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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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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대화와 설득, 전향 (1)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2-10 11:04:51
조회수
247
대화와 설득, 전향 轉向

그 무렵 심학무는 국정원의 높은 분인 북한 담당 염무성(廉茂聖) 국장과 면담하게 되었다. 염 국장은 오십 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16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키에 머리칼은 점점 빠지고 있었으며 귀 뿌리 주위 촘촘한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닳고 닳은 아주 노련한 조사관 출신처럼 보였지만 권위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장 차림이 아니라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는 3사관학교 출신으로 원래 국군 정보사령부 공작단 소속 장교였다. 정보사 공작단은 국정원의 예산 지원과 감독하에 대북공작을 전문적으로 실행했다. 그는 연길 지역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한 실적을 인정받아 특채 형식으로 그 당시 안기부에 스카웃되어 대북공작을 담당하는 제2차장 산하 해외사업국에서 몇 명의 비밀 공작원을 지휘하는 전문 공작관으로 근무했고(흔히 공작관과 그가 지휘하는 공작원은 바늘과 실 또는 야구에서 포수와 투수에 비유되기도 한다) 언제부터인가 제1차장 산하 대공 수사실 소속이 되었다.
그는 계급정년에 걸려 퇴직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말이 국장이지 실제 직급은 그 아래였고 임시 한직에 머물러 있었다. (인맥과 학벌, 지연 등이 제한되어 있어서) 승진할 가망은 전혀 없다. 더욱이 홑몸이다. 요즘은 자기 연민에 빠져서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이나 낮이나 쉴 새 없이 심장이 두근거린다. 매일 줄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지만 술로는 해결할 수 없다.
주변 가까운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하루빨리 재혼하라고 강권을 하지만 그는 차일피일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긴 여름날의 태양이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국정원 대공상담실은 강남 테헤란로 이면 도로에 있다. 그들은 아늑한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잡담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응접실은 꽃무늬가 들어있는 회색 벽지로 둘렀고 바닥에는 단순한 무늬의 카펫이 깔려 있다. 북쪽으로 난 큰 창문에는 하얀 플라스틱 커튼이 쳐져 있다. 전체적으로 수수했고 단순했다. 벽에는 흔해빠진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조 그림 하나 걸려있지 않다. 부하 직원인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의 남녀가 시중을 들었다. 남자 직원이 말했다. “국장님, 저희는 옆방에서 대기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수고했네.”
처음에는 둘은 잠깐 동안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다가 술이 돌면서 어느 순간 분위기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국장은 사나이끼리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는 커피보다는 술이 좋다고 하였다. 탁자에는 스웨덴 보드카 앱솔루트 두 병과 맥주 두 병, 양담배, 술안주 등이 이미 차려져 있었다. 안주는 마른 안주와 과일, 달걀 오믈렛으로 만든 샌드위치, 치즈 등이었다.
국장은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부었다. 둘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다음 단숨에 들이켰다. 심학무는 술이 혀끝을 맴도는 것을 느끼는 순간 뱃속이 뜨거워지며 열기가 훅 치밀어 올랐다. 잠시 아찔하면서 몽롱한 상태에 빠졌다. 긴장이 풀리고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목에 걸려 있던 무언가 풀어졌다. 그는 ‘역시 술이야’라고 생각했다.
국장이 말했다. “염무성 국장이오. 말이 국장이지 지금은 별 볼일이 없지. 옛날이 그립다네. 우리 기분 전환하자구…… 상의를 벗으라구.
술 마시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이거 북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스웨덴 술이야. 보드카 맛은 아주 미묘하지. 우리끼리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술을 마시면 혀가 풀리니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은 거야.”
