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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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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사랑의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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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3-12-09 12:38:33
조회수
61
사랑의 미로 迷路
사랑은 운명처럼 왔다가 화살처럼 간다.
그러면서 가슴에 인두자국만을 남긴다……
— 나태주

초겨울이다. 간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아침 출근길이지만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지난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아직도 머리가 지근거렸고 속이 메스껍다. 남부터미널역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을 때 지하철은 한 많은 여인의 독백과도 같은 긴 한숨을 내뿜으면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아뿔싸, 한 발 늦었네.
나는 그때 지하철의 맨 마지막 열 번째 칸의 4번째 출입문에 박혀있는 15번째 차창에서 그녀의 얼굴과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그래 틀림없어. 서글서글한 눈매하며 살짝 낮은 코, 피부는 여전히 뽀얗고. 그러나 약간 살이 쪄 얼굴이 전체적으로 조금 둥글게 보였다. 풍만한 몸을 감싸고 있는 회색 드레스는 소박하면서도 우아했고 염색을 했을 검은 머리는 단정하게 파마를 했다. 나는 그 짧은 순간 넋이 나간 채 그녀의 용모와 자태를 훑었다. 여전히 우아하고 묘하게 매력적이다. 어디선가 라일락의 진한 향기가 달콤하게 풍겨와 코끝에 와 닿았다. 그때 온몸에 짧은 전율이, 감상적인 사랑 속에 들어있는 잔인한 증오가, 육체적 욕망 속에 숨어있는 격렬한 복수심이 스쳐지나갔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렇게 아주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으니 그녀의 삶은 짙은 회색 안개 속에 가려져있었다.
그녀는 지금 너무나 행복한 거야. 남편은 내 고등학교 동창처럼 알짜 중소기업의 오너 사장인지도 몰라. 아니면 전문경영인으로 대기업의 대표이사이거나, 의사나 대학 교수일지도. 자식들은 1남 1녀일까, 2남일까, 2녀일까. 하여간에 지금쯤 좋은 대학 나와서 해외 유학 중일 거야. 나는 멋대로 상상하면서 그녀가 지금 행복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가 미워졌다.
나는 그 순간 얼굴은 벌써부터 잔주름이 넓게 퍼져서 쭈글쭈글하고 앞머리는 거의 빠져 번들거리는 내 몰골을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짙은 돋보기안경 너머의 지친 두 눈은 어떻고. 그리고 교대역 근처 후미진 뒷골목에 있는 초라한 내 사무실이 떠올랐다. 몇 년 전에 늙은 사무장이 그만둔 후 지금까지 전문대를 나온 어린 아가씨 혼자서 잔심부름을 하고 있다. 그나마 월세가 서너 달씩이나 밀려있지만 건물주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20년 넘게 있었으니까 봐주는 셈이다.
내 인생에서 새들이 노래하고 아지랑이가 어른거리던 시절이 한 순간이라도 있었던가. 나에게 청춘이라고 할 만한 때가 있었던가. 언제쯤 어둠의 순간이 사라질 것인가. 그게 가능한 일일까? 거의 불가능할 거야. 그렇고말고.

우리는 첫눈에 반해서 젊음의 치기인 맹목적 열정으로 사랑에 빠져든 게 아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처음 만나서 불과 몇 달쯤 지나고 나서부터 내가 고시를 합격하면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약속했으니까. 결혼을 전제로 계속 사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나이는 어느새 30을 넘어섰고 사법시험은 연례 행사처럼 계속 떨어지고 취직도 할 수 없어서 (그 당시 이미 적정 연령을 넘어섰으니 공기업이나 대기업에는 응시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나 한심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는 절교를 냉정하게 선언했다. 그날 우리는 예전에도 몇 번 간 적이 있는 대학로 뒷골목에 있는 다방에서 만났다. 날씨 탓인지 한산했고 분위기는 죽은 듯 가라앉아 있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그녀의 이름을 밝힐 기분이 아니다.)
