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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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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선> 2019 즐거운 사라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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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0-08-03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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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7. 상고 기각

이 사건은 항소심과 대법원 상고심 (박준서, 박만호, 김형선 대법관)에서도 기각되어 유죄가 선고된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대법원 판결 선고일은 1995년 6월 16일이다.)
아무리 뭐라 해도 여름엔 더러운 파리떼가 윙윙거리기 마련이다.
그는 애매한 죄로 뜬금없이 구속되어 검사한테 모진 신문을 받고 판사한테는 말도 안되는 재판을 받았으니, 그때 이후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을 하나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과 부정은 도대체 누가 심판해주나 하는 의문이 생겼고, 동시에 ‘법을 빙자한 사디즘’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연세대학교는 1993년 이미 그를 직위 해제했으나 그 다음날인 6월 17일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교수직에서 해직하였다. 그는 1998년 3월 13일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 · 복권되었고 같은 해 5월 1일 교수직에 복직하였다.
하지만 ‘즐거운 사라’는 대법원에 의해 형법이 규정한 음란물로 확정되었다. 2007년 4월에 마 교수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그 소설 전부를 올리면서 그는 다시 불구속 기소가 되어 또다시 벌금 200만원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전과 2범이 되었다.
그리고 그를 디립다 까기 위해서 ‘사라는 결코 즐겁지 않았다’라는 책이 나왔고 그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그래도 사라는 즐겁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논문을 기고했다.
그의 말대로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면 꼭 한편의 코메디 같이 느껴진다.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정문 담벼락에 ‘마광수 교수는 결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는 플래카드를 내걸면서 작가를 영국의 셰익스피어와 비교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지만 주한 인도 대사관의 항의를 받았다. 플래카드를 건 사진이 신문 1면에 나왔는데, 이를 본 인도 대사관이 ‘아직도 우리가 식민지냐’고 항의했고 이에 연세대 학생회가 사과했다.
그 당시 많은 작가들은 이 소설의 음란성을 인정하면서도 작품활동의 결과에 당국이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처사에 대해선 비판과 항의를 멈추지 않았다.

그때 이후 그가 겪은 우울증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다.
어떤 항우울제는 약을 먹고 나서 오히려 증상이 더 심해졌고, 의사가 처방해준 또 다른 약은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으면서 부작용만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처방해준 약은 오랫동안 복용하면서 내성이 생겨 약효가 떨어졌다.
그는 그때 심한 불안, 강박관념 때문에 내장과 가슴까지 그리고 사타구니까지 욱신거렸다. 그의 몸에 치명적인 병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신체 기능은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소화를 위해서, 밤에 잠을 자기 위해서, 용변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복용해야 했다.
그는 심리치료는 한사코 반대했다.
그는 가끔 남몰래 울었다. 처음에는 나직이 울었다. 나중에는 뱃속에 들어있는 찌꺼기까지 모두 토해내는 기분으로 온몸을 뒤틀며 서럽게 울었다. 그런 끔찍한 일이 왜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이해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건 불가능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순전히 세상의 무분별한 몰이해 때문에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그 날밤 늦게 석방되었지만, 그때는 벌써 초점을 잃은 눈, 구부정한 어깨, 빼빼 말라서 왜소한 몸집, 동작은 느릿느릿하다 못해 흐느적거렸고,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헷갈리게 하는 어눌한 말씨 등 한눈에 봐도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그 시절에는 진즉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어디서 구했는지 ‘장미’ 담배를 끊임없이 입에 물고 있었다.


