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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무진기행, 그 후 (4)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4-02-29 13:31:38
조회수
30
10. 그는 손에 나무토막 한 조각과 칼날이 예리한 접이칼을 들고 있었다.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에는 찢어진 흉터와 작은 흉터들이 나 있다. 요즘 손에 상처를 입으면서까지 소목장 목공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목공방에는 나무 냄새가 났다. 작업을 위해 쌓아둔 건조된 목재들, 작업하는 과정에서 잘려나간 나무토막들, 수북이 쌓인 대팻밥, 톱밥 먼지가 널려있다. 그러나 작업대 뒤 연장 선반에는 공구 수백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리고 가끔 낚시를 하며 계절에 따라 고기를 잡았다.
거실에 달린 달력에는 밀물과 썰물 시간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낚시를 하러 나갈 수 있는 날을 알기 위해서였다.
그가 말했다.
「목이 좋은 곳에 가면 고기들이 많이 달려든다네. 내가 잘 잡지는 못하지만 녀석들이 딱 물고 늘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지.
그런데 그것들이 영리해서 낚시의 갈고리가 느껴지면 바로 뱉어버리지. 아주 영리하다니까.」
「낙지 잡는 기술을 저에게 전수해줄 수 없나요? 낚시보다는 그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아직 초가을이니까 낙지가 제대로 클 때가 아니라네. 얼둥이라고 하는 중낙지 정도가 많을 거야. 곧 11월이니 알이 굵어지겠지만.
큰 놈은 4~5자 정도 될 거야. 그것들은 진흙탕 구멍 속에 들어가 겨울에는 틀어박혀 있으면서 구멍 속에 새끼를 낳지. 그런데 새끼가 어미를 잡아먹는다네.
낙지는 고작 1년생이야. 부화한 새끼들은 어미를 먹으면서 대를 잇는 거지. 어차피 죽을 목숨, 새끼에게 주는 셈이라네.
그런데 암낙지는 교미 후에 수컷 낙지를 먹기도 한다네. 혹은 교미에 실패해도 힘이 센 놈 쪽에서 약한 놈을 잡아먹지. 특이한 종족 보존 본능을 가진 녀석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러니 낙지 맛의 엄숙함을 다시 생각해보게나.」
「70~80년대에는 낙지가 지천이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지금도 낙지가 많이…… 낙지 잡는 기술을 말씀해주세요.」
「낙지잡이 선수들은 우선 부럿이라고 부르는 숨구멍을 찾지. 부럿을 찾으면 발로 슬슬 주변의 뻘을 밟아 주는 거야. 낙지가 숨을 죽이고 있는 자리는 공간이 생겨서 물이 차게 되거든. 그러면 낙지의 은신처를 파악한 후 삽질을 하기 시작하지. 낙지잡이 전용 삽도 있고. 보통 삽과 비슷한데 날이 훨씬 작아. 빠르게 찐득찐득한 뻘을 파기에 적합하다네.」
「그렇군요?」
「낙지가 욕심이 많고 힘이 세지. 그렇게 힘이 좋으니까 게와 새우, 조개를 잡아먹는다고. 그리고 낙지는 물고기치고는 머리가 좋고 꾀가 아주 많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빠른 시일 내에 직접 시범을 보여주겠네. 장도리에 한 번 가자고. 그곳 뻘밭은 여전하니까.」
「괜찮으시겠어요? 무릎과 허리 말입니다. 깊은 뻘밭에 들어가시기에는……」
「책상물림 샌님보다는 내가……」
낙지는 봄가을 두 번 부화한다. 봄에 낳은 녀석들이 더위를 피해 바다에 나갔다가 가을에 갯벌로 돌아온다. 엄청나게 먹어서 몸을 불린다. 그리고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낳는다. 보통 세발낙지란 것도 이른 봄과 이른 가을에 있다.
그런데 잔 낙지가 세발낙지이고, 그게 중낙지가 되었다가 가을이 더욱 깊어지면 대낙지가 된다.
그는 다시 목공일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나에게 갈망이라든가 절박감은 없다 해도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든다네. 그러니 소일거리라고 생각하지 말게.
내가 원하는 물건을 내 손으로 만들어내면서 희열을 느낀다네. 그러나 꼭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네. 오브제로서 소품을 직접 만드는 것이지. 그렇게 만든 게 수천 점이나 되지.
