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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대화와 설득, 전향 (2)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2-10 11:05:56
조회수
250
“무슨 말씀인가요?”
“북쪽은 순수한 전문 스파이 교육과 훈련이 턱없이 부족하지.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전문화가 되지 않은 거야. 시대에 한참이나 뒤처진 거지. 지금은 20세기를 지나서 21세기인데 말이야.
지금 세상에서 전문 스파이는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컴퓨터와 스마트폰, 인터넷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하지. 고도의 두뇌 싸움에서 이기려면 프로파일러 수준의 심리전 훈련을 받아야만 하지.”
“교육 방식이 낙후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요. 사상교육이 첫째니까요.”
“손자병법에 의하면 나만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지만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지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 북은 적을 너무 모르고 있네. 아마 잘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고 있는 거겠지.
결론을 요약하자면 풀어주고 싶은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걸 남쪽에서는 ‘기브 앤드 테이크’ 라고 하지. 세상 만사가 그렇지 않은가. 주는 것 없이 받기만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야.”
“무슨 말씀인지……?”
“그놈은 계속 우릴 엿먹이고 있어. 아주 사악한 놈이야. 우리를 짓누르고 있지. 우리 조직의 골칫덩어리니까. 아직까지도 정확한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서 체포하는 데 몇 번이나 실패했어. 아주 오래된 거물 고정 간첩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지.”
얼굴에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목구멍이 죄어드는 느낌이다. 입술을 깨문다. 몸에 잘 맞지 않는 처음 입어보는 정장을 만지작거린다. 심학무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저더러 협조를 하라는 말씀인 거죠. 배신을 하라고…… 저에게 아무리 혹독한 고문을 가해도 그건 소용없어요.”
“우린 고문 같은 거 하지 않아. 설득하지 못하면 그뿐이야. 이건 자발적 협조가 필요하니까 고문으로 될 일이 아니야. 스스로 결정하라고. 우리도 고문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야. 그렇지만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인간 혐오증에 빠지게 되는 거야.”
“모진 고문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사기였고 허울뿐이었어. 유물론이란 게 인간의 정신을 무시하고 말살하려는 이론이었단 말이지. 인간은 물질이 아니야. 그건 인간의 본질에도 반하는 거고 인간의 존재 조건에도 반하는 거였어.
북한은 이미 끝났어.”
“끝났다고 말씀하셨나요?”
“민중! 민중! 민중이란 말이야. 민중이건 시민이건 결코 패배하지 않아. 민중이 속아넘어가고 미신을 믿고 순종적이어도 언젠가는 마침내 깨어나게 될 거야. 그게 역사의 순리니까.”
“북한에 무슨 민중이 있습니까……? 인민이 있을 뿐입니다. 인민들은 강제적으로 세뇌되어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을 수도 있지. 인민이 민중으로 돌변하는……”
“계기가 있다고요…… 백년하청일겁니다.”
“북한을 어떻게 남한과 비교할 수 있겠어. 남과 북을 나란히 놓을 순 없단 말이지. 북한에서 인민은 모두가 노예가 되었고 당신은 살인의 도구로 이용된 거지. 오죽했으면 김학모 선생이 내려왔겠어.”
“너무 피상적인 견해가 아닐까요?”
“내가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하지…… 자본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여기에도 뿌리 깊은 문제는 있는 걸 부인할 수는 없겠지. 그건 김씨 왕조야. 공산주의는 낡은 봉건체제를 혁파하는 것인데 거꾸로 지독한 김씨 왕조가 성립된 거지. 무슨 주체사상을 들먹이면서 말이야.”
“물질의 풍요가 전부는 아닙니다. 남쪽 역시 타락하고 부패한 게 아닌가요?”
“그걸 알라고…… 북에서는 성경을 마약이라고 하지만 주체사상은 성경과 아주 비슷하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 대신에 김일성을, 예수님이란 이름 대신 김정일을 집어넣은 게 주체사상이니까. 다시 말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성경으로 삼고, 노동당을 사도 집단으로 삼고,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십계명으로 삼고 있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외웠으니까요. 그런데 이걸 아셔야 합니다. 남쪽에서 나온 주체사상 관련된 책들은 거의 백 프로 북한 책을 그대로 베꼈다는 겁니다.”
“역사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북쪽 역사책은 온통 김일성 일색이야. 우리나라 독립도 김일성 덕분이라고 하고. 김일성의 동상이 북한에 몇만 개나 세워져 있는지 알고 있겠지.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쇳물 덩어리에 불과한 거야. 각 가정과 직장에서는 가장 넓고 깨끗한 방에 의무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을 걸도록 했지.”
“너무 지나치게 비판하지 마십시오.”
“권력은 얻을수록 더욱 추구하는 괴물이라고 할 수 있지. 권력은 독이고 마약이야. 깊이 중독되거든. 권력은 커질수록 남용된다니까. 그렇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붕괴된다고 했어. 인간들은 왜 그렇게 권력에 집착할까.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지 않고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권력과 수단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지.”
“남쪽의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치는 자유방종은 언제든지 파멸을 자초할 수 있습니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염려하는 격이네.”
“북한은 경제가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경제만 회복된다면……”
“우리는 당분간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거지. 이제서야 민주주의가 막 꽃피기 시작한 거야. 남쪽은 활짝 열린 개방사회라니까. 밀실이 아니고 광장이란 말이지. 우리는 인민이 아니고 시민이란 걸…….”
“미국 제국주의 때문입니다. 그들이 틀어막고 있습니다.”
“미국이…… 왜 그럴까?”
“자신들은 핵무장을 하면서 우리가 하면 왜 안되는 거죠?”
“어려운 문제야. 미국은 세계를 쥐고 흔드는 강대국이야.”
“너무 낙관하지 마십시오. 과도한 낙천주의 역시 자유방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지금부터 정치범수용소 이야기를 해 보자고. 이건 남쪽에서 하는 소리고 그쪽에서는 특별독재구역이라고 하더군. 거기서 쥐를 잡아 먹었으니까…… 기억하기도 싫을걸.”
“지금 수용소 이야기를……?”
“거길 순전히 김상빈의 경력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갔는데 그게 들통이 나고 말았어. 미리 준비했던 대사를 완벽하게 연기했어야 하는데.”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무슨 일이건 과잉은 좋지 않아…… 당신은 지나치게 열성을 다한 거야.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야. 스파이는 과대망상도 안되지만 자기비하를 해도 안 되지. 냉정해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만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지. 스파이에게 강렬한 감정은 필요 없는 거야.”
