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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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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무진기행, 그 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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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4-02-29 13:31:17
조회수
28
8.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며 창문을 때리더니 그것을 신호로 해서 뒤늦게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바다로부터 세찬 비바람이 불어왔다. 마지막 장마는 열흘쯤 지나서야 끝났다. 그리고 티끌 한 점 없는 청명한 초가을 하늘이 수평선까지 아득히 펼쳐졌다.
경전선 기차 소리가 밤의 적막을 뚫고 지나갔다.
그날, 우리는 날씨가 선선해졌으므로 모처럼 신시가지로 나가 광양 불고기 집에서 몇 병의 소주를 반주로 해서 점심식사를 했고 근처 카페로 옮겼다. 평일 오후 카페는 한산했다.
우리는 에스프레소 커피를 마셨다.
순전히 가벼운 술기운 때문에 의기투합해서 택시를 잡아타고 구시가지 쪽으로 갔고 가곡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쪽으로 옛날 거리 여기저기를 느긋하게 산책하는 것처럼 몇 시간을 걸었다. 순천대학교를 지났고, 순천남초교, 순천여고를 지나쳐 마침내 순천고 정문에 이르렀다. 그가 순천중을 다닌 것은 65년 전 일이었다.
우리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옛날 추억에 잠기지도 않았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대동의 옛날 다방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그가 말했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세.
왜 광주역에서 기차를 내렸을까? 그 당시 순천역이라면 서울에서 내려오는 기차가 광주만큼이나 많을 텐데. 다시 말하면, 서울에서 순천으로 바로 내려오면 되는데 구태여 빙 돌아서 광주를 거쳐 내려오느냐 그 말일세.」
「그게 우스워요. 실제와 다르고 부자연스럽거든요. 그렇지만 소설의 도입부인 기승전결의 기에 해당하는 ‘무진으로 가는 버스’ 부분을 쓰기 위해서는 광주역으로 설정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버스 속 대화를 생각해보세요. 무진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런 대화가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인데요 그것 정도는 따지지 말고 눈 감고 넘어가야겠지요.」
「안개도 말일세…… 밤새 멀리 남쪽 바다에서부터 밀려오는 순천만 일대의 아침 안개는 너무나 유명해서 나도 잘 알고 있지.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안개 말일세.
그런데 그는 그 아름답고 신비한 안개를 밤 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라고 비유했단 말일세. 또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 놓은 입김 과도 같다고 했는데 그 회색 안개를 여귀 (女鬼)의 입김에 비유하다니. 그리고 또 있네…… ‘나는 그 여자의 프로필을 훔쳐보았다’라고 했어. 거기서 갑자기 profile이라는 낯선 단어가 튀어 나오지? 그냥 ‘얼굴’이나 ‘옆 얼굴’이라고 하면 될 텐데.」
「독자의 가독성을 방해하는 미숙한 표현인 거죠. 그게 미문 (美文)에 목을 메는 젊은 작가의 어설픈 치기가 아니었겠어요?
안개는 안개에요. 안개는 혼돈이거나 혼동일 거예요. 현실과 허구를, 진실과 거짓을, 꿈과 현실을 혼동시키는 거지요.」
「그리고 말이야…… 순천이야말로 전남 동남부 지역의 중심 도시로서 아주 옛날부터 역사와 전통이 있었는데…… 제멋대로 인구 오륙만의 읍으로 격하시키는 게 옳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나?
아무리 작가가 제멋대로 쓴다고 하더라도…… 리얼리스트인지 리얼리즘이라는 게 뭐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리 소설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소설인 경우에도 정확할 것은 정확해야겠지요.
그게 작가의 창작 윤리 아니겠어요.
헤밍웨이든가 누군가 인물이건 장소이건 모델을 묘사할 때는 그 모델을 아주 정확히 묘사해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그게 독자를 기만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작가 스스로 무진읍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순천시를 모델로 하였다고 밝혔다는데요. 읍이라고 한 것은…… 결국 독자를 기만한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무명작가이긴 합니다만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읍이라고 하면 인구 1만이나 2만 정도를 기준으로 하거든요. 그 당시, 그러니까 50년 전 일이네요. 인구 5,6만의 읍이 전국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작가가 자신만의 상상의 도시를 창조했다고 말입니다. 그 후 그 도시를 배경으로 한 후속 작품이 여러 편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그 가상의 공간이 문학적 배경으로 정착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후 뭐가 나왔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도 무진, 무진 하지 않습니까. 그 양반 평생 무진을 우려먹고 있어요.」
「그 잘난 비평가들을 어떻게 생각하나?」
「뭐…… 그렇지요. 우리나라에는 지금까지 비평다운 비평이 없었어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요. 우선 문단의 패거리들이 얼마 되지 않고 바닥이 좁아요. 작가들, 소위 평론가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들, 출판사의 편집 책임자들 등등 해봤자 뻔하지요.
