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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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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늙은 소매치기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4-01-27 12:11:01
조회수
32
늙은 소매치기



우리는 노인의 지혜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차라리 노인의 무모함, 어리석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 T.S. 엘리엇


어젯밤에는 잠깐 비가 내린 것 같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땅이 젖어있고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조금 남아있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결혼식에 가는 길이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육촌 동생이 딸이 결혼한다고 갑자기 연락이 왔던 것이다. 토요일 오후여서인지 지하철 안은 만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상당히 분비는 편이었다. 승객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거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는 요즈음 웬일인지 이유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가슴 속에 맺혀있는 우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나이 탓일 게다. 늙어가면서 무료한 나날들이 권태스럽다. 이를 벗어날 길은 없는가. 그는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들이 부드러워지도록 오므렸다 폈다하면서 계속 꼼지락거렸다.
그때 그 중년 사내의 검은 신사복 바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왼쪽 뒷주머니가 약간 볼록한 게 지갑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 지갑 속에는 고작해야 약간의 현금과 신용카드, 명함, 회원 카드가 들어있겠지. 그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그는 뒷주머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묘한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무슨 생각을? 그는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전철이 곡선 커브를 돌때 약간 휘청거리며 흔들린다. 그는 정신을 놓은 채 엉뚱한 생각에 잠긴다. 전철은 어느덧 잠실나루역을 지나고 있다. 전철이 다리 위를 지나며 덜컹거린다. 그는 역삼역에서 내려야하는데 한참을 지나쳐 온 것이다. 그는 새삼스럽게 전철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 중년 사내는 어느 역에서 내려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무렵, 토요일 오후 심심해서 강남고속터미널에 나갔다. 그는 명품 가방을 든 여자들이 지나갈 때마다 유심히 살펴본다. 한 번은 정장을 차려 입은 중년 부인의 뒤를 눈치 채지 않게 가만가만 따라가다가 무슨 짓인가 싶어 그만두었다. 왜? 저렇게 부자인 여자가 외제 자가용을 놔두고 버스를 타려고 하는 것일까? 혹시 명품 가방이라는 게 이태원에서 나온 가짜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고, 한참 중국 요우커들이 몰려오는 계절이어서 오랜만에 명동에 한 번 나가보기로 했다. 거리는 넘치는 요우커들로 너무 붐볐다. 중국 사람들은 주머니에 현찰을 듬뿍 넣고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벌써 거리에 어둠이 내렸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들이 떠들썩하게 지나가고 있다. 그는 그 뒤를 계속 조심스럽게 그들이 눈치 채지 않게 따라갔다.
손이 부드럽고 유연하도록 손가락 끝이 마르지 않도록 호주머니에 넣어둔 젖은 헝겊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인간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손 때문이다. 손은 창조적이다. 손은 천재다. 손은 얼마나 능숙한가. 게의 집게 같은 손. 길고 희고 가늘고 차갑고 부드럽다. 손은 연장 중 연장이다. 손은 손을 씻고 손가락은 손가락을 씻는다. 손은 굴신력과 예민한 감각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내가 실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그 솜씨가 어디 가겠는가 말이다. 최고의 솜씨가. 약간의 긴장감이 필요하지. 그래야만 손끝이 더욱 예민해지니까. 그는 너무나 흥분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정신을 집중해야한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사진을 찍으며 일행과는 떨어져 있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하나 있다. 유네스코 길의 명동예술극장 정면 쪽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얇은 잡지를 들어 일행과의 시야를 가리고 나서 두 개의 손가락을 가방 속으로 넣어서 중지와 검지 사이에 지갑을 끼어 막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그 여자가 무슨 낌새를 느꼈는지 옆으로 고개를 돌렸고 비명을 지르려고 하는 것처럼 그녀의 푸른 정맥이 튀어나온 목울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온몸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즉각적으로 손을 빼고 뒤돌아서서 걷다가 좁은 뒷골목으로 빠졌다. 만약 현장에서 붙잡혔다면 어떻게 했을까. 큰 목소리로 무조건 생사람 잡는다고 호통을 치면 될 것이다. 나는 늙은이이고 그들은 중국인이니까.