그녀는 들어올 때부터 입을 꼭 다물고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니 경멸에 가까운 표정이었고 철저히 무관심한 시선이었다. 그녀는 목덜미까지 늘어진 매끄러운 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양쪽 무릎 쓸개골에 두 손을 얹은 채 꼼지락 거렸다. 그녀는 뭔가 마음을 다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집안에서 너무 심하게 결혼을 강요하여 자신은 따를 수밖에 없다고,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였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나의 합격을 기다리는데도 지쳤다는 것이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미 합격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기다리며 자신의 청춘을 허송세월할 수는 없다는 거였다.
나는 또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몇 년 동안 떨리는 기분을 가까스로 달래며 고시잡지사에 전화를 걸면 잡지사의 아가씨는 지겨운 듯 건조한 목소리로 “이름이 없는데요.”했던 것이다. 불합격을 확인하였을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기도 하고, 이제는 이력이 날만큼 난 것이기도 하였지만 노상 느껴야 했던 참담한 기분과 자괴감하며, 자기 스스로에 대한 심한 모멸감,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드는 막심한 후회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순간마다 오래 전에 죽은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오로지 자식들 위해 온갖 희생을 다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던 어머니는 그때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신음하고 눈물을 흘리기만 하였다. 죽음이 눈앞에 와있었다. 오랫동안 별거 중인 아버지는 전보를 보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 위독. 오늘 밤을 넘기기 어려움.) 나는 무력하게 앉아 생명이 사그라져 가는 것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밤이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녀는 이제 얼굴 표정이 의젓하고 의기양양했고 아주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스쳤다. 나를 무시하기로 작정한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는 나에 대한 경멸감이 깔려있다.
새침한 얼굴에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며 몹시 비웃는 표정을 짓고 있다. 냉소주의자의 얼굴. 그녀의 시선이 갈수록 낯설고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심장이 망치질하고 격렬하게 고동을 친다. 그러나 감정의 동요가 비치지 않도록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검은 리놀륨 바닥을 내려다보았고 그때 온몸에 계속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난 지금 혼자예요. 혼자라구요. 어머니와 싸우는 것도 지쳤다구요.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요? 어머니에게 뭐라고 대꾸하죠? 말 좀 해보세요. 도대체 합격할 수 있는 거예요? 뒤 늦게 합격해서 뭘 할 건데요?
그래서 당신과 나의 인생이 무지개처럼 보장되는 거예요?”
내가 겨우 한마디 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나는 그때 무언가 버림받은 것 같은 분위기에서 비참한 처지로 내몰렸다. 진즉 불붙여 놓았던 담배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재떨이에서 타들어가다 재만 남았다. 뭐가 뭔지 모르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목구멍으로 무슨 말이 치밀어올랐다가 내려갔다. 참을 수 없는 갈증이 밀려왔다. 연거푸 물을 마시고 커피를 마셨다.
밤늦은 시각 우리는 다방을 나왔다. 벌거벗은 산 언덕을 향해 완만하게 경사진 골목이 멀리 어둠 속으로 뻗어 있었다.

그날 돌아서는 그녀의 눈초리는 아주 싸늘하였다. 나는 지금도 그 싸늘한 눈초리를 떠올리면 등에서 소름이 끼친다. 그 순간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한때는 친구들이 우리를 두고 그림처럼 매우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했었다. 분명히 우리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한 쌍이었다.
나는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했다. 변덕이 심한 여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말과 행동을 조심스럽게 조절했으니 나는 그때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누군가는 ‘사랑한다는 것은 둘이 서로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것이다’라고 했거늘. 내가 그녀에 대해 뭐든지 다 알고 있었던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무언가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인가. 기억은 질서정연하지 않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고 해도 어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세월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어서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나는 기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고말고. 하지만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거나 기억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제멋대로 조작한 완전히 자기기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심장을 깊게 찌르는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안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때 느꼈던 분노, 상실감, 나를 압도했던 그녀에 대한 배신감만은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는가.
무심한 거리는 모순으로 가득하였다.
그날 하루 종일 비가 조금씩 오락가락하였다.