그러니 모두가 지연이나 학연, 직장 관계, 기타 등등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학연은 고등학교와 대학이 중심이지요.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날카롭게 후배를 비평할 수 있고 후배는 하늘같은 선배를 어떻게 비평해요. 그랬다가는 싸가지없는 놈이라고 바가지로 욕을 얻어먹고 매장되겠지요.
지연도 그래요.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예요. 그러니 좋은 게 좋다고 비평다운 비평을 못하고 주례사 비평만 하는 거예요. 그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죠.」
「참으로…… 인정이 철철 넘쳐흘러서 좋구먼.」
「그런데 아닌 구석이 있어요. 그러니까 지연이나 학연으로 얽혀 있지 않고…… 게다가 자폐아가 중얼거리는 듯한 그 흔해빠진 1인칭 사소설만 보다가 새로운 소재와 캐릭터, 배경으로 무장한 깊이 있는 소설이 어쩌다 등장하면 그 낯선 세계에 대해 놀라움과 지적 호기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포심을 느껴요.
평론가는 지식이 엷으니까 그런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면 자신의 무식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하지요. 그래서 비평한답시고 그럴듯한 언사로 마구 깔아뭉개는 거죠. 비평이란 주관적이니까 제멋대로 하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때는 무척 잔인해지지요.
평론가는 검열관도 아니고 심판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들의 역할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가이드일 뿐이에요.
그거 알고 계신가요?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건 말이에요. 그게 가령 표절이라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20년 전 일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20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표절 운운한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요즘 신경숙 작가가 한창 뜨면서 잘 나가니까 배가 아픈 거예요.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요. 그게 아니라 잔인한 일이라고 해야겠네요.
어떤 원로 작가는 그 작가더러 공개적으로 표절했으니 절필하라고 요구했어요.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절필 운운하는 거죠? 자기가 작가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입법가인가요 심판관인가요?
전업 작가에게는 글을 쓰는 게 밥줄이고 생명줄인데…… 그건 밥을 굶고 죽으라는 이야기와 똑같죠. 작가에게 글쓰기는 어떤 것에서도 얻을 수 없는 생의 강렬함을 선사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작가는 ‘글을 쓸 때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낍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 순간조차도요’ 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나 역시 그가 작가로서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알고 있다네.
그는 1964년 ‘무진기행 (霧津紀行)’ 이후 이를 영화로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세 편을 직접 썼으니까 무진기행을 무려 네 번이나 우려먹은 셈이라네.
영화에서 제목은 ‘안개’…… ‘황홀’…… ‘무진 흐린 뒤 안개’ …… 등으로 매번 바뀌었네. 특히 마지막 영화는 무진의 하인숙이 서울로 올라와서 윤희중과 밀회를 즐기지만 결국 그 사랑의 한계를 깨닫고 허무하게 헤어지게 된다는 마무리로 끝났지.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그렇게 활동을 하여 대종상 각본상까지 받기도 하였네. 그러니 무슨 소설을 더 이상 쓸 수 있었겠나.
무엇이 그의 글쓰기를 억압했고 상상력을 갉아먹었는지 도대체 짐작도 할 수 없다네. 위대한 작가라면 꾸준히 계속 많이 써야 하거든. 그래야만 많은 졸작 중에서 한두 편의 명작이 나오는 거 아니겠나? 그렇지만 작가로서 게을러터졌고 불성실했어.
도저히 실체가 있는 작가…… 심각하거나 진지한 작가로 성장할 수 없었네. 너무 일찍 겉멋이 든 거지. 실패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지. 그랬으니 후배 작가들에게 모범은커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구동성으로 칭찬 일색이니…… 뭐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거지.
그 얄팍한 짧은 소설이 처음부터 요란스럽게 성공하니까 그게 독이 된 거야.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더라고. 그의 몇몇 작품을 나도 어쩔 수 없이 자세히 읽어보았다네. 왜 아니겠는가?」
「옳으신 말씀입니다. 과대포장이 된 거죠.
짧은 단편 소설 하나로 대표작을 삼을 수는 없다구요. 우리 문학 풍토가 저변이 빈약하고 아무리 단편소설 위주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안톤 체홉처럼 단편소설을 600여 편 넘게 썼다면 모를까…….
그를 대표할 만한 장편소설은 없어요. 뭐니뭐니 해도 소설은 장편소설이지요. 그것은 복합적인 주제를 가지고 반복, 변주하면서 깊이 있게 다뤄야 하니까 마라톤처럼 긴 호흡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작가의 문학성과 진면목이 그대로 반영되는 거예요.
