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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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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소설> 고정 간첩 (下)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3-02-10 11:04:11
조회수
183
“그들을 깨우치고 일으켜 세워야 하오. 비정규직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하오. ‘이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옳지 않아요. 정당하지 않단 말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권리를 갖고서 그걸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본가들이 양쪽을 분리시켜서 서로 싸우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의지박약이고 겁쟁이에 불과합니다. 노예이고 바보입니다. 너희들끼리 똘똘 뭉쳐라! 압제자들을 맹렬히 증오하고 그들과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 압제자가 누구입니까! 자본가들이고! 정규직이고! 정규직 노조 아닌가요!”

“언젠가 어떤 한계에 다다르면…… 비정규직들이 폭발하겠지요.”

“강남 좌파의 정체는 뭐요?”

“강남 좌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이름만 번지르르하지요. 그들과 만나보면 그 순간부터 부르주아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좌파가 쓸모없다고……?”

“강남 좌파의 실체를 아셔야 합니다. 그 사람들 모순투성이예요. 그들은 머릿속과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에서만 급진적인 좌파이고 실제는 부르주아 중에서도 상급 부르주아입니다.”

“위선자들……?”

“그 사람들은 잘난 척을 잘하는 자기중심주의자들이죠.”

“사생활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참견한 일이 없었소. 이건 중대한 사항인데…… 장 동무가 어떤 경우에도 북으로 송환되면 단호히 거절하겠다는 말도 명심하고 있소. 나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킬 것이오.”

“고맙습니다. 저는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물들어있습니다. 북에 가서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저는 죽는 편이 낫습니다.”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말할 필요는 없네. 나는 평생 그렇게 살았으니까 항상 사람을 의심하는 성향이 있어서 대화 중에도 말 한마디 한마디 신중을 기했소. 그렇지만 동무에게만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탁 터놓을 수 있었지. 여자 문제는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오.

여자와 남자는…… 불가피해요. 그렇지만 너무 깊이 빠져서는 안 될 것 같소. 내 말은 성도착증 같은 걸 의미하오. 거기에 빠지면 성의 노예가 되니까 임무 수행에 실패할 수 있단 말이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저에게는 성도착증 증세는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잠깐씩 만나는 여자가 있기는 합니다.

마누라는 절대 모르는 일이죠. 건강한 남자가 어떻게 여자 없이 살 수 있습니까. 욕구를 해소해야 하니까요.”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단 말이군. 그런 건 바람둥이들이나 잘 하지.”

“여자란 정이 깊이 들면 안 되지요. 워낙 감정적이니까요.”

지부장은 칭따오 맥주를 쭉 들이켰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들은 중국식 식당의 별실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이제는 마른 안주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재떨이에는 꽁초가 가득하다. 지부장이 천장으로 길게 내뿜는 담배 연기에는 그 나름의 많은 고뇌와 상념들이 녹아 있었다. 칭따오 맥주 큰 병 다섯 병 중에서 아직 한 병이 남아있다.

고 지부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대화를 주도했고 장 동무는 공손한 태도를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경청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한 친구처럼 보였다.

지부장이 말했다. “자 자…… 다시 한번 진짜 건배를 하자고. 기분 좋은 날이야.”

“건배사를 말씀하시지요.”

“당연하지. 그렇고말고.

공화국 만세! 공산주의 만세! 남산1호의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역시 맥주는 칭따오야.”

그러고 나서 둘은 단숨에 들이켰고 장 동무가 다시 잔을 채웠다.

“그 시절이 참 좋았어. 둘이서 술깨나 마셨지.”

“거길…… 자주 갔었지요. 뒷골목 끝에 있는…… 만두 맛이 최고였죠. 할머니가 직접 만든 고량주 맛도 잊을 수가 없어요.”

“진즉 사라졌지. 그 지역이 개발되면서…… 지저분한 뒷골목을 정비한다면서 그쪽 동네를 깡그리 뭉개버렸어.”

“지금도…… 눈에 선한데요.”

“나라고 해서…… 여자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할 수가 없지. 남자는 언제든지 여자한테 이끌리게 돼 있어요. 여자도 남자에게 이끌리고. 그런데 북경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단 말이야. 숨바꼭질할 수밖에 없어.”

“중국 여자들 별로일걸요……?”

“그렇지. 나긋나긋하지는 않아. 중국 음식이건 중국 술이건 이제는 지겨워. 너무 느끼하단 말이지.”

“역시 평양 음식이 최고란 말씀이군요.”

