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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강물은 흐른다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12-16 12:28:34
조회수
55
강물은 흐른다


강물은 지금도 흐르고 앞으로도 영원히 흐를 것이다.


모세하난 이브라함은 사하라 사막의 남쪽 원주민인 투아레그족 청년이다. 사막에 가족을 남겨두고 지옥을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로 온 것이다. 그는 알제리 출신의 불법 이민자이다.
(유명한 건축설계사이면서 사막 여행가인 김규현은 2000년 여름 사하라 남쪽을 여행하면서 여행 가이드이고 운전수였고, 말동무였던 그를 처음 만났었다.
그날 저녁 심신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지만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잠을 자려고 애쓸수록 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맑은 하늘에 암청색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막의 밤이 깊어가면서 하늘에 별빛마저 띄엄띄엄 남아있었다. 사그라져가는 모닥불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브라함은 장작 한 개비를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들은 다시 아랍 커피를 끓여 마셨다. 그 독약처럼 검고 쓰디쓴 커피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깊은 여운을 남겼다.
김규현이 말했다. “계속해보라고…… 알제에서 밀항선을 타고 마르세유로 밀입국했고…… 그리고 프렌치 커넥션의 후예인 알제리파 패거리에 속했고…… 그런데 기특도 하지. 마약 범죄에 연루되지도 않았고 갱단의 칼잡이가 되지도 않았으니까.
그 여관에서 자크를 만났다고 했어. 자크가 누구였지? 뭘 어쨌다고? 인생 여정이 궁금하군. 유색인종 난민이었으니까 자아는 분열되고 정체성 때문에 큰 혼란을 겪었겠지만. 또는 인간 혐오증에 걸렸을 수도 있고……?”)
이브라함은 마르세유에 와서 몇 년쯤 지나서야 청소부로 자리 잡고 일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991년 봄이었다. 그가 프랑스에 온지는 벌써 3년 반이 지났고 몇 년째 가뭄이 들어 폐허가 된 타만라세트의 고향 마을을 떠난 지는 5년쯤 되었을 때이다.
마르세유 뒷골목의 집단 패거리 중에서 최대 파벌인 알제리파 선배가 물려준 자리였다.
그들의 슬로건은 ‘알제리, 나는 너를 사랑해’ 였지만.
이브라함은 밀입국자나 이주 노동자들, 알코올 중독자들이 주로 투숙하는 그 여관에서 장기 투숙하고 있던 늙고 고독한 사람을 어떤 운명처럼 만나게 되었다.
그의 프랑스 이름은 그냥 자크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베트남에서 어머니가 불렀던 베트남 이름이 따로 있었다고 했다. 이브라함은 그 당시 너무나 외로웠으니까…… 그와는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오히려 스승이라고, 위대한 스승이라고 해야 될 것이다. 아니면 두 번째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그는 전혀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두 눈을 고정해서 못을 박을 것처럼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말이다.) 그 노인은 70대 초중반으로 갈색 얼굴에 키가 작으면서 깡말랐고, 그러나 얼굴은 주름살이 너무 많았으며 첫 전투 때 파편에 튀긴 흙먼지가 얼굴을 때리면서 생긴 안면 경련이 있었다.
그는 매월 첫 주의 월요일이면 꼬박꼬박 한 달분 방세를 (욕실이 딸린 제일 큰 방의) 미리 지불하였기 때문에, 또 그가 점잖고 신사적이고 방을 깨끗하게 사용한다는 이유로, 평소 무덤덤한 (프랑스 남부 아를 출신으로 세 번 결혼했으나 모두 이혼한 60대 초반의) 여관 여주인도 가끔 밤이면 온 여관을 울리는 그의 지독한 기침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하여 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돈은 그가 전쟁에 참전하여 서부전선의 뫼즈 강 전투에서 독일군과 싸웠기 때문에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무슨 군인연금과 할머니에게서 유산으로 받은 약간의 신탁기금에서 매달 나오는 것이었다.
그는 매주 한 번씩 생필품을 사기 위해서 슈퍼마켓에 갔고 매달 한 번씩 쇼핑몰에 갔다. 그리고 거의 매일 규칙적으로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온 젊은 여주인이 경영하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생 장 요새 부근에 있는 제마엘프나 카페에 출근해서, 그러니까 아침 9시부터 오후 9시 경까지 (가끔은 일찍 또는 늦게까지) 창가의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꼼짝달싹하지 않고 책을 읽으며 앉아있었다.
그는 언제나 부둣가를 거닐면서 (부둣가에서 구걸하는 노숙자가 “저는 거지는 아니고 노숙자입니다. 살 집이 없거든요. 도둑도 아니고 강도도 아닙니다. 제가 꼭 한 잔만 마실 수 있게 조금만 던져주세요.”라고 말하면 그가 공손하게 잔돈을 건넸고 “행복하세요. 복 많이 받을 겁니다.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닷가를 낮게 날으며 울부짖는 갈매기의 소리를 들으면서, 밀려오는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조약돌에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여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 작은 카페까지 걸어가서 그 자리만을 계속 지킬 뿐이었다.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어두운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잃어버린 세월을? 또는 장소들과 사물들과 이미지들을? 참담한 전쟁의 기억? 뫼즈 강을? 독일의 수용소를? 투르빌이나 생라자르 역을? 죽음의 해안을? 탕헤르나 케이프타운? 아프리카를? (가야만 한다! 아주 멀리 가야만 한다! 멈추면 안 되지. 그는 도대체 아프리카에서 여행자로서 어디까지 갔던 것일까? 아니면 방랑자처럼 헤매었는가? 얼마 동안이나 있었을까? 어느 도시를? 밀림을? 사바나를? 사막을? 뭘 하면서?) 잠시 멈췄던 이곳저곳을? 강물을? 여인들을? 그리고 고군분투했거나 아름다웠던 나날들을? 상상? 환상? 꿈?
그 카페에서 양파 수프와 전채 요리, 또는 (주로 바게트 샌드위치나 마르세유의 별미인 부야베스를) 메인 요리로 먹으며 간단한 식사를 하고 밤이 깊어가면 부드럽고 고소한 블루치즈를 안주로 하여 싱글 몰트위스키 몇 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이켰다. 그러나 가끔 기분이 내키면 적포도주 한 병을 비우기도 했다. 잘 모르기는 하지만 그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무슨 사교 모임이나 클럽에 참석하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마르세유에서 연중 열리는 축제와 사육제에 참여하거나 음악회, 전시회, 극장에 가는 일도 없었다. 그는 삶의 경계선에서 안개처럼 부유했으니까 인간 혐오증과 인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과 지나치게 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냥 가벼운 목례나 눈인사만 할 수 있는 관계를 원했다. 맨날 만나는 여관의 여주인과도 그랬다. 그러니깐 이브라함만이 유일하게 예외였다.

그가 훨씬 훗날에 그날의 전투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했었다.
그 해 (1940년) 이른 봄 그에게는 첫 전투의 경험이었다.
