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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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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무진기행, 그 후 (2)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4-02-29 13:30:42
조회수
34
5. 여름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하늘은 눈이 아플 만큼 파랗고 구름은 하늘 높이 떠 있는 성긴 새털구름뿐이다. 뜨거운 태양에 염습지의 풀들이 누렇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냇물은 바싹 말랐고 모기떼와 하루살이들만 들끓었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몹시 가물었던 것이다. 그때는 미풍마저 불지 않았고 먼바다로부터 진하게 풍겨오는 짠 염분 성분이 후덥지근한 날씨만큼 사람들을 무척 짜증나게 하였다.
우리는 얼마쯤 지나 다시 만났고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대대동의 번화가 다방으로 갔다.
내가 말했다.
「제가 약간 유치한 이야기를 해도…… 또는 약간 아는 채 거들먹거려도…… 현명하신 선생님께서는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대화가 빗나가면 바로 잡아주시고……
저도 문학청년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 짧은 소설을 단번에 읽었었죠. 하지만 영화를 본 기억은 없네요. 그걸 읽고 나서 감명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약간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왜 아니겠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반세기 전 순수시대의 일이니까요.
현실 세계에서도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는 이거다 저거다, 어느 하나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요.
흔히들 어떤 하나의 정체성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건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거예요. 다들 조금씩 복잡하고 복합적이에요.
그러므로 그가 지닌 전체…… 다시 말하면 모든 면모가 하나로 결합한 게 정체성이라고 봐야겠지요.
누가 작가의 모델이 되었든 간에 그 작중 인물에는 약간씩 여러 사람의 모습이 들어있게 되지요. 누군가……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요…… 작가는 모델을 그대로 복제하진 않는다. 그들에게서 그가 원하는 것만을 취한다. 그의 상상력을 점화시키는 모티프와 주의를 끄는 성격적 특징을 취하여 인물을 구성한다.
작가는 주제를 살리고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인물과 배경, 실재를 조금씩 변형시키고 왜곡하게 됩니다.
그러면 스토리가 소설 속 내적 논리와 인과율에 따라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가게 되지요.
소설이란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가 정확하고 세심한 표현을 찾는 사람의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너무 많이 곱씹은 탓인지 헷갈려서 이제 뚜렷하게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네. 오십 년이 흘렀으니.
그 작가는 그때부터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소설은 너무 잘 썼기 때문에 문단에서 전설이 되었네. 자네도 그 작자가 써놓은 이야기를 읽었다는 거 아닌가. 잔재주가 약간 있었다고 해야겠지.
자네는 물론이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소설을 읽은 것처럼 나도 내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놓는지 알고 싶어서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니까. 그때마다 내가 그 유명한 소설의 진짜 주인공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네. 하지만 그런다고 누가 내 말을 믿어주겠어.
자네인들 믿겠는가?
몇 년 전부터 난 자네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네. 마침내 내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되었지.
내가 직접 책을 쓰지는 못한다고 해도 적어도 실제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있지 않겠나?」
「아무리 인생에서 교훈이 되는 좋은 이야기이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그것은 기억에서 곧 사라져버리죠. 이야기는 글로 쓰여져야만 살아남아요. 어쨌거나 하나의 텍스트를 거쳐야 하는 거죠.
지금부터 선생님 대신 형님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게 편해요.
형님의 이야기는 충분히 근거가 있으니까 글로 남겨야 될 거예요. 회고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자기 변명만 늘어놓으니까 최악이에요. 문제는 글 속에 숨어있는 문학성 혹은 질감 그 자체입니다.
형님의 굴곡진 인생은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의미가 담겨있다니까요.
그 소설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독자들은 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몹시 당황스러워하겠지만 말입니다.
먼저……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해 보세요. 상당히 궁금했거든요. 거기에서는 너무 간단히 처리되었지요.」
「내가 아버지를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네. 그것도 엄마와 함께 방죽길을 걷다가 우연히 보았지. 거동이 몹시 둔한 영감탱이가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지 질질 끌고 다가왔어. 계속 기침을 하면서도 연신 담배를 피워대더군. 눈길에는 뭔가 악의에 차 있었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작자가 내 아버지였어. 우린 얼굴에 닮은 구석이 많이 있었다네.
아버지는 나를 외면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때는 긴가민가했어.
아버지란 작자는 엄마와는 한참을 속닥이다가 거친 말싸움으로 끝이 났어. 아마 돈 문제였을 거야. 엄마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생전 들어보지 못한 상스러운 전라도 욕설을 마구 내뱉었다네.
그래서 내가 당황해서 울어버렸지.
어머니는 평소 내가 뭘 물어보면 그럴수록 더욱 애매모호한 태도로 우물쭈물했거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 그 집에 하인으로 일하게 되었는지, 아버지란 작자와 어떻게 해서 처음 성교를 했는지 아니면 겁탈을 당했는지, 몇 번 만에 임신하게 되었는지, 왜 임신중절을 하지 않고 끝내 나를 낳게 되었는지, 아버지의 그 못된 성격이나 특징에 관해 얘기해준 게 하나도 없다네.
아주 작은 추억이라도 단 한 번도 이야기해준 적이 없었어.
쓸데없이 동네에서 흘러 다니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만 주절주절 말했었지. 그런데 이야기라는 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쯤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어머닌 고향이 경상도 하동이라는 거 외에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어린 시절 등 외갓집 쪽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다네. 혹시나 어디 고아원 출신이 아니었을까 의심도 많이 했었지.
어쨌거나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거라곤 ‘윤’이라는 성밖에 없거든. 그래도 어머닌 뼈대 있는 가문이라는 것을 자주 강조했어.
아버지가 죽었을 때 재산이 남아 있었다면 내가 소송을 제기했을 거야. 그거 있지 않은가? 사생아들이 흔히 하는 친부 확인 소송 말이야. 그 집은 원래 양조장을 한 소문난 부잣집이었는데 이미 거덜이 나서 실속이 없었다네. 자네가 변호사이니까 잘 알겠지만 소송 자체는 어려울 게 없었지. DNA 검사만 하면 되니까.
그 소송이야말로 진정한 마지막 심판의 날이 되었을 텐데……」
그가 시니컬하게 웃으며 새로운 대마초를 꺼냈다. 말린 대마초를 종이에 접어서 만 다음 불을 붙였다.
「자네 한 번 피워보겠나? 어떤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다네.
대마초 꽃을 말린 거니까 효과가 강력하거든. 천국에 갔다 오는 기분을 잠깐 동안이나마 느끼게 되지. 이걸 피우면 뭐든 하고 싶어지고 뭐든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든다네.
