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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외톨이 테러리스트 (1)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8-10 13:47:51
조회수
121
외톨이 테러리스트




절대의 고독, 그것이 그대의 운명이다.



1. 인세인 형무소
인세인 형무소 (Insein Prison)는 영국 식민지 시절인 1887년에 지어졌다. 군부 독재 시절 수천 명의 정치범을 수용했다. 열악한 환경과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별칭이 지옥의 형무소 (Darkest hell-hole in Burma)이다. 인세인은 거대한 원형으로 고대 백제의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 (前方後圓墳)을 닮았다. 원형의 정중앙에는 동그란 모양의 건물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형장이다.
철조망이 둘러쳐진 감옥의 퇴색한 콘크리트 담벼락 위로 으스스한 망루가 보였다. 밤이면 감시탑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시간 간격을 두고 허공을 가르다 사라질 것이다. 육중한 회갈색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면회실이 있었다. 그 면회실을 지나서 뒤쪽으로 붙어 있는 작은 방에서 낡은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지금 50대 중반을 넘어섰다. 벌써 23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젊은 청춘은 꽃도 피우지 못하고 감옥의 회색 벽 속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주름투성이 얼굴에 고독과 함께 세월의 흔적이 배어있다.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절단되었지만 마른 체격이고 다부지고 머리는 짧게 깎았다.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보인다.
과연 그럴까. 무기수의 운명이란? 남은 평생을 독방에 살다가 삶을 마감해야 하는 인간. 삶의 반려자가 고독과 고통뿐인 인간. 이 깜깜한 벽 안에서 20년을 넘게 갇혀 있었으니.
그러니까, 그에게 지금도 아직 희망이,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일까? 어머니, 여동생, (만약에 연인이 있었다면 말이다) 연인에 대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또는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멀어지는 게 아닐까? 아직도 그리움과 향수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 남아 있을까? 지금 고국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자신에게 고국이 있기는 한 것일까? 고국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자신을 철저히 버렸지 않았는가. 인민과 공화국, 그 거대한 이름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증오할 것이다.
이제 점점 늙어가고 몸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다.
갑자기, 문득 생각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스스로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닐까? 나는 허깨비가 아닐까? 나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이리라.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라고. 그리고 여전히 밤마다 악몽을 꿀 것이다.
끝없는 외로움과 고통.
그리움과 상실.
절망과 희망.



기자 : 밍굴라바 (안녕하세요).
면회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그렇지 않은가요? 저는 남조선에서 온 이인원 기자입니다.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아마 기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겠죠?

마태 : 여기까지…… 멀리 발걸음을 한데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시간도 얼마 없을텐데 입에 발린 인사말은 치워버리지.

기자 : 면회 시간은 어느 정도는 충분합니다.
그렇게 손을 썼거든요. 마실 걸 좀 준비했습니다. 술은 반입이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홍차 잎을 우려내서 설탕과 연유를 넣은 달콤한 맛이 나는 라팻여라는 버마 전통차와 밀가루와 콩을 갈아 튀긴 스낵인 뻬져, 향기가 좋으나 당도가 그리 높지 않은 미얀마 귤을 가져왔다.

마태 : 뭔지 모르지만…… 물어볼 말이 많은가 보지.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되네. 말을 돌리지 말라는 걸세. 우리는 지금 진실해야 하네. 내가 진실을 말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네만. 어떤 게 진실이라고 주장해도 한 번쯤 걸러져서 다듬어진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렇게 알게나…….

기자 : 버마에서 타자웅몬에는 우기가 다 끝난다니까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무더위는 누그러지고 산천초목은 변함없이 푸르릅니다. 세월이 하염없이 흘러갔네요.
그 당시는 버마였지만 1989년 6월 미얀마로 바뀌었지요. 여기 랑군시는 양곤시가 되었고요. 그런데 작년 11월에 느닷없이 미얀마 중부의 신생 도시인 네피도를 새 수도로 지정했어요.
지금 정부 기관들이 옮겨 가면서 도시가 전체적으로 너무 어수선하더라고요.

마태 : 그렇다네. 그런 일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아직 새파랗게 젊은 양반이네. 나하고는 한 세대 차이가 나니까 아들뻘이네. 그렇지 않은가? 나는 얼마 안 있으면 육십이 된다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노쇠하고 허약해질 나이가 된 거지.

기자 : 그때 세 사람이 버마로 왔어요.