그걸 내다 팔 생각은 없어. 그걸 누가 사겠나? 그냥 손에 상처를 입어가면서까지 정성껏 만드는 거야.
그래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대신 목공일을 하고 있는데.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힘들고 거친 목공일을 하는 게 훨씬 좋다네. 정신적으로 위로하니까 편안하거든.」
「왜, 하필 나무여야만 할까요?」
「요즘 매일 작업실에서 나무를 만지고 있지.
돌이나 흙보다는 나무 촉감이 좋거든. 나무가 가진 오묘한 멋을 자연스럽게 담아야 한다네. 나는 느티나무나 오동나무, 돌배나무, 은행나무를 주로 많이 쓰지.
원하는 크기로 나무를 잘라 두텁고 거친 나무판에 대패로 몇 차례 밀어붙이면 예상치 못한 나무의 고운 속살이 드러나지.
유일한 작업 원칙은 나무의 질감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라네. 그 순간부터 나무의 세상에 빠져버리지.」
「수공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해야 하니까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그거야말로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네.」
「연장이 너무 많더군요. 언제 그렇게 장만하셨어요?」
「목공일에는 연장이 필수 아니겠나. 작업 도구로는 여러 가지 종류의 대패, 강철 톱, 망치와 끌 등 수많은 공구가 있지.
솜씨 없는 놈이 연장 욕심만 많다고 했다네.」
「그렇게 열심히 만들었는데…… 전승공예대전 같은 데 출품해서 평가를 받아보지 그랬어요?」
「그럴 필요는 없었네…… 그런 정도는 아니니까.」
「요즘에는 목공일에 푹 빠져 있으니까 소설 같은 건 전혀 읽지 않겠네요?」
「지금 형편에 글을 읽기에는 눈이 너무 침침하지. 자네 소설은…… 너무 낯설지. 당연히 끝까지 읽지 못했다네. 앞으로도 내가 읽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게.」
「그렇습니다. 다들 재미없다고 하더군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맥이 풀리긴 합니다만……」
우리는 마당에 쌓여있는 오래된 톱밥과 폐목재를 모아서 불을 지폈다. 불이 바싹 마른 목재를 먹어치우면서 눈부시게 타올랐다. 불길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그가 말했다.
「불길을 단순하게 화학작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지. 그 속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감춰져 있단 말일세.」
「무슨……?」
「불은 신비한 거지. 정화제 이상인 거야. 모든 걸 사라지게 하고 모든 걸 새로 탄생시키니까. 미안하네만…… 나는 자네의 첫사랑과 이별에 대해 관심이 많다네.」
「형님께서…… 사랑 이야기를 다했으니까 이제는 제 차례라는 말씀이군요.」
「그렇다고 해두지. 나는 여자와 남자의 이별의 순간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다네. 여자들의 속성이 그 순간 잘 나타나지 않겠나.
그리고 그때 남자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말이야.
그래서인지 누군가 말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너무 희미한 불빛 아래서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좀 더 밝은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네.」
「그 순간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죠.
…… 여자는 헤어질 때 냉정하더라구요. 남자보다는 훨씬 독하지요. 제가 그때 느꼈던 분노…… 상실감…… 나를 압도했던 배신감만은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부질없는 이야기입니다. 부끄럽네요. 그 여자는 이미 죽었는데……」
그가 말했다.
「벌써…… 죽었다고? 당신의 첫사랑은 삼십여 년 전에 헤어졌다고…… 언젠가 말했지 않았는가. 그때 여기로 내려왔다고.」
「몇 년 전에 우연히 동창생한테서 들었죠. 그 녀석이 쓸데없이……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요. 어쨌거나 오래 전에 죽었답니다.」
「사랑은…… 지긋지긋하다니까. 사랑은 악마이고 지옥인 거야.」
「화제를 돌려보죠. 하인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여자가 갑자기 그리워지는군. 너무 자주 들먹여서 그런지 어느 순간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니까. 때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도 일어나는 법이라네.」
「여태 미련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잊어버릴 때도 됐지 않습니까?
지금 살아있다면 쭈글쭈글한 할머니가 되어 있겠죠.
젖가슴은 늘어지고 허연 머리숱은 얼마 남지 않았겠지요.