성능이 좋은 독일 전투기가 새하얀 은빛 궤적을 그리며 낮게 날면서 기관총을 난사하였고 그 흙먼지가 강하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얼굴에 심한 통증이 왔고 몸이 아주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질척질척한 땅바닥 진창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때 운이 나쁘게도 얼굴이 주근깨로 덮여있던 알자스 출신 병사의 머리가 총탄에 맞아 갈라졌고 머리가 붙어있었던 목구멍에서 검붉은 피가 콸콸 넘쳐흘렀다. 곧 포탄이 분노한 듯 쉴 새 없이 날아들어 굉음을 내며 폭발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과 말들을 죽였다. 주위에는 신원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시신이 별로 없었다.
독일 보병들이 연달아 쏘는 콩 볶는 듯한 기관총과 소총 소리와 박격포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해 늦은 봄이 되자, 그때 전투는 미친 듯이 격렬하였지만 독일군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프랑스군은 지리멸렬하여 허둥대다 맥없이 패배하였다. 독일의 탱크들은 너무나 쉽게 마지노선을, 뫼즈 강을, 마른 강을, 센 강을 차례로 돌파해 버렸다. 그리고 철저히 유린된 후 점령되어 독일 군대라는 쇠사슬에 묶여있는 프랑스. 그들은 옷깃에 은빛 배지가 번쩍이는 초록색 제복을 입고 반짝반짝 광이 빛나는 장화를 신었다. 번들거리는 붉은 얼굴은 말끔하게 면도를 하였다. 건장한 체구를 지닌 사내들이 히틀러 찬가를 휘파람으로 불어대고 제국군인 특유의 절도와 권위를 뽐내며 파리 거리를 활보했다.
그리고 페탱. 늙은이. 고집불통. 음험한 인간. 베르됭의 영웅이 돌아왔다. 페탱이여, 프랑스를 구하소서. 북부 점령지와 남부 자유지역. 패배와 배신, 배신자. 연대와 저항.
자크가 말했었다. “그해 5월의 마지막 전투 후, 나는 오랫동안 일종의 히스테리 상태에 빠져있었던 거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지. 심리적 실명에 빠져서 줄곧 눈을 뜨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 대해 눈을 감아버린 거지. 세상이 흐릿하게나마 다시 보이기 시작한 것은 수용소에서 한참이 지나서였어.
독일 군의관이 심리 치료를 해주었거든. 그는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라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 주었지. 그때 군의관이 치료제라고 몰래 갖다주는 독한 술을 마셨지. 잊기 위해 마시고 또 마셨지. 눈은 돌아왔어. 술이 약이었던 거야. 그는 날 그냥 타타르인 또는 동양인이라고 불렀어.
그는 아시아 쪽에 거의 무한정 매력을 느끼고 전쟁이 끝나면 장기간 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지. 몇 년쯤. ‘그건 내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야만 가능하겠지만.’ 하지만 그는 러시아 전선으로 전출되어 갔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죽었어.”
자크는 가끔 독한 술에 취해 있었고, 자주 콜록콜록 심하게 기침을 하였으며, 때로는 혼자서 무언가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그래도 그에게서는 따뜻한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었고 유일하게 사람의 냄새가 났다.
이브라함이 말했다.
“그 시절에 그에게서 프랑스어도 정식으로 배우고…… 문명 세계에 대하여 다른 많은 것도 알게 되었지. 나는 자크에게 큰 빚을 진거야. 그가 날 교활하게 조종하려고 한 게 아니였으니까 그의 진실을 믿게 되었지. 그는 바칼로레아를 합격하고 소르본느 대학에 들어갔지만 중퇴하였어. 강제징집 되었기 때문에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 그는 너무 외로운 나머지 말동무가 필요해서 나에게 프랑스어를 열심히 가르친 거였어.
난 이미 알제 시절부터 어깨 너머로 조금씩 배우고 있었으니까 더욱 빠르게 터득하여 그를 기쁘게 해주었지. 그는 아시아계 유색인종이었으니까…… 같은 유색인종인 나에게 일종의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을 거야.
그는 그때, 터무니없게도 날품팔이에 불과한 나에게 책을 많이 읽으라고, 막무가내로 강요했어. 그것도 읽기 어려운 책을.
‘독자가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하는 서술의 힘이 있는 책이라면…… 그런 책은 여러 번 읽고 또 읽을 수도 있어. 새로 읽을 때마다 의미가 새로워지고 다르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내가 말했었지.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요. 나는 아프리카에서 왔는데, 사막의 족속인 투아레그란 말이에요. 아랍어 책도 그렇고 프랑스어 책도 그렇지요. 책이란 죄다 너무 어려워요. 어렵게 시작해서 어렵게 끝나거든요.’ 그가 정색을 하면서, 아니 노려보면서 말했었지. ‘문맹은 절대로 안돼. 눈뜬 장님이야. non (아니요), oui (예)만으로는 이 험한 세상을 살 수 없지. 불가능해. 글이란 기호란 말이야. 이 세상의 암호문인 거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거야.
넌 글을 알고 쓰고 읽을 수 있어야만 하지.
그래야만 이 세상의 수수께끼를 알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기를 수 있는 거지. 널 해방시켜줄 거야. 글을 알게 되면 분노, 절망, 수치심, 배신감, 증오가…… 아프리카인의 끓어오르는 증오가 완화될 수도 있는 거야. 그리고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는 죄의식이건 부채의식이건 그런 걸 조금은 떨쳐낼 수 있는 거지. 너는 자발적 탈주자였으니까.
하지만 아주 정직하게 진실을 말해야겠지. 나는 그때 프랑스어 교사였지. 힘들게 가르쳐야만 할 진짜 이유가 있어. 그건 나를 위한 거겠지. 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말 상대가 필요하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으니까. 말들이…… 죽기 전에 한 번쯤 쏟아낼 수 있어야 할 거야. 뭐 안 해도 상관없기는 하지만. 그걸 꼭……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신은 이미 죽었다고, 또는 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사실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 알파벳 문자와 그 신기한 온갖 지식에 너무 목말라 있었지. 강렬한 호기심과 욕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프랑스에서 살아가자면 반드시 알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해서 많이 읽고, 또 읽고, 많은 지식을 흡수했던 거야. 덕분에 책을 열심히 읽는 습관이 들었지. 그때부터 책이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온 거야.
세상의 아버지들은 다 똑같아. 아버지는 모세인 거지. 계명이 많으니까. 그런 거야. 아들에게 늘 강요를 하지. 먼저 뭘 반드시 하라고, 신을 경배하라고, 공부하라고, 뭘 읽으라고, 경전을 읽으라고 하지. 또는 뭘 하지 말라고, 술을 절대 마시지 말라고, 마약을 하지 말라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지……”.

이브라함은 밤이면 아버지가 엄숙한 표정으로 신에 대한 기도문을 암송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가끔은 물담배를 피우면서 눈을 반쯤 감고 졸리는 목소리로 낭송하였다……. 아버지는 그때 금욕주의적이고 스스로를 알라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슬람 신비주의 종파인 수피교도의 쿠란을 투아레그가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은으로 만든 쿠란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주문을 외우고 낭송하였다.

