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유중원 대표 중편선> 삼각관계 (下)
 닉네임 : 유중원 변호사  2017-09-01 11:02:16   조회: 341   
* * *

지금 재판이 끝난다고 하니까 돌이켜보자고. 우선 나 자신에게 결론을 내려야할 것이 아닌가. 내가 무죄라고 할 수는 없지. 죄가 있다고 분명히 인정할 수밖에…… 그러므로 내가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 나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재판이 끝나가면서 며칠 동안 밤이면 좀처럼 잠이 오지 않고 뒤숭숭하였다. 잠이 쉽게 들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바로 잠이 깨어버린다. 잠이 깊이 들지 않으면 그 몹쓸 꿈을, 악몽을 꿀 수 없으니까 그건 좋은 일이다. 어둠 속에서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면 문득문득 무수히 떠오른 생각들이 뒤엉켜서 떠올랐다.
내 지나간 인생이 마치 드라마의 장면처럼 빠르게 또는 느릿느릿 스쳐지나갔다. 순서도 없이 제멋대로. 그리고 명징한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자초지종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일련의 사건을 복기했다. 어찌해서 기억이 생생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런 대로 중소 도시의 좋은 가정에서 자랐지 않은가. 공부를 잘했기 때문에 재수를 했지만 소위 사립 명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는 몇 그루의 오래된 사과나무가 서 있었고 가을이면 빨간 사과들이 담장 밖까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 달콤한 향기란…….
남한강과 그 지류인 달천 강. 새벽이면 밤새 강에서 피어올라온 짙은 안개가 자욱하다가 아침 햇빛에 쫓겨 흩어진다. 여름이면 그 강가에서 남동생과 함께 멱을 감고 물놀이하던 기억도…… 초등학교 시절 맨날 소풍을 갔던 탄금대…… 생생하다.
나는 증권 회사를 다닐 때 압구정동 지점과 서초동 지점에서만 순환 근무를 했다. 그 시절은 좋은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기분 나쁜 기억도 없다.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신앙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지만 ― 내가 성모송과 주기도문을 외우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 신부님을 만나 보기로 했다. 고백성사를 할 예정이었다. 그 어둡고 좁은 사각형 고해소에 앉아있으면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숨기고 앉아있는 늙은 신부님이 목이 약간 쉰 듯한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어쨌다고? 하느님 앞에 고백을 해 보라고. 고백을 하고 참회를 해야겠지. 하느님 앞에서 뭘 망설이는 거야.
내가 말했다.
굵은 밧줄이 목에 감기게 될 것입니다. 중형을 선고 받고 감옥으로…… 거기서 평생 나오지 못하고 골골하다 죽을 지도 모르지요.
신부님이 말했다.
그렇게도 무서운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건 살인죄가 틀림없겠지? 도끼로 내려친 거냐? 그렇지 않느냐?
내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적 살인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트림을 하자 역한 마늘 냄새와 도수 높은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느냐…… 어서 말해보라니까. 궁금하구나. 내가 꼭 알아야 할 것 아니냐. 그래야만 용서를 해줄 수도 있고. 내가 하느님이라니까.
……그렇지만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들리고 있느니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네가 지금 억울하다고…… 결백을 믿어달라고 여길 온 것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요. 아니란 말씀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느냐!
…… 죄송합니다. 죄송.
나는 속이 메스꺼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목구멍이 바싹 말라 버린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도저히 내 죄를 자세히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오긴 했지만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이제 와서 참회라니.
그때는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어떤 종류의 질문에는 결코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부님이 말했다.
…… 우리가 겪은 모든 시련은 하찮은 인간이 능히 감당해낼 수 있는 것들이라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시거든. 어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반드시 마련해주실 거야. 그러니 열심히 기도하라고…… 신께서 형제의 영혼에 자비를 베푸시기를……
나는 내 사건의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 소위 잘 나가는 법조인들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어쩐 일인지 아주 희미한 윤곽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평생을 과거급제 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 어려운 법률용어를 쓰면서 법률 전문가인 척 으스대는 인간들. 그들의 뻔뻔한 얼굴들이…… 그들의 오만한 몸짓과 행위와 무수하게 지껄인 말들이……