늙은 할머니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늙는다는 것은 특히 여자에게는 지옥이나 다름없지요.」
「그러게 말이야…… 남자는 그런대로 늙어갈 수 있지만…… 여자는 늙으면 너무 추해지지. 그러나 하인숙은 아닐 거야.」
「형님이 잘못한 게 있을까요? 혹시 그때 남자로서 잘했다면 그녀의 성향을 바꿀 수 있었을 거라고…… 자책하고 계신 건 아니겠죠?」
「그럴 수도……」
「마지막으로…… 하인숙에 대해서는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네요. 만약 말입니다만…… 하인숙이 지금 그때 나이라면 어땠을까요?
아마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다 양쪽 귓불과 배꼽에는 피어싱을 했고 헐렁한 셔츠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강남 거리를 활보하며 걸어 다니겠죠. 하지만 실용적이어서 10센티미터가 넘는 킬힐을 신었을 리는 만무하고 당연히 싸구려 운동화를 신었겠군요.
혹시 몸에 동물 문신을 했을 수도 있어요. 네일 케어를 받으면서 매일 손톱에 영양제를 바르고 외출할 때마다 손톱에 각기 다른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겠지요. 가끔 트랜스젠더 바에 가서 위스키를 마시고 성적으로는 펠라티오를 즐겼을 거예요.
참 너무 불쌍하지요. 그때 혼자서 사회적 위선을 뚫고 나올 순 없었다구요. 시대가 한참 변한 지금쯤 20대 후반이거나 30대 초반이어야 하는데요. 그러면 레인보우의 기수가 되어 성 소수자 단체나 페미니스트 단체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겠지요. 그렇게밖에 상상할 수 없어요.」
「여자는 정말 알 수 없는 거야.
그렇지만 말일세…… 지금이라고 해도 레인보우의 기수가 될 만큼은 아닐 거야. 여성다운 면도 있었거든. 노골적으로 커밍아웃은 못 하고 꼭꼭 숨어서 했을 거라고. 집안 체면 때문에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 할 수 있겠지요. 동성애자 말입니다. 그런데 성 소수자들은 심한 차별을 받으니까 분노했고……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서 페미니스트가 됐을 거라고요. 시대가 한참 변했어요. 지금은 21세기 대명천지라고요.」
「그렇다면……시대가 그렇게 변했다면……
이제 얼추 일 년이 다 된 것 같은데…… 자네가 여길 온 게 말이야. 벌써 가을이라네…… 또 그때처럼 서울로 올라갈 텐가?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때…… 할아버지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오랫동안 바다에서 노련한 낚시꾼으로 살아온 늙은 어부가 말했지요. 서울로 하루빨리 올라가야만 된다고 했어요.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촌구석으로 보내라는 속담을 맨날 들먹였어요. 바다 사람이 될 팔자는 아니니까 여기서 괜히 시간을 죽이지 말라고 했지요.」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서울로 다시 올라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할 일이 있어야겠지요. 구시가지 쪽에 집을 얻어 살면서 계속해서 무언가를 써야겠지요. 쓰는 게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우리에 대해서 쓰고 싶습니다.
언제나 글을 쓰기 전에 작은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쓰디쓴 커피를 끓여서 마시고 나서 시작하지요. 제가 쓴 글 속에 뜨거운 피가 흘러야 할 겁니다.」
「왜? 바닷가를 떠날려고?」
「바다가 늘 유혹을 하지요. 그래서 바다가 안 보이는 구시가지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건 비겁한 도망이야. 그런데도 뭐 소설을 쓰겠다고?」
「소설은 쓰기도 어렵고 출판하기도 어렵죠. 어떤 면에서는 출판이 더 어려워요. 자비 출판을 할 돈도 없지만…… 그건 자존심이 상해서 하고 싶지 않네요. 그러나 끝까지 쓸 거예요.」
「누가 알아봐주지도 않고…… 팔리지도 않을 글을 계속 쓰겠단 말이지? 그게 어쩔 수 없는 무명작가의 운명이겠지. 그러나 자포자기해서 그걸 태워 없애지는 말게. 카프카를 보더라도 유언대로 그의 작품을 모두 소각해버렸다면 그는 진즉 땅속으로 묻혀버렸겠지.
누가 믿거나 말거나 스스로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니까…… 혹시 자네가 죽은 후에라도 빛을 보지 않겠나?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 말일세……」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 부분 말씀인가요?」
「그렇다네. 거기에 ‘27일 회의 참석 필요. 급상경 바람 영.’ 이라는 아내가 친 전보가 나오지 않는가. 그러니까 윤희중은 짧은 휴가를 얻어서 어머니 산소에 간다는 핑계로 도사동으로 내려왔지 않은가. 그 일주일 후쯤 주주총회가 개최될 거고.
