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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외톨이 테러리스트 (3)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8-24 13:37:24
조회수
113
증거 자료 (물증)
검사는 형사 법정에서 증인을 내세우고 증거물을 제시한다. 범죄사실의 증명은 전적으로 검사의 책임이다. 물론 피고인 측에서도 반대되는 증인과 증거물을 제시할 수 있다. 법정에 제시된 증거물은 검사, 판사, 변호사, 피고인이 세밀하게 살펴보고 검토한다. 피고인과 변호사는 그 증거물에 대해서 인정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고 증거물의 신빙성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해당 증거물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최종적으로 판사가 자유 심증에 의해 판단한다.
이 사건 증거물의 수집과 분석은 10월 28일부터 북한의 폭발물과 폭파 수법에 대해서는 최고의 전문가들인 안기부 요원들이 수사에 참여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또한 그때부터 피의자들에 대한 수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피의자 신문은 피의자들을 분리한 채로 종합병원의 별실에서 이루어졌다.

범죄 현장에서 수거한 증거품은 소형 송신기와 안테나 선, 12볼트 배터리 수신기, 원격조종용 전자수신회로 조정기 1대, 원격조종용 건전지 16개, 불발탄 1개, 소이탄 1개 등이다. 소형 송신기는 크리스탈 송신기로 3S2S 0.9인치였다. 송신기의 가용 거리는 50마일이고 원격조정용 고성능 단추가 달렸다. 수신기는 트랜지스터 콘덴서 자석 코일로 구성되어 있고 배터리는 1.5VC였다. 중량 5kg의 불발탄은 감식 결과 폭발 시 80m 이내의 인명을 모두 살상할 수 있는 고성능 폭탄이었다. 원격조정장치에 사용된 배터리는 최장 3개월까지 사용할 수 있는 고성능 일본 히다치 제품이었다. 원격조종장치는 폭발물 설치 장소로부터 반경 2km 안에서 조종이 가능한 것이었다. 소이탄은 직경 10cm에 길이 30cm가량의 원통형이었다. 피고인들이 소지했던 소음권총, 수류탄, 무전기 등 휴대장비는 그동안 한국에서 검거된 북한 간첩들의 장비와 똑같은 것이었다. 피고인 진모와 강민철이 휴대했던 소음권총의 소음기는 지난 10여년 간 남한에 침투했던 북한 간첩들이 비밀공작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그들이 소지했던 벨기에제 브로닝 권총도 북한 간첩이 휴대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권총번호 459771S는 1980년 11월 3일 전남 횡간도에 침투했던 간첩 3명이 휴대했던 동일형의 권총번호인 459773S와 끝자리 수만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북한은 강민철이 휴대했던 25구경 브로닝 권총(번호 459771)과 횡간도 간첩 소지 권총 2정(번호 459773, 460259) 등 일련번호 459751~462546 사이 브로닝 권총 100정을 서독 거주 스웨덴 상인인 한스 루돌프 아우구스 요하임을 통해 벨기에 총기제작회사인 파브리크 나시오날 사로부터 수입했다. 평양 100번지 소재 조양상사가 권총 100정 이외에도 동형 브로닝 권총의 실탄 1만 1천 발도 함께 수입했다. 북한이 수입한 무기들은 권총 1상자와 탄약 3상자의 형태로 벨기에의 당베르 항에서 북한으로 수송되었던 것이다. 범인들이 휴대한 수류탄은 내부에 아이언 볼이 충전되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도 북한제 산탄형 4각수류탄으로서 대남 침투 간첩들로부터 노획한 수류탄과 동일한 것이다.

검사의 논고
1983년 12월 5일 제9차 공판에서 검사는 공소사실과 법률의 적용에 대해 의견을 말하며 구형했고 피고인들의 국선 변호인들이 최후 변론을 했다.

버마 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는 국적에 관계없이 형법 제2조에 의거 처벌되어야 한다. 국제법도 제3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에 대해서는 처벌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범인들을 치료한 군의관들의 견해에 의하면 범인들은 건강도 매우 좋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다. 범인들은 농아도 아니고 청력도 정상이며 말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다. 범인들은 영어로 한 질문에 반응을 보이고 통역을 통해 재판 과정을 이해하고 있다. 피고인들에게는 재판 과정에서 한국어 통역 제공 등 모든 배려가 재판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강민철의 자백에 의하면 조장 진모와 조원 강민철, 신기철은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 기간 중 대통령 일행을 살해할 목적으로 9월 22일 동건호에서 내린 다음 소형 보트를 타고 버마에 잠입했다.
이들은 북한 대사관의 참사관 주택에 은신하고 있었다.
10월 9일 오전 피고인들은 아웅산 묘소 근처 위지아야 극장에서 배회하다가 조장인 진모가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
이들에게는 형법 제302조 (I), (B) 및 제34조가 적용되며, 모든 증거에 비추어 이들의 범죄는 살인죄에 해당한다. 46명을 부상케 한 데 대해서는 형법 제307조와 제34조가 적용되며, 모든 증거에 비추어 살인미수에 의한 상해죄에 해당한다. 따라서 진모와 강민철은 각각 형법 제302조 (I), (B) 및 제34조 및 307조에 의거해 처벌되어야 한다.