며칠 후 다시 명동으로 나갔다. 옛날 일을 추억하면서. 퇴근 시간 무렵이다. 그는 중국대사관 건물에서 명동난타극장 쪽으로 상점들을 기웃거리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젊고 예쁜 여자 소매치기가 여자 옷가게에서 고객들이 옷을 고르는 순간을 노려 어깨에 메고 있는 백 속으로 그 앙증맞은 손을 넣어 지갑을 빼내려고 하는데, 그게 가게 구석에 있는 거울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가게 점원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가 재빠르게 거울을 가리고 나서 말했다.
“얘야, 아직도 고르는 중이야?”
그녀가 긴 검은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며 “아빠 마땅한 게 없어.”라고 말했다. 그녀가 내쉬는 숨결에 담배 냄새, 비누 냄새, 향수 냄새가 뒤섞여 있다.
그들은 큰길로 나왔다.
“왜? 그랬지요?”
“글쎄, 설명하기가 불가능하지. 어서 가기나 하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재빠르게 사라졌다.

아, 옛날이여. 그 시절이 생각난다. 그 시절이 그립다.
그들은 부산에서 시작했다. 다섯 명이서 부산역이나 광복동 번화가에서였다. 그리고 여름철이면 해운대 해수욕장이 주 무대였다. 두 사람이 서로 멱살을 잡고 언쟁을 벌여 싸움을 시작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멋도 모르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 사이에 세 사람이 엄격하게 분담해서 구경꾼들의 지갑을 빼내 이리저리 옮겼다.
그들 다섯 명은 오랫동안 변신을 거듭하며서 손발이 척척 맞았다.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여러 장소를 번갈아 가며, 계절이 바뀌면 대구 공평동 일대와 경주역까지 원정을 가고 하면서 수십 번인지 수백 번인지 한 번도 들키지 않고 계속 작업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분배를 둘러싸고 늘 티격태격하고 분쟁이 생겼다. 바람잡이들은 반쯤 은퇴한 치들이었고 그들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진짜 역할은 세 사람이 했고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이 분배할 몫의 70프로를 가져갔다. 그 세계에서 터줏대감으로 대선배임을 내세워서. 그래서 그 셋은 어느 날 갑자기 서울로 무대를 옮겼던 것이다. 그들의 주 무대는 중립지대인 명동거리와 서울역이었고 가끔 종로파가 장악하고 있는 동대문 5가 시외버스터미널에도 갔다. 그들의 양해를 구하고 30프로를 떼어주는 조건이었다.
소매치기에서 세 명은 딱 알맞았다. 혼잡한 틈을 이용해야한다. 한 사람은 살짝 몸을 부딪쳐서 먹잇감의 균형을 조금 무너뜨리고 또 한 사람은 그 순간을 가려주는 역할을 하고 손기술이 제일 좋은 기술자가 실제로 지갑을 꺼내고 빼낸 지갑은 그 다음 단계에서 역할을 끝마친 첫째 또는 둘째에게로 넘겨주면 그는 곧바로 자기 호주머니에 넣고 현장에서 빠져나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밤이 으슥해서 술에 잔뜩 취한 취객을 만나면 작업은 더욱 쉬워진다. 한 친구가 역시 술에 취한 척하며 괜히 시비를 걸어 상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혼을 빼놓고 그 틈을 이용해서 두 번째 친구가 말리는 척하며 지갑을 낚아채고 세 번째는 그걸 받아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좋은 시절에, 그땐 호흡이 너무 잘 맞았고 작업을 하면서 항상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물론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지갑을 빼내서 김이선에게 건네면 그는 돈만 빼고 나서 사라져버리고, 빈 지갑은 다시 박주봉을 거쳐서 그에게 돌아오면 그가 주인의 안주머니로 돌려주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주인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지갑은 언제나 그의 중지와 검지 사이에서 또는 중지와 약지 사이에 정확히 끼어있었다.
마법의 힘은 침묵과 비밀과 수수께끼 속에서만 존재한다.
얼굴은 편안하고 느긋하다. 긴장감과 공포를 숨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중적이고 상반되고 온갖 복잡다단한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그러나 신체의 모든 감각을 최대한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손은 뇌수술을 하는 신경외과 의사의 손처럼 섬세하고 예민했다. 연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때처럼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러나 손에 장악력이 있어야 하고 손의 안정성이 중요하다. 작업 도중 미세하게라도 손이 떨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손에 땀이 조금이라도 나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서부터 손을 비비고 문질러서 풀어주어야만 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현장 상황을 면밀하게 점검했다. 언제 시작해야 하는지, 계속해야 할지, 언제 포기하고 접어야 할지, 언제 떠나야 할지, 언제 도망쳐야 할지, 그리고 퇴로를 확인했다.