그렇다면 말일세…… 왜 구태여 전보를 칠 필요가 있었냐는 거지. 다시 말하지만 윤희중이 내려올 때는 이미 확실하게 주주총회 일정이 정해져 있었단 말이야. 일이 진행될 순서가 뻔하게 정해져 있었는데. 왜 급상경 전보가 필요했을까?
자네도 회사법을 잘 아는 변호사이니까…… 주주총회에 왜 윤희중이 참석할 필요가 있었을까? 주주도 아니고 회의 진행을 맡은 대표이사도 아닌데…….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거야.」
「형님도…… 지나치게 꼼꼼히 따지는 거 아닌가요? 우리나라 소설이란 게 대충…… 엉성하게…… 그럴 필요가 없지요.
제 생각에는 소설을 계속 이어서 쓰려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인과관계에 근거해서 미리 짜 놓아야 해요. 소설의 구조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소설을 어떻게 해서든지 마무리를 해야 했을 겁니다. 기승전결의 결에 해당하니까요.
그것도 멋지게 마무리하고자 하는데 어떤 계기가 필요했을 거예요. 그때 필요한 것이 아주 옛날 식으로 데우스 엑스 마키나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고 마무리하죠.」
「나는 그런 어려운 말은 모른다네. 라틴어 같기도 하네만……」
「저도 딱히 설명할 자신은 없어요.」
「조만간 어느 날 갑자기 망령이 날지도 모르지. 그런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준비를 해야겠지.」


11. 그날, 아침 안개가 중의 까까머리를 깬다는 속담이 들어맞을 듯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농무가 해안가를 휘감고 있었다. 나는 오후 2시경 경찰서에 출두했다. 어제 파출소 순경이 뜻밖에 집으로 찾아왔고 본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날 찾아내서 강력계로 출두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역시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몹시 당황했다. 강력계라고? 무슨 일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강력계에 출두할 만큼 무슨 짓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그 일 때문에? 아내가 마음이 변해서 가출 신고라도 한 것일까?
내가 경찰서에 가면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한 마디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나는 수사기관에 출두하는 피의자들에게 매번 강조했던 대로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 즉각 대답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다섯까지 세고 나서 대답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불리하게 작용하는 성급한 답변을 제지할 수 있다.
정년을 코앞에 둔 것처럼 보이는 늙은 형사가 느릿느릿 말했다.
「이렇게 나오시게 해서…… 봄이 온 것 같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쌀쌀하네요. 윤희중씨 잘 아시지요…… 그쪽 동네에서는 그렇게 부르더라구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주민등록은 진즉 말소됐습니다. 도사동 출신이고 1934년생이더라구요. 만으로 치면 금년에 80세쯤 되겠지요. 실제는 한두 살 위일지도 모릅니다. 본명은 윤기준일겁니다.
함께 술도 마시고 늘 어울렸다고 했습니다만…… 동네 사람들한테 그렇게 들었어요.」
「두세 달간 만나지 못했습니다…… 겨울이 되면서 날씨가 추워지니까. 무슨 일이……?」
「자살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틀림없다고요……?」
「그렇지요. 유서도 있고, 통화내역도 있고, 다른 단서도 있습니다. 부검을 하였는데 수면제 과용인 것 같습디다.」
나는 그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들었지만 그 순간 어떤 격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죽어서 안 됐다는 느낌, 어차피 잘 됐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우리가 가까운 사이 혹은 특별한 관계였을까?
그는 수면제를 한 움큼 먹고 깊이 잠이 들어서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줄조차 모르고 죽었을 것이다.
「무슨 통화내역인가요?」
「윤희중씨가 죽기 전에 이 분하고 대포폰으로 통화를 했습니다. 자살은 범죄는 아니니까 무슨 조사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 교인들을 제외하면…… 그렇겠지요.」
「…… 이렇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함께 지내면서 어떤 낌새를 느끼지 않으셨나요?」
그때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몇 년 전인가, 아주 옛날 어머니가 다녔던 교회의 목사가 나를 찾아와서 하느님에 관한 얘기를 좀 해보자고 하더라고. 나 정도로 늙었으면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귀의해서 기도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어. 목사가 힘주어 말했어. 어르신이 누구신지 하느님 말고 누가 기억하겠습니까.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내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진 않다고 말해주었어. 늙어가지고 무슨……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그 젊은 목사는 뻔뻔하게도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끈질겼다네.