“……”
“난 어렸을 때부터 성질이 급하고 충동적이었어. 어른이 돼서도 그게 남아있었지. 그런 건 스파이에게는 절대 금물이야. 스파이는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최고의 기술이거든. 그걸 혹독한 훈련…… 육체 훈련과 정신 훈련을 통해서 극복한 거야.”
“우리 처지에는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당신을 시험할 생각은 없다네. 지금 말이야…… 내가 북을 중상모략하는 것도 아니고 당신을 겁박하는 것도 아니야. 북한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그게 반드시 필요할 거야.”
“어느 정도는…… 수용소 하면 제일 먼저 배고픈 게 생각납니다. 수용소 자체가 배고픔이지요. 그리고 찢어지고 더러운 누더기 옷이 생각납니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구 소련의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기도 하지. 옛날 스탈린은 총살당할 자와 강제수용소에 수감될 자들, 두 부류로 나누었어. 지금 북한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 거야. 아무나 정치범이란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수감하고 있지.”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어요.”
“알아서 다행이구만.
북한이 그걸 애써 숨기고 있지만 어림없는 일이야. 지금도 북한은 대외적으로 억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게 없다는 거지. 농장이니 공장이니 기업소라든가 하면서 위장 명칭을 사용해도 소용 없단 말이지.
나치 SS장교들이 똑같이 그랬어. 그들은 유대인 수용자들에게 자신만만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와 진실이 외부에 절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하면서 설혹 알려진다 해도 누가 그걸 믿겠냐고 했어. 그러면서 득의만만했지. 너희들 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누구도 증언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 그걸 알게나…… 수용소마다 여러 개의 오케스트라와 밴드가 있었어. 그걸 수용자 중에서 뽑힌 대원들이 연주했지. 난 음악을 잘 모르지만 음악이 예술이라는 건 알고 있지. 나치 살인자들은 그들도 인간이니까 가볍고 명랑한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부담을 덜어낸 거야.”
“북한에는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그런 진정한 음악은 없지요. 최고 지도자를 칭송하는 노래밖에 없어요. 예를 들자면 ‘장군님 식솔’이라는 제목의 노래 가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디 한 번 노래를 해 보게. 백 번이건 천 번이건 불렀을 거 아닌가.”
“제가 지금 노래를 부를 수는 없어요. 술 때문에 목이 잠겨 있지 않습니까. 대신에…… 가사를……”
심학무는 작은 양주잔에 스스로 술을 가득 채워 마시고 물로 입가심한 후 목청을 가다듬었다.

메마른 가시밭길 울고 울며 네 왔느냐 / 거친 길 에들면서 외로웁던 시내 / 몰아 불행에 감겨 찢겨진 봄을 시름 놓고 맡긴 곳은 아 인정의 바다 / 사랑의 바다 / 고향은 다르지만 뜻이 같아 뜻에 살고 떠난 곳 어디여도 정에 끌려 정에 사네 / 흘러서 흘러 모여서 모여 형제 같은 너와 나는 아 한집안 식솔 / 장군님 식솔 / 시내물 흘러오며 흐려질 수 있어도 바다에 안기면 하나 되어 푸른 빛 / 민족의 운명 한 몸에 안은 그 품속에 너와 나는 아 한집안 식솔 장군님 식솔……

“정말 아름다운 가사야…… 구구절절이…… 그렇지 않나?”
염 국장은 언젠가 독일에 출장을 갔었다. 그때 칼 마르크스의 무덤에도 가 보고 프리드리히 앵겔스의 생가까지 갔고 폴란드의 아우슈비츠까지 간 것이다. 수용소 건물과 감시탑들은 세월의 풍파 때문에 낡아 있었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곳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살해당했다고 적힌 안내문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시체 소각로와 가스실, 교수대, 판잣집, 죄수 구역, 나치 친위대 구역을 건성으로 둘러본다.
“정치범수용소를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 정도로 잔혹하지 않습니다.”
국장이 순간 눈살을 찌푸리고 담배연기를 공중으로 천천히 뿜어 올렸다. 아주 유감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렇게 귀에 거슬린다면…… 뭐랄까…… 안 들은 걸로 해.”
“다시 말씀드리면…… 남이나 북이나 똑같이 아우슈비츠를 아전인수 격으로 우려먹고 있단 말입니다.”
“무슨 염치로…… 북이 아우슈비츠를 들먹인단 말인가.”
심학무가 정색을 하고 국장을 노려보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북이나 남이나 똑같았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거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는 거 아닙니까. 남쪽에서 유행하는 ‘내로남불’아닙니까. 한자 성어로는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의미에서 아시타비(我是他非)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하라고…… 흥분하지 말라니까…… 왜 그렇게 어려운 한자를 쓰고 그래. 나는 처음 들어봤다고. 나에게 한자 실력을 과시하고 싶은 거야?”
“제가 황해남도 강령군 쌍교리 해안에서 몇 달 동안 해상 침투 훈련을 받았지요. 그때 가까이에 있던 ‘미제 신천 양민학살 기념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박물관 담당자가 설명했습니다.
‘조국해방전쟁 당시 미제 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인류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인간 살육이라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건 20세기 식인종으로서 야수적 본성을 세계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내놓은 것이다. 미제 침략자들은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잿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명령하면서 두 달 동안 신천군 주민의 반에 해당하는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신천 대학살은 그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일당들이 감행한 아우슈비츠의 유혈 참화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게르니카’를 그린 피카소는 신천 학살을 주제로 하여 1951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그림을 그려서 국제사회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그것뿐일까요? 미군 폭격기는 북한 전역을 완전히 초토화시킨 겁니다. 구석기시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젊은 남자들은 모두 징집되었고 노인, 여자, 어린애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무자비하게 폭탄을 퍼부었어요. 그건 대량 학살이었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남북이 대립하면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우익과 좌익의 서로에 대한 증오와 원한은 대단했지. 그 전쟁이 한민족을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으로 완전히 찢어놓았어.”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남한에서도 그런 만행이 있었지요. 대표적인 게 제주도에서 일어난 4·3 사건 아니겠습니까. 무고한 양민을 폭도로 몰아서 3만여 명이나 학살했어요.”