그러니까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죄가 아니라네. 그게 범죄라면 범죄의 피해자가 누구란 말인가. 나쁜 악법 중의 악법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있지. 간통죄도 하루빨리 없어져야지. 국가가 오죽 할 일이 없으면 그 따위 법들을 만들었을까.」
그는 꺼진 대마에 다시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깊숙이 빨았다가 길게 내뿜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르는 푸르스름한 연기를 지켜보았다.
「이것도 혹시 내가 꾸며낸 거짓말이 아닌가 모르겠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완벽하게 이야기가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도 작가가 되고 싶었다니까. 나에게도 문청 시절이 있었다고. 그 시절에는 엄청 열병을 앓았었지.
워낙 오랫동안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궁리하면서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왔기 때문이지. 나는 모든 상황을 이야기에 맞춰서 몇 번씩이나 재구성해보았다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작가의 관점은 도대체 공정하지 않더군. 너무 심하게 왜곡을 하고 과장을 하고 미화를 하지.
자네는 법조인이니까 냉철하게 판단하게. 그러니까 날 비난하거나 원망하지는 말게나.」
「소설가는 창조주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성실하고 치열한 작가라면 소설 공간에서 사유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물을 만들거나 작품의 형식이나 소재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자유재량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야기를 꾸미는데 실제 명확한 증거는 필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서사적 충동을 느끼면 자신이 선택하고 창조한 범위 안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인생의 단면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글 속에서 뭔가가…… 절실한 감정이 살아서 꿈틀거린다는 겁니다.
소설의 캐릭터에 뼈와 살을 붙이고 감정을 불러일으켜야 하지요.
작가란 항상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하니까 틀림없이 호기심이 많을 거예요.」
「자넨 무명작가이면서…… 역시나 그럴듯한 이론을…… 설파하고 있구만. 선무당 사람 잡는다고…… 그런데 작가에게 무한정한 자유재량권이 있다고? 그래도 내가 대충 알기로는…… 개연성이니 뭐…… 핍진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한계가 분명히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은 절대적으로 진실해야 한다고 믿고 있네.
소설에서 중요한 건 진실이라니까. 그래서 스토리는 진실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어떻게 엄연한 사실을 마음대로 왜곡할 수 있어? 작가에게도 창작의 윤리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직업윤리라고 해야 하나…… 그게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작가에게 작가의 양심을 져버리고 방종할 수 있는 무슨 천부적인 특권이 있단 말인가?」
「그냥 넘어가죠. 어머니 이야기를 더 해주세요.」
「나는 요즈음 밤이면 위산 역류 때문에 자주 토한다네.」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으시지 그래요.」
「약은 무슨…… 어머니는 그 집에서 무슨 일이건 닥치는 대로 하는 말단 하녀였어. 난 어머니 나이를 몰라. 그때 어머니 역시 자신의 나이를 까먹었을 거라고.
어머니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틈만 나면 멀리 걸어서 공중목욕탕에 가는 일이었네. 그때는 도사동 부근에 딱 한 곳밖에 없었지.
항상 완전히 녹초가 되어 돌아와서는 끙끙 앓기도 했지.
그리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어. 어머니는 낡은 성경책을 끼고 다녔지만 글을 읽지는 못했다네. 어머니는 일자무식이면서도 밤마다 밤늦도록 성경을 목청껏 낭송하였으니 그걸 하느님의 기적이라고 해야겠나? 아니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네도 잘 알겠지만…… 순천은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되던 시기에 선교 기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예전부터 교회가 많았다네.
어머니는 나를 동네 교회에 보내기로 마음먹었어. 내가 교회에 안 간다고 하면 사정없이 막 때렸어.
믿을 사람은 이 세상에 하느님밖에 없다고 하면서 말이야.
나는 맨날 하느님 운운하면서 거들먹거리는 그 목사가 뱀보다 더 싫었기 때문에 교회에 안 가려고 일부러 눈물을 쏟아내며 막 울었지. 실제 그 목사만 보면 울고 싶었다네. 그러니까 배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그럴듯한 연기를 한 거지. 그 순간 이후로 나는 더 음흉해졌고 어른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네.
어머니는 방죽길을 걸으면서 내내 중얼중얼 욕설을 내뱉었지.
그게 쉴 새 없이 저주를 퍼부은 거였어. 그 대상은 틀림없이 하늘에 있는 하느님이었을 거야. 내가 어머니를 사랑했을까? 확신할 수가 없어. 그럴지도 모르지. 아닐지도 모르고. 나는 지금까지도 나를 낳아준 어머니를 결코 용서한 적이 없었다네.
어머니와 내가 살았던 그 집은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자연생태 공원인가 만든다고 하면서 다 파헤쳐버렸으니까. 그놈의 공원 때문에 어머니 산소마저 찾을 길이 없다네. 내가 여기에 내려오자마자 어머니의 무덤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발견할 수 없었어.
얘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 옆길로 그만 새야겠네.
그리고 우리가 겪은 가난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네. 그 시절은 60년대였으니까 지금하고는 다르지. 달라도 너무 다르지. 그 시절에는 모두 가난했으니까 누구인들 잘 살았겠는가. 거기서 거기였지.
그 집에는 방이 두 칸 있었고 벽에는 곰팡이가 피었지만 누런 벽지도 발라져 있었어. 마당에는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지.
그 시절에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어. 마을은 여전했고 더욱더 지저분해졌다네. 길을 따라 늘어선 단층 건물들과 가게들. 사람들이 걸어가는 소리, 나이 먹은 사람들의 기침 소리, 자전거 소리,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가끔 자동차 경적 소리, 통금 해제 사이렌 소리, 온갖 소리들, 길거리에 서 있는 아주 사소한 가로수까지. 나는 그 주변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네.
하지만 어딜 가나 갑갑한 무기력증만 느껴졌지.
가끔 중년의 아줌마들이 무슨 일 때문인지 표독스럽게 욕을 하고 소리 지르고 팔을 휘두르며 싸웠지. 사람들이 모여들어 싸움을 말리다가 도로 물러났어. 좁은 거리에 사람들이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면서 싸움이 계속되었지.
적어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따르면 그렇다네.
고향에 다시 내려와서 세월이 많이 흘러갔음을 새삼스럽게 확인하였네. 공원 만든다고 온통 파헤치며 공사가 진행 중이더군.