내 눈에서도 굵은 눈물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비에 젖은 노란 은행잎이 흩날리는 슬픈 늦가을이었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인생에서 사랑과 결혼이 그렇게 중요하단 말인가? 우리는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끝까지 갈 그런 인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우리는 그때 진짜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이었을까? 그 사랑이 오래오래 끝까지 지속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단 말인가? 하지만 5년 동안 사귀면서 단 한번도 ‘그녀는 내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져본 적이 없었지 않은가.
그녀는 냉철한 계산에 따라 결혼 적령기와 고시를 합격한 장래가 촉망되는 남자와의 성공적인 결혼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다. 우리의 고루한 관습적 현실에서는 말이다.
문제는 내가 고시에 계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 때문이다. 사랑도 결혼도 질질 끌면 끌수록 더욱더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때, 바위처럼 단단해보였던 것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남아돌아 가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어서 혼자 무엇을 했으면 좋을지 모른 채 빈둥거린다. 청춘의 꿈은 사라졌고 삶은 권태와 염증으로 가득했다.
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면 너무 혼란스러워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이후로 어떻게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내 자존심과 체면이 처절할 정도로 손상되었음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끝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살과 뼈가 있는 실체가 아닌 환영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어수선하고 그래서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고 마음을 비워버릴 공간이 필요했다. 누구로부터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딘가에서? 낯선 곳에 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고 싶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힘겨워지고 고통스러웠다. 내 생활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자포자기. 방탕한 생활에 젖어서 매일 밤 다음날까지 마셨다. 폭음. 토하고, 마시고, 또 마시고.
지독한 숙취와 몸에서 풍기는 고약한 술 냄새. 어느 날 밤에는 술에 잔뜩 취했을 때 혼자서 사창가에 찾아간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없이 충고를 하는데 한 1년 정도 떠나있으라고. 상처가 아물려면 그 정도 시간은 필요할 거야. 시간이 약이라고 할 수 있겠지.
조용한 바닷가 같은 데로…… 바다 바람을 쐬면 정신이 한결 맑아지겠지. 공부 잘하는 놈도 여자 앞에선 별 수 없구나…….”
나는 아직 추위가 남아있던 이른 봄날 남쪽으로 무작정 출발하였다. 도망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송창식의 노래처럼,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가 아니었다.
나는 그때 원대한 꿈이 아니라 절망과 좌절의 심연을 찾아서 남쪽 바다로 향한 것이다. 그리고 도사동에 도착했다.
부둣가 해변에는 생선 썩은 냄새와 낡은 어선의 타르 냄새가 뒤섞여 있다. 바닷가에는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엔 잔잔했던 바다가 거칠게 출렁이며 파도가 방파제를 거세게 때렸으므로 방파제와는 계류용 밧줄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던 낡은 목선들이 격렬하게 서로 부딪치며 몸부림을 쳤다.
바닷가는 아름답고 쓸쓸하였다.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남쪽 바다는 먼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함께 생명의 몸짓으로 꿈틀거렸다.
저 멀리 검은 뻘 밭이 끝나는 해안선에서부터 다시 바다가 열리고, 수평선은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경계가 희미해지는 아득한 곳까지 물러 앉아있다. 그때쯤이면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은 한결 누그러졌다. 겨울 철새들은 벌써 귀향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 역시 신림동 고시원으로 귀향을 서둘렀다.