“민족적 비극이었지. 그래서 평화가 필요한 거 아니겠어. 전쟁 때문이었어. 전쟁은 군인들만 싸우는 게 아니야. 모두가 서로 싸우지. 그 당시 도처에서 서로 간에 끔찍한 학살이 자행된 거야. 전쟁은 광기야. 미치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 그랬으니까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어느 한쪽이 잘했다고 하거나 다른 쪽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야.”
“고문 문제도 그렇습니다. 중정의 남산 분실이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모두 악독한 고문의 산실 아닙니까. 거기서 생사람이 죽고 완전히 병신이 되고 그랬지 않았습니까.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이니까 우리 쪽에서만 악랄한 고문을 한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실내는 담배 연기가 여기저기 흩어지고 독한 술 냄새가 퍼지면서 공중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어지간히 술을 마셨는데도 술에 취한 기색은 전혀 없다. 그들의 이러저러한 대화는 당초 예상한 것보다 점점 훨씬 깊은 곳까지 빠져들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은 많이 이야기했지만 정작 중요한 사항은 여전히 말해지지 않고 있었다. 국장은 크리스털 재떨이에 반쯤 남은 담배를 눌러 껐다. 그리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술을 스트레이트로 목구멍에 털어 넣는다.
“부끄러운 과거 역사이지만 옛날 일이야.”
“시대가 바뀌면 다시 부활하겠죠. 역사는 반복하니까요.”
“그래도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단 3년 동안만 운영되었던 데 반해 북한의 수용소는 50년째 운영되고 있단 말이지. 정권이 망할 때까지 존속하겠지. 북한에서 탈출한 강철환의「수용소의 노래」, 신동혁의 「세상 밖으로 나오다」, 안명철의 「완전통제구역」등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증언을 했으니까 정치범수용소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났지. 그들이 거짓말을 했을까?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라고 할 수 있을까?”
“국장님이 용서하신다면…… 제가 욕을 한 번 해주고 싶군요.”
“실컷 해 보라고…… 욕을 하면 뭔가 막혔던 게 풀릴지도 모르지.”
“너희들은 쥐굴에서 대가리를 내민 박멸의 대상이야. 배신자들이라고.”
“그게 무슨 욕다운 욕이라고 할 수 있겠어?”
“왜곡 과장이 너무 심했습니다. 이런 걸 두고 ‘돌미륵도 앙천대소할 나발’이라고 합니다. 그렇겠지요. 자신들의 탈북 동기를 미화시키기 위해서는 과장이 필요했을 겁니다.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현재 남한에서 떠도는 북쪽 이야기는 너무 과장 왜곡되었거나 잘못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에 대해 많은 오해가 생기고 뿌리 깊은 편견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그걸 전부 진짜 사실로 알고 있단 말이야. 무조건 믿는단 말이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어 버린다니까.”
“탈북자들은 지독한 거짓말을 하고 있죠. 신동혁이란 자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알려진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나 탈출에 성공한 유일한 탈북자라고 증언해서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단 말입니다. 그리고 14호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형이 탈출을 모의하다 들켜서 자신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했다고 충격적인 진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진실은 어떠할까요?
그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14호가 아니라 18호 수용소에서 생활했습니다. 18호는 일반 범죄의 수용소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동혁은 자신이 모종의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수용된 것이고 신동혁의 어머니와 형이 처형된 이유는 탈출 모의가 아니라 살인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했다면 사형에 처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닙니까.
탈북자들이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할까요? 그건 순전히 돈 때문입니다.
그들의 증언을 극적인 것으로 만들어 이용하려는 인권단체나 종교단체들이 있습니다. 증언이 잔혹할수록 띄워주는 언론이 그들이 거짓말을 하도록 부추긴단 말입니다. 탈북자들은 방송에 출연해서 출연료를 받고 방송국에서 준 각본에 따라 증언을 합니다. 탈북자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 시간에 앉아 있기만 해도 돈을 주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거나 신앙 간증을 하면 돈을 더 많이 줍니다. 그래서 남한에 내려온 탈북자들 대부분이 개신교 교회에 나간다고 하죠.
기자나 연구자들에게 북한 관련 증언을 해도 보수가 지불됩니다. 원칙은 하나입니다. 그런 증언이 더욱 끔찍할수록 비싸다는 것입니다. 공포의 무게에 비례하는 금전거래는 극적인 것을 갈구하는 기자들, 그리고 소위 북한 인권 활동에 돈을 대려는 기독교 단체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과장이 심했다고? 심한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어. 우리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인민들에게 어느 정도 공포심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겠지만…… 전향해서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약하는 게 어때? 북한 인권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활동하고 있지. 그들 중에는 진짜 단체가 있어.”
“저에게 그런 의지와 용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게 진정으로 조국을 위한 일이 아닐까?”
“그런 운동에는 인민들의 호응이 중요한데 아직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죠. 북한 주민들은 지금 살고 있는 자신들의 삶 이외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더 이상 어리석은 미련을 버리라고. 악마들을 위해서 귀중한 목숨을 버릴 건가?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거야?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협력하지 않으면 젊은 청춘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걸.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라고.
우리가 그걸 보장해줄 수 있지. 집도 마련해줄 수 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도 시켜줄 거야. 남남북녀라고 했지만 남쪽에도 빵빵한 여자들이 많이 있지. 그리고 의식주 같은 거는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걸 해결해줄 거야.”
“북에서 내려온 어리숙한 촌놈이 어떻게 그런 영리한 여자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날라리는 아닐걸. 착하고 좋은 여자도 있을 거라고.”
“인간답게 살라고 말씀하시니까 국장님은 어느 쪽인가요?
진보적인가요? 보수 반동적인가요?”
“정보부 쪽에서 일하면 당연히 보수 반동적이지 않겠어. 그렇지만 진보 쪽에서만 인간 운운하는 게 아니야.”
“간첩에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요?”
“우리 솔직하게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니까……”
“뭘 말씀하시려고 그러는 거죠?”
“스파이는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예민한 감각으로 늑대인지 개인지 구별할 줄 알아야만 하지.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리는 어둑한 석양 무렵을 가리키는데 그때는 저만큼에서 다가오는 짐승이 우리 편 개인지 적군인 늑대인지 구별이 안 된단 말이지.”