마태 : 그렇지. 무슨 운명인지 우리 셋이 그때 처음 만나서 왔지. 우리는 소속 부대가 달랐어. 물론 얼굴도 다르고 신체적 조건도 다르고 성격도 차이가 났지. 신기철은 너무 고지식했어. 함경도 출신이어서 함경도 말씨였어. 평양 문화어로 고치려고 무던히 애를 쓴 모양이지만 가끔 튀어나왔지.
하지만 출신 배경은 모두 같았지. 밑바닥 농촌 출신이었어. 평양의 높은 양반들 자식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공작원이 될 수 없지.

기자 : 마태 님의 나이는 그 당시 28세로 되어있던데요?

마태 : 내 나이는 그 당시 34세였네. 그런데 28세로 되어버렸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 필요했으니까 그대로 넘어간 거지. 진모는 나보다 6살 위였고 신 상위는 4살 아래였으니까 내가 중간이었지.
하지만 그들 나이도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네. 공작원의 나이는 알 수 없으니까.
키는 내가 171센티미터이고 진모는 160센티미터야. 몸은 돼지처럼 통통하고. 나는 그런 진모가 조장인 게 정말 싫었지.
이미 죽은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건 꺼려지네만…… 이해해주게. 상황 판단력과 대처 능력에도 문제가 있고 인간성도 너무 부족한 꾀죄죄한 인간이었으니까……. 그는 끝까지 자신이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입을 다물었다네. 추측건대 그 나이에 벌써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진짜 어떤 사정으로 결혼을 안 했을 수도 있고 결혼하고 나서 이혼했을 수도 있지.
공명심에 불타고 질투심이 강하고 진짜 의심증 환자였지.
어려운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 사이에서 인간적 신뢰, 동지애, 희생정신, 감정적 유대감이 필요했지.
우린 급조된 팀이어서 그럴 기회가 없었다네.

기자 : 그런데 갑자기 진모가 됐는지 궁금하지요?

마태 : 나도 그게 궁금하지. 전 소속부대에서 공작원 가명이 진선수였다네.

기자 : 그래도…… 북한에서는 진모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겁니다.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자신들은 그 사건과는 무관하다고 잡아떼는 마당에 그를 공개적으로 영웅으로 대접할 수는 없었겠지요. 아주 비밀리에 최고 훈장을 그의 가족들에게 수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 : 왜? 날 만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테러리스트로 보이지 않는가? 또는 살인마로……? 험상궂고 잔인하게 생긴…….
기자님이 지금 보고 있는 것처럼 왼팔은 팔꿈치 아래가 절단되었지. 그것뿐만이 아닐세. 복부, 오른편 어깨, 양쪽 다리와 넓적다리 등 어느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네. 온몸이 상처와 수술 자국투성이지. 그래도 거시기는 무사하다네.
저고리를 벗고 몸통을 보여줄 수도 있지.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으니……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잘살고 있다네. 인간은 적응하면서 사는 거지.

기자 : 그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겠지만 잘 버티신 겁니다.

마태 : 버마는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주의 국가야. 언론인들의 입국과 취재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그게 가능했는가?
더욱이 남쪽 기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기자 :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죠? 들어올 때는 취재 비자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어렵사리 상용 비자를 얻었습니다.
면회 신청은 약간의 뇌물을 주고 외교관 행세를 했지요.
인세인은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거대한 감옥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더군요. 영국인들이 세운 이 감옥이 말입니다.
양곤 순환열차를 타고 인세인 역에서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 인야 호수 근처의 오래된 인야 레이크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 기자들이 묵었던 호텔이지요. 호수 주변에는 우리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양곤대학교가 있더군요.

마태 :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새삼스럽게 나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너무 늦지 않았는가? 이 폭발 사건은 깜깜한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일어난 게 아니야. 대명천지 대낮에 일어났지.
그러니까 아직도 숨겨진 게 있을까?

기자 : 한때 남한 당국에 강민철이 자폐증으로 고생하다가 폐인이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지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지요. 물론 진짜 그런 건지 반신반의했다고 합니다만……

마태 : 그 무렵 나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각한 위기가 있었다네. 갑작스럽게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땀이 비오듯이 쏟아지는데…… 감방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고 사방 벽들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어. 목이 조이면서 가슴이 쥐어짜이는 강렬한 느낌이 나를 덮쳤지. 그래서 실어증에 걸리고 며칠 동안이나 잠을 잘 수 없는 불면증에 걸리고 말았지.
나중에 들었더니 그게 일종의 폐쇄공포증이라고 하더군. 그러니까 갑작스러운 자폐증은 아니었어. 그때 도저히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단단히 죽을 결심을 했지. 죽느냐 사느냐 그게 심각한 문제가 되어서 나를 괴롭혔지. 감옥 속에서 사는 삶이 지루하고 무의미했거든. 나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야 했다네.
나는 특수공작원 출신으로 자신을 살해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지. 그 무렵에는 거의 매일 밤낮으로 죽음을 생각했어. 악몽을 꾸면 칼날이 몸을 뚫고 들어오고 피부가 찢기면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피가 철철 흐르는 거야.
하지만 결론은 사는 거였어. 생명은 귀중했어.
그때 하나님이 말씀했으니까. “하나님은 부르는 소리보다 흐느낌을 먼저 들으신다.”

