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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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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3-01-31 12:38:07
조회수
334
소설이란 무엇인가? | 유중원



1. 소설은 中說도 아니고 大說도 아니고 小說이다. 소설은 소설이다. 잡설이다. 그래서 아주 유연하다. 한계가 없다. 모든 걸 포괄한다.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렇게 답변할 수 있다. 소설이 지금, 여기, 우리를 위해서 무얼 할 수 있는지를 논외로 하면 말이다.
지금은 (너무 영리해서 허구인 소설에 절대 속지 않는, 그러면서도 속은 척하는) MZ세대가 사회적 주류이고 조만간 AI가 세상을 지배할 것처럼 보이는 21세기 大明天地이다. 그들은 영화, 드라마, role playing game, 웹소설, 웹툰, 광고,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 열광한다. 그러므로 까마득한 옛날처럼 여겨지는 19세기 소설의 전성기 그 무렵처럼 소설을 과대평가하거나 지나치게 찬양할 시대가 아닌 것이다. 누군가 (실은 조지 손더스가) 말했던 것처럼 소설이란 그저 자기가 되고 싶은 것, 다시 말하면 (내 맘에 들게 약간 변형해서 인용한다면) 소설은 잡설에 불과함으로 변태적이고, 모순적이고, 경박하고, 불쾌하고, 쓸모없고, 소수를 제외한 누구도 읽기 어려운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나아가서, 웨인 부스 (Wayne C. Booth)는 ‘어떠한 비평의 언어로도 소설의 총체는 포괄할 수 없다.’라고 말했고, 뤼시엥 골드만 (Lucien Goldmann)은 ‘소설은 타락한 사회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의 형식’이라고 말했고, 게오르크 루카치는 ‘소설은 현대의 문제적 개인이 잃어버린 정신적 고향과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동경과 모험에 가득 찬 자기 인식에로의 여정에 대한 형상화’라고 말했고, 미하엘 바흐친은 ‘소설은 그 자신의 고유한 형식을 가지지 않는 문학’이라고 말했고, R. 켈로그는 ‘소설의 시학 같은 것 없이도 몇 세기 동안 잘해왔다.’라고 말했는데, 모두 틀림없이 나름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정확히 무엇이란 말인가? (플라톤은 ‘시인을 추방하라. 최후의 한 사람까지’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시인은 이야기꾼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가 보기에 이야기꾼은 직업적 거짓말쟁이였던 것이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인 Homo Foictus 또는 Homo Narrans다. 하지만 이야기가 가진 전염성 때문에 언젠가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Storytelling은 인간의 생존에 산소만큼이나 필수적이면서도 그만큼 치명적인 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Storyteller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소설을 써야만 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예술적 열정과 의지가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글쎄 말이다. 나는 지금도 (내일은 다를 수 있지만) 작가로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 혹은 유명한 (?) 작가들이 말했다.
…… 어떠한 특정 시기, 예를 들자면 열다섯이나 열여섯 살에 시란 자위행위나 마찬가지랍니다. 하지만 훌륭한 시인은 나중에 초기 시를 불태워버리고 별 볼 일 없는 시인은 초기 시를 출판하지요. 고맙게도 저는 시를 상당히 빨리 포기했어요. …… 사실 어떻게 보면 모든 소설이 자서전적이지요. 등장인물을 만들어낼 때 개인적인 기억을 등장인물들에게 불어넣거든요. 제 일부를 이 등장인물에게 부여하고, 저의 다른 부분을 또 다른 인물에게 부여합니다. 이런 의미로 보자면 저는 결코 자서전을 쓰는 건 아니지만 제 소설들은 제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는 거지요. …… 소설의 틀 내에서 믿을 수 없고 절대적으로 허구적인 것처럼 보이는 실제 사실을 사용하는 것이죠. 제 소설은 수없이 많은 실화와 실제 상황을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제가 소위 허구의 소설에서 읽은 것보다 훨씬 더 낭만적이고 소설적이기조차 하기 때문이지요. ……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지요. 무엇인가 소통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기 위해서요. 작품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의 문제는 소설가나 시인만이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랍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철학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납득시키려고 책을 씁니다. 그리고 앞으로 3000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계속 읽기를 바라지요. (움베르트 에코)
…… 모든 작가는 믿을 만한 독자가 있어야 합니다. 작가가 작업하고 있는 것에 대해 동감하고 작품을 가능한 훌륭하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 말입니다. 그렇지만 독자는 솔직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독자가 갖추어야 할 근본적인 자격입니다. 절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며 거짓으로 위로해서도 안 되며, 칭찬받을 만한 작품이 아닌 경우에는 절대로 칭찬을 해서도 안 됩니다. (폴 오스터)