“국정원의 대공 요원들이나 기무사의 동태는 어때요? 우리는 옛날처럼 무선 교신을 하지 않으니까 무선감청 장치는 이제 쓸모가 없겠지.”

“그 사람들 인터넷 검열이나 핸드폰 감청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겠지요.”

“작전이건 임무 수행이건 본부와 현장 간 통신 연락은 정말 중요하지. 발신이나 수신 과정에서 암호 조작과 암호 해독이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단 말이지.

옛날 일이지만 우리가 치명적으로 실수한 거요. 중대한 지시사항을 암호화했는데 그걸 풀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 거지. 암호문의 첫 번째 숫자가 풀리지 않아서 해독할 수가 없었던 거야.

1968년 1월 우리 124부대 소속 31명의 동지들이 군사분계선 철조망을 절단하고 남측으로 내려왔지. 삼봉산에서 나무를 하러 온 우씨 형제들을 잡은 거야. 동지들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우왕좌왕하면서 결국 본부에 암호문을 보내서 물어보았는데 돌아온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어 회의 끝에 이들을 풀어줬어. 어쨌거나 암호문을 해독할 수 없으니까 회의 끝에 풀어줬는데 걔들이 경찰에 신고하면서 작전은 실패했어.

그때 냉정했어야 하는데 그 어린 애들이 너무 불쌍해서 인간적으로 동정을 한 거요. 손목에 차고 있던 일제 시계까지 풀어주면서 살려준 게 화근이 된 거지.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한 명은 북으로 귀환했지만 김신조는 남으로 투항해서 완전히 배신자가 되었지. 그렇지만 천신만고 끝에 북으로 살아 돌아온 박재경 선배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대장으로 승진해서 인민군 총정치국 부총국장까지 지냈어. 그때 해독되지 못한 암호문은 ‘원대 복귀’였어.

암호문을 제대로 해독했더라면 전원 무사히 철수했을 것이고 29명이나 되는 귀중한 목숨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어.”

“IS 같은 이슬람 테러조직도 감청이 어려운 해외 메신저를 이용했습니다. 인터넷 번호와 암호책은 매번 적절히 교체하고 있습니다.

옛날 이메일로 교신할 때 썼던 은어들은 너무 구식입니다. 저는 중국으로 자주 출장을 가서 직접 만나 처리하니까 더욱 안전합니다. 국정원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도 별수 없어요.”


“우리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소. 1997년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바둑에서 복기하는 것처럼 말이오. 장 동무는 최고수로 소문이 났지. 아마 5단쯤 될 텐데…… 나는 바둑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바둑의 묘미를 알 수 있으니까요.”

“요즈음은 도대체 둘 기회가 없어요. 바둑이란 게 참으로 묘미가 있지.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정신적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데.”

“주말이면 바둑을 두던 옛날 북경 시절이 그립군요. 지부장님은 승부욕이 강해서 꼭 내기를 고집하셨고 저도 오기로 절대로 져주지 않았지요.”

“그게 당연한 게 아닌가. 내가 꽤 돈을 잃었지.”

“바둑은 유일한 취미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지금도 가끔 바둑을 두지요. 우리가 언제 다시 한가하게 바둑을 둘 기회가 있을까요?”

“그게 말이오…… 남쪽에서 원만한 사교생활을 하려면 골프를 쳐야만 할 거 아니오?”

“대표적인 부르주아 스포츠이지요. 어쩐지 죄의식이 들면서 꺼려져요.”

“아무튼 말이야…… 옛날로 다시 돌아가면……

1997년 봄 무렵 그때 나는 노동당 작전부 작전 1과장으로 있으면서 그 작전을 지휘했소. 그때는 그 영감태기가 남쪽으로 내려갔으니까 온통 난리가 났지. 공화국 전체가 뒤숭숭했으니까. 배신자 주제에 영웅 취급을 받은 거야. 우리는 극히 민감한 정보가 남한 당국이나 미국 CIA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노심초사했어.

물론 그런 극비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지만 혹시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뭔가 캐낼 수도 있었으니까. 경고를 보낼 필요가 있었던 거요. 직접 그를 처치할 수는 없었지. 그때 안기부가 내곡동 안가에서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지 않소. 그것들이 내곡동으로 이사한 게 1995년인데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초호화판 최신식 건물을 지은 거요. 남산 근처에 있던 부장 공관도 그리로 옮겨갔고 남산 별관에 있던 온갖 고문 기구들도 가지고 갔을 거요.”

“저는 그 작전의 깊은 내막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남에 숨어 사는 그 쥐새끼를 대신 처리하기로 결정했지.

