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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대화와 설득, 전향 (3)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2-10 11:06:37
조회수
226
처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사지로 내몰리는데 말이야. 그 분위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겠지.”
“대남 공작원을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거였어요. 공작원과 죽음을 동일시했습니다. 훈련 과정에서 교관들과 선배들은 항상 ‘자폭’이니 ‘자결’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외고 다녔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너무 두려웠지요. 꿈을 꾸면 악몽을 꾸었습니다. 총에 맞아 죽는 꿈이었습니다.”
“무슬림의 지도자들 말이야…… 그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자식은 애지중지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그러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인 사회 밑바닥 출신 어린애들 허리에 폭탄 벨트를 묶어서 자폭 테러를 일삼는단 말이지.
본부는 당신을 볼모로 잡기 위해서 은근히 결혼을 강요했어. 그렇지만 현명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고 내려왔지. 그건 잘한 거야.
공작원의 아내는 공작원이 남에서 체포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대개 자살했거든. 여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억압적인 환경을 견딜 수 없는 거야.”
“여자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란 완전히 믿을 건 아니야. 여자의 예쁜 얼굴도 그렇지 않은가. 일 년이나 이 년쯤 지나고 나면 아무리 좋아봐야 그게 그거라고. 나는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
“그 여자를 믿을 수 없단 말씀인가요. 평양에서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텐데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하는 거죠.”
“당신은…… 여자라고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 연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탈북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을 했던 그 여자도 모든 걸 털어놓았다니까. 그 여자는 영리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야.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거든.”
“박정아가 무슨 말을 했죠? 합신센터에서는 저더러 강간범이라고 했습니다. 강간범으로 기소하면 그것만으로도 10년 넘게 살 수 있다고 했죠.”
“우리 세계에서는 여자를 믿으면 안 되는 거야. 그 여자가 다 불었어. 성관계나 술 마신 거, 마약한 거 말이야. 처음에는 입을 다물었지만 조사관이 가만두지 않았지. 그게 강간한 거로 돼 버렸어.”
심학무가 얼굴을 찡그렸다. 술잔 속에 반쯤 남은 마지막 술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게. 남자란 여자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단 말이지. 여자 쪽도 마찬가지고.”
“지금 이 지경에 뭐가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국장님은 결혼은 하신 겁니까? 애들은 있습니까……?”
“젊은 장교 시절 당연히 연애도 많이 하고 결혼도 했었지. 아내는 중학교 과학 선생님이었어. 내가 공작원으로 있으면서 맨날 출장 다니고 연장 근무하고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니까 아내는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어 했지. 임무 수행이 불규칙적이니까 인생살이도 점점 불규칙해졌단 말이지.
애가 생기기 전에 이혼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고 깨끗이 합의 이혼했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외롭겠지만 혼자여야 했지.
벌써 오래전 일…… 재혼은 하지 않았어.
진짜 스파이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지. 사랑에 빠져서도 안 되는 거지. 나는 가슴 속에 늘 절대적 사랑을 꿈꾸고 있었지만 말이야. 스파이에게 진짜 사랑은 무서운 독이야. 그러면 업무에 집중할 수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쓸데없이……”
“아니야. 어차피 해야 할 이야기였어. 우리 어머니는 나를 낳으면서 난산으로 엄청 고생을 했다네. 거의 죽을 뻔한 거지. 그래서인지 내 인생은 처음부터 꼬인 것인지도 몰라.”
“국장님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거 아닙니까?”
“이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것은 아니야.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인 거야. 그리고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지. 우리는 더 이상 싸워서는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남북 모두 파멸이 있을 뿐이야. 평화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게.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다니까. 수사를 할 수밖에 없어. 법원은 살인 미수가 겹치니까 사형을 때릴 수도 있어. 아니면 무기징역을 때릴 수도 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젊은 청춘을 그렇게 썩히면 되겠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감옥은 감옥이야. 평생을 그 안에서 썩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러면 정신도 육체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겠지. 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자살할 수도 있어. 실제 장기수 중에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다구.”
“저의 이용가치는 딱 한 번뿐이겠네요. 접선 장소에서 고정 간첩을 잡고 그를 족쳐서 고첩의 연결망을 일망타진하면 말입니다. 그 후에는 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부담스러워하겠지요.”
국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북과는 다르지. 쓰고 나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걸 알라고. 김동식은 말이야 불행하게도 접선하다가 총을 맞고 체포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별거 없어. 그래도 우리는 그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완치되게 해주었고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았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지.”
