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재심 (下)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4-03-28 14:47:56
조회수
20
검사가 반대신문을 했다.
「공범인 김상만의 전과와 관련된 수사기록을 살펴보면 폭력 행위의 상대방이 전부 여자였거든요. 실제 성폭력으로 나아가지는 않았고 피해자들이 처벌을 원치 않아서 가볍게 처벌을 받고 넘어갔습니다. 술 마시고 우발적으로 일어난 단순 폭력으로 본 것이지요.
그런 가벼운 폭력은 성폭행의 전 단계일 수도 있었는데. 그때 수사관들이 대충 넘어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3차례나 됩니다. 강도 전과도 있고요. 부인과는 이혼했는데 그 이유가 가학적인 성격 때문에 폭력이 원인이었습니다. 여자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갔으니까, 그래서 여자를 증오했겠지요.
소년원 기록에 따르면 주의력 결핍 및 과잉행동장애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이성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과잉행동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김상만은 성인이 되고 나서는 폭력적 성향이 가학적 변태성욕자로 변한 것 같습니다. 이 경우 모든 것이 성적인 흥분상태와 직접적 관계가 있습니다. 만일 살아있는 피해자의 고통을 보면서 성적으로 흥분하지 않는다면 그건 가학적 변태성욕자가 아닌 것입니다. 또한 가학적 성범죄자에게는 죽은 희생자는 전혀 성적 흥미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의 시체를 보고 자신의 분노와 좌절을 표출하는 사후 시체 훼손자들 역시 가학적 변태성욕자는 아닙니다.
이 사건의 경우를 돌이켜보자면, 피고인은 여자의 목을 처음에는 가볍게 조르다가 쾌감을 느끼면서 점점 손목에 힘을 가하면서 발버둥을 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바다에서 작은 어선을 타고 함께 고기를 잡았어요. 끝나면 어김없이 엄청나게 술을 마셨고요. 그렇다면 공범의 그러한 가학적 성격이 피고인에게 전이된 것이 아닐까요. 형님처럼 따랐으니까요. 다시 말하면 목을 점점 세게 조르면서 쾌감을 느끼고 성적으로 흥분상태에 빠진 것이죠.
만약 그게 아니라면, 김상만은 성행위를 훔쳐보는 것에 목숨을 건다는 ‘절시음욕증’일지도 모릅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관음증이라고 하죠. 몰래 숨어서 성행위 장면을 훔쳐보면서 성적 만족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김상만은 피고인이 강간을 할 때 그걸 직접 바라보면서 성적 만족을 느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의 수사 경험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밑바닥 범죄자들은 서로 영향을 받고 모방을 합니다. 이 사건의 경우에는 김상만이 죽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조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상만의 교활한 성격을 감안하면 교사를 했거나 강요할 수도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알코올과 폭력성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날 둘이서 소주를 6병이나 마셨다고 했지 않습니까.
물론 알코올은 폭력적 공격의 원인으로 간주하기보다는 공격에 대한 구실로 보는 견해도 있긴 합니다. 알코올을 마셨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 아니라 알코올을 마시고 공격할 정당성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어떤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평상시보다는 강력한 충동성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죠. 그때 상대방은 약자입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되면 상대에 대한 공격을 주저합니다.
제가 수사한 경험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흉악 범죄자들은 피해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남성보다는 여성, 어른보다는 노인이나 아이들을 피해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피고인은 대항할 수단이 없는 무력한 여자를 상대로 행동을 한 것이죠.」
「범죄 수사에 있어서 알코올과 범죄행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사례가 쌓여 있습니다. 살인이나 강도강간 같은 강력범의 경우 특히 그렇습니다. 김상만의 경우를 보면 결국 술이 그 사람을 망쳤어요. 술 때문에 비명횡사했지 않습니까.」

이 사건 핵심 증거인 DNA 검사와 관련하여 변호인이 신청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선임 연구원이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증인은 현재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지요. 이 사건 분석을 직접 담당했던 분은 이미 정년퇴직을 하고 나서 더 연구를 한다면서 미국으로 갔습니다. 증인은 현재 보관되어 있는 DNA 관련 자료들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DNA 감식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습니까?」
「DNA 감식을 영국에서 1985년 처음 개발되었을 당시에는 유전자 지문 감식이라고 했습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경우 1990년 11월 15일 9차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만 그때 채취한 정액이 피의자의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샘플을 보내 유전자 감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액의 주인과 용의자의 그것이 불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국과수는 1991년 말쯤에서야 유전자 분석 기법을 시작했습니다. 도입 초기에는 어느 정도 시행착오가 있었을 겁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검사법이 초보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변별력이 극히 떨어졌습니다. 현재는 DNA를 작게 잘라 전기장치를 이용해 배열 모양을 분석하는 정밀 기술 등 분석 종류가 10여 가지에 이릅니다만 당시에는 두세 가지에 불과했던 것이죠.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그때는 유전자 검사가 신기술에 속했습니다. 현재는 민간 실험실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검사는 엄연히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밝혀주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닙니다. 유전자 감식은 언제나 그 주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까지는 구별해 주지만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심리 상태 또는 신체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주지 않습니다.」
「이 사건의 경우 DNA 감식 과정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남자의 정자는 DNA 보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라붙거나 강한 자외선 빛을 쐬어도 정자의 머리 안에 들어 있는 유전형질은 오랫동안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보존됩니다.
근 2년이 지나서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청색 외투에 묻은 극히 작은 얼룩에 ‘크리스마스트리’라는 시액을 바르자 바로 그 얼룩은 정액이 틀림없는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거기서 클린턴 대통령의 DNA가 나왔지요.