아닙니다. 할아버지. 저는 당신 편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귀신에 씌어서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거지요. 제가 할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지옥이 아니라 천당으로 인도하시게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도와줄 수도 있어요. 불편한 점이 계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해주세요. 돌아가시면 끝까지 다 정리해드릴 것입니다. 재산이나 법적인 문제까지도 문제가 발생한다면 모두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 왜 그런지 몰라도 내 안에서 마침내 분노가 마구 폭발하더군. 그래서 내가 말했어. 당신들의 신 그리스도는 오직 믿음 말고는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거 아닙니까. 믿음보다는 진실이 우선이지요. 목사가 말했다네. 요즈음 인간들은 신을 믿기에는 너무 영리하지요. 그래도 진실은 신만이 알고 있겠지요.
무슨 수작인지? 하느님은 어머니의 지극 정성스러운 기도도 들은 체 만 체 했었는데…… 그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그리고 무슨 법적…… 재산…… 운운하는 바람에 분통이 터졌다네.
그때 무심결에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네. 목사에게 어머니처럼 상소리로 욕을 퍼붓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몇 번씩이나 말했지.
나는 지금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으니 숨을 쉬고 살고 있다는 것조차도 확신할 수 없네. 그러나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네. 그러니까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확신이지.
내가 말했다.
「글쎄요. 혹시 자살이라면 제가 먼저였겠지요. 그런데…… 저는 자살할 생각을 접었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자살하면…… 경찰만 뒤치다꺼리하면서 고생한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일반적으로 유물정리업이라고 하는 특수청소업체의 대표가 설명했다. 그는 이미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저는 불행하게 죽은 사람들의 삶의 마지막 흔적을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특수청소부란 말입니다. 특히 고독사나 자살한 현장에서 유물과 유품을 정리하는 거지요. 쉽게 말해서 옛날에는 폐품 수집상 또는 고물상이 했던 일입니다.
열흘 전쯤이었어요. 어떤 할아버지가 전화를 했습니다. 희미한 목소리를 들으니 분명히 할아버지였어요. 사망 현장을 깨끗이 정리하는데 드는 비용이 얼마인지 묻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주소와 위치를 자세히 가르쳐주더군요. 바로 약속 날짜를 잡았습니다.
현장에 내려와서…… 알고 보니까…… 그 할아버지가 혼자 살면서 전화를 했고 제가 도착했을 때는 침대에서 자는 것처럼 죽어있었어요. 이미 시체가 굳어있더라고요. 그래서 경찰에 먼저 신고부터 했습니다.
그런데 집안을 살펴보니 그림이라든가 목공예품 같은 것이 수천 점이나 있었던 거 같은데 전부 불에 태워버려서 재만 남아있었지요. 그리고 나머지 살림살이는 너무나 깨끗이 정리되어 있어서 치우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경찰조사가 끝났으니까 곧 처리해야겠죠. 비용은 두 배로 계산해서 탁자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형사가 말했다.
「그쪽은 가셔도 좋습니다. 조사에 협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그 형사가 자판기 커피를 꺼내서 들고 왔다. 나는 종이컵에 담긴 뜨거운 커피를 조심조심 마시기 시작했다. 커피가 금방 미적지근하게 식었고 종이컵 밑바닥에 설탕 찌꺼기만 남았을 때 종이컵을 구겨서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내가 말했다.
「저는요?」
「전해줄 게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뭘 말씀인가요?」
「뭐…… 별것은 아니지요. 그저 이야기나 더 나누고 싶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건 조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마을 이장한테서 원래 순천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이장은 그 이상 자세한 것은 모릅디다. 혹시 순천중고를 졸업했습니까?」
「저는 순천이 고향이긴 합니다. 몇 대 선조 때부터 대대로 살았지요. 지금은 산소만 남아있어요. 이곳에서 초등학교까지 다녔습니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은 서울에서 다녔습니다.」
「요즘은 귀농과 귀촌이 유행하고 있지요. 그러니까 직장을 은퇴하고 나서…… 고향으로 내려오신 거겠군요. 자녀분들은 다 결혼을 하고 나서 말이지요. 혼자 오신 거 보니까 혹시 부인이 돌아가신 거 아닌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살한…… 그 할아버지 말입니다. 그렇게 자주 어울렸다면…… 뭘 잘 알고 계실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주 어울린 건 아닙니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결벽증이 있으니까 사적인 부분은 원체 말씀이 없으셔서… …」
「제가 처음 시체를 봤을 때 아주 깔끔하고 품위 있게 죽었단 말입니다. 시체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이곳 농부나 어부 같지도 않고. 많이 배운 지식인처럼 보였어요.