* * *

그때는 성공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 때문에 마지막 순간 그 계획을 포기하고 싶었다.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어딘가로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무섭고 두려웠다. 그러나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일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면 말할 수 없이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고 그러고 난 후 에너지가 모두 소진되면 착잡한 심정에서 절망감이 찾아왔다.
그 무렵 나는 매일 밤 여의도에 있는 단골 술집에서 혼자 독한 술을 많이 마셨고 끝내 엉망으로 취해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여전히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오랫동안 말을 섞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그때 우리는 각방을 쓰면서 별거하는 부부처럼 살았으니까.
그때는 심한 불면증 때문에 만취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침내 성공이 확실해지자 통쾌하게 복수하였다는 짜릿한 흥분 때문에 실컷 웃다가 그만 오줌을 지렸다.
지금은 구치소에 몇 달째 갇혀있으면서 수사 과정에서 끝내 대질신문을 거부했던 그녀의 인간적 자존심과 엄숙함을 떠올렸다. 그때 그녀를 쳐다볼 수조차 없었으니 그녀와의 만남을 꺼려했고 두려워했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동했다.
그 여자는 육체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인 영혼까지 나를 사랑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처음 만나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힐 만큼 놀랐고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았던가. 그녀의 몸에서는 언제나 재즈의 즉흥 연주처럼 비틀고 과장된 야생적인 리듬이 넘쳐나지 않았던가.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녀가 말했다.
육체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거야. 육체는 지고지순한 사랑의 징표인 거지. 사랑은 아름다워. 나는 그 육체를 사랑하고 숭상했던 거야.
그러니까 단순한 향락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섹스를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절대적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진정제로 사용한 게 아니란 말이지. 내 순수성을 확인하는 거룩한 행위라고 할 수 있겠지. 나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목말라 했고 그걸 찾아 나섰던 거야.
그러나 나의 경우 육체적 향락이라는 베일이 걷히는 순간 벗겨진 베일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사랑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비열한 인간은 표면적인 것과 숨겨진 의미를 구별할 줄 모를 만큼 단순했으니 밀교적 사랑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 여자의 사랑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나와 동갑이지만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이는 그 여자를 속속들이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솔직했고 곧이곧대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정확하게 말했다. 그녀에게는 숨길만한 비밀이 없었다. 그러나 결별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계속 전화를 했고 그녀는 계속 받지 않았다. 반대로 그녀가 계속 전화를 했을 때는 내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성미가 급하거나 당돌한 여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성적 쾌감을 한껏 고조시키기 위해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려고 설득했을 때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녀와 나누었던 마지막 밤이 언제였든가? 그날 밤 넓은 창문을 통해 은은한 달빛이 침입했었다. 그때는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 그런 인간에 불과하다. 아이라이너를 연하게 그리고 립스틱을 아주 연하게 칠하는 여자. 그녀의 젖은 입술이 내 가슴을 핥고 나서 그녀의 혀가 깊숙이 들어와 축축한 키스를 한다. 입 안에 과일 향과 함께 독한 포도주의 술맛이 퍼진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을 활짝 열어준다. 나의 몸 여기저기에 손톱자국을 냈다. 그녀는 매번 다른 향수를 썼고 끝나고 나서는 울었다.
주책없이 그 격렬한 밤들을 계속 떠올리자 사타구니가 끈적끈적해지면서 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죽박죽이었으니……
이경순은 돈을 주체하지 못하는 돈 많은 이혼녀이고 동시에 육체적 욕망 때문에 몸부림치는 섹스의 화신이었다. 그때는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여의도 일식집 방에서 일어난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그 여자는 얼큰히 취하자 본색을 드러내고 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밀착시켰다. 몸을 격렬하게 비틀고 덤비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자리에서 단번에 삽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다급했으니까. 그녀는 쉰 목소리로 계속적으로 즐거운 비명인지 신음소리를 내뱉는다. 그리고 또다시 요구를 하고 또 요구하였다.