이 사건에서는 손수건에 남아있는 정액의 DNA와 용의자의 머리카락에서 나온 DNA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일치하는지 여부를 분석한 것입니다.」
「증인은 DNA 감식 과정에서 실수 또는 오류는 있을 수 없다고 보십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정확하지 않은 수학적 전제에서 출발했거나 실험과 분석에 있어서도 부실한 실수가 있을 수도 있고 더욱이 무슨 선입견이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검사자가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라면 확률이 떨어질 지라도 범인일 수밖에 없다는 그릇된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DNA를 맹신해도 상관없는 것인가요? 결국 확률의 문제가 아닐까요?」
「인간들은 누구나 가끔 실수를 하지요. 하지만 검사자에게 그런 편견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검사자는 전문가로서 지극히 냉정해야 되고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이론상으로 보면 확률의 문제이긴 하지만 DNA 감식에 있어서는 그 확률은 의미가 없다고 보아야겠지요. 그게 99.99999퍼센트 확률이니까요.」
「2015년 4월의 일인데요. 미국 워싱턴 DC 범죄연구소에서는 DNA 분석이 10개월간 중지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기간 중에 100여 건의 사건이 재검토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한 검증위원회가 그곳 분석가들의 자질이 매우 떨어지고 절차가 부적절하게 진행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말입니다. 그 당시는 아직 초창기 아니었습니까.」
「글쎄요…… 그 당시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형사 사건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 하는 일은 난제 중의 난제이겠지요. 특히 어려운 살인사건에서는 말입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과학수사 기법들을 믿어도 될까요?」
「드라마는 원래 과장이 심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도 많은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확실하게 검증이 안 된 과학수사의 증거가 실제보다 더 확실한 증거로 인정되어 버린다면 무고한 사람들이 형벌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요. 과학수사의 증거라고 해도 엄밀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막 개발되기 시작한 DNA 표현형 분석이라는 기술을 이 사건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직은 불가능합니다. DNA 표현형 분석이라는 것은 유전적 증거를 가지고 복잡한 수학 알고리즘을 거쳐 3D 스캐너를 이용해서 DNA 주인의 얼굴과 신체적 특징을 예측한다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머리카락이나 눈동자의 색깔, 주근깨 발생 확률, 귓불의 유무, 광대뼈의 각도나 턱선, 코의 모양과 같은 얼굴의 형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인데요…… 아직은 아니지요. 여전히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이 남아있지요.」
「증인으로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번 기회에 많이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는 그 사건이 있은 지 몇 년 후 검찰을 떠나 지금은 서울의 대형 법무법인에서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고 문자 메시지를 남겨 놓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날 사무실로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나는 그에게 그 당시 DNA검사가 정말 과학적으로 하나의 오차도 없이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 알고 싶었고, 피의자의 자백이 계속 오락가락하였는데 그 과정과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이고, 혹시나 재심재판에서 참고가 될 만한 사항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미 옛날 일이니까. 같은 변호사로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초면이긴 했지만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내가 30년이나 변호사 생활을 했건만 턱없이 순진했던가. 그가 말했다. ‘재심 좋아하네. DNA가 말해준다고. 다 잊고 있었는데…… 꺼지라고. 당장 꺼져.’ 그는 계속 버럭 화를 내더니 먼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증인 출석 요청에도 해외출장을 이유로 불응하고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관점에 의하면 이 사건 검사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DNA 검사 결과에만 의존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검사는 기소해서 유죄 판결과 최고 형량을 받아내는 데 급급한다. 검사들은 자신이 수사 기소한 범죄가 법원에서 무죄라고 판단하는 것과 재심 사건을 엄청나게 싫어한다. 그걸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부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도무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사건기록에 의하면 피의자 김영남은 그 당시 수원지방검찰청 408호 검사실에서 이준보 검사로부터 4회에 걸쳐 피의자 신문을 받았다. 그 젊은 검사는 항상 거만하고 흥분해 있었으며 자주 호통을 치고 가끔 노려보면서 뺨을 때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지껄였다.
피의자신문조서 중에서 일부 발췌한 부분과 그 검사가 한 말 중에서 조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김영남이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부분을 뒤섞어서 문답 형식으로 임의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문 : 피의자는 경찰에서 자백을 하였는가요?
답 : 그게…… 그러니까……
문 : 분명히 자백하였다니까 이제 와서 부인하면 안 되지.
그건 검사를 모욕하는 일이야. 알겠어?
답 : 저는 시키는 대로…… 진술했을 뿐입니다.
문 : 국과수에서 한 그 감정에 대해 알고 있지요?
답 : 경찰이…… 그러나 저는 이해가 안 가는데요. 무슨 감정이라고 하였지요?
문 : DNA감정 말이야.
답 : 그렇다고 하더군요. 뭐가 뭔지? 전 모르겠습니다.
문 : 다시 한 번 확실하게 알려주지. 네놈의 DNA와 하얀 손수건에 묻은 DNA가 정확하게 일치한 거지. 그러니까 그날 저녁…… 바보처럼…… 하고 나서 손수건으로 닦고 무심결에 자동차 바닥에 버린 거지. 아! 이런! 그건 멍청한 짓이었어. 그 손수건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범인을 잡을 수 없었겠지.
지문은 잘 지웠는데 손수건은 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느냐 말이야. 그게 시트 밑에서 발견되었거든. 왜 손수건으로 닦았어? 흘러내려서 찝찝했던 거야? (이건 조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피고인은 이 말을 지금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답 : 잘 모르는…… 그럴 리가요. 아니지요. 절대로……
문 : DNA는 하느님도 어쩔 수 없어. 다 인정하라고. 속 시원히 말이야. 날 짜증나게 해봤자 이로울 게 하나도 없어.
너 바보 멍텅구리 아니야? 내가 사형을 구형할 수도 있다고. 강도강간에 강도살인, 특수감금, 사체유기까지 했으니…… (이 부분도 조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거든. 속 시원하게 자백을 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스스로 대답 하려고 하지 않아. 시종일관 눈을 맞추지도 않는단 말이야.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죄를 하는 것처럼 했지만 어쩐지 진지한 태도는 아니라고 느껴진단 말이야.
침묵. 흐느껴 움.
답 :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문 : 지난번에 거짓말 한 거지? 그런 것 같지?
답 : 용서해주십시오. 용서를……
문 : 나는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실체적 진실
을 사실대로 말하라고. 나는 진실을 듣고 싶다고.