지금 농촌에선 가끔 자살 사건이 일어납니다만 대부분 농약을 먹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으니까 수면제 자살은 아주 드문 일이거든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특이했습니다.
제가 순천 출신이고 순천중고를 나왔습니다. 그분이 까마득한 선배가 되지요.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좀 알아봤지요. 이건 수사와는 관계없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쨌거나 사람이 죽었지 않았습니까.
순중 동창생 몇 분을 만나서 자세히 들었지요. 학교 다닐 때 키가 크고 잘생겼고 공부도 잘했다고 하더군요. 항상 전체 수석이었고 책은 닥치는 대로 얼마나 많이 읽었던지 글도 아주 잘 썼답니다. 자기는 장차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고 장담했답니다.
그래서 친구들 연애 편지는 도맡아서 대신 써주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홀어머니 밑에서 가정 형편이 안 좋았습니다. 그 시절에도 순중에서 공부를 잘하고 집안 형편이 웬만하면 서울이나 광주로 가는데. 그래도 대부분 순고로 진학했거든요. 그분은 도저히 형편이 어려워서 3년 장학금을 받기로 하고 벌교상고로 갔다고 하더군요.
벌교상고를 졸업하고 나서 한국은행에 들어갔답니다. 한국은행은 수재가 아니면 못 들어가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하늘의 별따기지요. 그러고 나서 스카웃되어 무슨 제약회사로 옮겨갔다고 했습니다.
동창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할아버지를 40대 초반 무렵까지 가끔 만났다고 하더라구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순천에 자주 내려오셨답니다. 아주 효자였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발길이 뜸하다가 아주 끊겼다고 했습니다. 어머니 장례식 때는 동창생들이 아주 많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조사해놓은 게 있으신가요? 가령 전과 기록 같은 거 말입니다.」
「말씀드려도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간통으로 한 번 고소되었다가 합의가 되어 취소된 사건이 있었고 마약으로 집행유예를 받은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전부 부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혹시 부산에서 살았을까요?」
「저는 잘 모르지요. 그런데 시체는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그게 약간 골치 아파요. 무연고자 처리를 해야겠지요. 보통 시청 복지과로 넘깁니다.」
「제게 넘겨주시면 화장을 해서 바다에 재를 뿌리겠습니다. 그분의 희망사항이 아닐까요?」
「그렇게 해도 되는지 검토를 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탁자 위에 노란 봉투가 있었는데 그 속에 두툼한 노트 몇 권과 메모지와 두 통의 유서가 있었어요. 하나는 친절하게도 경찰에게 남긴 거고…… 또 하나는 선생님에게 남긴 거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경찰에 대해서는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면서 자신은 틀림없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한 것이라고 했고, 가족이나 연고자가 아무도 없다고 했으며, 집과 기타 재산은 옛날 어머니가 다녔던 교회에 기증하겠다고 하였다. 은행에는 상당히 큰 금액의 예금 잔고가 남아있었다.


제강호 諸岡昊 에게
나는 실제적인 사람이야. 유령이 아니란 말이지. 나는 여기 땅과 현실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나만의 방식으로 내 삶을 산 거라네. 나는 지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건강하지. 지금 스스로 결정하는 게 중요하지.
나는 더 늦기 전에 결정을 내렸다네. 자유로운 한 개인의 권리에 근거해서 내 생명을 처분한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자살에 이를 만큼 절망적이지도 않았고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그런 상황도 아니었네. 다만 자기 살해를 감행할 만큼 정신적으로 강한 의지와 용기는 가지고 있었다네. 마음의 준비가 된 거지. 그건 자신과의 길고긴 싸움이고 삶과의 치열한 투쟁이었지. 안락사는 비겁한 거야. 그게 삶에 대한 모독이고 굴종이고 회피이고 도망인 거지. 나는 스스로 존엄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선택한 거라네.
내가 깊은 밤 어느 순간 발작을 하고 충동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을 정당화할 충분한 논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아닐세.