그녀는 너무 감동해서 내 가슴에 안겨 한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녀가 말했다.
내 살갗에는 어느새 당신의 체취가 깊숙이 배어있지. 당신과 나는 하나가 된 거라고. 당신은 내 마음속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고.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사건이 시작되었다. 사무실에서 주식 투자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간 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서 근처 단골 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긴지 불과 몇 시간쯤 지나서였다.
그 이후 우리는 매일처럼 만나 먼저 이태리 식당에서 부드럽고 육즙이 많은 로스트비프로 가볍게 식사를 하며 치즈를 안주로 알코올 함량이 20퍼센트에 달하는 붉고 진하고 독한 와인을 마시고 약간 얼큰히 취했었다.
그리고 밤의 열기 속에서 굶주린 동물처럼 몇 번씩이나 격렬하게 서로를 탐하였다. 마치 서로를 물어뜯어 삼켜버리는 성난 맹수처럼 말이다. 내가 굴곡진 육체의 곡선을 쓰다듬을 때마다 엄청난 욕망이 분출하였다. 나는 노련하게 여자의 리듬과 템포에 맞춰서 강하게 또는 부드럽게 번갈아가며 압박을 가하였다.
내 얼굴이 흥분 때문에 시뻘겋게 물들어서 변하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지는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육체가 요동치며 꿈틀거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펄떡이고 척추 뼈는 뿌드득 소리를 냈다. 그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아우성을 쳤다. 너무나도 완벽한 순간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당신은 정말 특별한 여자야.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그러나 그 순간 회색 머리카락들이 힘없이 이마로 흩어져 내렸다. 아내의 초췌한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는 눈길을 돌렸고 몸이 오그라들었다. 온몸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기운까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피곤한 듯 하품을 하고 눈을 껌벅거리다 돌아누웠다.
우리의 경제적 형편은 눈에 띌 만큼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우리 사무실은 한결 여유가 생겼다. 그 동안 계속 사무실 운영비도 빠듯해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근 일 년여 동안 만나면서 서로의 육체에 익숙해지고 무한정 섹스에 탐닉하였다. 언제부터인가 익숙해진 심미주의자가 나를 이끌고 리드했다. 그 대담한 행위와 체위를 수시로 바꿔가며 즐기고 즐겼다. 그래도 우리는 항상 성적 쾌감에 목말라 했다. 나는 그녀에게 배꼽 부분과 등짝, 엉덩이, 사타구니 사이에 피멍이 들 만큼 그 이상으로 심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무렵부터 그녀는 자신의 재력을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과시해가며 처음에는 은근슬쩍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그녀를 놓치기 싫었으므로 그렇다고 내 가정을 송두리째 버릴 생각도 없었으므로 갈팡질팡했고 대충 어물쩍 넘기곤 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나 몰래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또다시 아내를 만나서 냉정한 얼굴로 수표가 든 봉투를 내밀며 이혼 얘기를 꺼내고. 다시 음험하게 웃으며 당신이 원한다면 돈은 얼마든지 내 놓겠다고, 나는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하고. 애들은 당신이 원할 테니까 당신이 키우라고, 나는 애들은 질색이라고 하면서 나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이 필요하니까 둘 만의 생활에 틀림없이 방해만 될 거라고 말하고.
그녀는 돈의 화신이고 황금만능주의자이니까 백 번, 천 번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항상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거야. 자금도 동원하고 사람도 동원할 수 있지.’라고 말했으니까.
착한 아내는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떨구었을 것이다. 그건 적반하장이었고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이었다. 아내는 희생자이면서도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는 그 돈 많은 여자에게로 가라고, 더러운 돈은 필요 없고 애들은 내가 잘 키우겠다고 말했다.
나의 첫사랑이었던 아내는 나에게 절대로 화를 내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치미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왜 진즉에 터뜨리지 않는가. 나는 아내가 나에게 화를 내지 않은 것에 더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그때 칼날 위에 선 것처럼 위태위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녀를 떠날 수도 없었고 아내와 헤어질 수도 없었다.