나는 새벽 2시쯤 깨어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막상 올라가자니 마음이 뒤숭숭했던 것이다. 날이 밝아 왔다. 벌써 마을 뒤쪽 해장죽 숲에서 그곳 텃새인 동박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밤새 내려앉았던 밤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떠나오던 날 맑은 하늘에 샛바람이 거세게 불면서 바다는 흰 거품을 일으키며 나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일 년 전 이른 봄날 아침 무렵, 나는 순천역에서 기차를 내려 두 시간이나 기다려서 시내 버스를 타고 방죽길을 따라 삼십리를 더 들어왔다. 바람에 휘청거리는 누런 갈대밭이 끝없이 펼쳐진 염습지와 검은 갯벌, 회색빛 얕은 바다를 한참 지나자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남쪽에는 차가운 봄비가 내리면서 소금기를 머금은 강한 해풍에 풍경이 흔들렸던 것을, 간조 시간이어서 갯벌은 깊은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마을이 거기에 있었다. 내가 정을 붙이고 1여년을 살았던 도사동은 세상이 축약된 작은 세계였다. 초등학교와 동사무소, 우체국, 파출소, 농협 지소 등 관공서와 술집과 (추운 겨울날에는 톱밥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어부들이 톱밥난로 주위에 둘러서서 불을 쬐던) 다방, 미장원, 약방, 당구장, 사진관, 교회, 횟집이 모여 있었고, 마을 바깥 부둣가에는 고기잡이 어선이 입항할 때마다 부산스러운 간이 어판장, 아주머니들의 생선 좌판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눈물을 뿌리면서 그 길을 되돌아서 올라가야했다.
오랫동안 앓고 있는 알레르기성 천식 탓으로 여전히 숨이 넘어갈듯이 심한 기침을 했고, 그때마다 진절머리 나는 기침이 시작되면 목이 몹시 근질근질 거린다고, 이 약을 먹으면 목구멍이 덜 근질거린다고 하면서 하얀색 알약을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노인은 천식 때문에 직장을 잡을 수도 없었고 결혼을 할 수도 없어서 바다 바람을 쐬면 천식이 나을까 싶어 서울에서 공사판 목공으로 일하다가 여기로 이사 온지 30년이 넘었다고 했다.
반평생을 여자만 바다에서 노련한 낚시꾼으로 살아온 늙은 어부는 말했다. “서울로 올라가야제, 서울로. 사람의 새끼는 서울로 보내고 마소 새끼는 촌구석으로 보내라고 했으니께. 바다는 아주 험한 곳이여. 바닷사람이 될 팔자는 아니구먼. 여기서 괜히 시간을 죽이지 말게나. 나야 어쩔 수 없었으니께. 이놈의 천식이 왠수여. 그리고 어차피 오래 못 살 것이니께.
이렇게 맨날 독한 술을 퍼마시니……. 의사가 천식에는 술이 상극이라고 하더구먼.”
무슨 미련이 남아있었던가. 그러나 나는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달리 뾰족한 탈출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제자리에서 맴도는 지겨운 생활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 대한 복수심 또는 실낱같은 희망이 내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을까. 끔찍할 만큼 지루하고 단조롭고 길고도 고독한 시시포스의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밤이면 악몽을 꾸고, 그녀가 칼을 들고 덤벼들었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무 늦었어, 너무. 정말 너무 늦은 것일까? 그러나 막다른 골목이야. 다시 시작하는 거야. 지금 멈추면 안 돼지. 조금만 더, 조금만. 바뀌겠지, 바뀔 거야.”

나이가 들어서 (육십이 훌쩍 넘었으니) 이제 연말 망년회는 시큰둥하다.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자고, 전화가 몇 번씩이나 오니 차마 안 나갈 수가 없다. 아주 오래간만에, 근 3여 년 만에 염 사장을 만날 줄이야. 우리는 한때 무척 친한 사이였는데. 염 사장은 대기업 대표이사를 10여 년 넘게 하였다. 한 시절 그는 아주 잘 나갔다. 그러나 나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내뱉은 넋두리에 의하면) 지금은 집에서 마누라 눈치나 보며 빈둥빈둥 놀고 있는 신세다.
그는 많이 늙어 보였다. 오늘 무척 취하였다. 과음한 것이다.
“야, 자식아 임마, 너 알고 있기나 해? 옛날…… 그 시절…… 그 잘난 네 애인 소식 말이야. 내가 얼마 전에 자세히 들었지. 세상이 좁더라고. 알고 보니 내 마누라의 친구의 친구 1년 후배였다고 하더군. 그 여자가 그때 널 버리고 부잣집 외아들한테 시집 잘 갔어. 잘 갔지. 그때는 그게 사필귀정이었어.