답 : 네. 그렇지요. 제가 모르는 부분이 잔뜩 있으니까요.
문 :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어. 나하고 지금 동문서답 하고 있는 거야.
답 :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야겠지요.
문 : DNA가 있으니까 끝까지 부인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 그렇다니까. 그런데 말이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사람을 죽였으니 진심으로 반성했으면 하는 거야. 그 여자가 무슨 잘못이 있어. 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지금쯤 결혼하고 애낳고 행복하게 살텐데.
답 : 그렇지요. 그 여자가 불쌍하지요. 그건 못된 짓이었어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문 : 그래. 인정한 거야. 다시 부인하지 마. 특히 법정에서 부인하면 판사한테 찍혀. 판사한테 찍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지.
그러니까 순순히 네, 네. 하라고. (이 부분도 조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답 : 제가 뭘 알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문 : 김상만과는 잘 아는 사이인 건 맞지?
답 : 그렇습니다. 함께 어선에서 일했으니께.
문 : 그래서 존경하는 형님으로부터 배운 게 아니겠어. 술 마시고여자 강간하는거.
답 : 묵묵부답
문 : 그날 어떻게 했었지?
답 : 그날 저녁 배에서 내려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문 :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술은 가끔 사람을 미치게 하지. 그게 문제인 거야.


4. 변호사가 재심재판에서 피고인 신문을 하였다.
작은 키에 다소 헐렁한 푸른 수의를 입은 피고인은 단정하게 머리를 깎았고 푸르스름하게 면도를 한 턱이 가끔 씰룩거렸다. 머리는 벌써 완전한 백발이다. 그러나 실제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잔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그렇게 떨 필요는 없습니다. 겁먹지 마세요. 진정하십시오. 여기는 법정이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제대로 하십시오.」
「그래도 떨립니다. 모든 것이 두려워요. 재심이 성공해서 석방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도 두렵고 실패해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도 두렵지요. 진정시키기가……」
「지금은 너무 기다렸던 순간이 아닌가요.」
「……」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정하시기 바랍니다. 냉정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묻겠습니다. 피고인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죄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는가요.」
「그렇지요. 어떻게 그걸 꿈속에서라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강도강간, 특수강도, 강도살인 아닙니까. 특히 강도살인 때문에 사형까지 받았습니다.」
「피고인은 수사 과정에서 계속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었는가요? 다시 말해서 범행을 시인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냥……」
「그냥…… 나 때문에 고생고생하는 거 보니까 미안했지요.」
「그래도 그렇지?」
「저에겐 알리바인가 뭔가가 없다고 했고 DNA가 있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었……」
「피고인은 경찰에서 자술서를 여러 번 썼는데 거기에 자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 자술서를 기억하십니까.」
「네. 똑똑히 기억납니다. 제가 뭐가 뭔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니까 형사님이 자세히 일러주어서 그대로 썼습니다.」
「그런데 왜 울고 하였는가요?」
「제 처지가 한심해서 그냥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계속 구속된 상태에서 네가 한 게 맞아, 틀림없다니까, 빼도박도 못하는 거야, 어서 자백하라고, 그러고 나서 편히 쉬라고 하니까 기분이 어땠어요?」
「정말이지 말입니다. 계속 내가 했다고 하니까, 꼼짝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고 하니까 정말 제가 한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때 수사 받으면서 경찰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하지는 않았나요? 때리고 발로 짓밟고 말이지요.」
「그런 건 없었습니다.」
「수사 받을 때마다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가요?」
「아침 9시부터 밤늦게까지 받았지요.」
「그래도 견딜만 했는가요?」
「계속 머릿속이 뜨거워졌지요. 머리가 멍해지고 새하얗게 되었는데 한 번은 그만 바닥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자포자기 했단 말인가요?」
「그렇지요. 일종의……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되지요. 끝까지 버틸 것을 하고. 자백하지 않으면 수사가 지겹게 수없이 반복되고 하니까 얼른 끝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배에서 내린 다음 그 친구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요? 그런데 술을 얼마나 마셨나요?」
「둘이서 소주 6병쯤 마신 것 같습니다.」
「안주는 뭐였어요.」
「돼지고기를 크게 썰어 넣은 김치찌개와 맹물이었습니다.」
「그 음식점 이름을 기억하나요.」
「자주 가는 단골집인데 간판도 없어요. 할머니가 오랫동안 혼자서 했어요.」
「술 마시고, 그러고 나서.」
「우린 헤어졌지요. 하루 종일 바다에 있었으니 온몸이 뻐근하고 술을 마셨으니 잠이 쏟아졌지요.」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그날 저녁 궁평항에서 술을 마신 다음 매항리가 바라다 보이는 남양만 쪽 바다의 해안가로 가서 범행을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그날 저녁 거기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진술하였는가요?」
「경찰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거길 갔으니까 DNA가 남아있는 거라고 하면서.」
「공범인 죽은 친구가…… 그러니까 힘이 센 김상만이 남자를 끌어내서 방망이로 뒤통수를 치니까 기절해버렸고 그러고 난후 피고인이 여자를……」
「저는 모르는 일이지요.」
「피고인이 궁평항으로 온 게 언제였는가요? 그 사건 당시를 기준으로 말입니다.」
「전 원래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고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부터 목포에서 계속 뱃일을 했습니다. 군산과 장항에서 몇 년간 어선을 탔고 가두리 양식장에서도 일했습니다.