* * *

그런데 극단적인 질투심이 지배하는 비이성적인 남녀관계에서 삼각관계는 둘은 웃고 하나는 울어야 하는, 또는 하나는 웃고 둘은 울어야 하는, 아니면 셋 모두 울어야 하는 자기 파괴적이고 위험한 관계일 뿐이다. 이건 역사적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례가 있다. 그러므로 명확히 증명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셋 모두가 정상적으로 인간다운 남자이고 여자이어서 진짜 미치지 않았다면 그들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비이성적인 인간사회의 현실에서 결코 동등한 삼각관계, 즉 정삼각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들의 세계라면 모를까.

* * *

이제부터 그녀가 점점 짜증을 내더니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사랑은 악마이고 불이고 천국이고 지옥인 거야. 너네 가정은 돈도 없는 허수아비들의 아지트에 불과한 거지. 내가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돈을 빼내면 너의 투자 자문사는 당장 문을 닫게 될 테지. 그러면 너는 알거지가 되는 거야. 지금 당장 이혼하고 내게로 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가정이건 회사이건 풍비박산이 될 거니까. 선택을 하라고, 선택을.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라고. 네가 이혼한다고 해서 결혼할 거는 아니니까. 남녀가 사랑을 할 때는 두 사람은 동등한 거야. 그래서 상호 관계가 형성되거든.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 아냐. 오직 당신만 있으면 된다고. 당신과 섹스를 하고 나서 드디어 당신 속에서 내가 찾고 있던 남자를 찾았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당신이 꼭 필요한 거야.
나는 머리를 숙이고 항복한 것처럼 했던 거지. 그럴 수밖에.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그녀를 몸으로 달래면서 차일피일 시간을 벌었다.
내가 그녀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구.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아주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현대의 연금술사들이 현자의 돌을 발견한 거야. 그 중에서도 연구소장은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이 극비리에 연구소를 차려서 몇 년 동안 머리를 싸매더니 바로 얼마 전에 획기적인 매연저감 화학물질인 촉매제를 발명한 거였어.
그것만 있으면 자동차와 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해물질을 90프로 이상 없앨 수 있으니까 얼마나 대단한 발명인 거야. 지금 중국을 보라고.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매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시진핑 정권의 명운이 걸린 문제인 거지.
그게 해결된다면 어떻게 될 거 같아? 대박 중에 대박, 아니지 대박 같은 거로는 설명이 부족하지. 그 촉매제를 특허 등록하면서 바로 세상에 공개할 거거든.
그 신기술을 발표하는 발표회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국내외 수백 명의 기자들이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며 사진을 찍어대고…… 미래창조과학부 장관과 국회 상임위원장이 연이어 축사를 낭독하고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지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란 말이야. 어때…… 짜릿하지.
그들이 세운 벤처기업의 비상장 주식은 바로 그 순간 암암리에 10배, 20배 폭등하고 일 년 후쯤 상장 되면 다시 수십 배 폭등할 것이거든. 그런데 그 벤처는 초기여서 자금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 연구와 개발에 너무 많은 자금이 필요한 거지. 내가 자금조달을 책임지기로 했지. 액면가 5,000원의 주식을 20프로 할인한 가격으로 500만 주만 취득하라고…….
이경순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상무와 함께 그 회사의 조직도와 현황, 재무제표, 연구소와 실험 장면을 찍은 동영상과 연금술사들의 화려한 프로필과 사진을, 촉매제의 화학적 원리와 시제품을 회의실에서 프리젠테이션하였다.
그녀는 의심이 약간 풀렸으나 그래도 여전히 반신반의하면서 그 천재를 만나기를 원했다. 최종적으로 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그녀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안 그래? 당신은 전문가이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어. 그러니까 빨리 날짜를 잡으라고…….
우리는 판교 신도시 벤처기업들이 밀집해있는 거리에 있는 15층 건물의 전망 좋은 사무실을 1년 단기로 얻었다. 작업 기간은 1년이면 충분하다고 계산했던 것이다.
늦은 가을 스산한 날씨였다. 금요일 오후 거리는 혼잡했다. 바람이 가볍게 일었고 하늘엔 먹구름이 낮게 드리워있다.
벤처기업의 사무실답게 꾸민 그 사무실에서 MIT 공학박사로 NASA의 우주특수물질 탐색반의 팀장 출신인 연구소장과의 면담이 이루어졌다. 그때 사무실에는 요란하지도 착 가라앉지도 않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 들릴 듯 말 듯 흐르고 있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벤처기업의 대표이사 겸 연구소장은 창백한 낯빛에 냉담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짙었다. 영락없이 사색형의 지식인 타입이다. 그는 실리콘벨리의 창업자처럼 몸에 꽉 끼는 청바지와 티셔츠에 운동화를 신고 있다.
그가 켜 놓은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에 실험실 건물과 실험실의 복잡다단한 기구와 설비, 정교한 실험 장면 등이 연속해서 나왔다.
그는 열정적으로 촉매제의 원리와 액체나 분말가루처럼 만들 수 있는 제조공정에 관한 복잡한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매연의 원인 물질에 이 촉매제를 혼합시키면 유해성분 자체를 근원적으로 분해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련의 기호와 라틴어 단어, 숫자, 무슨 화학 방정식을 낙서하듯이 종이에 끄적거렸다.
그가 말했다.
한국에는 실험시설이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서 저희와 조인트한 미국 연구소에 의뢰하였지요. 그게 완성 단계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특허출원은 준비 중에 있습니다. 다만…… 그렇지요. 너무 빨리 세상에 이 기술이 공개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그 시기를 신중하게 저울질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코스닥에 먼저 상장할 예정이지요. 주가가 폭등할 것입니다. 대박 중의 대박이란 말입니다.
그가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담배의 유해물질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연구소장이 대답했다. 그건 식은 죽 먹기지만 유해물질을 없애버리면 누가 맛없는 담배를 피우겠어요. 그러면 담배회사가 망하겠지요.
뮌히하우젠 증후군 증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소장은 진지하였고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능수능란했다. 기대 이상으로 완벽한 연기를 해낸 것이다. 그녀는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그가 컴퓨터를 끄고 나서 말했다.