8. 마광수 교수의 항변

마 교수는, ‘문학담론이란 언제나 한 사회가 허용하는 관습적, 도덕적 한계 안에서 사유와 상상력만을 담아내는 것이 아님’을 전제하고 ‘작가의 사회적 책임은 당대의 도덕체계를 강화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받아들이던 당대의 지배적인 유용한 가치체계를 의심하고 그것의 본질을 직시하고 성찰하도록 이끄는데 있다’면서 ‘문학적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당대적 현실에 대해 일탈적이며 가치 전복적으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금지된 영역에 대한 탐색과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문학적 상상력은 항상 경계와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끊임없는 의지를 반영한다. 그것이 성과 관련된 것이라 할지라도 예외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했다.
‘즐거운 사라’는 덧없는 것의 화려함과 ‘순간에 충실하기’에 빠져들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고 외치며 행동하는 신세대들의 가벼운 삶과 의식을 추적한 작품이다.
물론 그것을 표현하는데 성은 아주 중요한 매개가 되고,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성적 표현이 많이 나타나고 솔직했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현대문학이 이광수 이래로 고수해온 도덕적 전통이 한국 소설을 정체시키고 답보시켜온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위선적으로 고착된 도덕주의와 경건주의 그리고 문학작품을 통해 작가의 인격이나 가치관을 저울질해보려는 태도는, 작가들의 상상력과 사회적 입지를 위축시켜 그들을 이중 인격자로 만들어 버리기 쉽다.
문학이 근엄하고 결벽한 교사나 사제의 역할 또는 혁명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잠식되고 만다. 작가들은 저마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가진 생각과 세계관이 다르다. 그것의 다양하고도 창의적인 문학적 표현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그것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발상은 우리 사회를 획일적 윤리기준에 묶어두려는 독선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발상에 다름없다.
한국에서 소설의 외설성 때문에 작가가 기소된 것은 내 사건 이전에 딱 한 번 있었다. 1969년 염재만씨가 ‘반노’로 기소돼 재판을 받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가 겪은 재판은 나와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그는 불구속 기소되었으므로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1심에서는 벌금형, 그리고 2심과 3심에서는 무죄선고를 받았다.
적어도 내 사건에 있어서만은 대한민국 사법부는 20여 년 전보다 훨씬 ‘비민주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볼 수 있다. 판결 결과를 차치하더라도, 우선 ‘전격 구속’이라는 위압적인 카드를 쓴 것이 그렇다. 그렇다면 염재만씨와 나는 기소 과정이나 판결 결과에 있어 왜 그토록 큰 차이가 나는 법 적용을 받은 것일까.
이 문제를 따져보면 ‘즐거운 사라’ 사건의 본질과 한국의 정치적 · 문화적 실상의 시대적 추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미안한 얘기지만 염재만씨는 당시에 무명 신인 작가였고 나는 꽤 ‘유명한’ 교수요 작가였다.
‘즐거운 사라’ 이전에 나는 문학이론서 5권, 시집 3권, 장편소설 2권, 에세이집 4권의 저서를 갖고 있었고, 개방적 성의식과 자유주의적 윤리를 주장하여 주로 신세대층에서 열띤 호응을 받았고, 주로 기득권 보수층에서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내가 대중적 지명도를 얻게 된 것은 1989년 초에 발간한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때문인데, 이 책은 상당히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하며 찬사와 험담, 그리고 매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자유로운 성적 쾌락의 추구와 수구적 봉건 윤리의 척결을 주장한 일종의 문화비평집인 이 책은, 당시까지만 해도 도덕적 설교 위주의 성담론밖에 없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출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낸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와 장편소설 ‘권태’ 및 ‘광마일기’ 역시 화제를 불러일으켜, 드디어 심의기관인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는 참다못해 ‘광마일기’에 ‘경고’처분을 했고, ‘방송위원회’에서는 방송에서 야한 발언을 이유로 ‘방송 출연정지’조치를 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인데다 나는 또 이른바 ‘인기 교수’(말하기 쑥스럽지만)였으니, ‘매스컴 플레이’에 의한 ‘여론재판’의 희생양 또는 이용물로 썩 좋은 대상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염재만씨 사건 당시, 또는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의 관심사는 오직 ‘이데올로기’ 문제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유교적 충효사상과 반공 이데올로기 두 가지만 가지면 국민 계몽이 얼마든지 가능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1992년 당시 경제성장과 동구 및 구소련의 붕괴 때문에 주로 성해방과 개인적 쾌락추구의 자유를 위주로 하는 반유교적 자유주의 윤리가 최대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었고, 마르크시즘이나 반공 이데올로기에 국민 모두가 시큰둥해하던 때였다.
그래서 기득권 지도층에서는 좌파든 우파든 새로운 국민훈육용 카드로 ‘민족적 국수주의’와 ‘도덕주의’를 내세울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반공적 매카시즘’이 ‘도덕적 테러리즘’으로 전환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염재만씨 사건과 내 사건이 그 전개 양상에서 커다란 차이점을 보이는 것이고, 염재만씨 사건 이후 20여 년 만에 죽어 있던 법조문이 벌떡 일어나 ‘외설소설 사건’을 크게 터뜨리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작가를 기소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판금을 시킬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다. 문화부에서는 행정명령 하나로 간단히 책의 판매금지를 시행할 수 있다. ‘간행물윤리위원회’는 그런 목적을 위해 설립된 정부기관인데, 보수적 인사들이 대부분 심의위원 직을 맡고 있다.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는 문화부에 ‘제재’를 건의하고 문화부는 이를 대체로 받아들이는 수순이다.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직접 저자와 출판사 대표를 고발할 수도 있는데, 내 경우는 그런 경우가 아니라 검찰의 결정에 의한 사건이었다. 사회 여론이 ‘표현의 자유’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그랬는지, ‘즐거운 사라’가 출간된 지 한 달 후인 1992년 9월 말에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제재를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부는 내가 구속될 때까지 판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판금 결정은 구속이 집행된 직후 검찰의 요청에 의해 황급하게 이루어졌고, ‘즐거운 사라’는 인쇄원판까지 압수되었다.
왜 갑자기 유례없는 전격 구속이 일사천리로 집행됐는지, 그 정치적 배경에 관해서 매스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주로 제시된 이유는 ‘대통령 선거를 위한 전시용 깜짝쇼 (공권력의 무서움을 보이고 동시에 당시 여당의 공약인 도덕정치 강화를 상징하는)’와 ‘건영 특혜사건 은폐용 깜짝쇼’ 두 가지였는데, ‘건영 특혜사건’이란 재벌 회사인 건영그룹이 정부의 특혜를 받아 부정한 이득을 취했다고 여론의 의혹을 받은 사건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이유 말고 단순한 이유, 즉 ‘마광수가 교수의 신성한 직분을 망각하고 전통윤리와 미풍양속을 해칠 가능성이 있는 책을 계속 냈기 때문에 드디어 공권력이 나선 것’이라는 이유가 일부 보수 언론과 보수적 지식인들 측에서는 아주 당연한 이유처럼 강조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은 ‘마광수도 지나쳤지만 검찰도 너무했다’는 식의 양비론으로 이사건을 얼렁뚱땅 얼버무리려고 애썼다.
나는 그 소설이 문학이 아니라 음란물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의 문학세계는 총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내가 추구하는 성담론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문학적 체계와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나의 성애론은 모든 금기와 압제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에 근거한 것이다.