그 국어 선생님은 ‘그 무렵 독서를 많이 하고 피츠제럴드를 좋아 한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피츠제럴드의 팬답지 않게 아주 얌전하고 매사에 엄숙했고 그리고 가난했다’ 고 했습니다.」
「박치순 말이군.」
「스콧의 ‘위대한 개츠비’ 말입니다. 1920년대 재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뉴욕 이야기이죠. 180쪽밖에 안 되는 작은 장편이지만 무궁무진하게 해석이 가능해요. 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 유복한 상류 사회와 하류층의 계급 문제, 사회적 신분의 상승과 몰락, 세속적 욕망, 사회적 자아와 심리적 자아의 분열이라는 이중의식, 사라진 꿈을 되찾으려는 시도, 백인 남성 우월주의, 그 소설은 결국 잃어버린 환상에 관한 작품이다. 위대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파행적 사랑을 다룬 한 편의 심리극에 불과하다. 소설의 힘이 플롯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언어에 의존한다. 플롯과 타당성이 가장 큰 약점이다. 신파적인 별난 책, 싸구려 소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엄청난 부자가 된다는 너무나 미국적인 이야기, 작가는 사상가는 아니고 그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하드보일드이고 누와르적이다.
물론 미국 쪽 비평가들의 다양한 견해입니다.
이에 대해 작가는 불평을 합니다. 이 책이 무엇에 관한 내용인지 알아차린 비평가는 없다고 말이죠.
그러면 그 소설은 지고지순한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장 기본적인 해석이지요. 그렇지만 제 생각으로는 그건 블랙 유머에 불과해요. 주인공 개츠비는 병적 자아도취에 빠진 인물이라고요. 그래서 엄청나게 허세를 부리는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죠.
어쨌거나 장편소설이어야 해요. 그 단편은 유부남과 노처녀 간 유치한 정사 이야기일 뿐이지요. 그 작가는 일찍부터 장편에 코를 박고 정진했어야 했는데…….」
「자네의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네.
우리는 지금 이심전심으로 공모를 하고 있으니까.
내가 그 소설의 주인공이었는데.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아주 감각적이더라고. 그러니까 깊이가 없지.
그 소설들에는 도대체 내적 가치라는 걸 찾아볼 수 없었네. 그렇다고 신파조의 특성인 노골적으로 드라마틱한 요소도 찾아볼 수 없었지.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네만…….
어쨌거나 깊이가 없고 지극히 피상적인 거지. 그런 속물들을 가지고 옛날 어수룩한 시절에 반짝한 거야.」
「형님의 말씀에는 정당한 비평이 아니라 멸시와 조롱의 느낌이 들어있네요.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편집병적 피해의식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진정하십시오. 그저 얄팍한 짧은 소설일 뿐이에요.
아시다시피…… 그 작가가 명문 대학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 패거리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껏 치켜세웠어요. 누가 감히 반기를 들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앞서 나온 글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하고 말을 빙빙 돌려서 논지를 펼치지요. 아무도 비평하지 않아요. 이제껏 오직 환호와 찬양만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설이 되어버렸지요.
그래서 한심한 화가도 작가도 대대 마을에 잠깐 갔다 와서는 제2, 제3의 무진기행을 썼지요.」
「자네도…… 그 S대 법대를 나오지 않았는가. 누워서 침 뱉기야.」
「제 이야기는 빼야죠. 다시 말씀드리면…… 그들이 정말로 그 작가를 연구한다면 그가 누구이고, 무엇에 몰두했으며, 무슨 책을 읽었고, 취미가 무엇이며, 그에게 중요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형제들이 있었는지,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은 어떠하였는지,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갔다 오는 군대를 갔다 왔는지, 이게 중요해요. 남자들이 군대에 갔다 오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거든요.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였는지, 수입과 지출 내역서, 헌신적인 사랑을 한 적이 있고 실패했었는지, 그의 내면의 의식과 감정, 사유를 반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의 숭고한(?) 삶을 추적하는데 필요한 단서라면 연인과 교환한 짤막한 편지 하나, 메모, 낙서, 일기장 등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수집해서 분석하고 평가를 했어야죠. 그런데 아무도 그런 중요한 일은 하지 않고 있죠. 직무유기란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수집한 것들이 그 작가의 삶의 궤적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인지,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그것이 작품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분석하게 해줄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더욱이 그 작품들이 그렇게 치밀하고 정교한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될 만큼 가치가 있는지도 여전히 의심이 가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런 건 보통 유명 작가의 사후에 하는 일이지만 만약 작가가 어떤 사정으로 더 이상 쓸 수 없어서 살아생전에 완전히 절필하여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면…… 그의 영혼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죠.」
「내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
「그렇다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도대체 윤희중은 누구인가요?」
「나는 그를 잘 모른다네. 그가 제멋대로 갈겨 썼으니까. 내가 나라고 자신할 수 없게 되었네. 물론 그게 내 본명은 아니라네. 그러나 나는 내 이름 석 자를 잊어버린 지가 오래되었지.
