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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탄원서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4-01-13 11:44:16
조회수
29
탄원서

오오 양심이여! 양심이여!
인간의 가장 충실한 벗이여!
― 조지 크래브


서울동부지방법원 제3형사부 재판장님!
저는 2017년고합1650 폭행치사 사건 피고인 김정진입니다.
현재 동부구치소에 5개월 수감되어 있습니다.
수인 번호는 142번입니다.


지난 수요일 결심 공판이 끝났고 지금은 선고일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혀서 재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저는 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체적 진실을 사실대로 말씀드리고자 이 탄원서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실체적 진실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만 검사님도 변호사님도 그 말씀을 자주 하시기에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판사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그날 먼저 판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 검사님이 무표정한 얼굴로 또 뭐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우리 변호사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직 변호사님이 시키는 대로 두세 번 ‘네’라고 대답했을 뿐입니다. 변호사님은 재판이 잘 진행될 터이니까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하셨습니다.
검사님은 저에게 장기 10년 단기 5년을 구형했고, 변호사님은 제가 아직 철없는 미성년자이고, 자수를 했으며, 피해자야말로 나쁜 사람으로 처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성폭행의 피해자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행위이기 때문에 범행의 동기에 충분히 참작할 만한 정황이 있으므로 이를 참작하여 관대하게 처벌해달라고 판사님께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제 진짜 나이와 자라온 가정환경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부분은 수사기록이나 재판 과정에서도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이 탄원서에서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공소장에는 제 나이가 17세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21살입니다. 4년이나 늦게 호적에 올라간 것입니다.
어머니가 저를 낳았을 때 미혼모였고 저는 친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얼굴을 본 적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나중에 아버지를 만나 먼저 동거를 시작하셨고 동거를 시작한지 몇 년이 지나서야 혼인신고를 하고 호적에 올리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전남 순천에서 살면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지만 가족적으로는 아무런 문제없이 순탄하게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공사판의 일용 노동자였습니다. 아파트 공사장에서 벽돌 쌓는 일, 페인트 공, 도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습니다. 순천뿐만 아니라 광양, 여수, 벌교, 고흥까지 다니면서 일을 했습니다.
율촌 산업단지 공사 때는 대형 건설회사의 하청업체에서 몇 년 동안이나 고용되어 안정적으로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어떤 인테리어 업체에 소속되어 ‘노가다’라고 불리는 보통 인부로 일했습니다.
보통 인부는 일반 잡역에 종사하는 육체 노동자를 말합니다. 온종일 허리 굽혀 일하느라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는데도 다음 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하러 나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키는 160센티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키 절반이 넘는 날이 굵은 드릴인 뿌레카를 든 채 공사 현장 바닥 콘크리트를 잘게 조각냅니다. 늙으신 아버지는 20킬로그램에 육박하는 뿌레카를 눈도 깜빡이지 않고 능숙하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 자리에는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서 유래됐다는 깨진 콘크리트 덩어리를 이르는 막노동판 은어인 왈가닥과 잡석들이 수북이 쌓이게 됩니다.
공사판은 돌가루와 흙가루가 휘날리는 더러운 곳입니다. 그곳에서 무거운 건축 자재와 폐기물을 쉴 새 없이 나르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자칫 방심하면 다칠 수도 있으니 상당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지만 수급비를 신청하지 않습니다. 수입이 있으면 수급비가 깎이게 되는데 거기에 속박되는 게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고된 일로 몹시 피곤할 것인데 한 번도 예배를 거른 적이 없을 만큼 신앙심이 돈독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버지 이야기를 길게 말씀드리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버지가 너무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일을 했으므로 우리 식구는 20평 연립주택에서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이에 딸만 둘을 더 낳았습니다. 제 여동생들은 얼마나 귀여운지 모릅니다. 마음씨 착하고 저와는 달리 공부도 제법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저를 친자식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폭행이나 학대를 받은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부모님이 매일같이 치고 박고 싸우는 집안에서 자랐다거나, 아빠가 술만 먹고 들어오면 몽둥이를 휘두르는 탓에 집 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다거나, 부모 없이 자란 탓에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서 누구에게 폭행을 당했다거나 하는 사건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라면서 제가 당연히 친자식인 줄 알았습니다.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서야 어떤 일을 계기로 계부인 사실을 알았지만 그게 저에게 어떤 정신적 상처를 안겨주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제 지능지수나 학교 성적을 생각할 때 또한 집안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면 대학은 일찍 포기하였습니다. 제가 무슨 염치로 대학 진학을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항상 만화책이나 소설책만 읽었고 용돈이 생기는 대로 게임방에서 살았습니다. 가끔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지친 몸으로 느지막이 등교를 하여 지각하기도 했고,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화장실로 달려가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래서 성적은 언제나 밑에서 거꾸로 일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구들처럼 학교로부터 정학이나 퇴학을 받은 일도 없었고 소년원에 간 일도 없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집안에서 빈둥빈둥 노는 것도 지겹고 부모님이나 동생들의 눈치를 보는 데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저는 몸이 건강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못하겠는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순천역에서 밤 열차를 타고 올라 온 것입니다.
하지만 서울은 무심한 도시였습니다. 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이 무작정 상경했기 때문에 결국 가출 소년들끼리 만나게 됩니다.
서울에서는 신림동, 동대문, 천호 등이 가출 청소년이 많이 모이는 곳입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 신림동에 있는 가출 패밀리의 멤버가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형편이 웬만하면 쉼터에 가지 않습니다. 가출 청소년 쉼터에 들어가면 담배도 못 피우게 하고 오토바이도 못 타서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밖에 있는 게 편한데 날이 더 추워지면 갈 곳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잠시 들어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찜질방, PC방을 오가면서 밤을 보냅니다. 전단 아르바이트와 배달 아르바이트로 돈을 마련하지만 이마저도 떨어져서 갈 곳이 없을 땐 그제서야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청소년 쉼터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쉼터를 여러 곳 갔었는데 규칙이 엄격했던 곳은 답답해서 하루도 있지 못했습니다. 쉼터가 마음에 안 들면 가출 청소년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나 단체 카카오톡방을 통해 다른 쉼터 정보를 얻어서 가기도 했습니다. 쉼터 여러 곳을 투어하듯 맴도는 청소년을 가출 청소년들 사이에서 쉼돌이, 쉼순이라고 부르지요.
저는 마침내 여자들이 수십 명이나 있는 강남의 대형 풀코스 룸살롱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가출 패밀리의 형님이 다른 데로 옮기면서 그 자리를 물려준 것입니다. 그곳 여자들은 어김없이 2차를 갔습니다. 그 후 다시 호스트바의 웨이터가 되었다가 남자 보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저는 세상 물정과 인간과 여자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의 성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달걀을 깨고 나온 병아리처럼 세상이 보였단 말입니다.