“어둠 속에서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위험천만한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스파이가 생존하려면 끊임없이 의심해야만 하는 거야.
먼저 의심하고 나서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지. 모든 게 두려워. 계단이 삐걱거리는 소리, 셔터가 덜그덕거리는 소리, 무슨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밖을 나가면 미행이 두렵단 말이지. 거기다가 임무 실패에 대한 두려움까지……”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십니까?”
“합신센터에서 충분히 증명했지. 조사관들이 치를 떨 만큼 끝까지 괴롭혔으니까. 그거면 충분할 거야.”
“국장님도 수사관을 하면서 악독한 짓을 했던 거……?”
그는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얼굴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었고 붉으락푸르락했다가 평온을 되찾았다. 국장이 담배를 빨아들일 때 담뱃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연기를 내뿜고는 바로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러지 말게…… 나는 조사실에서 직접 뛰지는 않았어.”
“그건 손에 직접 피를 묻힐 수 없다는……”
“엄격한 조직에서 내 맘대로 될까. 직급상의 문제였지.”
“제가…… 어쨌거나 실패했지요. 제가 그렇게 나약한 인간인지 깨닫고는 스스로도 놀랐습니다. 계속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말하자면…… 단둥과 연길을 왔다갔다하면서…… 그런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에는 남몰래 혼자서 술을 많이 마셨고.
그런데 술을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아. 점점 우울해져…… 술은 말 그대로 마취제인데…… 그게 시원찮으니까…… 닥치는 대로 돈을 주고 탈북녀들과 잠을 자고 마리화나를 했지. 거기서는 그걸 구하는 게 아주 쉬웠거든.”
“화려한 시절을 보냈군요.”
“그 때문에 본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고…… 강제 전역을 당할 뻔했지.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네. 우리는 중령까지도 현장에 투입되고 대령이 돼서야 일선을 떠나게 되어있는데…… 그쪽에서는 진급할 가망이 없었지. 어떻게 해서…… 이쪽으로 옮겨온 거지.”
“전화위복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지금부터라도 사람답게 살아보라니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청춘인데.
청춘은 아름다운 거라네. 하지만 청춘은 인생에서 단 한 번밖에는 오지 않지. 내가 스파이 출신이니까 당신을 뼛속까지 이해할 수 있지.
나는 스파이에 대해서 어떠한 환상도 없었어. 그냥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전문직 직업이었을 뿐이야. 그 직업의 특성상 스파이는 언제든지 악과 타협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지.
우리는 매국노일 수도 있고 동시에 애국자일 수도 있는 거야.
우리는 본부 조직의 관점에서는 한낱 먼지 같은 하찮은 조직원에 불과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장기판의 졸도 아냐.
그렇지만 우리도 엄연히 인간이야. 누가 인간이 아니라고 부인할 수 있겠어.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니까.”
“저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도 공작원 출신이야. 나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남쪽에서 신용 불량자가 되어서 몇 가지 사기행위를 저지르고 도망쳐 온 것으로 신분 세탁을 했어. 무대는 단둥과 연길이었어. 거기는 최일선이야. 진짜 내 임무는 아주 위험했단 말이야.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지. 비밀리에 접선할 때의 긴장감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지. 노동당 대외연락부 소속 고위급 인사를 통해 정기적으로 민감한 정보를 수집하는 거였어. 우리가 오래전에 찍어두었던 인물이었지. 어느 정도 한계에 다다랐다고 판단했을 때 탈북을 권유하고 안전한 루트를 제공했지만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두고 그럴 수 없다고 완곡하게 거절했지. 그런 후 우리는 손을 끊은 거야. 그 사람 안전이 염려되었단 말이지.”
부모는 모두 경상남도 김해 출신이었다. 아직도 김해에는 당숙과 그들의 자손이 살고 있고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이 있다. 그들 부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베나 도쿠시마 쪽에서 막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았지만 종전이 된 후 ‘조선인 부락’이라고 불렸던 오사카 이카이노에 정착했다. 그곳은 일본 속 작은 제주였다. 제주도 출신이 많았다. 골목을 걷다보면 오사카 사투리, 제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 한국말 억양의 오사카 사투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어머니는 쓰루하시역 도매시장에 붙어있는 조선시장에서 내장과 족발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정육점을 했고 아버지는 조총련 오사카 본부에서 간부로 근무했다.
그는 외아들로 늦둥이였다. 조총련계 고등학교인 오사카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함께 니카타항에서 망경봉호를 타고가서 ‘조국 방문의 현관’이라고 불렸던 원산항에서 내린 후 평양으로 갔다. 그는 조총련 간부였던 아버지 덕분에 평양의 ‘조총련 간부 자녀 합숙소’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평양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할 수 있었다. 졸업 후 곧바로 노동당 대외연락부에 들어가 처음에는 일본과 조총련을 담당했다. 그는 모종의 임무를 띄고 가끔 단둥으로 출장을 나갔고 어떤 때는 몇 개월씩 머무르기도 했다. 그때가 과장시절이었다.
“어쨌거나 내 임무는 까딱 잘못하면 그쪽 역공작에 말려들 수도 있었고, 만약 방첩팀에 걸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었지.”
“연길은 북쪽이건 남쪽이건 정보기관들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는 북쪽의 앞마당이나 다름없어. 중국 공안들과 북쪽 요원들이 쫙 깔려 있단 말이지. 그들의 임무는 그쪽에서 활동하는 남쪽 요원을 잡아서 납치하는 거였어. 여의치 않으면 감쪽같이 죽여서 숲속 빈터에 암매장할 수도 있었지. 그들에게는 공공연히 살인 면허가 있었으니까.
그 시절에는 잠을 잘 때도 옆에 권총이 있어야 안심이 되었지. 일반 사람들은 스파이는 베개 아래 총을 숨기고 잠을 자는 줄로 오해하지만 잠을 잘 때는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놓아두어야 해. 순간적으로 상황이 벌어지니까. 권총을 맨날 분해해서 닦고 기름칠을 했지. 손잡이는 원래 촉감이 조금 거칠었지만 닳고 닳아서 매끈해졌는데 말이야. 내 분신이나 다름없었는데 규칙이 그러니까 여기로 오면서 반납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권총이란 게 묘한 거야. 성능과 다른 게 반비례하거든. 무슨 말이냐 하면 성능이 좋으려면 권총의 부피가 커야 하니까 숨기거나 휴대가 불편하단 말이야. 그 반대이면 성능을 줄여야 하고.”