그 무렵, 그는 몸 관리를 철저히 했다. 키는 172센티미터이고 옷은 수수하게 보통 사람처럼 입었다. 출정을 하는 날은 일찍 일어나서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몸 구석구석을 닦으며 세심하게 목욕을 했다. 손톱의 길이가 중요해서 아침마다 몇 번이고 다듬는다.
보름에 한 번씩 단정하게 이발을 했고 담배도 피우지 않으며 술은 아주 조금 적당히 마셨다. 커피는 하루에 딱 한 잔만 마셨다. 몸을 단단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철봉과 기계체조를 하고 장거리 달리기를 하면서 호흡을 조절하는 법을 연마했다.
그리고 손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 밤이면 연필로 종이에 끊임없이 손글씨를 썼다. 그때 자주 쓰는 단어들과 문장들이 있기는 했다. 가끔은 십계명을 썼다. 그는 문장 부호 중에서 직선인 느낌표 (!) 보다는 곡선인 물음표 (?)를 좋아했다.
그렇게 스스로 정신과 육체를 단련했던 것이다.
쓸데없는 동작은 없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속도가 중요했다. 또한 손가락을 집어넣을 때나 뺄 때의 각도 역시 중요했다.
속도와 각도는 절묘해야 한다. 느려서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 모든 일이란 게 급히 서두르다 보면 반드시 그르친다. 각도 역시 알맞아야 한다. 조금만 틀어져도 인간의 오묘한 감각에 의해 눈치를 채이게 된다.
까다로운 손동작과 정해진 순서. 숙달의 필요성.
그러나 속도와 각도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숙달되는 것이 아니다. 수백 번 혹은 수천 번의 피나는 연습과 수많은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만 천하의 고수가 된다.
그들의 기술은 날로 진화하고 세련되어 가면서 그쪽 세계에서는 최고의 콤비로 명성이 자자했고 특히 그는 이미 전설적인 천재로 통했다. 그들은 점잖은 옷차림에 그러나 도망칠 때를 생각해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근데 분배는 언제나 똑같이 나눴으므로 공평했다. 그들은 약속된 뒷골목에서 만나 아무도 모르게 돈을 분배한 뒤 술집으로 갔고, 그 후에는 각자의 여자를 찾아갔다.
그들은 그때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김이선은 꼬박꼬박 고향으로 송금을 했지만 그와 박주봉은 가진 돈을 죄다 술과 도박, 여자한테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도 도박에서만은 자주 돈을 잃었다. 도박과 소매치기는 다른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때를 새삼 그리워하며 생각했다.
나는 내 손끝을 믿었다. 믿을 건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면도칼을 쓰거나 낚시 바늘 같은 거를 사용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랬으니 한 번도 도구를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으므로 운이 좋으면 제법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빈집털이나 야간주거침입절도, 폭력을 행사해야하는 강도, 퍽치기는 어떤 경우에도 한사코 사양했다.
그 일은 고된 육체적 노동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예술가적인 섬세한 감각과 함께 강인한 정신적 담력이 필요하다. 소심해선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긴장된 순간에는 숨을 들이마신 후 동작이 끝날 때까지 참아내야 한다.
나는 낚시꾼의 손맛을 안다. 바로 그거였다. 내 손끝에 전달되는 짜릿한 손맛.
하지만 나는 감옥을 나온 후 개과천선했다. 소매치기 인생의 그 뻔 하디 뻔 한 비참한 말로가 눈앞에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나도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었다. 나는 출소한 후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단단히 결심을 했다. 처음에는 사당동에서 포장마차를 했고 그 후 오랫동안 중국집을. 그러고 나서 성실한 부동산 중개업자가 되었고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사당동 이면 도로에 작은 건물까지 마련하였다.
30대 중반쯤 결혼을 했고 아들 딸을 낳았다. 그들은 얼마나 훌륭하게 자랐는가. 모두 다 현모양처인 아내 덕분이다. 그러나 아내는 2년 전에 대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아내는 너무 말라서 뼈와 살가죽만 남아있었다. 헛개비처럼 가벼웠다.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하지만 자식들이 너무 무관심하다고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그들의 인생이 있고 그들이 가야 할 길이 있지 않은가.
