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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출신의 황선태 변호사가 시인으로 등단한 후 시집을 출간했다. ‘꽃길의 목소리(시학사)’가 바로 그것. 황선태 변호사는 법조인으로서 다소 엄격한 틀속의 생활이지만 틈을 내어 아름다운 자연과 소중한 생명을 사랑하고 고마워하고 노래하고 싶어 시를 써 왔다.《창가에 달빛처럼 흐르는 애잔한 향내/무엇이 마음 아파 진종일 뿜나/범접할 수 없는 똘망한 눈/푸르고 정갈한 날개/단아한 청자집 두고//…난향백리 덕향만리/일리라도 갈 덕이 있어야지//수줍은 듯 꽃피운 철골소심》(‘몸을 사르다’ 중)이 시집은 제1부 몸을 사르다, 제2부 이슬이 되고 싶다, 제3부 영산홍, 새로 핀, 제4부 아침에 오는 새, 제5부 꽃길의 목소리로 구성돼 있으며, 따뜻하고 정과 사랑이 묻어나는 74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Culture&Life
대한변협신문
2016.09.1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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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만화
이영욱 변호사
2016.09.12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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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평
이우정 만평가
2016.09.0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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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공무원이었습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한 뒤 나름 포부를 가지고 지원을 했습니다. 월급이 많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가고자 한 것은 기왕이면 힘들게 공부해서 얻은 자격증으로, 개인보다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보람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지금과는 달리 그 때는 변호사를 5급 행정사무관으로, 그것도 임기제가 아닌 일반직공무원으로 선발했습니다. 단 한명을 뽑던 부처에 운이 좋게 합격을 하여 공무원이 되었습니다.그리고 그로부터 4년을 조금 넘게 근무하고 의원면직 신청을 하였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나오기 위해 법무법인에 취직이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왔습니다. 그 안정적인 곳을 왜 나왔냐는 질문은 정말 셀 수
연재 끝난 칼럼
백현석 변호사
2016.09.0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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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의 변기가 미술전시장에 들어온 뒤부터 예술작품은 일상적 사물과 구별되지 않았다. 예술이 특별한 환상을 만드는 대신 의도적으로 평범한 자리에 스며들자, 전통적 아름다움의 가치는 곤경에 빠졌다. 바야흐로 복사물이 원본을 압도하고 현실이 미디어를 따라가는 시대였다. 보드리야르는 조금 어려운 말로 “이 세계는 시뮬라크르가 지배하는 곳”이라고 했다.사람들에게 조금 쉽게 일러주기 위해 그는 “영토가 지도에 선행하지 않고, 지도가 영토에 선행한다”는 비유를 썼다. 지금까지 자연이 기호를 낳았다면, 이제는 기호가 실재보다 우월하게 자연을 표상한다는 것이었다. 영상, 사진, 미디어… 사람들은 실상 이미지를 볼 뿐이면서 실재를 접한다고 생각했다. “한 폭의 그림 같은데!” 트인 절경을 본 사람들이 자연과 예술의
기자의 시선
이경원 국민일보 기자
2016.09.0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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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작은 마을 시그나기(Sighnaghi)에서게스트하우스를 하는 마리아 할머니에게는여섯살 쌍둥이 소녀 타코와 마리가 있어요.똑같이 생겨 누가 타코인지 마리인지2박3일 동안 구분하지 못한 나에게 쌍둥이들은“마마 이즈 대다, 파파 이즈 마마, 타코 앤 마리”를노래처럼 가르쳐주었죠.조지아에선 엄마를 대다, 아빠를 마마라고부른다는 것이 신기했으나,내가 떠날 때 두 소녀가 실로 한참동안이나‘바이바이’를 목청껏 외쳐 준 것이더 신기한 일이었죠. 이 여름 낯선 땅에서.