장 동무는 이제서야 그 쥐새끼를 처리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될 거요. 그 인간은 우리 명부에서 이름마저 지워버렸다네. 그냥 쥐새끼야. 그 이름도 아깝지. 악마 중의 악마이고, 배신자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배신자이니까.

본부에서는 공작원들을 훈련시킬 때 이 사건에 대해서 이미 교육을 했소. 공화국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이오. 어쨌거나 쥐새끼가 박살난 사실을 영감태기가 알 필요가 있었어. 그 당시 작전의 경과는 장 동무가 어느 정도 관여했으니까 조금은 알고 있을 거요. 장 동무가 자신이 맡았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시오. 그때는 초창기여서 장 동무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임무만 맡긴 거요.”

“그때 한국으로 들어와서 본사에서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본사는 지하철 선릉역 부근에 있었습니다. 제가 그 회사의 초대 북경 지사장이었지만 그때는 직원도 서너 명에 불과했고 아주 초라했지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맡은 임무가 성남의 빌라로 두 사람의 공작원을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이 일요일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핑계를 대고 회사 영업용 차량을 빌렸지요. 그리고 오후 6시경 안산시 시화방조제 북쪽 오이도 활어판매장 부근에서 만나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습니다. 그때 교환한 암호는 잊어버렸습니다. 벌써 13년 전 일 아닙니까.

그때 그들은 ‘누굴 만날 일이 있다. 중요한 물건을 전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다른 고첩과 접선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두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완전히 남한 사람처럼 행세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전날 태안의 안면도 해안으로 침투해서 서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서 시외버스를 타고 안산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안산에서 성남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입니다.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지요. 경원대학교 근처 빌라들이 늘어선 뒷골목 부근에서 내렸습니다. 주위가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6월이었지만 밤이 되니까 약간 추웠는데 거기서 함께 한 시간 정도 대기했습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때 장 동무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한 거요. 그 암호는 내가 만들었으니까 지금도 기억하고 있지. 한쪽은 ‘벌써 봄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이고, 다른 쪽은 ‘그러게 말입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이었어. 그건 그렇고 그들은 소음기가 달린 총을 사용했소. 빌라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소. 그리고 나서 다른 요원이 그들을 픽업해서 강화도로 데려왔고 그날 밤 강화도 해안에서 공작선에 오를 수 있었소.

그분은 원래 이북 출신이었소. 6·25 전쟁 때 소년병으로 참전했다가 휴전회담 당시 남쪽의 꼬임에 빠져 반공포로가 되어서 남한에 남은 거요. 그렇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남한에서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소. 온갖 고생을 하였지. 두 번 결혼했다가 두 번 다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었어.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북쪽에 가족이 살아있었으니까 고향을 몹시 그리워했소. 그래서 아주 쉽게 포섭이 된 거지. 가족사진을 보여주었더니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

그 후 중국을 여행하는 것처럼 갔다가 압록강을 건넜어. 지금은 고향인 신의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아주 잘 살고 있어요.”

“지금 돌이켜보니까 정말 전광석화와 같은 작전이었네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네.”

“쥐새끼는 즉사해서 좋았겠네요. 그 무엇도 생각할 틈이 없었으니까요. 궁금하군요. 작은 구멍에 감쪽같이 숨어있는 그 쥐새끼를 어떻게 찾아냈나요? 틀림없이 안기부에서 애지중지 보호하고 있었을 텐데요……”

“당신의 그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지.”

