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를 느껴보리라 갔다가 살리에리를 만나고 돌아오게 되는 영화 ‘아마데우스(1984)’는 영국의 작가 피터 셰퍼의 희곡에 바탕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에쿠우스’의 작가로 더 친숙한 그의 작품도 ‘아마데우스(1979)’. 우리가 익히 잘 아는 그 천재 모차르트의 이야기를 할 것처럼 사람들을 홀린다. 물론 뜻밖의 살리에리의 등장에 살짝 당혹감도 느끼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역시 모차르트!”를 외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아마데우스’가 푸시킨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1830)’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고작 2장 231행의 짧은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대부분이 살리에리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고도의 심리극이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를 오페라로 만들었는데 극적인 드라마도 변화무쌍한 무대전환도 없고, 등장인물이라고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눈먼 바이올린 주자(무언) 3명이 전부이지만, 원작의 무게감과 흐느끼고 울부짖는 살리에리의 섬세한 연기력이 단연 돋보이는 작품으로, 초연 당시 전설적인 바리톤 가수 표도르 살리아핀이 살리에리 역을 맡아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고 한다. 제목이 무색하게 모차르트는 마지막에 잠깐 등장해 단 3줄의 익살스러운 대사를 내뱉는 게 전부인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살리에리의 이런 독백으로 시작된다. “사람들은 지상에 정의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에도 정의는 없다. 나에게 그건 단순한 음계처럼 명백한 것이다.” 느닷없이 ‘정의’라니….

불쑥 데리다의 “법은 정의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법은 계산의 요소이며, 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당하지만, 정의는 계산불가능한 것이며, 정의는 우리가 계산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할 것을 요구한다.” ‘법의 힘’을 말하며 그는 파스칼을 소환한다. “정의, 힘-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파스칼은 또 이렇게 말한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힘’이라고 번역됐지만 데리다가 사용한 언어는 ‘force’였다. ‘법에서 정의로’를 말한 후에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Zur Kritik der Gewalt)’를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사용한 ‘force’ 역시 ‘gewalt’와 같이 번역함이 옳지 않았을까? 법 집행을 “to enforce the law”로 표현한 것 역시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든 것, 그게 ‘법’이라고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살리에리를 소환해 본다. “오, 하늘이시여! 정의란 대체 어디 있는가?”

 

 

/김계희 변호사

대구회

저작권자 © 법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