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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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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외톨이 테러리스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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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3-09-04 12:46:10
조회수
91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771 특수부대의 강창수 사령관은 진선수 소좌 등을 소환하여 앞으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준비를 지시했다. 또한 함께 임무를 수행할 다른 두 명에게도 같은 지시가 내려졌다.
사령관이 말했다. “동무들은 특별히 선발되었소.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요. 알겠소?”
진선수가 대답했다. “정말 영광입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공화국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야만 하지.”
“어떤 임무라도 목숨을 바쳐서 잘 수행하겠습니다.”
“한 치의 착오도 있으면 안 되오. 백번 천번 연습해야 하오.”
특수부대 요원은 키가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된다. 그리고 눈이 작아도 안 되고 너무 커도 안 된다. 너무 쉽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특수부대 요원에 알맞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수행해야 할 특수임무가 대통령을 암살하는 엄청난 것인지 몰랐다. 단지 이 임무가 매우 중차대한 것이고 최고위층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이 작전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직 사령관 혼자뿐이었다. 사실 이 거대한 작전을 치밀하게 준비하는데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랬으니 구체적 작전의 기획과 공작원의 훈련 기간이 두 달에 불과했던 것이다.
직접 작전을 수행하는 공작원들은 물론이고 담당 지도원들까지도 이 작전의 내용과 관련 훈련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알려고 해서도 안 되었다. 그들은 막연히 이번 작전이 남조선의 모처에서 수행되는 것으로만 알았다.
공작원 세계의 대원칙인 단선연계나 분리분할, 횡적연계금지의 원칙이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는 모두 한 부대 소속이 아니었고 특수임무를 부여받기 전까지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공작원들은 처음에는 각기 고립된 가옥에서 담당 지도원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맡은 임무에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그런 후에 합동훈련을 하였다. 특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은 비무장지대 바로 위에 위치한 개성이었다.
그들은 개성의 부대 내 수풀이 우거진 극비 장소에 아웅산 묘소와 비슷한 어떤 건물의 모형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정찰국 내 화학부 소속 폭발 전문가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확한 위치에 신속하게 폭발물을 조립 설치하고 원격으로 조종해서 폭파하는 훈련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또한 정신력을 강화하고 체력을 단련하기 위한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백발백중 사격훈련과 모의 수류탄을 가지고 수류탄 투척 연습을 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소한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됐다. 그 특수한 임무는 정확하게 수행되어야 했다.
그들은 사령관 앞에서 실제 상황을 가정해서 세 번이나 시연을 했다. 사령관은 환하게 웃으면서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렇지. 시간이 너무 짧았는데. 훌륭해. 수십 번 훈련을 한 보람이 있구먼. 자신감을 가지라고. 믿을 수 있으니까 확신이 필요하지.
그런데 말이야…… 모든 동작은 정확하지만 자연스럽지는 못해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요. 실수가 없으려면 심호흡을 가다듬고 여유가 있어야 하오. 여러분은 이미 공화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된 거요. 최고 지도자 동지가 여러분에게 격려를 보냈소.
적에게 사로잡혀서 포로가 되는 것은 공화국에 대한 배신이요. 최후의 총알 한 발, 최후의 수류탄 한 개는 반드시 자신을 위해서 아껴두시오. 알겠소.”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3명은 조장인 진선수 소좌 1명과 조원인 강민철과 신기철 두 상위였다. 버마에서는 진모라고 알려진 진선수는 왼쪽 팔이 잘리고 눈이 애꾸눈이 되는 심한 부상을 입고 체포된 후 버마 수사관들이나 한국 안기부 요원들의 강도 높은 신문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그런 진선수의 모범적인 행동은 특수부대 공작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었다. 머나먼 이국 버마에서 자살 또는 묵비권 행사라는 공작원 세계의 철칙을 끝까지 지켜냈으므로 공화국 영웅으로 숭앙받을 자격이 있었다.
강민철의 본명이 강영철인 것으로 나중에서야 밝혀졌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인 1998년 11월 그를 인세인 형무소에서 면담한 미얀마 주재 외교관에게 밝힌 것이다. 진모 또는 진선수는 김진수였다. 신기철로 알려진 인물은 버마 경찰과 교전 중 사망해서 인적사항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의 본명도 그때서야 김치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이 버마로 떠나올 때 강창수 사령관이 말했다.