우 틴 망지 (진모의 변호인)의 최후 변론
진모가 살인 목적으로 범행을 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한 구체적 증거가 없다. 강민철의 자백에 의거해 진모가 원격조정 스위치를 눌렀다고 하지만 자백 이외에는 진모의 범죄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피고인 강민철은 자신의 죄를 모면하기 위해서 진모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도 있다.
형법 제2조와 관련 동 조항의 적용은 인정될 수 있으나 제302조의 적용에 관해서는 강민철의 자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모가 원격 스위치를 누르고 신기철이 폭탄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경찰국장 우테인 아웅만이 증언했다. 하지만 이건 전문 증거에 불과하다. 그는 목격 증인이 아니다. 강민철의 자백 내용에 의하면 누가 어떻게 폭탄을 설치했는지에 관해서 구체적인 진술이 없다.
따라서 검찰 측 주장은 일관성이 없다. 실체적 진실은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진모가 운명의 나팔 소리를 듣고 악마의 리모컨을 눌렀다는 범행사실에 관해서는 현장 목격 증인이 없으며 정황 증거만이 있을 뿐이다.

우 세인 (강민철의 변호인)의 최후 변론
강민철은 범죄 사실을 전부 자백했다. 강민철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그의 자백으로 버마 정부는 사건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으며 전 세계에 사건의 배후와 책임이 어디 있는지를 밝힐 수가 있었다. 따라서 강민철에게는 형법 제337조에 의거, 사건 제보자의 특권이 주어져야 한다.

1983년 12월 6일 제9차 공판에서 피고인들이 유죄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마지막 신문이 있었다.
진모는 “you, Zinmo, are you guilty?”라는 신문에 끝내 응답을 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강민철은 “you, Kang Minchul, are you guilty?”라고 신문하자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이며 유죄를 인정했다.

1983년 12월 9일 선고공판에서 재판장 (마웅 마웅 아예 판사)이 형을 선고했다.
재판은 1983년 11월 22일 제1차 공판이 시작되어 12월 9일 제10회 공판 기일에서 판결이 선고되어 종결되었으므로 18일 만에 끝났다. 이 역사적 재판은 그렇게 끝났다. 이게 버마식 재판이었다. 버마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이 사건을 재판 없이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재판을 했다는 시늉은 해야했다. 물론 인적 증거이건 물질적인 증거이건 증거가 충분하다고 미리부터 예단한 것이다.
하지만 형사소송의 기본 절차는 지켜야 했다. 그런데 엄격한 증거조사, 현장검증, 피고인 신문 등 형사소송의 기본적인 절차는 지켜지지 않았다. 피고인 측 변호사의 반대신문도 없었다. (변호사는 자신의 기본 권리이고 책무인 피고인들을 접견하여 의견을 청취하고 조사 분석하는 접견 교통권도 행사하지 않았다.)
엄격한 형사소송의 절차를 지키면서 치밀하고 정확한 재판을 통해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겨져야 하는데 말이다. 20세기 문명 국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해진 시나리오에 따라 재판장은 로봇처럼 재판을 기계적으로 진행하여 속전속결 일사천리로 끝내버렸으니까 형사소송의 대원칙인 신속한 재판의 원칙을 잘 치킨 셈이지만.
‘어리석은 재판관은 속결 (速決)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피고인 진모는 형법 제302조 1항 및 제34조에 따라 유죄로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강민철은 형법 제302조 1항 및 제34조에 따라 유죄로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
증거물은 공소기간이 경과한 후 각각 반환한다.

버마 최고 재판소 (인민사법회의, council of people’s justice)는 1984년 2월 9일 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고 형은 확정되었다.
버마 정부는 1985년 4월 6일 범인 진모에 대한 사형을 집행했다.


3. 771 특수부대 (일명 강창수 부대)
1983년 10월 8일 대통령은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그날 아침부터 차가운 가을비가 내려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다. 첫 방문지인 버마에서 북한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비극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 채 대통령 순방의 날이 밝은 것이다.
대통령은 출국인사를 하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 버마, 인도,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 3개국과 대양주의 뉴질랜드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 5개국 및 브루나이 왕국에 대한 순방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종단하는 본인의 이번 순방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우리 국력의 국제화를 지향하는 국민 여러분의 여망에 따라 본인이 추진해온 개방외교의 네 번째 결실로서, 세계사의 중심에 우리 스스로를 성큼 다가서게 하는 전진의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버마에 도착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본인은 오늘 우산유 대통령각하의 초청을 받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황금빛 사원의 나라로 알려진 버마 연방사회주의공화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본인의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의 첫 방문국으로서 귀국에 도착한 것을 더욱 뜻 깊게 생각하면서, 버마 국민에게 보내는 대한민국 국민의 따뜻한 우정을 전하는 바입니다.……

쉐다곤 파야 shadagon paya
쉐다곤은 미얀마어로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양곤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상구타라라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쉐다곤은 불심이 깊은 미얀마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고 죽기 전에 꼭 한 번 참배해야 하는 성지이다. 불탑은 온통 황금으로 덮여있고 불탑의 꼭대기는 5,448개의 다이아몬드와 2,317개의 루비, 사파이어 등 값으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찬란한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다. 찬란한 황금 불탑. 그러니 양곤 어디에서도 황금빛을 찬란하게 쏟아 붓고 있는 쉐다곤 탑을 볼 수 있다.
이 거대한 불탑 사원은 세계 6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자랑할 만도 하다. 그래서 미얀마를 찾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아보아야 할 필수적인 방문지 같은 곳이다. 쉐다곤은 미얀마의 상징이고 미얀마인들의 자부심의 표상이다.
세계의 수많은 시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신비스럽고 웅장한 탑을 노래했다.