에필로그

1. 작가 마광수는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의 작가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즐거운 사라’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이번에 다시 제2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이 작품을 탈고한 것은 1990년 6월이었는데,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1년 뒤인 1991년 7월 가서야 서울문화사 판으로 비로소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나로서는 꽤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간행물윤리위원회의 판매금지 조치에 의해 나온 지 한 달만에 출판사측이 자진 절판을 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때로선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찌 보면 내게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해 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소설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손질하여 깁고 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결말 부분을 바꾸고 전체적인 분위기와 문장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손질을 가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 진짜 결정본 ‘즐거운 사라’를 이제 독자 여러분들게 새로 선보이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번에 내는 ‘즐거운 사라’는 내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과정에서의 우여곡절 말고도, 아무래도 내가 남자인지라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내면세계를 묘사해 내기가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출판을 맡아준 청하출판사측에 감사하며, 나뿐만 아니라 부디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즐거운 사라’ 아니 ‘즐겁게 방황하는 사라’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이끌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진짜 결정본 ‘즐거운 사라’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기는커녕 그의 인생역정에서 운명을 비극적으로 바꿔 놓았다. 그는 전격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온갖 수난을 겪었고 결국 남은 평생동안 그를 괴롭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지 않은가. 그는 그 우울증 때문에 결국 자살까지 하였다.
누가 내일의 운명을 정확히 알겠는가? 기원전 3세기 그리스 시인 칼라마쿠스는 아주 옛날에 벌써 그렇게 말했었다.

2. 1990년대에는 그 소설이 불경한 음란문학이라며 지탄받았지만 현재는 그가 말한 대로 지극히 단순한 성적 욕망의 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공중파에서 섹드립을 치는 지금과 비교해보면 그 시절은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지고 아주 아주 우스운 일로 여겨진다.
그러니까 10년이 지난 2002년이나 사반세기가 지난 2018년과 앞으로 이어갈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즐거운 사라’에서 묘사되는 삶의 태도는 소설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 등장해도 거의 문제가 안 될 정도로 성적인 개방이 이루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건 자체 (공소장과 판결문을 포함해서)는 완전히 비웃음거리가 되다 못해 아예 잊혀지고 말았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마광수 본인은 생전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얼마나 깊은 원한이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었을 것인가. 그가 그당시 받은 육체적 정신적 충격과 그 이후 진행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을 사회적 타살로 보는 견해가 타당한 것이다.
어쨋거나, 이 사건은 1990년대 초반 당시 한국의 문화적 자유주의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광수 본인 역시 ‘10년 정도 지나면 어처구니 없던 해프닝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 말대로 위키러들이나 누가 보기에도 웃기는 옛날 해프닝이 되었다. 시대적 추이를 예리하게 통찰한 마광수의 예언은 틀림없이 적중했다.

이광수가 친일 매국노로 비난받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그가 쓴 「무정」은 교육을 통해 민족을 계몽시키려는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봉건적 구습을 넘어서는 당대 지식인의 자유연애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소설은 무엇하러 쓰느냐. 그런 것도 조선에 도움이 되느냐’, ‘웬 연애 이야기를 써서 청년들을 부패케 하느냐’, ‘조선 고래의 도덕률을 파괴한다’, ‘이광수란 어미아비 없이 자란 상놈의 자식’이라는 등등 별별 인신공격을 받았지만, 그 소설은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현대 문학사에서 이정표가 되는 최초의 본격적인 소설로 인정받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1998년, 헌법상 보호되지 않는 언론 · 출판과 그 판단 기준에 관하여, ‘언론 · 출판의 영역에서 국가는 단순히 어떤 표현이 가치없거나 유해하다는 주장만으로 그 표현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그 표현의 해악을 시정하는 1차적 기능은 시민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사상의 경쟁 메커니즘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립되는 다양한 의견과 사상의 경쟁 메커니즘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의 해악이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또는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표현은 언론 · 출판의 자유에 의한 보장을 받을 수 없고 국가에 의한 내용 규제가 광범위하게 허용된다’고 하였고,
음란 표현과 저속 표현의 차이에 관해서는, ‘음란이란 인간 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 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크게 해칠 뿐만 아니라 사상의 경쟁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그 해악이 해소되기 어려워 언론 · 출판의 자유에 의한 보장을 받지 않는 반면, 저속은 이러한 정도에 이르지 않는 성 표현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헌법적인 보호 영역 안에 있다’라고 하였다. (헌재결 1998. 4. 30. 95헌가16)
그러나 위 헌재 결정은 음란물을 표현의 자유 보호 대상에서 제외한 유명한 오판 사건으로 법조계와 학계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4년 후 헌재는 입장을 확 바꿔 음란물도 표현의 자유가 보호하는 대상이라고 했고 (헌재결 2002. 4. 25. 2001헌가27), 2009년에는 전원재판부가 명시적으로 판례를 변경하면서, ‘음란 표현은 헌법 제21조가 규정하는 언론 · 출판의 자유의 보호 영역 내에 있다고 볼 것이므로 종전에 이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취지로 판시한 우리 재판소의 의견은 변경한다’고 하였다. (헌재결 2009. 5. 28. 2006헌바109, 2007헌바49, 2007헌바57, 2007헌바83, 2007헌바129)