호스트바에서 어느 날 저녁 좋은 손님을 만났을 때 저의 일과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똑똑.” 노크를 하고 젊거나 어린 사내들이 3평 남짓한 룸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웨이터가 말합니다.
“초이스 들어가겠습니다. 1조부터 1번 2번 3번 4번입니다. 원하시는 분이 있으면 바로 골라주세요. 만약 없으면 2조가 뒤따라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면 10대 말이나 20대 초반 건장한 남자들이 좁은 룸 안으로 들어와 일렬로 서서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 그렇지만 조금 애매한 미소를 짓고 기다립니다. 거기 온 여성 고객은 그런 청년들의 몸매와 얼굴을 한 번 쫘악 훑어본 다음 마음에 드는 남자를 고릅니다.
우리들은 서로가 마음에 든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순정파가 아닙니다. 어차피 그날 밤 하루 보고 안 볼 사이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저희는 어색함을 피하고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푸짐하게 술과 안주를 시키고 말을 걸면서 애교를 떨지요. 그건 뭐 룸살롱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무조건 하고 누님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가끔 멜로 드라마 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미남 접대부가 사근사근하게 굴면서 “누나…… 나만 똑바로 바라보세요. 나는 누나가 너무 좋아. 미쳐버리겠어.”라고 말하자 그만 못생긴 여자가 홀딱 넘어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남자가 주문한 대로 굉장히 비싼 안주와 최고급 양주를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자꾸 찾아오는 거예요. 결국 외상술값 갚으려고 결혼 자금으로 쓰려고 마련한 예금 적금 다 털고 나서야 정신 차리는 겁니다.
그때쯤 접대부는 양심이 있어서 “누나…… 우리 그만 만나요.”라고 말합니다.
그날 밤 고객은 40이 넘은 늙은 아주머니였습니다. 테이블 위로 양주가 쉴 새 없이 오가고 분위기도 최고조로 흘러갔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많이 취했고 분위기는 무르익었습니다.
여자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억울하다고 하면서 울었습니다. 제가 위로했습니다. 그때부터 여자는 앞뒤가 안맞는 반말을 마구 지껄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며 애무를 하는 드라이 섹스부터 시작해서 온갖 체형을 요구했고 마침내 도기 스타일로 끝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30만원을 받아서 업소 측과 반반씩 나누게 됩니다. 그곳도 불경기를 타서 매일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손님 중에는 도저히 참아줄 수 없는 막나가는 꼴 보기 싫은 나이 어린 여자도 있습니다.

