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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난생 처음 욕을 한 날

닉네임
유중원 변호사
등록일
2019-01-09 14:37:48
조회수
382
난생 처음 욕을 한 날



마주 보고 대화하는 사람들도
마음은 천 리나 떨어져 있다
― 명심보감



― 유승석 변호사님!? 아주 오래간만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는지. 신수가 훤하십니다. 그나저나 절 기억이나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누구시더라? 어떻게 제 이름까지?

―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 예?!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까 김정민 변호사죠.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하도 오래돼서……

― 그러실 테죠. 법원 고위직을 지내고 지금은 대형 로펌에서 지내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요즘은 대형 로펌도 옛날 같지 않거든요. 정년도 당겨졌지 않습니까.

― 그래도 우리 같은 구멍가게하고는 차원이 다르겠지요. 전 40년을 해도 이 모양 이 꼴입니다. 전관 경력이 없거든요.

― 저를 기억하는 걸 보니까…… 저한테서 재판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요?

― 그럼요. 그럼……

― 저는 지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골프가 아주 잘 맞고 있거든요. 그래도 몇 가지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재판을 받은 당사자나 변호사들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이란 게 도대체 믿을 게 못 되지요.

― 당연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저가 기억나는 것은…… 유 변호사님이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처음으로 형사단독을 하던 때의 일입니다.

― 형사사건은 정말 지겹지요. 밑바닥 인간들을 재판한다는 게 말입니다.

― 그래도 그때는 형사단독이야말로 판사들이 가장 선망하는……

― 그렇긴 했습니다.

― 그때 단독으로 오시기 전에 형사합의부에 우 배석으로 계시지 않았습니까?

― 그렇지요. 배석에서 단독으로 승진하니까 그제서야 진짜 판사가 된 기분이 들더군요.

― 그렇겠지요. 그 기분을 알 것 같습니다.

― 정말 판사로서 자부심이 들었지요.

― 그런데 그 당시 합의부 부장님이 누구셨더라?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나는데 이름은? 가물가물하네요.

― 배수곤 부장님입니다. 저에게는 고등학교, 대학 선배가 되지요. 인품이 아주 훌륭하시지요. 법원에 계속 계셨으면 대법관까지 올라가실 분이었죠.

― 대법관까지 올라갈만큼 그렇게 인품이 훌륭하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 그렇다니까요. 저가 직접 모시고 재판을 해보니까 피부로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저는 소문으로만 들어서…… 이곳 서초동이 워낙 좁은 바닥이라서 모를 수가 없지요. 그 양반은 브로커를 끼고 전관예우 운운하면서 거액의 수임료를 챙겼더라구요. 그게 바로 사기였다는 거 아닙니까. 사기였단 말입니다.

― 잘은 모르지만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 가까스로 피해자와 합의해서 구속까진 가지 않았지요.

― 저는 구체적인 경위는 모릅니다. 어쨌거나 남의 일이니까요. 더욱이 지나간 과거지사 아닙니까. 전…… 이만…….

― 아! 그렇지요! 모처럼 만났는데 본론이 빠지면 안 되겠지요. 이제야 생각나는군요. 그게 전관예우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무슨 말씀인가요? 뜬금없이 전관예우가 어쨌다는 겁니까. 그게 용건이라는 말씀인가요?

―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중대한 용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법대 위에서 떵떵거리며 날뛸 때 일어난 일이니까요.

― 당신…… 당신이라고 했습니까. 말씀을 좀……
저는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전관예우는 없어지지 않을거구만. 유구한 전통이니까. 전통이라는 게 어느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죠. 아주 뿌리가 깊지요.

― 유 변호사님 역시 법원 고위직 출신으로 오래 계셨으니까 덕을 톡톡히 보셨겠네요.

― 그럼요, 그럼요. 그걸 부인하면 안 되겠죠. 그러면 양심을 속이는 일이 될 겁니다.

― 그렇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양심은 살아있어야만 하지요.

― 그게 예전만큼은 못 하지만 여전히 위력이 있어요.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기는 합니다.