사모님! 아니 지금부터 회장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회장님! 우리 회장님!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니까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상당히 어려운 물리학 이론이 나오지만 별 거 아니에요. 회장님은 명민하시니까 얼마든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슈만은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손가락 부상 때문에 그게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슈만의 환상곡 악보 맨 앞에는 ‘은밀하게 엿듣는 사람’이라는 문장이 나오지요. 메시지를 알아듣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우리 제품이 계속 개량되어 나오게 되면 이 지구상의 모든 유해물질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MIT 예비 창업자들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마틴 트러스트 창업가 정신 센터’에서 확실하게 배웠지요.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우선 집중 공략할 거점시장이 중요한데 그건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 곁에 거대한 중국시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계속 생산량을 늘려서 중국 다음으로 인도, 러시아, 유럽, 미국 등으로 해서 전 세계를 장악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10년 전에 나사에서 쏘아올린 우주탐사선이 우주에 퍼져있는 암흑물질 중에서 어떤 신비한 물질의 단서를 전송해온 일이 있습니다. 그게 실체를 도저히 규명할 수 없으니까 그냥 암흑물질이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나사 당국은 이것에 주목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생명체 형성에 필수적인 탄소가 함유된 유기분자 발견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거든요. 오직 저만이 그걸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후 캘리포니아 공대 케크우주과학연구소로 옮겨서 연구를 계속하였지요. 그리고 이 암흑물질을 분석하고 촉매제를 개발하기 위해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의 원장직도 사양하였습니다.
이 우주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요. 다중우주의 법칙이 적용된다는 말이지요. 이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는 46억 년 전에 생성되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우주에만 1,000억 개가 넘는 행성이 있는데 이 우주에는 소위 말하는 암흑물질이 꽉 들어차 있지요. 우리 인간은 그 중에서 단지 4퍼센트만 그 성질을 규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한 물질은 아인슈타인이 인생 말년에 찾고 있던 궁극의 이론을 풀 수 있는 해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인데 그건 원자물리학자들의 꿈이었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연금술에서 찾고 있던 ‘현자의 돌’을 제가 찾아냈다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이제부터 인류의 진정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믿습니다. 노벨 화학상과 노벨 물리학상은 당연한 것이고 동시에 노벨 평화상도 받게 될 것이지요…….
저는 모든 인류의 진정한 구원자, 21세기에 와서야, 이제서야 예수님이 재림한 것이지요. 완고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지요. 그들도 이제는 진정한 메시아가 왔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회장님이 알아둘 게 있지요. 이 아이템에 대해서는 재벌기업들이 수천억 씩 투자하려고 줄을 설 것이고 벤처캐피탈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그들이 회사를 집어삼키게 될 것이지요. 그러면 저는 닭 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겠지요. 저는 새가슴이지요. 그것도 참새가슴…… 그걸 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리고 오싹해지지요.
그래서 말입니다. 공존공영할 정직한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지요. 너무 아름다우신 회장님께서 투자하신다면 대주주로서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될 이사회 의장쯤은 양보해야겠지요.
지금까지 대충 말씀드렸습니다만 회장님께서 만족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추가적으로 질문이 계신다면 얼마든지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강동욱은 암흑물질이라는 용어를 거듭 강조했다. 그는 정해진 각본과 미리 몇 번 연습한 리허설에 따라 훌륭한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마구 터져 나오려는 것을 겨우 겨우 참았다.
어느덧 가늘고 차가운 빗줄기가 창문을 때린다.
그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무엇에 쫓기듯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부드럽게 물결처럼 흐르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그녀가 말했다.
내가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마술을 부린다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그런데 너무 낙관적인 것이 아닌가요? 장밋빛 환상……
그녀는 그 순간 넓은 사무실 안을 꽉 채우는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자아도취가 심했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속이 뒤집히고 메슥거렸겠지요. 그걸 아셔야 합니다. 강한 사람이 되어 성공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대개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는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자신을 비판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래서는 성공할 수 없지요.
저는 목숨을 걸고 저만의 해석과 관점에 따라 실험에 몰두했어요. 그러면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요. 살아남으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합니다.
그는 목이 메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때 정의경의 표정은 신중했다. 전혀 입을 열지 않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가 말했다.
성공이 눈앞에 와 있지요.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샤포가 이런 시를 썼지요.