Culture&Life
최현주 카피라이터, 사진가
2016.09.0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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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1일자로 대법원과 대검찰청을 제외한 서소문의 법조타운이 모두 서초동으로 옮겨졌다. 대법원과 대검찰청도 1995년 옮겼다. 1989년 현재, 변호사 사무실도 서초구가 중구(서소문)보다 많아졌다. 강남 이전이 대세였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도 1989년 회관문제특별위원회를 만들고 이전을 검토하였다.다행히 마땅한 건물이 나왔다. 지금 서초동 변호사회관의 맞은편 나주정씨월헌종회회관(현재 서초종로학원)이 신축을 하고 있어서 다섯개 층을 빌리기로 하고 건물이름도 ‘변호사회관 서초별관’으로 명명하였다. 협회와 서울회는 1991년 5월 17일부터 이전을 시작해 1991년 5월 20일부터 업무를 시작하였다. 광화문 변호사회관이 있지만 강남 이전으로 다시 남의 건물 신세가 된 것이다.1992년 1월 25
자유기고
정리 박형연 변호사
2016.09.05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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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유학 가서 저작권법을 공부할 때다. 사전 지식이 부족한데다가 영문으로 된 교재와 판례를 공부하자니 처음에는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우연히 미국저작권법 교재를 번역한 책을 보고 큰 도움을 받았다. 대구지방법원 판사들이 비교법연구를 하면서 미국저작권법 교재를 번역한 책이었다. 먼저 번역된 내용을 읽고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이니까 영문 교재나 미국 판례를 이해하기가 쉬웠다.그 덕을 톡톡히 보아서인지 유학 기간 중에 공부한 미국 판례를 번역해서 자료로 남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에는 저작권에 관련된 판례가 많지 않았고 미국 판례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이라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짧은 지식과 우리말 실력 부족으로 꽤 고생했지만 번역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받은 도움을 갚았다는 느낌도
연재 끝난 칼럼
장주영 변호사
2016.09.0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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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로 일하게 되면서 사건 수임의뢰가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수임제한사항이 아닌지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흔히 이해충돌확인(conflict check)이라고 부르는 이 부분이 선행되어야 나머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2000년대 초에 미국에서 특허소송을 하기 위해 로펌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인 일본기업이 주요 특허에 강점이 있는 페이턴트 파워하우스(patent powerhouse)라고 불리는 로펌들을 이미 선점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형로펌들은 수임에 가장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 수임제한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의뢰인을 위해서 자신의 의뢰인을 포기하여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는데 이 경우 내부 구성원 변호사(소위 파트너 변호사)들 간의 이해조정 과정
연재 끝난 칼럼
최승재 변호사·변협 법제연구원장
2016.09.05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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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하긴 싫지만, 사건을 진행하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을 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뭘 잘못했나’와 ‘어떻게 하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의뢰인께 잘 설명할 수 있을까’이다. 내 잘못일 수도 있고,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설프게 변명을 하다가는 그나마 있던 신뢰마저 남아나지 않을 수 있기에 비난의 화살을 피하면서도 상황을 잘 풀어가야 한다.그렇게 묘수를 생각해보는데, 사실 시시비비와 무관하게 언제나 시작은 정해져 있다. 죄송하다고 하는 것이다. 간혹 그걸 대체 어떻게 알고 대비하나 하는 억울함이 들 때도 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을 대리인의 불찰로 인정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운을 떼면, 감정이 쉬이 가라앉지는 않더라도 신뢰는 남고, 잘잘못에 대한 비난은 수그러든다. 그리고 다시 같은
청변카페
강은혜 변호사·사시 51회
2016.09.0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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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감정회신문을 보면 “적절한 진료이다. 최선의 조치였다. 과실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잘라서 감정하는 경우가 있다. 소송대리인이 “적절하였는지요, 최선의 조치인지요, 과실이 있는지요?”라며 유도신문을 한 데에 대한 답신이 대부분이지만, 사실관계만을 물었음에도 의료감정인이 “과실이 아니다”라며 부언하여 회신하기도 한다.헌법상 재판권은 법관에게 있고, 모든 국민은 법관으로부터 재판받을 권리가 있다. 그럼에도 감정인이 마치 법관처럼 재판까지 하여 회신하는 적극성을 보이곤 한다. 이 때문에 어느 법관은 “감정인이 법원의 보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법원이 감정인의 보조자가 되었다는 두려움마저 든다고 실토할 정도이다. 감정인은 법관의 보조자에 불과하므로 감정인이 사실인정에 개입하는 것을 최소한으로 막아야 한다.