나중에 보니까 영화에서는 윤희중이 윤기준으로 바뀌어버렸더라고. 왜 멀쩡한 이름을 바꿔 버렸는지 도대체 그 속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네. 그 이름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거나 영화를 만들면서 그 이름에 무슨 징크스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네.」
「왜? 이름을 바꿨을까요? 이름은 자존감과 인격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되는 겁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정없이 함부로 바꾸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의 운명이 확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 자네 말대로라면. 이름은 바뀌었지만 영화 속에서 운명이 크게 바뀐 건 없었다네. 아! 그렇지! 우리를 완전히 섹스에 미친 사람으로 만들었더군.」
「어쨌거나 소설에서 공간적 배경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지요.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남부 태생으로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지닌 남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소설들을 썼지요. 그의 작품들은 포크너 소설의 주요 무대인 가상의 공간 요크나파토바에서 펼쳐지지요. 그리고 현대 미국 여류작가인 애니 프루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네요. 유명한 영화로 나온 ‘브로크백 마운틴’을 썼단 말입니다. 그녀는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많은 소설들을 썼었죠. 그러니까Wyoming Stories 라는 부제를 단 단편집을 세 권이나 발표했지요.」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만…… 그 후 무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나오지 않는 것만은 틀림없다네.」
「소설에 보면 제약회사의 직급에 간사가 나오고 그 간사가 전무로 승진한다고 나오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말이 되나요? 회사 직급에 간사가……?」
「내가 1963년 여름에 을지로 술집에서 만났을 때 분명히 경리부장이라고 찍힌 명함을 그들 일행에 나누어주었지. 나는 그때 틀림없이 경리부장이었지. 도대체가 우리나라 회사에서 간사란 직급은 없지 않은가? 자네도 변호사니까 잘 알고 있겠지.
거의 예외 없이 사원, 계장,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상무, 전무 등의 순서로 올라가게 되어 있지. 거기서 왜 간사가 나오는지 아연실색했다네. 그리고 말일세…… 간사가 있다고 치더라도 거기서 어떻게 하여 곧바로 전무로 치고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위계 질서가 있는 법인에 제멋대로 중간 단계를 생략할 수 있단 말인가?
가령, 간사가 전무로 올라갈 수 있다고 치더라도 말일세…… 왜, 쓸데없이 주주총회까지 열어야 하지? 그런 건 도대체 주주총회의 안건이 될 수 없어. 또한 말일세…… 주주총회는 그 절차가 법률에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개최될 수는 없는 거야.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 아닌가.
영화를 만들면서 그제서야 깨달은 거지. 주위에서 그걸 심각하게 지적했겠지. 그래서 영화에서는 내가 상무로 나오더라고. 주주총회 이야기는 쏙 빼고.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점은 또 있다니까.
왜? 작가는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수십 번이나 수정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걸 방치한 거지. 간사 문제는 너무나 중대한 것인데 그걸 여태 수정하지 않았느냐 말이야? 그게 독자를 우습게 보고 조롱하는 처사가 아닐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어쨌거나 작가는 초고를 쓰고 나서 치열한 자기 검열을 해야 하는데 소홀했어요.」
「그게 소홀했다고…… 은근슬쩍 넘어갈 문제인가?」
「소설 속에서 보면 6.25.사변이 났을 때 말입니다. 그때 형님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 걸로 되어 있는데요.
‘서울을 떠나는 마지막 기차를 놓친 나는 서울에서 무진까지의 천여 리 길을 발가락이 몇 번이고 불어터지도록 걸어서 내려왔고 어머니에 의해서 골방에 처박혀졌다.’ 라고 되어 있거든요.」
「내가 이미 말했지 않은가.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는데 대학은 무슨…… 그건 작가가 마음대로 쓴 것이라네.」
「그때, 1963년 6월인가? 왜 순천에 내려오셨지요? 어머니 산소에 가기 위해서……? 어머닌 언제 돌아가셨어요?」
「그게 완전히 사실을 왜곡한 거라네. 그때 어머니는 멀쩡하게 살아 계셨거든. 어머니는 죽을 나이가 아니었어. 나는 모처럼 여름 휴가를 얻어서 산소가 아니라 어머닐 뵈려고 내려온 거라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그 후 10년쯤 지나서였어.」
「서울에서 동거했던 ‘희 (姬)’라는 여자가 있었던가요? 소설에서 그 여자 이야기가 잠깐 나오죠.」
「그날 술자리가 문제였던 거야. 내가 술이 몹시 취하니까 혀가 풀리면서 별 걸 다 까발리고 나불거렸다네. 채신머리도 없이 선배가 후배들 앞에서 말이야. 내가 회사 과장 시절에 잠깐 만났던 여자야. 그때 여상을 나와서 거래 은행 창구에서 입출금 업무를 보고 있었으니까 서로 업무상 알게 된 거지. 그날 내가 그 여자와 몇 번 관계한 이야기를 하였을 거야. 그게 전부였을 거야. 그런데 그걸 가지고 동거 운운한 거지.」
「그러면 중학교 출신 중에서 형님이 출세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요? 조가 고등고시에 합격해서 세무서장이 된 것은 그렇다고 치고 말이지요.」
「부끄러운 일이네. 그 당시가…… 전쟁에 후유증이 남아있었고. 지금부터 오십 년 전 일이니까 어수룩할 때가 아닌가.