또다시 그 허무감을 이기지 못하고 그 짜릿한 손기술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내일모레면 공자님이 말씀하신 종심 (從心)의 나이인데 나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될 터이다.
죽음보다도 더한 파멸의 길.
아니야, 아니지. 딱 한 번만 그 손맛을 보고 싶어. 그래야만 되는 거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거야. 돈이 문제가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옛날 솜씨를 한 번 발휘해 보는 거지. 할 수 있을 거야. 할 수……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는 사당역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탄 후 교대역 사거리나 강남역으로 갔다. 또는 교대역에서 3호선 지하철을 갈아타고 강남고속터미널로 가거나 충무로역에서 내린 다음 명동거리로 나왔다.
그가 그때 먹잇감을 찾아서 배회한 곳은 주로 강남고속터미널,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강남역이나 삼성역 부근, 가끔은 예술의 전당 그리고 명동거리였다.
토요일 오후 백화점 안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볐다. 정말 좋은 날이다. 에스컬레이터에도 사람들이 빈틈없이 서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반투명 플라스틱 벽에 실루엣이 어린거리는 것만 조심한다면 작업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30센티미터 정도 차이가 나므로 옆으로 매고 있는 윗사람의 가방에서 지갑을 빼내기가 안성맞춤인 것이다.
그는 3층에서부터 목표물을 정하고 몸을 약간 옆으로 비틀어서 한 쪽 벽을 가렸다. 딸과 어머니인 듯한 여자 둘은 서로 정신없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녀들은 왜 명품 가방을 매고 다니는가. 지퍼 채우는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 것인가. 그게 한때의 유행인 것 같기도 하다. 에스컬레이터가 8층 꼭짓점에 닿기 직전이다. 실루엣은 사라지고 없다. 그는 그 순간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손끝에 지갑이 걸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낚아채 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 순간 가방 속에서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얼른 손을 빼내고 나서 방향을 바꿔 아동복 코너 쪽으로 돌았다.
그 다정한 모녀는 계속 9층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의 오른쪽 손목이 누군가의 억센 손에 잡혔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깨닫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니 틀림없이 강력계 형사였다. 그가 빙그레 웃고 있다. 웃기는, 징그러운 녀석. 손목을 비틀어 빼내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 억센 손을 당할 수는 없었다. 온몸이 파르르 떨리면서 완전히 굳어졌다. 꼼짝도 할 수 없다. 그저 꿈결처럼 아득할 뿐이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 옛날 명동 국립극장 앞에서 일이 그 순간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었다.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달아나고 그만 혼자 잡혔다. 매우 혼잡한 틈을 재빨리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래서 상습과 특수절도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늙은 몸으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빈틈을 노릴 수도 없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고 이대로 끝내야만 하는가?
2호선은 승객이 가장 붐비는 것으로 악평이 나있었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 그날도 퇴근 시간에는 혼잡했다. 남자는 변태인 모양이다. 그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엉덩이에 자신의 성기 쪽을 밀착시킨 채 손을 앞으로 돌려 유방을 더듬을 태세였다. 그러나 그 순진한 여자는 치한이 몸을 밀착시키고 더듬어도 너무나 무서워서 도저히 소리를 지르지 못할 것만 같다. 절호의 기회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는다. 치한은 여자한테 정신이 팔려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몸을 미세하게라도 자극해서는 안 된다. 그의 육감이 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빼내려는 찰나였는데 어쩐지 느낌이 허전했다. 손가락의 힘이 약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갑이 미끄러지면서 잘 끼워지지 않아 애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딱딱하게 굳어서 무뎌진 손가락들은 하릴없이 헛되이 곰지락거리고 있었다.

“김정진씨, 그 옛날에는 김쌍기씨였던가, 당신을 형법 제329조의 절도죄와 제322조의 상습범의 현행범으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형사소송법 제244조의 2의 규정에 의해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변호인의 참여 등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형사인가? 사람을 잘못 본 게야. 잘못 짚었다고. 난 늙었어, 할아버지이지. 손자 놈 사진 보여줄까. 그때, 그때 말이야 늙었으니까 다리 힘이 없어서 균형을 잃고 그 남자 쪽으로 기울어진 거야. 너무 혼잡했다니까. 그것뿐이야, 안 그래?”