“누구보다도 잘…… 백발백중 명사수 아닙니까. 제가 초보자일 때 조교는 항상 두 손으로 사격하라고 강조합니다. 오른손으로 총을 꽉 잡고 왼손은 탄창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거죠. 그거 헛소리예요. 자세가 잡히지 않아서 속사가 불가능해요.”
“그게 참으로 묘한 일이야. 긴장의 연속인 일선 업무에 애착이 가면서도 은근히 후선으로 가고 싶은 거야. 이중적 감정이 일어나는 거지. 우리 임무는 감정의 배출구가 없으니까 가혹한 정신노동이면서 육체노동인데 말이야. 나이가 들수록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고 싶더라고. 난 지금 퇴직 직전이지. 내가 그 험한 시절을 어떻게 견디고 살아 왔는지…… 계급정년을 기다리면서 쓸데없이 버티고 있는 셈이라네. 그래도 먹고 살만큼은 공무원 연금이 나오니까. 세월이란 게 참 빠르지 않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거든.”
“별 탈 없이 무난히 은퇴하신다고 하니까……”
“당신이 부러워할 일이 아니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온갖 위험한 일만 시키고 나서 이제는 쓸모가 없으니 그냥 나가라는 게 아닌가.”
“왜 그런 말씀을…… 유도 신문을 하기 위해서인가요. 스파이는 표리부동의 능력을 무한대로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건 아니야. 오해하지 말게. 은퇴하고 나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거니까. 진즉 안 쫓겨난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한직에 있으면서 자리나 지키고 있으니까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지. 우울하니까 충동적으로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시니까 더욱 우울해지고. 거기서 빠져나오려고 남몰래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알코올 의존증이 되었다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진탕 마셨다가 다음 며칠 동안은 술이라면 진저리를 쳤지. 이러다가 길거리에서 객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게 밤새 술을 퍼마시고 거리에서 쓰러져 잠들었다가 다시는 눈을 뜨지 않으면……. 술을 끊으려고 아니면 조금 줄이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려고 노력을 해도 불가능하단 말이야. 그러다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서 정신병원에 입원할 수도 있어.”
“술 대신 골프를 치시면…… 그게 신선놀음 아닌가요?”
“웬만하면 모두들 골프를 치지만…… 여기서는 골프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품이거든. 하지만 한가하게 골프치는 게 탐탁지 않았네.”
“국장님은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스파이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니까 중독에 빠질 것 같진 않은데요.”
“뭔가 오해하고 있구만…… 우리의 내면은 의외로 허약하지. 우리는 별난 세계에 사는 별종의 인간일까? 보통 사람의 욕망, 생각, 감정을 모르고 사는 현실 도피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삶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삶을 증오하고 삶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을까? 그렇다고…… 무슨 범죄자처럼 이제 과거의 일에서 손을 씻었다고…… 후회하면서 참회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야.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네.”
“저희는 보통 사람들이 겪는 인생과는 완전히 다르긴 합니다.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스파이 판타지가 생긴 거 아니겠습니까.”
“당신이 이번 공작을 성공해서 북으로 귀환하면 공화국 영웅 칭호를 수여받게 되고 영웅 메달과 영웅증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게 되겠지. 그리고 잘하면 대좌로 은퇴할 수도 있겠지.
본부에서 은퇴하고 나면 연금이 나오겠지만 그 연금이 쥐꼬리만해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으니까 결국 장마당으로 내몰리겠지. 그게 바로 거지 생활 아니겠어. 당신 장마당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거야.
이미 실패했지 않은가. 탈북자를 가장했지만 남파 간첩이라는 게 탄로났단 말이야. 김상빈이 아니라 심학무라는 게. 처음에는 가짜 이름을 댔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막다른 궁지에 몰리니까 진짜 이름을 댔단 말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당신은 약간 고지식하다고 되어있어.
그런데 그런 성격은 공작원에 어울리지도 않고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정치싸움에서 성공할 수 없는 거야. 당신은 신체 건강하고 공부를 잘했으니까 뽑혔겠지만 본부에서 사람을 잘못 뽑은 거지.”
“북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뽑아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요. 갑산 촌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지요. 양강도 군사동원부의 군관이 학교에 왔을 때 저의 운명은 그때 벌써 결정되어 버렸지요.”
“옛날 KGB는 물론이고 CIA도 마찬가지인데 비밀 정보부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겉으로는 매우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것처럼 가장하지.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굳어있어서 웃을 줄을 모르거든. 유머 감각이 아주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단 말이지. 엄숙주의자인 것처럼 행동한단 말이야. 그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긴 해. 군대 이상으로 규칙이 엄격하고 상명하복 관계이니까. 전문 스파이라면 그걸 넘어서야 하는데 당신은 아니었어. 어딘가 단단히 굳어있는 거야. 스파이는 변신하는 데 능수능란해야만 하니까 이럴 때는 이런 사람이 되고, 저럴 때는 저런 사람이 되고, 또 다른 데에서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어야만 하지. 즉석에서 자연스럽게 연기도 잘 해야 하고. 그걸 완전하게 숨길 수 없으니까 만나보면 어딘지 모르게 표시가 나는 거야. 우리는 동업자니까 본능적인 직감에 의해서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연습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나이가 들어야 하지. 삶의 여정을 잘 살펴보면 나이가 사십은 넘어야 될걸. 그리고 여자를 알아야만 되지.
여자의 은밀한 마음과 함께 음탕한 육체를 알아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는 거야. 여자에게 내 거시기가 잘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 여자를 정복할 수 없어.”
“국장님도 지나치시군요. 저를 우습게 보고 깔아뭉개고 있어요.”
“여자는 몸으로 말하는데 그게 무언극이지. 여자는 수십 가지 무언극을 할 수 있다네.”
“저도 남자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거든요. 여자의 미소, 여자의 촉감, 여자의 속삭임, 여자의 향기 등을 모두 알고 있다고요. 여자의 신음소리도…… 여자의 온몸 어디든지 어루만질 수 있단 말입니다. 탐스러운 젖가슴, 아랫배, 엉덩이, 촉촉한 사타구니를……”
“ㅎㅎㅎㅎㅎㅎㅎ”
“왜 웃으십니까? 제 말이 믿어지지…… 비웃는 겁니까?”