― 그게 말입니다. 21세기 문명사회에서 여태 사라지지 않은 게 불가사의합니다.

― 김 변호사님! 왜 그러세요? 잘 생각해보십시오.
판사들이 나중에 개업하면 그 덕을 톡톡히 볼 수 있는데 그걸 스스로 애써서 없앤다는 게 말이 됩니까. 어불성설이죠. 세상 이치에 맞지 않는 거 아니겠습니까.

― 그러나 그건 지극히 나쁜 관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폐해가 심각하지요.
경북대 법전원에 신평 교수님이 계시지요. 무슨 과목을 강의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판사도 잠깐 했고 변호사도 잠깐 했을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언젠가 그분의 글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전관예우와 법조브로커의 심각한 폐해를 지적했더랬습니다.
저는 물론 깊이 공감했습니다마는.

― 제가 알 바 아니지요. 뭘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 모처럼 만났는데. 그러니까 끝까지 들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정부 방침에 따라 경찰이 중개업자들을 단속했는데 시범 케이스로 두 사람이 부동산중개업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어요.
그 사건이 기소되고 나서 유 판사님께 배당이 된 거죠.
A는 제가 맡았고, B는 그때 막 옷을 벗고 나온 배 변호사가 맡았지요. 죄송합니다. 피고인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군요. 하여간에 수임을 안 했으면 그런 수모를 당하진 않았을 텐데 두고두고 후회하였지요.
그런데 우리는 거의 동시에 보석신청을 하였는데 B만 보석이 허가되었지요. 그러면 제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 당사자 가족들이 사무실로 몰려와서 무능한 변호사라고 고래고래 소릴 지르면서…… 수임료 돌려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요.

― 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이제 와서 어쩌란 말입니까.

― 그런 나쁜 기억은 일말의 양심은 있으니까 애써 잊어버렸겠지요. 인간적으로 나를 모독하는 거였죠. 나도 시간이 없으니까 결론을 내려야겠네요. 그건 헌법이 보장하는 평등권, 행복을 추구할 권리, 재판을 받을 권리,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 아닙니까!

― 이제 와서 저에게 헌법 강의를 할 작정이십니까.

― 제가 헌법을 강의할만한 주제가 되겠습니까. 어깨 넘어 들은 풍월이라고 해두죠.

― 모처럼 우연히 만나서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군요.

― 무슨…… 제가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는 게 아마 평생 처음일 거예요. 전에 욕을 한 기억이 없거든요. 제가 불같이 화가 났을 때도 쓰는 말이 고작 ‘에잇!’이거나 ‘나쁜’이거든요.
육두문자를 들으면 당연히 화가 나겠지요. 화가 나도 꾹 참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흥분하셔도 안됩니다. 흥분하면 자칫 건강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요. 암 그래야겠지요.

― 무슨 말씀인가요? 무척 궁금합니다.

― 이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당신 같은 개자식이 법대에 앉아서 개같은 재판을 했으니까, 그런 게 누적되면서 결국에는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이렇게 욕을 얻어먹는단 말입니다.
이제는 이해가 되십니까.

― 말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당신이 뭔데…… 지랄이야.

― 끝까지…… 죄송하다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말 한 톨의 양심도 없군요.

― 양심 따위가 밥 먹여주나. 나이를 처먹었으면…… 그런 것쯤은…… 내가 바빠서 가겠지만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구만.

― 그건 제가 할 소리입니다! 나쁜 사람이라구요! 당초에 판사가 되면 안 될 인간이었어요!

그렇게 해서 둘은 찜찜하면서 지극히 불유쾌한 기분으로 헤어졌다. 정말 재수없는 날이었다. 당연히 그날 하루를 완전히 잡쳐버렸고 그 여운은 오랫동안 남아서 머리를 어지럽힐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어찌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인가.

이 대화가 일어난 시점이 언제인지, 그 장소가 어디인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 당사자들의 이름이 가명인지 실명인지 여부 등등은 당신이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랄 뿐이다.
작성일:2019-01-09 14:37:48 14.32.9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