지금 낡은 집들, 좁은 골목길, 가로수 길, 콘크리트 전봇대들은 모두 사라져버렸고 시멘트로 매끄럽게 포장한 긴 방죽길만 해안선 끝까지 뻗어있지.」
「그렇군요. 저쪽 산에 올라가면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 산소가 있어요.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묘가 있지요. 하지만 전 그 묘소에 가본 적이 별로 없네요. 까마득해요.」
「내가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거짓말을 한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가 하인숙과 그날 밤 관계를 그토록 세세하게 묘사한 걸 보면 단순히 기록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지어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야겠지. 그는 심혈을 기울여 재구성을 한 거야. 그러니까 내 이야기가 아니라 꾸며낸 소설이란 거지.
지금 생각나는데…… 그가 그해 가을쯤 내게 편지를 보냈다네. 필적은 그만의 뚜렷한 특징이 있었지만 글씨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지. 깨끗하게 정서해서 보낸 것이 아니었거든.
편지의 내용은 그날 밤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달라는 거였지. 그는 어떤 형식이든 스토리를 만들어 글을 쓰고 싶어 했네.
나는 그때 약간 당황했었지.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를 갖고…… 괜히 술기운 때문에 나 혼자서만 간직해야 할 이야기를 어설프게 한 거야. 술을 마시면 혀가 풀리고 혀가 풀리면 말을 많이 하게 되지. 그날 밤 상황은 그렇게 글을 쓸 만큼 흥미진진한 건 아니었으니까 알려줄 만한 게 없다고 냉정하게 답장을 보냈네.
다시 말하면 그가 작가로서 마음대로 지어낸 거지. 자네 말에 의하면…… 그게 작가의 특권이라고 하니까…….」
「형님이 술자리에서 한 두서없는 이야기가 젊은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죠. 사실이 허구와 상상력을 유발한 것입니다. 그게 영감인지 아이디어인지 또는 소재인지 그런 역할을 한 거예요. 실재가 재료가 되고 상상력이 발휘되어 가공하지 않으면 소설이 탄생할 수 없다는 거 아닙니까. 그것들이 공모하고 작당을 해서 한 편의 소설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자네를 보고 있자니 내가 정말 자네를 믿어도 될지 모르겠어.
작가라고 주장하니까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자네는 믿어 줄 텐가?
이건 말일세……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는 털어놓지 않으면서 그저 지나치면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에게 털어놓는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네.
내가 지금 횡설수설을 하고 있는 거야. 자네도 무명작가이긴 하지만 무슨 소설인가를 썼다고 했으니 궁금하긴 할 거야.
변호사가 돼가지고 오죽 돈을 못 벌었으면 소설을 쓴다고 했겠나. 너무 아픈 데를 찔렀나?」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 돈 때문만은 아니지요.
배고픈 변호사는 굶주린 사자보다 무섭다고 했습니다만…… 저도 무언가 쓰고 싶었답니다. 무슨 일인지 한이 맺혀 있었거든요.
오죽했으면 변호사 사무실을 접었을까요.
인생에 곡절이 많거나 심한 심리적 외상을 입게 되면 그걸 치유하기 위해서 글을 쓰기도 하지요.」
「그런 건…… 나에게 해당되는 일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변호사를 하며 돈을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살고 남은 시간에는 소설을 쓴다는 거 아닌가?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네만……
그런데 말일세…… 당신은 오랫동안 소설을 썼다면서…… 왜 여지껏 무명작가이고 그 흔해빠진 문학상 하나 못 받았지……? 그게 의문이라네.」
「그렇게 남의 약점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완벽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완벽한 삶도 완벽한 예술도 없는 거예요.
더욱이 둘 다…… 예술과 삶은 간극이 있고 서로 충돌하니까 둘 다 동시에 가질 수가 없어요.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예술과 삶 중에서 선택했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한 거예요. 속물근성 때문이기도 하고…… 제가 어리석어서 우유부단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중을 싫어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그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글을 써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해요.
저는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신봉하지요. 하지만 도덕주의자는 아니에요. 교훈적이거나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질색이죠.
그러니까 오직 자아를 위해서, 자신을 입증하고,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맞는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는 거예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면 죄다 퇴짜를 맞아요.
팔릴 수 없는 책이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저는 소외되고 결국 소멸되거나 파멸을 맞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미 소멸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게 제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체념해야겠지요.」
「그게 말일세…… 베스트셀러를 쓸 능력이 없는 무능한 작가가 내뱉는 구구한 변명처럼 들리는군.」


6. 바다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였다.
푸른 하늘 아래 멀리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바다는 유혹이고 함정이고 마약이었다. 짭짤한 소금기. 짙은 회색 안개. 바다는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짙은 회색 안개가 자욱한 방파제에서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려는 인간에게 그 바다는 과거에 대한 상실과 그 상실의 자각을 일깨워주었을 뿐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바다의 고요……
밀려와라 그대 깊고 검푸른 바다여
바다는 그 거대한 배를 달을 향해 기울였고
우리 사랑의 굴절에 미소를 보냈다.

물수제비뜨기를 한다. 수면을 차며 날아오르면서 날개를 치는 갈매기. 돌이 하늘 높이 날 수만 있다면. 한 마리 호랑나비로 변할 수 있다면. 돌을 허공으로 날게 하는 꿈은 나를 너무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가 말했다.
「가끔씩 나는 더 깊은 망상에 빠져들어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 다네. 어쩌면 나야말로 그 작가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다시 말하면 나야말로 그 작가란 말이지.
그리고 말이야. 가령 내가 그걸 썼다면 내 자신의 이야기니까 얼마나 구구절절 잘 썼겠어. 왜 내가 그 소설 때문에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냐고. 내가 그걸 쓰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그 소설가는 그걸 쓰고 나서 후일담으로라도 어떤 실존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에 관해 여지껏 함구하고 있다네. 그는 윤희중이라는 작중 인물을 만들기 위해 그 모델인 나라는 인물을 아주 어설프게 축소시키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했네.
그를 어렸을 적부터 잘 아는데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지. 하지만 그가 작가라면 나라고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게 무슨 유치한 오기가 발동한 그런 문제는 아니었네. 그런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니까.
글을 쓴다는 게 필기구와 종이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나도 내 굴곡진 인생에 대해서 스스로 구구절절 쓰고 싶었다네. 나는 나 자신의 천일야화를 쓰고 싶었지.
그러니까…… 그 소설이 끝나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지.
나는 분명히 잘 쓸 수 있었네. 그럴 마음의 자세를 갖추고 있었고 쓰고 싶은 의욕과 갈망이 있었으니까. 내가 글을 쓴다면 그의 스타일을 벗어나 완전히 내 나름의 시각에서 창조적인 것을 쓸 작정이었지. 다시 말하자면…… 완전히 새로운 것을, 완전하게 변용한 것을 쓰고 싶었다네.