“당신 얼굴을 보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래.
한창 젊은 시절 내내 전투원으로 그다음에는 공작원으로 계속 고된 훈련의 연속이었으니까 여자를 만나서 연애할 시간이 있었겠어?
총각 딱지를 뗄 시간도 없었을 거라고?”
“왜 그러세요. 아무렴 연애할 시간마저 없을라구요. 그날 밤 그녀가 말했었지요. ‘당신 벌써 다섯 차례나 제 몸속으로 들어왔단 말이에요. 아직도 모자라세요’”
“정말 그렇단 말이지……. 중국 땅에서 아름다운 평양 여자와…… 황홀한 밤이었군. 그렇다면 벌써 여자 뱃속에서 아이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떤 애정 소설에 쓰여 있는 걸 언젠가 써먹으려고 외운 거 아닌가?
북한 공작원들은 달달 외워야 할 게 참으로 많지 않은가.”
“아무리…… 그런 것까지 외우지는 않습니다.”
“그 여자는 신체검사 결과 임신을 안 했단 말이야. 그런데 임신중절을 한 적이 있다고 하더군.”
“여자가 그랬어요. 탈북하면서 성폭행을 당할 거에 대비해서 몸속에 뭘 설치했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는 사랑의 포로가 되거나 비극의 주인공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을 거야. 미쳤어? 완전히 자유인이 되었는데……”
“미련을 버리라는……”
“자신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어.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니야.
이제부터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본부에서 출세하려면 3층 서기실의 빽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옛날 함경북도 갑산 산골 촌놈 출신이야. 오죽했으면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지금 당신에게는 아무리 찾아봐도 연길에서 중국집 하는 아저씨밖에 없어. 이름이 아마 심한준이 아니었던가? 하여간에 그 양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음식점 주인이 무슨 힘이 있겠어.
호구증이 있으니까 중국 동포 행세를 하면서 중국 쪽 통행증 발급사무소에서 쉽게 국경통행증명서를 발급받은 거지. 그걸 이용해서 북한산 도자기, 냉동 노루고기, 송이버섯 등을 중국에 내다 파는 밀무역에 종사했서 돈을 모았지.
그런데 상당히 눈치가 빠른 사람이더라고. 그러고 나서 그쪽에는 깨끗이 손을 털고 중국 식당을 시작했는데 그게 아주 번창한 거야. 우리가 알아보니까 당신 아저씨는 술 좋아하고 원만한 사람이지만 그뿐이지. 그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거야. 남한에 여러 번 왔다 갔는데 조사해보니 용의점은 없었어.”
“아저씨는 핏줄이 무엇인지…… 저에게 잘해주었습니다.”
염 국장은 같은 공작원 출신이어서 대화가 깊어질수록 연민의 정을 느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청년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 된다고 생각한다. 너의 모습에서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을 거슬러 아주 오래전 내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거야. 기억들이 어둠 속에서 기어나오고 있는 거지.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이 그렇게 중요할 것인가. 인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너는 국가에 의해 이용된 도구에 불과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너가 파괴되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것인가. 너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대화의 숨은 진정한 목적이 아니었던가. 나는 적군이 아니야. 아무리 어둠 속을 헤매고 있어도 그걸 알아야지. 젊음이 안타까울 뿐이야. 젊음은 찬란한 꿈이니까. 나에게는 그게 없었단 말이야. 인생을 허송세월한 거지. 너의 신념, 의지, 자존심, 그런 거 전부 헛거야. 스스로 자신을 지키라고. 이게 마지막 기회야. 이게 내가 퇴직하기 전 마지막 임무이다. 나에게 부과된 엄숙한 소명이다. 하지만 너는 먼저 전향하고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너를 보호할 방법이 없다. 법이 허용하지 않는다. 내곡동 본부는 협상할 권한을 제한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이번 임무에서 이미 완전히 실패했어.
가령 기적적으로 여기를 탈출해서 북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해도 말이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물론 전후 사정을 엄중하게 조사하겠지.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 대접을 받을 수도 있어. 왜, 자결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돌아왔냐고 하면서 배신자 취급을 할 수도 있어. 그냥 불명예 제대를 시킬 수도 있겠지. 아니면 정치범수용소가 기다릴 수도 있어. 당신은 수용소에서 몇 달 동안 생활했으니까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을 거야. 다시는 지옥이나 다름없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걸.
또 다시 가정을 해 보자고. 당신이 이번 임무에서 성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금의환향한다고 가정해 보자고. 그런다고 모든 게 술술 풀릴까? 내가 생생한 실례를 들을 수 있어.
이 사건은 아마 본부에서 쉬쉬했으니까 교육 과정에서 틀림없이 빼놓았을 거야. 공작원들이 알면 사기가 떨어지니까. 철석같이 믿었던 고첩은 진즉 전향했고 그를 데리러 간 공작원 역시 전향해서 남쪽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까발려서 교육할 수 있었겠어. 그러나 그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 북에서 하는 일이 늘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가요?”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김동식이라는 남파 간첩이 있었지. 물론 가명이야, 나는 본명을 모르고 있는데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남쪽에서는 공개된 비밀이야.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 쪽은 완전히 개방사회니까 쉬쉬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애를 둘이나 낳았지. 올해 3월에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어. 3년쯤 지나면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김동식은 1990년 1차 침투에서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거물 고정 간첩이었던 이선실을 대동 월북했었지. 그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던 거야. 하지만 조직 내부에서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다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라는 뒷담화를 들어야 했어.
당신네 본부 상층부는 든든한 빽만 믿고 뱃속에 자만심만 가득 들어있는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야. 그건 우리 쪽도 마찬가지야. 그것들은 책임감이라고는 눈곱 털끝만큼도 없는 자식들이야.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남한테 떠넘기면서 책임을 지길 싫어하지. 남이 공을 세우면 시기 질투하고 실패하면 이리 떼처럼 달라붙는 거야. 그게 바로 관료주의야. 공산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불문하고 관료주의의 병폐란 말이지. 김동식이 공을 세우자 시기하면서 그렇게 험담을 늘어놓은 거지. 어떤 조직이건 질투를 하거나 잘못되길 바라는 사람이 몇 사람쯤은 있게 마련이야. 물론 사람들은 원래 성공한 사람을 제일 미워하긴 하지.
