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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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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외톨이 테러리스트 (2)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8-10 13:48:14
조회수
140
기자 :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했겠네요. 이곳에서 술을 마실 수 있나요? 실제 마신 일이……?

마태 : 나의 정신적 고통은…… 그걸 어떻게 달랠 수 있었겠어?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지. 공공연히 많은 과실주를 담아놓고 있었으니까. 경비들이 모른 체했어.
술이란 그런 거야. 마시다 보면 많이 마시게 되는 거지. 가슴 속의 분노와 슬픔을 불태워버려야 하니까. 엄청나게 마셨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기자 : 마태 님은 북한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 공작원 출신이 아닌가요?

마태 : 외팔이 테러리스트도 연약한 인간이라네.
내가 그때 왜 살고 싶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내가 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왜 살기로 결심했을까……? 수사관들이 나를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자백을 받기 위해서 심하게 고문을 했더라면 나는 반항하면서 차라리 죽기를 바랐을 건데…….

기자 : 시간이 없는 상황에서 틀림없이 모진 고문을 했을 텐데요?

마태 : 그때는 몸이 아직 회복이 안 돼서 만신창이였으니까 고문을 했다면 살아날 수 없었어. 그래서 수사관들은 고문을 삼가한 거야. 그들은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어.
나는 그들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지.
한국에서 온 수사관들을 만났을 때는 정말 반가웠지. 귀찮은 통역 없이 말이 통했으니까. 그렇다고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어.
걔들은 안기부 요원이었어. 우리 공작원들은 걔들을 철천지 원수처럼 생각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반갑더라고.

기자 : 왜 그때 자살하지 않았나요? 기회가 없었던가요?

마태 : 그때 말일세…… 진실을 말하자면…… 진모도 그렇고 나도 최후의 비상 수단인 자살용 극약을 몸속 어딘가에 끝까지 숨기고 있었다네. 우리는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언제든지 쉽게 결행할 수 있었어.
권총으로 자살할 때는 방아쇠를 당기는 손맛을 느낄 수 있겠지만 총알은 너무 빨라. 칼로 흉부를 찌르는 것도 있지. 그때는 흉부 자창에 의해서 과다 출혈로 죽게 되지만 피를 너무 흘리면서 고통 속에 죽게 되지. 독약은 어떤 종류의 매력이 있지.
독극물은 권총으로 쏘거나 칼로 심장이나 목울대를 찌르는 것과는 달리 성공의 확실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네.
독극물이 치사량에 못 미친다거나 몸이 아주 건강하다는 이유, 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몸의 이상 반응에 의해서 독이 듣지 않는 경우도 있지.
내가 알기로는…… 1987년 11월 29일 KAL 858기를 공중 폭파한 테러리스트 김현희가 앰플 독약을 마셨지만 멀쩡하게 살아남아서 결혼까지 했지 않은가.
하지만 독약의 경우 그걸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서 독성이 몸속으로 천천히 퍼질 때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사지가 뻣뻣하게 굳어지는데 동시에 짧은 순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환각을 느끼게 되지. 살아온 인생의 온갖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서 지나간다네. 그리고 아련한 추억에 잠겨서 스르르 눈을 감는다네.

기자 : 그렇게 많이 교육을 받았는데도 결국 결행하지 못했군요.

마태 : 나의 경우 어느 순간 마음이 변하니까 끝까지 살려고 발버둥을 쳤지. 그래서 버린 거야. 그때 ‘내가 뭣 때문에 죽어야 하지’하고 반발심이 일어났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네.
수류탄이 터졌는데 말일세. 그들은 나를 죽일 수 없었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자기 목숨을 보전하는 걸세.

기자 : 그 당시 상황을 좀 더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무거운 발걸음을 힘들게 옮기면서 한동안 서성거렸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을 비난한다. 그리고 다시 앉은 다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한다.

마태 : 다시 말하지만…… 본부는 우리가 양곤강 하구로 도망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곳에 다다르게 한 거야. 거기는 망망대해가 가로막고 있으니까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훈련받은 그대로 수류탄을 터뜨리거나 권총으로 죽어가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던 거야.
또는 말이야…… 버마 경찰이나 군인에 의해서 사살되도록 그렇게 설계된 거야.
쾌속선도 없었고 동건 애국호는 애시당초부터 없었어.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지.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의심해서도 안 되고 질문해서도 안 되었지. 일방적인 명령이 있었을 뿐이야. 우리는 그들의 덫에 걸린 거야.
그들은 우리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고 조작해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완벽하게 지배했어.
그러니까 우리를 그 깊은 강물에 수장시켜서 고기밥이 되도록 의도한 거야.
차라리 너희들이 상황을 판단해서 스스로 탈출하라고 지시했다면…… 우리는 특수부대에서 충분히 훈련을 받았으니까…… 그랬다면 우리는 그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살윈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올라가서 태국이나 라오스로 탈출할 수 있었을 거고 그 다음에는 중국으로 갈 수 있었어.