그게 소설이 될지, 자서전이 될지, 에세이집이 될지는 알 수가 없었네만…… 사람들이 1964년 이후 내 모습을 몹시 궁금해할 것 같았거든. 내 이야기는 독자들의 중추신경을 건드리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을 밝히게 될 터이니까.
그런데 말이지……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까 많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어. 소설가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는 걸 마침내 깨달은 거지. 그래서 이런저런 책들을 무작정 닥치는 대로 수백 권을 읽었던 거야. 그때는 밤새도록 많이 읽었다네. 눈이 짓무르도록 하루에도 백 쪽이나 이백 쪽을 읽었다니까.
그래도 결국 글이 써지지 않더구먼. 원고지를 단 한 장도 채울 수가 없었지. 울고 싶도록 막막하더군. 세련된 솜씨로 깊은 내용과 재치와 기지가 넘치는 것을 쓰고 싶었는데…… 아무나 쓰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지. 도저히 쓸 수 없더군. 절망적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네. 나는 그때 자신에게 몹시 실망했어.
자네 지금 날 비웃고 있나? 그럴 수도 있지.」
「ㅎㅎㅎㅎㅎ…… 웃음이 나오죠. 그것도 헛웃음이…… 내가 잘 아는 몇몇 변호사들 역시 자신도 글을 써서 책을 낼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요. 하지만 단 한 줄도 못 써요. 그냥 얼치기들이니까요. 형님도 그랬겠네요.」
「변호사들이……?」
「그걸 아세요. 그 사람들 제 잘난 맛에 살고 있어요.」

그날, 우리는 다시 바닷가 방파제 부근에서 만났었다.
그가 말했다.
「어땠어? 엊그제 마셨던 그 시큼한 막걸리 말이야? 떫으면서도 상큼한 맛이 괜찮지 않던가. 모처럼 그런 걸 마셨지. 진한 것하고 연한 것을 비교할 줄 알아야 한다네. 한 가지 맛이 다른 맛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해주거든.
그래서 가끔 대대동의 해묵은 다방으로 간다네. 몇 달씩 걸려서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들리기도 하고. 나는 옛날에 자주 여행을 떠났지. 목적지도 없이 부유하는 노마드를 꿈꾸지도 않았고 발길이 닿는 대로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어딘가에 멈춰 정착하기를 바라지도 않았다네. 그 여행은 다시 이곳 바닷가로 회귀하는 것을 전제로 한 그런 여행이었어. 이곳으로 돌아와야 할 필연적인 이유도 없고 이곳을 사랑하지도 않고 애착도 없지만 말일세.
거기에 설탕을 듬뿍 친 연한 다방커피를 마시려고 갔단 말일세. 그러면 독한 커피 향이 더욱 생각나거든. 거기 오래 앉아서 오고가는 사람들과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잡념에 빠져들지……
특히 젊고 예쁜 여자를 보면 그녀를 눈으로 좇고 마음속으로 그녀의 옷을 전부 벗겨버렸지.」
「그건 심각한 병적 관음증이죠.」
「단지 상상한 걸 가지고…… 그런데 그 작가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어. 왜? 세무서장 조 (趙)와 국어 선생 박 (朴) 선생이라고만 하였을까? 자네가 설명해보게.」
「그들이 단역에 불과할 까요? 스토리의 전개 과정에서 단역으로서 임무를 마치고 곧장 사라져버렸을까요? 특히 조의 역할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죠. 핵심적인 역할을 한단 말이죠. 그가 매개체가 되어 윤희중과 하인숙이 만나게 되니까요.
만약 조에게 이름을 부여했다가는 소설 속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확립돼버려요. 그러면 작가인들 이름을 가진 작중 인물을 아무렇게나 쉽게 처리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런데 소설의 주제와 스토리의 초점은 윤희중과 하 (河)인숙에 맞춰 있어요. 그래서 작가는 두 사람에게 집중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박 선생이 중학교 후배인 것은 사실인가요?」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네. 우리 모두는 같은 중학교를 졸업했지. 그런데 조와 내가 그 작가보다는 몇 년 선배이고 박 선생은 그 작가의 2년인가 3년인가 후배가 된다네. 나는 그때 가정형편 때문에 상고로 갔네만 그들 모두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어.
그나마 우리 중에서 번듯하게 대학을 나온 것은 그 작가뿐이지. 내가 야간 대학 영문과를 나온 것은 훨씬 후 일이야.
그래서인지 조는 어찌어찌해서 고시를 합격했지만 대학을 안 나온 게 커다란 콤플렉스로 작용한 거야.
우리들은 중학교의 선후배로 연결되어 있지. 하지만 그 시절 학창 생활에 대해선 기억하고 싶지 않다네. 그러니까 아련하게 그립다거나 하는 일은 없지.」
「지금쯤…… 이름을 밝혀도 될 것 같은데요?」
「지금…… 뭐 그들의 이름을 밝힐 수 있지. 지금 다들 늙었는데 뭐가 문제되겠나. 조는 조성식이고. 박은 박치순이었네.」
「그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나요?」
「궁금할 만도 하구만. 조성식은 광주로 올라가서 국장까지 승진했다지. 그런데 업체를 세무조사 하면서 돈을 받고 약간의 편의를 봐준 게 정기 감사에서 발각되었다네.
그걸 무마하려고 지역 국회의원을 통해서 여기저기 손을 썼지만 결국 파면을 당했다고 하더군.
지금 무얼 하고 지내는지는 알 수 없지. 뭐? 어디서인가 세무사나 세무법인의 대표쯤 하고 있지 않겠나?
그리고 박치순은 후배이긴 하지만 그때부터 늘 존경하였다네.
인간성이 되먹었거든. 그래서 훌륭한 선생님이 된 거야. 그는 교원자격고시 출신이야. 정식으로 사범대학을 나온 여선생님과 뒤늦게 결혼했는데 그 여선생님은 교장선생님으로 정년 퇴직했고 박치순은 평교사로 끝났다고 하더군.