저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좀 더 확실한 수입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재작년부터 남자 성인 상대 성매매로 돌아섰습니다. 그쪽이 훨씬 수입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선릉역 근처 원룸에서 남자 성인들을 상대로 성매매하는 형들 4명과 함께 살면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스마트폰 앱 장터인 플레이스토어나 앱스토어에서 채팅 앱을 검색하여 성 매수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남자 — 남자’ 간 성매매로 이름난 채팅 앱에 접속하여 자신을 10대 남자라고 밝히고 ‘ㅇㅂㄱㄴ(알바가능)’ 또는 ‘ㅇㅂ(알바)’ 라고 글을 올립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그런 게시물들을 여럿 찾을 수 있습니다.
밤늦은 시각엔 자신의 알몸 사진을 올리고 가격을 제시하는 간 큰 어린 녀석들도 있습니다. 성매매가 이렇듯 스마트폰으로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집니다.
이런 채팅 앱들은 실명이나 성인 인증 없이 손쉽게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고 채팅 앱은 전화나 문자와 달리 기록이 남지 않아 추후 확인이 어렵습니다.
이 사건 아저씨와는 그렇게 채팅 앱을 통해 만났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도 아저씨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건 비밀 사항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기 때문에 매번 만날 때마다 정해진 가격의 두 배를 지불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제가 아담한 체격에 곱상한 얼굴이고 여자처럼 수동적 역할을 잘하기 때문에 처음 만났을 순간부터 저를 좋아했고 저에게 완전히 빠져버렸습니다. 저는 꽃미남은 아니지만 나긋나긋해서 그게 성적 매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만 주면 돈은 얼마든지 더 많이 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쨌거나, 그때부터 저는 노예나 다름없었습니다. 비싼 청바지와 스니커즈 운동화, 스마트폰을 사주고 수시로 필요한 용돈을 듬뿍 주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만났고 만날 때마다 그가 요구하는 대로 온갖 체위를 변형해가면서 팔라티오나 항문성교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사도마조히스트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요구는 갈수록 집요하게 늘어났습니다. 채팅 앱에서 탈퇴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저를 의심해서 에이즈 양성이 아닌지 궁금해 했고 결국 병원에 가서 모든 종류의 성병 검사를 받게 하였습니다. 물론 에이즈나 매독, 임질 등 어떤 성병균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터무니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문제는 저의 성 정체성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어느새 완전히 동성애자로 변모하면서 여자들을 혐오하게 된 것이지요. 돈을 벌기 위해서 남자들을 상대하다가 거기에 빠져들면서 게이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그 늙은 남자에게 싫증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질투심에 눈이 먼 그가 눈치채지 않도록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종로 낙원동 쪽으로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점점 성욕이 왕성해졌기 때문입니다.
젊고 싱싱한 남자들. 끈적이는 피부. 그들은 근육질의 몸을 자랑했고 가슴에는 검은 털이 무성했습니다. 그들이 날 안아주면 가슴이 터질 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하고 똑똑해서 저를 매혹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말이 통했고 영혼마저 통했습니다.
코카인이나 암페타민을 들이마시면 하늘로 올라갈 것 같은 기분이었지요. 더할 나위 없었습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너무 잘생겼고 늠름했습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였습니다. 제가 홀딱 반해버렸죠. 하지만 제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매달렸지만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너 같은 어린 애는 아니야.”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지요. 그때 저는 몹시 부끄러웠고 동시에 분노했습니다. 증오심이 불타올랐지요.