기자 : 어떻든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저는 마태 님의 남한 송환을 강력히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용 가치도 충분한 것 아닙니까?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증인으로 말입니다. 아웅산 사건의 자초지종을 테러리스트인 마태 님이 직접 증언하면 북한의 잔혹성에 대해 아주 좋은 증거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러나 남한 당국은 북한과의 미묘한 관계를 의식해서 아주 소극적입니다. 웬일인지, 그쪽에 자꾸 굽신거려요.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거죠. 핑계인즉슨 ‘만약 한국이 그를 받아줄 경우 피해자 유족들이 반발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정부 당국자는 마태 님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동정심을 표시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요? 결국은 남과 북의 비극이고…… 분단의 비극인데…….

마태 : 그렇군. 나는 북으로도 남으로도 갈 수가 없는 거군. 북조선보다 남조선에 더 희망을 걸었지.
그쪽에서는 나를 배반자로 생각하겠지만 남조선은 어쩌면 용서하고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네.
남쪽에 대한 무수한 생각들과 감정들은 나도 어떻게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복잡하지.

기자 : 북한은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자결하지 않은 것과 자백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언짢아 할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가족이 처벌을 받았을 거라고…… 남쪽에서는 그 당시 그렇게 생각했더라구요.
그러나 북한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잡아뗐기 때문에 남아 있는 가족을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기쁜 소식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이동생이 탈북하여 지금 남한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누이동생이 맞지요?
북한에서도 미혼이었고 남한에서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북한 당국이 오빠가 훈련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고 통지했지만 누이동생은 이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아웅산 사건을 알지는 못했지만 오빠가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빠가 남파 간첩으로 내려갔다가 죽었거나 잡혔거나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오빠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엄마가 돌아가신 후 탈북을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 함경북도 회령군 인계리 근처 두만강을 건너서 길림성 연길로 넘어온 것입니다. 연길에서 안전보위부 요원들이나 중국 공안들 눈을 피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두만강만 무사히 건넌다고 탈북이 되는 게 아니거든요. 중국과 라오스 국경을 넘은 다음 태국으로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마태 : 아! 이 사진은! 옛날 일만 떠오르고! 이 사진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 많이 변했군. 나는 지금 목이 메어 그 애 이름조차 부를 수가 없군. 기자님의 말씀을 믿어도 되는 건가?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닌가? 동생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지.
그 애를 만나면 죽어도 한이 없겠네. 내 동생은 강미순이야.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피붙이지. 지금 나이가 벌써 오십이 넘었어.
내가 마지막 떠나올 때 그 무렵에는 벌써 노처녀였는데……
그러면 말이야. 어떻게 해서 누이동생을 알게 되었는가? 무척 궁금하군? 약간 의심이 들기도 하고…….

기자 : 제가 오랫동안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을 출입하는 기자였거든요. 그 당시 안기부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어쨌거나 국정원 북한 담당 사람들에게서 어깨너머로 들어서 알게 된 겁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동생이 탈북해서 온 게 작은 화젯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탈북자 일행과 함께 내려왔지만 가족은 없이 혼자 내려온 모양입니다. 오빠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먼저 결혼할 수는 없었겠지요.
정부 당국자는 대외적으로는 극비 사항으로 취급해서 쉬쉬하고 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지요.

마태 : 그러니까…… 더욱 남조선으로 가야할 이유가 생긴 거네. 그 애를 꼭 만나야만 하지. 그 애를 단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네.
오래오래 살고 싶네. 그 앨 만날 희망이 생겼으니까.