내가 고향에 내려가서 말하자면 뻥을 친 거라네. 물론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었다네. 제약회사 경리부장이었으니까 곧 대 제약회사의 전무로 승진할 거라고 떠벌리고 다녔지. 그렇게 된 거라네. 사실은 몇 년쯤 지나야 겨우 상무가 될까 말까 했는데 말일세.」
「지금부터 하인숙이라는 여자 주인공에 대해서 다시 말해보세요. 그 소설의 기승전결 중에서 핵심인 승에 해당하는 ‘밤에 만난 사람들’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죠.」
「미리 밝혀두자면…… 당연히 하인숙은 그 여자 이름이 아니야. 나도 양심이 있지. 그날 술자리에서 본명을 밝힌 적은 없어. 그 후로도 말이야. 내가 무덤 속까지 안고 가야 할 이름이야. 혹은 말일세, 내가 그 이름을 진즉 까먹었는지 모르겠네.」
「그럼 할 수 없죠. 그런데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나오지요.
“참, 엊그제 하선생이란 여자는 네 색싯감이냐?” 내가 물었다. “색싯감?” 그는 높은 소리로 웃었다. “내 색싯감이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냐?” 그가 말했다. “그 정도가 뭐 어때서?” “야, 이 약아빠진 놈아.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놓고 기껏 내가 어디서 굴러온 줄도 모르는 말라빠진 음악선생이나 차지하고 있으면 맘이 시원하겠다는 거냐?” 말하고 나서 그는 유쾌해 죽겠다는 듯이 웃어대었다.
하인숙의 정체가 무엇인가요? 집안 배경을 말한 것입니다.」
「그 여자는 명문 여자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했고 졸업하자마자 아버지의 막강한 빽으로 서울의 여고에서 음악 선생으로 있었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나. 그 여자 집안은 명문가였고 아주 부자였다네. 그러니까 영등포에서 사립 중, 고교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그 재단의 이사장이었어. 아버지의 동생들은 어떻고. 그러니까 작은아버지 중에 한 사람은 법원장을 지낸 법원 고위직 출신이었고 그 당시 잘 나가는 현직 부장검사도 있었어.
하지만 어머니 쪽은 그저 아주 평범한 가문이었다고 하더구만. 부잣집 아들인 아버지와 가난한 집 딸인 어머니가 젊은 시절 아주 열렬히 연애를 했다고 하더군. 아버지는 집안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강행했고.」
「아주 대단했군요. 그런데 조는 왜 ‘퍽 똑똑한 여자일 것 같던데.’ ‘똑똑하기야 하지. 그렇지만 뒷조사를 해보았더니 집안이 너무 허술해. 그 여자가 여기서 죽는다고 해도 고향에서 그 여자를 데리러 올 사람 하나 변변하게 없거든.’ 라고 말했을까요?」
「그게…… 기억나는데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네. 소설에 보면 조가 ‘그래도 그게 아니야. 내 편에 나를 끌어줄 사람이 없으면 처가 편에서라도 누가 있어야 하는 거야.’ 라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조의 입장에서는 출세하려면 집안 배경이 탄탄한 신붓감이 절실했겠지.
그렇지만 조에게도 고시를 합격했다는 자존심은 있으니까…… 그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척 위장하기 위해서 해본 쓸데없는 소리였을 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도대체 궁금증이 풀리지 않는데요?
그런 하인숙이 왜 그 좋은 서울에서 시골 촌구석으로 일부러 내려오게 되었냐는 거죠?」
「나도 그 점이 궁금하였다네. 자네는 ‘보스턴 식 결혼’이라는 걸 알고 있나?」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런 결혼은 인류 역사상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네. 헨리 제임스라는 소설가가 쓴 소설 ‘보스턴 사람들’ 속에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라고 알고 있네만. 그러니까 독신인 두 여성이 결혼한 남녀와 다름없이 한 집에서 정신적으로 의지를 하며 사는 것을 말하지.」
「형님 지금 울고 있는가요? 갑자기…… 왜 그래요? 제가 남자의 눈물을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때를 생각하니까 잠깐 울컥한 거라네. 주책없이…….」
그녀는 윤희중를 끌어당겼고 마치 빨아들일 듯했다. 하인숙이 입술을 너무 격렬하게 물어뜯어 그는 소리를 지르며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다시 침대로 끌어당겼고 바지를 벗겼다. 그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과 커다란 검은 눈동자는 무언가를 묻고 싶어 했다. 그녀가 몹시 당황한 윤희중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속삭였다.