구름과 안개 속에 흐릿했던 아침, 내가 쉐다곤을 처음 보았을 때 쉐다곤은 불로 된 혓바닥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듯 가리키고 있었다. 맑게 갠 날 정오의 그 모습은 평화롭고 장엄하였다. 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밤에 드러내는 자태는 정말 신비스럽기만 했다. 쉐다곤은 어느 곳에서도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그 분위기는 인간이 풍기는 듯한 분위기다.
그리고 그 위엄과 아름다움, 그 순결함은 쉐다곤을 인간이 추구해온 가장 고상한 것들의 상징으로 만든다. 나는 그동안 황혼과 폭풍우, 빙하, 공원, 꽃 그리고 사람의 얼굴 등 나를 감동시켰던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손으로 창조한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아는 한 쉐다곤이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쉐다곤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뇌리에 되살아나곤 한다.

테러리스트들은 대통령이 버마에 도착한 10월 8일에는 순교자 묘역 (일명 아웅산 묘소) 근처인 쉐다곤 사원 부근 숲속에서 노숙했다. 운명의 그날이 소리 없이 다가왔다. 피의 일요일인 10월 9일 아침에는 사전 정찰해두었던 묘역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한 자동차 정비공장 (Shwe Lin Yone Motor Service)으로 접근했다.
버마의 주요 교통수단인 모터바이크 택시, 사이클 택시, 사이카, 픽업 트럭, 미니버스 등을 수리하는 공장으로 사방이 훤히 터져있는 직사각형 목재건물인 공장 건물 앞 공터에는 수리를 기다리거나 폐차 처분된 수십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묘역의 전면과 묘역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한 눈에 잘 보였기 때문에 원격조종 폭파 스위치를 누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그들이 정비공장으로 들어가려 할 때 서로 간에 손짓, 발짓으로 하는 어설픈 대화가 오갔다. 정비공장 사람들은 버마어로 말하고 그들은 우물쭈물 대꾸해야 했으니 말이 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버마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조장인 진모는 버마인들이 입는 상의와 치마같인 생긴 론지 하의를 입고 어깨에는 버마식 가방을 매고 있었으며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있었다. 강민철은 노란색 상의와 갈색 바둑무늬의 버마식 론지 하의, 신기철은 하얀색 상의와 검정색 바지를 각각 입고 있었다.
진모는 160센티미터 정도로 키가 작은 편이었고 몸집은 뚱뚱한 편이다. 진모가 들어왔을 때 한 종업원이 어떤 이상한 사람이 버마어도 모르고, 행동이 약간 수상하다고 하면서 주인에게 직접 한 번 만나보라고 말했다. 주인이 나가보니 진모는 다른 종업원과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인이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느냐고 물었는데도 그는 “차이나, 차이나”하고 되풀이할 뿐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에 25짜트 짜리 버마 지폐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진모는 이 돈을 줄 테니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서로가 계속 손짓 발짓으로 의사 소통을 시도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진모는 계속 “차이나, 차이나”라는 말만 또다시 되풀이했는데 그는 자신들이 중국인 여행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버마인들은 이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몹시 짜증이 난 주인이 진모의 저고리 앞주머니에 꽂혀있는 만년필을 뽑으면서 글을 써보라는 시늉을 하자 그는 기겁을 하며 만년필을 빼앗아 황급히 공장 밖으로 달아났다. 이 만년필은 북한 공작원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비상용 살상용 무기 (boobytrap)였기 때문이다.
진모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2명과 합류해 자동차 정비공장을 포기하고 그 묘역으로 이어지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군중들 틈에 섞였다. 마침내 쉐다곤 파야의 북쪽 계단 쪽 도로와 연결되어 있고 묘지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마하 위자야 파야 거리의 영화관 (Wizaya Cinema) 앞에 자리를 잡고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거리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소란스러웠다. 새삼스럽게 살펴보니 버마 사람들은 자신들과 많이 닮아 보였다.
이때가 묘소참배 시각이 거의 다 된 10시 24분경.
그들의 시야에 버마 경찰의 모터사이클을 선두로 검은 리무진 차량 행렬과 태극기를 단 벤츠 차량이 뒤따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구경나온 랑군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단 차 속에 대통령이 있다고 생각하여 손에 든 태극기와 버마기를 힘껏 좌우로, 위아래로 흔들면서 환영하였다.
그들은 그 순간 그 차량 행렬이 묘소에 도착하는 시간과 헌화하는 시간 등을 면밀하게 계산했고 원격 조종 장치의 버튼을 누를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언제 어디에서 폭발을 일으킬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에 대해서 당초부터 의견 충돌이 생겼다. 조장이었던 진모 소좌는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폭파 리모컨을 작동시킬 생각이었지만 강민철은 생각이 달랐다. 구경꾼들 틈에 섞여 있으면 차량 행렬을 볼 수 있어도 순교자 묘역 내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주공격 목표인 대통령이 폭탄의 살상 유효 공격 범위 내에 있는지 혹은 그 밖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폭탄의 치명적인 살상 거리 밖으로 이탈해 있을 때 폭발물이 터지면 공작은 당연히 실패한다.
강민철은 순교자 묘역 내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쉐다곤 사원 북쪽 입구에 있는 나웅도지 파야의 맨 위층 계단에서 마지막 행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모는 조장으로서 짜증을 내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사원 주변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최후의 마지막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쉐다곤 사원은 관광객이 많아서 작전에 차질이 빚을 수도 있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을 탈출하는 데 시간이 너무 걸려서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강민철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와 강민철은 이 문제 외에도 사사건건 의견충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어 왔다.
그들의 대화는 언제나 순조롭게 이어지지 못했다. 진모가 어느 순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리모컨은 그때 진모의 바지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노골적인 적의가 드러난 얼굴로 진모가 말했다. “명령에 복종해. 내가 조장이니까 명령은 내가 내린다. 조금이라도 거역하면 명령 불복종 죄로 다스리겠다.”
그런데 만약 강민철의 주장대로 나웅도지 탑에서 리모콘을 눌렀었더라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작전은 완전한 성공이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 시각 아직도 영빈관에 있었다. 대통령이 아니라 대사 일행이 탄 차량 행렬은 1분 후인 10시 25분 묘역 기념관에 도착했다. 이때가 폭탄이 터지기 3분 전이었다. 수행원 일행이 복장과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으면서 줄을 정돈하고 있을 때 갑자기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두 소절의 짧은 나팔소리였다.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이 나팔소리가 결정적인 신호였다. 나팔소리까지 들은 다음에 더 이상 폭발을 미룰 수는 없었다. 리모콘을 쥐고 있던 진모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도착해서 행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버마에 도착해서 생긴 땀띠 때문에 사타구니에 발진이 돋았는데 또 다시 미친듯이 가렵다. 진모는 나팔소리가 울리고 난 후 잠시 사이를 두고 원격 폭파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 사실 눌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 눌렀을 수도 있다. 현실은 기억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그때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교자 묘역에 폭음과 함께 번갯불 같은 섬광이 번쩍이면서 맹렬한 폭풍이 일었고 일순 모든 것이 폭풍에 휘말렸다. 묘지는 캄캄한 암흑에 휩싸이고 파편과 함께, 사람의 몸에서 찢겨진 살과 뼈 등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짧은 순간 태곳적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현장은 바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불에 탄 목조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은 날아가 버렸다. 그 잔해 밑에 대통령을 기다리며 도열해 있던 인사들의 찢긴 신체가 널려 있었다. 부상자들 중에는 서까래나 다른 구조물 밑에 깔려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폭발음이 들리자 주위 상황을 살피면서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러의 최종 목표인 대통령은 그렇게 화를 면했다. 일정의 차질, 행사 시작 전에 울린 나팔소리 등 예상치 못한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겹쳤다.