‘자비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우주의 이름으로 찬미합니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주인이시며 자비로운 선인이시니, 심판의 날의 주권자이시라. 우리가 경배하는 이가 당신이시며 구원을 청하는 이가 당신이시라.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사 당신의 축복을 베풀었던 이들의 삶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옵소서. 당신의 분노도 우리의 방황도 피할 수 있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알리프, 람, 밈…….’”

아버지는 마호메트의 열두 가지 계율을 모세의 십계와 비교하면서 그대로 행동할 것을 강조했다. 그 계율은 사막의 법률이었고 도덕 원칙이었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우리의 뿌리는 뭐니뭐니해도 구약이야. 구약에서 신약이 나왔고 쿠란이 나온 거지. 신약과 쿠란 사이에 60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니까. 그래서 열두 계율은 모세의 십계명으로 거슬러 올라간거지. 네 이름 ‘이브라함’도 ‘아브라함’과 ‘이브라힘’에서 나온 거란다.”

열두 계율
‘유일한 신만을 숭배하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라.’
‘이웃을 사랑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주라.’
‘약한 자, 여행자, 이방인을 보호하라.’
‘낭비하지 말라.’
‘욕심부리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타인의 재산, 특히 고아의 재산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저울을 속이지 말라.’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

아버지는 언제든지 아들 앞에서 위엄을 부리며 쿠란을 읽는 걸 즐겼다. 그러므로 쿠란의 문장과 단어들, 운율과 리듬은 신실한 무슬림인 아버지와 평생을 동행하였다.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에도 그것들은 아버지를 천국까지 동행하였을 것이다.

자크가 말했었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학 작품을 잘 읽는 게 중요하지. 거기에 인간의 생각, 세계관, 정서, 감정들이 들어 있으니까…… 그건 프랑스어를 배우는 과정에서도 필수적인 거야. 그런다고 해서 네가 프랑스 사람이 되라고 하는 건 아냐.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중요해. 너는 사막의 사람이니까 그걸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하지.”
이브라함은 매일, 조금씩 독서를 늘려가면서 처음으로 자신을 답답하게 조이고 있는 속박 같은 낡은 껍데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세계에 대해 더욱더 많은 생각을 떠올렸고, 질문을 했고, 해석과 재해석을 했고,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자크가 말했었다. “프랑스가 식민지 통치를 하였던 시절…… 아직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 일인데…… 내가 어렸을 적에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지가 이미 60년이 넘었어. 그런데 베트남 언어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지. 기억 속에 구멍이 뚫려서 빠져 달아나 버린 것이겠지. 아무래도 생각이 나질 않는단다.
지금은 내 베트남 이름까지도 말이야. 한 번 가슴 속에서 지워져버린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해도…… 결코 멈추지 않고 유유히 흐르던 강물 이외에는 생각나는 게 아무것도 없지.
하지만 날 동정할 필요는 없어. 조금도 없다니까. 동정주의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니까 딱 질색이지.”
그는, 젊은 시절 프랑스 상사 회사의 사이공 지사에서 평직원으로 근무하였던 투르빌 출신의 아버지와 베트남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메콩 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한 빈롱의 외갓집에서 8살 때까지 살았다.
그 당시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해서 제국주의 신민지 지배를 하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 후 사이공에서 여객선을 타고 투르빌로 간 것이다.
투르빌은 센 강이 지친 여행을 끝내고 영불 해협의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항구 도시이다. 강 하구의 오른쪽에 투르빌이, 왼쪽에는 도빌이 있다. 그때는 파리 생라자르 역에서 기차로 서너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건너온 직후 투르빌 외곽 어촌에 있는 할머니 집에 맡겨져 몇 년간을 산 일이 있었다.
그곳은 햇볕이 은은하고 강렬하였다. 그 햇빛은 인상파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빛깔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은빛 파도가 햇빛에 유난히 번쩍거리는 바다가 아름다웠다. 밀물 때면 고물에 삼각돛을 단 작은 어선들이 통통거리며 텅 비어있는 긴 해안선을 뒤로 하고 바다로 나갔다.
할머니는 억세게 일했다. 투르빌의 부두 어시장에 길게 늘어선 생선 좌판에서 어부들이 갓 잡아온 펄떡이는 생선을 팔았다. (할머니는 억센 노르망디 억양과 사투리로 거친 몸짓을 하고 상대방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며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강렬한 말들을 사용했다.) 할머니 몸에는 생선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러나 외로운 할머니는 손자에게 한없이 인자했다. 투르빌에서의 어린 시절은 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그의 생애에서 최고의 나날들이었다. 그가 투르빌의 기차역 플랫폼에서 기차에 오를 때 할머니와 자크는 헤어지기 싫어서 손을 잡고 오랫동안 눈물을 뚝뚝 흘렸다.
기차는 차가운 푸른색 불빛들을 뒤로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그 후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자식들과 버림받은 아이들, 사생아들이 주로 가는 파리 근교의 기숙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잠시 아버지 집으로 가야했다.
그때 아버지는 남부 벨기에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였고 파리의 본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기숙학교에 입학한 이후, 그를 절대로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팽개치다시피 했던 아버지와는 그나마 인연이 완전히 끊겼다.) 그는 가톨릭 신부들이 운영하는 반군대식 기숙학교에서 6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그곳에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가톨릭의 기도문과 성가인 ‘살레 레지나’의 언어였다. 그때부터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신앙은 삶의 힘이었다. 가톨릭 신앙은 잠시나마 효과가 있어서 아시아에서 온 유색인종의 불안을 달래고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그에게 부여했다.
자크가 말했었다. “너는 말이지…… 아시아계 혼혈아가 프랑스 육군에서 군대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할 거야. 다른 사병들과는 한 식탁에 앉지도 못하였지. 군대에서도 여전히 유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했어……. 유럽에는 유색인종에 대한 뿌리 깊은 멸시가……. 오랫동안, 아마 중세의 십자군 전쟁 때부터 존재하였을 거야. 지금도 그렇고.
나치는 그래도 유대인을 불량 인간으로 인정하고 대량 살육을 감행하였지만 아시아 사람은 아예 원숭이 취급을 했어.
나의 인생에서는 두 사람의 정신적 지주가 있었던 거야. 모두 할머니들이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인 베트남의 외할머니와 내 아버지의 어머니인 투르빌의 친할머니. 그러나 난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지. 내가 사이공 항구에서 마르세유 행 여객선에 오를 때 할머니가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주었거든.
할머니의 가냘픈 손만은 언제든지 기억할 수 있지.
그리고 내가 기숙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투르빌 역 플랫폼에서 파리행 기차에 오를 때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말했었지.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거야. 세상은 무섭지 않단다. 절대로……. 넌 너무 여리니까. 내가 널 위해서 밤마다 여호와 주님께 기도를 할 거니까. 그러면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돌봐주실 거야.’