“혁명의 영재이시며 조선 인민의 태양이시고 우리의 어버이이시고 경애하는 수령이신 김일성 동지와 어둡던 이 강산에 떠오르는 태양이신 김정일 동지와 조선노동당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자라 온 동무들은 오늘 당과 수령님이 내려주신 최대의 영광된 임무를 부여받고 버마로 떠나게 되었소. 동무들의 장도를 진심으로 축하하오. 동무들은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오시오.
수령님은 동무들에게 2계급 특진과 영웅 칭호를 수여할 것이고…… 또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휴가도 줄 것이고…… 예쁜 아가씨를 고르고 골라서 결혼도 시켜줄 것이오.
동무들! 동무들! 동무들은 위대한 혁명 전사요!
우리에게 부과된 이 엄청난 과업의 성공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그들은 다 같이 건배를 외쳤다.
“위대하신 수령 동지와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강민철은 그때 술에 취해서 불콰하게 붉어진 조장 진선수의 얼굴을 얼핏 쳐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우리 세 사람은 너무 비슷했으면서도 완전히 너무 달랐다. 그래서 서로 대화가 쉽지 않았다. 우리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서로 간에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솔직한 이야기는 불가능했다. 이게 우리 세계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서로 간에 뻔했기 때문에 속일 수는 없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 있다.
그 순간이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나는 그의 명령에 굴복할 것인가 말 것인가? 내가 테러리스트란 말인가? 공화국 역사 속에서 내가 맡게 된 배역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나는 동기생 중에서도 매번 제일 마지막으로 간신히 승진을 했다. 그런데 얼마나 중요한 임무이기에 2계급 특진이라니. 나는 단번에 소좌가 되고 그러면 대좌까지는 따놓은 당상이다. 장군까지 진급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장군이 되면 군모와 어깨에 붙은 찬란한 별이 번쩍번쩍 빛날 것이다.

강민철은 (체포되고 나서 수사를 받으면서) 나중에 한탄했다.
북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계급적 원쑤를 청산하자.
우리는 원쑤에 대한 적개심으로 타끓는다.
돌탕을 쳐 죽이자.”
대통령은 광주항쟁 당시 대학살의 주범이었다. 그는 남조선 민중의 적이고 조선 민족 전체의 적이었다.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그는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만고불변의 역적이었는데……
그런데 그를 놓치고 만 것이다.
아! 이럴 수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실패의 원인을 그 당시에는 우리가 알 수 없었다. 그저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나중에 그 과정을 엄밀하게 분석해보니까 조장인 진모의 어리석은 상황 판단과 외고집이 실패의 원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리모컨은 그의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 사실을 수사를 받을 무렵에서야 처음 알았다. 버마 수사관들이 자백하라고 다그치면서 비아냥거렸다. “너희는 완전 실패한 거야. 그러니까 더 이상 버틸 필요가 없다니까.”
최고 지도자 동지가 노렸던 정치적 효과 면에서 본다면 테러는 완전한 실패였다. 남한 정부의 주요 인사를 다수 살상했지만 가장 중요한 목표인 대통령을 암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 정국의 불안정이나 혼란, 저항운동의 확산 등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테러리즘은 폭력을 이용해서 물리적인 피해보다는 심리적 영향을 확산시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인데 그가 멀쩡하게 살아서 귀국했으므로 목적을 성취하기는커녕 북조선은 테러를 자행하는 불량 국가로 지목되는 역효과를 내고 만 것이다.
나의 무지갯빛 화려한 꿈도 사라졌다. 그 꿈은 목표가 달성되고 내가 살아서 무사히 귀환했을 때 실현 가능한 일이었지만.

양곤강
3인의 특공대는 폭발 후 북한 배로 귀환하기 위해 양곤강가로 도주하였으나 두 사람은 생포되고 신기철은 사살되었다.
양곤강은 버마의 수도 랑군시의 젖줄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랑군의 중서부 지역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내려가서 마르타반 만 바다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까 강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모든 것을 아래로, 더 아래로, 마침내 바다까지 내려보내는 것이다.
진모는 폭발이 일어나고 나서 3명이 함께 행동하면 눈에 쉽게 띄기 때문에 각자 탈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두 부하들에게 절대로 대사관 숙소로 돌아가지 말고 양곤강가에서 만나자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그들이 안전하게 탈출할 방안이나 비상사태를 위한 대비책은 사전에 세운 게 하나도 없었다. 당초부터 테러리스트를 살리기 위한 배려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원래는 쾌속정이 양곤강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강 입구의 태그우드핀 마을까지 데려가기로 되어있었다. 그 후 모선으로 안내할 요원과 접선한 다음 강 하구에서 멀리 떨어져 그들을 기다리는 동건 애국호에 승선해서 귀환하는 것이 그들의 탈출 시나리오였다.