나의 두 손으로
하늘을 만질 수 있다니
미처 생각지도 못했네.

그러면 기대 이상으로 훨씬 과장된 찬사가 쏟아질 겁니다. 그게 매스컴의 속성이지요. 제가 감당하기 벅찰 것입니다. 저는 성공이 한 없이 두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슬픈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성공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거액의 복권에 당첨된 자가 마누라와 이혼하고 돈을 도박을 하면서 탕진하고 다시 가난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가끔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파국이 오는 거지요.
저는 이번 사업을 진행하면서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우리는 허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서 교회에 다니긴 했지만 그 후로는 안 나갔거든요.
지금 돌이켜보니 인간의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는 성취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니 하느님께서 도와주셔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상기된 표정으로 대표이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짧은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연민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인 채 가만히 그녀의 반응을 주시했다. 그 노련한 사기꾼은 안경 속에서 교활한 눈웃음을 치며 그녀의 표정 변화를 포착했다. 그녀는 황홀함에 들뜨기 시작했다. 그의 달콤한 유혹이 그녀의 욕망에 환한 불을 지핀 것이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장신구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값비싼 최고급 제품들이었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다이아몬드는 더욱 광채를 발했다.
그녀가 말했다.
옛날 재즈가 흐르고 있었군요. 이야기에 열중하다보니까 그걸 미처 깨닫지 못 했네요. 비밥 모던 재즈가 아니라 1920년대 재즈 시대의 재즈가……
대표이사가 말했다.
시카고 재즈의 대부인 빅스 바이더백의 곡이지요. 그는 재즈도 낭만적이고 나른한 음악임을 보여줬지요. 그래서인지 루이 암스트롱이 빅스의 연주를 회상하면서 ‘정말이지, 그 아름다운 음들이 내 마음을 관통했다.’고 말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녀가 말했다.
우린 옛날 재즈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갑작스런 하느님 이야기는…… 전 믿지 않으니까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죠. 그 암흑물질을 규명해서 촉매제를 만들었고…… 곧 특허출원까지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가 상대에게 틈을 허용하고 싶지 않은 듯 즉각 말했다.
그렇습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서둘러야 하지요. 세계적인 IT기업 쪽에서 냄새를 맡고 달려들지 모르거든요.
그녀가 정의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이 상기되고 마침내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요란하게 몸짓을 하며 박수를 쳤다.
그녀가 말했다.
됐어요, 됐어. 위대한 과학자께서 오죽했으면 눈물까지 흘리고…… 눈물은 정직한 거예요. 저도 그런 순간에는 자주 눈물을 흘리거든요. 그 진심에 감동 먹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성장하게 될 환경기업의 대주주 겸 이사회 의장이 된다면야. 필요한 자금은 전부 내가 조달하겠습니다. 자금 걱정 말고 신속하게 진행해주세요.
우리는 헤어지면서 문간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그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감사를 표했고 그녀는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이제 한 줄기 빛이 보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꼭 성공하겠습니다.
그녀는 전 재산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은행 예금을 찾고 상장 주식을 팔고 강남역 부근과 삼성동 건물을 매각했으며 심지어 자기가 살고 있는 100평의 고급 빌라를 저당 잡혀 은행 돈은 물론이고 사채까지 빌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차례차례 그 회사의 가상 계좌로 입금하였고 우리는 나중에 다시 대포통장으로 옮긴 다음 반반씩 분배하였고 일부는 해외계좌로 이체했다.
그녀가 투자금 명목으로 자금을 송금할 때마다 회사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주식을 발행해서 교부했고 동시에 그녀의 요구에 따라 회사 명의의 차입금 증서를 발급해주었다.
그녀는 일생일대의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대박 중의 대박을 위해 올인한 것이다.
나는 그 돈 대부분을 무모하리만치 대담하게 주식투자와 선물투자를 하면서 일 년여 만에 다 날려버렸다. 가끔 마카오로 날아가서 거액의 카지노 도박을 하며 물 쓰듯 돈을 썼다. 그 돈은 부정한 범죄수익이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몽땅 날려버려야 마땅했다. 그래야만 속죄를 하는 기분이 들면서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랬으니 내가 구속되었을 때는 변호사 비용 마련도 빠듯했다.

* * *

나는 오래 전에 읽었던 그리스 신화를 떠올렸다.
오디세우스는 이타케로 돌아오는 여정에서 천신만고 끝에 티탄 아틀라스의 딸인 님프 칼립소가 살고 있는 오기기아 섬에 표류하여 어쩔 수 없이 정착하였다. 그리고 7년 동안이나 요정 칼립소에게 사랑의 볼모로 잡혀 있게 된다.
그는 그 요정과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는 천국과 같은 그 섬에서 칼립소와 함께 쾌락에 빠져 너무나 행복한 삶, 기쁨과 보람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한동안 쾌락에 탐닉하여 고향 이타카도, 페넬로페도, 삶의 목적도, 자기 자신마저 잊어버렸다.
칼립소는 현명하고 지혜롭고 참을성 많고 임기응변과 언변에 능한 탁월한 인물인 오디세우스를 연인으로 삼으면서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겠다고 끊임없이 유혹하였다.
더욱이 키는 작으나 몸이 다부지고 정력까지 센 오디세우스에게 흠뻑 반한 칼립소는 그를 달래서 결혼까지 하고 그 섬에 주저앉히기 위해 한껏 애교와 위엄, 협박을 섞어서 말한다.
그대는 진심으로 지금 당장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나요? 진실로 나는 얼굴과 몸매, 신체적 아름다움에서 그녀 못지않다고 자부하지요. 그녀는 인간, 지금쯤 많이 늙어버렸지 않았겠어요. 필멸의 인간 여인들이 몸매와 생김새에서 불사의 여신들과 겨룬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지요.
오디세우스는 역시 정중한 어조로 칼립소에게 말한다.
존경스런 여신이여, 그 때문이라면 조금도 화내지 마시오. 페넬로페가 비록 정숙하기는 하지만 그대와 비교하면 위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소. 더욱이 그녀는 필멸하는데 그대는 늙지도 죽지도 않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매일 비는 유일한 소원은 집으로 되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맞이하는 것이요.
칼립소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보내줄 궁리를 하고 출발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를 목욕시키고 향기로운 옷을 입혀준 다음 섬에서 떠나게 해주었다.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 그의 연인 칼립소 간에는 삼각관계가 성립하였지만 어쨌거나 신들의 삼각관계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 칼립소가 대범하게 양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신이 아니었던가. 그들 셋은 모두 웃을 수 있었다.