기자 : 다시 말씀드리지만, 돌아가면 마태 님의 남한 송환을 강력히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 쪽 사람들을 움직일 만한 힘은 없지요. 일개 기자의 말을 콧방귀나 뀌겠어요? 분명하게 말해서 그들은 마태 님의 송환을 껄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제가 취재한 바로는 버마 당국도 그 태도가 아주 애매모호한 것 같습니다. 오랜 사회주의 우방이었던 북한의 눈치도 봐야 하고 한국의 의중도 알아야 하고 말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나서서 석방을 교섭한다면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인도적인 측면에서는 극악무도한 살인죄를 저지른 죄수의 신병을 함부로 인도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고 버마 당국으로서는 무기징역수로 이미 20년이 넘게 복역한 죄수를 더 이상 형무소에 가두어 놓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버마 법에 의하면 무기수라도 14년이 넘으면 언제든지 석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의 강력한 요청만 있으면 석방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 정부가 강경하게 요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버마와 북한은 국교를 재개하려고 절차를 밟고 있는데 그 문제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당연히 석방을 완강하게 반대할 겁니다. 마태 님이 한국으로 가서 이것저것 불면 그들에게 이로울 게 하나도 없거든요.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 정부가 문제인 겁니다. 한국 정부는 북한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면서 북한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마태 님이 들어오는 게 하나도 반가울 게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정부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거죠.

마태 : 이곳 교도관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만약 너를 받아줄 만한 나라가 나선다면 언제든지 내보내줄 수가 있다. 그런데 너는 갈 곳이 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지.
다시 말하면…… 나는 남으로도 북으로도 갈 수 없는 버림받은 외톨이인 거지.

기자 : 다시, 사건 당시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때 체포될 당시 훈련 수칙대로 자폭을 하지 않고 왜 살아남게 되었나요? 북한에서는 붙잡혀서 사건의 전말을 자백한 것을 두고 배신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북한 공작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손에 무기가 없을 때 혹은 신체의 자유를 잃었을 때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한다는 수칙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때는 혀를 이빨에 물고 자기 주먹으로 아래턱을 강하게 가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결국 출혈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칼이나 총 같은 무기가 있을 때는 자살은 간단하겠지요.

마태 : 그때 우리는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관이어서 던지는 것과 동시에 안전장치를 놓으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었지. 버마 군인들이 몰려오자 그들은 제압하려고 수류탄을 투척하려고 했어. 권총으로는 안되겠더라고.
그런데 안전핀을 제거하자마자 내 손에서 바로 터지는 바람에 팔 하나를 잃어버렸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나는 왼손잡이야. 왼손에 수류탄을 쥐고 오른손으로 안전핀을 뺐지만 왼손은 수류탄의 안전장치를 쥐고 있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터진 거야.
그 순간 나도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을 거야…….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나야말로 북조선 당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지. 그걸 알고는 자살할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어.
높은 양반들은…… 자기 자식들은 애지중지하면서…… 우리는 죽든지 말든지…… 나는 배신에 대해서 배신을 했지. 배신에 대해서 복수를 한 거야. 복수는 꿀처럼 달콤하다고 했는데 그 복수란 게 고작 자백이었어.

기자 : 만약 마태 님이 자살했더라면 북한은 이제 완벽하게 잡아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한국의 자작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마태 : 나는 그 순간부터 자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네.

기자 :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진선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는데요?

마태 : 나는 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냐고? 그게 궁금한 거구만. 내가 배신자고 자백했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봐준 거라네.

기자 : 그렇군요. 남한 정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가 많은 애를 썼어요.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그 당시 군사정권으로서는 진심이었을 겁니다. 북한에 대해서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요.
체포되고 나서 처음에는 완강하게 버텼는데요.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면서…… 그렇지 않았습니까?

마태 : 남조선 수사관들이 참여하여 심문할 때 대충 생각나는 대로 거짓말을 하였는데…… 한계를 느꼈지.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그 순간 영감처럼 희망적인 뭔가 떠올랐지.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 살고 싶었다고…… 인간이 살고 싶다는 이유 이외에 무슨 명분이 필요했을까?
처음에는 의심했어. 과연 살려줄까? 그 일주일 동안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을 했지. 11월 3일 범행 일체를 자백했어.

기자 : 북한 당국에 대한 배신감만으로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살려는 의지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마태 님이 자살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을 때 북한 요원이 병원으로 잠입하여 살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 당시에 있었다고 하던데요.

마태 : 나는 혁명성이 없어서 스스로 자폭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지.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치료를 받고 건강을 되찾는 과정에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지.
그때 병원에서 아름다운 여성 간호사가 나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 준거야. 버마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북한에 두고 온 여동생이 생각나더라고.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먼. 기념품 가게에서 산 선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지. 오랫동안 삶에의 집착을 잃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살아온 거라네……?
그래 솔직하게 다시 이야기하지. 어쩔 수 없었다고. 살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까? 젊은 기자가 인간의 생존 본능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간호사를 볼 때마다 그녀와 몸을 섞는 상상을 했다네. 그래서 새벽이면 그녀와 수없이 몽설을 하였다네. 그때마다 나는 새벽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인간 존재로서 살아있음을 깨달았지.
오랫동안 감감했었는데 버마와 북조선 간에 국교 재개 교섭이 있어서인지 눈에 안 보이는 무언의 압력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네. 그걸 인간의 예민한 감각에 의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야.
또다시 심한 불안증 때문에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네.