심학무는 식은땀이 흐른다. 눈맞춤을 피한다. 눈을 감는다. 무척 불안하고 초조하다. 말을 더듬는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그걸 알게나. 시간이 없어. 당신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북경은 어떤 낌새를 챌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작전을 포기할 거라고. 버스가 떠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없다네.”
“두렵습니다. 두렵단 말입니다.”
“당신과 접선하려는 그 고첩은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고 거물일 수도 있지. 만약 하수인이라면 그 뒤에는 거물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거물은 오랫동안 우리들이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한 인물일 수도 있어.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북한은 남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여기는 풍족하고 자유가 넘쳐나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에요. 북한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비참하지요. 저더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되라고 하시는군요. 유다는 결국 자살했어요. 김학모 선생이 배신자인데 그 배신자를 응징하려고 내려온 제가 또다시 배신자가 된다면……?”
“이건 절대로 배신의 문제가 아니야.”
“저는 또다른 배신자가 되고 싶지는……”
“북에서는 예수님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단어를 극도로 두려워하지.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반갑군. 할렐루야! 할렐루야!”
심학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웅얼거린다.
“국장님이…… 할렐루야를……”
“난 처음부터 무신론자야. 물론 신을 믿지 않는 것도 또다른 신앙이긴 하지.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관대한 불가지론자로 변했지. 아마 범신론에 가까울 거야. 가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 살면서 신을 믿어보라고. 그러면 신의 뜻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신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아야만 되지. 신의 가슴 속에 생명과 평화가 깃들어 있으니까.
이건 알아야 할 거야. 내가 말하는 신은 자신의 신을 말하는 거니까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거지. 누구도 신을 강요할 수는 없어. 자기가 알아서 믿어야만 하는 거야. 그러면 어느 순간 신이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어……”

짧은 여름밤이 꽤 깊어진 것 같다.
보드카는 완전히 비어있다. 그들은 나중에는 입가심으로 각자 알아서 맥주를 병나발로 마셨다. 국장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다. 그는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해서 독한 술을 목구멍에 털어넣어 얼큰한 기분이 들게 하고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가 주는 편안함을 느끼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대화가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설득에는 강압적이고 까다로운 태도는 전혀 효과가 없다.
통상 남파 간첩은 처음에는 북에서 혹독하게 훈련을 받은 대로 완강하게 입을 닫는다. 그래서 입을 열게 해야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이 완전히 노출되는 순간 당황하고 공포에 빠져 결국 실토하면서 온갖 유혹에 넘어오기 마련이다.
심학무는 전혀 달랐다. 그는 원래 자기 신념에 충실한 지독한 확신범일 수 있다. 국장은 웃는 얼굴로 조사실로 들어와서 그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두려웠던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심학무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심학무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말의 효과를 가늠하면서 대화를 주도하고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많이 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기 양주 한 병씩을 마신 셈이다. 그것도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물만 마시면서. 아무리 담배를 많이 피워대고 술을 연거푸 마셔 얼큰한 기분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도 그들의 대화 속 심연에 깔려있는 긴장감을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술과 담배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국장은 자신이 상대방의 의중이나 반응도 살피지 않은 채 목적도 두서도 없이 무슨 말을 마구 지껄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의 입을 떠난 말들은 겨눈 표적을 정확하게 맞히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파편이 튀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게 글이었다면 문장들 위에 박박 줄을 그어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한 번 내뱉으면 어쩔 수 없다. (프로이트식 말실수란 무엇인가. 아무리 말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을 해도 결국 똑같은 말실수를 한다는 거 아닌가.) 심학무는 내내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신경을 미묘하게 긁었다.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침내 수세에 몰렸고 심학무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그의 마지막 공작 임무였는데 말이다.
그는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런…… 정말 단단한 인간이야. 짧게 때로는 길게 대답했지만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걸 빠짐없이 말했단 말이지.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지껄인 것 같군. 그러나 어쩔 수 없지. 대화를 이끌고 나가야 했으니까. 그를 설득하려면 사무적이어서도 안되고 조용하고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갈 수도 없었던 거야.
내가 너무 많이 가식적이었던가…… 위선적이었던가…….
하지만 맹세코 나는 사기를 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실제 사실과 어긋나는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진실한 대화는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국장이 마무리하려는 듯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 것 같구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수사를 잘 받으라고. 당신은 역사적 증언대에 서 있는 셈이야. 올해가 2010년이란 걸 기억해두게. 그러니까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피곤한 일이야. 그러지 않도록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당신의 운명을 쥐고 있으니까.
그걸 알라고…… 그걸 알라니까……”
그가 마지막으로 작별의 악수를 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지만 심학무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손길을 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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