기자 : 이런 말씀 드리기는 죄송하지만…… 저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했을 텐데요.

마태 : 20년이 넘게 독방에 갇혀 있었으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외톨이였다네. 거대한 인세인 감옥의 별채 옥사에 있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작은 1인용 독방이라네.
그 방에는 쥐와 바퀴벌레가 배수구를 타고 수시로 드나들고 우기에는 붉은 개미 떼가 문틈으로 기어들어 왔지. 그것들이 나의 친구들이고 말벗이었네.
그랬으니 뿌리가 뽑힌 가련한 영혼이 되고 말았지. 육체는 병들어가고 정신은 썩어서 권태에 빠져버렸지. 한동안 알코올 의존증이 되고 우울증 환자가 되고 모진 절망 때문에 정신병자가 되었지.
그러면서 매 순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거야.

기자 : 그런데…… 하나님의 힘으로 그걸 견뎌내셨군요?

마태 : 그렇다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훌륭하다네.

기자 : 북조선 공화국에 대한 미련이 아직도 남아있는가요?

그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얼굴과 목에 홍조가 번진다. 갑자기 복받친 분노 때문에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 박동이 쿵쾅거렸다. 그는 이 귀중한 대화를 이어가려고 심호흡을 했고 안정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그는 앞에 놓인 라팻여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마태 : 기자 양반…… 평생을 속아서 살아온 나를 이해해주게.
사회주의 조국이니 강성대국 건설 같은 허황된 구호에 진절머리가 나지. 그들이 입이 침이 마르도록 선전하는 사회주의 낙원은 낙원이 아니라 지옥일 뿐이야.
거짓말도 반복해서 말하면 진짜 진실이 된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북한의 현실이야. 우리가 믿는 그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기극이라고 할 수 있네.
내가 오랜 세월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은 그거야.
지금 돌이켜보자고……. 그래도 내 조국인데 그들이 나를 헌신짝 버리듯 버렸지 않은가.
가슴이 아팠던 건…… 내가 목숨을 걸고 젊음을 바친 특수부대가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인한지를 직접 경험했다는 거지…….
그걸 알게나. 테러리스트도 한때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고 인간적인 꿈들이 있었다네.

기자 : 시간이 없어서 본론 쪽으로……
그 사건이 1983년에 일어났는데 지금이 2006년이니까 벌써 23년이 훌쩍 지나갔네요. 돌이켜보면 1983년은 국가적으로 다사다난한…… 어찌보면 참으로 비극적인 한 해였어요.
그해 9월 1일 새벽에 소련 미그 전투기가 소련 영공으로 잘못 들어온 대한항공 여객기 KAL 007편을 미사일로 격추했지요. 이 사건으로 승객과 승무원 269명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저는 그런 사건이 일어날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했지요. 그랬으니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만나서 취재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한 선배 기자님들과 정부 관계자들, 그때 함께 간 생존한 경제인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를 했고 옛날 신문기사와 정부 기관의 공식 보고서, 버마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버마의 순교자 묘소 폭파사건에 관한 재판 등을 열심히 읽어서 사건 내용을 자세히 파악했지요.

마태 : KAL기 격추 사건은 충격적이었지. 하지만 우리에게 뭔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지. 우리는 그때 중대한 임무를 띠고 어디론가 떠나려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네.

기자 :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감옥에서 20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지낼 만하다는 건가요?

마태 : 오랫동안…… 정신이 분열되어서…… 나의 몸에는 두 개의 영혼이 공존하면서 대립하고 화해하고 다시 티격태격 싸우고. 그건 아주 지루한 싸움이었어. 하나는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직 특수공작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본래의 나라는 인간이었다네.
벽 속에 갇혀서 10년쯤 지나니까 양립이 불가능했어. 공작원의 영혼은 차츰 지워졌고 인간 본래의 모습만이 남았지. 그걸 지우는데 10년이 걸린 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까.
그때쯤부터 더 이상 꿈속에 DMZ에서 군사 정찰을 한 일, 그때 우리 전투원은 지뢰를 밟거나 어디선가 날아오는 총알을 막고 수없이 죽어 나갔지. 폭파 훈련, 배, 이층 방, 검은 혀를 날름거리며 엄중한 지시를 내리던 대좌, 시커멓고 회색인 폭탄, 권총, 타원형의 검은 쇠뭉치, 탑, 묘소, 섬광, 폭발음, 강, 바다, 병원, 지겨운 인간들이 나타나지 않았다네.
정말이지 어느 순간 그것들은 감쪽같이 사라졌어.

