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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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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어느 일등병의 비망록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4-01-13 11:49:07
조회수
35
어느 일등병의 비망록



하모니카를 잘 부는 앳된 청년.
꿈 많은 젊은 청춘.
난 지금도 이목구비가 단정하지만 깨끗하게 면도를 한 해맑은 얼굴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는 그를 모르고 그는 나를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자세히 알 기회도 없이 그렇게 헤어진 것이다.
그는 1947년 9월 5일생이다. 만 21살에 죽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6개월 15일이고 군대는 내가 3개월 빠르다. 상병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가 처음 우리 소대로 전입해 왔을 때 서슴없이 ‘형’이라고 불렀다. 전입 신고식이 끝나고 나서 며칠 지났을 때 나는 5개월이 빨랐으므로 제법 월남 고참 티를 내면서 그에게 말했었다.
“원래 소속은?”
“백골부대를 아시나요? 경례 구호가 ‘백골’이에요.”
“무슨 사단인데?”
“5군단 산하 3사단이죠. 철원에 주둔하고 있어요. 제23연대, 제2대대, 제7중대, 제1소대의 소총수였어요.”
“담배 피워?”
“절대 안 피우는데요.”
“내 옆자리에서 자면서 숨을 쉴 때마다 담배 냄새 풍기는 거 질색이란 말이야.”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만…… 제가 코를 골 수 있습니다.”
“그거야 피곤하면 누구나…… 처음에는 전쟁 공포증에 시달릴 수 있단 말이야. 첫 전투에 참가하면 오줌이나 똥을 지릴 수도 있고. 그걸 참아내야 해. 넌 할 수 있을 거야. 모두 그랬다니까.
꼭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야.
처음 몇 개월을 무사히 견뎌야만 하지.”
나는 박승춘 일병의 유품을 정리했다. 유품이라고 해봤자 그가 애지중지했던 하모니카, 대학 노트, 필기구, 면도기, 세이코 손목시계, 편지를 모은 봉투 등에 불과했다. 나는 그가 매일 밤 대학 노트에 무언가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잡기장이면서 비망록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일기장은 아니었다.
아니면…… 일종의 일기장일 수도 있다. 내면 일기이거나 외면 (바깥) 일기이거나. 혹은 계획과 일정, 자신의 꿈과 그것을 향해 나가는 과정의 생각, 감정, 느낌 같은 걸 담는 다이어리 같은 것. 메모. 잡문. 독백. 자신과의 침묵의 대화 또는 자신에게 쓰는 편지일 수도.
누군가 ‘비망록은 상대방에게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고 쓰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발췌했다. 저승에 가 있는 승춘이에게 양해도 구하지 않고.

미성숙 꿈 희망 환상
새로움을 추구한다.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한다.
멋지다. 아둔하다. 충동적이다. 자기 파괴적이다. 이타적이고 이기적이다. 절망적이다. 자기조절능력이나 판단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우리는 춘천역에서 오음리행 군용 트럭을 탔다. 험준한 산을 돌고 돌아서 여러 구비를 넘었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 도로는 달팽이처럼 꼬불꼬불하다. 항아리처럼 푹 파여진 분지에 위치한 오음리 훈련장은 바람 한 점 불지 않고 숨이 콱콱 막혔다. 따뜻했던 봄 날씨는 지나가고 이제는 무더운 한여름 날씨였다.
한 달 동안 고된 훈련을 마친 후 춘천역에서 부산항 제3부두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1969년 7월 5일)
환송식.
부산항 제3부두는 태극기를 흔드는 환송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많은 가족 친지들이 환송식에 나와 이름을 부르며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다. 군악대가 군가와 최신 유행가를 쉴 새 없이 연주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나와 줄을 맞춰 도열에 있으면서 무슨 노래를 불렀다.