국장의 예리한 눈은 전문가답게 심학무를 평가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길에 심학무는 자신이 신참 풋내기로 느껴졌다. 스무 살 정도 연상이었고 공작원으로서 경험이 훨씬 더 풍부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같이 일하는 사람을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훨씬 더 깊이 그리고 더 잘 알게 된다. 서로 만나면 근육과 신경은 긴장하여 아주 조그만 제스처나 얼굴의 표정에도 반응하고 모든 감각기관은 더욱 민감해진다. 상대방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이고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몸짓이나 얼굴의 표정을 관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아주 사소한 행동의 미묘함을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면 가장 은밀한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심학무는 어리둥절했지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술은…… 처음 구경하지요.”
“심신이 완전히 지쳐 있을 거야. 이런 때는 술이 최고의 보약이지. 어떤 골빈 의사가 독한 술이 머리를 썩게 만든다고 헛소리를 했지만…….”
“지금 산산조각이 난 상태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양주를 마실 때 괜히 폼 잡으려고 술과 얼음을 섞어 마시는데…… 그건 아냐. 술맛을 버리는 거지. 그러려면 차라리 맨 물을 마시는 게 낫지. 괜찮겠어?”
“저는 상관 없습니다.”
국정원 사람들이 심학무를 (최고급 가죽 소파, 크롬 도금한 내부 장식, 천장과 바닥을 네온처럼 비춰 주는 LED 조명, 웅장하게 울리는 음향 시스템, 물병이 담긴 아이스박스, 선루프 등이 설치되어 있는) 고급 리무진에 태워서 내곡동 본부에서 출발하여 서너 시간 동안 강남대로에서 한남대교를 건너 장충동으로, 워커힐 호텔, 남산 타워, 세종로, 연세대학교, 여의도 63빌딩을 거쳐서 다시 역삼동으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니까 모처럼 바깥 바람을 쏘여 주려 한다고 생색을 냈지만 실제는 남한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북한과 비교해보도록 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게 목적이었다.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니까…… 기분이 어땠어?”
“부럽군요. 사람들이 숨 쉬고 살고 있으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그러나 거기에 속지는 말게. 서울은 만원이라네. 인간도 세상도 너무 복잡하지.”
“감사합니다만…… 갑자기 정장을 억지로 입히고…… 리무진에 태워서 뭘 어쩌겠다는 거죠?”
“오해하지 말게. 그 동안…… 사죄하는 의미로 받아 주게.
이건 수사하는 게 아니야. 조서를 작성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 자유스럽게 대화를 하자고……. 서로 궁금한 게 많을 거 아닌가. 나도 군 장교 출신이고 오랫동안 공작원 생활을 했으니까. 우리는 같은 공작원 출신으로 서로 통하는 데가 있단 말이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지. 내가 만약 연길에서 체포되어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솔직하자고…….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테니까 진의와 숨겨진 의도를 가늠하려고 애를 쓸 필요는 없을 거야.”
“간첩들이 말하는데 솔직한 대화가 가능할까요? 제가 반박을 해도 화를 내시지 않겠다는 건가요?”
“왜? 화를? 반박을 실컷 하라고.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성립하니까. 상대방의 말을 끊고 끼어들면 안 되는 거지만. 당신을 빈정거리고 싶지도 않지. 그건 예의가 아니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가감없이 하겠습니다. 질문을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지는 않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우리가 이 자리에서 내뱉는 견해이건 신념이건 서로 일치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대립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겠나?”
“제가 굳이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는……”
“오해하지 말게.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말이야…… 문제의 해결 여부와는 상관없이 마음의 짐이 상당히 줄어든다고 하지.”
“그럴까요?”
“나에게도 말 못할 고민이 많다네. 내 인생을 돌아보면 자기 자랑을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격렬한 토론은 피하자고.
그러면 술맛이 떨어지니까. 차라리 잡담하는 기분으로 얘기를 하자는 거야. 화제를 바꿔보지. 남자들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못하면서 많이 마시는 것처럼 자랑을 하는데 술을 마셔보면 금방 들통이 나고 말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마시자고. 우리 편안하게 이야기하자고…… 긴장할 필요는 없다고. 내 말이 오락가락하면서 옆길로 샐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합동신문센터에서는 마음 놓고 담배 피우기도 어려웠을 거야.