미국의 경우에는 영화 ‘래리 플린트’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다. 포르노 잡지 ‘허슬러’에는 동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도로시가 양철나무꾼에게 오럴섹스를 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발행인 허슬러는 음란물 배포죄로 기소되고 오하이오주 1심 법원에서 징역 25년을 선고 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1988년 허슬러는 다시 연방대법원 법정에 섰다. 허슬러는 1983년 제리 폴웰 목사의 가짜 인터뷰를 실었는데 ‘나의 첫 경험은 문란한 어머니와 화장실에서 한 근친상간’이라는 내용이었다. 사생활 침해, 명예훼손, 정신적 가해로 폴웰이 고소한 것이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전원일치로, ‘수정헌법 제1조는 자유로운 사상 표현을 존중한다.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이며 진리 탐구를 위한 초석이자 건강한 사회의 밑거름이다. 좋은 의견이든 나쁜 의견이든 모두 들어보기 위해 수정헌법 제1조가 존재한다.’고 판시하면서 플린트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3. 그런데, 지금 (2019년) 활동 중인 검찰의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는 왜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을 주목하지 않는지 의아스럽다.
전술한 것처럼 이 사건을 둘러싸고 몇 가지 의혹이 그 당시 이미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음란물 제조죄라는 죄를 범한 하찮은 잡범이 국사범처럼 특별히 독방에 수감되었었는가? 지금 보면 박근혜 전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같은 거물들만 독방에 수감되고 있지 않는가. 무슨 음모가 있었길래 그가 독방에 갇히게 된 것인가. 그 사건은 (마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외설을 이유로 작가를 전격 구속한 한국 최초, 세계 최초의 사건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적어도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재고할 여지가 전혀 없는 너무 가볍고 하찮은 사건에 불과했던 것일까? 작가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들출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자신이 쓴 책 속 여러 군데에서 천재라고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과시했다. 그의 90편이 넘는 수많은 저작물을 면밀히 조사해보면 그저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위선으로 가득찬 이 완고한 사회에 맞서 금기 사항에 과감히 도전한 것은 대단히 용기있는 일이다. (나 같은 겁쟁이는 도저히 엄두도 못낼 일인 것이다.)
그의 도저한 신념과 의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용감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훌륭한 시인이고, 소설가이고, 윤동주 연구의 권위자인 국문과 교수이고, 문학 평론가이다. 그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있는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하지만 그의 불행한 인생역정과 죽음은 그 필화 사건에 단초가 있다. 그 사건 때문에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도되고 기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필화 사건 이후 그는 해임과 복직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교수 재임용 과정에서 그를 지지하는 교수가 거의 없었으니. 죽음과도 같은 상실감이 그의 머리와 가슴속으로 침입해 들어와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대작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전대미문의 어처구니없는 필화 사건은 ― 상부의 지시에 따라 구속 기소가 결정되었는지, 그렇다면 누가 그런 지시를 하였는지, 아니면 수사 검사가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렇게 하였는지, 그 당시 마 교수는 수강생이 천 여명에 이를 정도로 인기 교수였는데 그런 그가 도망갈 염려가 있었는지, 이미 책은 출간되어 판매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증거인멸의 가능성이 있었는지, 그래서 구속 요건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었는지, 조자룡 헌 칼 쓰듯이 검찰권을 남용한 것이 아니었는지, 법원이 유죄의 근거로 삼은 지극히 추상적인 음란성 개념을 이 사건에 적용한 데 있어서 과연 판사는 확신을 가졌었는지, 판사가 말한 ‘유죄선고를 받아도 비판을 받고 무죄선고를 받아도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렇게 확신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었는가,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의심스럽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황금률은 왜 실종되었는가, 판사는 무죄를 선고하는 데 검찰의 눈치를 봐야 해서 커다란 심적 부담감을 느꼈던 것일까, 그건 판사의 책임을 방기한 무책임의 극치 아닌가, 그렇게 사법적 적폐가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사법부의 치부가 만천하에 드러난 사법농단에 까지 이르게 된 거 아닌가 등등 ― 그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쟁점과 진상이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야한 소설 썼다고 ……
구속기소……
집행유예……
항소기각……
상고기각……