그는 안기부 방첩과에서 전향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엄격한 조사를 받았다.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거쳤고 충성을 맹세하는 충성 서약서도 썼고 보안 교육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이중간첩이 되었다. 새로 주민등록증과 그 당시 안기부 산하 무슨 연구소의 연구원 자격으로 의료보험증을 발급받았고 운전면허증은 정식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발급받았다. 그리고 성형수술을 했다. 한국인치고는 매부리코처럼 너무 높은 코를 조금 낮추고 쌍꺼풀 수술을 했으며 사이가 벌어져서 금방 태가 나는 앞니 두 개를 뽑아내고 인공치아를 심었다. 항상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을 하여 길게 기르고 다니면서 수십 개의 안경을 상황에 따라 번갈아 썼다. 그리고 가끔 여러 종류의 모자를 쓰고 주로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보통 중년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안기부의 비밀 안가에서 칙사 대접을 받았다. 특급 호텔만큼 깨끗하고 화려한 침실에 자면서 매끼 그가 원하는 대로 식사를 했으며 어떤 책이든 마음대로 골라서 독서를 하고 TV 시청을 했으며 가끔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안내원을 자처한 감시원이 따라나서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1년쯤 지나자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서 밖으로 옮겨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도저히 갑갑해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은 자유를 찾아서, 해방되기 위해서 전향한 것이지 돼지우리에 갇혀 있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전담한 직원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며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건 본부 고위층의 의견이란 것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완강했다. 자살 소동까지 벌인 것이다. 그는 병실에서 깨어나자마자 ‘도대체 말이죠…… 제가 스스로 죽겠다는데 왜 죽지 못하게 하나요? 이건 제 고유의 권리란 말입니다.’라고 항변했는데, 정말 죽고자 하는 진짜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자살 의도가 없었는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보여주기식이었는지 분간하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성남시 태평동에 대지 50평, 건평 35평의 단층 단독주택을 마련해서 살게 하였다. 그는 그 주택에 도청장치 등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호신용 권총을 요구했지만 권총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안기부에서 주선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파출부로 근무했다. 그 아주머니는 정기적으로 그의 동태를 보고했고 가끔 그가 연구소로 출근한 후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그의 집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의심스러운 정황이 없는지 수색을 하고 갔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단단히 지시했다. 절대로 소포를 받지 말고 무조건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하라고. 자기한테는 소포를 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폭탄이 장치된 소포가 배달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바퀴벌레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이사를 갈 것을 고집하면서 이번에는 아파트를 요구했다. 그리고 감시받기 싫으니까 아주머니 없이 혼자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파트의 경우 출입하는 주민들이 많아 보안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4층 빌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는 그 당시 북쪽 대남공작 라인의 조직체계와 지휘관들, 중국 주재 북한 공작원들의 신상정보 등을 제공했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특히 국정원이 애타게 알고 싶어 하는 남한에 뿌리박혀있는 고정 간첩망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므로 그의 효용성은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이다. 첩보기관은 어느 조직이든 자족적이고 자체 논리로 움직인다. 이중간첩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면 잔인하게 버려질 수도 있다.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당초 약속한 대로 그에게 새로운 신분과 살 곳을 마련해주고 보살피기는 하지만 때로는 적의 손에 죽게 하는 것이 편리할 때도 있다. 언제든지 그쪽의 잔인한 소행으로 발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으로 애를 태웠다네. 그 자식이 계속 거기 안가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지. 거기는 언감생심 우리가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지. 그런데 걔가 거기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는데 근무는 연구소에서 계속한다고 했어.

그게 몇 단계를 거쳐서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온 거지. 우리 세포들은 서로 존재를 전혀 모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그때부터 우리 요원 두 명이 걔 출퇴근 시간에 맞춰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했었지. 우리는 연구소 애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음식점이나 술집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지. 그리고 말이야……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쥐새끼의 동선을 찾아낸 거야. 아무리 성형수술을 하고 변장을 해도 소용없었지. 키가 175센티미터인데 키를 키우거나 줄이거나 할 수는 없었지. 그리고 그 인간은 조금 독특한 걸음걸이를 걷는단 말이야. 아주 거만한 모습이지……”

그는 공화국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반역한 것이다. 지독한 스트레스와 광기에 가까운 고양된 감정의 힘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아이러니한 체념과 가벼운 비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망가져 가고 있었다. 남과 북으로부터 이중으로 쫓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기부는 계속 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고 언젠가는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이 언제든지 그를 찾아내서 총을 발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울 강박증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효과가 아주 좋다는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 정신과 의사는 최후의 처방으로 충격요법을 제시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때 성남의 거리에서 마주쳤던 두 명의 젊은 남자는 누구였을까. 눈초리가 매서웠지 않는가. 몸이 단단하고 눈초리가 매서운 걸 보니까 틀림없이 북에서 내려왔을 거야. 나를 찾고 있다고. 너무 지루한 일상, 좆같이 더러운 내 인생. 가끔 총에 맞아 죽는 악몽을 꾸고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잠에서 깼다. 덜덜 떨리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가 울부짖었다. “나도 인간이라구. 어떤 후회도 뉘우침도 없는 게 아냐. 잔인한 짐승이 아니라니까. 너희들은 날 이용해 먹은 거야! 날강도 같은 놈들! 남과 북이 다 똑같다고! 배신자들 같으니라구! 나는 북에서 공작선을 내려보낼 때 두세 명만 내려올 줄로 알았지. 그들이 상륙하자마자 생포될 것이고 그러면 내가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남쪽에서 정착해 살도록 할 작정이었어. 그렇게 약속이 되었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탄 공작선이 내려왔느냐 말이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게 큰 배를 보내면 남쪽 해군들이 금방 탐지하고 말지. 그들이 몰살당한 게 내 탓이라고 할 수 있어? 나는 죄가 없다고……”

어느 날 저녁 밤늦게 방탄 조끼를 입고 등산용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검정 군화를 신은 괴한 두 명이 빌라의 옥상에서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왔다. 그들은 전문가답게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실 창문을 깨고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그때 쥐새끼는 거실 소파에 망연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가 창밖을 내다보자 어둠이 꿈틀거리면서 인간의 형체가 그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질려서 몸이 굳어버렸다.