규칙이 그러니까. 이거 한 번 피워 보지. 미제 말보로 골드인데 이게 조금 순하긴 하지만 맛은 일품일걸. 북쪽 담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거야.”
“담배 없이는 못살 거 같습니다. 탈북하면서 버스나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웠거든요. 그런데 합신센터가 기가 막혔지요. 조사관들은 내 앞에서 연기를 마구 뿜어대며 담배를 피웠습니다. 저더러 자백하면 담배를 주겠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담배는 원기를 북돋아 주니까 기분을 좋아지게 하지. 담배도 마음대로 피우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 바에야……”
“담배는 세상에서 가장 값싸게 즐길 수 있는……”
“스파이들은 대개 골초야. 환경이 그렇거든. 긴 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단 말이지. 기다리는 게 우리의 운명이야. 긴장을 풀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그때는 담배가 최고야. 담배는 진정제 역할을 톡톡히 하지.”
“국가적인 모순이지요. 국가가 운영하는 담배회사가 담배를 생산해서 팔아먹으면서 한쪽에서는 금연운동을 국가적으로 펼치고 있으니까요.”
“지친 기색이야…… 더운 여름에 조사받으면서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어……? 지금 정신이 산만해서 제정신이 아닐 거야.”
“술이라면……”
“실컷 마시고 취해보게. 그러면 본 모습이 튀어나올 거니까.”
“저는 조사과정에서 본 모습이 충분히 노출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내 고향이 남쪽 끝 바닷가야. 지도에서 보면 길쭉하게 바다로 뻗어있는 반도야. 면사무소에서도 십 리를 더 들어가는 바닷가인데. 나는 가난한 어부의 자식이야. 부모님은 평생을 거친 바다에서 살았어. 나는 어렸을 적 바다를 정말 두려워했지만. 파도에 휩쓸려 멀리 떠밀려갈까 봐 벌벌 떨었던 거야. 큰형님은 지금도 고향에서 바닷일을 하고 계시지. 당신 역시 산골 중의 산골인 함경도 갑산 출신이던데……?”
“지금은 양강도 갑산군입니다. 억지로 쪼개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사이에 양강도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갑산은 함경북도 길주와 붙어있어요.”
“언제부터 갑산에 살았지?”
“저는 증조부 때 일은 잘 몰라요. 할아버지 때부터……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해방이 됐을 때 얼마쯤 되었을까.”
“아마 사십 대 초반쯤 되었을 거예요. 할머니가 두 살인가 세 살 위인데 할머니는 길주 출신이에요. 할아버지는 아마 글을 읽을 줄 몰랐을 겁니다.
그래도 가난한 농민 출신이니까 의식이 있어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익 사상에 빠져 농민조합에 가입하였답니다. 그 때문에 경찰서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매를 맞고 나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김일성이 단행한 토지개혁령에 의해 상당한 혜택을 받았을 거 아닌가?”
“1946년인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 하에 토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때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농민을 네 가지 계층으로 분류했는데 5정보 이상의 땅을 소유한 사람은 지주, 그 다음은 부농, 중농, 빈농 순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빈농에 속했습니다. 북한 정권은 모든 빈농에게 땅을 주면서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념 같은 것은 잘 몰라도 갑자기 농토가 공짜로 생기니까 너무 좋아서 마을에서 제일 먼저 공산당에 입당해가지고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6·25 전쟁이 났을 때 아버지는……?”
“아버지는 1949년 갑산고등중학교를 막 졸업했는데 바로 인민군에 징집되어 들어갔어요. 고등중학교 동기 동창인 지주의 아들과 함께 징집되어 신병훈련소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나서 인민군 15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의 다부동 전선에서 인민군이 패퇴할 때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가 오판한 거야.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거든. 그래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니까 8월 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해서 통일을 하라고 특명을 내렸지.