「이건 제가 생각한 건데요…… 미안하지만…… 당신과 저와의 첫날밤의 특권이 여자에게 있지 않을까요? 저는 그 특권을 누리고 싶어요. 왜?! 여자들은 남자들처럼 행동할 수 없는 거죠?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어요. 시대가 변하겠지요. 그들이 세상으로 고개를 쳐들고 나올 겁니다. 다만 긴 시간이 필요하지요.」
그녀는 윤희중이 그녀 아래쪽에 눕도록 했다. 그리고 속옷을 벗어던지고 그를 올라탔다. 침대가 부스럭대다가 삐걱거렸다.
그는 그날 저녁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녀가 가볍게 코를 골았던가…… 그때 그는 창문을 통해 별빛이 내리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날 밤 모든 걸 그녀가 주도했고 그는 완전히 수동적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는 호모이긴 했지만 양성애자이면서 동성애자라는 말씀이군요. 그래도 그만하면 다행이네요. 하인숙이 사디스트이거나 사도 마조히즘적 취향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네. 날 유린한 건 아니었어. 그러니까 완전히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이지는 않았지. 다시 말하면…… 그런 변태는 아니었다네.
날 침대에 묶어놓고 채찍을 휘두르거나 칼로 몸 여기저기를 긁어서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았어. 자신을 그렇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순천으로 내려온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네.
순전히 내 합리적인 추측이네만…… 자기의 여자를 찾아서 스스로 가족의 간섭이 없는 곳으로 도피를 한 거겠지. 아니면 가족들로부터 집안 망신이라고 파문을 당하고 쫓겨났을 수도 있어.
그리고 다시 순천에서 진주나 마산, 부산 쪽으로 계속 이동을 했을 것이네. 그 여자는 낭만적인 면이 있고 바다를 좋아했으니까. 살아있건 죽어있건 간에 부산이 마지막 피난처이었을 거야.」
「역시 지금도 못 잊고 계시군요.」
「그렇지. 그러나 연락이 끊긴 지는 오래되었어. 그때 만나고 나서 몇 년 후부터는 확실하게 끊어졌지.」
「소설에서는, 그 여자는 개성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윤곽은 갸름했고 눈이 컸고 얼굴색은 노리끼리했다. 전체로 보아서 병약한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좀 높은 콧날과 두터운 입술이 병약하다는 인상을 버리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라고 했거든요.」
「그건 작가가 제대로 묘사했다고 할 수 없네. 그때 술을 마시면서 그 여자의 인상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이야기했었거든. 그러니까 묘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알고 있던 다른 여자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어떤 배우의 이미지가 끼어들어서 뒤섞여 버린 거지.
아무튼 그건 아닐세. 눈이 크고 높은 콧날은 맞는데 병약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네. 예쁘지는 않지만 아주 아주 개성적인 여자였지. 오히려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네. 우리 같은 촌놈들을 약간 멸시하고 우습게 보는 눈치였지.」
「그때 방바닥 비단 방석에 화투짝이 흩어져 있었나요?」
「그날 밤에 하인숙이 거길 무슨 이유로 오게 되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네. 그러나 화투를 치거나 술을 마실 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니었네. 그건 분명하지. 왜냐하면 그 여자가 그 자릴 어색해하는 눈치가 역력했고 계속 무슨 할 일이 있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거든.」
「그러면 손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고 하인숙이 ‘목포의 눈물’을 부른 것은 아니군요.」
「정통 성악을 전공한 음악 선생님이 그런 하찮은 유행가를 부를 리가 없지. 그네들은 유행가를 뱀을 보듯이 혐오한다네.
다시 말하자면 그가 이리저리 재주껏 지어낸 거지. 그게 멜로드라마를 쓰는 작가의 작업 방식 아닌가. 내가 나중에 비평가들의 글들을 모아서 다 읽어보았지. 그런데 그렇게 그런 말을 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태도를 돌변하여 온갖 찬양의 소리를 늘어놓았다네. 도대체 근거가 없는데 찬양 일색이야. 역겨워서 토할 것만 같았네.
그가 뭘 대단한 걸 썼다고……
나중에서야 어디서 읽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어떤 잡지사로부터 청탁을 받았는데…… 그게 사상계였을 거야. 마감에 맞추지 못해서 쩔쩔매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급하게 쓴 게 그 소설이었는데 겨우 완성하고 나서도 자신이 없어서…… 그 무렵 글깨나 쓴다는 S대 출신 동인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이게 무슨 소설이냐, 차라리 찢어버려라’ 라고 하면서 한결같이 지나치게 신파 같다고 혹평하였다네.