기자 : 버마 음식은 어떤가요. 지금쯤 입에 잘 맞는 거 아닌가요?

마태 : 그렇디. 잘 먹고 지내디. 오래 살다 보니까 버마 음식이 내 입에 잘 맞지 않겠어…… 미얀마의 전통 커리 라든가, 채소 볶음, 길거리 음식인 람베아샤아샤, 미얀마의 열대과일을 먹을 수 있거든. 버마에서는 소고기, 양고기, 양 내장, 닭고기, 돼지고기, 생선, 새우, 피시볼 등등 온갖 종류의 커리 음식이 일품이라네.
귀국하기 전에 꼭 한번 맛보고 가게.

기자 : 처음에는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육군의 특별 감옥에 있었다고 했는데요?

마태 : 재판이 끝나고 나서 육군에서 운영하는 특별 감옥에서 1년간 있었다네. 그러고 나서 이곳으로 옮길 수 있었지. 내가 고분고분하니까 탈출할 염려가 없다고 본 거겠지.

그는 육군 감옥에서 이송되던 날 아침 일찍 소지품을 비닐봉지에 넣고 나서 검사실에서 옷을 벗고 허리를 굽혀서 엉덩이를 벌리고 항문까지 보여준 다음 발목에는 족쇄를 차고 수갑을 찬 손목은 단단한 포승줄로 허리에 묶인 채 호송차에 올랐다.
호송 버스에는 죄수는 그 혼자였고 열 명이 넘는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그를 엄중하게 호위했다.
인세인 감옥에 도착해서는 먼저 신입 수감자들이 들어오는 검사실에서 다시 한번 검사를 받았는데 분류 담당자에 의해 외국인 특수 수감자로 분류되어 별채 1층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수갑과 족쇄가 풀렸다.
감방 안에는 매트리스가 깔린 시멘트로 된 좁은 침상이 오른쪽 벽에 붙어 있고 변기는 뒤쪽 벽에 붙어 있고 작은 나무 탁자와 의자가 왼쪽 벽에 붙어 있었다. 앞쪽 철문 옆으로 격자무늬 쇠창살로 막은 작은 창문이 있고 그 창문 너머로 나무가 우거진 정원이 보였다. 석양이면 햇빛이 비스듬히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기자 : 북한 출신의 외국인 정치범이니까 여기서도 좀 특별한 독방에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게 들었거든요.

마태 : 이곳은 인세인 감옥 내에서도 주로 중요 정치범과 외국인 등 특별한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지. 이 특별 감옥은 특수 수감자들이 들어있는 별채이고 실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정원도 있다네. 노역은 면제돼 있지. 언제든지 운동도 할 수 있고.
나는 외국인 정치범으로 분류되었으니까 일반 죄수들보다는 여유도 있고 식품 공급도 훨씬 나은 편이지.
여기는 악명 높은 지옥의 형무소야. 버마 수감자들은 무슨 일로 한번 찍히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한 고문을 당하고 며칠 동안 음식을 주지 않으니까 굶어서 죽기도 하지.

기자 : 그래도 상당히 좋은 대우를 받은 거군요.

마태 : 감방 냄새와 사람들의 냄새에 익숙해지니까 감옥이 별천지 같았어.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래서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거든.
나는 작업이 면제되어 있으니까 많은 책을 읽을 자유도 있고 생각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수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까 어떤 깨달음이…… 지혜가…… 관점이…… 따라오더군. 때늦은 거였지만. 진실은 수많은 책 속에 들어있어. 다시 말하지만 여기 감옥보다 훨씬 더 한 감옥인 강성 대국보다 백배 천배 좋다네.
노련한 수사관들한테 밤낮으로 들볶이며 조사를 받는 일이라던가…… 재판관들의 경멸어린 시선을 받으며 재판을 받는 일과도 비교할 수 없다네.

기자 : 제가 알기로는 버마 말을 아주 잘한다고 그러던데요?