운명의 나팔소리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대통령의 조화 헌정시 진혼곡을 연주하기 위해 도열해 있던 의장대 요원인 나팔수들이 연습삼아 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혹시 폭발성 물질이라도 안에 있지 않을까 하는 사전 점검 차원에서 한국 경호원들이 나팔을 한번 불어 보라고 권유했기 때문에 나팔수들이 불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행사와는 관계가 없는 2명의 버마인이 묘지 근처의 나무 밑에서 장난삼아 나팔을 불었다는 설이다.
나중에 천병득 경호처장은 대통령 도착 직전 나팔수에게 손짓으로 한번 연습을 해보라고 했더니 진혹곡 나팔을 불었으며, 이 소리를 듣고 범인이 원격폭발장치 스위치를 눌렀다고 했다.
영빈관에서 순교자 묘역까지는 불과 4.5킬로미터였다. 폭발이 일어난 시각이 10시 28분이었고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그로부터 4분 전에 영빈관을 출발해 테러의 순간에 묘역을 1.5킬로미터 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공식행사는 2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나팔소리가 들린 후 폭파장치를 작동시키지 않고 잠시만 더 기다렸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순교자 묘역 martyrs mausoleum
순교자 묘역은 약간 언덕진 구릉에 위치해 있고 4차선 도로인 아자니르 거리 건너 버마의 상징인 쉐다곤 파야 서북쪽을 바로 올려다 볼 수 있다. 현지어로는 ‘아자니베이만’이라고 부른다. 이 묘역의 바로 옆에는 ‘무명 용사의 비’가 서 있는 묘역이 붙어 있다.
버마 전통 목조 양식으로 지어진 기념관은 약 200평 가량의 기다란 직사각형 기와집 모양이었다. 안에는 직사각형의 아웅산 장군 석관이 있고 그 좌우에 조금 작은 석관이 4개씩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묻힌 사람들의 사진이 황금빛 액자로 단장되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1947년 자치 정부의 수반이었던 아웅산 장군은 휘하 각료들과 함께 회의 도중 정적이 보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8명의 각료들과 함께 암살을 당했었다.
묘지 사방은 벽이 없이 틔어 있었고 티크 목재로 된 기둥이 빙 둘러서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높이 약 5미터의 천정은 목재 타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목책에 따라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이 묘역은 폭발 사건 이후 한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그 후 소련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로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신축되었기 때문에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2주일 동안 북한 공관원의 집에 은신하던 그들 3인은 10월 6일 공관원의 안내로 순교자 묘역 주위를 맴돌면서 범행 장소를 사전 정찰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후, 10월 7일 새벽 2시에 폭발물을 휴대하고 묘역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묘소 바로 위쪽 천정에 폭발물을 설치하였다. 테러리스트들이 설치한 폭발물은 모두 3개이다. 그 중 2개는 대통령이 헌화할 아웅산 장군의 묘 바로 위쪽 천정에 설치된 고성능 살상용 폭탄이었고 나머지 한 개는 폭발과 동시에 불이 일어나게 하는 소이탄이었다.
순교자 묘역에 설치된 폭탄은 북한이 테러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고성능 폭발물로서 폭발 시 파편과 함께 폭탄 속에 내장되어 있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아이언 볼이 사방으로 튀어나와 많은 사람을 살상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2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원격조정 폭파가 가능하며 유효 살상 거리는 직경 약 80미터 정도로 아주 강력한 폭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살상용 두 개의 폭탄 중 한 개는 폭발되지 않았다. 만약 이 폭탄마저 폭발했더라면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10월 6일, 그들은 은신처인 공관원의 관저를 나왔다. 진모와 강민철은 버마 현지인들의 옷을 입었다. 아래는 론지 longi 라고 부르는 치마 같은 옷인데, 옷이라기보다는 둥글게 이어진 옷감을 몸에 감고 위에서 매듭을 만들어 허리춤에 찔러 고정하는 옷이다. 별 장치가 없는데도 흘러내리지 않는 것이 그저 신기하다. 버마인들이 남녀 구분 없이 입는 전통적인 복장이다. 평소 일상적으로 늘 입는 복장이라는 점에서 한복과는 다른 것이고 얼핏 보기에 통치마 같은 이 옷은 직장인들의 근무복이기도 하고, 외교 행사 때나 국가적 기념식 때는 국가 원수나 외교관들이 착용하는 의례복이기도 하다. 신기철만 검은 바지에 흰 셔츠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모두 엄지와 둘째 발가락에만 줄을 끼워 사용하는 슬리퍼를 신었고 길거리 음식인 밀가루와 콩을 갈아 튀긴 스낵인 ‘뼈쪄’를 들고 씹어 먹었다.
공관원의 집을 나와서 테러 현장인 순교자 묘역이 있는 지역인 쉐다곤 사원과 칸도지 인공 호수, 랑군국립박물관, 랑군동물원 일대를 정찰했다. 그리고 드넓은 실내 시장인 보족 아웅산 시장에서 버마식 슬리퍼와 론지, 기념품 등을 샀고, 시장 내 식당에서 버마 전통요리인 닭고기 커리와 채소 볶음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전통 담배를 피우며 사탕수수 주스인 ‘짠예’를 마셨다.
테러리스트들은 날이 저물어도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아웅산 묘소 부근의 숲속에서 극성스러운 모기떼의 공격을 참아내면서 노숙을 했다. (그들은 혹시라도 의심을 사서 검문검색을 당할지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노숙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강민철은 버마의 극성스러운 모기를 피해서 제대로 잠을 자려면 호텔로 가자고 주장했는데 진모가 일축했다.) 그들은 수칙에 따라 1명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나머지 2명만 잠을 잤다. 그 다음날 10월 7일 새벽 2시, 그들은 순교자 묘역에 잠입했다. 동료 2명이 밑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기철이 묘소 기념관의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진모가 아래에서 폭탄들을 올려주자 이것들을 지붕 아래 장치하였다. 그중 두 개는 원거리 작동 폭탄이었고 나머지 한 개는 화재를 일으켜 증거를 인멸할 목적으로 숨긴 소이탄이었다.
그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국빈 행사가 있을 예정인 장소에 침투해 폭탄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중에 묘소 관리인의 집을 방문해, 자신들은 남쪽의 보안요원이고 현장을 방문해야 한다며 관리인의 양해를 얻었으며 그 과정에서 관리인에게 최고액권 화폐인 10,000짯 짜리 지폐를 주었고 그에게서 폭탄 설치에 사용할 사다리를 빌렸다.
7일과 8일 낮 동안에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가장하고 사람들 속에 뒤섞여 쉐다곤 파야와 아웅산 묘소 인민공원 주변 북적거리는 거리를 적당한 시간 간격으로 왔다갔다하며 주의 깊게 살폈다.
버마 사람들과 마주칠 때는 애매하게 웃으면서 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이나’ ‘차이나’라고 되뇌었다. 배가 고프면 노점 식당에서 닭고기 커리와 맥주를 마셨다.
8일 밤에도 쉐다곤 파야 부근 남쪽 숲속에서 노숙을 했다. 하지만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면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9일 새벽, 회색 여명이 숲속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벌써부터 흥분했고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긴장하기 시작했다.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해야했다.