자식들도 너무 잘 키웠다고 하더라고. 그들 부부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모범 부부라고 할 수 있겠지.」
「그게 전부인가요?」
「내가 오랫동안 이곳을 떠나있었으니까 더 자세한 걸 알 턱이 없지 않겠나.」
「소설에 자살한 술집 여자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그건 내가 전혀 모르는 일일세. 난 그녀에 관해선 이야기한 적이 없어. 실제 없었으니까. 그녀 얘기는 꾸며낸 거야. 뭘 노렸는지 모르지만. 이게 진짜 진실인 걸 어떡하겠나. 작가가 제멋대로 덧붙인 소품이라니까.」
「글쎄 말입니다…… 소설에 나오는 그 해변은 지금 남아있지도 않지요. 간척지가 되었으니까요. 어떤 흔적도 없다니까요. 상전벽해가 우스울 지경입니다. 예전에는 해변이 끝나는 지점에 섬과 연결하는 길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은폐된 장면이 있을 거야. 내가 작가인 것처럼 머릿속에 이런저런 장면들이 떠올라서 몹시 혼란스럽군. 우리가 보드카를 너무 급하게 마셨는가보네. 늙으면 술도 점점 약해지지.」
그의 얼굴에서 땀방울이 떨어졌고 눈에선 불이 났다. 그가 담배를 길게 빨아들인 후 입안에 연기를 가두었다가 아주 천천히 뱉어내자 가늘게 피어오르는 담배연기가 소용돌이로 꼬이며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사라졌다.
「옛날 제가 여기 있었을 때 말입니다. 그때 절벽 바위에 뛰어내린 여자가 있었어요. 여기 다시 내려오자마자 그날 밤늦게 거길 갔었거든요. 왠지 가고 싶었어요.」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몸을 아래로 굽혀서 절벽 아래 허공을 바라보았다. 가랑비가 내렸고 우산을 뒤집어 놓을 만큼 약간 강한 바람이 불었다. 높은 절벽은 음산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이곳에서라면 아주 쉽게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바다를 뚫어져라 내려다보니까 내가 수영을 못 한다는 것과 바닷물이 너무 차갑겠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뛰어내릴 생각이 사라졌다.
그날 방파제에는 갈매기들이 줄지어 앉아 구구거리고 똥을 갈기고 부리로 깃털을 다듬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이야기가 중단된 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그걸 다시 생각하면 자살한 여자를 등장시켜서 의도적으로 모호한 역할을 하게 한 작가의 뒤틀린 정신을 엿보게 되지.
하필 여자의 시체를 보고 정욕을 느껴야 했을까? 그리고 말이야…… 도대체 왜 그날 그 방죽길에 갔던 걸까?
필연성이라고 할까?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리자면…… 지나치게 작위적인 설정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도대체 설득력이 없어요.」
「그 소설의 기승전결에서 전에 해당하는 ‘바다로 뻗은 긴 방죽’에는 하인숙과의 정사이야기가 핵심 아니던가?」
「그 집은 옛날 폐결핵에 걸렸던 그가 폐를 씻어내기 위해서 일 년 동안 보냈던 집이에요. 그런데…… 그 소설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검토하자면 어느 시기에 폐결핵에 걸리고 일 년 동안 칩거했는지 아주 모호해요. 딱히 시기가 들어맞지 않거든요.
더욱이 대낮에 그 짓을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 집 주인 부부가 밖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정서상 아주 부자연스러워요.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성 이야기는 진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난 도대체 폐결핵에 걸린 일이 없었네. 그건 억지 소리야. 그런데 말이야…… 그게 밤이 아니고 대낮이었다고?
초여름이었고…… 그쪽 방죽은 밤이면 사람이 안 다니는 으슥한 곳인데…… 차라리 방죽의 자운영 풀밭에서…… 그 무렵 시골에서 젊은 청춘 남녀들은 그렇게들 했거든.」
「형님도 그런 경험이……?」
「옛날 옛날, 아주 옛날 일이라네. 그건 그렇고 말일세.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내 죄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음으로써 용서를 받는다거나 양심의 가책 같은 거에서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야. 난 지금도 나를 낳은 어머니를 원망해.
나는 언제나 여자들에 대해 강렬한 의심을 키워왔다네. 근본적으로 여자들을 의심했는데 그게 어머니 탓이 아닐까?」
「어머니에 대한 증오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그래서는 안 되는데…… 아버지가 없었으니까 원망의 대상이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육체적인 면에서 매우 건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별로 내세울 만한 게 없지 않은가. 내 몸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닐세. 여자가 이성으로서 남자에게 기대하거나 욕망하는 걸 말하는 거야. 현명한 여자들은 육감에 의해서 직관적으로 미완성품인 풋내기를 알아본다네. 그래서 그런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들을 기피하는 법이거든.
하인숙도 그랬지 않겠나. 그때 그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했거든. 내가 잠시 내려왔지만 곧 올라갈 거고 기혼남이었으니까. 크게 부담이 없었을 거야.
아무런 미련 없이 금방 떨쳐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그녀는 그때 여러 가지로 계산을 했을 거야.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눈빛에서 빛나고 순수하고 섬세한 것을 발견하였다네. 그때부터 가슴 속에서 나의 뮤즈가 되어버린 거지.
그녀와 나는 그해 늦가을 무렵까지 아무도 모르게 서울에서 몇 번인가 만났어.
안 만나는 동안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몇 달 동안 그러고 난 뒤엔 무슨 일인지 편지가 끊기면서 모든 게 사라졌지.
나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분노를 느꼈다네. 온다 간다 말없이 도망친 여인. 나는 그녀의 뒤를 쫓았지만 계속해서 빠져나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다시 찾고 싶어 했다네. 불행하게도 그녀가 동성애자일지도 모른다고 의심 했지만 말일세.
내가 하인숙을 갈망했던 것은 사람 자체 때문이 아니었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이롭고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존재로 상상하였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러니까 나로 하여금 그녀를 탐나게 만든 것은 나의 상상력이었을 거야.
그러면 나는 실제로 그녀에게서 무엇을 상상했겠는가? 지금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누구와 함께 있을까? 어떻게 하고 있을까? 이렇듯 질투하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상상한다네. 그러므로 모든 사랑의 시작에는 일종의 환상과 착각 혹은 상상과 오해가 존재하지 않겠나.
그리고 늘 울고 싶기도 했고…… 늙은이가 되면 기억의 무게를 견뎌내야 하니까. 인간의 감정도 역시 서서히 늙어간다네. 끝까지 살다 죽는다 해도 죽는 순간에 느껴지는 건 아마도 분노일 거야.
하지만 나는 지금 솔직해지고 싶네. 그 시절에……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분명히 남존여비 사상에 투철한 남성 우월주의자였다네.