마태 : 이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죄수들을 만났디. 그들은 거의 전부가 버마 사람들 아닌가. 버마군 탈영범 출신으로 이 감옥에서 5년 동안이나 사역병으로 일했던 죄수로부터 버마 말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네. 이제는 버마 말을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쓸 수 있지.
하지만 버마말은 할 수 있어도 버마글은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지. 거기에 나의 한계가 있다네.
그러나 버마 말을 할 기회가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어. 말 한마디 못 하고 지내는 날이 허다했지. 똑같은 날의 반복은 매우 고통스러웠어.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나서 자신에게 침묵을 강요했지. 어떤 때는 몇 달 동안 말 한마디 못 하고 또는 안 하고 지내야 했으니까.
그런데 말을 안 하니까 일종의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는 거야. 한동안 확실하게 기억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서 계속적으로 하루종일 내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정원을 맴돌면서 걸었지. 걷고 또 걸었어. 그제서야 기억이 돌아오더라고.
여전히 조선말이 그립지. 너무 그립다고. 한때는 너무 외롭고…… 조선말이 너무 그리워서…… 조선 말이 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 되니까 병적 강박증에 사로잡혔지.
인간에게 말은 너무 중요해. 언어는 신성하지. 언어는 예술이기도 해. 말을 안 하니까 혀에 설태가 끼고 입에서 악취가 풍겼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어.
그건 중얼거리는 거고 독백이고 고백이고 기억이고 회상이었지.
하지만 곧 싫증이 났어. 그다음에는 터져 나오는 그렇게 많은 말을 감빵 벽에 대고 중얼거렸어. 그래도 너무 아쉬워서 벽에다 발길질하고 비명을 질렀다네.
감방의 회색 벽에는 내게서 터져 나온 무시무시한 비명, 저주, 고통의 절규가 새겨져 있을 거야.
내가 조선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감옥에 들어오고 나서 15년이 지났을 때야. 그전에는 아무도 면회 온 적이 없었고 영치금을 넣어준 사람도 없었다네. 형무소에도 매점이 있고 암시장이 있으니까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암시장에서는 치약 비누 음식물 술 속옷 옷가지 신발 담요 침구 담배 등등 온갖 생활필수품이 거래되고 물물교환 되지. 마약도 얼마든지. 하지만 담배가 제일 중요하지. 그게 현찰 역할을 하니까.

기자 :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아가서 북한에 있을 때 어떻게 해서 특수부대 장교로 뽑히게 되었는가요?

마태 : 나는 날라리였지. 그러니까 잘생기고 잘 놀고 공부도 모두 잘했지. 그래서 군대에 가서 특수부대로 뽑혔고 특수부대의 장교가 되어 상당히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지. 하급 장교에서 간부급으로 올라가는 거니까. 우리는 외출할 때 대좌 신분증을 갖고 다녔지.
남쪽에서는 대좌는 대령이야.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는 계급이지.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닌 거야. 우리에게 선택권은 없어. 그들이 강제로 선발한 것이라네. 그렇다고 마음대로 빠져나올 수도 없지. 그건 죽음을 의미하니까.
여기 올 때도 그들이 강제로 선발한 거야. 나는 사상과 이념이 투철한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야. 가슴이 콩알만 한 겁에 질린 사람일 뿐이지. 여기 올 적임자가 아니었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날라리였으니까 인생 자체가 출발이 늦었어. 동기생 중에서도 진급이 꼴찌였다니까.
처음부터 선발된 것이 아니라 통신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막판에 교체로 들어온 거야. 내 주특기는 통신 기술이거든.
지금 돌이켜보면 운명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기자 :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지요? 가족사항은 어떤가요?

마태 : 나는 통천군 통천읍 대곡리 출신이야. 통천은 바닷가니까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지. 남쪽은 금강군과 맞닿아있으니까.
부친은 내가 군에 입대할 무렵에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 그리고 내가 떠날 때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지.
버마로 떠나오기 직전 특별 배려로 집에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아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네. 그것이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지.

기자 : 그때 가족들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지 않았던가요?

마태 : 가족들에게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의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기자 :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요?

마태 : 정말, 어머니가 그립지. 어머니는……. 어머니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제 모습을 보고 ‘네가 정말 많이 컸구나.’ 하며 대견해 했지.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임무이긴 하지만 편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무척 노력했지.
어머니가 왜 모르겠어? 어머니인데.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떠나올 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더군. 그리고 “네가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하나님이 너를 보살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
어머님이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였으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정말 잘 보살펴주신 것이지. 혼자서 살아남았으니까……

기자 : 북한에 있을 때 혹시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 친구가 있었던가요?

마태 : 잠시나마 결혼을 단단히 약속한 여자 친구가 있기는 있었다네. 내가 떠나올 때는 평양에서 인민학교 선생님이었어. 그러나 육체적인 접촉은 없었지. 대동강 변을 밤에 데이트할 때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지만 지금은 후회하지. 그때는 여자의 마음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했거든. 여자가 내 손을 꼭 쥐었을 때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까지…… 믿을 수 없겠지만 성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숫총각이란 말이지.

기자 : 그 여자 친구가 마태 님의 이 모진 운명을 알고 있을까요?

마태 :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으니까……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서 잘살고 있겠지.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네.