그 집말이야, 남자 어머니가 신촌 이대 앞에서 한때 잘 나가는 유명한 양장점을 했거든. 그때 너무 장사가 잘 돼서 돈을 갈퀴로 긁어모았다고 하니깐. 그리고 그 돈으로 그 옛날 잠실 석촌 호수 근처에 땅을 사뒀는데 그 땅값이 또다시 폭등하고.
근데 남편이란 작자가 말이야 잘생긴 얼굴에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평생 백수야. 홀어머니가 죽은 후 이제 제 세상 만난 듯이 그 많은 땅 다 팔아서 주식 투자해서 날리고, 도박으로 날리고, 완전히 알거지가 된 거야.
그 사람 의처증이 심했다고 하더군. 만날 술 퍼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자식, 마누라 두드려 패고. 오죽했으면 아들 둘 다 대학을 못 갔다고 하더라고……. 그 여자 평생 골골하다 2년 전에 죽었어.
그게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실제는 달리는 버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그러더라고…….
사랑과 배신이 얽혀있으니 무슨 신파조 같군. 그런데 우리의 영웅이었던 만년 수석이 신파조의 주인공이라니. 이제 보니까 학교 때 수석 그거 별 거 아니라니까.
어쨌거나 말이지…… 네게도 일부 책임이 있는 거 아니야? 네가 빨리 합격했으면……. 젠장, 십년이 훨씬 넘게 걸렸으니…….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별 볼일 없는 변호사나 하려구……. 네 놈이 수재인거 맞아?”
그녀의 불행한 결말. 그래? 그게 내 책임이라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던가? (할 수 있었던가?) 누가 날 버렸는데? 이별은 불가피 했을 거야. 사랑이 오래가면 이별은 찾아오기 마련이라니까. 시간은 사랑마저도 마모시킨다고. 그러니까 어느 누구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야.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심각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문과반에서 언제나 내가 수석을 독차지했고 그는 차석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그 시절의 열등감과 낭패감 때문에 내게 은근히 험한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대로 갔고, 나는 법대로 갔다. 그 시절 공부 잘하는 수재들은 공식처럼 법대로 갔고 고시에 합격해서 권력의 상징인 판검사가 되어 출세해야 했다. 그리고 판검사를 하고 나서 퇴직하면 전관예우를 받으면서 잘나가는 변호사가 될 수 있으니까.
나는 원래 공부벌레였으므로 나태함에 젖어 빈둥거리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시 합격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친구들은 과거의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학창시절 아주 느긋했고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새 자신 없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동창생들 사이에서 어렸을 적에는 신동이었고 언제나 뛰어난 수재로 통했고 도맡아 놓고 수석 했던 화려한 명성은 진즉 퇴색하였다. 그 무렵, (학창시절 공부 못한다고 내심 경멸했던 친구들이었지만 사회에 나가서 출세하고 잘 사는 친구들은) 모두들 영문을 몰라 쑥덕거렸다. 그때는 공연히 분한 마음에 밤이 되면 침대에 누워서 소리 없이 울었고 흘러내린 눈물은 베개를 축축하게 적셨다.
삶의 무의미한 시기. 악몽의 시간들. 인생의 쓸데없는 낭비. 어떤 영감의 원천, 신성한 불꽃, 은밀한 도취는 없었다. 어떤 갈망, 욕구, 전율, 환호도 없었다. 탈출구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내 인생의 쓰디쓴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세상은 잔인하고 나는 그 비참한 시절의 희생자였을까? 나는 시대와 불화했고 현란하게 핑핑 돌아가는 이 세상과는 보조를 맞춰 잘 살지 못했다.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한다. 나는 언제나 잠정적이었던 내 인생과 그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그날 무척 과음하였다. 다짜고짜 폭탄주를 무려 열 잔 넘게 마셨으니까. 그런 것 같다. 어떻게 집으로 기어들어왔는지 기억이 안 난다. 오래 전부터 술만 마시면 곧잘 필름이 끊겼다.
오랫동안 의식이 멀쩡하면 수면장애이거나 불면증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그때마다 과도하게 알코올에 의존했다.