4. 나는 돌이켜 생각한다.
작가는 61일 동안 추운 독방에 갇혀서 무슨 상상을 했던가.
그는 결국 승리했을까? 승리라고…… 그가 언제 패배를 인정하기는 했던가. 만약 승리라면 승리 같지도 않은 승리를 획득하였지만 그나마 만신창이가 된 뒤에 뒤늦게 찾아온 승리가 아니었던가.
그때 법이라는 날카로운 칼을 든 사람들이 함부로 휘두르는 그 칼 때문에 얼마나 깊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던가.
두 사람 모두 한창 중년의 나이라 할 수 있는 40세가 되었을 때 처음 만났다. 그것도 아주 낯선 장소인, 숨 막힐 듯이 답답한 좁은 회색 공간에서 말이다. 자기도취증에 빠진 나르시시스트인 작가와 막강한 권력을 쥔 잘 나가는 엘리트 검사 간 음란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 그러나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동등하지 않은 두 적대자의 대결이었으니.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너무나 유치해서 소꿉장난하는 어린애들 말싸움 같은 거였다.
그 후 (우리가 대충 알고있다 싶이) 그들의 인생행로는 극적으로 엇갈린다. 그들의 인생에서 막간의 에피소드로 남을 수 있을까. 한쪽은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작가는 작년에 (2017년 9월 5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그는 일생 동안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했었다. 셋이라는 숫자는 동화에서도 자주 나오는 마법의 숫자이다. 첫 번째는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구속 기소되어 유죄판결이 선고되고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기각되자 그 무렵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했고, 두 번째는 2002년 연세대 국문과 동료 교수들의 집단 따돌림에 의해 ‘교수 재임용 탈락’의 위기를 겪으면서 심한 외상성 우울증에 걸려 자살 시도를 했고, 마지막으로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방범창에 스카프로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인생에서 그의 정신과 육체를 야금야금 갉아먹은 우울증을 고려하면 자살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자살이란 무엇인가. 자살 이외에 고백의 피난처는 없다. 그러므로 자살은 곧 고백이다.
그날은 늦여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는 중얼거렸다.
“오늘은 무지 덥구나. 비가 언제 내렸던가? 그래도 언젠가 여름은 끝날 거야.”
그는 몇 가닥 남은 하얀 머리카락이 뒤쪽에서 엉켜 있는 반쯤 벗어진 머리를 늦여름의 강렬한 햇빛에 노출시킨 채로 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검지 손가락과 엄지 손가락 사이에 끼고 담배연기를 코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가 맨날 지나다녔던 골목길로 눈길을 돌렸다. 모든 것이 어렴풋하고 풀어 헤쳐져 있었다. 그때 수많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성스러운 여체는 목살은 축 늘어지고 자궁은 쪼그라 들었다.
시시각각 두려움이 자신을 사로잡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이 겉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분노를 삭힐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로서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을 실현하는 것인데 그는 자신의 삶 속에서 삶의 정수들이 속절없이 빠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권태는 악몽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무력감에 빠져서 아무 쓸모도 없는 것들 때문에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건 나 자신을 허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날 가만히 내버려 두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날 추호도 동정하지 않을 꺼야. 내가 쓴 쓰레기 같은 글들을 가지고 공연히 비난을 퍼붓겠지. 내가 죽은 후에도 말이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나는 현실을 이해하기엔 유머가 너무 부족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당신들이 날 이해하기엔 유머가 턱없이 부족했거나. 나는 나일뿐이고 당신들은 당신들이다. 나의 유머, 당신들만의 유머 또는 우리들의 풍부한 유머가 필요한데. 그들이 날 법정으로 끌어내서 인민 재판을 할 거라고. 단지 내게 모욕을 주려고. 얼굴에 침을 뱉겠지. 위선자들! 난쟁이들! 모두 다 악취가 풍긴다. 나는 정말 지쳤다. 그러나 그건 소용없는 일이야. 나는 이렇게 자유롭게 떠나니까. 그렇지만 부끄럽긴하다. 나는 잔혹한 종말을 기대했었다. 나는 별다른 의심 없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야.
……자살하는 이를 비웃지 마라, 그의 좌절을 비웃지 마라
참아라 참아라 하지 마라 이 땅에 태어난 행복,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의무를 말하지 마라
그는 늙고 나약했다. 갑자기 지겨움을 느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지겨움, 인간들에 대한 지겨움 등등.
그는 심장이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베란다의 금속 지지대가 튼튼한지 점검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아주 빨리 그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산 자와 죽은 자.
산자는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는데 그의 죽음을 알고 있기는 할까? 알고 있다면 그 죽음에 대해 어떤 만감이 교차할 것인가. 인생은 허무하다고 느끼고 있을까. 그저 까마득한 옛날 일이니까 이미 망각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려서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는 피해망상과 동시에 과대망상을 앓았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전격 구속과 기소는 그의 잘 나가는 인생에서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그에게 더욱 심한 우울증과 함께 피해망상을 앓게 하였고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 피해망상은 조건반사적으로 과대망상을 앓게 하였다.
그러한 시련을 겪은 이후에도 성에 대한 편집증적 망상, 성담론 또는 실제 삶에서(우리에게는 아주 이상하지만 그에게는 아주 정상적인) 성도착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이것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에게는 정신적이건 미학적이건 간에 오로지 숭배 대상은 성 또는 관능적인 어떤 것이었다. 성적인 면이 제거되면 어떤 사상도 성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순수한 의식 역시 위선에 불과하고 결국 육체와 성에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쓰고 있는 허위의식이라는 가면에 의해 고통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적 토대는 그것들 뿐이다. 그는 성도착에 집착하는 것처럼 문학적으로도 도착에 집착했다. 그에게는 눈을 크게 뜨고 낯선 영역을 찾아서 탐색할 여지는 전혀 없었던 걸까?
그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었던가. 행간에 독자들과 숨바꼭질하기 위해서 무엇을 숨겨놓은 적이 있었던가. 도대체 독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가. 독자와 소통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던 걸까. 일부 독자들은 포르노그래피같은 작품에서 뱃속까지 토해내는 구역질을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가.
그는 왜 진정한 소설가가 될 수 없었을까? 왜 전업작가가 될 수 없었을까? 학교로부터, 친한 선후배 사이인 동료 교수들로부터 인간을 모독하는 그런 푸대접을 받으면서까지 교수직에 연연했던 것일까. 생계 문제가 걸려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출세라고 생각했고 신분 상승을 위한 자격증이라고 여겼던 것일까. 그렇다면 여기서 탁월한 지성인으로서, 작가로서, 인간적으로 그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그가 받은 모든 모욕과 멸시는 그 알량한 교수직 때문이었지 않은가. 그렇게 교수직에 연연한 것을 보면― 왜 그렇게 자부심이 강한 그가 배알도 없이 해직당한 학교로 다시 복직하고, 교수 재임용에 학과 교수들이 그렇게 결사 반대했는데도, 그래서 병까지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어이 학교로 돌아간 것을 보면 ― 그 역시 자신이 그렇게 경멸했던 지적 허영심과 권위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위선자임에 틀림없다.
[ 나는 여기서 똑같이 유미주의자 이거나 탐미주의자이고 나르시시스트인 오스카 와일드를 생각한다.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공통점이 너무 많다. 그들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결국 무신론자이고 극단적인 비관주의 또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말했다.
“난 절대 옥스퍼드의 고리타분한 교수가 되지는 않을 거야. 나는 시인, 작가, 극작가가 될 거야. 어떤 식으로든 유명해질 거라고. 만약 유명해질 수 없다면 악명이라도 떨치고 말 거야.(I won’t be a dried-up Oxford don, anyhow. I’ll be a poet, a writer, a dramatist. Somehow or other, I’ll be famous, and if not famous, notorious.)”]
그는 교수직을 내팽개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렇게 좋아하는 섹스 이야기만 실컷하면서 그런 소설을 평생 쓸 수도 있었는데. 그래서 베스트셀러를 써서 돈도 많이 벌고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을 수도 있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소설은 그의 인생이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가벼운 유희에 불과했다. 소설가로서 목숨을 걸 만큼 치열한 직업의식은 없었기 때문이다.(그는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죽어도 ‘나잇값’은 안하겠다는, 그래서 마음만은 언제나 ‘야한 상태’로 있겠다고 했으니까…….)
그걸 운명이나 숙명이라고 운운할 순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손쉽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모든 빛에는 그림자가 있는 법이다. 인생에서 상승과 몰락을 겪어본 자만이 진정으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가면서 자유분방하고 자의식이 강하고 이상주의자인데다 놀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삶에 지치고 겁먹었다. 그의 글에는 노골적인 냉소주의를 넘어서서 결국 인간을 비하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온갖 성행위를 무자비하게 노출시켜서 표현한다. 무절제하며 지겹도록 지루하게 반복한다. 하지만 블랙 유머를 쓰면서 훌륭한 유머 감각이 없고, 그러면서 겸손하지 못했고 자기 억제를 하지 못했다.
그가 천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방대한 저서에서 발견되는 날카로운 지성과 번뜩이는 재치, 아포리즘, 성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학적 사색을 고려하면 천재적인 것은 틀림없다.
그는 우리 문학사에 흔치않은 독특한 족적을 남겼다. 지금쯤 어떤 형태이건 그가 현대문학에서 어떤 위치를 점했는지 재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무책임하게도 애써 그를 외면해 왔다. 왜 그가 그렇게 푸대접을 받아야 했단 말인가.
인간이란 남이, 그것도 자기 자신과 같은 수준의 사람이 겪고 있는 불행이나 괴로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기쁨을 느끼는 법이니까, 우리는 그래서 사디스틱한 쾌감을 느꼈던 것일까.
우리는 그를 시기 질투했다.
작가 이문열의 비난을 살펴보라. 그들은 세 살 차이이니까 동년배나 다름없다. 문학박사이고 연세대 국문과 교수이며 그때는 벌써 잘 나가는 인기 작가였으니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물어 뜯는 대상으로는 딱 알맞았을 것이다.
그건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지극히 유치한 비방에 불과했다. 나는 그게 시기와 질투심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 중 누가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구태의연해서 성담론에 관한 위선을 까발리지도 못하면서, 과감하게 쓸 용기가 없어서 고루한 관습에 얽매여 지루한 글을 쓰면서, 그를 외면하고, 폄하하고, 비방하고, 험담하고, 쑥덕거리고, 이상한 괴물로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로 말미암아 그는 뿌리가 뽑힌, 친구가 없는, 사랑이 없는, 마침내 인간다운 삶조차 없는 궁지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는 끔찍한 상처를 입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심전심으로 공모한 공범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말인데, 그가 죽지 않았다면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줄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그는 ‘언젠가는 나와 시와 생활과 종교와 사상이 함께 결합된 날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 시인은 어떤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우주의 진리를 전달해야 하고, 또 미래를 향한 투철한 예언자적 사명을 갖고 있어야 한다’ ‘…… 최근 우리 문학은 시나 소설이나 극도로 왜소화되고 기교적 유미주의로 떨어지고 말았다’ ‘…… 작가나 시인들은 좀 더 문학에 있어서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
그는 우울증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글을 썼다. 그는 마음속 울화와 욕구를 마음껏 설사시키기 위하여 또한 자기 정화를 위하여 글을 쓰지 않으면 금단현상을 일으킨다.