하지만 내가 전쟁이 끝난 후 투르빌에 갔을 때 할머니는 공동묘지에 계셨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심한 폭격에 충격을 받고 돌아가셨던 거야.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안 때로부터 나는 다시 완전히 무너져 내렸지.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는데.
전쟁은 모든 걸 산산조각으로 만들어 버린 거지.
공기 중의 먼지처럼 바람에 날려서 부유했던 거야. 모든 게 희미했으니까 나는 늘 내가 지금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었지. 하지만 모든 곳이 잠시 동안 머무르기만 하면 충분했지. 어차피 그곳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내가 전화라도 걸어볼만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 무엇이라도 진지하게 나를 붙잡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는 가끔 누가 내게 말을 건네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기도 했었지. 그러고 나서 나는 미련 없이 또 다른 도피처로 떠났던 거야. 항상 수배자가 되어 도망치는 기분이었어. 나는 아프리카 끝까지, 죽음의 해안인 세인트헬레나 만까지 내려갔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케이프타운까지 갔다가 모로코 탕헤르로 돌아오는 데 십 년이 넘게 걸렸지만. 그러나 그곳에서 죽지는 못했어. 하지만 어쩐 일인지 아시아 쪽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지. 무척 망설이다가 끝내 가질 않았던 거야.
케이프타운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배에 승선했다가 출발 직전 결국 내리고 말았지.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아주 가깝거든. 그때는 베트남에서 미국과 베트민 간 제2차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어. 그래서 두려웠던 거야. 전쟁이라면 몸서리를 쳤으니까…….”
그는 그 시절 암흑의 대륙인 아프리카 여기저기를 여행하거나 혹은 방랑하였다. 호메로스는 ‘인간에게 정처 없이 떠도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고 했지만. 아프리카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반식민지의 물결이 휩쓸면서 국가 독립에 눈을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종교 대립, 부족 전쟁, 민병대, 파벌, 반군, 조직 범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불길하고 고통스러운 인생 노정.
아름다운 풍경을 탐욕스럽게 바라보고, 처음 보는 신비한 동식물을 관찰하고,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가는 여행이 아니었다. 사막의 굴곡진 모래 언덕들은 깊은 감동을 주니까 사막의 아름다움을 음미하기 위해서 가는 여행도 아니었다.
여행은 홀로 가야 한다. 여행의 진수는 자유에 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고…… 그러니까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가고 싶을 때 가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 길 저 길로 갈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수 있다. 하지만 여행이 즐거우려면 돌아오게 될 훌륭한 보금자리가 있어야 한다.
나 자신을 겸허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 아니었다. 피가 물을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감각인 목마름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발견하기 위한 내면으로의 여행이었다.
인생 행로는 예기치 못한 일들, 굽잇길, 굴곡들이 가득해서 일직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전쟁의 트라우마를 탈출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삶이란 하찮은 것, 삶은 죽음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삶은 죽음의 출발일 뿐이라는 진실을 깨닫기 위해서, 삶에의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기 위해서, 사람은 다만 혼자서 죽을 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나 자신과 험한 세상 사이의 경계로서, 환상과 현실의 경계로서,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가상의 벽인 ‘제4의 벽’을 넘어서 내가 생존 능력이 있고 부활할 수 있는지, 그래서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회복할 수 있는지, 자기 살해의 간절한 욕망을 지워버릴 수 있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출발하여 나일강을 거슬러 올라가 누비아 사막,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 케냐의 킬리만자로산,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 마다가스카르 섬, 모잠비크를 거쳐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내려갔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여 나미비아, 보츠와나의 칼라하리 사막, 앙골라, 나이지리아, 말리, 모리타니, 모로코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프랑스의 옛 식민지였던 모로코, 세네갈, 말리, 튀니지, 코트디부아르, 부리키나파소 등에서 오랜 세월 동안, 거의 20년 동안 상선의 선원, 항구의 부두 노동자, 올리브 농장의 계절 노동자, 육체 노동자, 정신 노동자, 밀매업자의 운반책, 여행 안내자, 방랑자 또는 여행자, 노숙인, (아주 먼 옛날에는 조상들이 식인종이었고 그 후에는 노예 상인이었다가 지금은 쇠락할 대로 쇠락한) 원시 부족 마을에서 한동안 추장의 포로가 되어서 주술사 노릇을 했고, 프랑스 영사관의 임시직,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면서 살았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인 모로코의 카사블랑카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오래 일했다.
“그렇지…… 고독한 방랑자처럼…… 인생의 숙명인 것처럼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지. 불안 강박 공포 증오를 떨쳐내기 위해서 말이야. 하지만 결코 그 어느 곳에도 정신적으로 안전하게 도착하지 못했지. 다른 삶을 꿈꾸었지만 불가능했지.
나는 이렇게 늙어가고 있으면서도 아직 진정한 삶을 살아보지 못했으니까. 모든 장소를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어설픈 나그네라는 생각이 들지. 어쨌거나 마지막이 마르세유였어. 그래도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정착했던 것 같아. 거의 십 년 동안이나.
그 뚜렷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 남쪽에 있는 항구이기 때문일까. 이 방이 편안했기 때문일까. 하여간에 이 방에서는 오랜 불면증에서 벗어나 잠을 잘 수 있었지. 전쟁이 끝난 후 처음으로 맛보는 틀에 박힌 삶 때문일지도 모르지. 틀림없이 나이가 들었지. 늙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 파리를 몰래 도망치듯 떠나면서부터 계속해서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갔던 거야. 파리를 떠날 때 멀리 더 멀리 남쪽 해안 쪽으로 가고 싶었거든. 남쪽이란 말은 언제나 나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 거야.”

그를 알고 나서 일 년쯤이나 이 년쯤, 아니면 삼 년쯤 지났을까. 비가 추적추적 끈질기게 내리는 어느 봄날 초저녁에 이브라함이 그의 방에 갔을 때 자크가 술에 반쯤 취한 채로 무언가 중얼거리다가 불쑥 말하였다.
그의 얼굴에 어떤 희미한 미소가, 모호하고 떠날 것 같지 않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그 전쟁이 남긴 깊은 고통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는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전쟁에 휘말렸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전쟁이 남긴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까?
그때는 그가 인생에서 가장 예민하고 상처 받기 쉬운 시기였다. 그는 그 당시 바칼로레아에 합격하고 대학에 입학해서 문학을 전공할 때였다. 그는 문학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에서 파트 타임으로 교정보는 일을 하면서 생라자르 역 근처 작은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열리는 문학 모임에 자주 갔었다.
생라자르 역에서 출발한 기차들은 노르망디 쪽 이거나 파리 근교 교외 지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역 부근의 이 지역은 파리에서 하층민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고 그 모임에는 그 지역 무명의 가난한 시인과 비평가들, 연극이나 독립영화 제작에 관계하는 제작자나 감독들이 모여서 밤늦게까지 값싼 채소볶음 요리를 안주로 해서 독한 럼주를 마시며 자작시를 낭독하고 토론도 하였다.