그 무렵부터 점점 돈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는 아저씨가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금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것에 저항하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저에게 말입니다. 저는 그를 어떻게 죽일지 생각했습니다. 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구하기는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밧줄로 목을 졸라 죽일 수도 있겠다고 궁리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주치게 될 찌그러진 얼굴이, 튀어나온 눈알과 숨 가쁘게 헐떡거리는 입과 축 늘어진 혀가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했습니다. 칼로 난도질해서 죽일까?
그러면 처치곤란하게 피바다가 될 것이었습니다. 독약은 구하기도 힘들지만 구역질과 구토를 유발할 것입니다.
저는 온갖 궁리를 하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늙고 추한 남자는 섹스가 끝나고 나면 피로에 지쳐서 죽은 듯이 늘어지니까요. 예정된 작업이 끝나고 나서 간단히 목을 서서히 조르면 되는 거였습니다.
저는 지금 그의 시선을 느낍니다.
제 두 손이 그의 목을 감싸서 옥죄었습니다. 저는 방 안의 대형 거울을 통해서 제가 그의 목을 조르고 또 조르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바뀔 겨를도 없었고 그의 눈이 놀래서 휘둥그레질 겨를도 없었습니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에서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렸습니다. 그가 축 늘어졌고 제 손도 힘이 빠지면서 감각마저 사라졌습니다.
마침내 그가 죽었습니다.
저는 너무 피로해서 침대로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 그의 마수를 하루빨리 벗어나자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강박관념이 반복해서 돌고 돌아 저의 분노와 욕망을 분출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 젊으니 오랫동안 감옥에 썩고 싶진 않습니다. 저에게도 밝은 미래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게 암흑의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게 정당한 처벌을 내려주실 수 없을까요?

2017년 11월
김정진 올림

<추신>
담당 검사님은 처음부터 동정적이었고 너무나 친절하셨습니다. 저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실제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사실은 수사를 받으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조사를 시작하면서부터 하느님께 너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씀했거든요.
저는 어려운 법률 용어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검사님은 경찰에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로 저를 송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도대체 말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 더러운 성폭행의 피해자일 뿐이고 제가 목을 조른 행위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적으로 한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처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피해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순진한 검사님께 더 이상 진술할 게 없었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지장을 찍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담당 국선 변호사님 역시 여자 변호사였습니다. 동부구치소로 처음 접견을 와서는, 딱 한 번 왔습니다만 검사님하고는 사법연수원 동기라고 하면서 수사는 잘 되었으니 더 이상 문제 삼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지요. 더욱이 면전에서는 말입니다.
저는 천사처럼 아름답고 엄마 같고 누나 같았던 두 분 여자 검사님과 여자 변호사님께 추잡한 사건을 도저히 솔직하게 말씀드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방의 방장님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금융회사에 근무했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금융사기 등 사기전과 5범입니다. 하느님 같은 방장님께서, 제가 불쌍한 희생자라는 선입견과 약자를 편들어야 한다는 모성 본능이 발동하여 작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꿈틀거렸습니다.
작성일:2024-01-13 11:44:16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