동건 애국호
9월 9일 그들은 비밀리에 ‘동건 애국호’를 타고 황해남도 옹진항을 떠났다. 이 배는 총 5,379톤, 속력 15.5노트의 튼튼한 화물 운송선이었다. 이 정도의 배라면 어떤 악천후에도 걱정하지 않고 세계 어디라도 항해할 수 있다. 전형적인 화물선으로 외견상으로도 화물선이고 실제 화물 운송도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 기항하더라도 그 나라 항구의 무선전신국을 경유하지 않고 북한 본부와 직접 교신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으면서 고성능 무기를 숨기고 있었고, 그래서 특수 공작에 자주 이용되고 있었다.
동건 애국호는 평양의 대훈선박회사 소유였다. 이 배에는 선장 김영문을 비롯한 39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김무라는 진짜 선장이 또 있었다. 정치 선장 또는 일명 정치부장이라고도 하였다. 선원들의 일거수일투족 동향을 감시하는 노동당 조사부 소속 특수 요원이다.
진모, 강민철, 신기철은 출발하던 날 아침 사복을 입고 여행 가방을 든 채 동건 애국호 갑판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이 승선을 하고 출항한 후 이틀이 지나서 동중국 해 대만 해역 북쪽을 지날 무렵에서야 배에 타고 있던 정찰국 소속 어떤 대좌로부터 자기들이 수행해야 할 특수임무에 대해 몇 시간 동안 구체적이고 상세한 브리핑을 받았다.
그들이 지금 버마 랑군으로 가고 있다는 것, 최종 목표물이 남조선 대통령이라는 사실, 폭발 지점이 아웅산 묘소라는 사실, 구체적 일정은 아직 알 수 없지만 버마 주재 해외공작 지도원이 분 초 단위로 세세히 알려줄 것이라 했고, 폭발물과 장비 등은 이미 현지에서 조립이 끝난 완성품 상태로 보관 중에 있다고 했다.
그들은 내심 크게 놀랐지만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세 공작원들은 다른 선원들과의 접촉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항해 도중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의 선실 내에서만 생활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겠지만 온갖 힘든 극한의 훈련을 통해 단련된 그들에게는 이 정도 어려움이야 차라리 좋은 휴식거리였다.
그러나 서태평양 대만 해역 남쪽 필리핀 루손 해협 근처를 지날 때 계절적인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삐걱거리며 엄청난 포말과 소음을 일으켰다. 그들은 심하게 배 멀미를 했으며 오장육부에 들어있던 마지막까지 토해내야 했다. 그때는 아무리 단련된 그들도 배 멀미만은 당해낼 수 없었다.
배는 아주 천천히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마침내 폭풍우가 잦아들었다. 배는 어느덧 남중국해로 접어들었고 말라카 해협을 빠져나와 안다만 해역으로 계속 북상하였다.
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동건 애국호는 마침내 9월 15일 새벽 양곤강 입구에 도착했다. 그보다 열흘 전에 이미 버마 선박출입항위원회에 입항 허가 신청이 되어있었고, 버마에 도착한 그 다음날인 16일 건자재 하역 목적으로 입항 허가를 받았다. 이틀 후인 9월 17일 오후에 이 배는 랑군항의 술레제티 부두에 접안해서 화물하역 작업을 하도록 승인받았다. 9월 18일부터 하역 작업이 시작되어 21일 새벽에 작업이 종료되었다. 21일 오전 동건 애국호는 출항허가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선장은 갑자기 선박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으로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긴급하게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며칠간 부두에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버마 선박출입항위원회는 처음에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선장이 긴급한 사정이 있다면서 3일만 시간을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고 버마 항만공사의 담당자가 선박에 올라와서 엔진을 검사하고 문제를 확인한 후 허락했다.
이제 동건 애국호는 양곤강 입구 외항에서 3일 동안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배는 21일 오후 랑군 부두를 떠나서 외항 정박지로 이동했는데 3일 후인 24일에는 버마를 떠나라는 통고를 받았다.
9월 22일 북한인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채소와 파파야, 구아바, 귤, 망고, 바나나 등 버마 열대 과일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서 동력이 부착된 삼판을 타고 와서 배에 승선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날 때에는 3명의 북한 사람들과 함께 떠나면서 바퀴가 달린 무거운 가죽 가방을 2개 싣고 갔다.
9월 24일 정오경, 동건 애국호는 바로 출항했는데 함께 떠났던 3명은 그때까지 배로 돌아오지 않았다. 3명의 북한 사람은 아무런 입국 검사나 절차도 없이 버마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당시 배에 승선해 화물과 인원의 이동을 감시했던 경찰관과 세관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배가 정박해 있던 곳은 수도 랑군의 항구이지만 부두에는 입출국을 통제하는 절차나 혹은 이를 관장하는 관청 등의 체계가 미비한 상태여서 테러리스트들이 버마에 잠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 특수 공작원들은 모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랑군에 무사히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상륙 직후 그들은 공관원의 안내로 관저로 갔다. 그 집은 랑군 시내 남쪽으로 양곤강과 접해 있는 알론 구역 트리엑타 2번가 버마 외무부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집이 있던 곳이 ‘외교단지’라고 불렸던 구역이었고 바로 옆집이 북한 대사관이었다.