자크 역시 프랑스 현대문학에 심취해서 매일 같이 (공식적으로 발표하지도 못할) 시들을 끄적이고 있었고, 가끔 차례가 오면 그 시들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임은 곧 사라졌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하고 나서 1940년 6월 휴전이 되었을 무렵 그 레스토랑은 독일군의 선전부대인 프로파간다 슈타펠에 징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 모였던 사람은 군에 입대하거나 일부는 남쪽으로 떠났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 그 시절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던 그런대로 무난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자크는 그 모임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우아한 모습의 반쯤 잿빛이 도는 금발이었고 러시아식 억양으로 프랑스어를 말했다. 그 해 가을, 플라타너스 나무의 낙엽이 떨어져 바람에 날리는, 멀리 센 강에서 피어오른 밤안개와 축축한 냉기가 퍼져있는 그 동네의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길을 그녀의 그 길고 섬세한 손가락들이 꼼지락거리는 손을 잡고 걸으며 끊임없이 속삭였고 마침내는 그녀의 아파트 문 앞에서 헤어져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하고 싶다는 미친 듯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가 서부전선으로 떠나는 군용열차에, 지옥행 열차에 올라탔을 때 (그때는 아직 폭풍전야의 고요함 같은 시기, 앉아서 하는 전쟁 혹은 가짜 전쟁의 시기였다) 출발을 알리는 파리 리용 역 역무원의 요란한 호루라기 소리가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해 5월, 아르덴 숲 남쪽의 뫼즈 강 전선에서 있었던 마지막 전투. 독일군 장거리 곡사포의 포탄이 작렬할 때의 그 고막을 찢는 듯한 폭발음, 급강하 폭격기인 융커스 Ju 87이 퍼붓는 230킬로그램짜리 대형 폭탄이 폭발하는 소리, 박격포 소리, 히틀러의 전기톱이라고 불리던 MG42 기관총의 독특한 발사음, 막대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독일군 팬저 기갑부대의 탱크가 내는 소름끼치는 굉음, 비명, 신음, 고함, 욕설, 분노와 공포의 절규, 기도 소리, 아우성 등이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귀에 생생하였던 것이다.
마을은 텅 비어있다. 집들은 폭격으로 거의 부서졌고 마을 사람들은 철수했다. 어른들은 등에 봇짐을 지고 손수레와 유모차에는 갓난애들과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싣고 정처 없이 남쪽으로 떠났다. 보병 연대가 주둔하면서부터 친숙해졌던 숲과 언덕, 작은 강들이 잠시 정적에 휩싸여 평화롭다. 태양이 비스듬히 지고 있다. 어스름한 저녁이 다가온다.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봄꽃들이 만발해 있고 자작나무들이 우거져있는 들판을 지나간다. 그 바람이 모든 희망과 절망, 부질없는 상상마저 죽은 나뭇잎인 것처럼 모두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간헐적으로 조명탄이 터지며 빛이 펼쳐진다. 철모들이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다.
그들은 고립되어 있다. 그곳에 있는 모든 군인들은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지금 당장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독일 장거리 곡사포는 저 멀리 그 모습을 숨긴 채 집중포화를 퍼붓고, 급강하 폭격기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심심풀이로 아군 진지에 폭탄을 투하한다.
탱크의 굉음이 점점 가까이에서 들려오고 있다.
그는 단념했다. 그를 오랫동안 짓눌렀던 무서운 공포심과 불안감은 그 순간 사라졌다. 그는 울지 않는다. 곧, 날이 밝자마자 독일 보병 부대가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겠지. 그러면, 부대는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우리는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풍비박산이 되겠지. 공동묘지가 기다리고 있는 거지. 거기가 나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거거든.
자크 장프랑수아. 21세. 베트남 빈롱 출생. 29보병연대 소속. 1940년 5월 31일 사망.
(그가 태어나서 성년으로 성장한 시기는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이 끝났지만 볼세비키의 공산주의, 코민테른, 파시즘, 나치즘, 군국주의가 대두하여 극도로 혼란한 카오스적 시대부터 또다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약 20년으로 전쟁 사이의 시기라는 의미에서 ‘전간기’로 불리는 시기였다.)
그의 눈은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해 붉게 충혈되어 있고, 안면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고 손등에는 생채기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다. 그는 기진맥진하고 허기가 져 몽롱하다. 그제 저녁부터 꼬박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수통에 물도 거의 바닥이 났다. 모든 게 안개처럼 흐릿할 뿐이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프랑스에서 어차피 잉여 인간으로 살아야 했으니. 프랑스는 날 받아 준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이방인 아니면 아시아에서 온 뜨내기 여행자, 난민에 불과했다. 인종적 차별을 뚫고 나아갈 수 없었다. 그랬으니 미래에 대한 확고한 계획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시나 평론, 서평 같은 글을 쓰겠다는 막연한 희망 이외에는.’
그리고, 빈롱에서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가, 등이 굽은 할머니가, 티베트 분지에서부터 꿈길처럼 아득하게 흘러 흘러서 마침내 강의 하구 삼각주에 다다른 메콩 강의 유장한 강물이, 투르빌과 생선 냄새에 찌든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색이 누렇게 바래버린 원고들 뭉치가 연거푸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자크는 그때, 격렬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기 바로 직전 그 참을 수 없을 만큼 긴장된 순간에 생각했다.
‘그러나 이 순간 추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런 거야. 나는 이미 죽은 거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죽일 수 없는 거다. 나는 인간을 향해 총을 쏘지 않을 거고 수류탄도 던지지 않을 거야. 그건 정말 불가능한 일이야. 그건 엄중하고 치명적인 대죄 mortal sin이니까. 지금은 이 지상에서 최후의 평화스런 순간이지. 마지막 순간이 될 거야. 그런 거지 뭐.’

그해 5월의 뫼즈 강 전투 때 부대는 괴멸되었는데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가? (사실 그 전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자신은 살아서 인간의 삶을 누릴 특권이 없는데. 다른 동료 병사들이 자신을 대신해서 죽었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독일 드레스덴 수용소에서 5년간의 혹독한 포로생활을 추억처럼 회상할 수 있을까? 드레스덴 교외에 있는 시멘트 벽돌로 지은 돼지우리에서 아프리카인 포로들과 지낸 세월을. 1945년 2월 13일 드레스덴의 대학살을. 그날 수용소를 엄습했던 공습경보 사이렌을. 날아다니는 화려한 불꽃과 화재 폭풍을. 연옥. 지옥.
그때 어떤 중년 여자가 미친 나머지 계속해서 춤을 췄다. 그리고 울부짖었다. “우리 집 잘도 탄다! 잘도 탄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갈 막바지 무렵에는 포로수용소에 있던 유색인종 포로들은 대부분 굶주림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 학대, 학살, 폭격으로 죽고 없었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으로 전쟁이 끝났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수년 동안의 해묵은 피로와 분노와 공포 때문에 몹시 지쳐있다. 영양실조로 아래 이가 세 개인가 네 개가 빠져있었고 넝마를 두른 몸은 막대기처럼 마른 채로 자주 심하게 구역질을 하고 기침을 콜록 거렸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살을 섞을 만큼 진정한 여자 친구도 없었다. 집도 없었고 고향도 없었다. 그러므로 집에 대한 향수는 애당초부터 없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어디로 간단 말인가. 다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할머니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려면 파리에서 투루빌로 가야한다. 우선 파리로 가야했다.