나는 충분히 오래 살아남았네. 어쨌거나 일찍 죽는 것보다는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은 거지. 그 이후 일어난 내 이야기를 두서없이 자네에게 모두 털어놓았고 더욱 자세한 것은 내가 일기장이나 메모, 비망록을 남겨놓았으니 그걸 참고하게나. 그 일기장에는 金惠淑의 사진이 여러 장 들어있다네. 그러나 몇 가지 비밀은 비밀로 그냥 남겨두었지.
내가 당신에게 두서없이 이야기했던 그 후…… 내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써서 발표하는 것에 동의한다네. 당신이 작가적 양심으로 그럴 생각이 있다면 말일세. 쓸데없는 간섭을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만 가급적 또는 꼭 정확히 사실 그대로 쓰는 게 어떨까. 더 이상 내 이야기가 가감되고 윤색되어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네.
어쨌거나 책을 출판하게. ‘모든 책은 제각기 자신의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 안개처럼 깔려있는 어둠을 헤쳐 나가게. 자네도 잘 알다시피 안개는 결국 햇빛에 사라지게 돼있어. ‘어둠이 깔려야 비로소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비상을 시작한다’고 했다네.
삶은 흘러가서 절대 돌아오지 않지. 미적미적하지도 우물쭈물하지도 갈팡질팡하지도 말게. 내 안으로 한없이 움츠러들지도 말게. 앞으로 나아가게. 문학과 고독을 사랑하게나.

2015. 2.
윤기중
尹綺重


부록
여러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끼리끼리 주고받은 민망할 정도로 구태의연한 찬양 일색을. 그러니 단 한 마디 날카로운 비평의 말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멜로드라마 같으니 찢어 던져버리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일찍이 헤밍웨이가 지적했다. 칭찬이 가득한 서평은 작가의 정신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찬사를 받으면 앞으로 글쓰기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아진다고.

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한국문학사에 자리매김한 김승옥은 기존의 작가들과는 뚜렷하게 다른 변별점을 가지고 있었다. 4.19 혁명세대의 새로운 의식구조, 식민통치 시대의 교육과는 구별되는 완전한 한글세대의 출현, 문학에 있어서의 감각과 감수성 있는 문체의 구사 등의 특징을 내세우며 그는 한국소설사에 뚜렷한 위치를 차지했다.
김승옥은 새로운 문학의 지평이 뚜렷하게 예견되지 않는 시점에서,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았고 또 성공의 보장도 없는 미지의 영역 속으로 헤쳐들어간 당돌한 모험가였다.
그는 우리의 모국어에 새로운 활기와 가능성에의 신화를 불어넣었다. 그는 우리의 모국어에 대한 혹종의 미신 - 근거가 있기는 하나 너무 과장된 - 을 구호로써가 아니라 실천으로써 타파하였다.
김승옥은 감수성의 혁명을 우리의 황량한 문학 풍토 속에서 일으켰으며 우리는 그의 눈을 통해 모든 사물을 기성 세대와 다른 감각과 의미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의 창작은 내적 자아의 형성 또는 개인주의 문학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이며 우리 정신사에서 처음으로 의식의 주체화에 전망을 비춰 준 것이다

비평가들이 한 술 더 떠서…… 무진이라는 공간은 서울과 대비된다는 등, 그곳은 질서보다는 무질서, 인공성보다는 자연성으로 상징되는 곳이라는 등, 무진은 질서와 체계가 잡히기 전의 혼란과 퇴폐를 보여주지만 그 자체가 삶의 원형과도 같이 어떤 구체성을 띠기 전의 모습이라고 하는 등 별의별 소리를 다 했다.
순천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전남 동남부 지방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인데 그게 말이 되냐구요. 퇴폐는 무슨…… 서울이야말로 온갖 퇴폐의 중심지이지.

하인숙이라는 인물의 성격, 그리고 그녀와 나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하인숙이라는 인물을 내가 사랑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는 그저그런 평범한 여인 중 한 사람인가, 아니면 모든 남성들의 환상을 구성하는 이상적 타자로서의 바로 ‘그 여인’인가? 하인숙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주인공인 윤희중 역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문학청년으로서의 면모와 닳고 닳은 방식으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노력하는 중년의 노회한 속물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다면 과연 ‘나의 분신’으로 간주되는 그녀는 순수하고 솔직하게 고뇌했던 ‘과거의 나’의 분신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배경을 손에 넣거나 유지하기 위해 비열한 타협안을 작성하는 ‘현재의 나’의 분신인 것인가?