“그만 두시죠. 헛소리 그만 두시란 말입니다. 강력계에서 5년 동안이나 소매치기만 전담했는데 제게도 감이 있단 말입니다.
3개월 동안 다섯 번 이상 시도했지요. 그 이상일지도 모르죠. 제가 미쳐 못 본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어떻습니까?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정당한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행위는 경범죄처벌법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건 빼겠습니다.”
“……”
“할아버지, 오늘 커피는 제가 살게요. 오늘은 가장 긴 하루였지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했습니다. 수갑을 채우지는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뒤쪽을 흘긋거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뒤에서 노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테니까요. 그나저나 이번 일이 끝났으니 속이 다 후련하군요. 3개월을 미행했으니…… 또 3개월은 소매치기 전과범들을 조사했고요.”
“……”
“이제 할아버지인데 손이 무뎌져서 잘 안 되겠지요. 이제는 녹이 슬었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혼자서 말입니다. 왜 바람잡이를 두지 않았어요. 늙은 바람잡이라도……. 자신의 손기술을 너무 과신한 것이겠지요.”
“……”
“제가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어요. 늙은 할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잘못 본 거라고……? 그 나이에……?
하지만 계속 미행하다 보니까 틀림없었어요. 제 육감이…….”
“……”
“세 번의 경우에는 가방과 핸드백에 이미 손을 접촉했으니까 소매치기에 착수한 것이 되지요. 세 번은 모두 거의 성공할 뻔 했지요. 옛날 솜씨 어디 가겠어요. 그런데 재수가 없었지요.
손이 지갑에 닿고 빼려는 순간 느닷없이…….
그 정도면 충분하지요. 옛날부터 직업적으로 소매치기를 했고 이번에는 3개월 동안 다섯 번 시도했으니 이를 연결하면 상습으로 충분히 엮을 수 있지요. 잘 아시겠지만 상습이 되면 형이 가중됩니다. 제가 한 건 올린 것 아닙니까.”
“형사 양반,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네. 한 마디로 말해서 젊은이의 관점에서 노인을 바라보기 때문이지. 옛날 그 시절이 생각났거든. 우리끼리이니까 어떻게 할 수 없겠나?”
“무슨 말씀인가요?”
노인은 주저주저했다. 그는 형사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아직 한모금도 마시지 않은 식은 커피 잔을 내다보며 우물쭈물 말했다.
“형사 양반, 내가 크게 한 장을 쏠 테니 눈감아 주시게. 내가 천려일실이라고 실수한 거라네. 다시…… 다시 말하지만, 나는 늙었네, 늙었어, 할아버지이지.”
“한 장이란 게?”
“1억을 말하는 걸세,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네만……. 그 정도면 월급쟁이가 평생 만져보기 힘든 목돈이 될 게 아닌가.”
강력계 형사의 얼굴이 분노와 짜증과 경계심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평정심을 잃었다. 형사의 예리한 눈빛으로 무섭게 노려본다. 이제부터는 피의자 대하듯 거칠게 말하기 시작했다.
“뭐? 목돈. 그렇지, 목돈이지. 내 반 지하 보증금이 5천만 원이니까. 씨발 더럽게 구네. 소매치기 주제에 사람을 뭘로 보구서.
여기가 경찰서 조사실이었다면 네놈을 코피 터지게 짓밟아버렸을 거라고. 그걸로는 어림도 없지. 사당동에 있는 그 건물을 통째로 준다면 모를까. 그게 부동산에 알아보니까 한 30억은 나간다고 하더라고. 월세도 5백이나 6백 정도 나오고.”
“그걸 어떻게?”
“다 알 수 있지. 지문이라는 게 만인부동 (萬人不同)이고 종생불변(終生不變)이라고 하지. 당신 지문을 겨우겨우 어렵게 채취했지.
요즈음은 지문 데이터베이스를 입력하고 검색 프로그램을 돌리면 다 나오지. 30년 전인가? 용케도 잘 빠져나왔더군. 상습도 빠지고, 합동도 빠졌으니까.
전관예우를 듬뿍 받은 막 개업한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를 그들이 남몰래 사주었으니까 가능했겠지. 겨우 3년을 살고 나왔더군.