* * *

그러나 나는 중과부적인 그녀를 뿌리쳐야 했다. 나는 그 신물나는 사랑 놀음에 진저리를 쳤다. 이제는 그녀의 체취가 낯설게 느껴지며 점점 역겨워졌다. 그녀의 얼굴에 보랏빛 피멍이 들게 한다면……
그래서 염치없는 일이지만 믿음에 대한 배신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아내와 애들 곁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런다고 아내와 애들이 날 쉽게 용서해줄 리는 없었지만…… 하지만 그 이전에 어쨌거나 그녀가 가진 권력의 원천인 돈을 모두 빼앗아야만 했다. 그건 필리스티아인들이 들릴리를 이용해서 삼손의 초인적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통쾌한 복수.
황금만능주의자에게 그 황금을 모조리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녀를 지탱했던 황금이 빠져나가버리면 말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들의 삼각관계, 나와 그 능수능란한 사기꾼 강동욱, 이경순의 관계는 지금 어떻게 결말이 지어졌는가. 나의 동업자는 나를 배반하고 안전하게 해외로 빠져나갔다. 그 여자는 재산을, 사랑을, 인생을 모두 잃고 완전히 파산하였다. 그리고 나는 구속 기소되었다. 한 사람은 통쾌하게 승리했고 둘은 완벽하게 패배했다. 이것이 결론 아닌 결론이다.
검은 법복을 걸친 저 판사의 뒤틀린 입을 보라고. 결국 저 입 속의 검은 입술이 나를 죽이려고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겠지. 저 판사는 구치소에 있는 모든 피고인들의 공공의 적인 거야. 지금 저 상기된 얼굴 좀 보라고. 내심 쾌감을 느끼고 있는 거야. 모든 게 개뿔이야…….
설마, 20년을…… 아니면 15년…… 10년……
사기 절도 9범이고 15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늙은 방장은 한 개비에 7만원이나 하는 비싼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말했다.
요즈음은 말이야, 전관예우가 옛날 같지 않다고. 괜히 비싼 돈만 쳐바르고…… 그거 믿을 거 아니야. 브로커들은 맨날 전관예우를 팔고 다니지만…… 그럴 바에 차라리 국선 변호사가…… 공짜 아니냔 말이야.
본론을 말하지. 내가 판사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 넌 그대로 놔두면 10년 이상이야. 그러니까 달아난 공범한테 떠넘기라고. 그러면 5년 아니면 6년쯤일 거야. 그리고 여자가 합의를 해주면 아주 좋아. 경제사범은 뭐니뭐니 해도 합의가 최고야.
그건 그렇고…… 5년 정도면 그게 금방 가버린다고. 범털이 가는 의정부 교도소에 가면 편하게 지낼 수 있어. 재벌 회장이나 유명한 정치인들은 다 거기에 있어. 내가 법무부에 손을 써서 그리로 보내줄 수 있다니까. 그러려면 돈이 좀 들어가야 하는데……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지금 사기를 치고 있는 거야.
저 판사에게 더 이상 뭘 기대한단 말인가. 내가 무슨 염치로 그 여자에게 합의를 요구할 수 있을 것인가. 항소할 필요가 있을까? 항소심 판사인들…… 항소 이유가 있기는 할 것인가? 누가 내 구구한 변명을 믿어줄 것인가? 그건 자신을 속이고 신까지도 속이는 거짓말일 텐데.
벌써 새벽이다. 오늘은 6개월의 구속만기 때문에 서둘러 재판을 끝내는 날이다. 나는 밤새 한 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사동 소지가 수용방 밖 복도를 청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잠이 없는 우리 방장은 똥통에 앉아 맛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다. 오! 향기로운 담배 냄새여! 똥 냄새여!