(그 대좌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폭발 후 즉시 양곤강 하류 선착장으로 이동하라. 아웅산 묘소에서부터 양곤강으로 가는 길을 숙지하라.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다. 거기 작은 배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동무들은 다시 동건 애국호를 타고 무사히 평양으로 귀환할 수 있다. 그리고 공화국의 영웅이 될 것이다.)
배는 하구에서 10월 12일까지 그들을 기다리기로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허겁지겁 양곤강 선착장 부근에 도착해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쾌속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쯤이면 랑군 시내에 비상경계령이 선포되었고 군경이 총출동한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들은 범인을 발견하면 가급적 생포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거기에는 버마 특산품인 반항나무 열매 담배, 햇빛 차단용 모자, 모기약, 달걀 꾸러미, 기름에 굽고 튀긴 스낵 등 온갖 물건들을 파는 노점들만 즐비했을 뿐이다.
동건 애국호는 테러리스트들이 애타게 탈출을 기도하고 있을 때 인도에서 비료를 선적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배가 버마에 입항할 수 없고 양곤강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쾌속정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각본대로 각자 양곤강 하구를 향해 탈출을 시도했던 것이다.
진모는 강가에서 있지도 않은 쾌속정을 찾다가 실패하자 낮 동안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며 빈둥빈둥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저물고 밤이 되자 강물에 뛰어들어 강줄기를 따라 하류로 수영을 하면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약속된 지점을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또는 쾌속정이 고장났다고 생각했다. 하류로 더 내려가면 그 마을을 발견할 것이고 거기서 배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2월에서 5월까지 성난 태양은 하늘에서 이글거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열대 몬순 기후가 스콜을 몰고 온다. 우기인 6~10월에는 거의 매일 5시간 정도 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때는 우기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강물이 많이 불어났고 물살도 거칠었다.
강가 진흙 언덕에는 열대 관목들이 무성한 덤불을 이루고 있다. 몇 마리 물소들이 선 채로 느긋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강둑 너머에는 저지대 벼가 심어진 푸른 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아득히 저 멀리 지평선 끝에는 낮은 검은 산맥이 줄지어 솟아있다.
흙탕물이 많이 불어난 거대한 양곤강은 신비롭고 심오하였다. 그 강은 버마인들을 전율케 하는 꿈과 환상과 망상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달이 빛났고 강은 달빛을 받았지만 어둠에 싸여있다. 공기는 매우 후덥지근했다. 늪지에 사는 밤의 가수인 개구리와 두꺼비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그 두려움은 계속 커져서 마침내 공포감이 밀려왔다. 왜? 아니겠는가. 잘려나간 왼쪽 팔에 임시로 헝겊을 감았지만 피가 계속 흐른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강으로 뛰어들었다.
진모는 특수부대에서 단련된 수영 실력, 20킬로미터 정도는 거뜬히 수영할 수 있는 자신의 뛰어난 수영 실력을 믿고 혼자 힘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만이라도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특수부대 출신이니까 자신들 스스로 알아서 잘할 것이다. 그는 굉장한 폭발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고 여겼고 그러면 평양으로 돌아가서 2계급 특진으로 단번에 꿈에도 그리던 대좌가 되는 것이다.
밤 9시경 강변의 한 정박소에 모여 버마 길거리 음식인 ‘람베아샤아샤’를 즐기고 있던 주민들은 웬 남자가 혼자 하류를 향해 헤엄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수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경찰서에 신고하는 한편 그에게 강가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그런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수영을 하면서 나아갔다. 횃불을 든 주민들이 그를 쫓아 강변을 따라가고 신고를 받은 경찰관들은 배를 타고 그의 뒤를 쫓았다.