남성이 자식과 여성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거지. 내가 하인숙을 온전히 소유하겠다는 욕망이 있었고, 지극한 이성애적 사랑으로 그녀의 동성애적 성향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허황된 계산을 한 거지.」
「그녀가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죠? 거기에서는 모교라고 했거든요.」
「그게 아냐…… 그게 아니라니까. 여고였어.」
「그녀가…… 술을 잘 마셨던가요? 잠깐이지만 술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아주 취하도록 많이 마셨지. 난 원래 술 잘 마시는 여잘 좋아하거든. 왜 그토록 술을 마셨을까? 마음속 고통을 이겨내려고…… 했을까? 혀가 풀리면 말을 많이 하긴 했지.
하지만 눈물을 찔끔거리거나……그런 짓은 하지 않았지. 내가 주책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지.」
「그때 오빠라고 불렀던가요?」
「무슨…… 자존심이 얼마나 센 여자인데……. E대 출신이니까. 은근히 콧대가 엄청 셌지.」
「그렇겠네요. 그때는 그랬죠. 김민정이도 거길 졸업했거든요.」
「묘한 인연이군?」
「다시 말하면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자신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자기 보존 본능이 강했기 때문에 소유의 욕망을 무력화시켜버렸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하더라고…….」
「다시 소설로…… 넘어가죠.」
「훨씬 후의 일이지만…… 어느 날 저녁 나는 그 망할 놈의 소설을 또 다시 펴들었네. 천천히 읽어갔지만 다시 읽으니 역시 짧고 얄팍하더군. 너무 자주 읽으니까 마침내 친숙한 글이 되었지만.
소설의 구성은 부실했지만 단어의 선택, 문장의 구성에 있어서 독특한 습성이 눈에 들어오니까 글의 흐름을 알게 되더군.
어쨌거나 내 이야기가 나오니까. 하지만 모욕당하는 느낌과 동시에 그 안에 내 모습이 왜곡돼서 드러나 있다는 느낌도 받았지.
내 이름은 딱 한 번 나오는 거야.
무언가 불편한 심정이었고 억울하기도 했지.
그 작가는 내게서 너무 많은 걸 훔쳐갔어.
나는 밤을 거의 꼬박 새며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씩 몇 번이나 꼼꼼하게 읽어나갔지. 그건 완벽한 헛소리였어.
특히 하인숙과의 관계는…… 내가 그 소설에서 찾으려 한 건 내 청춘 시절 내 삶의 흔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그 작가의 자기 반영적인 헛소리였어. 그때 고작 스물세 살밖에 안 되었는데……
나는 그 작가가 쓴 또 다른 소설들을 모두 읽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통해 점점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네. 그래서 작가의 의도와 독특한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었지.
물론 소설들은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많이 부족했어.
섬세한 감수성이 절제되어 있지도 않고…… 아주 속물적이었어.
하지만…… 그가 그 소설들로 출세하려고 어떤 책략이나 전략을 세우려고 한 것으로는 볼 수 없었네.」
「옳으신 지적입니다. 흠이 없는 텍스트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작가 자신도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겠지요. 지금 다시 읽어보면…… 이제서야 알게 되었는데요…… 쓸데없이 우울한 감정이 지배하고 있어요. 간결하지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해성을 지닌 것도 아닌…… 아주 흔해빠진 신파조 멜로드라마이지요.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요. ‘지난 봄엔 그 여잘 데리고 절에 한번 갔었지.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요 영리한 게 결혼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무안만 당하고 말았지.’, 그런 대화가 나오지 않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당대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포착해서 명과 암을 반영한 것도 아니고 통렬한 사회 비평적인 것도 아니란 거죠.
오십 년이 지났지 않습니까? 그 작가도 이제 말년이 되어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걷고 있지요. 그 소설은 작가 자신의 마음속에서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마음속에서도 그 생명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어요. 그게 모든 소설의 운명이죠. 시간이 모든 걸 마모시키니까요.」
「우리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군.」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인숙을 사랑하긴 했던가요?」
「나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거든. 사랑이란 얼마나 이상한 감정인가. 그녀가 영영 떠나갔다는 걸 마침내 깨닫게 되었네.
그녀가 내 삶 속에 머물러있으란 희망은 도저히 가질 수 없었어.
혼란스러웠지. 그때 분노의 기억 속에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네. 산다는 게 얼마나 지겨운 일인가.」
「알고 보니까 말입니다…… 하인숙은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녀의 성적 정체성이……?」
「당신이 잘 지적했네. 하인숙은 확실히 여자이긴 하지만 양성애자이고 동성애자였다네. 내가 나중에서야 그녀의 깊은 비밀을 깨닫게되었지. 그런데 말이야…… 아버지는 학교 재단의 이사장이고 집안은 아주 빵빵했어. 그 집안은 엄격한 가부장적 분위기였을 거야.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니 질식할 것만 같았겠지. 거기에 반항했을 거고.
그녀가 왜 날 몇 번씩이나 만나주었다고 생각하는가? 그건 성 정체성에 관한 탐색의 과정이었네. 남자를 사랑할 수 있는지? 남자와 섹스를 해도 괜찮은지? 어머니의 성화처럼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지? 자기는 호모로서 여자만 사랑할 수 있는지? 남성을 너무 싫어하는지? 그런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지.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녀는 길 잃은 영혼이었어.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몰래 자기만의 삶을 유지하려고 발버둥 치는 여자였네. 그러나 마지막까지 그녀는 알 수 없는 인물이었네. 그녀에 대한 진실을 결코 알 수 없어서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지.
나는 우리가 전적으로 남성적이거나 전적으로 여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뭔가 뒤섞여 있겠지.」
「그녀는 외면적으로는 여성성을 지닌 여성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확실하게 남성이었군요. 원래 인간 본질의 탐구에 사로잡혀 있는 소설가에게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을 묘사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지요. 그 후…… 그러니까 이혼하고 나서겠지요. 다시 여자를 만난 일이 있었던가요?」
「…… 내가 그 회사를 그만둔 후 십여 년 동안 몇 군데 회사에서 재무 담당이나 감사 같은 직책을 맡았었지만. 혹시나 해서 부산에서 일 년쯤 살기도 했었지. 그런 후 여기로 온 거야.
그동안 여자를 사귀어볼까 생각한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피곤하기만 했어. 그렇다고 내가 숙맥은 아니었으니까 몇몇 여자들을 만나긴 했었지. 그러나 절대로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네.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지해지면 안 되니까. 철저하게 자기 방어적인 거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7. 우리는 그 해 여름 내내 그 이야기에 골몰했다.