전창휘 (해외공작 지도원)
그들이 들어간 집은 북한 대사관 참사관 전창휘의 집이었다. 주소는 랑군시 알론구 티리2가 154/A호였다. 그들은 전창휘의 집 차고를 통해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전창휘는 총무 담당 참사관이란 직함을 갖고 있었으나 실제는 노동당 연락부 소속으로 북한의 해외공작 지도원으로 버마에서 이 사건을 총지휘했다. 테러범들이 들어간 전창휘의 집은 전창휘 이외에도 2명의 북한 대사관 직원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이 주택은 왼편에 차고가 붙어 있었고 이 차고는 2층 방으로 통하도록 돼 있었다.
테러리스트들은 이곳에서 2주일 동안 숙식하면서 전창휘의 설명과 지시에 따라 구체적인 범행 계획을 세웠다. 범행에 필요한 폭약, 폭파 조종장치 등 모든 장비들이 이곳에 이미 준비돼 있었다.
이 장비들은 부품으로 분해되어 외교 행낭으로 북한에서 버마 주재 북한 대사관으로 보내졌고 그 집에서 다시 조립했다. 외교 행낭은 빈 협약에 의해 검색 없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랑군 주재 북한 대사관은 정규 직원, 운전사, 고용원까지 모두 본국에서 데려다 썼으며 현지에서 고용한 사람은 없었다. 또한 테러에 필요한 공작품과 요원들을 수송하는 데에는 외교관 면책 특권이 부여되어 있는 외교관 번호판이 부착된 대사관 공용차를 이용했다.
그 후 그들은 공관원의 집 2층에 숨어 지내면서 대통령 일행의 도착을 기다렸다.
낮 동안은 임무 수행을 위한 훈련 시간이었다. (특수부대의 작전용인 벨기에제 장탄수가 15발인 FN FNP) 권총을 분해해서 정성껏 닦은 뒤 다시 조립하고 각자 삼십 발씩 지급된 탄환을 점검하고 두 발씩 지급된 수류탄을 점검했다. (수류탄은 필수적인 휴대무기였다. 다수의 적과 대적할 때에는 다급하면 일시에 적을 제압하기 위해서 권총보다는 수류탄이 효과적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폭발물을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불발탄이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점검하고 송신기나 수신기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피고 조작을 연습했다. 잠시라도 눈을 뗄 수 없는 기계적인 작업이었다.
매일 아침 현지 지도원이 방으로 들어와서 그날의 일정을 지시했고 본부에서 내려온 지령을 전달하고 현지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들은 낮 동안 외출이 금지되어 있었고 지도원 이외의 어떤 인물과도 접촉이 금지되었다. 매끼 식사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한국식이나 버마식이 교대로 나왔는데 음식은 정갈하면서 원하는 대로 충분히 먹을 수 있었다. 오직 밤에만 술을 마시는 것이 허용되었다.
너무나 지루한 나날이었다. 개성의 부대에서부터 7월 8월 두 달 동안 연습했기 때문에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너무나 익숙한 과정이었다. 수없이 반복해야 하는 일들은 너무나 지겨운 일이다. 더욱이 배가 항해하는 일주일 동안 외따로 떨어진 선실에서 갇혀 지냈고 다시 2주일 동안이나 그 2층 방에서 갇혀 지내는 것은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 3명에게는 감옥 생활보다 더 지독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암살이라는 그 막중한 임무를 생각할 때마다 등짝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맥주를 마시거나 커피를 수없이 마시면서 잡담처럼 옛날 이야기를 했다. 버마의 맥주 맛은 그만이었다. 가끔 지도원이 갖다준 고급 양주를 버마의 전통 요리인 채소볶음을 안주로 해서 마시면 긴장이 풀리면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을 마시니까 혀가 풀렸다.
진선수는 고향이 황해북도 사리원이었고 강민철은 강원도 통천이었으며 신기철은 삼수갑산으로 유명한 양강도 갑산군 출신이었다. 그는 갑산에서 협동농장 유치원을 거쳐 4년제 갑산읍 인민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 갑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인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 하에 토지 개혁을 단행했을 때 아주 빈농이었던 할아버지는 큰 혜택을 입었고 그래서 바로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핵심 계층 출신이었다.
진선수는 자기 자랑이 심했다. 그는 사리원에서 인민학교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고등중학교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고등중학교 시절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 (사로청)의 부위원장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당연히 위원장이 되어야 했음에도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밀렸다고 했다. 그는 고등중학교 시절부터 일찍 마르크스 레닌주의 이론서와 주체사상 관련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인민군에 입대하여 최고의 엘리트들만이 가는 군사정전위원회 경무부 차단 소대에 복무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강철민은 고등중학교 시절 방학이 되면 금강산에 놀러간 일, 단체로 혁명 전적지나 사적지 답사를 하면서 즐거웠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그 시절 아버지와 함께 무슨 일로 함흥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먹은 함흥냉면 맛을 버마의 전통 커리 맛과 비교하면서 그 맛을 잊지 못했다. 그는 정찰국 신병훈련소에서 수영을 못해 탈락할 뻔했는데 통신교육에서 탁월한 성적을 냈기 때문에 그게 상쇄되어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들은 인민군에 복무하던 중 사상 검증과 신체검사를 받고 나서 최고의 인재들만 들어가는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을 양성하는 정찰국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것이다. 거기서 두 달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고 기본 군사교육을 마친 후에는 육상이나 해안으로 하는 침투하는 훈련과 기타 지독한 훈련 (수영, 군사정찰, 지형학, 산악훈련, 정치학습, 통신교육, 정보학 등)을 받았다.
그리고 소위 계급의 군관이 되었고 군관이 되면 민족 간부가 되기 때문에 당연히 조선로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해야 했다.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기 위해서는 조선로동당 규약과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철저히 학습하고 줄줄이 외워야 했다.
신기철은 그걸 외우는 게 그렇게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그들은 전투원 훈련을 마친 후 군사분계선을 침투하여 밀로 (침투로를 말함)를 개척하고 군사정찰을 실시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침투와 군사정찰은 담력을 기르고 전투원으로서 경험을 쌓기 위한 필수 코스였다. 진선수는 강화도 해안 침투와 군사분계선 침투를 이미 열 차례 이상 했고 강민철은 다섯 차례를 했으며 신기철은 세 번을 했다. 그들은 모두 국기훈장 3급을 받았다.
그들은 조장이 되어 부조장과 조원을 인솔했다. 그들은 AK 소총, 수류탄, 무전기, 사진기 등 침투 장비를 지급받은 후 남쪽 괴뢰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비무장지대 북쪽 초소로 이동해 군사분계선을 넘어 DMZ로 침투했다.
아무리 노련한 전투원이라고 해도 비무장지대를 침투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외줄타기였다. 마치 거품처럼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철조망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그 풍경은 아득하면서도 씁쓸했다. 우거진 풀섶 속에 촘촘하게 설치된 지뢰밭과 여기저기 얽혀있는 고압전선 등 장애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야만 했다.
남한군 휴전선 감시초소 부근 지점까지 접근한 후 그곳에 숨어 있다가 남측 지역 괴뢰군의 경계근무 실태 및 지형을 파악하고 사진을 촬영하며 숨어 있다가 야음을 틈타 다시 이동해서 철수한다.
그들은 전투원으로 오랜 기간 복무하면서 검증을 받은 다음 전투원보다 한 단계 높은 공작원이 되었다.
신기철은 술에 취하면 (그는 술에 약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장군님을 칭송하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메마른 가시밭길 울고 울며 네 왔느냐 / 거친 길 에들면서 외로웁던 시내 / 몰아 불행에 감겨 찢겨진 봄을 시름 놓고 맡긴 곳은 아 인정의 바다 / 사랑의 바다 / 고향은 다르지만 뜻이 같아 뜻에 살고 떠난 곳 어디여도 정에 끌려 정에 사네