기자 : 지금 단계에서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마태 : 극비리에 북조선으로 데려가고 싶은 거겠지. 그게 사실상 납치이고 버마가 눈감아 주는 거야.

기자 : 북한에 데려가서?

마태 : 그걸 강요하겠지. 남조선의 자작극이었다고…… 나는 버마 주재 외교관이었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하였다고…… 기자 회견을 하는 거지.
또는 조용히 데려가서 특수부대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을 하려고 하지 않겠어? 본보기로 말이지.

기자 : 그렇게 까지?

마태 : 그렇게 하고도 남지. 그쪽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네.
나는 지금 어느 정도는 건강하지. 마음만 굳게 먹으면 상당히 오랫동안 살 수 있을 거라네. 그런데 내가 피치 못하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면 결국 자살용 극약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어.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기자 :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지요.

마태 : 그러니까…… 내가 석방되어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군.
간절한 부탁이 있지. 언젠가 동생을 만나면 주려고 간직하고 있는 목걸이와 반지가 있다네. 그걸 전해주게나.
그 애가 심성은 착하지만 그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 되구먼. 자본주의 사회는 험악하다고 하니까 말이야.

기자 :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산가족이랍니다.
할아버지가 흥남 철수할 때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서 내려왔거든요. 우리 모두는 분단의 희생자인 거지요.
지금도 남조선혁명과 조국 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마태 :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런 희망을?

기자 : 그렇군요…… 부디 건강하십시오.
오래오래 사셔야 합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마태 : 트와메노 (안녕히 가세요).


2. 특별 재판
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어서 수도 랑군 지구 사법재판소에서 특별 재판을 했다. 특별 재판의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선고 후 7일 이내에 최고 재판소에 상고할 수 있다.
특별 재판은 랑군공항 근처에 있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단층 건물인 3군 통합 장교회관에 설치된 임시 법정에서 열렸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짧게 깎은 머리카락에 약간의 백발이 섞인 재판장이 검은 법복을 입고 두 명의 배석 판사를 거느리고 법정으로 들어서자 법정의 공기가 부르르 떨며 아연 긴장하기 시작한다.
재판장이 진모, 강민철 두 피고인에 대해 인정신문을 하기 전 버마 경찰의 특별수사본부장인 우 틴 라잉의 사건 개요 설명이 있었다.
피고인들은 버마 형법 제302조, 제301조 및 총기법 제19조에 따라 살인죄, 살인미수죄, 무기불법소지죄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됐다.
재판장은 버마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인민사법위원회법 제6조에 따라 랑군변호사협회 소속 틴 마웅기와 세이 위 등 두 사람을 국선 변호사로 선임한다고 발표했다.
판사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법대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면 왼쪽에 앉은 애꾸눈 진모는 오른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완전히 잘려 나갔는데 하얀 반팔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를 입었고 운동화를 신고 있다. 역시 왼팔이 잘려 나간 강민철은 오른쪽에 앉아있는데 하얀 반팔셔츠에 회색 긴바지를 입었고 샌들을 신고 있다.
진모는 재판관들을 외면한 채로 모노륨이 깔린 바닥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살아있는 한쪽 눈마저 질끈 감고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작은 상처들이 남아있었고 초조한 표정에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들 주위에는 버마 전통 복장으로 남자들이 입는 론지인 체크무늬 빠소를 두르고 상의를 받쳐 입었는데 파낫이라고 부르는 슬리퍼를 신은 교도관들이 피고인들을 각기 에워싸고 앉아있다.
피고인석과 칸막이가 된 방청석에는 재판을 참관하러 온 몇몇 대사관의 직원들과 기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서 수첩을 펴들고 메모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방청은 허용되지 않았다.)
법정 밖에는 소련제 소총을 어깨에 멘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강민철은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놈의 재판이란 말인가? 해괴망측한 일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당초 시나리오에 의하면 지금쯤 동건호를 타고 평양으로 금의환향해서 주석궁에서 최고 지도자 동지로부터 ‘공화국 영웅’으로 칭송받으며 최고 훈장을 받고 온갖 영예를 누려야 하는데.
최고 지도자가 말했을 거 아닌가. “동무들! 공화국의 영웅들이야! 민족의 영웅들이야! 그대들은 민족의 배신자이며 남조선 인민들을 도탄에 빠트린 만고의 역적을 단칼에 처단했다. 그러니 그대들은 영웅이야.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인정신문
1983년 11월 22일 제1차 공판이 시작되었다. 판사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피고인들을 내려다본다. 재판장이 한국어 통역을 통해서 인정신문을 했다. 먼저 진모에 대해 신문이 시작되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
“국적은 어디인가?”
“……”
“생년월일 또는 나이는?”
“……”
“가족관계는?”
“……”
“소속 부대는?”
“……”
“피고인은 북한에서 파견된 북한군 장교라는데 사실인가?”
“……”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유인데 재판 심리와 관련해서 다른 무슨 특별히 할 말은 없는가?”
“……”
“특별수사본부장이 범죄 사실을 설명했는데 어디 틀린 데가 있는가? 그렇다면 지적하시오.”
“……”