우리들은 어느 덧 친밀한 사이가 되었고 결코 피상적인 대화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가 없었더라면 바닷가에 대한 오랜 향수가 차갑게 식으면서 무료한 시골 생활 때문에 금방 싫증이 나버렸을 것이다.
그가 말했다.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었네. 순서대로 나가지 못하고. 나는 상고를 겨우 나와서 그 당시 내 처지에 대학은 언감생심…… 아버지라는 작자가 죽고 나니까 그나마 우리를 먹여 살려주던 쥐꼬리만한 생활비가 뚝 끊겨버렸어. 사내아이에게 아버지가 없다면 그건 고아나 다름없는 거야. 아버지가 없으면 더욱 분명하게 아버지를 의식하게 되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순천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네. 좋은 은행에 합격을 했거든.
어쨌거나 내가 대성제약으로 옮겨가서 죽을 둥 살 둥 일하니까 칠 년쯤 지나서 경리부장이 되었다네. 물론 그는 마음대로 이름을 바꿔치기 해서 ‘대회생제약회사’라고 했네. 대회생이라니 얼마나 유치한가? 그 몇 년 전에 마누라의 남편이 죽었는데……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내막은 모른다네. 그들이 입을 닫아걸고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으니까. 추측하자면 교통사고 아니면 악성 암이었겠지.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네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마누라는 이 년 연상으로 재혼이었고 나는 당연히 초혼이었네.
나는 그때 완전히 회사 인간이었어. 귀를 찢는 자명종 소리가 나를 새벽잠에서 깨웠지. 나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베개에서 머리를 들고 눈곱이 달라붙은 눈을 억지로 떠서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하였네. 그때는 십 분 만이라도 더 자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지.
내가 아침에 출근할 때는 마누라는 깨어나지도 않았다네. 단 한 번도 아침이면 ‘잘 다녀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네.
그리하여 오전 8시에 회사에 출근해서는 매일 야근을 하였지. 내가 매일같이 하는 일이란 전표, 분개장, 원장, 영수증 등 회계장부, 월말 결산서류, 분기 보고서, 연말 결산서류, 재무제표를 처리하는 것이었고, 더 중요한 일은 가끔 비밀장부, 비자금, 분식회계를 처리하는 일이었고 그리고 매일처럼 거래 은행에 들락거렸다네.
내가 그렇게 해서 시골 상고 출신인데도 그나마 장인의 빽 때문이었는지 경리부장에서 상무로 승진하였지. 작은 회사였으니까 십 년 동안이나 만년 상무를 했고 그 후에는 또 십 년 동안이나 만년 전무를 하였다네.
이건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처가 쪽에서는 내가 반드시 필요했던 거야. 나는 상고 출신에 시골 촌놈인데 재혼이든 아니든 어떻든 부잣집 오너가의 딸과 결혼하는 게 싫지 않았지.
세속적인 속물근성에 따른 생존 본능이거나 자기 보존 본능이 작용된 것이지. 내 앞길이 훤히 뚫리는 기분이었거든.
그러니까 세무서장이 ‘……넌 빽 좋고 돈 많은 과부를 물어놓고’라고 빈정댄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네.」
「그 결혼으로 횡재를 한 셈이네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정략 결혼이었다는 거죠?」
「그 회사의 진짜 대주주는 형님이었다네. 그러나 지병이 있어서 회사의 경영을 잠시 동생에게 맡겨놨는데…… 그 동생이 바로 내 장인이었지. 내 장인은 대표이사가 되었지만 회사 지분은 형님의 반의 반에 불과했어. 그런데 형님의 병이 깊어지면서 욕심이 생긴 거야. 황금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거고 그걸 탓할 수는 없다네. 그러니까 돈 앞에서는 형님도 없고 동생도 없는 거지.
그래서 장인은 회계 장부를 조작해서 비자금을 조성하기 시작한 거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주로 매입 단가를 높이고 매출 단가를 낮추어서 그 차액을 챙기는 거지. 그리고 회사가 커 가니까 자본금을 늘려야 한다면서 증자를 하고 그 과정에서 자기 지분을 늘리는 거지. 내가 만년 전무로 퇴직할 때쯤에는 자본금도 조금 늘었고 회사 매출도 300억대를 넘어서게 되었지.
그런 은밀한 과정에서 경리를 담당하고 있는 나의 재무회계에 대한 지식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어. 그랬으니까 그쪽에서 먼저 나에게 은근슬쩍 접근해서 결혼을 부추긴 거지. 나는 멍청하게도 넘어갔고. 그랬으니 결혼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었지.
하지만 나와 마누라는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도 않았다네.
전 남편과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심한 자폐아였던 거야. 혼자서 독립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병이었던 거지. 내가 결혼했을 때는 어떤 특수 보호시설에 맡겨놓고 있었던 거지.
물론 훨씬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 아들 때문에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다네. 그 때문에 우리 결혼생활이 많은 지장을 받았던 거고…… 마누라는 그 충격 때문에 다시는 자식을 낳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네.
오십 년 전에 말일세, 그 제약회사가 무슨 대 제약회사였겠나. 내가 고향에 내려가서 폼 좀 잡으려고 ‘대’자를 붙인 거야. 내가 국내 굴지의 대 제약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뻥을 친 거지. 그리고 곧 전무로 승진할 거라고 또다시 심한 뻥을 친 거지.
그게 시골 촌놈들의 흔해빠진 자기 과시인 거지.
그 회사 오너는 말이야, 50년대 초에 종로 5가에서 5평 남짓한 약국을 열었다네. 이익을 많이 남기려고 위장약과 성병약을 조제해서 팔았는데 그걸로 유명하게 되면서 큰돈을 벌었지.
그 돈으로 제약회사를 창업해서 일본 제약회사의 국내 독점 총판을 따내서 수입 약품으로 돈을 벌고 상처에서 고름을 빼주는 고약으로 조금 히트를 쳤고 그리고 생약제제로 만든 위장약을 만들기 시작했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어.
그때 1960년대 초 말일세. 그래봐야 본사와 성수동에 있던 작은 공장 직원 전부 해서 고작 100명 남짓이었어. 그러니 대 제약회사하고는 거리가 한참 멀었지. 그 소설에서는 ‘……내가 경리의 일을 보고 있던 제약회사가 좀 더 큰 다른 회사와 합병되는 바람에’라고 했지만 실제 합병은 없었다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네. 세상일이 뜻대로 순조로울 수만은 없는 거지. 미국에 유학을 갔던 형님의 큰 아들이 마침내 5년 만에 귀국을 했다네. 회계학을 전공하고 미국 회계사 자격도 따서 귀국해서는 회사의 경리장부를 샅샅이 뒤진 거야.