진모는 접안 시설로 쓰는 니아웅단 제티 (Nyaungdan Jetty) 플랫폼 부근까지 수영하다가 강폭이 좁고 맹그로브 숲이 길게 펼쳐져 있는 꼬불꼬불한 강의 지류로 빠져나가 일어섰는데 그곳의 깊이는 허리가 물에 잠기는 정도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자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들고 위협했다. 그러고는 바로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한동안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가 강에 있던 말뚝에 걸려 멈추었다. 경찰관 한 명이 강물에 들어가서 그를 붙잡고 있는 사이 다른 경찰관이 그의 양손을 묶고 강변으로 끌어냈는데 몸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진모는 그렇게 붙잡혔다. 그러나 잡히기 전에 수류탄 폭발이 있었고, 이때 가까이 있던 버마인 3명, 선원 1명과 어부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진모는 팔꿈치 아래까지 잘려나간 오른쪽 팔에서 피가 철철 넘쳐흐른다. 눈알이 박살난 왼쪽 눈에서도 피가 흐른다.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다. 극심한 통증과 어지럼증이 온몸을 감싼다. 그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의 공포가 어른거린다. 그는 막막했고 사무치게 고독했다.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왜, 그놈의 수류탄이 안전핀을 뽑자마자 터진단 말인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가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을 떴을 때 달은 이울고 하늘에 다시 검은 구름이 가득하였다. 우기의 억수 같은 비가 또 다시 쏟아질 모양이다. 강물이 찰랑거리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진모가 급히 폭발 현장을 이탈한 후 뒤에 남겨진 강민철과 신기철은 역시 양곤강 하류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들은 미행을 의식해서 길을 빙빙돌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쾌속정은 없었다. 그들은 오후 2시쯤 선착장 부근에 도착하고 나서 진모를 계속 찾았지만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강가 노점 식당에서 점심으로 버마식 새우커리와 채소 볶음을 먹으면서 맥주를 서너 잔씩 마셨다.
그들은 쾌속정을 포기하고 나서 그 마을로 가려고 길을 걸어서 계속 하류 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강변에 있는 채소 시장으로 가서 버마식 긴 나무 보트를 한 척 빌려 강을 건넜다. 그러고 나서 강변을 따라 하구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흰 백로들이 목을 구부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길가 풀섶에 외다리로 서 있다.
그들은 탈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불안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서 몹시 피곤에 지치고 배가 고팠고 우선 너무 어두워서 길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는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눈이 아득해지곤 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외국 사람들이 밤길을 걸어가면 현지인들이 수상하게 여길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마침 강가에 모기들만이 살고 있는 빈 오두막 하나를 발견했다. 주변은 물웅덩이가 있는 습지였기 때문에 땅에서 강한 악취가 올라왔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기들이 붕붕 날아다녔다. 맹렬한 모기들이 인정사정없이 물어 뜯었지만 꿀맛 같은 단잠을 잤다. 몇 시간 동안 눈을 붙였지만 먹을거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10일 새벽이 되자, 날이 희미하게 밝아왔다. 강으로부터 짙은 회색 안개가 피어올라 주변 풍경을 감싸 안았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목가적 풍경이었다. 지평선 위로 해가 솟아오르면서 안개는 점차 사라졌다. 녹색비둘기 떼들이 벌써 나뭇가지 위에 모여 앉아 구구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하구를 향해 걸었다. 공동묘지를 지나갔다. 멀리서 소가 끄는 달구지 바퀴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어렵사리 작은 어선에 편승해서 하구로 내려갔다.
그러나 강에서 민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수상하게 여겼기에 기회를 보아 경찰서에 신고할 속셈이었다. 이미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신고해야 한다는 통지가 있었다. 어선이 약속된 장소인 태그우드핀 마을에 가까워지자, 어부 중 1명이 배가 아파서 약을 사야 한다며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갔다. 그 어부는 바로 경찰과 마을 인민위원회에 신고했다.
경찰이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방의 검사를 요구했는데, 그들은 모두 “머니, 머니”라고만 되풀이해서 말했다. 실랑이 끝에 강민철이 주저앉아 갖고 있던 가방 하나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정말 외국 돈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경찰관은 그들을 경찰서 지소로 연행했다.
그곳에서도 경찰관은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다른 가방들을 검사하려 했지만 이를 계속 거부했다. 경찰관은 그들에게 결국 총을 겨누면서 가방을 뺏으려 했다. 신기철은 강제로 가방을 뺏으려는 경찰관과 옥신각신하다 가방에 있던 총을 꺼내들어 경찰관들을 향해 먼저 발포했다.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불꽃이 튀었다. 아찔했던 순간들이 지나간다. 분명히 어딘가 치명적으로 맞은 것 같았다. 짧은 총격전 끝에 신기철은 수발의 총알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면서 바로 사망했다. 그는 그 순간 총을 버리고 항복할 수도 있었지만 계속 총을 쏘면서 저항했던 것이다.
버마 경찰관 2명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소동 중에 강민철은 지소 밖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신기철의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얬는데 온몸에 여러 군데 총상의 흔적들이 끔찍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시체에 불과했지만 신기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바로 그가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1일 오전, 지소에서 총격전이 있고 테러범 중의 한 명이 탈출한 후에 그 마을에는 즉시 경계령이 떨어졌고 경찰과 함께 군부대가 파견되었다.