궁평항에 온 것은 그 1년 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궁평항에서 중국 쪽으로 밀항할 수 있다고 해서 그 기회를 엿보려고 온 것이지요.」
「중국에 밀항해서 무얼 하려고요.」
「외국에 한 번도 못 가봤으니까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중국은 큰 나라이니까 거기 가면 돈도 벌고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잡았나요?」
「기회는 없었습니다. 공해상에서 중국 쪽 어선과 바꿔 타야 하는데 중국 쪽에서 돈을 엄청나게 부른다고 하더라구요.」
「공범인 그 친구는 누구인가요?」
「그는 화성시 마도면 출신이지요. 저보다 3살 위여서 친구가 아니라 형님 동생하고 지냈지요. 한때는 집에서 김양식장을 크게 했는데 잘못되어서 망했다고 하더라구요. 저하고 그때 석 달째 함께 배를 탔습니다. 해병대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절도와 강도 때문에 소년원에 갔다 온 전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전혀 몰랐지요. 그걸 제게 자랑할 일이 못 되지요.」
「피고인은 이 사건 이전에 전과가 있었는가요?」
「목포에서 술먹고 패싸움을 하다가 폭력으로 입건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속되지도 않았고 바로 나왔습니다.」
「그 당시 재판받을 때 국선변호인이 있었지요. 그때 국선변호인이 뭐라고 하던가요?」「국선변호인은 제가 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난감한 표정을 짓더라고요.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을 해야 형이 줄어든다고 하면서 만약 잘못되었다가는 사형이 선고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강도살인죄는 무서운 범죄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꼭 따지고 싶으면 사선을 선임하라고 했습니다. 국선으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사선이 뭔지도 몰랐고…… 돈도 없었습니다. 국선이나 사선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법정에서 처음에는 시인했다가 나중에는 번복했고 다시 시인했습니다. 왜 그랬나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번복하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법정에 그 형사가 나와서 들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사받을 때 형님처럼 대해주었거든요. 그리고 변호사한테 야단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변호사가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 두 번째 면회를 왔었는데 그때 시인하라고 했고 그러면 자기가 잘 처리하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들이 재판을 하면 알아서 할 줄로 알았습니다.」
「형사들이 검찰에 가서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시 똑같은 수사를 받을 거라고 했나요?」
「그랬습니다.」
「사형 선고가 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는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끝까지 싸워야 하는데 제 곁에는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걸 알게되었지요.」
「교도소에 있으면서 왜 반성문을 쓰지 않았는가요. 그걸 쓰면 가석방에 도움이 될 텐데요.」
「저는 이 사건에서 반성할 게 없습니다. 오히려 무고한 사람에게 무기징역을 때리고 지금까지 가둬놓은 국가가 반성을 해야 합니다. 제가 뼈저리게 반성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자신이 너무나 한심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때 피고인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렸다.
「진정하시기를…… 가족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형제자매는 없습니다. 제 처는 몇 년 전에 죽었습니다. 계속 속병을 앓고 있었는데 죽어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답니다. 제 딸이 편지에 그렇게 썼어요.
형편 때문에 차일피일하면서 결혼식도 못 올렸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 때문에 맨날 떨어져 살았습니다. 제가 형이 확정되고 나서 편지를 보냈지요.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잊어버리고 재혼하라고 했지요. 답장은 없었습니다.」
「딸과는 계속적으로 편지 왕래가 있었습니까.」
「지금까지, 화성경찰서에서 구속되면서부터 재판을 받는 동안 구치소에서 2년, 재판이 확정되고 나서 교도소에서 18년 동안이나 면회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고…… 편지도 몇 년 전부터…… 그러니까 제 애미가 죽고 나서 딸애한테서 처음 왔습니다.
제 애미가 죽을 때쯤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딸애가 두 번째 편지에서 그렇게 억울하다면 재심을 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피고인에게 영치금을 넣어준 사람도 없었겠네요.」
「그렇지요. 단 한 번도 영치금을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재심 말인데요. 교도소에서 누구든지 재심을 신청해보라고 하지는 않던가요.」
「모두들 어림없다고 하면서 꿈을 깨라고 했습니다. 그게 너무 어렵다고…….」
「피고인은 대전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리고 해서 징벌방에 구금된 일이 있었나요.」
「무기징역이 확정되고 처음 대전교도소로 갔을 때 일입니다. 너무 억울했지요. 제가 무기징역이라니요. 처음에는 사형이었습니다. 판사가 어떻게 사무적이고 냉정한 어조로 사형을 선고할 수 있을까요. 판사가 신이라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폭발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무서운 힘이 생겼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벽을 발로 차면서 난동을 부렸습니다. 저를 말리는 감방 식구들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물어뜯고 죽도록 두들겨 팼습니다.
보름 동안 독방에 갇혀 지내니까 사람이 그립기 시작했고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독방에는 자살할 기구가 없었지요.
그 후 현자이신 선생님이 계신 방으로 갔습니다. 그분은 저를 무식하다고 괄시하지 않았고 계속 저를 가르쳤습니다.」
「교도소에서만 18년간이나 수감되어 있었는데 어디 어디 교도소에 있었는가요.」
「처음에는 대전교도소에 5년간 있었습니다. 그 후 전주, 순천 등지로 옮겨갔습니다. 전주시 평화동에서 제일 오래 있었습니다.
매일 완산칠봉의 일곱 봉우리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우린 전주교도소를 ‘전주대학’이라고 하고 출소자들을 ‘전주대 동창생’이라고 합니다. 거길 떠날 때는 정말로 정든 고향을 떠난 것 같아서 눈물이 났습니다.」
「교도소 생활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나요.」
「일단 교도소는 최소한 의식주가 해결됩니다. 빈손으로 들어왔다가 빈손으로 떠나는 곳이기 때문에 바깥 사회와 같은 치열한 생존경쟁은 없습니다. 하지만 교도소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수없이 들어야 하는 많은 규칙들로 죄수들을 옭아맵니다. 지옥도 아니고 천국도 아닙니다. 그냥 밑바닥입니다.
저는 작업을 하기 위해 출역을 하면서 이왕이면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목공, 페인트, 영선, 염색, 양화, 양복 등 닥치는 대로 기술을 배웠습니다.
특히 작업장의 필수요원이 되면 이리저리 떠밀리며 구박받지 않고 지낼 수 있기 때문에 목공 일을 열심히 배우면서 제일가는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가 시간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때는 뭘 하죠.」
「사형수들은 죽음만 면하면 원이 없다고 생각해서 쓸데없이 재심청구서를 쓰고 탄원서를 쓰는 등 거기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막상 무기수들은 인생이 너무 막막해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도소는 소지할 수 있는 책을 제한하는데 저는 다 헤진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거의 외울 정도로 수십 번 수백 번 읽고 또 읽으니까 그제서야 하느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두운 동굴 속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누가 피고인에게 성경책을 권하였는가요.」
「거기는 사회의 축소판이에요.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났습니다. 재소자들은 함께 지내는 동안 서로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좁은 공간에서 함께 부대끼며 사니까요.