나는 많은 작가들이 작품을 끝내고 나서 엄청난 허탈감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종의 산후우울증을 앓는 것이다.

다시 돌이켜 보면…… 1992년부터 2002년까지 10년 간은 그의 인생에서 최악의 시기였다. 긴급 구속과 긴 재판, 유죄 판결의 확정, 그 무렵 처음 자살을 기도했고, 학교로부터 직위해제, 퇴직과 복직, 교수 재임용 탈락 소동과 그 과정에서 배신을 당했고, 그로 말미암아 외상성 우울증에 걸려 치료 때문에 2년 6개월 간 학교 휴직, 또 다시 자살을 기도하는 등 비극적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던 것이다.
그 시절, 그는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과 고독, 좌절과 반항, 허무를 뼈저리게 맛봐야 했다. 그리고 뼛속 깊은 절망을 체험해야 했다. 그때, 마광수 같은 나르시시스트이고 허무주의자라면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순 없었을까. 회의하면서 방황할 수 없었을까. 자포자기하면서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할 수 없었을까. 그래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고통을 달관하고 체념하며 진정한 희망을 향해 나갈 수 없었을까.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더라면.
그러고 나서 글쟁이로 오로지 시나 에세이, 걸작 소설 쓰기에 전념하는 것이다. (내 짧은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는 평생 동안 탐미주의를 추구했다. 그러면서 ‘야한 여자’ 예찬론과 감각적 성담론이라는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었다. 더 이상 젊지도 않은데 언제까지 섹스 스토리에만 몰두할 것인가.
그도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으니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문체를, 지루하게 반복되는 리듬을, 성담론이라는 한정된 주제를 하루 속히 탈피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대개는 인간적인 성숙과 사회 경험의 축적과 인생의 유전을 겪으면서 변화하게 되어 있으니까.
어느덧 인생의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어 육체는 노쇠하고 심리적 상태는 불안정해서 불면하는 밤을 보내는데 말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되돌아보면서 숨이 막혔을 것이다. 정말 위기라고 느꼈을 것이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반복은 안 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지금처럼 작품을 쓰는 일은 더 이상 안 된다고 한계를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 꿰뚫어 보고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소설로 형상화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타자를 의식하고 인간의 실존에 관한 또 다른 목소리를 가져야만 위대한 작가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심오한 철학적 사색은 스케일이 큰 무겁고 깊은 난해한 소설을 쓰도록 그를 밀어붙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스케일이 큰 그럴듯한 소위 대중소설을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성격과 인생관, 문학에 대한 사유를 고찰해보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번개가 치는 듯한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 오지않는다면 자의식이 너무 강한 그에게 변화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쉽게도 나의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5. 누군가 오스카 와일드에 대해 말했었다.
영광의 좌대에서 추락해 진창에 빠진 오스카 와일드가 완전히 노선을 바꿨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세상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일도 없다. 그런 기적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 자신이다.