재판장이 강민철을 신문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Kang Minchul”
“국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771 특수부대”
“계급과 군번은?”
“북한 육군 상위이며 군번은 9970.”
“생년월일은?”
“1955년 4월 18일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관계는?”
“부친은 강석준, 모친은 김옥선입니다. 부친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특별수사본부장이 설명한 범죄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자유이다.”
“……”
“이 엄숙한 재판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 재판부에 특별히 할 말은 없는가?”
“……”

법정 증언
이 증언들은 1983년 11월 23일 제2차 공판에서부터 12월 1일 제7차 공판 사이에서 나온 총 27명의 증언들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증인들은 검사 측의 주신문에 대해서만 진술했고 변호사의 반대신문도 재판장의 보충신문도 생략되었다.
증인들의 증언은 물증과 함께 범죄사실을 확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증거자료가 된다. 하지만 증언은 법정에서 증인선서를 하고 판사 앞에서 진술해야만 법률이 인정하는 증언의 자격이 있다.
하지만 강민철은 증인들이 증언대에서 선서를 하고 판사를 향해서 진술을 하므로 그들의 뒷모습만 볼 수 있어서 얼굴 모습과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말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당황스러워하는가 아니면 평온한 얼굴인가?
그들은 지금 기억을 샅샅이 뒤져가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진실을 알고 있기는 하는 걸까? 그래서 지금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자각하고 있는가?
누구든지 명백한 범죄 행위에 대하여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의 증언이 있거나 공개된 법정에서 자백에 의하지 않고는 반역죄의 유죄 판결을 받지 아니한다. (미국 헌법 제3조 3항)

우 틴 아웅 (폭발사건조사위원회 경찰국장)의 증언
태그우드핀 마을에서 체포된 코리안은 북한 육군 상위 강민철이며 군번은 9970, 나이는 28세, 아버지 이름은 강석준, 어머니 김옥순이다.
강창수 부대 소속으로 개성 소재 정찰중대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또한 강민철은 이 사건 발생의 전 과정을 상세하게 자백하였는데 그의 자백 내용은 참고인들의 진술, 수많은 물증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진모는 체포된 이후 지금까지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으므로 그의 성은 물론 이름조차 알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입을 열기 위해서 어떠한 가혹 행위도 한 일이 없다. 그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지만 ‘진’이라고 웅얼거렸기 때문에 ‘진모’라고 지칭하고 있다.
진모 등 3인은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 시 아웅산 묘소를 폭파하라는 강창수 사령관의 지시를 직접 받았다.
조장은 소좌 진모이며, 조원은 상위 강민철과 신기철이었다.
범인들은 선박편으로 9월 9일 황해남도 옹진항을 출발하여 9월 17일 또는 18일 랑군에 도착했다. 랑군항의 부두에 접안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랑군 도착 후 10월 22일 2명의 북한인이 범인들을 어떤 주택으로 안내했다. 범인들은 그 주택에서 2주일간 은신하는 동안 자신들의 방에 폭파 장비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10월 7일 오전 2시 범인들은 아웅산 묘소 지붕에 올라가 원격조정 폭탄 2개를 묘소 천장에 설치했다.
범인 3명은 10월 9일 오전, 묘소 근처 위지아야 극장이 있는 거리에서 배회하다가 자동차 행렬이 지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조장인 진모가 폭파 스위치를 눌렀다.
폭발 후 진모는 혼자 도주했으며 강민철과 신기철은 랑군 강으로 가서 소형 배를 이용해 도강하였다. 다음날 버마 경찰들이 범인들을 발견 체포하려 하자 신기철은 수류탄을 버마 경찰에 투척했으며 강민철은 도주했다. 신기철은 총격전 끝에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그는 투항을 권고했는데 끝까지 거절했다.
그 다음날 강민철은 버마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범인들은 10월 12일 북한 선박에 의해 귀환토록 되어있었다.
강민철은 11월 3일 마이 타이 한 군의관에게 범행 일체를 자백할 뜻을 밝혔다. 마이 타이 한 중령은 강민철의 자백 의사를 본인에게 보고했다.
강민철은 자백하면서 랑군시 지도를 보고 자신들이 은신했던 장소를 지적했다. 그곳 주소지는 알론구 트리에타 2번가 154/A호로 밝혀졌는데, 그는 은신했던 집의 구조도 정확히 그렸다. 그 집은 차고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게 돼 있었다. 그는 자기들 일행이 화장실이 붙은 그 집 2층 방에서 잤다고 말했다. 그 방에는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었다.
이러한 진술에 따라 조사단은 랑군 지구 법원 제7재판부 입회하에 11월 10일 그 집에 대한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조사단은 강민철의 은신 장소가 북한 대사관의 전창휘와 2명의 대사관 직원의 주택임을 확인했다. 강민철의 안내로 그 주택을 조사한 결과, 그의 진술대로 차고를 통해서만 집 안으로 출입이 가능했으며 방에서는 그들이 마셨던 종류의 맥주병들이 나오는 등 모든 것이 강민철의 진술과 일치했다.
10월 11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버마 국방성 정보국장, 내무성 경찰국장 등이 입회한 가운데 1차 현장검증을 실시했다.
11월 3일 강민철은 자백했고 그 후 11월 9일 2차 현장검증에서 폭발물 설치 과정을 재현했다.
10월 6일 범인들은 칸다위키 식물원의 벤치에서 잠을 잤으며, 다음 날 오전 2시에는 아웅산 묘소의 지붕으로 올라가 폭탄을 설치하고 묘소 옆 풀밭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8일 범인들은 쉐다곤 공원 서쪽의 위사라 로에 있는 주유소 옆 숲속에서 잠을 잤다.