대전교도소에는 사상범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전교도소는 옛날부터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전쟁 포로, 남파 간첩, 사상범이 많이 수감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사상범으로 무기징역을 받았는데 훌륭한 인품을 가졌고 동양 고전에 해박했습니다.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재소자에게 지급되는 두꺼운 노트에 그 가르침을 받아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트에 성경 말씀도 수없이 필사하였는데 그 노트들이 30권이 넘습니다.
그분은 자신은 완전히 한문으로 된 동양 고전을 읽으면서 저에게는 성경책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쉽게 읽을 수 있고 많은 지혜가 담겨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많이…… 성경을 읽었단 말씀이지요. 그래서 탄원서 여기저기에 성경 말씀을 많이 인용했군요. 전 성경을 모르니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수백 번 읽다니 지겹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읽을수록 새롭고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성경을 읽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면 진즉 죽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면서 자살 충동에서 벗어났습니다. 굶어서 죽으려고 여러 번 굳게 결심을 하였거든요. 하지만 어떤 고난이 있어도 신이 인간에게 준 삶이라는 선물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언제쯤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나요.」
「저는 오직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지만 기독교는 믿지 않습니다.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만나기만 하면 무조건 회개하라고 설득합니다. 진실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그들은 진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한다는 말씀이 ‘잠시 쉬었다가 나간다고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만 20년이란 세월은 잠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길지 않습니까. 남의 일이니까 한가한 말씀을 하신 거지요.
그리고 신부님은 저를 의심의 여지 없이 죄지은 사람으로 단정하고 법 앞에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고 설교합니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기만 바라지요. 그런 다음에는 하느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이 기뻐하신다는 거죠.
그들은 언제든지 남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럼도 모르는 채 공공연히 기도를 드립니다.」
「피고인께서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요.」
「하느님은 분명히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어리석다고 하지만 하느님의 뜻과 의지를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재판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더 늦기 전에 진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검사가 반대신문을 했다.
「다른 재심 사건을 보면 대부분 수사 과정에서 자백을 받기 위하여 협박과 폭행, 고문을 했다는 것인데, 이 사건에서는 그런 건 없었다는 거 아닙니까. 피고인 맞지요.」
「그렇습니다.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지만 폭행이나 고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면 경찰의 교묘한 신문은 폭행이나 고문보다 못하진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피고인과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김상만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이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1년 동안이나 함께 일했는데.」
「그 어선은 늙어서 바다에 나갈 수 없는 노인의 배를 형님이 빌린 거였습니다. 채낚기를 하려면 혼자 할 수 없으니까 저를 부른 겁니다. 형님이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은 고용된 입장에서 주인이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했습니다.」
「그때 무슨 배를 타고 어업을 했나요.」
「250마력의 디젤 엔진을 단 5톤 낡은 목선을 타고 나가서 채낚기 어업을 했습니다.」
「피고인은 월급이랄까, 수입은 어땠나요.」
「월급은 없습니다. 수입은 그날 잡은 고기를 어판장에서 팔고 나서 70대 30으로 나눴습니다.」
「피고인은 목포에 동거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왜 혼자서 올라왔는가요.」
「일시적으로 올라왔습니다.」
「동거녀와는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지요. 매일 많이 싸웠지요. 그래서 중국으로 멀리 도망치려고 한 거 아닙니까.」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런 환경에서 살다 보니까 많이 싸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자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진 게 아닌가요. 굴욕감이라든가 증오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 나쁜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을 무기로 여성을 굴복시켜야 되는 거 아닙니까.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싶었겠지요.」
「검사님께서 지나치십니다.」
「피고인은 그 무렵 여자와 성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나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거의……」
「그러니까 술 마시고 나서 여자 생각이 간절했겠지요. 그런데 형님이 한번 하라고 부추긴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한편의 괴상한 소설입니다.」


5. 그 사건이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나서 해안가 갈대밭에서 여자의 사체가 발견되자 수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때 화성경찰서 강력계 형사가 다 쓰러져 가는 농가 빈집이었던 김영남의 집으로 찾아왔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만 경찰서에 가자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죽은 김상만에 관해서 몇 마디 물어볼 것이 있다는 것이다.
강력계 형사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궁평항의 불량배, 전과자를 중심으로 조사를 벌였다. 그는 절도와 강도로 두 번이나 소년원을 다녀온 적이 있고 폭력 전과가 세 번이나 있었는데 한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잡종 진돗개 두 마리를 키우면서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건이 있은 지 몇 달 지나서 바다에 낚시를 갔다가 사고로 죽었던 것이다.
거기는 그쪽 사람들만 아는 숨어있는 명당 낚시터였다. 하지만 바위 틈새 덤불에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는 해안가 절벽 아래 큰 너럭바위에서 낚시를 하다 미끄러져 절벽 발치로 떨어졌고 사망 원인은 두개골 파열이었다. 그때 시체 주변에서 그가 키우던 개 두 마리가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으르렁거리면서 배회하고 있었다.
국과수의 시체 부검 결과 그때 술을 많이 마신 것으로 판명되었고 그래서 실족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강력계 형사들은 그가 죽었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배제했다가 뒤늦게 이 사건의 범인이 두 명이고 김영남이 그와 함께 배를 타는 친구 사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경찰서로 데려간 것이다. 그는 그 당시 다른 어선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DNA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정식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

1심 재판이 시작되고 나서 1회 공판기일에서 피고인은 기소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3회 공판기일에서는 범행을 부인했고 연이은 공판기일에서 부인을 취소했다. 그러니까 피고인의 진술은 자백과 부인과 다시 자백으로 변했던 것이다.