달려라 백마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세운 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
정의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백마가 가는 곳에 정의가 있다
달려간다 백마는 월남 땅으로
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들

우리들은 오직 배웅나온 가족을 찾기에 분주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도 안 나왔다.
환송행사가 끝나고 나서 미 해군의 수송함에 승선했다.
뱃고동 소리가 아련하게 울리면서 배는 항구로부터 점점 멀어져간다. 그 뱃고동 소리는 텅 빈 가슴 속에 긴 여운을 남긴다.
항구가 점점 멀어져 가더니 이내 수평선 밖으로 사라진다.
우리들은 갑판 위로 올라와서 태평양 망망대해를 헤치면서 나아가는 항해를 즐겼다. 우리가 탄 배는 지구상에서 수심이 가장 깊다는, 에베레스트산 높이보다 훨씬 더 깊다는 필리핀 바탄 제도 부근 바다를 지나고 있다. 밤하늘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손을 길게 뻗으면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총총한 별들이 내려와 있다. 별똥별이 기다란 곡선을 그리며 바다 위로 내려앉았다.
내가 부산항을 떠나 망망대해에 떠 있을 때 어머니는 비로소 나의 베트남행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런 후회도 미련도 없이 떠나야 한다.
어머니가 받게 되실 엄청난 괴로움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한 심정입니다. 제가 없더라도 견뎌내셔야 합니다.
일주일 만에 베트남 중부의 나트랑에 도착했다. (7월 13일 아침) 우리는 내리자마자 군용 트럭을 타고 30연대 연대본부로 이동했다.
중대본부에 도착했다. 새로 전입 온 신입은 다섯 명이었다. 인사계 중사가 내어주는 조그마한 봉투에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 담아 보관하는 절차를 거쳤다. 내가 죽으면 부모 형제에게 전사 통지서와 함께 보낼 유품 중 유일한 신체의 일부였다.

우리 보병 부대에서 파월 복무 희망자를 조사했더니 대부분 불응했다.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들도 모두 보병이 가면 죽는 줄 알았다. 가족들이 면회를 와서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탈영병이 급증했다. 처음에는 갈려고 마음먹었다가도 가족들을 면회하고 나면 안 가겠다고 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돈 있고 빽 있는 자는 빠졌다. 가정 형편을 하소연하는 병사도 있었다.
상부에서는 말단 부대의 사정도 모른 채 터무니없는 지시를 내렸다. 독자 또는 결혼한 사병, 범죄 가능성이 많은 그런 사람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보내지 말라. 전쟁터에서는 안전사고가 부대의 사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데 부녀자를 강간하고, 나라의 체면과 명예를 더럽힐 위험성이 있는 사람들은 보내지 말라. 사병의 경우에도 학벌이 나빠도 안된다. 최소한 중졸 이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부대에서는 월남에 가는 사병을 차출할 때 자기 부대에서 필요한 똑똑한 병사는 절대 안 보냈다. 그래서 중대에서 뽑게 되면 중대 서무계가 빠지고 또 누군가가 빠졌다. 돈 있고 빽이 있으면 다 빠졌다.
그날, 늦은 봄의 맑고 맑은 아침이었다. 초여름에 접어들었지만 웬일인지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나는 우울해지기만. 나에게 월남 차출 명령이 떨어졌다. 사실은 그 명령이 떨어지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명령에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만약 차출이 안 되었으면 지원했을 거다. 돈 쓰고 빽 쓰는 녀석들은 꼴보기 싫어. 고향의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선했지만.

신체 검사 통지서를 받은 날. (1967년 6월 20일)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넌 늦둥이야. 지독한 난산이었어. 얼마나 산통이 심했던지. 넌 내 목숨보다 귀중해. 상주읍 사무소 병사계에 손을 쓰면 군대 안 갈 수 있다더라. 여러 사람이 그렇게 했어. 못난 놈들만 군대에 간다. 돈 있고 빽만 있으면 다 빠진다. 상주고등학교 동창생들도 군대 빠지고 공무원 시험 합격해서 세무서에 다니고 있지 않느냐. 너는 경북고 아니면 경북대 사대부고를 갈 수 있었는데. 문리대에 가면 안 된다고 하더라. 제대로 취직이 안 되니까. 넌 마음씨 착하고 공부도 잘했으니까 경북대 법대에 꼭 들어가야 한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회에서 병신 취급받습니다. 결국 돈 문제에요.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우린 그런 부정한 돈이 없잖아요.

하고픈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나는 몹시도 오랫동안 타향에서 지냈습니다.
그래도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시는 이는
언제나 어머님 당신이었습니다.

문경과 김천을 연결하는 경북선은 상주를 관통한다. 기차는 우리 동네를 지나갈 때마다 기적을 울린다.