진선수는 항상 자신이 조장임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휘자로서 이 사건 모든 공작 임무를 주도해야 하고 그래야만 자신의 공적이 확실하게 부각 될 수 있었다. 그는 사령관이 약속한 2계급 특진에 목말라 있었다. 그가 엄숙한 표정으로 강조했다. “광주 학살의 원흉이야. 우리 인민들의 철천지원수라고.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우리가 그를 처단하는 거야. 역사적 순간이 될 거라고…….”
정민철도 그때는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스릴 만점의 한 편의 장대한 연극이 될 거야. 폭탄이 터지는 순간 그걸 신호로 해서 양곤강 선착장으로 내달릴 것이고 거기서 쾌속정만 타면 되는 것이다.
평양에서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고 2계급 특진을 한다면. 그리고 꿈에 그리던 결혼식을 올릴 것이다. 평양의 대동강 변에 있는 공작원들의 아파트에서 살게 될 것이고. 선미혜는 내가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얼마나 기뻐하실까. 결혼할 나이가 지났다고 그렇게 성화였으니까. 적어도 대좌까지는 무조건 승진이 가능하다. 우리는 그 시절 외출할 때는 가짜 대좌 신분증을 가지고 다니면서 잔뜩 폼을 잡았었지. 내가 통신기술 때문에 교체된 것은 어찌보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틀림없이 그렇다. 그 다음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장군 진급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정년 퇴직하면 연금을 받아서 살 수 있으니까 고향 통천으로 돌아가리라. 어머니 모시고 함께 살고 싶다. 그리고 자주 금강산에 올라가리라.
그날 밤 그는 꿈에 부풀어 잠을 못 이루고 마냥 뒤척이다가 늦게 잠이 들었는데 연이어서 여러 개의 꿈을 꾸었다. 그 꿈들은 모두 금강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금강산 비로봉에 올라갔다. 금강산 만 이천 봉 중 최고봉이 비로봉이다. 비로봉 꼭대기에 올라간 것이다. 하늘은 청명하다. 원산만의 동해 푸른 바다와 어우러진 내금강의 울긋불긋한 봉우리가 저 아래 보인다. 대자연의 웅장함과 숭고한 모습을 보면서 꿈속에서도 연신 탄복했다.