6. 톨스토이가 말했다.
여성이 임신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즉 생리를 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성행위는 합리적 정당화가 불가능하며, 단순히 육욕적 쾌락의 한 형태라네. 이것이야말로 매우 수치스럽고도 부끄러운 쾌락이라는 데는 모든 인간의 양심이 동의할 터인데,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명예스럽고 부자연스러운 성적 변태이기 때문이라네.

7. 영국 작가 존 클레런드는 그의 소설 ‘패니 힐 Fanny hill’ 에서 성행위며 인체의 성 관련 부위를 표현하기 위해 완곡 표현과 미사여구를 총동원했다. 하지만 외설죄로 구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장미꽃 입술의 서곡’ ‘달콤한 좌석’ ‘사랑의 부드러운 실험실’ ‘갈라진 곳’ ‘수풀로 에워싸인 바닥 구멍’ ‘가운데 주름’ ‘사랑의 보물’ ‘쾌락에 목마른 도랑’ ‘살에 난 상처’ ‘기타 등등’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쾌락의 무기’ ‘쾌락의 추축’ ‘사랑의 진정한 화살’ ‘전권 도구’ ‘물렁뼈’ ‘살덩어리 솔’ ‘살아 있는 상아’ ‘자물쇠 따개’ ‘하얀 막대기’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진실, 적나라하게 까발려진 진실’ ‘영문학사에서 가장 에로틱한 소설’ ‘18세기 에로티시즘 문학의 고전’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고 가장 많이 읽힌 포르노그래피 소설’ 등의 평가를 받고 있는 솔직 담백한 외설물 가운데 하나인지, 아니면 18세기의 고전인지를 두고 현재도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교보문고에서 전문을 완역하여 전자책으로 새롭게 펴냈다.)

그는 리넨 튜닉의 끈을 풀고, 옷을 아래로 벗긴 다음, 그녀의 백금색 가슴의 흰 광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가슴을 만졌고, 자기 삶이 녹아버리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그가 말했다. 당신은 왜 이걸 제게서 숨기셨습니까? 보십시오! 그가 말했다. 이건 기도를 뛰어넘습니다. (여기서 그는 예수를 말하고 그녀는 여사제를 말한다. 출처는 D.H. 로런스의 ‘달아난 수탉 The escaped cock’ 이다.)

8. 항소심 재판장은 판결 선고 당시 ‘이 판결이 불과 10년 후에는 비웃음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판사로서 현재의 법 감정에 따라 판결할 수 밖에 없다.’ 라고 말 했다고 하는데, 지금 그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법 감정은 (무미건조하고 고루한) 판사가 아니라 그 당시 대다수 국민의 법 감정이 기준이 되었어야 한다.
그들은 왜 예술과 외설을 구분 지으려고 했을까? 뭐가 외설이란 말인가. 성적 흥분을 일으키면 외설이라고. 그렇다면 외설이 왜 나쁜 것인가. 왜 죄가 되는 건가. 성은 인간의 본성이고 원초적 생명력인데 말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따져본 적이 있었던가. 그들은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음란성의 개념에도 무지할 뿐이다. 골치 아프게 그런 걸 알 필요가 있을까. 오직 관료주의적 타성과 관행에 의지해서 늘 해오던 대로 재판을 할 뿐이다.
판사들은 그들에게 무죄를 선고할 만큼 용기는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구속시킬 만한 배짱도 없었다. 하지만 엄청난 선심을 베풀 듯이 말했다. 그래서 판결문에 ‘……나아가 피고인들은 그 동안의 적지 않은 구금기간을 통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위와 같은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 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그건 집행유예를 선고할 때마다 하는 의례적인 것으로 흔해 빠진 클리셰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들이 구금기간을 통해서 반성했다고?! 그들은 전 재판과정을 통해 한번도 반성한 일이 없었다. 오직 분개했을 뿐이다. 반성은커녕 이를 갈면서 판사들의 법 개념의 일방적 해석과 문학에 대한 파렴치한 무지에 대해 분개했던 것이다.
그 후에도 마 교수는 여전히 위와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뿐이다.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불타는 관능적 감각은……
문학적 영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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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
마광수 교수는 1951년 경기도 수원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나기 몇 달 전, 1.4 후퇴 중 종군 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에 갑자기 사망해 홀어머니 슬하에서 이부 누나와 함께 자랐다. 대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국문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석 입학해서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 다녔으며, 학부과정을 올 A로 졸업했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26세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홍익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당시 28세)를 거쳐 1983년부터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당시 32세)로 재직하다 2016년 8월 정년 퇴임했다.
2017년 9월 5일 오후 1시 51분쯤,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연립주택에서 숨져 있는 것을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고 자살로 추정했다.
그는 작가로서는 굴곡이 많았지만 문학 연구가로서는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니 바로 윤동주의 재발견이다. 윤동주하면 떠오르는 정서인 ‘부끄러움’ 도 마광수 교수가 그를 연구하면서 발굴해 낸 것이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
김진태 전 검찰총장은 1992년 그 당시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에서 마광수 교수를 담당한 수사검사 겸 공판 관여 검사였다.
1952년 경상남도 사천 출생.
제14기 사법연수원 수료
2013년 1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제40대 검찰총장을 지냈다.

안경환 교수
안경환 교수는 항소심에서 재판부가 선정한 감정인이었다. 당시 안경환 교수와 서강대 이태동 교수는 ‘즐거운 사라’는 문학작품이 아닌 음란물이라며 마광수 교수에 대한 검찰의 기소 의견을 지지했다.
1948년 경상남도 밀양 출생.
서울대 법학과 졸업
미국 펜실베니아대 법학 석사
미국 산타클라라대 로스쿨 J.D.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한국헌법학회장
제4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2013년부터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민용태 교수
민용태 교수는 항소심에서 피고인측 증인으로 나와 검찰의 공소사실을 반박했다.
1943년 전라남도 화순 출생.
스페인 마드리드 국립대학교 박사
1968년 창작과비평에 시 ‘밤으로의 작업’으로 등단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어서문학과 명예교수
스페인 한림원 종신회원

장석주 시인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당시 발행인으로 함께 옥고를 치렀던 장석주 시인은 2017년 9월 15일 ‘여성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마광수 교수와 얽힌 여러 이야기를 했다. 이 인터뷰 기사는 같은 해 10월호에 게재되었다.