쥐새끼가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드디어 오셨군.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지. 오랜만에 보는 소음 총이군. 한 발만 머리통에 쏘라구. 그러면 충분하니까.” 그들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처음 한 발의 총알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을 때 죽음이 임박하여 머릿속에 갇혀 있던 회색 안개가 걷히면서 아주 짧은 찰나적 순간에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았다. 곧이어 괴한들은 총을 난사하고 그대로 빠져나갔다.

그는 즉사했다.

“우리 요원들이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이틀 전에 총상으로 죽어있었어. 거실은 끔찍한 피바다였다고 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니까 아마 기념으로 죽은 시체에다가 여러 발을 갈기고 나왔어. 방아쇠를 당기는 짜릿한 손맛을 느꼈을 거라고. 그리고 증거품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가지고 돌아왔지. 사실대로 정확하게 보고했어.”

“자살했단 말인가요?”

“그럴 리가…… 자살했다면 그 자리에 총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총은 없었어. 자살자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여러 발의 총을 쏠 수가 없다니까.”

“그럼 누구의 소행……?”

“뻔하지 않은가. 걔들이 한 거야. 쥐새끼가…… 배신자 주제에 염치도 없이 안하무인 격으로 요구사항이 많았단 말이오. 그때는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 분수를 모르고…… 유흥가에서 돈을 물 쓰듯 했고 술이 만취해서는 온갖 행패를 부렸어.

여자를 소개해 주면 폭력을 일삼고 학대하니까 도망가버렸소. 더군다나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겠다고 생떼를 쓰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골치를 앓고 있었던 거지.”

“그렇다고……”

“생각해 보라고…… 걔가 말이야 계속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절대로 보내줄 수 없지. 그런데 밀항이라도 해서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일본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찾아가서 망명을 하면 아주 골치 아플 것 아닌가. 또는 말이야…… 변신에 능수능란하니까 위조 여권을 만들어서 우선 동남아시아로 튈 수도 있었을 거야. 걔들 옛날 이수근의 위장 탈출 사건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을 거라고. 그때 이수근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일단 홍콩으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거든. 그 양반 탈북자였지만 남조선 역시 아니었던거야. 탈남한 탈북자 1호라고 할 수 있겠네.

물론 어느 조직에서 처리했는지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일세…… 아마 어느 조직의 작은 그룹의 소행일 수도 있어. 걔들이 수뇌부 모르게 감쪽같이 처리한 거지. 이심전심이었던 거야. 추측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걸 공개했단 말인가요?”

“그 당시 안기부는 당분간 극비에 부치면서 쉬쉬하다가 보름이 지나서야 간단하게 발표했어. 북에서 망명한 고위 인사가 두 명의 북한 공작원에 의해 서울의 모처에서 암살되었다고 했어. 그러면서 국과수에서 부검한 결과 시신에서 구경이 다른 두 종류의 총알이 나왔고, 모두 열한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 가슴에 아홉 발, 목에 두 발을 맞았다고 했어. 그들은 그걸 북한의 소행으로 돌리면서 북한의 테러리즘을 부각시킨 거야.”

“그럼…… 우리 요원들은 코에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군요.”

“그런 셈이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지. 우리는 그걸 교육용으로 활용했어. 우리 요원이 한 걸로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은 거야. 그리고 걔들은 북한 소행으로 돌렸으니까 말이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렇게 단단했던 사람이 망가진 게.”

“그렇게 망가질 수밖에 없었어. 그도 인간인데 그러한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소. 누구든지 인간이라면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네. 그러니까 배신은 배신한 사람에게도 상처가 되는 법이지.

그런데 말이야…… 쥐란 동물은 아주 영리하고 신경이 예민하지. 본능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회피할 줄 아는데 그놈은 쥐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그를 납치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북으로 데리고 가서 모든 공작원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너무 복잡해서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네.”

“요점은 그거요. 이번에도 직접 남산1호와 접선하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거요.”

“별로 어렵지 않은 임무 같습니다.”