우밀 몽툰 (버마 국영 항만공사 부장)의 증언
9월 5일 상관으로부터 랑군항에 도착 예정인 동건호에 대한 입항 절차 처리 임무를 부여받았다.
9월 16일, 건자재 하역 목적으로 입항허가 요청을 한 동건호의 입항허가서, 도선사 선임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9월 17일 오후 4시, 그 선박은 랑군항의 술래제티 제6 부두에 접안했다. 9월 18일부터 건설자재 900톤의 하역 작업이 시작되어 21일 오전 0시 20분 종료되었다. 9월 21일, 그 선박의 선장은 출항 허가서를 제출했다.
9월 22일 오전 9시 30분, 항만공사는 그 서류를 선박출입항위원회로 보냈다. 그런데 동건호 선장은 갑자기 그 선박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으로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엔진 수리를 해야한다고 하면서 정박 연장 허가를 요청했는데 선박출입항위원회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다.
그 선박의 선장이 엔진 수리를 하는데 3일이 소요된다고 진술하여 항만공사의 담당자가 선박의 엔진을 검사한 후 3일간의 정박 연장 허가를 내렸다. 9월 24일 낮 12시 30분, 3일간 정박 연장 후 그 선박은 예정대로 출항했다.

우 틴 민 (항만 경찰관)의 증언
9월 20일 오전 7시 30분, 동료 경찰관 1명과 함께 제6 부두 술래제티에 접안중인 동건호에 화물 담당 경찰관으로 배치되었다.
9월 21일 오후 1시 30분, 세관원과 함께 랑군 외항 정박지로 이동한 동건호에서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 22일 오후 1시 35분, 소형 보트가 그 선박에 접근해 오는 것을 목격했다. 같은 날 오후 1시 50분, 소형 보트가 선박과 접선했고 2명의 북한 선원들이 신원 미상자 수 명과 함께 음식물을 운반 중인 것을 목격했다.
그 신원 미상자들은 소형 보트의 선원들로 판명되었으며, 왜 선박이 왔느냐고 질문하자 선원들을 태워주러 왔다고 답변했다.
9월 22일, 3명의 북한인들이 외출 후 선박으로 귀환하지 않았으나 나의 임무는 화물 검사였으므로 선원들의 출입항은 더 이상 감시하지 않았다.