수원지방법원은 그 당시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DNA 감정에 대해 과학적 증거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고 피고인의 자백의 경우 전후사정을 종합해서 판단하면 피고인의 진술 번복은 매우 불합리한 변명으로 볼 수밖에 없고, 특히 피고인의 자백이 사건 발생으로부터 대략 6개월이 지난 후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어서 세세한 부분까지 객관적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미미한 부분에서 자백이 어긋난다고 해서 자백의 신빙성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피고인은 그 후 항소해서 일관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여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상고했으나 기각되어 유죄판결이 확정되었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 사건 형량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세 사람의 판사들이 여러 의견을 개진했다. 이 살인사건은 유일한 결정적 증거가 DNA 조사 결과일 뿐 다른 보강 증거가 없다는 점이 조금은 께름칙하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그 결과가 뒤집어진다면? 나중에 진범이 나타나면? 치명적인 혹은 치욕적인 오판으로 영원히 회자될 것이다. 피고인의 태도를 보면 자백을 부인했다가 다시 번복하기도 했지만 피고인의 눈빛과 태도가 작위적이지 않고 어딘가 진정성이 있어보였다. 그는 도저히 흉악범으로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순박해보였다. 더욱이 전과가 없는 초범이었다.
누군가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다’라고 했지만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인데 사형은 국가의 폭력을 제도적으로 용인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면 사형이 타당한 형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사형의 집행은 거의 순식간에 끝난다. 그 짧은 순간에 사형수가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고 반성을 할 리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피해자를 원망하고 증오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무기징역을 선고하면 평생 감옥에 살며 참회하고 반성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엄연히 DNA 증거가 존재하는데 무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하기로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
재심재판에서도 DNA 감정 결과는 절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수원지방법원 형사부는 역시 DNA 감정은 신뢰할 수 있고 피고인이 자백과 번복을 반복하긴 했지만 피고인의 자백을 믿을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DNA 재감정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기각하였다. 그러자 피고인은 다시 서울고등법원에 항소하였고 서울고등법원은 제1회 공판기일에서 DNA 재감정을 실시하기로 하면서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다음 공판기일을 추정하였다.
DNA 재감정은 대검찰청 과학수사부에서 맡기로 하였다.

범죄 수사에 있어서 객관적‧과학적인 증거를 제시한다는 DNA 감정이라는 새로운 수사 방법은 외국에서는 1985년 처음 도입되었지만 1990년대 초반쯤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역시 1991년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도입 당시의 DNA 분석은 조금은 불확실해서 타인과 일치할 확률이 약 1000명에 1.2명일 확률로 나왔다. 다시 말하면 833명에 1명에 해당할 정도로 정밀도가 낮았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 당시 화성시의 인구가 168,217명이고 남성이 82,839명일 경우 화성시에서 이에 해당할 남성은 약 100명일 확률이었다.)
그러나 2003년에 개발되었고 나아가 2006년에 개량된 새로운 DNA 감정은 DNA형이 일치할 확률은 4조 7000만 명에 1명의 확률일 만큼 그 정밀도가 탁월하게 향상되었다. 다시 말하면 지구 상 인구가 약 70억 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므로 적어도 지구상에서 DNA형이 일치할 확률은 없게 되는 것이다.
항소심은 이러한 항소이유를 받아들여서 재감정을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항소심 재판장은 재판을 받는 피고인의 지극히 순박하고 성실한 모습에서 감명을 받았고 그의 온화하지만 맑은 눈에서 신의 의지를 읽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특수강도 강도강간 강도살인을 저지른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흉악범이라는 선입견이 사라졌다. 그래서 그의 말이 진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유일한 핵심증거인 DNA 검사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항소이유서를 쓰면서 일본 판례를 검토했고 도치기현 아시카가 시 사건을 인용했던 것이다. 1990년 5월 아시카가 시 파천코 가게의 주차장에서 4세 소녀가 행방불명 되었는데 다음 날 소녀의 사체가 근처 하천 부지에서 발견되었다. 1심은 피고인의 자백과 DNA 감정을 믿을 수 있다고 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하였고 그 후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면서 항소, 상고했으나 전부 기각되었다.
2008년 재심재판 과정에서 피고인의 DNA와 소녀의 옷에 묻어있던 범인의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6.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어서 날씨는 추웠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만큼 겨울은 가까이 오네요.
전남 순천시 서면 선평리 430 순천교도소
호남 고속국도 서순천 나들목에서 시내로 접어들면 4차선 도로는 순천지방산업단지까지 이어지고 고물 SUV는 골골거리며 달리다가 교도소 정문 공용주차장에서 멈췄다. 서울에서 여기까지 꼭 4시간 이 걸렸다. 네비게이션 덕분에. 요즘 우스개 소리가 있지 않은가. 남자는 세 사람의 여자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어렸을 적에는 엄마의 말을 잘 듣고 결혼해서는 아내의 말을 잘 듣고 운전할 때는 네비게이션에 나오는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차에서 바로 내리지 않았다. 뭔가 나를 가로막고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동차에 망연히 앉은 채로 오락가락하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옛날에, 그러니까 1970년대만 해도 나는 서울에서 밤늦게 보통 급행열차를 타면 아침에 순천역에 닿게 되고 다시 터덜거리는 고물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몇 시간씩이나 달려 고흥읍에 갈 수 있었다. 버스가 벌교읍 시외버스터미널을 경유해서 보성군과 고흥군의 경계인 깔딱 고개를 힘겹게 돌고 돌아서 겨우 올라가면 ‘고흥 25km’라는 사각형 시멘트 기둥으로 된 이정표가 서 있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외롭게 서 있다. 나는 한 숨을 쉰다. 고흥읍에 내려서도 남쪽 바다 쪽으로 삼십 리를 더 들어가야만 한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왜 고향이 남쪽 끝 바닷가란 말인가.
버스는 자갈길에서 몹시 덜컹거렸다. 그때마다 온몸이 무작정 들썩거리며 토할 것 같았다. 그러나 열린 버스 창문으로 벌써부터 바다 내음이 바람에 실려 들어왔다.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었다.