영화의 각색자는 원작을 쓴 소설가 자신이었다. 원작자인 만큼 그 작가는 소설을 고스란히 영상화하기 위해 애를 썼던 것인가.
원작의 각색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점을 충실히 옮겼느냐가 아니라 어떤 부분이 필연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어떤 부분이 어떤 방식으로 변이되었느냐에 대한 추적이다.

결국 작품이란 유동적인 텍스트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술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폴 세잔은 ‘그림은 절대로 완성되지 않으며 어느 순간 그리기를 멈출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작품일수록 스테레오 타입의 고정된 또는 한정된 의미에 갇히는 것보다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내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학 작품이 해석과 재해석, 재생의 과정에서 가변적이라는 관점은 이미 오래 전부터 널리 인정된 해석 이론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경우 자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각색을 거쳐서 연극,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화로,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 새로운 버전으로 전환한다.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 시대에 컴퓨터 게임, 소셜웹, 가상현실 게임, 테마파크 같은 엔터테인먼트 분야로의 전환은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각색자는 원천 작품을 재해석하여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고 캐릭터를 다른 관점에서 정체성을 변형하고 플롯을 변경해서 디테일을 생략하고 주제를 변주하면서 개작하고 재조합한다. 그래서 그들 각각의 버전은 상호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는 옹기 그릇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있듯이 이야기꾼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각색자는 창작자가 되어 그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고정된 텍스트는 없다. 항상 유동적이다. 이야기는 숙명처럼 끊임없이 조금씩 일탈하면서 또는 증보되면서 반복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변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걸 탓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와 독자는 독립된 개인이지만 작품 때문에 연결은 불가피하다. 작가와 작품을 매개로 한 독자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 소설에서 말이다. 작가가 죽으면 또는 죽어야만 독자가 탄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독자가 왜 그 소설의 의미와 관련해서 작가의 원래 의도 혹은 작품의 (숨은) 배경, 인물의 모델 등등에 관하여 신경을 써야만 하는가. 작가와 독자는 더 이상 비대칭적인 관계가 아니다.
작가의 내면 세계와 그의 어두운 영혼이 작품에 미친 영향과 상호 관련성을 파악하고 싶다면 왜 그의 삶과 생애에 관한 모든 사항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그렇게 소홀할 수 있는가. 작품이 작가를 아는 하나의 계기이고 반대로 작가의 삶이 작품을 깊이 이해하는 계기라면 말이다. 그런데 고작 피상적인 관찰만 있을 뿐이다.
문학의 지고한 가치란 독자들이 작가의 영혼에 내밀하게 접근하게 해 주는 데 있다고 하는 주장을 부정해야만 할 것인가? 작품은 작가의 손을 이미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논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오직 텍스트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들은 작가의 의도를 당해 예술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는데 유일한 척도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독자는 더 이상 텍스트의 내용과 의미의 수동적인 수신인이 아니라 작품을 자기 나름대로 해체해서 해독하고 의미를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자는 이제부터 능동적으로 텍스트의 새로운 의미 형성에 참여하게 된다. 독자는 텍스트의 일부인 서사의 틈새를 메우는 것이다. 그 소설에서처럼 말이다. 결국 독자는 작가와 더불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독자들은 제각기 독자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재창조할 뿐만 아니라 같은 독자의 경우에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시대적, 공간적, 문화적, 개인적 등등 환경의 변화에 따라 해석과 재해석이 유동적이 되면서 작품에 대한 태도가 변화할 수 있다.
내가 60년대 그 무렵에 그걸 읽었었다. 반세기가 지나서, 나도 60대 후반으로 세상을 알 만큼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때처럼 읽을 수 있겠는가. 세상이 변했고 나도 변했다.
그때도 그 소설은 지나친 감상주의 때문에 신파조 멜로드라마 같았는데 5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성경을 제외한다면) 정전 취급을 받는 어떤 고전인들 지금 그때만큼 읽을 수 있겠는가. 생각보다 훨씬 재미없고 정말 지루할 뿐이다. 두서없이 긴 문장에는 쓸데없는 상투적 사설과 훈계가 그렇게도 많다.
그는 진지한 작가는 아니다. 여기서 진지하다는 것은 진지한 주제로 소설을 쓴다는 걸 말한다. 나는 그걸 산산조각을 내서 해체하고 다시 이어 붙였다.
작성일:2024-02-29 13:31:38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