우 밍 셰 (정비공장 주인)의 증언
10월 9일 오전 8시 45분경 중국인으로 보이는 수상한 사람이 정비공장 마당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고 있다고 종업원 마웅 윈 타잉이 보고했다.
종업원은 그 수상한 자가 ‘버마어를 모르는 미친 사람같이 보인다’고 설명하면서 그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같이 갔더니 중국인으로 보이는 그 수상한 사람은 다른 종업원인 아 웅 치와 손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 웅 치는 나에게 수상한 자가 벙어리 같다고 말했다.
버마인들이 흔히 입는 론지 하의를 걸친 그 수상한 사람은 왼쪽 어깨에 버마식 가방을 메고 있었으며, 오른손에는 우산을 든 채 버마 지폐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종업원 아 웅 치는 여기서 뭘 하느냐고 묻자 그 사람이 손가락으로 자기 입을 가리키며 말을 못한다는 시늉을 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아 웅 치가 계속 뭣 때문에 여기 왔느냐고 묻자 치나, 치나! (버마 말로 중국이란 뜻)라고만 되풀이 했다. 내가 종이에 글을 써보이려고 그 사람 상의 주머니에 있는 만년필을 빼내려고 하자 그는 만년필을 낚아챈 후 공장 마당 출입문을 통해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 밖에는 다른 2명의 수상한 자가 있었는데, 한 명은 중국인 같았고 다른 한 명은 일본인 같았다. 그들은 노란색 상의와 밤색 바둑무늬의 버마식 론지 하의, 그리고 하얀색 상의와 검정색 바지를 각각 입고 있었다. 그 후 이들 3명은 위사라 거리로 사라졌다.

저 루인 (제2육군병원 소속 군의관)의 증언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경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 후 한국의 이기백 장군을 포함한 19명의 부상자와 시체가 제2육군병원으로 옮겨졌다. 버마 측 부상자 가운데 병원 도착 직후 1명이 사망했다. 따라서 당시 사상자는 사망 18명, 부상 49명이었다. 한국 측 부상자 16명과 버마 측 부상자 7명의 민간인 및 3명의 군인은 랑군종합병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10월 12일 자정, 상부의 명령에 따라 랑군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더니 파준다웅 강과 니아웅단 부두에서 체포된 범인 두 명이 수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실에는 4개 팀이 대기 중이었는데 나는 진모의 수술을 담당하기로 했다.
상부로부터 반드시 범인을 살려야 한다는 특명을 받았다.
진모 범인을 검진한 결과 눈, 코, 얼굴, 왼쪽 가슴과 복부 및 양쪽 허벅지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오른쪽 팔과 왼쪽 손가락 4개가 절단되어 있었다. 피가 흐르는 상처는 임시로 지혈 붕대를 감고 있었다. 범인은 거의 의식이 없었는데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나는 수술을 해도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봤다.
복부는 창자, 방광 등이 터져나와 있었고 왼쪽 가슴에서는 내부 출혈이 심했다. 왼쪽 눈은 수류탄 파편에 의해서 그 당시 이미 실명 상태였고 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수술은 13일 오전 10시 15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계속됐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그 후에는 항생제 주사와 진통 소염제 계열의 약과 소화제를 계속 투여했다. 10월 15일 오전 7시부터 범인에게 처음으로 음식을 주었다.
진모를 8일간 치료했는데 진모는 영어를 이해하였다. 예를 들면 식사 시에 ‘브레드와 라이스 중 어느 것을 원하는가?’ 하는 질문에 ‘브레드’라고 답변했다. 간호원과 의사들이 진모의 상처를 친절하게 치료해주자 진모는 ‘땡큐’하며 영어로 말했다.
(저 루인 중령은 그동안 치료한 사망자 및 부상자의 관계 서류를 재판부에 제출했고, 검찰 측 대질신문에서 피고인들이 자신이 치료한 환자였음을 확인한 후, 진모의 청력은 정상이며 벙어리가 아니고 두뇌도 정상이라고 증언했다.)