그걸 대표이사인들 막을 도리가 없었네. 대주주의 권한으로 상법상 인정되는 회계장부 열람권에 관해 법원에 소를 제기해서 승소한 거지. 그전에는 장부와 서류의 보전을 위해 가처분 신청을 했었고. 자넨 고참 변호사이니까 이런 걸 잘 알고 있겠구만.」
「형제간 치사한 싸움이 볼 만 했겠군요?」
「결국 임시 주주총회에서 동생은 패배하고 물러났지. 사필귀정이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네. 노발대발한 형님이 동생을 횡령 배임죄로 검찰청에 고소해버린 거야.」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형님 입장에서는 동생이…… 배신을 했으니까 그럴 만 했겠네요.」
「형님은 용서가 없었네. 동생이 잘못했다고 그렇게 빌어도 고소 취하도 해주지 않고 합의서도 써주지 않았지. 경제 사범에게는 합의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더군.」
「그렇지요. 대게 합의하면 집행유예로 풀려나오죠.」
「그런데 그 사건에서 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네.
그동안 그렇게 무시하고 냉랭하던 처가 쪽에서 나에게 매달리고…… 읍소하고…… 회유를 하였다네.」
「그럴 만하네요. 그 사건의 가장 중요한 하수인이었으니까요. 공범으로 함께 처벌받지 않았나요?」
「말도 말게. 검찰 쪽과 타협을 본 거지. 검찰이란 게 두 번 다시 갈 곳은 아니더구먼. 그놈의 검사가 당장 구속시켜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거야. 그래서 엄청나게 압박을 받았지. 그때 내가 너무 연약하고 쉽게 상처받는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네.
처음에는 죽을 만큼 두려웠지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침착하게 생각을 가다듬었지.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한 거야.
그랬더니 마음이 평온해지더라고. 내가 이실직고하면 뭐……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 비밀 장부를 제출한다면 나는 관대하게 처벌하기로……. 그러니까 상부의 지시에 따라 시키니까 그렇게 뒤처리를 한 것으로…… 그렇게 정리가 된 거지.
무엇보다도 나는 그 일과 관련해서 단 한 푼도 받은 사실이 없었다네. 그것은 돈 때문에 지저분한 짓은 하지 않겠다는 내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담당 검사도 깜짝 놀라더구만. 검사는 내가 당연히 떡고물이라도 챙긴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구속되지도 않고 기소에서 빠지게 되었네. 그 대신 법정에서 또다시 증언을 서게 되었지.」
「선서하고 증언하였다는 거죠?」
「그렇다네. 난 처음부터 내가 구속되는 한이 있더라도 밝힐 건 다 밝히겠다고 결심했어. 그래서 불태워버리라고 종용했던 비밀장부도 검찰에 제출했던 것이고. 어쩐지 그래야만 된다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거든. 난 검사 앞에서건 판사 앞에서건 떳떳하게 진실을 다 밝혔어.」
「장인은…… 몇 년 형을?」
「판사도 괘씸하게 생각했던 모양이야. 끝까지 부인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그랬으니 중형을 선고받았지.」
「그 후 일이 궁금하네요?」
「이번에는 내가 배신자가 되었다네. 뭐라고 하더라…… 그렇지…… 기껏 키워주었더니 배신했다고 그러더라고. 배신과 변절은 내가 제일 증오하는데 말일세. 배신이라는 단어가 정말 고통스러웠네. 그때는 그 고통을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지. 그 충격 때문에 한동안 광장공포증 환자가 되었다네.
그리고 마누라가 아니라 처가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했어.
난리법석을 피운 거야. 나는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고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도장을 찍어주었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누라가 가여웠거든.
그 무렵 새로 선임된 대표이사가 간곡히 만류했었네만…… 그 지경이 됐는데…… 회사에 사표를 냈다네. 본래 집은 마누라 앞으로 되어있었으니까 내가 짐을 싸서 나오면 되었지.
나는 이삿짐센터에 부탁해서 은밀하게 야반도주를 하였다네. 이웃들의 눈도 있고 회사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러저러한 말들이 나오게 될 테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이사를 한 거지.
그러고 나니까…… 갑자기 외로워져서 눈물을 흘렸다네.
나를 되돌아보게 되더라고. 나는 인생을 헛되게 산 것이 아닌지 회의감이 들면서 막막해지더라니까. 삶이란 게 무엇인지, 악과 선은 왜 항상 함께 있는지, 어머니가 의지했던 하느님은 지금도 하늘에 살아 계시는지, 영혼은 불멸인지, 죽음으로 끝나는지, 윤회설을 믿어도 되는 건지 등등 근본적인 물음이 마음 속에서 제기되더라고.
평생을 책상에서 일했으니까 이제부터 남들처럼 트럭 운전을 하거나 공사 현장에서 육체노동을 해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이 들었지.
그러나 그 나이에 불가능한 일이었어.
그리고 그들 큰 물음에 대해 대답 자체가 가능한지…… 설령 대답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대답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더란 말일세.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똑같은 질문을 제기하였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네.
그 후, 그럭저럭 보낸 십년을 빼고 나면 여기로 오면서부터 내 인생은 밑바닥 끝까지 내려갔지. 그래서 주민등록이 소멸되면서 사회보장 혜택도 모두 말소되었다네. 여기 살면서부터 그런 건 필요 없었으니까.」
「혹시…… 세상이 종말에 다다랐다는 종말론적 환상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아주 단순하고 마음 편하게 살고 싶었겠지요. 여기까지…… 더 내려가면 고흥 쪽 바닷가가 있는데요.」
「고흥에 몇 번 가봤지. 소록도에도 갔었지 않나. 그래도 여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니까. 도사동은 다른 동 (洞)들로 쪼개지면서 개발한답시고 그 모양이 되었지만 별량면은 그런대로 남아있지 않은가. 거의 변하지 않고 옛날처럼 말이야.
그렇지만 여기에 처음 자리를 잡았을 때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몹시 두려웠다네. 고립에 대한 공포심 때문이었어.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외딴 세상에 홀로 갇혀 있다고 느꼈거든.
‘그런데 제가 있는 여기는 어디인가요?’
내가 여기까지 내려온 게 자신이 선택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인지 판단할 수가 없었네.
마음이 평온할 때는 선택한 것으로…… 마음이 몹시 심란할 때는 저주 받았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버림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나를 구속했던 저쪽 세상과의 모든 질긴 밧줄을 끊어버리고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지금까지 홀로 살아왔으니까.」
작성일:2024-02-29 13:30:42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