잠결에 기적이 들린다
사람들이 잠든 깊은 밤중에
멀리서 가차이서
기적은 서로
쓸쓸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입술이 부르트고 목젖에 염증이 생길 만큼 하모니카 연습.
하루에 수십 번씩 혼자서 배웠다. 뻔하게 하면 안 된다.
나 스스로를 놀라게 할 만큼 변주해야 한다. 비틀어야 한다. 자기만의 감정과 해석. 나와 하모니카가 한 몸으로 느껴지기.
하모니시스트. 세심한 표현력의 부족. 멜로디와 변주, 재탄생. 즉흥 연주. 재즈곡의 연주. 클래식 하모니카. 고향의 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나는 그 음반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서른 번이고 연달아 들었다. 도합 오백 번쯤. 선율이 곧 끝날까 봐 조바심을 치면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는 격렬한 느낌. 가사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애잔한 선율. 그 선율 속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내 하모니카는 중고품 트레몰로 하모니카이다. 재즈나 블루스를 잘 연주하려면 다이아토닉 하모니카가 필요하다.
다른 취주악기와는 달리 하모니카는 들숨과 날숨이 둘 다 필요하다. 횡격막을 사용해서 호흡을 재빨리 전환해야 한다.
도미솔은 불어서 레파라시는 마셔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도레미파솔라도시 순으로 음계가 배치된다. 한 옥타브 아래로 내려가거나 올라가면 음계 배치는 더욱 괴상해진다.
화음 넣기. 벤딩. 오버 벤딩.
재즈 하모니카의 거장 투츠 틸레만스.
나는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노래가 장일남 작곡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시를 지은 시인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나는 수백 번의 연습 끝에 운율과 리듬을 살려서 하모니카로 멋지게 연주할 수 있다.
지금은 슈 톰슨의 Sad movie가 유행하고 있다.
절대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 담배는 목구멍을 망가뜨린다. 담배는 하모니카의 적이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 소리 물레 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 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 소리 물새 소리에 눈물 흘렸네

Sad movies always make me cry
He said he had to work so I went to the show alone
They turned down the lights and turned the projector on
And just as the news of the world started to begin
I saw my darlin' and my best friend walk in
Though I was sittin' there they didn't see
And so they sat right down in front of m
When he kissed her lips I almost died
And in the middle of the color cartoon I started to cry
Oh-oh-oh sa-a-a-d movies always make me cry

용돈이 생길 때마다 헌책방에서 사서 모은 문학 전집들.
책꽂이에는 고등학교 교과서와 입시용 참고서, 영어사전, 독일어 사전, 전집들이 빼곡히 차 있다. 영어 원문 소설 또는 독일어 원문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들 전집들에 들어있는 명작 소설들을 제대하고 돌아가면 제일 먼저 차례대로 읽어야 할 것이다.
책은 하나의 길이며, 책 읽기는 근원으로의 여행이다. 하지만 나는 책벌레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게는 큰 위안인 동시에 무서운 형벌이다.
4단 책장의 제일 아래 칸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필기한 헌 공책들, 스케치와 시 습작물을 갈겨 쓴 노트들이 있다. 지금 그것들이 새삼스럽게 그립다.
3학년 때 담임 선생이었던 신동한 선생님이 기억난다.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mind over matter를 강조.
상주고에는 그때 여자 선생님이 딱 두 분 계셨다. 구미 출신으로 경북대 사범대를 나온 이현자 음악 선생님.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를 좋아했던 김인순 독일어 선생.
한국외대 출신. 2년만에 대구 계성고로 전근.
어느 날 독일어 선생님이 칠판에 썼던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라틴어 문장, 미적분이나 물리법칙보다 더 어려운.
내가 짝사랑했던 독일어 선생님께 배운 귀중한 단어들.

Cogito ergo sum
memento mori
memento vivere

김응조. 그는 상주고가 낳은 천재라고 할 수 있다. 6년 동안 전체 수석을 놓친 적이 없다. 특히 수학을 잘했다. 서울의대에 단번에 합격했다. 상주고에서 서울의대를 합격한 것은 아마 개교 이래 처음일 것이다.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는 그를 질투했다. 그는 지독한 공부벌레이고 노력파이다. 수업 시간에는 선생님의 사소한 농담까지도 전부 노트에 필기한다.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었다. 이제는 그를 질투하지 않고 존경한다.