안양교도소에서……. 그런데 교도소를 나온 후 지금까지 30년을 훨씬 넘게 더 해먹었으니 빌딩까지 살 수 있었겠지. 정말 천재이지, 소매치기에도 천재가 있다면 말이야.”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었구먼. 난 출소한 후 새사람이 되었소. 믿지 않겠지만 말이요. 아들은 의사가 되었고, 딸은 성악을 한다고 이태리에 가 있지. 손자도 있고. 그런데…….”
“새사람이 되었다구요? 연목구어라고요. 끝까지 철가면을 쓰고 살았겠지요.”
“그건…… 아냐……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래서, 개명까지 하고……. 얼굴 성형수술은 안했나요? 소매치기하는 작자들은 정말 역겹지요. 어두운 인간들, 인간 쓰레기들 아닌가. 너희 놈들은 인격적으로 대우해줄 필요가 없어! 언제든지 본색이 나타나거든. 강력계 형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소매치기들이지.
네놈들은 무슨 짓이든 하지. 형사들 중에 칼 맞아 죽었다고 하면 대개 소매치기 검거하다 당한 경우이거든. 더러운 자식들! 내가 네놈의 어두운 과거를 다 까발리겠어! 그 두꺼운 가면을 벗겨내는 거지! 의사 아들이 이걸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차라리, 날 죽이지 그래. 말 실수한 걸 가지고……. 제발 소리를 줄이라고. 다들 듣겠어?”
“다들 들으라지. 늙은 소매치기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여주고 싶군요.”
“늙은 소매치기……. 나라는 인간은 그 한마디로 돌이킬 수 없게 단번에 결정되어 버렸군. 그 한마디가 반평생 쌓아 올린 것을 단숨에 무너뜨려 버리는 군.”
“자업자득인거지, 자업자득. 내가 네 놈들 때문에 몇 달 동안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요.
개자식들! 너희들은 두말할 것 없이 개자식들이지!”
“그렇게 말해도…… 할 말이 없구먼. 그게 형사가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렇지, 형사가 일을 하기 위해서 돌아다녔지요. 당신은 김이선을 알고 있겠지. 모를 리가 있나? 소매치기 전과범들의 목록을 자세히 검토했으니까. 딱 짚이는 게 있더라고. 그래서 본적지와 고향을 찾아낸 거요. 그 사람 이야기를 해줄까? 몹시 궁금할 텐데…….”
“……”
“내가 그 사람을 찾아서 고흥까지 내려갔지요. 마을 뒤 쪽 산골짝에 움막을 치고 혼자 살면서 보신탕용 똥개를 기르고 있더구먼.
모진 고문의 흔적이 아직까지 온몸 여기저기에 남아있더라고. 얼마나 가려운지…… 니코틴 때문에 누렇게 물든 손가락으로 연신 상처 자국을 긁어댔으니까.
형사를 보더니 기겁을 하더구먼.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막 울더라고. 묻지도 않은 말까지 다 털어놨어.
몇십 년이 지났지만 그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지요. 어찌 잊어버릴 수 있었겠어. 감추고 싶은 어두운 과거이지만 말이야.
몇 년 동안이나…… 배운 게 그거니까…… 당신이 구속된 후 다른 멤버를 구할 수 없어서 둘이서……. 그 박주봉인가 하는 작자하고……. 그런데, 당신이, 최고의 고수가 빠지니까 잘 될 리가 없었지. 그때 경찰 끄나풀이 미행한다고 생각해서 명동을 피해 다녔고 영등포역이나 가끔 서울역에서만 작업을 하였는데.
그날은 가을비가 질척질척 내리는데 영등포역에서 작업하면서 날쌘돌이 박주봉은 손기술은 서툴지만 눈치가 귀신같아서 어느새 냄새를 맡고 쥐새끼처럼 빠져나갔다고 해요. 정말 쥐새끼처럼.
그리고 여수에서 죽은 사람 걸로 신분세탁을 한 후 새 주민등록증과 여권을 마련해서 옛날 부산파 사람들과 함께 일본으로 밀항했다고 하였지요.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김이선도 알지 못하더라고요.
하지만 김이선은 정말 재수가 없었지. 현장에서 강력반 계장에게 붙잡힌 거였어. 그는 처음에는 완강히 버텼다고 하더군요. 자기 혼자서 했다, 서투른 도둑이 첫날밤에 들킨다고 이게 처음이다, 그런데 재수 없게 걸리고 말았다고 우겼다고 해요. 특수절도와 상습에서 빠지려고 말이지.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었어.