서울에서 순천을 거쳐 고흥까지의 짧은 여행은 언제나 흥겨운 여행길이 아니었다. 낯선 느낌이 드는 오래된 길과 시골의 풍경, 정다운 고향 사람들의 익숙한 사투리와 질척한 삶의 맛을 음미할 여유는 없었다. 그러므로 좋았던 옛 시절을 회고할 일도 없었다.
내게 그런 시절이 있기는 했겠는가. 삶의 표류. 균열된 자아. (지금쯤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으면 더 좋았을) 우울한 기억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업무상 내려왔다. 그것도 도저히 가망이 없게 보이는 재심 사건을 맡게 될 모양이었다. 그래서 순천교도소에 수감 중인 재심 청구인을 접견하러 온 것이다.
살인범의 기결수가 20년이 지나서 새삼스럽게 재심재판을 하겠다고. 그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세월이 그렇게 흘러 버렸는데. 20년 동안이나 케케묵은 소송기록을 아무리 뒤져봐도 가능성은……? 하지만 한 번 만나볼 수밖에. 20년을 감옥에 갇혀있었던 인간. 얼굴을 보고 몸짓을 보면, 숨결을 느끼고 눈빛을 바라보면 그의 고결한 영혼과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인간의 추악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될 것인가? 그의 간절한 언어 속에서 한 줌의 진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말을 듣고 음미하고 느끼고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그가 수줍어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것을 소송기록을 살펴보고 나서 이미 알고 있다. 그가 품고 있는 끔찍한 기억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편안히 앉아서 끝까지 다 말하도록 내버려 둬야할 것이다. 나는 섣불리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중단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흐르면 안 될 것이다. 그가 말을 계속하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가 ‘내가 하늘을 우러러보고 주님이 아래를 내려다보실 때 머지않은 날 나는 왕관을 쓰리라.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말하면…… 내가 그때 무신론자인 것처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요. 하느님이 도와주시겠지요.’라고 맞장구를 쳐야만 하리라. 그런데 그가 독실한 기독교도인지 믿을 수가 있을까. 탄원서에는 하느님과 성경 말씀을 많이 쓰긴 했는데…… 무신론자들이 항상 하느님을 더 많이 들먹인단 말이지. 그러나 패배주의적 편견과 몰이해와 오해 같은 것을 내 속에서부터 몰아내야 한다. 그를 의심하면 안 된다. ‘그 여자의 얼굴도 모르는데 어떻게 용서를 빌 수 있나요’라고 말했지 않은가. 그 말에는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 묻어있지 않은가. 기록을 잊어버려라. 그를 완전히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조금도 안 믿는 그런 모순적인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진실이 있다고? 그러니 진실을 알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그때 김 변호사에게 불면증과 자기 살해의 충동을 차마 말하지 않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잘한 일이다. 그걸 어떻게…… 나의 우울과 불안 때문에 비관주의 혹은 패배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을 경계해야 되리라. 그에게도 나에게도 지금은 절대적으로 낙관주의가 필요하다. 그는 20년을 기다렸는데. 그에게 쓸데없이 냉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깥 사람의 온기가 얼마나 그리웠겠는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면회가 없었다고 하지 않은가. 그렇게 접견을 끝마쳐야 하리라.

열흘 전쯤이었다.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김연수 변호사가 전화를 했던 것이다.
「형! 오랜만이야! 정말이지! 그동안 통 연락을 못 해서 죄송하지요. 그런데 소설은 잘 돼가고 있나요? 그런데 말이지요…… 변호사가 본업에 충실해야지 무슨 소설을 쓴다고 끙끙거리세요. 그게 돈 되는 게 아니잖아요.」
「뭐, 그렇지. 내가 미쳤다고 하면 너무 심하니까 어리석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용건은……」
「무기징역을 받은 인간이 재심청구를 해달라고 탄원서를 보냈어요. 뭐, 아무리 생각해 봐도 DNA가 잘못됐다고 하면서 말이에요.
우리 입장에서는 탄원서를 냈으니까 무작정 무시할 수도 없어요. 위원회에서 토의 결과 한 번 청구를 해보기로 했지요.」
「그게 말이야…… 재심이란 게…… 하늘에서 별 따기 아니겠어.
그 사건 있잖아? 진범이 경찰에 체포됐고 자백도 받았는데 검찰에서 그 진범을 무혐의로 처리하면서 영장도 신청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진범이 자수하거나 자백을 해도 왜 사건이 뒤집히지 않는 걸까? 검찰은 왜 그 모양이야. 도대체 알 수 없다니까?」
「뻔하잖아요. 진실을 말하자면…… 검사가 뭘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검사는 수사 전문가이고 법률 전문가입니다. 검사가 악마는 아니라는 거죠.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죄는 검사의 입장에서는 치욕이거든요.
다시 말하면 피고인이 무죄라는 사실이 자신이 평생동안 추구해온 검사는 악을 척결한다는 신념과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무죄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현실적인 측면이 있는데요…… 무고한 범인을 잡아서 수사, 기소한 경찰이나 검사는 법적, 도의적 책임을 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한 거죠.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검사까지…… 그렇단 말이지. 그래도 피의자들은 검찰은 다를 거라고 생각할 텐데.」
「오히려 검찰이 문제예요. 피의자가 경찰에서 한 자백 진술과 객관적 사실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면 그걸 파고들어 검증해야 하는데 그냥 마구잡이로 기소를 해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경찰처럼 노골적으로 고문은 안 하겠지만 대부분 경찰의 수사내용을 그대로 시인하라고 윽박지르거든요.」
「검찰을 얼마나 원망하겠어……?」
「그러니까…… 수사기관의 모진 가혹 행위 끝에 허위자백을 하는 등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은 딱 정해져 있어요. 사회 밑바닥에 사는 빈곤층, 가출 청소년, 육체적 정신적 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가 많아요. 그들은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자신을 충분히 방어하지 못하니까 이를 약점으로 삼아서 악용하는 거죠.
