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이 라인강에 몸을 던진 그 날처럼 오후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에 젖은 대구에서 백건우의 슈만 연주회가 있었다. 슈만의 첫 작품인 ‘아베크 변주곡’에서 시작해 마지막 곡인 ‘유령 변주곡’으로 마무리되는 프로그램. 76세의 노(老) 연주가가 감당하기에 ‘아베크 변주곡’은 다소 버거워 보였으나, 클라이맥스는 역시 슈만의 유서라고 일컬어지는 ‘유령 변주곡’이었다.

곡이 끝나고 우렁찬 박수갈채가 쏟아졌음에도 백건우는 투신하는 자세로 백발을 건반에 파묻은 채 한참을 그대로 머물렀다. 당황한 관객이 박수를 멈추고 그가 건반에서 일어나 돌아오기만을 숨죽이고 기다린 것이 수십 초. “사랑하는 클라라, 나는 라인강에 결혼반지를 던지려 하오. 당신도 그렇게 하구려. 그러면 두 반지가 하나가 될 게 아니오.” ‘유령 변주곡’ 작곡 후 라인강에 투신하기 직전 슈만이 남겼다는 이 문구를 그도 되뇌었을까?

쉽게 말하듯 슈만은 클라라를 이토록 죽을 만큼 사랑했는지 모르겠으나, 영화 ‘아무르’에서는 죽일 만큼 아내를 사랑한 남편 조르주가 나온다. 조르주와 함께 제자의 연주회를 다녀온 안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블랙아웃과 그에 이어진 팔다리 마비는 그녀에게서 일상을 빼앗고, 피아노를 빼앗고 온갖 모멸만을 안긴다. 영화는 뭉텅뭉텅 잘리고 뜯겨나가는 그녀의 삶을 자분자분 따라가고, 이를 자못 담담하게 지탱하려는 조르주를 지켜봐야 하는 참혹함은 관객의 몫이다. 결국 그녀 자신으로서의 모든 것을 약탈당한 채 그녀가 “엄마(mére)”와 “아파(mal)”만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순간에 이르러 조르주는 죽음을 결단한다. 아니 그녀에게 선물한다.

다시 돌아가, 윤정희를 둘러싼 논란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2010년 이창동 감독의 ‘시’가 알츠하이머 초기이던 그녀를 모델이자 주인공으로 한 것이니만큼 10년이 넘도록 투병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와 그 가족에 대해 그 누구도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아이리스 머독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텔레토비가 나오는 TV 프로그램에 넋을 놓고 있을 때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아야만 했던, 40여년간 영국 최고의 지성인 커플로, 학문적 동지이자 연인으로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존 베일리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의 연주복을 싸서 늘 함께 공연장을 다니던 그녀가 어느 날 우리가 왜 가고 있냐고 수없이 물을 때, 무대에 올라가기까지 한 100번을 같은 질문을 반복할 때, “엄마”를 부르는 딸에게 “나를 왜 엄마라 부르냐”고 되물을 때 백건우,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또한 우리는 가늠할 수 없다.

체스터턴은 어떤 의미에서 슬픔과 비관은 정반대라고 말한다. 슬픔은 무언가에 가치를 두어서 생기지만, 비관은 그 무엇에도 가치를 두지 않아서 생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확하게 슬퍼할 줄 아는 자만이 인생을 낙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슈만의, 백건우의 ‘유령 변주곡’은 그렇게 슬펐다.

 

 

/김계희 변호사

대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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