나에게 글쓰기의 재능이 있을까. 전혀 자신할 수 없다. 나에겐 문학청년 시절이 없었다. 나는 아직 문학이건 예술이건 잘 알지 못한다.
말하자면 형식과 내용, 이 둘이 구비되어야만 문학이 될 수 있는 것이니,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형식을 얻지 못하여서는 문학이 될 수 없고, 형식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용이 없으면 문학이란 것이 되질 못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문학이 되려면 형식과 내용이 구비되는 것이 우선 첫째 문제이겠지마는, 문학 중에서도 훌륭한 문학이 되려면 그 형식과 그 내용이 혼융 일체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췌언을 요하지 않을 것이다. (조윤제)

내가 쓰는 글씨체에는 나의 감정이나 심리 상태가 드러난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으면 따뜻하고 화가 나 있으면 글씨가 거칠어지고. 어려운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에게 쓰면 글씨가 반듯해진다. 내가 어머니와 독일어 선생님에게 손편지로 쓸 때처럼.

상주와 구미는 붙어있다. 상주 위에는 문경이 아래에는 구미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7년 11월 14일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에서 교사를 하면서 젊은 시절 인생을 시작했다.

인간이 조금만 덜 미쳤더라도 전쟁으로부터 생기는 비극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전쟁은 악한 사람보다 언제나 선량한 사람만 학살한다. 전쟁은 남자의 일이다.
여름내 품고 다닌 그 슬픔 / 멜빵 그리고 거친 천조각 / 수류탄, 삽 또는 철모, / 흠이 파진 칼 / 말없는 등의 피를 찾는 // 슬퍼하는 살찐 까마귀 일곱 / 빨간 소나무 가지에서 떨어지네 일곱의 꽃들은 또 / 탱크 지나간 자취 위에

군인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 죽겠다고 하는 자는 살고, 살겠다고 하는 자는 죽는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전쟁은 중노동이다. 군인은 전쟁터에서 아무런 상처나 부상을 입지 않은 채 극단적인 피로와 오래 누적된 스트레스가 결합되어 즉사할 수 있다.

전쟁터에서는 폭력성이 최고조에 달한다. 긴 인생의 여정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근접전은 없어야 한다. 내 총검으로 적의 목을 베거나 적이 내 얼굴을 찌르는 건 피하고 싶다. 근접전에서는 비명을 지르지 못하도록 단번에 목을 찔러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아서는 안 된다. 수류탄은 땅에 떨어지기 몇 초 전에 폭발하도록 안전핀을 뽑아야 한다.

그들은 북베트남 전선을 A전선, 남베트남 전선을 B전선, 라오스 전선을 C전선, 캄보디아 전선을 D전선이라고 한다.
3인 1조로 구성된 가장 작은 단위의 부대를 삼삼조라고 하고 3개 조가 모여 1개 분대를 구성한다.
베트콩들은 군용 배낭을 두꺼비 배낭이라고 하고 전리품을 골동품이라고 한다.
북베트남 여자들은 3가지 미루어야 할 일이 있다. 사랑, 결혼, 임신을 말한다.

베트콩들은 부비트랩에 관한 한 전문가이다. 그것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낚싯줄로 만들었다. 그들이 낚싯줄을 이용하여 부비트랩을 설치해 놓으면 정말 안 보인다.
우리는 월남에 도착한 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낚싯줄을 조심하라’고 들었다.

하늘은 칙칙했고 안개가 끼어 있었다. 눈을 비비면서 출동했던 병사들이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른함이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멀리서 은은히 들려오는 총소리를 자장가 삼고 끝없이 펼쳐지는 조명탄의 유희를 바라보면서 병사들은 논둑을 베개 삼아 하나씩 잠들어갔다.

C-Ration을 먹고 나서 기다리고 있는데 분대장이 신호를 보냈다. 조심조심 파헤치니 105mm 탄통이다. 모두 6통이다. 무엇일까.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놓았더니 쌀이다. 그중 한 통은 AK 실탄이다. 바위틈 속 동굴에서 미제 타자기와 월맹기, 월남어로 쓰여진 문서가 나왔다. 그것들은 나중에 헬기로 중대 기지로 옮겨졌다. (처음 나간 분대 동굴수색작전. 일종의 월남전 예행연습.)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물러나고, 적이 멈추면 우리는 교란하고, 적이 피하면 우리는 공격하고, 적이 물러나면 우리는 추격한다. (호치민의 전략 전술)