그래야 범인 검거 실적을 올리고 특진을 할 거 아닙니까.」
「그래도……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대명천지에…….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 과정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 감정에서, 법원의 재판에서,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면서 누구 하나 양심이 있었다면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제동이 걸렸을 거 아닌가.」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사법 시스템이 그렇게 돼 있다구요.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는 거죠.
경찰의 처음 수사가 아주 중요해요. 제가 검사 출신 아닙니까. 그런데 검사는 우선 경찰의 수사자료에 의존하고, 1심 판사는 검사가 제출한 서류에 의한 증거에 의존하고, 2심 판사는 사건을 판단함에 있어서 심리적으로 1심 판결에 어느 정도 제약을 받습니다.
피고인들은 최후심인 대법원에 기대를 걸지만 그건 어불성설이에요. 이미 소위 말하는 실체적 진실에 대한 판단은 끝나버렸고 법리 적용의 정당성 여부만 쟁점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면…… 내가 뭘 해야만 되지?」
「여름에 재심청구는 했고 곧 결과가 나올 모양입니다. 법원에 알아봤더니 그러더라고요. 만약 재심 결정이 나오면 검찰에서 항고는 안 할 거라고 봐요. 인면수심이 아니라면 무슨 염치로……」
「김 변호사님! 사랑하는…… 너무 낙관하는 거 아니에요. 형사소송법 제420조 재심사유를 살펴보라고…… 빠져나올 구멍이 없어요.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 아니겠어…… 낙타는 오역이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거야.」
「그렇긴 해요. 재심사유 중에서 그나마 제5항이 만만해요.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 또는 면소를 또는 원판결이 인정한 죄보다 경한 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라고 규정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DNA가 있다고 했는데 그게 되겠나?」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알아보니까 초기 DNA 검사는 약간 문제점이 있어요. 일본 판례가 있더라고요. 거길 파고들어야 할 거예요. 재심 심리에서 뒤집어엎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형님이 잘해보세요. 형님은 끈질기기로 소문이 났잖아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사건은 형님밖에 없어요. 형님이 나서면 법원도 상당히 긴장할 거예요.」
「난 지금 반쯤은 은퇴한 상태야. 정신적으로 고갈되어있지.」
「청구인은 뭘 믿고 있는지…… 아마 하느님을 믿고 있는 거 같아요. 잘 아시다시피 저야 무신론자이지요. 형님은 독실한 무신론자이구요. 그런데 탄원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뭔가 끌리는 데가 있어요. 구구절절 옳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래서 한 번 부딪혀보기로 한 거예요. 제가 위원장이니까 결심한 겁니다.」
「그런데, 하필 날…… 법률구조단 소속 변호사가 있을 거 아닌가. 젊은 변호사를 시키지 그래.」
「그들도 도저히 가망 없다고 고사했거든요.
피고인은 처음에 법률구조공단과 국가인권위원회 지역사무소에 간절한 편지를 보냈지만 ‘재판이 끝나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라든가 ‘정 억울하면 재심을 신청하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우리라도 나설 수밖에 없어요.
형님이야…… 사건도 없이 마냥 놀고 계시잖아요. 다들 바쁘다네요. 소설은 시간 날 때 쓰시면 될 거고…… 그리고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 소설의 재료가 될 수도 있겠지요.」
「흐흐흐…… 소설의 재료가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저 그렇게 있으니까 맡아도 무방하겠지. 그러나 내가 중증 우울증인건 알고 있겠지?」
「갑자기 우울증이 왜 나오죠?」
「이건 비밀이 아니야. 오래전부터 항우울제 약을 먹고 있거든. 혹시 내 우울증과 불안증이 그 사람에게 전파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꺼져버릴 것 아닌가. 자포자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
「20년간을 철창에 갇혀있었으니 그쪽이 오히려 심한 우울증 아니겠어요? 우울증 환자끼리 잘해보지 그래요.」
「잘해보라고……?」
「그런데, 죄송하지만 실비 외에 보수는 없어요. 우리 사정 잘 아시잖아요. 그 대신 관련 사건의 기록 일체는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 사람 돈도 없고 빽도 없다잖아요. 오직 하느님만 믿는 모양이에요.」
「엄청나게 선심 쓰시네. 그런데 하느님이…… 그런데 말이야 그 기록이란 게 엄청 복잡할 텐데.」
「죄송해요, 죄송……. 경찰과 검찰의 수사기록, 재판 관련 기록이 어림잡아 1,000페이지는 될 거예요. 형님 성질에 그걸 끝까지 몇 번이고 꼼꼼하게 읽을 텐데. 그러나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신경 쓸 건 하나도 없어요. 어차피 잘 안 될 거예요. 청구인에게는 그 점을 이미 못 박아 두었습니다.」
「알았다고. 그렇게 해보지. 먼저 교도소로 면회 가서 하루빨리 무기수를 만나봐야겠지. 내가 무신론자인 게 후회되네. 이럴 때는 하느님에게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데…….」

이제 계절의 여왕인 5월이다.
온갖 꽃이 만발하고 따스한 햇빛은 눈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나 눈부시게 빛날 것이다. 봄의 희망이 온 사방으로 퍼지고 있지 않은가. 고속도로가 쭉 매끄럽게 뻗어있다.
나는 약간 과속으로 달리면서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대검 과학수사부는 DNA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내온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오! 기적이! 나는 형사부 재판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피고인은 무죄입니다. 이 사건 당시 DNA 감정은 증거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피고인의 자백은 DNA 감정 결과에 짜 맞추기 위한 허위인 것이 명백합니다. 피고인은 오랫동안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나서 참여 사무관에게 무죄판결을 공시하도록 지시할 거라고, 상상했다.
나는 김영남의 수척한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활짝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겠지. 그래, 그렇지. 실컷 울어야지, 실컷 울라고. 20년의 세월이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갔지 않은가.


나는 자기혐오의 굴레를 벗어났고 그러므로 삶에 대해, 인간의 생명력에 대해 충만한 경외심을 느꼈다.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제서야 눈물이 내 뺨을 타고 내리는 것을 알았다.
작성일:2024-03-28 14:47:56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