그들이 정확하게 꿰뚫어 본 거라니까. 그 소설의 속물근성을 말이야.
그래서 자신을 잃은 작가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까까지 생각했는데 작품이 좋지 않으면 싣지 말라며 다음에 더 좋은 작품을 보내겠다는 추신을 덧붙여 편집장에게 보냈다는 거지.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그 잡지에 게재 후 작가는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고 하더군. 너무 심하게 많이 받았어.」

9. 나는 지난 해 (2013년) 늦가을쯤에 내려왔다.
도사동 일대가 많이 변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많이 변할 줄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30년 전 서울로 올라간 후 처음으로 다시 왔기 때문이다. 별량면 마산리 쪽으로 한참이나 더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산리 거차 방조제가 보이는 근처의 비어있는 농가를 임시 거처로 삼았고 그 할아버지는 건너편 황룡사가 있는 구룡리에 15년 넘게 자리를 잡고 혼자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의 집 근처 해안가에는 호동 방조제가 있고 지금은 폐교가 되어 흉물스럽게 텅 비어있는 별교초등학교가 있다.
내가 내려와서 (“제가 순천 출신이고 우리 조상님 산소가 여기 별량면에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동네 사람들과 의식적으로 어울리며 자리를 잡고 난 후, 한겨울 바닷가에서 자주 긴 산책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몇 번 마주쳤는데 그러고 나서 처음에는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점점 자주 만나게 되니까 인사말이 길어지면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인간들의 관계에서 흔히 있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미스터리를 간직한 사람으로 보였고 처음부터 먼저 마음을 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지는 않았다. 그가 훨씬 연장자였으므로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순서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는 몇 개월이 지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그 소설에 나오는 실제 윤희중이라고 소개했다.
그때는 4월이었다.
달콤한 4월! 숱한 상념이 그대와 결합했구나, 마음이 합친 것처럼. 엹은 자주색 라일락꽃이 벌써 피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나고 기억과 욕망은 뒤섞인다.
그러나 우리가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였다.
「엉뚱한 소리가 아닐세……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네.
내가 현실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인 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가? 다시 말하면 허구적으로만 느낄 뿐이고 실제적으로 느끼지 않는다는 건가? 사실이 허구일 수 있고 허구가 사실일 수 있지 않겠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진정한 불가지론자는 아닐세. 나는 그 작가가 진실한지 아닌지, 그 작가가 그걸 주장할 자격이 있는지 아닌지, 그 소설의 내용의 진실성을 보장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네.
다만 뼈와 살과 피로 만들어진 살아있는 피조물로서 그 소설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뿐이라네.」

그날, 거차 방조제에서 바라본 하늘은 잿빛이었고 파도가 거센 물결을 일으켜 조수의 방향을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내 흰 머리카락이 바다에서 불어 닥친 바람에 휘날리며 얼굴을 가렸다. 늦은 오후가 되면서 깊은 정적 속에 하늘이 칠흑같이 변했고 잠시 후 천둥이 쳤다. 마을의 똥개들이 미친 듯이 짖어댔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바다 갈매기들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듯 꼼짝하지 않고 방조제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녀가 첫사랑이었을까? 왜 사랑의 감정에 첫 번째가 있고 마지막이 있어야 되는가? 그렇다면 중간도 있어야 하고 아니면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를 매겨야 할 것이 아닌가?
오스카 와일드는 남자는 항상 여자의 첫사랑이 되려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사랑이 되려고 한다. 라고 말했지만, 파스칼은 사랑에는 연령이 없다. 그것은 어느 때든지 생길 수 있다. 고 하였다. 폼페이 유적지의 낙서, 많은 여성과 사랑을 나누었다 multas puellas futuisse. 희대의 바람둥이 돈 후안은 한 여자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첫사랑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인가.
지금…… 30년이 지났는데…… 그 잊혀져가는 상처를 새삼스럽게 들춰내야만 할까? 옛 기억들이 순서대로 부드럽게 풀려나올 수 있을까? 나는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겸허하게 인정해야만 할까? 나는 행복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그때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후회하고 있을까?
어쨌거나 내 생애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있다. 첫사랑 여자하고 결혼을 해서 살았던 아내하고.
그녀의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그럴 수밖에 없을까.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건 자기보존의 본능에 따라 그녀를 잊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에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녀에 관한 일이라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막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서 그녀를 깔끔하게 몰아냈는가?
그녀와 미련 없이 완전히 헤어진 것은 79년 막바지 겨울이었고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그보다 훨씬 빠른 7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유신정권이 한창 맹위를 떨치던 시절에 만나 그 정권이 붕괴되고 나서 다시 신군부가 득세하고 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끝난 것이다.