프랑스 육군 외인부대의 경례 구호는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이다. 15년 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여기 베트남에서 (그들의 역사상) 가장 많이 죽었다. 무려 일만 명이 넘게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외인부대 부대원의 명예 규범
모든 외인부대원들은 암기하고 숙지해야 한다. 못 외우면 부사관이 무시무시하게 갈구기 때문에 안 외울 수가 없다.
첫째. 외인부대원, 우리는 명예와 충성으로 복무한다.
둘째. 외인부대원은 국적, 인종, 종교를 초월한 무장한 군인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가족이며 긴밀한 연대를 보여준다.
셋째. 전통에 대한 존중, 지휘관에 대한 헌신, 규율과 동지애는 우리의 자랑이며, 용기와 충성은 우리의 긍지다.
넷째. 우리는 군인으로서 품위를 자랑스러워하며 항상 흠잡을 데 없는 제복을 입고, 항상 위엄있는 행동과 겸손한 행동을 하며, 깨끗하고 위생적이게 행동한다.
다섯째. 우리는 엘리트 군인이다. 우리는 엄격하게 훈련하고, 무기를 가장 귀중한 소유물로 유지하고, 신체를 끊임없이 관리한다.
여섯째. 임무는 신성한 것이므로 끝까지 수행하고, 필요한 경우 목숨을 바쳐 수행한다.
일곱째. 전투에서 우리는 열정과 자비심을 갖추고 싸우며, 패자를 존중하고 전사자, 부상자, 무기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꽃의 여왕 장미.
5月이면 우리 동네 골목길 담장에 흐드러지게 피는 넝쿨 장미.
다섯 꽃잎 꽃송이를 피우고 분홍색이거나 아주 빨갛다.
수술은 거의 흰색에 가까운 노란색.

Rose, oh reiner Widerspruch, Lust,
Niemandes Schlaf zu sein unter soviel Lidern.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을 열망하네 겹겹이 싸인 눈꺼풀 속에서.)

춥고 서먹한 겨울이었다.
정미소 추녀 끝에 햇살을 쪼아대던
참새떼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오늘 저녁 혼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오늘 오후 아무런 까닭도 없이 울고 말았다.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눈을 감자 내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처럼 무서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으스스 몸이 떨려왔다.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마구 뛰었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나가 없으면 다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것이 없으면 나도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면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도 없다. 나는 다른 것의 모임이요, 다른 것은 나의 흩어짐이다. 나와 다른 것을 아는 것은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다. 갈꽃 위의 달빛이요, 달 아래의 갈꽃이다. (한용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우리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죽음은 감각의 휴식, 충동의 실이 끊어진 것, 마음의 만족, 혹은 비상소집 중의 휴식, 육체에 대한 봉사의 해방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그녀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일 수는 없다. 그녀는 상주초등학교 동창생이고 상주여중고를 졸업했으며 내가 알기로는 그 후 대구에 있는 어떤 섬유 회사의 총무부에 근무하고 있다. 지금도 근무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 한 무리의 상주여고 여학생들이 길모퉁이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교가를 합창하면서 걸어갔다. 맑은 목소리가 어울리면서 행복하게 울려 퍼졌다. 그들 일행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와 관련해 떠오르는 어떤 장면은 6학년 여름 무렵 (그때 우리는 다른 반이었다) 그녀는 여름 내내 체크무늬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멀리서 훔쳐보았는데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 이미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뿐이다. 졸업 후 우리는 어쩐 일인지 다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소식이 궁금하여 계속 그녀의 근황을 추적했다.

사랑은 그 대가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사랑하고 상실을 겪는 편이, 죽음과 같은 상실을 겪는 한이 있어도 사랑을 전혀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은 것일까?
그녀의 마음은 애매모호해서 도저히 진심을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너무 높디높은 꿈을 품고 살아가다가 스스로 그 꿈을 잃어버린다. 나는 꿈 없이 살다가 역시 그 꿈을 스스로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유상동(柳相東) 상병의 주소
유 상병은 내 옆자리다.
주소 - 전남 고흥군 풍양면 송정리 103
우리는 제대하고 나면 서로 연락하기 위해서 주소를 교환했다.
집 밖을 나서면 남쪽 바다가 보이고 활처럼 굽은 만에 자리 잡은 풍남항이 보인다고 했다.

(박승춘 일병은 한 달여 후 그 비극적인 랑비앙산 계곡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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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4-01-13 11:49:07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