초가지붕을 한 작은 오두막집 수십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물론 주변지역에서도 물샐 틈 없는 수색이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10월 12일 아침, 똥개들이 나지막하게 짖어대면서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마을에 사는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벌거벗은 한 아이가 수상한 외국인이 강변 갈대밭에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신고했다. 경찰관, 군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그 지역을 포위했는데 강민철은 태그우드핀 (Tagwoodpin)과 크웨인 웨잉 (Kwain Waing) 두 마을 사이 강변 구석 푸른 꽃들이 피어있는 늪지에 숨어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있지도 않은 모선으로 탈출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강민철은 군인들이 가까이 접근하자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고, 그 순간 바로 폭발했으며 왼손 손목이 절단되었다. 그 순간 어떤 군인을 그를 덮쳐 눌렀다.
버마 군인들은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면 가급적 죽이지 말고 생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버마 육군의 젊은 장교가 강민철에게 말했다.
“한국인 일어나라.”
“……”
“빨리 일어나라! 쏘겠다! 쏘겠다!”
온통 피가 튀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하다. 그는 지금 죽는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눈물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자식 노릇 한 번 못해보고……”
강민철은 머리를 두 번 흔들고는 쓰러졌다. 장교가 다시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그가 왼팔을 들어 보였는데 팔뚝 아래 손이 잘려져 나가고 없었다. 장교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는 당황스러웠다. 강민철은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남방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숨 막히게 더웠고 강가에서 풀잎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한 떼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과 점점 많이 모여드는 똥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며 따라왔다.


4. 랑군종합병원
강민철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게 기적처럼 보일 만큼 심하게 부상을 입었다. 그는 랑군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부상을 심하게 당한 버마 군인들 일부는 헬리콥터로 이송 도중 사망했다.
누군가? (아마 시인이었을 것이다.) 랑군 (Rangoon)을 가리켜, ‘피와 꿈 그리고 황금의 도시’라고 묘사했다. 1989년 군사정권은 도시의 이름을 양곤 (Yangon)으로 개명했다. 그래서 버마에서 최고의 의료 수준을 자랑하는 랑군종합병원도 양곤종합병원이 되었다.
그가 병원에 실려왔을 때는 의식이 오락가락했었다. 얼굴과 양쪽 다리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복부에도 중상을 입어서 개복수술을 했다. 왼쪽 팔은 더 이상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팔꿈치 아랫부분에서 절단했다. 그는 버마의 의사들이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잘 돌보아주는 것을 고맙게 여겼다.
진모가 10월 10일 밤 11시경 랑군종합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어 왔을 때는 수류탄이 자기 손에서 미리 터져서 오른손 팔꿈치 아랫부분이 절단되고 왼손 손가락들이 잘려져있고 한쪽 눈은 수류탄 파편으로 실명 상태였다. 복부는 창자, 방광 등이 터져 나와 있었다. 왼쪽 가슴에도 내부 출혈이 심했다. 수술은 8시간 넘게 걸렸는데, 오른손의 일부가 절단되고 눈도 영구 실명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수술에서 회복되고 나서 보니까 청력은 정상이었고 극히 짧은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수술 며칠 후부터 조금씩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처음 음식을 주었을 때, 영어로 빵과 밥 중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묻자 바로 ‘브레드’라고 대답했다. 간호원과 의사들이 그를 친절하게 치료해주자 그는 자주 ‘생큐!’라고 말했다.