기자 : 끝까지 기다릴 수도……?

마태 : 이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면서 그렇지만 가장 깨지기 쉬운 것이 둘이 있다네. 하나는 여자 마음이고 또 하나는 도자기라네.

기자 : 북한에서는 특수 공작원이 임무 수행을 위해서 떠날 때 특별한 환송연을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때는 어땠는가요?

마태 : 초가을이었어. 무척 뜨거웠던 여름이 한물갔었지. 우리가 떠날 때도 당연히 부대 안에서 환송연을 해주었다네. 식탁에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소련제 보드카와 북조선의 인삼주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우리는 인사불성이 되게 마시고 다 때려 부쉈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꼭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았거든.
인간의 예감이란 게 무서운 거야. 그렇다니까. 안 그런가?
나는 그때 조장의 그 거만한 얼굴을 죽도록 갈겨주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네. 진모는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이 인간은 절대 아니라는 선입견이 들었거든.

기자 : 아웅산 테러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은 다음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771 특수부대의 부대장인 강창수 소장에게 지령하여 일으킨 사건이 아닌가요?
771 특수부대는 일명 강창수부대라고도 하더군요.

마태 : 김정일이 김일성의 허락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네. 그런데…… 그걸 알게나. 그때는 이미 김정일이 실권을 잡고 있었고 김일성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네. 허락을 받았다고 해도 그건 형식적인……. 강창수는 6.25 전쟁 때 전사한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의 아들이라네. 아버지의 후광으로 공산당 엘리트코스인 만경당학원과 김일성대학을 나와서 출세가도를 달렸지.
하지만 그 사건이 결국 실패로 끝났으니까 어김없이 숙청을 당했을 거야. 그게 북한의 법률이니까.

기자 : 지금 북한과 버마 간에 국교가 재개되려고 교섭이 한창 진행 중에 있지요.

마태 : 그런가?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네만……. 내가 무슨 걸림돌이 될까?

기자 : 북한은 그 사건과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으니까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버마 주재 남한 외교관들이나 국가 기관원들이 가끔 찾아오지 않았던가요?

마태 :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
그게 1998년 11월경으로 기억하네. 몸이 몹시 아팠는데 이곳 형무소의 약은 쓸모가 없었지. 그러니까 의약품과 소액의 영치금을 교도관을 통해서 보내주었지. 나는 그 알량한 자존심을 내팽개치고 남조선 괴뢰 도당들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어.
정부 인사들과는 그 후 십여 차례 정도 더 만났다네. 마지막으로 만난 게 2005년 9월이었을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긴 했지만 그들이 외교관인지 기관원인지는 내가 알 수가 없었지.
그저 형식적인 만남이었지. 그들은 뭔가 눈치를 살피려고 온 것처럼 보였어. 내가 간곡히 말하면 건성으로 듣고…… 계속적으로 무슨 탓만 했어.

기자 : 그때…… 그 완벽한 순간에 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인가요? 무슨 이유가 있었던 가요?

마태 :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겠지.
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 결정한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은 별로 없었어. 모든 조각들이 제자리에 맞아 떨어졌지. 모든 것이 너무 당연하게 보였거든.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는 느낄 수 없었어. 그런데도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 않은가.
사람들이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결국 모든 것을 정하는 힘은 따로 있는 것이라네.

기자 : 누구보다도 사령관이 엄청 실망했겠네요.
작전의 성공을 누구보다도 철석같이 믿었을 텐데요. 자신은 그 공로를 가로채서 단번에 도약하여 더 높이 올라갔을 거 아닙니까.

마태 : 그랬을 거야. 하늘처럼 높은 사령관님이 철석같이 믿으니까 우리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버렸지. 사령관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거야. 그러한 확신은 스스로 생명력을 얻었어.
그래서 그게 우리에게 전염이 됐다고 할 수 있지.

기자 :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는데도 그때 대통령은 무슨 운수를 타고났는지 죽지 않고 여태 아무 거리낌 없이 잘 먹고 잘살고 있지요. 독재 권력을 이용해서 엄청난 재산을 부정 축재한 것입니다.
아주 건강해요. 그러니까 부부가 옛날 군대 시절 부하들을 잔뜩 데리고 다니면서 맨날 골프만 쳐요.
도대체 창피한 줄을 몰라요. 너무 뻔뻔하다니까요.

마태 : 누구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지.

기자 : 자신이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무고한 사람을 말입니다.