“그걸 아시오. 장 동무는 지금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존재요. 우리 조직의 핵심이란 말이오. 우리 공작에서 생명선인 서해안을 책임지고 있지 않소. 그래서 목숨이 위태로운 아주 위험한 임무는 줄 수 없는 거요.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 영감태기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지시 사항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 인간이 살고 있는 논현동 집과 사무실, 동선 파악은 잘 되고 있소?”

“무장한 경호원이 서너 명씩 따라다니고 집에서도 함께 기거합니다. 담장에는 물론이고 사방에 고성능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창문에는 방탄 유리가 끼워져 있습니다. 가끔 안에서 셰퍼드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집안 여기저기에 틀림없이 도청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경비가 상당히 심합니다.”

“우리가 최근에서야 파악한 바로는 그 인간에게 젊은 여자가 있고 자식도 있다는 사실이오. 그게 아마 사내아이라고 했어. 비정한 인간이지. 북에 있는 본처는 자살까지 했는데 본인은 남쪽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자식까지 낳았으니까 말이오.”

“이중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시하고 핍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르고 달래려고 젊고 예쁜 여자를 붙여 준 거지요.”

“무장 경호원들이 붙어있어서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소.”

“경호원을 따돌리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 임무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도록 처리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소…… 타이머로 조종되는 폭탄은 어떻소? 소형 폭탄을 침대 밑에 설치해서 원격 조종으로 처리하는 거지. 그렇지만 조잡한 사제 폭탄은 안되오.”

“우리는 소형 스마트 폭탄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배터리를 이용해서 타이머 설치가 가능한 부비트랩인데 폭발력이 너무 강해요.. 이 층 전체를 통째로 날려버릴 겁니다. 전쟁이라도 터진 줄 알겠지요.”

“그건 불가능하단 말이지……?”

“역시 집 밖에서 처리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만. 사무실이나 강연장에서 말입니다. 집안으로 침투가 가능한지 여부와 집 밖에서 처리하는 게 좋은지는 면밀히 검토하겠습니다. 동선은 충분히 파악해 두었습니다.”

“그자가 가만히 칩거하고 있으면 그를 제거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잘난 체하고 강연을 하고 다니니까. 최근에는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서는 대외활동을 강화하고 있소. 우리는 혹시나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그러는지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지. 눈엣가시 같은 존재야.

우리가 충분히 눈치챌 수 있도록 경고를 보냈네. 제일 먼저 경고를 하기 위해서 쥐새끼를 처단하지 않았는가. 그러고 나서 협박 소포도 보냈고 식칼도 보냈고 손도끼도 보냈지. 그런데 그 작자는 그걸 장난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순한 협박으로 보는 거야. 아무리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거야. 이번에는 아예 처치할 수밖에 없는 거라네.”

“저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영감태기는 눈치가 없어. 남조선 정부는 더 이상 그가 쓸모가 없다니까. 아무리 캐봐도 쓸만한 정보가 없는 거야. 국가적 체면이 있으니까 억지로 보호하고 있어. 부담만 되는 거지. 그러면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까불고 발악을 하고 있는 거요.

추악한 민족 반역자! 늙다리 정신병자!”

“기회는 있을 것입니다. 사무실이나 강연장에서 말입니다. 사무실의 경우 화장실에 숨어있다가 처리할 수도 있고 사무실에서 잠시 쉬고 있으면서 졸고 있을 때 감쪽같이 처리할 수도 있습니다. 강연장에서도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을 때도 가능합니다.”

“좋소. 그건 장 동무한테 일임하겠소. 무기는 뭐가 있소?”

“소련제 특수부대용 PSS 소음 권총이 있습니다.”

“다른 무기는?”

“구식 독침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볼펜형 독침인데 일반인들이 청산가리로 알고 있는 시안화칼륨에 비해서 독성이 몇 배나 강력한 브롬화네오스티그민이라는 독극물이 들어있습니다. 너무 오래되어 제대로 작동할런지 성능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잘 들으시오. 역시 권총을 사용해야 하오. 공화국의 잔인한 힘을 보여주어야 하니까 권총이어야만 하오. 독침은 녀자애들이나 쓰는 거지. 총알이 가슴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대정맥, 허파, 심장, 간을 찢어놓으면서 피가 쏟아지고 엄청난 고통을 느끼게 될 거요. 푹 고꾸라져서 죽게 되는 거지.

총알을 아껴야 하오. 꼭 두 발만 주시오. 더 이상은 안 된단 말이오.”