석방된 포로들을 태운 파리행 화물 열차는 천천히 출발했다. 기차는 끊임없이 덜커덕거리며 느릿느릿 달렸고 간혹 간이역에 멈춰서서 진이 빠질 정도로 오랫동안 정차했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면서 야간 폭격으로 파괴되어 폐허가 된 창고들과 작업장을 지나고 한적한 농촌의 비옥한 밭과 외딴 농장과 짙푸른 숲과 호수와 계곡들을 지나쳤다. 그는 장엄하게 펼쳐지는 독일 동부지방의 풍경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1940년 6월은 악몽의 계절, 잔인한 계절이었지만 1945년 6월은 승리의 계절, 빛나는 계절이었다. 전쟁에 지친 남루한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는 리옹 역에서 기차에서 내릴 때 오랫동안 병석에서 누워 있다가 완쾌되어 퇴원하는 환자처럼 가뿐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되돌아본다. 내가 왜 살아남아있는가? 나는 살육으로 얼룩진 그날의 전투에서 내가 살아남은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신의 가호 혹은 운명의 장난? 나는 그 위대한 유일신에게 전쟁 전에는 너무 두려워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었는데, 전선에서는 처음에는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였는데, 그리고 마침내 버렸는데……. 그 참혹한 전쟁의 기억들이 저절로 지워질 수 있을까? 나는 전쟁이 남긴 상처를 마침내 치유하고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적인 삶 속으로 그럭저럭 복귀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지금 안식처 또는 피난처를? 지금 나의 인생행로를 어떻게 예단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모든 장면들이 더욱 또렷해졌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살과 뼈가 타는 냄새, 죽음의 악취가 항상 코끝에 맴돌았다. 한 달에도 몇 번씩 그 끔찍한 전투장면들이 꿈속에 나타났다.
부대의 괴멸과 항복.
그 부대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항복 아니면, 그 직전에 탈출만이 차선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때는 사병들에게 가혹했던 가학적인 특무상사가 앞장을 섰고 자신의 안위에 골몰하는 거들먹거리는 몇몇 장교들이 뒤따랐다. 그들은 탈출을 아주 가볍게 여긴 듯하다. 그래서 겨우 살아남은 일부는 뫼즈 강을 따라 남쪽으로 탈출하였지만 나머지는 항복했었다. 종전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때 탈출했던 장교와 병사들 전원이 랑그르 근처 뫼즈 강 지류에서 독일군 수색부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그는 1940년 6월 휴전협정 조인 직전에 포로로 잡혀있기 때문에 부대원 100여명과 함께 독일로 강제 이송되었다.
다시 돌이켜서 기억한다면…… 그래도 포로수용소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 전선에서처럼 당장 죽을 염려는 없었으니까 안정된 일상이었다고 위안을 삼을 수 있었을까?
하지만 5년 동안 포로수용소 생활의 쓰라린 경험이 그를 평생 동안 짓눌렀다. 그곳 역시 지독한 인종차별, 아시아의 원숭이, 하루 열다섯 시간씩 진행되는 가혹한 강제노동, 배고픔, 수면 부족, 추위, 폭력과 학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만행.
그는 종전 후 프랑스로 돌아왔지만 불안 강박 피해의식 공포 (대상이나 원인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증오라는 유색인종이 겪은 전쟁의 후유증이 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니 여자를 사귈 수도 없었고 결혼도 할 수 없었으며 변변한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그렇다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때는 프랑스와 베트남독립동맹 (Viet Minh)이 한창 항불인민해방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반은 베트남 사람이고 나머지 반은 정확히 프랑스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이면서 프랑스인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어린 시절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이주하면서부터 (뿌리가 뽑히고 나서 토착 언어가 망각 된 채로) 프랑스인이 되었으므로 프랑스인의 정체성과 자기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혼종적인 인간으로 주조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르세유 구시가지의 북쪽 끄트머리와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아프리카 거리에는 사하라 사막 북쪽 마그레브 지역의 이민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그 골목길에 그 여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면 좁은 문에 ‘since 1939’라고 새겨진 퇴색한 나무 간판이 걸려있다.
그는 대개 오전 10시쯤이면 3층의 건물의 여관에 도착하여 늙은 여자 주인으로부터 마스터키를 넘겨받은 다음 좁은 층계와 복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해묵은 때를 화학약품으로 문질러 닦기도 하고, 매 층마다 통로 끝에 있는 화장실과 샤워실을 청소하였다. 그리고 비어 있는 이 방 저 방들을 정리하는데 투숙객들은 대부분 너무 가난한 사람들이어서 휴대품이 간단했고, 방 역시 비좁았다.
그의 방은 3층 남쪽 코너에 있는 그 작은 여관에서는 제일 큰 방이다. 자기 방. 영혼이 안식을 취하는 방. 어머니의 자궁, 요나가 머물렀던 고래의 배 속, 튀빙겐 탑 속 지하에 있는 휠덜린의 방 같은 어둠침침한 작은 방. 그 방은 수도승의 방과 같다.
그가 알코올 의존증임에도 불구하고 얼룩이나 티클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스스로 정돈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깨끗하였다.
한쪽 구석에는 항상 깔끔하게 정리된 일인용 침대, 반대 구석에는 간이 주방이 있고, 원고 뭉치와 무엇인지 깨알같이 쓴 노트, 초고와 최종 원고, 메모, 편지 등이 가득 들어있는 두 개의 나무 상자가 탁자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그리고 벽면에 붙은 선반에는 작은 위스키 술병들과 여러 종류의 약병과 함께 주로 문학과 철학에 관한 손때 묻은 수십 권의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래서 그 작은 공간은 너무 비좁았지만 한없이 아늑하였다.
물론 그 책들은 몇 권의 중세 이탈리아어로 된 필사본과 그리스어 책을 빼면 희귀한 판본들이 아니다. 흔하디흔한 보급판 문고본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그 책들을 지금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언젠가 말했었다. “그 전쟁 이후 더는 한 줄도 책을 읽지 않았어. 단 한 줄도. 난 어차피 외톨이여서 닥치는 대로 읽는 책벌레였는데 말이지. 그만 독서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지.
하지만 삶의 소금이고 삶의 유일한 빛이었던 것, 손때 묻은 것을 그냥 버리지는 못하였지. 나에게는 어떤 종류이든 책은 성서인 거야. 그래서 이 방은 지성소인 거지. 책을 버린다는 것은, 또는 헌책방에 팔아버리는 것은 어쩐지 옳지 않은 일로 여겨졌던 거야.”