아침에 마누라가 심한 잔소리를 또다시 시작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벌써 경멸의 감정이 서려있다.
“지난밤에는 왜 그렇게 많이 마신 거야. 술을 이기지도 못하면서 맨날 마시는 거야. 밤새 몇 번이나 토했는지 기억이나 있어?
오줌까지 지리고. 중독이야, 중독이라고. 그러니까 진즉부터 남자 구실도 못했다니까. 인생이 참으로 불쌍하다고.
그나저나 언제쯤 집에 돈을 가져올 거야? 반년 넘게 한 푼도 가져오지 않은 거 알고나 있는 거야? 첫사랑 애인, 그 여자 말이야 당신과 결혼 안 한 거 정말 잘한 거야.”
나는 억울함과 분노 때문에 숨이 턱 막혔다.
내가 겨우 대답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나의 지나간 삶을, 확실히 실패한 삶을 요약해서 말해주고 싶었고 그러면 그가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기를 바랬다.
지금 다시 새삼스럽게 돌이켜보면…… 아마 나이탓일테지만.
나는 어렸을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고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그때 아버지가 말했다. “남자는 자고이래 서울로 가야한다. 너는 신동이야. 그리고 장손으로서 우리 집안의 기둥이고 대들보다.”
나는 명문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전체 수석을 하여 수재니 천재 소리를 수없이 들었으니 당연하게 법대 진학을 하였고, 재학 중에 소년 등과 합격해서 판검사로 출세할 줄 알았다. 자신만만하였으니…… 고시가 뭐 대수란 말인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내가 누군데…….
나는 대학시절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법서에 코를 박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으니 무슨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하는 자들을 노골적으로 멸시하고 경원시하였다.
아버지는 중소 도시에서 커다란 목재소를 경영하며 돈 많은 유지 행세를 하였고 술집에서 만나 여자와 동거를 하여 남매를 낳았으니 오랫동안 어머니를 멀리 하였다.
어머니는 그 원한을 어떻게 풀길이 없어서 대신 자식들을 돌보는데 온갖 희생을 다하며 헌신하였다.
첫사랑 애인은 처음 마주친 순간 어디선가 라벤더의 연한 향기가 풍겨오며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심장이 멎은 듯 했다. 하지만 5년 넘게 사귀었지만 내가 고시에 계속 떨어지자 나를 버리고 떠나갔다.
그때 나는 말 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하였고 그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청량리 사창가를 드나들다 고약한 악성 임질에 걸린 일이 있었다.
내가 천신만고 끝에 제25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을 때는 그 기수에서 몇 번째로 나이가 많은 고령 합격자였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하였을 때 나이도 많았고 성적도 시원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개업식도 생략한 채 아무도 모르게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사무실은 지하철 교대역 14번 출구 근처 깊숙한 뒷골목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5층 건물의 4층에 있다. 변호사 제강호 (諸岡昊) 법률 사무소는 20년째 그 자리에 있지만 내가 보아도 20평 남짓 사무실은 아주 초라하기 그지없다. 리놀륨 바닥이 닳고 닳아서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다. 변호사 방은 따로 없고 30여 년 전 개업할 당시 중고 가게에서 산 낡은 책장에는 고시 공부하던 시절 보았던 색이 바랜 오래된 법률서적 몇 권과 시집들과 소설책들, 기록 봉투들이 덩그러니 꽂혀있다.
내가 변호사 사무실을 연 지 어언 30년이 되었지만 그 모양이다. 나는 전관 경력이 없으니 전관예우를 받을 수도 없었고 굶어 죽어도 악질적인 브로커를 둘 수는 없었다.
나는 법조인들의 필수품인 골프도 마작도 카드도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맨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정신이 맑아지면 무언가 쓰고 싶어서 무턱대고 소설이나 산문시 같은 걸 끄적인다.
그리고 사법연수원 시절 뒤늦게 (전직 중학교 수학 선생님이었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지만 결혼생활은 엉망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도 속으로 곪아서 실패한 결혼이었다.