강민철도 간단한 영어회화를 할 수 있었다. 군의관들이 영어로 “건강상태가 좋은가” 하고 물으면 ‘예스’라고 대답하고 ‘음식이 맛있는가?’하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들이 치료를 끝내고 나갈 때는 ‘생큐’라고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 몸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면 바로 사망했을 것이다. 또한 웬만큼 건강한 사람이라도 그 정도의 상처를 입으면 고통스럽고 복잡한 치료 과정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진모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강민철은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두 사람 모두 한쪽 팔이 절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민철의 부상은 진모보다는 조금 가벼웠던 것 같다. 그도 역시 한쪽 팔을 절단해야 했고 얼굴과 양쪽 다리, 허벅지 등 복부와 내장에도 부상이 심했다. 그는 왼팔이 절단되는 부상 외에 온몸에 상처가 심했지만 진모처럼 실명이 되지는 않았다. 기이한 것은 두 사람 모두 한쪽 팔이 잘렸고 교전 중에 상대방의 공격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지하고 있던 수류탄으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처음 며칠간은 생포된 진모와 강민철의 부상이 워낙 심해서 치료가 우선이었으므로 피의자 신문을 할 수가 없었다. 진모는 눈, 코, 얼굴과 양쪽 허벅지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왼쪽 가슴에는 내출혈, 복부는 창자, 방광 등이 터져 나왔으며, 왼쪽 팔과 오른쪽 손가락 4개가 잘려 나간 상태였다. 강민철은 코, 오른쪽 어깨, 왼쪽 팔과 손뼈 및 정맥, 복부, 고환, 양다리, 허벅지 등에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들에 대한 치료는 1주일이 걸렸고, 그러고도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문 뒤에야 신문이 시작되었다. 수술 후유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복부에 몇 겹의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매일 여전히 항생제 주사를 맞고 진통 소염제 계열의 약과 소화제 등을 수십 알씩 먹고 있었다.
범인들은 묵비권을 행사하여 신문에 응하지 않았다.
피의자 신문은 처음부터 밤낮을 불문하고 버마 수사 당국이 독자적으로 진행했다. 그들은 국제적으로 파장이 큰 대형 사건이었으므로 너무 초조했다. 한국 측이 범인과의 대질 신문을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다가 10월 25일이 돼서야 처음으로 한국 대사관 직원과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면담을 허용했다. (그때는 어느 정도 치료가 끝나서 회복이 된 상태였고 랑군종합병원에서 육군병원으로 이송된 뒤였다.)
진모는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소좌 계급의 최고 엘리트 공작원이었는데 지금은 수류탄 파편에 실명하여 애꾸눈에다가 오른쪽 팔은 절단된 상태에서 꼼짝없이 체포되었다.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라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 다 불어버릴 수도 있고 침묵을 고수할 수도 있었다.
강민철은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머릿속이 제멋대로 소용돌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침착하려고 애썼다. 지금 어떤 결정적인 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내심 굳게 마음먹고 있었다. 그는 침투 경로에 대해 육로로 왔다, 헬리콥터 비행기를 타고 왔다, 배로 왔다고 횡설수설하는 등 거짓 진술로 일관했다.
하지만 그의 진술은 앞뒤가 맞지 않았고 너무 엉성했다. 이렇게 수사를 받는 상황은 세밀한 작전 계획 속에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훈련도 받은 바 없었다.
그러다가 강민철이 사실을 자백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것은 11월 3일이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명백한 물증들이 나왔다.
강민철은 그때 절망적이었고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 그는 끊임없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 강박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끊임없이 스스로 상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마침내 굴복하고 말았다. ‘될 대로 되라지.’
강민철은 밤이면 그럭저럭 잠을 잘 잤다. 매끼 나오는 버마식 식사는 정갈했고 그가 원하는 대로 많이 먹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매운 양념의 버마식 전통 커리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버마의 노련한 수사관들이 그를 달랬다. 그들은 더 이상 진모는 포기했고 강민철에게 집중했다.
병원 별실 조사실에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버마 수사관 3명과 그가 마주보고 앉았다. 수석 수사관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몸은 어때? 조금도 염려하지마. 버마 최고의 의사가 돌보고 있으니까. 약을 잘 먹으라고. 식사도 잘하고. 의사 말이 아주 좋아지고 있다고 했어.”
“감사합니다. 정말 몸이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습니다.”
“노스 코리아는 매우 추운 나라야. 여기 버마는 아주 따뜻한 나라이지. 모기떼가 극성이지만 지금은 좋은 모기약이 있으니까.
재판은 형식적인 거야. 세계가 보고 있으니까 재판을 안 할 수가 없어. 몇 년 있다가 풀어준다니까. 그러면 예쁜 버마 여자와 결혼해서 잘살 수 있어. 죽을 때까지 평생 연금을 지급할 거야. 신분세탁을 해서 특별히 보호할 거고. 우리가 다 준비를 해놨다니까.
그러니까 빨리 자백하라니까. 자백이 중요해.”
“나는 자백할 것이 없는데요……”
“어제 이미 자백을 했어. 다시 말해보라니까. 당신이 한 말을 확인해보려고 하는 거야.”
“전기 고문인지 물 고문인지 고문을 해도 소용없어요.”
“우리는 고문 같은 거 안 해. 그거 야만인들이나 하는 짓이야.”