그래서 김동식은 ‘내가 실력을 증명할 방법은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1995년인가 다시 남파됐는데 그때는 승려로 위장한 고정 간첩 ‘봉화1호’를 복귀시키고 주사파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말이야 1980년 봄에 남파된 그 고첩은 언젠가 우리에게 넘어왔어. 그렇지만 북에서는 모르고 있었지. 북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농락당한 것이지. 1994년 겨울에 그가 ‘중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나를 빨리 북으로 데려가 달라’는 무전을 친 거야. 당연히 우리가 사주를 한 건데 그를 복귀시키기 위해 김동식이 다시 내려온 거지.
그쪽 상층부는 변절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혹시 역공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막무가내로 김동식을 내려보낸 거지. 그는 희생양이었어.
그가 봉화1호와 접선을 시도하려고 부여의 한 사찰로 찾아갔다가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지. 우리는 내려올 줄 알고 잠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고 쓰러졌고, 다른 공작원은 숨졌어.”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차마 공개할 수 없었겠죠. 교육 과정에서 빠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걸 무슨 낯짝으로 교육 자료로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작원들이 들으면 마음속으로 은근히 동요할 텐데요.”
“변절자를 엄청 싫어하지. 복수를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하지. 물론 복수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니까 사람들은 크고 작은 복수를 꿈꾸지. 평범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복수하겠다고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거야. 사람의 가슴 속에 숨겨 둔 복수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건 없지.
총국장도 그 지독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야 하니까…… 그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에 김학모를 살해하여 성과를 내서 지도자 동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지금쯤은 코가 납작해졌겠지. 지도자 동지가 ‘그 영감태기가 너무 나불댄단 말이지’라고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도자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라고 장담했을 거 아닌가.
또다시 옛날얘기를 해야 되겠군……
이수근은 탈북 당시 북한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라는 거물 인사였어. 그 당시 남쪽에서는 그가 판문점을 거쳐 극적으로 귀순하자 영웅 대접을 한 거야. 그러나 남쪽 역시 그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천국은 아니었거든.
다시 자유를 찾아 제3국으로 탈출을 시도한 거지. 홍콩을 거쳐서 사이공 탄손누트 공항까지 갔는데 거기서 마지막 순간에 붙잡혔어. 아주 아슬아슬했지. 홍콩에서는 가발이 벗겨지고 가짜 수염도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그렇지 뭐…… 그 당시 중정은 자신들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난리가 났지. 위장 귀순으로 의심하면서 옴짝달싹 못 하게 밀착 감시를 했어. 이수근은 자유를 찾아서 내려왔는데 숨이 막혔을 거라고.
그때 감찰실장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파면되었어. 그러고 나서 온갖 폭력과 고문을 행사해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바로 사형시켜 버렸어. 그는 재판을 제대로 받을 기회도 없었다니까.
북한 입장에서는 앓던 이가 저절로 빠진 거니까 얼마나 시원했겠어. 북에서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지…… 공화국을 배신한 변절자는 말로가 그렇게 된다고 선전했어. 남쪽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살인마라고 비난하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 하늘이 처벌을 내린 거라고 했지. 남조선은 절대로 배신자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그 당시 그 사건의 총 지휘자는 누구였죠?”
“그때는 정보부장이 김형욱이었어. 그 사람이 이수근을 고문으로 조작해서 사형을 시켰던 장본인이야. 그 역시 나중에 비명횡사했다네.”
“세상은 돌고 도는군요.”
“그렇다네……”
“그건 합법을 가장한 살인 행위가 아닌가요. 암살과 다름없다는 것입니다. 국가기관에서 법률이라는 위장막 없이 공개적으로 살인을 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래도 민주주의 국가는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 테러만 있고 백색 테러는 없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런 건…… 그냥 넘어가지.
판도라의 상자를 다 열어서는 안 되는 거야.”
“왜 그러세요. 솔직하지 못하시군요. 인혁당 사건은 어떻습니까? 그건 테러보다 더 악랄한 살인행위 아닌가요? 국정원에 암살팀은 없나요? 최신 독극물인 노비초크를 몰래 들여와 사용하는 독극물팀은 없나요? 특수도청팀이 있지 않나요? 모든 첩보기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조직 아닌가요?”
“계속적으로 곤란한 질문을 하고 있구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 분야가 아니니까 알 수 없지. 비밀첩보기관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몰라야 하는 정도가 아니야. 엄지손가락이나 검지손가락이 하는 일을 새끼손가락이 몰라야 하는 거야.”
“왜 애매한 말씀만 하십니까? 저는 사진으로만 확인했습니다만 내곡동에 있는 국정원 본부는 정말 어마어마하더군요. 여섯 개의 건물이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무슨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건물 중에서 비밀스러운 장소 또는 별도 안가 어디에서 그 팀은 극비리에 활동하겠지요.”
“우리는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 그렇지만 이건 말할 수 있을 거야. 공산주의는 부르주아 계급과의 계급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테러가 필수적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야.
자기 방어적인 경우에 한해서 불가피한 수단인 거야. 그쪽은 아주 편리할 거라고. 공산주의 이념이나 당을 위한다는 명분만 있으면 되니까.”
“그게 그거 아닐까요? 아전인수격이란 말입니다. 아주 괴상한 논리군요. 이번 암살 작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고 생각하시나요? 저를 살인청부업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정보활동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결과가 가장 중요하지.
결과만이 모든 걸 정당화해 준다는 거지. 첩보전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단 말이야. 그 점에서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나 차이가 없어.”
“소련 KGB는 암살을 ‘적극적 조치’라고 했습니다만…… 그건 암살이 아니라 처단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의 지엄한 명령에 의해 임무를 수행하지요.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국가의 명령에 의해 인간에게 총을 쏘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수 정보기관은 그런 일을 하라고 만든 거 아니겠어. 이스라엘의 ‘모사드’ 이야기로 대신하겠어. 모사드는 세계의 모든 특수기관의 모델이야. 우리 언론은 국정원더러 왜 모사드처럼 하지 못하냐고 해. 그래서 국정원 개혁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모사드가 나와. 모사드의 작전 부서 중에 ‘메차다’가 있는데 이게 암살, 납치, 폭파 전문이야. 산하에 ‘단검’이라는 의미의 ‘키돈’이라는 암살 전문 조직이 있지.
