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누군가 죽는 장면이 나오면 “저 배우는 남들 촬영하느라 고생할 때 먼저 집에 가서 쉴 수 있겠구나, 그러면 수입은 많이 부족하려나?”하는 생각들 때문에 몰입이 되지 않아 이젠 아예 보지 않는다던 영어 선생님이 계셨다. 감수성 과잉의 또래 여고생들은 자지러질 듯 야유를 보냈지만, 그 정도는 아니어도 늘 엉뚱한 대상에 감정이입이 되곤 했던 나는 멀뚱한 표정을 숨기며 묘한 안도감을 느껴야 했다.

맹숭맹숭한 주인공보다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에 늘 마음이 끌렸고, ‘한땀 한땀 장인’과는 당최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부수고 깨트리고 찢어발기는 장면이 나오면 장인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걸 만들고 가꾼 이에게, 심지어는 그 물(物) 자체에 감정이입이 되어 ‘고작 저런 허접한 이야기를 하자고…’라며 혼자 들끓곤 했다. 이런 기이한 가내 수공업자(?)의 마음은 영화 ‘타이타닉’에서조차 주인공들이 접시를 던지는 장면에만 온통 쏠렸다. 물론 불편함과 불쾌함으로. 환경으로든 경험으로든 아무리 되짚어봐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보편적 감수성의 결핍일까? 잠시 고민한 적도 있었지만, 문학작품 속 주인공의 감성은 오히려 그쪽이 보편적이었기에 문학도였던 한 때에는 되레 기묘한 주류를 경험하기도 했다.

자신의 의뢰인에게 지나치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변호사로서 좋은 자세가 아니라는 얘기를 듣곤 한다. 당사자를 이해하고 그의 이익을 수호하거나 변호하려면 어느 정도의 감정이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면 그것이 맹점이 되어 일을 그르치게 된다. 따지고 보면 나름의 안타고니스트를 많이 만나게 되는 직업이 변호사인 듯하다. 판사나 검사와 비교해 수적인 면에서 많이 만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타고니스트에의 감정이입이 필요한 이는 변호사가 유일하다.

사람들이 쉽게 불륜에 빠지는 것은 그것이 절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변호사가 나름의 안타고니스트를 만나는 지점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 생의 절정에서인데, 절정에서 시작된 불륜의 결말이 그러하듯 안타고니스트 역시 그 결말은 대개 몰락(untergang)으로 스러져가거나 아니면 간신히 이를 회피하는 정도에 그치고, 그러한 안타고니스트에 대한 감정이입은 변호사에게 심각한 외상을 남기기도 한다.

화학 용어로서 안타고니스트는 제독제(除毒劑)라는데, 이 지점에서 문득 변호사가 만나는 안타고니스트, 혹은 그에게 감정이입 함으로써 어쩌면 또 다른 안타고니스트가 변호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려나 이렇게 변호사가 무릅쓴 감정이입의 결과물은 안타고니스트의 법적 의사 표현이다.

“표현하다(express)”라는 말의 어원은 포도의 즙을 막판까지 쥐어짜는 행위(squeeze out)라고 한다. 마른 수건을 쥐어짜 목욕물을 받아낸다는 전설 같은 상사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 바닥 법조계. 그러나 너무 진한 자기표현은 건강을 해치기 마련이다.

 

 

/김계희 변호사·대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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