나는 악성 임질의 후유증 때문인지 자식을 가질 수 없었는데 그게 결혼 생활이 삐걱대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나를 닮은 못난 자식을 낳지 않은 게 차라리 그게 나았다고 생각한다.
첫사랑의 과정은 우여곡절이 많고 평탄치 않다고 했는데 우리의 첫사랑은 그렇게 파탄이 나버렸다. (남자는 항상 여자의 첫사랑이 되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의 최후의 사랑이 되려고 하니까.) 나는 그때 사랑의 참된 의미를 알고 있기는 했는가. 그걸 실천할 의지가 있었던가. 그래서 그녀가 떠나려고 할 때 매달리며 다시 시작할 순 없었는가. 왜 수수방관 하였는가.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만약인데 말인데, 그때 그녀가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그녀가 조금만 참고 기다려 주었다면 말인데 우리들의 그 후 인생역정은 어떤 경로로 진행되었을까? 우리에게 인생 유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금과는 운명이 확실히 달라졌을까? 운명 혹은 운명적이라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가끔 왜 이런 비겁한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일까?

나는 일요일 아침 골목길을 산책하려고 서초동 연립주택을 나서면서 담배를 빼물었고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자 웬일인지 그 옛날 남쪽 바다의 기억이 서서히 밀려와서 나를 덮쳤다.
집집마다 얕은 담벼락에 철 이른 붉은 줄장미가 피어있는 골목길, 아카시아의 짙은 향기, 마을 뒤쪽 해장죽 숲에서 동박새들의 지저귐, 내가 살았던 넝쿨과 이끼가 낀 돌담 속 폐허 같은 슬레이트 집, 방죽길을 따라 길섶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야생화들, 금창초, 현호색, 개별꽃, 쑥부쟁이, 자운영꽃, 복사꽃, 할미꽃, 개구리 발톱, 잎이 달려있을 때는 꽃이 피지 않고 꽃이 필 때는 잎이 피지 않아서 꽃말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상사화, 그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소금기가 밴 찝찔한 바다 바람, 정오가 되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교회의 종소리, 검은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길게 기적소리를 울리고 내달리는 경전선 완행열차, 학교가 파할 무렵이면 재잘거리며 교문으로 우르르 몰려나오는 어린 아이들, 크고 검은 눈동자에 우수가 깃들여있어 수줍음을 잘 탈 거 같았던 여선생님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그녀를 깊이 사모했고 짝사랑했다), 언제나 밤안개가 짙은 곳, 염습지의 갈대숲, 시베리아의 툰드라에서 날아온 겨울 철새들, 사리 물때가 되면 갯벌에서 웅덩이를 만들어 개불을 잡는 일, 또는 말뚝망둥어와 흰발농게를 잡는 일, 갯바위에서 굴을 따는 일, 흰발농게를 잡아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봄의 철새인 도요새, 밤의 어두움이 찾아오기 직전 짧은 순간 황혼녘의 바다가 푸른빛으로 빛날 때 어둠을 뚫고 먼 바다에서 돌아오는 지친 어선들. 생선 횟집에서의 술판, 도수 높은 알코올 기운을 풍기는 술 취한 어부들. 갯바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젊은 여자의 부풀어 오른 시체. 그녀는 얇은 코트 주머니에 돌멩이를 넣은 채바다로 뛰어내렸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며칠동안 갯바위를 찾아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보려고 애썼다. 나는 그녀가 뛰어내린 장면을 수없이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나는 그녀의 혼을 만나기 위해 그 바닷가를 배회하였는지 모르겠다.
그곳의 나의 유배지였던가. 그곳에서 나의 삶은 남루했지만 그러나 행복했다. 그때 내 얼굴은 햇볕에 그을렸고 내 육체는 바닷바람에 억세졌다. 나는 그 바다 바람을, 바닷가 마을을, 늙은 어부를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굳게 결심하고 어부로 살면서 올라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다시 생각한다.

노인이 되어 참을 수 없는 것은 육체나 정신의 쇠약함이 아니고 기억의 무게를 견뎌 내는 일이다. (W.S. 몸)
작성일:2023-12-09 12:38:33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