“저를 설득하려고 해도 소용없어요. 왜? 살려주니까 보답을 안 하냐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
“당신 말이 맞아……”
“왜? 고문을 안하죠……?”
“그렇지…… 소용없는 일이야. 우리는 끝까지 인격적으로 대할 거야. 자백 안 하면 할 수 없지. 물증이 충분하니까. 빼도 박도 못하게 넘쳐난다고. 남쪽 안전기획부에서 정말 치밀하게 조사했더라고.”
아열대의 후덥지근한 탁한 공기가 온몸에 들러붙는다. 그의 두뇌는 절대적인 진공상태였다가 차츰 정상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는 정체 모를 두려움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그때 그의 감정은 체념과 희망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결국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은 강민철은 수사관들 앞에서 그의 공작 임무를 속 시원하게 다 털어놓았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다. 그래서 수사관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그는 그런 감언이설, 협박, 공갈, 회유 등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자백했을까?
양심의 가책 또는 영혼을 짓누르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역사의 증인이 되겠다는 허영심 때문이었을까? 배신에 대한 유일한 복수는 자백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련한 수사관들의 철저한 조사가 계속 이루어지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치면서 어떤 강렬한 불안감이 덮쳐오니까?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려면 자백을 해야 마음이 가벼워지니까? 어머니가 보고 싶고 고향 통천이 그리워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훨씬 나중에 그의 진실한 고백에 의하면 그는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백했다고 했다.
어쨌거나 강민철은 자백을 하고 나서 마음의 짐을 훌훌 털어버렸기 때문에 그 후에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도 진모와는 대조적으로 생에 대한 강한 애착을 드러내 보였다. 법정에서 자포자기에 빠진 듯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아무런 표정도 없던 진모에 비해서 강민철은 온전하게 남은 한쪽 손이 소중한 듯 교도관이 준 수건을 얼굴에 대고 계속 문질렀고 슬리퍼만 신은 맨발로 몸놀림을 했다.

버마 정부는 폭발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내무종교상을 위원장으로 하는 폭발사건조사위원회를 구성했고 진모와 강민철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외부의 간섭을 완전히 차단한 채 정예 수사관들이 그들을 조사했는데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전혀 조사에 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당초 버마에서는 한국 내부의 불만 세력 혹은 반정부 세력이 저지른 짓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고, 한국 내에서도 모든 것이 대통령의 자작극이라는 허무맹랑한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 그래서 버마 당국은 남한 사람들에게 짙은 혐의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물증들이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 물증들이 우선 버마 수사관들을 동요케 하였다. 그들은 의심을 풀기 시작했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때 처음으로 버마 정부의 허락을 받고 한국 수사관들이 신문에 참여해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냈다. 수류탄 파편 때문에 오른쪽 팔이 절단되고 한쪽 눈이 실명되어 완전히 자포자기한 진모는 계속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강민철은 엉뚱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28세로 남한 출신이고 영등포에서 초 · 중 ·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육군에서 제대한 후 현재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제인가 남조선에서는 서울대학교가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교처럼 유명하다고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속 추궁하자 이내 자신은 성북국민학교만 나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니지 않았다고 답변했고 영등포역 부근에서 살고 있으며 그곳에 어머니가 여전히 살고있다고 했다.
물론 모두 허위 진술이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 당시 서울대학교 학적부를 샅샅이 조사했는데 강민철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추궁했다.
“너무 거짓말이 심하다. 우리가 모든 걸 다 조사했다. 그럴 것까지 없지 않은가?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가? 뼛속 깊이 속을 만큼 속았지 않나?”
“……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뭐가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니까…… 버마 사람들은 우리말을 모르지. 우리끼리 솔직하게 대화하자.”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맨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남조선 괴뢰정권의 주구에게 사실을 말할 의무가 없다.”
“우리는 당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진실이 중요하다. 이미 모든 증거물이 나왔지 않은가.”
“그 증거들은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가짜이다.”
“버마까지 언제 어떻게 왔는가? 그러니까 북한에서 언제, 어느 항구에서 출발했는가?”
강민철은 그 당시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계속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들이 버마에 온 것은 육로를 통해서 왔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윈난성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메콩강을 건너서 태국 북부를 거쳐 국경을 넘을 수도 있고, 중국 윈난성에서 곧바로 버마 쪽으로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빙빙 돌아서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 육지에서는 장거리 시외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알아서 생각해라.”
“버마 당국이 버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 다 조사해 봤지만 그쪽으로 온 게 아니야.”