“잘 이해가 안됩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남산1호는 명사수요. 그가 목표를 잡았다면 딱 한 발이면 되지. 그래도 사람 일은 알 수가 없으니까 여분으로 한 발 더 주는 거요. 저격에 실패해도 반은 성공한 거요. 그 인간에게 충분히 경고를 한 것이니까. 만약 말이오…… 비상한 상황에서 당황하여 난사해서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요. 함부로 여기저기 총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지. 그건 본부가 원하는 바가 아니오.”

“잘 알겠습니다. 만약 체포가 된다면…… 문제가……”

“총알은 머리 아니면 목구멍에 정통으로 박힐 거니까 비명을 지를 수도 없어요. 사람들이 겁에 질려서 도망칠 거고 경호원들은 졸고 있다가 뒤늦게 나타나서 당황하고 허둥댈 거야. 비상이 걸리고 현장을 봉쇄하고 경찰차, 구급차가 출동하겠지.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 응급실로 달릴 쯤에는 남산1호는 귀신처럼 날쌔게 움직여서 벌써 멀리 달아날 거야.”

“저는 만약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중요하오. 살아서 체포되면 안되는 거요. 독약 앰플을 건네주시오. 너무 잔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어요. 그가 운 좋게 현장에서 빠져나와 도망친다고 해도 말이오…… 남조선은 너무 좁아. 경찰의 기동력이나 국정원 조직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잘못하면 붙잡히게 될 수도 있어요. 그러면 모든 걸 불 수도 있겠지.

그도 연약한 인간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끝까지 도망쳐서 살아남으라고 하시오. 어떠한 악조건의 경우에도 살아올 각오가 돼 있으면 사는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밀선을 내려보내 데려올 것이오.

그렇지만 말이오. 만약…… 만약의 경우에는…… 마지막 궁지에 몰리게 되면…… 약을 삼키라고 하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가 살아서 체포되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고 공화국은 감당할 수가 없어요. 최고 지도자 동지도 노발대발할 거라고. 그게 말이야, 앰플을 삼키고 죽으면 해결되는 거지. 우리는 개인적으로 저지른 일이고 공화국과는 관계가 없다고 계속 부인할 거고 시간이 흘러가면 결국 완전히 묻히는 거요.”

“그가 앰플을 보면 동요하지 않을까요? 앰플을 받는 순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지 모르죠. 인간들은 누구나 극단적인 상황이 되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면 어쩔 줄 모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짓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신세대 공작원이라고 할 수 있소.

처음 선발할 때부터 사상이나 능력, 신체적 조건이나 외모 등 여러 측면을 감안해서 국내파와 해외파로 나누지. 그런데 국내가 위험부담이 크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훈련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단 말이지. 어쨌든 해외보다는 국내가 훨씬 뛰어난 사람들이야. 그런 걸 모두 뛰어넘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소. 정신력이 중요하지.”

“너무 젊으니까 순수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본부는 남산1호에 대해서 큰 기대를 걸고 있소. 명령을 어길 인간이 아니오. 그렇게 믿어야겠지.”

“그럴까요?”

“그는 공화국 최고 엘리트 공작원이오. 해낼 수 있을 거요. 정신력도 강하고……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오.”

“지부장님! 목숨을 건 일인데! 앰플을 건네주는 것은 꺼려지네요.”

“선택의 여지가 없네. 이렇게 말하게. ‘최고 지도자 동지에게 충성을 바치라고’ 그리고 공화국의 영웅이 될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해. 그가 죽으면 영웅 훈장의 혜택은 고스란히 가족들에게 돌아간다고.”

“저로서는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가 앰플을 삼키지 않으면 문제는 너무 커지는 거야.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버마의 아웅산 사건’을 돌아보라고. 그때 강민철이가 그 자리에서 죽었더라면 그 사건은 공화국과는 관계가 없다고 끝까지 부인할 수 있었어. 눈감고 아웅하는 식이지만. 그런데 그자가 살아서 모든 걸 털어놨단 말이야. 그 바람에 우리의 가장 친근한 우방이었던 버마와는 단교가 되고 국제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지.

그리고 또 있어. 대한항공 KAL기 폭파 작전도 김현희가 현장에서 죽었으면 그걸로 끝인데 기적적으로 살아나서 나불거렸단 말이오.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니까 그 여자 입장에서는 하늘이 도와준 거겠지. 똑같은 앰플을 똑같은 방법으로 삼켰는데 여자는 살아났단 말이야.

역시 여자란……? 여자의 목숨이 훨씬 질긴 법이라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남산1호가 하나원에서 외박을 나오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할 거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는 거지. 시간은 오전이 될 수도 있고 오후가 될 수도 있소. 접선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지.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바로 아래야. 동상 앞 바닥에는 청동으로 된 실물 크기의 해시계와 측우기, 혼천의가 설치되어 있는데 거기서 만나는 거지.