그들의 표어가 ‘일어나서 먼저 죽여라’이지. 그렇게 해서 모사드는 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2,700번이나 암살 작전을 수행했어. 아랍 측에서는 ‘살인기계’라고 비방하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모사드는 틀림없이 살인 기계야. 변명의 여지가 없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담하지.”
“공산주의 세계의 배반과 복수라는 위대한 전통을 반드시 이해하셔야 합니다. 물론 문제가 많이 있기는 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그게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는 게 더 떳떳한 거 아닐까요?”
“당신은 하수인으로 이용당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데 일이란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첩보전은 인내와의 싸움이지. 너무 서두르면 반드시 실패하게 되어있어. 아무리 리허설을 많이 해도 실제 상황에서는 돌발 변수가 생긴단 말이지. 결론은 그거야. 당신이 임무 수행에 성공해서 돌아가도 결국 팽 당한다는 거지. 김동식처럼 말이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르다고. 그걸 알아야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어. 1983년이면 당신은 몇 살이었을까?”
“여섯 살 꼬마였고 유치원에 다닐 때입니다. 북에서는 쉬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주 긴 이야기이지만 최대한 요약해서 말하겠어.
그 당시 버마 주재 우리 대사관의 보고서와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한 내용을 종합한 거야. 지금은 버마가 미얀마로 이름이 바뀌었네.
어쨌거나 들어보면 금방 이해가 되겠지.
그날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호신용으로 북한제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안전핀을 빼서 던지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어. 그런데 강민철이가 안전핀을 빼자마자 바로 그 순간 터져버려서 팔 하나를 잃었고 여동생에게 선물하려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니까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바로 터진 거야. 그 순간 강민철은 깜짝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해.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지. 그래서 강민철은 북한 당국과 정찰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적 비애를 느끼고 절망했기 때문에 모든 걸 불어버린 거야.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지만 강민철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북한의 비인간적인 테러리즘을 고발했기 때문이야.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수감되어 있었던 버마의 인세인형무소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모를 수도 있겠지. 북은 온 천하가 아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까.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보호하는 거야. 국가가 국민을 그렇게 내팽개치면 그걸 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심학무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린 맨날 목숨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어요. 휴전선에서 끊임없이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서였죠. 그게 도무지 쓸데없는 침투 작전인데 여러 번 실패해서 몰살당했거든요. 그래도 명령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한단 말입니다.”
국장이 말했다. “그렇게 도구로 이용당하면 억울하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인간으로서 반발심이 생길 거라고. 아무리 공작원이라고 해도 말이야. 공작원도 인간이라니까.”
“……”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거야. 강민철 선배를 생각해 보라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자신을 하수인으로 이용한 그들에게 복수하라니까. 복수가 필요하지.”
“복수하란 말씀이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답게 살라고……”
심학무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슬픈 운명을 떠올리자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떤 불가사의한 운명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럴수록 성급하게 술을 꿀꺽 삼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두 번 다시 없는 기회이다. 내 남은 일생의 운명이 달려 있지 않은가? 지금쯤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 아닌가? 더 늦기 전에……?
“그럼 무슨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신도 전향서를 쓰고 나서 우릴 도와주면 대학은 물론 대학원 진학까지 도와줄 수 있어. 남한에는 지금 현재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사회학 박사를 비롯해서 많은 탈북자 박사가 있단 말이지. 탈북자들은 여러 분야에서 학위를 받았어.”
“저더러 어떻게 하란 말씀이죠?”
“먼저…… 합신센터를 무사히 통과한 것으로 하자고. 하나원에 입소해서 거기서 외박을 나가 북경과 연락하는 거야. 그런 절차는 우리가 다 준비할 거니까 조금도 신경쓸 거 없어. 그리고 접선할 때는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지 않겠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 여길 나가면 북경의 지시에 따라 접선 장소에 나가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고첩이 은밀하게 무기를 건네주고 동선을 알려주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지시할 게 아니겠어.
하지만 뒷일은 우리가 잘 처리할 거니까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수사도 진행하지 않고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을 거네. 그걸 보장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봉화1호’처럼 배신해서 이중간첩이 되라는 것이지요.”
“글쎄 말이야…… 배신이니…… 이중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좋지 않아.”
“미리 잠복해 있다가 고첩과 접선하는 순간 덮치겠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진행되겠지. 이게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우리는 김상빈이 배신한 게 아니라 우리의 치밀한 정보망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고첩의 정체를 마침내 밝혀내서 미행하다가 현장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처리한단 말이지. 그렇게 언론에 발표할 거야. 그렇게 되면 면책이 되는 거지.
본부는 당신을 비난할 수도 없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
“아주 그럴듯한 시나리오이군요. 결국 그게 바로 ‘독 안에 든 쥐 작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작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우리는 남쪽에서 말하는‘독 안에 든 쥐잡기’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찰국의 수치였지요. 깜빡 속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에 대해 교육을 받았습니다. 단단히 복수를 했지요. 그런데 김동식 사건도 들어보니까 결국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제일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배신 아니겠습니까?”
“봉화1호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잠깐 동안이나마 자유를 맛보았으니까. 언젠가 지옥 같은 북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었어. 그래서 공을 세우고 공소보류 처분을 받아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거야. 매일 긴장의 연속인 고첩 생활은 그 정신적 긴장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처음부터 돈에 매수된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지.
그걸 배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거였어.
잘 생각해보라니까.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야. 한창 젊은데. 당신의 인생,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귀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낭비하는 게 아니야.”
“저에게도 미래가……?”
“아직 젊었어.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가.
내가 괜히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당연히 법적 근거가 있으니까 약속할 수 있는 거야. 국가보안법 제16조는 이런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고, 제20조는 공소제기를 보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단 말이지.”
“저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북한은 당신같이 신체 건강하고 똑똑한 청년들을 골라서 위험한 공작에 몰아넣고 있어. 그렇지만 죽든지 살든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지.
경우에 따라서는 공작원이건 전투원이건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과정이 생략될 수도 있어. 위험한 임무이니까 그냥 죽으라는 거지.
그런 일이 너무 다반사로 일어난다니까. 공작원은 오랜 기간 경험과 노하우를 쌓아야만 하니까 한 사람의 요원이라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단 말이지.
그런데 높은 분들은 자기 자식은 귀중하니까 절대로 공작원은 안 만들지.
작성일:2023-02-10 11:05:56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