하지만 누렇게 바란 흰색 벽면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도 붙어있지도 않았다. 거기에 그가 좋아하는 반 고흐의 복제한 그림 몇 점이나 가족사진, 투르빌의 자연 풍경 사진, 할머니의 초상화 등이 걸려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날은 하루 종일 지중해 쪽 먼 바다에서부터 계절풍이 불어왔다. 작은 창문을 통해서 석양의 여린 빛이 여과되어 비스듬히 들어온다. 검은 구름이 창문에 그늘을 드리우며 구 항구의 바다 쪽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이내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가는 빗줄기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도시의 소음을 잠재우며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이브라함이 말했다.
“그가 자주 날 붙잡고 잔소리를 하였지. 꼭, 우리 아버지처럼……. ‘나처럼 알코올 중독이 되고 싶으면 얼마든지 마셔도 괜찮을 거야’라고 말했지. 절대 술을 입에 대지 말라고……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마실 수밖에 없다고 하였어.
도대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하였어. 그는 한 때 모든 것을 망각하기 위해, 필름이 완전히 끊기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통제 불능의 상태, 완전히 미쳐버리거나 알코올성 발작을 일으켜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키 위해 마구 들이켰지만, 그때마다 도대체 정신이 말짱하였다고 하였어.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술을 줄이기 시작했지. 옛날에 비하면 많이 줄이고 절제를 하였던 거야. 그래도 완전히 끊지는 못하였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어. 술은 일종의 해독제였고 신경 안정제였으니깐.
나 역시 생활이 안정돼 가면서 그의 충고에 따라 술을 점차 줄일 수 있었지. 그렇지, 술은 강박관념이었으니까 완전히 끊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줄이기는 했지. 그놈의 술 때문에 알제 시절에도 사촌 형과는 무척이나 말다툼을 했거든. 형은 지독한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거야.
하여간에…… 지금까지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어. 내가 이 세상의 두꺼운 벽을 뚫고 나오는데 동맹군이었지. 나를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깨닫게 해주었고, 현재의 순간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지. 그 현자는 나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의 힘으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준 거야.”
자크는 그때 이브라함이 어려운 책들을 읽을 수 있게 정성껏 도와주었다. 그는 어려운 단어와 문장을 쉽게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이브라함은 그 무렵 말라르메, 베를렌, 아폴리네르, 플로베르, 프루스트, 카뮈, 모디아노를 읽었다. 특히 카뮈의 책을 많이 읽었다. 그는 몇 년 동안 무서운 집중력을 가지고 소설을, 시를, 다른 책들을 무더기로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반에 반쯤 밖에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그 당시 (풍성한 긴 머리채에 엉덩이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고 첨단 유행과 옷차림에 민감한, 여자애들만 보면 환장해서 막무가내로 추파를 보내는, 속박을 떨치고 즐겨라, 자유로운 성생활, 술과 담배, 마약에 찌든) 프랑스의 정형화된 얼치기 대학생들보다도 더 많이 읽었고, 그들보다 인생 경험이 훨씬 풍부하였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언제든지 이브라함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무슨 이야기든지 기꺼이 들어준다.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자크와 함께 에스프레소를 또는 가끔 맥주를 마시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브라함은 자크에게 언제든지 기댈 수 있었다. 그가 스승 또는 아버지 역할을 자임하였으니까. 아버지에 대한 어떤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 저 세상으로 간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버지.)
하지만 주로 밤 시간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브라함은 먹고 살기 위해서 낮이면 또 다른 무슨 일이든지 일을 해야 했으니까.
가끔 그들은 신의 존재와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다. 그때는 이브라함은 듣는 쪽이었다. 그들은 어떤 날은 토론에 몰입한 나머지 밤을 꼬박 새면서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하여 말했고, 육체의 죽음은 무의미하다고 말했으며, 또한 영혼의 불멸과는 차원이 다른 불교의 윤회와 환생, 수레바퀴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전쟁 전에는,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서 할머니를 따라 먼 거리를 걸어서 천주교 성당을 다녔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열렬한 예수 그리스도 숭배자이었지만, 투르빌에서도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열심히 다녔지만 (그의 할머니들은 오직 하나님밖에 몰랐으니까 참으로 진정한 기독교도이었다), 그 지독한 기숙학교 시절에도 한 번도 신을 의심해 본적이 없었지만, 전쟁 중에 그 신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였다.
“그 참혹한 전쟁을 겪으면서 말이야…… 그 무익한 전쟁은 피와 고함소리 속에서 모든 것을 망가뜨렸지. 인간의 삶, 사랑, 고뇌, 영혼, 죄악까지도 완전히 파괴해 버렸고…… 마침내 신의 존재까지도…….”
이번에는 스카치위스키 몇 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이키고 나서 약간 취했고 목구멍에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아 높고 낮은 목소리가 복잡하게 얽혀있지 않은 탁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는 치밀어 올라오는 가래를 꿀꺽 삼켰다.
그가 계속해서 말하였다. “미래의 불확실성과 절망의 늪에 빠진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어가 있겠어. 자신이 믿는 신께 애타게 구원을 찾는 거겠지. 나는 히믈러가 ‘나는 하위 종족인 모든 유대인들을 지구상에서 멸절 시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라고 선언했을 때, 그리고 유대인들이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곧 죽을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의 위대한 신 야훼를 찾았는지, 지금도 궁금하지.
그녀는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러시아계 유대인이었어.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 때문에 그 비극적 고통을 당한거지. 바로 그 신 때문에. 신은 유대인이 불경하다는 이유 때문인지 유대인들에게 재앙을 내려 큰 고통을 준 것 같지만…… 유대인들이 어떻게든지 그렇게 행동하도록 조종한 건 바로 그 신이었어. 자신의 힘과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야.
그 신은 위선자이고 허영심이 강하고 자만심이 가득한 거야.
지금 어쩐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는 않고만. 가슴이 먹먹해질 거니까. 그냥 M이라고 하겠어. M은 전쟁 초기 돈을 주고 신분 세탁을 해서 그 당시 유대인 문제 전담 경찰들의 추적을 따돌렸지만…… 1942년 봄에 생라자르 역 대합실에서 그녀를 미행했던 자들에게 잡히고 말았지. 사실은 그 모임의 누가 밀고를 한 거였어. 독일군의 파리 점령 후 친독의용대의 대원이 된 자칭 초현실주의 시인이 말이야.
그 인간은 그 시절 그녀를 보살펴준다는 핑계로 그녀의 아파트를 번질나게 들락거렸고 몇 번씩이나 짓밟고 그것도 모자라서 회유와 협박을 해서 가지고 있던 얼마간의 돈과 금붙이를 갈취하고 나서 그들의 끄나풀에게 불어버렸던 거야. 합스부르크 제국의 귀족 출신 행세를 하였던 허풍쟁이였으니까 무슨 공명심 때문이었을 거야.
그 인간은 종전 후 체포되기 직전 자살하였지. 하지만 그녀는 유대인 임시 수용소를 걸쳐 결국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어.”
그녀와의 관계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그는 난생 처음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할 용기는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백인 여성이었고 자신은 아시아계 유색 인종이라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었다. 1943년 1월 24일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 날 아침. 파리 로맹빌. 프랑스 각지에서 체포되어 원래 가축 수송열차였던 ‘31000번’ 기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여성 230명 중에 그녀가 끼어있었고 29개 월 간의 수용소 생활이 끝나고 살아 돌아온 49명 중에 그녀는 끼어있지 않았다.