그런데 미군이 개입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당한 거지. 전투에서는 강이란 게 지형상 굉장히 중요하거든. 그게 방어막 구실을 하는데 그 당시 인민군은 허겁지겁 내려오면서 강을 건너는 장비가 없었어. 게다가 보급선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서 끊겼거든. 맥아더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어.”
“남조선에서는 맥아더가 영웅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냉정히 평가해야만 하지.
더글러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했어. 그는 극동사령부 사령관인데도 한국전쟁 발발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어.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중국이 참전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어. 그 역시 심각하게 오판한 거지.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맥아더는 원자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만약 원자탄이 우리나라 좁은 땅에 떨어졌다면 말이야…… 우리 한민족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해 보라고.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지?”
“아버지와 지주 아들은 함께 포로가 된 후 처음에는 부산의 임시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나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전선과 비교하면 식사도 제대로 나오고 잠자리도 그런대로 편했다고 하지요. 그렇지만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의 목숨을 건 투쟁 때문에 포로들이 수없이 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지금은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자리에는 유적공원이 만들어졌지.”
“1953년 포로 교환 당시 아버지는 당연히 북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주 아들은 끝까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에서야 결국 반공포로가 되어 남쪽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지막 만났을 때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조선을 택했다. 남쪽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앞날이 막막하지만 북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돌아가면 착취 계급인 지주 출신이라고 온갖 핍박을 받을 거니까…… 우리 집에 가거든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 내가 막심한 불효자식이니까.’
아버지는 1953년 9월 초순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북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지주 집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이미 인민군에 의해 가족이 전부 총살당했고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지주 아들은 지금쯤 남한에서 사업에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을 거야. 함경도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하기로 소문이 났으니까. 아니면 한밑천 장만해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 수도 있어.”
“아버지는 인민군에서 10년을 복무한 후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우리 형제들을 낳은 거지요.”
심학무는 회상에 잠겨 잠시 눈을 감았다. 조부모님, 부모님, 큰형님, 누나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그리고 어린 시절 고향의 집과 마을이 차례로 떠올랐다. 얼마나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는가. 아버지는 오랫동안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전쟁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는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이가 한참 들어서 머리가 하얘지자 가끔 띄엄띄엄 단편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산굽이를 감돌아 흐르는 강, 낙동강 전선, 15사단, 폭발음, 탱크의 굉음, B-29 폭격기 편대의 폭탄, 불길, 공포, 너무 많은 죽음, 시체 더미와 배설물, 살 썩는 냄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온몸을 기어다니며 득실거리는 이. 판문점의 황량한 벌판. 벽돌과 잔해뿐인 침묵에 빠진 함흥의 모습.
그가 군관 요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어머니는 수심에 잠겨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예민한 직감으로 그때 벌써 그의 기구한 운명을 예감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어머니의 사진을 가지고 내려올 수 없었다. 그는 가짜 이름으로 탈북자로 위장했기 때문에 사진이나 편지는 물론이고 메모 쪽지 하나 가족을 생각나게 하거나 기념하는 그 어떤 사소한 것도 가지고 내려올 수 없었다.
“당신은 아직도 6·25가 북침인 거로 알고 있는가?”
“저도 알 만큼 알고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라고. 내 말이 틀렸는지 말이야. 북한은 남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야. 당신 가족은 출신성분이건 사회성분이건 흠잡을 데가 없으니까 핵심 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군. 그리고 전형적인 농촌 출신이니까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좋은 가정이야. 그런 가정에서 무난히 자랐는데 하필이면 공작원이라고……. 그동안 조사받느라고 고생 많았어. 거대한 조직을 상대로 혼자서 싸워야 했으니까.”
“함량 부족이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약물을 입속으로 주입하거나 전기충격을 가했기 때문에 실토한 거 아니야?”
“글쎄 말입니다…… 뭐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까요?
저를 가지고 놀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주 병신을 만들었지요.”
“세상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천지개벽을 하고 있는데 그쪽은 아직도 1950년대 냉전시대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지.”
작성일:2023-02-10 11:04:51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