1992년 10월 29일 새벽에 검찰청 직원 서너 명이 집 앞에 와서 갑자기 연행됐어요. 그날 종일 조사 받고 아마 저녁 8시쯤에 법원 영장이 떨어져서 서울구치소에 함께 들어간 걸로 기억해요. 설마 했어요. 이걸로 사람을 구속시킬까. ‘즐거운 사라’는 출판된 책이니까 증거인멸도 할 수 없고, 우린 얼굴이 다 알려진 사람들인데 일사천리로 구속까지 진행된 거죠. 처음엔 암담하고 당황스러웠고 속수무책인 상태였어요. 이후 변호인이 선임됐지만 보석 신청도 계속 기각됐고요. 재판이 진행됐어요. 두 달이 빨리 지나갔죠. 12월 30일에 1심 선고 받고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저는 그 사건으로 인해 출판사를 정리하게 됐고, 가정도 풍비박산이 났어요. 내 인생에 가장 큰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죠. 내 안에 분노 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구속까지는 예상을 못 했죠. 저는 표현의 자유와 외설이란 법적 규제가 정면으로 충돌했을 때 우리 사회의 품이 그렇게 좁진 않을 거라고 낙관적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상당히 엄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 거죠. 검찰 권력이 얼마나 막강해요. 개인이 권력에 맞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모든 걸 감당해야 했고, 거기서 생겨나는 피해와 손실은 온전히 제 몫이었죠.

1980년대 당시 한국 사회는 좌파 이념이 휩쓸던 때였어요. 한국 사회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서 편향된 사회가 되는 것을 우려했죠. 지식생태계가 건강해지려면 반대쪽에도 좀 균형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그런 면에서 마 교수가 가진 문학적 혹은 이념적 · 사상적 위치가 대단히 독특했어요. 마광수 같은 사람도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마 교수 작업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회를 주는 것이었어요. 지식생태계가 균형에 필요하다는 것이 당시 제 생각이었어요. 검찰에서는 내가 마 교수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고 했던 게 아니냐고 했지만요.

운동권이 득세하던 시기였고,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시대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었죠. 그러나 저는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마 교수는 성 담론 해방을 거의 혼자 주창하고 나왔어요. 그것을 시로 소설로 창작해서 계속 보여줬고요. 우리 사회는 밤과 낮이 같지 않은 위선적 사회였어요. 낮은 근엄한 도덕주의자가 지배하지만, 밤은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였죠. 마 교수는 그런 이중성을 폭로하고, 성 담론을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더 자극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작품을 썼던 거죠.

마 교수는 독창적인 천재였죠. 사물이나 현상을 보는 방식이 보통사람과 굉장히 달랐어요. 특히 윤동주나 시나 이상의 시를 해석한 걸 보면 독창적인 시각이 두드러져요. 재능도 많은 사람이었어요. 가끔 함께 노래방에 가면 노래도 굉장히 잘했거든요. 자유롭고 유쾌하고 잘 노는 사람이었어요. 멋쟁이였어요.

사회적 타살이란 말은 앙토냉 아르토라는 프랑스 작가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에요. 고흐는 자살했지만 사실은 사회적 타살이란 거죠. 고흐의 자살이나 21세기 마 교수의 자살은 똑같아요. 자살 형식을 빌렸지만 이것은 한 사회가 그 예술가에 대한 냉대와 몰이해로 공모해서 죽인 거예요.


참고 자료
나는 메타픽션을 의식하면서 한 편의 논픽션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 또는 실화소설이기 때문에 냉엄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역사소설을 쓸 때의 작가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 많은 참고 자료를 읽고 조사했지만 충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마광수 교수를 만나서 조사하고 확인해야 할 사항이 많았지만.
내가 1차 자료에 근거하지 않고 또한 당사자를 직접 만나서 취재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또는 역사적 상황과 인물들, 사건, 배경에 대한 내 상상력이 지나쳤거나 부족했다면 그건 순전히 내 과오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참고한 자료는, 마광수 저,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돌아온 사라’ ‘마광쉬즘’ ‘마광수의 뇌구조’ ‘나의 이력서’ ‘사라를 위한 변명’ ‘마광수의 유쾌한 소설읽기’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법률신문사 발행 ‘법조50년 야사’, 범우사 발행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실록’ 제6권, ‘마광수 교수 필화사건 백서’, 존 클레런드 저 / 정성호 옮김 ‘패니 힐’, 게리 덱스터 지음 / 박중서 옮김 ‘왜 시계태엽 바나나가 아니라 시계태엽 오렌지일까?’ 기타 나무위키 또는 네이버 인터넷 자료 등 이다.
다만 ‘즐거운 사라’ 사건의 공소장, 1심 판결문, 변호인들의 항소이유서, 마광수 교수 본인의 항소이유보충서, 한승헌 변호사의 상고이유서 등등 중요하면서 상세한 것은 한승헌 변호사의 전게서 457면부터 539면 까지 및 ‘마광수 교수 필화사건 백서’를 참조해야 할 것이다.
원본 ‘즐거운 사라’는 그 사건 재판에서 음란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공개적으로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공소장과 판결문에서만 문제가 된 음란물 부분을 찾아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부분을 생략하지 않고 전부를 실었다. 판례가 제시한 음란물의 개념, 문학에서 성표현의 한계, 예술과 외설의 변별에 관해서 학술적 가치가 있는 논문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공소장과 판결문을 참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성일:2020-08-03 10:27:00 211.104.150.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