폴란드 오시비엥침.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 Kz Auschwitz. 세계의 항문 Auus Mundi. 가스실과 소각로를 갖춘 대규모 학살 공장.
최종 해결책. 특별 처리. 치클론 B 가스. 일산화탄소.
Schutz Staffel(SS)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아우슈비츠는 폭력적이고 비열했다. 그러므로 삶의 의욕은 사라졌고 삶의 목적을 잃은 채 다가오는 죽음을 향해 체념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가스실에서 시체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때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들이 다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녀는 유대인의 최후 세대가 되는 줄로 알았었지.
내가 파리로 돌아온 후 제일 먼저 그녀를 수소문 하던 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거야. 그 후 나는 파리를 떠났고 다시는 파리에 돌아가지 않았지.”
“……”
“그런데, 신의 구원이란 게 인간의 죽음과 관계가 있어. 인간이 언제, 어떻게 죽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신의 몫이거든.
그때 우리 쪽도 적들도 같은 신을 믿고 있었으니까 같은 신을 향해 서로 울부짖었어. ‘주님이시여, 여호와여, 저의 영혼을 구하여주소서.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여주소서. 불의 세계를 퍼부어 주세요. 어서 빨리 불을 내리소서. 저들을 죽게 하소서.
몰살시켜 주세요. 저들이 죽어야만 제가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이시여, 예수그리스도여 구해주세요. 오, 저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소서.’
그러나, 하나님인들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그때 신은 기가 막혀서 죽을 수밖에 없었어. 그랬으니 하나님의 목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았어. 그들도 못 들었을 거야. 나는 그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을 하게 되었지. 미망과 환상에서 깨어난 거였어. 그 후 더 이상 어떠한 형식이든 기도를 하지 않았지.
그랬더니, 오히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어. 이 무의미한 전쟁에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삶에 대한 집착이 신에 집착하게 된 동기인 것을 마침내 깨달은 거였어.”
“……”
“지금은 참으로 기적의 시대이거든. 반세기 동안이나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단 말이지,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알겠어? 지난 전쟁에서 신이 죽었으니까 이제야 평화가 찾아온 거야.
그러니까 1차 세계대전에서 신은 상당한 내상을 입었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서 죽지는 않았는데 2차 세계대전에서 확실하게 죽은 거지. 2차 전쟁은 신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확인 사살까지 하였던 거야.
하지만 알라신은 지난 전쟁에 참전하지 아니하였으니까 아직 살아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알라신께 구원을 요청할 필요가 있을까? 그 신은 너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이슬람의 천국은 널 기다리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천국이 없었거나 아니면 이미 망가졌겠지. 네 아버지가 그 고난을 겪고 죽으면서 신을 버리지 않았는지 궁금하구나?”
그러고 보니, 새삼스럽게 살펴보았지만 방안에는 그가 성서라고 지칭한 소중한 책들 이외에는 작은 십자가나 성모상 같은 성물, 성경책, 개인적인 토템 등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성당이건 교회이건 간에 그런 곳에 다니는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새벽의 여명이 검은 밤의 여운과 함께 작은 창을 통해 스며들었다. 밤이 흐트러지고 있다. 새벽 공기가 냉랭하고, 눅진하다. 검고 하얀 포석이 깔린 뒷골목의 눈에 익은 거리 풍경이 밤의 어둠과 정적, 추상적 분위기에서 풀려나면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 밤은 명철한 예지가 빛나고 추상적 개념과 의미가 충만한 밤이었다.
이브라함이 말했다.
“나는 한동안 자크의 방에 들어갈 수가 없었던 거야. 아침에 깨어나면서부터 오늘은 꼭 들려야한다고 다짐을 했으면서도. 그게 몇 개월이나 되었지. 차츰차츰 내켜하지 않게 된 거지. 그의 준엄한 말들이 두려웠던 거야. 정신적으로 짐이 되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거지. 나에게는 그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진짜 이유가 있었던 거야.
그 무렵 다시 술집에 매일처럼 드나들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었거든. 뒷골목 아가씨들을 만나고. 밤새 사랑을 나누고.
왜 그렇게 술을 마셨겠어? 당신도 알겠지만 술에 취하면 굳은 혀가 풀리면서 꾹꾹 참았던 말을 할 수 있게 되거든.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나 자신에게만 말했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거지. 그렇지만 그때마다 무슨 말들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
자크가 알코올 중독의 후유증으로 마르세유 시립병원의 행려병자 병동에 입원했을 때서야 문병을 갔었는데…… 그때는 온몸이 허깨비처럼 빼빼 마른채 혼자서 외롭게 죽어가고 있었지.
그는 날 그저 무덤덤하게 쳐다보고는 다시 눈을 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어. 죽음과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며칠 동안 내내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던 거야. 그러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하는 연명치료는 단호하게 거부했어. 몰래 숨겨두었던 다량의 진통제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고.”
자크가 언젠가 말했었다. “늙음과 죽음. 죽음은 불가피하지. 난 죽음이 두렵지않지만…… 그게 예고도 없이 멀리서 온다니까. 죽는 순간을 스스로 결정하고 싶지.”
이브라함은 임종자리를 지키면서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그가 말을 많이 해야 했지만 그때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그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울었다.
자크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었다.
“내가 지금 죽어가면서 침대에 꼼짝 못하고 누워있으니까 오랫동안 잊혀졌던 일들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거야.
어떤 영적 계시가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주었으면 하지.”

그날, 1995년 늦은 봄이거나 초여름이었다.
항구의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하늘은 너무 파랗다. 저 멀리 위풍당당한 구름들이 흰 돛을 펼쳐서 꿈결처럼 항해를 하고 있었다. 파도가 잔잔히 일며 뜨거운 햇볕 아래 바다가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아프리카 쪽에서 시로코 바람이 불어 왔다.
바다 새들은 방파제 위를 미끄러지듯 이리저리 빙빙 떠돌다가 높이 날아올라 남쪽으로 사라졌다. 바다 새들의 푸른 눈빛은 먼 바다와 긴 항해를 향해, 자유로운 비상을 동경하고 있었다.
자크는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망각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희미한 기억을 퍼 올렸다. 가장 먼저 열대의 몬순 계절이면 하늘에서 무섭게 쏟아지는 소나기와 강둑을 넘치듯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생각났다. 그는 가끔 헛소리를 하였다. 그때는 베트남 할머니 집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를 키엠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메아리처럼 여운을 남긴다.
시간의 흐름은 먼 과거의 어느 시기에 고정되었다. 건기의 무덥고 숨 막히는 듯한 열기가 수그러든 석양 무렵이었던가, 어쩌면 해가 막 떠오르는 아침 무렵이었는지도 모른다. 태양이 그때 거대한 붉은 점처럼 동쪽에서 솟아올랐는지, 서쪽으로 사
작성일:2023-12-16 12:28:34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