이게 오백 년 조선왕조에서 가장 위대한 임금인 세종대왕의 동상일세. 아주 옛날 일이지만 내가 모종의 임무 때문에 남조선에 잠깐 내려갔을 때 거기서 누굴 만났던 일이 있었지.”

“광화문 광장을 잘 알긴 합니다만……”

“거기는 중국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인 거요. 그래서 안성맞춤인 거요. 그 사람들은 아주 유명한 삼계탕집에서 삼계탕을 먹고 경복궁으로 가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정문으로 나와 광장으로 몰려가는 거요.

걔는 적구화 교육을 철저히 받아서 남한의 대학생이나 대학원생 이상의 수준이오. 서울 지리도 샅샅이 익혔기 때문에 아주 훤해요. 서울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소.”

“암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암호는 동무가 먼저 ‘한라산에는 지금 단풍이 한창이지요’하면 그쪽에서 ‘백두산 천지는 벌써 살얼음이 얼었어요’할 거야.”

“남산1호와 접선하는 일자와 시간을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북경에서 만날 날짜와 시각을 정해서 양쪽에 알려줄 거요. 걔는 맨손으로 나타날 거야. 흔히 볼 수 있는 관광객이 등에 메는 가방이어야 해. 가방을 통째로 전달하는 거야. 가방 속에는 장전된 총과 앰플, 돈, 위조한 신분증, 선글라스, 지하철 카드, 서해안 지도, 관광객이 쓰는 모자, 갈아입을 가벼운 여름 옷이 들어있어야 하오. 남산1호가 처음 나타날 때는 완전히 중국 관광객처럼 행세할 거요. 서툴지만 광둥 말을 조금 할 수 있지.

작전이 끝나면 시치미 떼고 조용히 하나원으로 복귀하는 거요.”

“제가 남산1호를 정확하게 알아보아야 합니다.”

“여기 사진을 보게나. 이게 남산1호야.”

“참 단정하게 잘 생겼습니다.”

“아까운 인물이야. 우리들의 가혹한 운명인 걸 어떡하겠어. 우리는 항상 목에 올가미를 걸고 사는 거요.”

“제가 어쩔 수 없이 그 운명에 얽혀들었군요.”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고 싶다네. 그러니까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 최후의 수단인 거야. 우리가 가는 길에는 단 한 번도 무풍지대가 없었소.

우리는 언제나 폭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했소.”

“잘 알겠습니다.”

“미행을 조심해야 하오. 미행이 있다고 가정하여 행동하시오. 만약 미행의 낌새가 있으면 즉시 접선을 중단하시오. 장 동무 임무는 영감태기의 동선을 메모를 그려서 정확히 알려주고 물건을 전해주면 바로 헤어지는 거요. 뒤도 돌아보아서는 안 되오.”

“차질 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그렇지…… 차질이 있으면 안 되지.”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었다.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맥주는 시원하긴 하지만 약점이 있는데 너무 싱겁다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도수가 높은 백주를 입가심 겸해서 단숨에 한 잔씩 마셨다.

그는 안주머니에서 돈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우리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까 자금을 내려보내지 못하는데…… 잘 알고 있겠지만 우리는 가난해서 돈이 없어요. ‘자력갱생’의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소. 그래서 비자금이건 공작금이건 음식점이나 회사를 직접 운영해서 가급적 스스로 마련해야 하오.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니까 고맙소. 그 대신 중국의 수출회사는 우리가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시오.”

“감사합니다. 마진이 적지만 그래도 안전하니까 다행입니다. 그 정도 마진이면 빠듯하지만 조직을 유지하는 데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동무! 동무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하오. 국정원 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까…… 귀신처럼 행동해야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장 동무는 흰 머리가 몇 가닥이 솟아오르기는 했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얼굴에 주름이 하나도 없어요.”

“저도 나이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맑은 하늘에는 일곱 빛깔의 무지개는 뜰 수 없어요. 무지개는 오로지 물방울 속에서만 빛나는 거요.”

“무지개라고 하셨나요……”

“그건 알아야 하오. 우리는 북남 대결의 최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어요. 민족 분단의 희생자란 말이오. 언제가 될지 모르겠소만 북남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정착되면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운명에서 해방될 거요. 그때까지 행운을 비오.”

“우리 생전에…… 가능할까요. 안녕히 가십시오."
작성일:2023-02-10 11:04:11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