마태 : 기자님의 노골적인 질문에 대답하기가…… 내가 살인자라고? 내가 누굴 죽였는데? 아니야, 아니라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해. 얼굴도 모른다고.
기자님은 그걸 알게나. 우리는 국가로부터 엄중한 명령을 받았고 그걸 충실히 이행한 거야. 우리가 스스로 한 게 아니란 말일세.
다시 말하지만…… 이건 우리 입장에서는 치열한 전투 행위였어. 전투는 상대방을 죽여야 하는 거야. 역사적으로 증명된 만고불변의 진리인 거지. 그러니까 우리는 군인이야. 나는 북한 인민군 상위였어. 군인은 싸우도록 돼 있어. 싸우다가 죽게 돼 있어.
남과 북은 지금도 전쟁 중이야. 전쟁 중에 상대방의 수괴를 죽이려고 시도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
우리 민족을 위한 위대한 행동이었어.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단지 실패했을 뿐이야.

기자 : 그렇단 말이지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군요. 그런데…… 북쪽에서는 그걸 어떻게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마태 : 그가 죽지 않았으니까. 유일한 목표물이었거든.
그쪽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지. 과정은 보지 않고 오직 결과만 가지고 따지니까. 내가 북조선으로 귀환한다고 하면 당연히 처벌하겠지. 그쪽은 내가 테러의 전모를 자백했다는 것보다는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체포되었을 때 자폭하지 않은 것도 문제 삼겠지. 그들은 테러 훈련을 할 때 입버릇처럼 말하지. “최후의 총알 한 발, 최후의 수류탄 한 개는 자신을 위하여 아껴두라. 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것도 조국에 대한 배신이다. 배신 중의 배신이다.”
그렇게 강조했거든…….

기자 : 그 당시 폭발 사건이 발생하자 남한 사람들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지요.
버마 수사당국이 추정한 시나리오는, 첫째 한국의 반정부 단체의 소행이라는 설, 둘째 그 당시 나팔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즉시 폭발이 일어났는데 버마인 나팔수를 조사한 결과 “한국 경호원이 불라고 해서 불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에 그래서 한국 경호원이 개입된 자작극이라는 설, 셋째 북한 특수부대의 직접 범행이라는 설, 넷째 북한의 사주를 받은 버마 내의 반정부 극열 단체가 저지른 범행이라는 설, 다섯째 버마 내에 있는 소수 민족 게릴라 등 반정부 단체의 단독 범행이라는 설 등이 있었지요.
버마 동북부의 태국, 라오스, 중국과 접경한 황금의 삼각 지대로 불리는 샨 고원 일대에는 잡다한 인종으로 구성된 반정부 게릴라들이 거의 완전히 장악하고 있거든요. 그들은 AK 소총이나 수류탄, 지뢰 등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해요.
그러자 북한은 신문 방송 등 모든 선전매체를 동원해서 격렬한 대남비방 선전을 계속했지요.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 사건을 내세워 남북 대결을 고취하고 긴장 상태를 더욱 격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모략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노동신문은 랑군 사건은 한국 측의 자작극이라고 억지를 쓰고 나왔지요.

마태 : 뻔하지 않는가. 그게 북한식 대응 방법이지.

기자 : 1983년 12월 북한 무장 간첩이 부산 다대포 해안으로 침투하려다가 생포된 적이 있었습니다. 생포된 간첩들은 훈련을 받을 당시 지도원으로부터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시에 공작원 2명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지도원은 “아웅산 묘소는 뒷산에 수풀이 많고 전망도 좋아 저격 장소로는 최적지인데도 침착하지 못하게 얼굴도 확인하지 않은 채 나팔소리만 듣고 폭파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문제는 끝까지 버텨야 하는데 혁명성이 부족해서 북한에서 왔다고 번복했다.
이는 공화국을 배신하는 반역적 행위이다. 폭파 후 복귀하는 계획이 너무 허술했다. 위장 전술도 서툴렀다. 왜 자살용 독약을 삼키지 않았는가. 혁명성이 없어서 장엄하게 자폭하지 못한 것은 엄중히 비판받아야 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마태 :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네.
내가 나쁜 사람이거나 비겁한 인간이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네. 기회주의자일지도 모르지. 두려움과 공포심 때문일 수도 있어. 하지만 악랄한 부역자는 아니었어. 완전히 타락한 것도 아니었어.
하지만 그 지도원 동무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야. 철저한 위선자라니까.
그런 작자일수록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기가 닥치면 틀림없이 제일 먼저 살려고 발버둥 칠 인간이야.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인간은 누가 뭐래도 매우 복잡한 존재야.
인간은 연약하니까.
그쪽 사람들의 버릇을 잘 알고 있지. 틀림없이 극비리에 궐석 군사재판을 열어서 반역자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을 거야.
그러니까 나는 이미 처벌을 받은 셈이야.