771 특수부대 (일명 강창수 부대)
1983년 6월 초쯤 버마 주재 해외공작 담당 지도원이 극비리에 노동당 본부를 방문했다. 암호명 국화에 대해서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남조선 괴뢰 정부는 대통령의 버마 순방 시기가 10월로 예정되어 있어서 그 계절에 피는 꽃 이름을 딴 것이다.) 공작원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극비 정보는 문서가 아니라 반드시 직접 대면 보고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문서의 경우 행간을 오해해서 잘못 해석할 수도 있고 변조 가능성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문서가 오가는 과정에서 밖으로 새 나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5월 31일 버마 정부 정무총국장이 버마 주재 한국 대사를 초치하여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공식 통보했다.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목표물은 대통령이었다. 다른 수행원들은 죽거나 살거나 상관이 없었다. 대내적으로는 인민들의 단결을 도모하고 공화국의 막강한 힘을 보여주고 대외적으로는 도탄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남조선 동포들에게는 혁명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어떤 모험심을 자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의 경우에도 끝까지 잡아떼고 부인하고 부정하고 남조선의 자작극이라고 밀어붙이면 되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어떠한 사적 감정 없이 사실만을 건조하게 기술하고 있었지만 절대 실패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최고 지도자 동지는 실패라는 단어를 엄청 싫어했기 때문에 보고서에 실패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노동당 35호실은 작전명을 청와대의 뒷산인 북악산으로 명명하고 3주일 동안 세밀하게 작전 계획서를 작성했다. 또한 그 무렵 버마의 외무차관과 의전국장이 방북하여 국화 행사에 대해서 북한의 양해를 구하면서 행사 일정을 설명했으므로 그 일정에 맞춰서 계획을 수정하기도 했다.
그 후 35호실의 작전계획서는 최고 지도자 동지에게 보고되었고 지도자 동지는 일주일간 머리를 싸매고 검토한 끝에 승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작전의 실제 실행은 노동당이 아니라 인민무력부 산하 특수부대가 맡기로 최종 결정되었다.
작성일:2023-08-24 13:37:24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