“다 조사해 봤다면 왜 이렇게 물어보는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배를 타고 왔는데 이를 믿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타고 랑군 국제공항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해두자.”
“이미 모든 증거물이 나왔다니까. 우리도 인내심에 한계가 있다. 제발 헛소리 그만하라니까.”
“누가 이기나 보자. 나는 끝까지 갈 거다.”
“아까운 목숨 버릴 필요가 있겠나? 어떻게 해서든지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있으니까……”
“우리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살아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도움은 필요 없다. 무슨 도움?”
“살고 싶으면…… 살고 싶을 텐데…… 그 젊은 나이에……”
“……”
그때 그는 느긋하게 긴장을 푼 것처럼 보였고 희미하게 악의가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너의 웃음은 새로운 별들을 창조했다 / 우리들에게 보이지 않는 별들을 / 그리하여 너는 미소를 건넬 수가 있다 / 새로운 새들에게, 보기드문 꽃들에게


에필로그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관련 버마 정부의 공식 문서는 개성을 ‘Kay soon’으로, 테러리스트들이 떠난 북한의 항구 옹진을 ‘Aun Sin’이라고 표기했다. 한국 측의 어떤 자료에는 ‘원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황해남도의 ‘옹진’이 맞다.
1983년 (계해년) 2월 25일 북한 공군의 이웅평 상위가 최신 미그 19기를 몰고 남한으로 탈출해 귀순했다.
1983년 5월 5일 중국의 민항기가 당시 적성국이었던 한국에 불시착했다.
1983년 6월 12일 멕시코에서 개최한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 (현재 FIFA U-20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4강에 진출했다.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KBS 1TV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했다.
1983년 8월 7일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 조종사 손천근 소령이 미그 21기를 몰고 한국으로 귀순했다. 그는 8월 20일 중화민국 (대만)으로 망명했다.
1983년 8월 21일 필리핀 야당 지도자 베그니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할 때 마닐라 공항에서 테러리스트에 의해 피살되었다.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상공에서 격추되어 탑승객 269명 전원이 사망했다.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를 방문 중 아웅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17명의 수행원이 순직하고 15명이 부상당했다.
1983년 11월 4일 오후 1시 버마 정부는 첫째, 북한 대사관 폐쇄, 둘째, 북한과 외교관계 단절, 셋째, 북한 정부의 승인을 취소 (derecognize) 한다고 발표했고, 같은 시각 이 사실은 북한 대사에게도 통보되었으며 북한 대사관 공관원과 가족 전원에게 48시간 이내 출국조치 명령이 떨어졌다.
1987년 11월 29일 14시경 버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기가 공중 폭파하여 탑승자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12월 1일 (김정일 친필 지령을 받은) 테러리스트 김현희 (당시 26세)가 체포되었다. 그녀는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식 이름을 썼고 바레인 공항에서 체포 당시 현장에서 공작원의 수칙에 따라 음독자살하기 위해 몸속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앰플 독약을 마셨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나중에 그 소식을 들은 강민철은 매우 흥분했다. 그는 한때 노동당 해외조사부에서 함께 특수임무 요원 훈련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124부대 소속 31명의 특공대원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기습을 기도했다. 그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금은 목사님) 김신조가 말했다.
다시 수류탄을 집어 안전핀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나 마음 저 밑바닥에서 그래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올라왔다. 살고 싶다는 이유 외에 무슨 명분의 치장이 필요한가. 사람이니까. 그 정도 이유면 충분할 것이다.
1997년 2월 12일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북한 권력의 핵심이자 최고위층의 측근인 황장엽 노동당 비서가 베이징 국경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망명에 실패하는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서 입에 삼키려고 독약을 몸속에 지니고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독약을 좋아하는가?) 그가 남한에 정착한 후 증언했다. 아웅산 폭파사건이 일어날 당시 예상외로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김일성은 북한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최고위층은 모르고 있었고 아래에 있는 몇몇 모험주의자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발뺌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버텨야 한다고 반대했고 결국 자신들의 관련을 완전하게 부인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때 이미 김일성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고 김정일이 실세였던 것이다.)

1989년 6월 18일 버마에서 미얀마로 국호가 변경되었다.
2007년 4월 버마와 북한은 국교를 재개했고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죽었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버마 정보부의 고위 간부와 인세인 형무소 교도관이 병원의 사망 진단서를 확인하고 죽은 시신을 살펴보았다.
강민철은 교도소 내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고 그제서야 그의 고독한 영혼은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작성일:2023-09-04 12:46:10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