그 계장은 엄청난 사디스트라고 소문이 났어. 경찰서 지하실에 있는 보일러실에서 엄청나게 맞았다지. 포승줄로 온몸을 묶어놓고 손목에는 수갑을 채우고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죽도록 얻어맞은 거야. 며칠 동안이나 그렇게 맞고 그래도 불지 않으니까 물고문으로 넘어간 거고 뱃속에 들어있던 똥오줌을 모두 목구멍으로 게워냈겠지. 다음 차례는…….
그러자 김이선은 있는 것 없는 것 다 불었어. 부산과 서울에서 30번 쯤 한 것으로…… 특수절도의 합동과 상습으로 엮였고 다시 공동과 상습이 엮이니까 특가법이 적용되어 15년을 청송감호소에서 살다가 만기 출소했어. 그리고 출소하고 며칠 지나서 결심하고 왼 손목을 작두로 잘랐다고 하더군. 지금도 가끔 환상통 (幻想痛)을 앓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왼쪽 손목이 온전히 붙어있는 것처럼 말이야, 손바닥이 가렵다고 해.
그가 왼손잡이인 건 알고 있겠지. 당신은 어느 쪽이지, 오른손 또는 왼손? 아니면 양손을 다 잘 쓰는 건가?
내가 당신 사진을 보여줬더니 움찔하더니만 아예 두 눈을 감아버리더군. 옛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서 지나갔겠지. 그가 의리는 지킨 거지. 그래도 끝까지 부산에서는 부산파 선배들과 했고 서울에서는 독립해서 자기하고 박주봉 둘이서만 했다고 우겼다고 했으니까.
그 사디스트도 상습과 특수절도로 엮어서 한 건 올렸으니 그걸로 만족했던 거고. 유공자로 표창장까지 받았다고 하더군요.
그 왼손잡이는 당신을 무척 존경했어. 우상처럼 숭배했다고 하더군요. 그 세계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재였으니까,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전설적인 천재였다고 했어요. 예술의 경지였으니까. 그리고 그때 자기들만 도망치게 된 걸 미안해하더군요. 자기들이 서두르면서 실수한 건데.”
“내가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상 더 이상 진학이 어려웠지요. 그래서 부산으로 간 거라네. 거기서 부산파에 포섭되고 나서 일 년 동안이나 독학을 하면서 하루에 열 시간씩 피나는 연습을 했다네. 손기술의 완성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말일세.
극도의 두려움과 중압감이 사라지기 시작했어. 그렇게 됐지. 그러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실전에 투입되었지. 내 기술에 스스로 도취되어서 빠져들었네. 오직 손맛을 느끼는 게 중요했지.”
“그렇군요? 출소한 후 지금까지 30년 넘게 잡히지 않고 활약할 수 있었겠지요. 그거 대단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나요? 그 끈질긴 집념 말입니다. 그리고 머리가 영리하니까 소매치기 한 돈을 술 먹고 노름하며 탕진하지 않고 땅 투기해서 건물까지 장만하고……
자식들은 잘 키우고. 그랬으면 진즉 손을 털었어야…… 너무 과신한 건가. 과유불급이라고 그랬는데. 인간은 끝이 좋아야 하는데…… 내가 뭘 알겠어요?”
“그건 형사님이 오해한거요. 다시 말하지만 나는 30년 이상 완전히 손을 떼고 착실하게 살았단 말이요.”
“난…… 일개 형사에 불과해요. 법률 전문가가 아니라니까. 검사인지…… 판사인지가 판단하겠죠. 그 많은 돈 어따 쓸거야?”
“……”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조서를 꾸미고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그러고 나서 검찰로 송치하는 거지. 행여 부인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모두 명백하게 찍혀있으니까. 오늘도 그놈의 지긋지긋한 야근이겠군. 강력계는 밤샘 근무가 잦아서 저녁이 있는 삶은 언감생심이지……. 이번에 들어가면 오랫동안 살아야겠지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초겨울의 짧은 해가 완전히 저물었다. 카페 안은 퇴근하는 젊은이들로 꽤 많이 붐볐다.
갑자기 그들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노인은 불안하고 초조해서 공허한 눈빛으로 멍하니 형사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눈앞이 캄캄해지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서초경찰서의 호송차가 진즉 도착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작성일:2024-01-27 12:11:01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