전문분야 이야기
신현호 변호사
2016.09.05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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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영국 로스쿨 졸업생들이 변호사 임명을 전담하는 런던의 4개 법학원(the inns of court)을 점거했다. 전문직 역사상 보기 힘든 정치행동이었다. 신참 변호사들의 일자리 부족에 대한 항의시위였다. 당시 한 졸업생이 일간 ‘가디언’기자의 블로그에 ‘OccupyTheInns’라는 필명으로 남긴 글.“누구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BPTC [영국법정변호사(barrister)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하는 전문 과정] 와 LPC [영국사무변호사(solicitor)가 되는 법률실무코스] 졸업자들은 직장을 구할 수가 없거나, 적어도 변호사다운 일자리를 찾을 수 없다. …운이 좋은 졸업생들은 법률보조인이라도 되지만, 운이 나쁜 졸업생들은 바(bars)에서 일한다(the bar말고).”미
자유기고
최재천 변호사(사시 29회)
2016.09.05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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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만화
이영욱 변호사
2016.09.0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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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만화
이영욱 변호사
2016.08.29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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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평
이우정 만평가
2016.08.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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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 하나인사과에 가서 담당 중사에게 물었다. “왜, 우리 중대 민호가 뽑히지 않았습니까?” 군 생활 당시 우리 부대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병사 한명을 선정하여, 재정적 후원을 해주기로 했다. 어느 독지가가 연대장님에게 이런 취지로 성금을 기탁했고, 병사들은 모르게 절차가 진행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추천한 중대원 민호(가명)의 부모님은 보행에 장애가 있으신 분들로, 변변한 상점도 없이 시장에서 노점을 하고 계셨다. 지독한 가난 탓에 민호는 병사들에게는 금싸라기 같은 휴가 기간에도, 작업을 열외 받은 채 부대에 머물곤 했다. 당시 중대원들 중 고참이었던 민호가 중대장인 나에게 가정 사정을 일일이 말하진 않았지만, 신병 훈련소에서 군기가 바짝 들어 빼곡히 적은 생활기록부를 통해 힘겨운 형편을 소
연재 끝난 칼럼
이상현 변호사
2016.08.2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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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2일 넥슨의 김정주 대표가 다시 검찰에 소환됐다.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진경준 검사장과 수차례 가족을 동반한 해외여행을 다닌 정황이 포착돼 검찰이 추가적인 뇌물공여 혐의에 대한 조사에 나선 것이다. 사실 그는 이미 2005년 비상장주 1만주 제공 부분과 2008년 3000만원 상당의 제네시스 제공 부분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받은 상태다. 공소시효가 10년인 뇌물수수와는 달리 뇌물공여죄는 7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에 새로 조사대상이 된 해외여행도 2008년 이전의 일이라면 처벌이 곤란해진다. 뇌물공여자인 김 회장이 좀 더 폭넓게 공소시효의 혜택을 누리고는 있지만 뇌물을 받은 진 검사장 또한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이미 진 검사장에 대한 수사 시작 전부터
기자의 시선
양은경 조선일보 기자·변호사
2016.08.29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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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국제분쟁 분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약 16년 전의 일이다. 1996년 뉴저지주 연방법원에서 재판연구원(federal law clerk)으로 근무한 후, 1997년 법무법인 태평양에 합류하였다. 그해 겨울 IMF 구제금융사태가 발생하였고, 2000대 초반 IMF를 졸업하면서 분쟁 사건들이 밀려들어 왔다. 이에 김갑유 변호사와 함께 2002년 한국 로펌으로서는 최초로 국제중재 및 국제소송 전문팀을 만들어 이들 분쟁에 대응하였다. 그렇게 축적한 역량을 바탕으로, 7000억원이 넘는 소가의 주식 관련 소송(미국 뉴욕주 연방법원)에서 국내 금융기관을 대리하여 성공적으로 방어하였고, 최근에는 ‘대한민국 대 론스타 투자 분쟁 사건’ 에서 한국 정부를 대리하였다. 현재 국제중재 및 국제소송팀의 팀장인 필자는 지
자유기고
방준필 미국 뉴욕·뉴저지주 변호사, IBA 소송위원회
2016.08.2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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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9월이 성큼 다가왔다. 지난 여름은 그 어느때보다 무더웠지만,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가을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오고 있다. 9월은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학기의 시작이며, 직장인들에게는 하반기 업무가 시작하는 시점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취준생)들에게는 하반기 공채가 시작되는 계절이며, 올 가을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들에게는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가을이 될 것이다.‘외모도 경쟁력’이라고 부르는 시대이니만큼, 취업·결혼 등을 앞둔 이들에게 미용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런 트렌드를 반영하듯 치과 분야에서는 치아를 하얗게 만드는 ‘미백’치료에 대한 환자들의 관심과 문의전화가 늘어난다. 미백치료는 일종의 탈색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치과에서 직접 시술받는 미백치료(office
Culture&Life
손정구 연세좋은손치과 원장
2016.08.2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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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후반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의 국내 이주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국내 거주 탈북민은 약 3만명에 달하고 있다. 20년간 매년 약 1500명의 탈북민이 이주해온 것이다. 최근 언론에 보도된 주영 공사를 비롯하여 북한 엘리트층의 이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 지난주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의사 출신 탈북민의 사고 사망 기사가 있었다.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가 탈북하여 병든 아내를 위하여 공사장에서 막노동했고 6년전부터 인천의 건물관리 용역업체에 취직하여 주차관리와 청소 등 의 일을 해 왔는데, 빌딩 2층에서 실내 유리창을 닦다가 추락해 숨진 것이다. 북한의 의사가 국내에서 막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은 전혀 다른 체제에서 평생 살아온 탈북민들에게 우리 사
연재 끝난 칼럼
유욱 변호사
2016.08.29 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