그 모든 게 불확실했던 엄혹한 시절에 우리는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고 시대 상황과는 무관하게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그 시절에 사랑놀이는 특별한 사치품이 아니었겠는가.
나를 먼저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내적 영혼이 아니라 아름다운 외모였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얼굴, 우윳빛의 깨끗한 피부, 여자로서 아담한 체격, 말을 할 때마다 드러나는 고른 치아, 그녀의 아름답고 미묘한 미소.
그녀는, 그 시절에는 인조 속눈썹은 대유행이었지만 색조 화장품이나 부분 화장품이 유행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아주 얇게 발랐고 단정하게 깎은 손톱에는 복숭아색 매니큐어를 칠했다. 그녀에게서는 늘 옅은 라벤더 향수 냄새가 났다.
그때는 호경기 시절이었고 시대가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옷이나 헤어스타일도 금기가 풀리면서 점점 야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공화국에서 퇴폐적이기까지 가지는 않았다. 정권은 거기까지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자극하기 위해서였는지 자주 아주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고 구두는 당시 유행했던 앞바닥에 두꺼운 창이 달린 굽이 아주 높은 하이힐을 신었었다.
우리가 처음 어떻게 만났더라? 내가 고시 공부한다고 미팅을 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미팅에서 만난 건 아니었고 친구들 중에서 누군가 소개를 했을 것이다.
내가 몇 달 후 그녀의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고시 합격을 눈앞에 둔 명문 S대 법대 출신을 아주 노골적으로 얼마나 흡족하게 반겨주었던가.
그때 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곧 판검사 사위를 보게 되었다네! 집안의 경사이지!」
김민정은 그러고 보니 어머니를 쏙 빼다 닮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아름다우니 딸 역시 아름다웠던 것이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너무 쉽게 재빨리 연인이 되었다. 나는 너무나 큰 횡재를 하였으나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이 저물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고 바닷가 시골에서 혼자 살고 있으니 자주 자기연민과 망상에 시달린다. 그녀 역시 지금 살아있다면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 자기 방어적 입장에서 자신을 속이고 여전히 날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 이렇게 세월이 흘렀으니 가슴 속에 채 꺼지지 않은 불꽃이 남아있을 리 없다. 그날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그날 동숭동 다방은 날씨 탓인지 한산했고 분위기는 죽은 듯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와 헤어지기 위해서, 결별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렇게 입을 꼭 다물고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왜 얼굴 표정이 의젓하고 의기양양했었는가.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스쳐지나가지 않았던가. 그녀는 아무런 고통도 내비치지 않고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선언할 수 있었던가. 나는 왜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심장이 망치질을 하고 격렬하게 고동을 쳤던 것인가. 왜 나는 굵은 눈물방울을 하염없이 흘렸던 것인가.
나는 지금도 그 싸늘한 눈초리를 떠올리면 등에서 소름이 끼친다. 그 순간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한때는 친구들이 우리를 두고 그림처럼 매우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분명히 우리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었다.
나는 그때 한창 사랑에 미쳐있었으니까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했다. 변덕이 심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조절했으니 나는 그때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뭐든지 다 알고 있었던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무언가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인가. 기억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고 해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세월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어서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 여자의 입술, 가슴, 허벅지, 다리는 어떻게 생겨 먹었던가. 지금 도저히 기억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그녀의 몸 위에서 헐떡거리며 환희에 찼던 밤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서울에 내팽겨쳐 둔 아내에게 동시에 어설픈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받은 모욕과 상처는 놔두고 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집에 살면서도 서로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기로 하여 다른 방을 쓰고, 밥을 각자 알아서 먹었다. 아내는 무엇 때문에 나를 의심한 것일까? 내가 그녀를 속인 적이 있었던가?
그럴 거야. 무수히 속였을 거야. 지금도 속이고 있고.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아내는, 「30년 가까이 매일 밥상을 차려줬는데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실상 이혼 상태 혹은 별거 상태였다. 그렇지만 사회적 이목과 체면 때문에 가정법원에 이혼 조정을 신청하거나 이혼 소송을 제기하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하고 지냈다.
나는 서울에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가출을 꿈꿔왔다. 아내에게 어떻게든 양해를 구하고 아니면 쪽지라도 남겨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주 필요한 것만 간단히 챙기고 야반도주하는 것처럼 떠나왔다.
그날 아침 아내가 아직 깨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섰다.
아내와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은행에 있는 잔고를 전부 인출한 다음 은행계좌를 폐쇄했다. 그러고 나서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여행했다. 어차피 아내는 내가 집을 나가도 찾을 생각이 없었겠지만…… 그래도 아니다 싶어서 나는 집을 완전히 나왔으니까 찾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가져온 게 거의 없었다. 서울에서 보낸 내 삶을 떠올리게 하는 어떤 것도 가져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작성일:2024-02-29 13:31:17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