기자 : 버마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발음하기 쉬워서인지 강민철 대신 ‘강민추’라고 하였고 또는 ‘김민추’라고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마태 : 내 본명은 아니야. 공작원은 가명을 쓰니까.
조장인 진선수도 그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자기들 편의대로 ‘진모’라고 불렀고 그 때문에 버마의 공식기록에도 진선수는 진모라고 되어있지.

기자 :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무소 사람들이 강민철을 마태로 불렀다고 하던데요?

마태 : 버마는 압도적으로 불교국가지. 처음에는 당연히 불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지. 그러나 동료 죄수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어. 기독교 교리도 배우고 성경도 받아서 읽었지.
나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서 반드시 종교가 필요했다네. 그 혹독한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무신론자였지만.
과거를 씻어내고 자신의 자아를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종교의 힘이 필요했지. 처음에는 불교였어. 하지만 진정한 신이 필요했지. 어머니의 영향도 컸고……. 불교에 무슨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라네.
나를 이끌어 줄 심오하고 전지전능한 신이 필요했으니까.
아웅테인 (AungThein)이라는 동료 죄수가 있다네. 나는 특수 감방 1호에 있고 그는 7호에 있는데 우리는 가끔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지. 그게 내가 여기에 오고 나서 10년 쯤 지났을 무렵이야.

붉은 벽돌로 지은 단층 건물인 별채 옥사는 공용 휴게실과 샤워실이 딸려있는데 8개의 일인용 작은 감방이 있었고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낮 동안에는 감방문이 계속 열려있어서 정원으로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수색 요원이 방을 샅샅이 조사했다. 어떠한 금지 품목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 징벌위원회에 불려간 일도 없고 지하에 있는 무시무시한 징벌방에 감금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감옥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디로 도망가거나 감옥을 탈출할 의지는 없었다. 낯선 이국 타향에서 마땅히 갈곳이 없었으니까.

기자 : 아웅테인이라는 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는가요?

마태 : 그분은 버마의 사업가로 한때 유력 인사였는데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장기형을 선고받았어. 그 양반 인텔리겐차라고 할 수 있지. 너무나 박학다식하거든. 그가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와 그 차이점을 자세히 설명해주었어.
그는 나를 가엾게 여겨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지. 그래서 내가 원하는 한국 책을 얼마든지 구해서 주지. 나는 그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주기 싫어서 오직 읽고 싶은 책들만 간곡히 부탁했어.
수많은 책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네. 책은 소중했어. 걸신들린 것처럼 닥치는 대로 수백 권을 읽었지. 아주 잘근잘근 씹어서 소화했어.
사실 우리 어머니는 기독교도였고 집 안에는 남몰래 십자가와 성경 등을 숨겨놓고 어머니가 가끔 십자가를 꺼내서 기도했었지. 어머니는 글을 읽을지도 쓰지도 못했지만 늘 곁에 성경책을 끼고 살았어.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더욱더 목숨을 걸고 하느님을 믿은 거라네. 북쪽의 현실은 그렇다네.
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죄를 지었어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라도 용서해주신다. 그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에게서 죄의 사함을 받으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철저하게 믿게 되었다네.
그래서 형무소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신부님은 없었지만 물 없이 세례를 받고 ‘마태’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얻게 되었지. 그 이후 내 이름은 마태가 된 거야.
성 마태는 그 당시 죄인이나 부랑자들과 다름없는 세리 출신이었지.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고 제자로 받아들인 것 아닌가.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그 죄인을 용서했다네. 마태의 다른 이름은 레위인데…… 나는 마태라는 이름이 너무 좋다네……
내가 만약 죽기 전에 살아서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목사가 되거나 전도사가 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거라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지…….

기자 :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걸 알고 계신가요?

그의 뺨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대화는 한동안 끊어졌다. 이인원 기자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떠한 위로의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 다시 평안한 얼굴로 돌아왔다.

마태 : 어쨌거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알고 있다네.
그 슬픈 소식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수만 리 떨어진 여기까지…… 전해졌다네. 나는 살아서 돌아가 다시 어머니를 만나는 게 소원이었는데.

기자 : 괜찮겠어요?

마태 : 미안하네.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기자 : 이곳에 신부님은 없겠지만 그래도 고해성사를 하나요?

마태 : 감옥 안 벽에 이마를 대고 매일 하지. 그래야만 마음의 평화를 얻고 그날 하루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니까.
자주 악몽을 꾼다네. 그때는 오로지 군인으로서…… 공화국 혁명전사로서…… 국가의 명령을 받았다면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렇게 특수 훈련을 받았으니까.
그랬으니까…… 우리에게는 애시당초부터 양심이나 도덕적 문제는 없었지. 그렇다네…… 살인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지.
작성일:2023-08-10 13:47:51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