미아 테인 (밍가라돈 육군병원 군의관. 외과 전문의)의 증언
10월 9일 오후 2시경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으로 부상한 버마군인 12명이 육군병원에 이송되었다. 부상자들은 폭탄 파편과 무너진 건물에 깔려 부상한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12일 오후 2시경 버마 군인 부상자 2명과 범인 1명이 랑군종합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나는 종합병원으로 가서 그 범인을 치료했다. 상부로부터 범인을 반드시 살리라는 특명을 받았다.
이 범인의 부상 부위는 코끝과 양쪽 다리, 허벅지 등이었다. 이 범인의 의식은 때때로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왼쪽 팔이 팔꿈치 아래부터 절단되어 있었다. 임시로 봉합한 붕대 사이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이 범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했다. 13일 오전 왼팔은 치료하기에 어려운 상황이어서 팔꿈치 부근에서 절단했다. 복부 내의 창자도 중상이어서 개복수술을 했다.
폭발물이나 총기에 의한 외상 수술은 생과 사가 순간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정말 어렵고 긴장된다. 수혈은 응급 상황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이 환자는 장기 손상이 심해서 감염이나 혈전증같은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모든 의사와 간호원들이 이들 범인의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잘 돌봐주어서 그런지 범인은 진정으로 고맙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범인은 영어로 글씨를 쓸 수 있게 되면 모든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했다. 11월 3일 이 범인은 자백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해, 나는 이 같은 사실을 군사위원회에 보고했다. 이날 랑군 지구 인민법원은 범인 강민철의 자백을 공식 접수했다.
(이 증인은 증언을 끝낸 후 범인에 대한 병원의 치료 관계 서류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검찰 측 대질신문에서 증인은 강민철을 지적하면서 병원에서 자백할 의사를 보인 자라고 말했다.)

마웅 마웅 (90보병연대 중위)의 증언
10월 11일 강을 차단하고 범인을 수색했다. 10월 12일 오전 7시 30분경 마을 주민 마우 마웅 예린의 신고에 따라 범인이 태그우드핀 마을과 크웨인 웨잉 마을 사이에 위치한 강둑에 숨어 있음을 확인하고 수색에 나섰다. 이날 오전 9시 15분 범인을 발견했다는 부하의 보고를 받고 그 장소로 달려갔다.
강둑의 늪지에 숨어 있는 범인을 발견했다. 1명의 군인이 30야드 정도까지 접근했을 때 범인은 왼손에 수류탄 같은 것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 순간 범인은 오른손으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았고, 나는 부하들에게 순간적으로 ‘폭탄이다!’라고 소리친 후 땅에 엎드렸다. 수류탄이 터진 후 주위를 돌아보니 부하 탄투위가 범인을 덮쳐 누르고 있었으며, 부하 타잉 라잉과 묘 라잉은 부상했다.
범인은 땅에 누운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버마식 하의를 입고 허리에 25구경 권총을 차고 있던 범인은 누운 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돌려 주위를 돌아보기도 했다. 범인을 향해 내가 ‘코리안! 코리안! 플리즈 스탠드업!’이라고 말하자 범인은 머리를 두 번 흔들고는 쓰러졌다.
다시 영어로 명령하자 범인은 왼손을 들었는데, 자세히 보니 손목이 절단돼 있었다. 그 범인은 나중에 즉시 랑군종합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부하 여러 명이 범인에게 다가가 그를 어깨에 메고 연행하여 상관에게 인계했다. 범인은 복부와 허벅지에 중상을 입어 운반하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부하 3명이 사망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웅 탄 (폭발물 검사관. 육군 소령)의 증언
육군학교 폭발물 전문가 마웅 마웅라 대위와 국방성 운수산업과 소속 웅 마웅 대위와 함께 니아웅단 부두와 태그우드핀 마을에서 수거된 수류탄을 조사한 결과 모두 동일한 것이었고, 이 수류탄들은 같은 군수공장에서 제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강민철과 진모의 몸에서 제거한 파편도 모두 같았고, 이 수류탄들은 버마 내 반정부 게릴라들이나 버마군이 사용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수류탄들은 버마에서는 본 적이 없는 특수한 것들이었다.
보통 수류탄은 1개의 철뭉치로 되어있어 폭발 시 껍질이 파편으로 분산되는데, 이 수류탄은 이른바 shrapnel bomb이었다. 이 같은 유형의 수류탄은 1975년 「제인 보병무기 연감」 638페이지에 북한제로 소개된 폭탄과 동일한 것이었다. 또한 니아웅단 부두와 태그우드핀 마을에서 발견된 수류탄 폭발 장치도 같은 것이었다. 심지어 수류탄 일련 번호도 ‘141-69-101’로 같았다. 이 번호 중 ‘141’은 동시 생산 번호이고, ‘69’는 제조 연도, ‘101’은 제조 공장 고유 번호이다.
이 같은 증거에 비추어 2명의 범인은 동일 집단 소속임이 분명하였다. 수류탄 속에 든 폭약은 TNT 타입의 고성능 폭약이었다. 수류탄 1개에 든 폭약 무게는 5.5온스, 수류탄 안에 든 파편은 치명적인 성능을 지닌 것이며, 수류탄의 살상 거리는 15~20m로 밝혀졌다.
작성일:2023-08-10 13:48:14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