* * *

법정은 언제나 우중충하다. 터무니없고 기괴하고 역겹다. 사막처럼 황량하다. 그러므로 생명의 맥박은 멈춰있다.
정의경의 안색은 창백했다. 입이 바싹 마르고 뱃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움푹 꺼진 눈은 어느새 광채를 빛냈다. 그는 법정 천장을 쳐다 보았다. 형광등 불빛이 너무 초라하다.
검사의 말투에는 나를 죄인으로 몰아세우며 인간적으로 멸시하고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맞는 말이다. 내가 무슨 염치로 거기에 항변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인간쓰레기다. 이건 재판이 아니라 고백성사 같은 종교적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버텨야 한다.
나는 지금 가느다란 줄에 매달려 막막한 허공에 떠있다. 어떤 운명이 그 줄을 끊어 버린다면 곧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판사님은, 네 죄는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묻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저에게 고백성사 혹은 자아비판을 하라는 거 아닙니까? 최후 진술이란 게 그거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저는 피해자를 한 때 사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집념에 감탄했고 그녀의 자존심과 위엄을 존경합니다. 그녀는 강하므로 결코 파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성적이었다면 차라리 그녀의 심장을 칼로 찌르는 게 나았을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은 인간이 경험하는 일 중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녀에 비하면 너무나 천박하고 비굴한 인간이지요.
저는 항변을 하고 싶습니다.
제가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원인은 깊이 숨겨져 있으면서 그 결과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가정은 신성한 것이지요. 성소이지요. 작은 새들의 둥지이고 보금자리이니까요. 그걸 송두리째 파괴하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 반항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복수는 원인에 대한 결과일 뿐입니다.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인 또는 동기를 제공한 자를 법이 왜 처벌하지 않는지 의문이 드는군요. 그녀가 희생자이고 피해자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녀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달게 받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렇지요 그리스 시인은 ‘복수는 꿀보다 감미롭다’라고 하였지요. 그래서 구약성서와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화상에는 화상으로, 상처에는 상처로, 멍에는 멍으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던 가요.
지엄하신 검사께서 왜 무기를 구형했을까요?
검사는 피해자의 대리인 아니겠습니까? 그것 역시 복수의 감정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사 재판이란 게 복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형식적 과정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군요.
과연 이 험한 세상에 진실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찮은 인간들이 말입니다. 신이 계시다면 신만이 알 수 있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신이 죽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반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선처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걸 바라서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마음대로 하라지요.

재판장 : 판사란 무엇인가? 또는 판사란 누구인가? 우리들은 쓸데없이 자존심만 강하고 지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건 거의 병적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경험과 삶의 깊이가 턱없이 부족해서 인간으로서 인격 형성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스스로에게마저 그걸 애써 부인한다. 그래도 법대에서 근엄하게 폼을 잡고 앉아있으니 자기기만이고 위선일 뿐이다.
우리는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아니면 무죄를 선고할 수도 있다. 우리 성인 인간들 중에 누가 무죄일 수 있을까? 유죄인 경우 양형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분명치 않다.
심증 형성이 합리적 의심 없이 확실한가? 더 검토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

미리부터 자포자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단은 금물입니다. 예단은 이 신성한 법정에 대한 정신적 모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나저나 피고인이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군요. 맞는 말입니다. 판사들도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지요. 왜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산헤드린의 재판관들처럼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사회경험도 풍부하지 않고, 전문지식도 없고, 인간에 대한 애정도 없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해도 부족하니, 제가 판사로서 재판을 한다는 게 참으로 어불성설이죠.
이 자리에서 반성이니 회개니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지요.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죄악을 대신해서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진실이 있는지도 의문이군요. 우리가 진실을 너무 오랫동안 찾으면 진실은 도망가 버리고나서 오히려 우리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닐까요.
하여간에 그건 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지금 겉만 핥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이 어찌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지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신만이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인데 그 신이 죽어버렸다고 하니 안타깝군요.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을 대신해서 운명이…… 그렇지요. 운명이.
우리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실의 토대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은 바로 법률이고 제도이고 관습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법은 절대적으로 만능이 아니고 엄연히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아시겠습니까? 법이건, 인간이건 어쩔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과관계에서 원인은 무한정 확대되면서 과거로 계속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래서 법은 현명하게도 결과만 가지고 따지기로 결정한 것이지요. 바쁜 세상에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나저나 개를 죽인다고 해서 물린 자리가 낫는 게 아니지요.
피고인은 섣부른 복수는 자신의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을 몰랐던 모양이군요.
그리고 구약성서와 함무라비 법전은 2,000년도 넘은 아주 옛날, 옛날 일이지요. 그 후 세상은 골백번 바뀌고, 바뀌고, 법도 골백번 바뀌고, 바뀌었지요.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저는 법률가이지 성직자는 아닙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성직자들은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도 넘치는 도다’라고 말하지만 법률가는 죄와 벌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당연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악마가 혹은 우주의 신성한 힘이 피고인에게 그 짓을 하게 시킨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범한 것이지요.
만약 최후의 심판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세상 재판관들 모두가 그들이 살아있거나 이미 죽었거나 상관없이 불려 나와서 피고석에 앉아 신의 재판을 받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 재판을 내내 취재하며 공판정 중간쯤에 앉아있던 주간지 기자는 지루한 표정으로 자기도 모르는 새 긴 하품을 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오간 무수한 말들을 대충대충 메모했다. 어차피 빠진 게 있다면 먼저 기사가 나올 일간 신문의 주말판을 보고 보충하면 될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상상력을 발휘해서 소설을 쓰면 된다.
그는 메모 수첩을 양복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어서 법정 밖으로 빠져나가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그가 웅얼거린다.
이 재판은 클리셰는 아니야. 보통 재판에서 나오는 상투적인 말보다는 훨씬 심오했거든.

재판을 마칩니다.
선고는 3주 후에 하겠습니다.
2017-09-01 11:02:16
121.xxx.xxx.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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