……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그것이 톨스토이의 소설이든, 체호프든, 배리 한나든, 리처드 포드든, 헤밍웨이든, 아이작 바벨이든, 앤 비티든, 앤 타일러든 어느 정도까지는 자서전적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줍니다. 적어도 실제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어요. 긴 이야기든 짧은 이야기든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랍니다. …… 일하는 시간의 많은 부분은 수정하고 다시 쓰는 시간이지요. 집 안 어딘가에 놓아둔 이야기를 가져다가 다시 수정하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지요. 한 단편에 스무 가지나 서른 가지의 다른 수정본이 있는 경우도 있어요. 열 개나 열두 개 이하인 경우는 없답니다. 시도 마찬가지죠. 단지 시는 40번이나 50번 정도까지 수정한다는 게 다르지요. …… 어떤 일을 열심히 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한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걸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삶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게 됩니다. (레이먼드 카버)
…… 훌륭한 장인 정신이란 값싸고 쉬운 효과를 외면하고, 지름길을 버리고, 아주 사소한 부분 (이를테면 화가 난 남자의 부엌 벽을 향해 내던지려고 집어 든 물건을 정확히 무엇으로 할지, 어떤 인물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건 아냐”가 되어야 할지, 그보다 강경한 “그래선 안 돼”가 되어야 할지 따위) 조차도 가짜스럽게 않게 쓰려고 고뇌하는 예술가 정신입니다. 한마디로 피땀 어린 고뇌의 흔적조차도 독자의 감동에 일조하는 그런 뛰어난 장인 정신은, 독자만이 아니라 작가에게도 기쁨을 주고 삶의 가치와 존엄을 느끼게 해줍니다. …… 모든 종류의 작가에게 똑같은 언어감각의 잣대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이 시를 제대로 써내려면 일반적인 장편소설가가 보기에는 거의 병적이다 싶을 만큼 세밀하게 조탁되고 꾀까다로운 언어 감각이 필요합니다. 짧은 시간에 독자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단편소설가에게도 시인만큼 절박하지는 않더라도 유사한 서정적 응축이 요구됩니다. 장편소설가의 경우 과민한 언어 감각은 때론 장애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존 가드너)
…… 일반적으로 인정받는 많은 작가들은 제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텅 빈 무덤에 새겨져 있을 뿐입니다. 그들의 책은 모조품에 불과하고, 제 독서 취미와 관련되는 한, 완전히 보잘것없는 비실재라고나 할까요. 브레히트, 포크너, 카뮈, 그 밖의 많은 작가들은 제게 완전히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레이디 채털리의 성교나 완전히 가짜라고 볼 수 있는 파운드의 오만한 난센스가 비평가들과 동료 작가들에 의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위대한 문학’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제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음모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소설가는 누구의 대변인도 아닐뿐더러 자기 관념의 대변인도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싶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의 초고를 썼을 때 안나는 매우 인정 없는 여자였고 그녀의 비극적 종말은 전적으로 합당하고 정당화될 만한 것이었다. 이 소설의 최종본은 초고와 사뭇 다르다. 하지만 나는 톨스토이가 그사이에 도덕관념을 수정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글을 쓰는 동안 자신의 도덕적 신념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는 내가 소설의 지혜라고 부르고 싶은 것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진정한 소설가는 그 개인을 넘어서는 지혜를 찾아 귀를 기울이고, 그래서 위대한 소설은 늘 그것을 쓴 사람보다 조금 더 똑똑하다. 자기 책보다 똑똑한 소설가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밀란 쿤데라)
…… 회고록이나 고백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속에 든 사실을 믿지 못한다기보다는 그 의도를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시대의 회고록을 읽고 제가 받는 느낌은 그 회고록에 작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죠. 그 목적이란 작가가 자신을 무한히 매혹적이며 중요하다고 느끼는 만큼 독자도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이에요. 작가들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저는 회고록 대부분이 그래서 처량해 보입니다. …… 책에서 약물에 관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비유예요. 책임을 갖고 작업했어요. 아주 적극적으로 조사를 하고, 속임수까지 써서 정보를 얻었어요. 많은 시간 실제로 사람들이랑 어울렸어요. 보스턴에는 재활시설이 열두 곳이나 있는데, 그중 세 곳에서 수백 시간을 보냈어요. 시설 내 휴게실에 앉아 있으면, 갓 약물을 끊은 사람들이 남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제게 접근해요. 그들에게서 정보를 많이 얻었어요. 전 헤로인 중독자 아니고, 중독자였던 적도 없어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 나는 결국 내 스스로 지핀 불에 데었다는 것, 나 자신의 화염에 소진되었다는 것,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내 삶을 흡입한 맹렬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송곳니에 의해, 내 존재가 갈가리 찢겼다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빛의 세포 하나가 낮이건 밤이건 내 삶의 모든 깨어 있는 순간에, 또한 모든 잠자는 순간에, 뇌와 마음과 기억에서 언제나처럼 빛나리라는 것, 벌레가 내 몸을 먹으면서 자신의 빛을 유지하리라는 것, 어떤 오락, 어떤 음식과 음료도, 어떤 여행과 어떤 여자도 그 빛을 깨뜨릴 수 없으리라는 것, 그리고 죽음이 그 전적이고도 결정적인 어둠으로 내 삶을 덮을 때까지, 나는 결코 그 빛에서 해방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여 마침내 나는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자신의 삶을 작가의 삶으로 바꾼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깨달았다.
…… 조사나 탐구에는 과도한 측면이, 무작정 쓸어 담겠다는 경향이, 인간의 온갖 경험을 통째로 집어삼키겠다는, 개인의 한평생이 허락하는 것 또한 한 예술 작품이 담아낼 수 있는 한도보다 더 포괄하고 더 그러모으겠다는, 거의 비정상적인 굶주림이 도사리고 있다. …… 그해 내내 나는 처음으로 가차 없는 시간의 압박과 위협을, 끝장을 보고 싶은 갈급함, 완성을 향한 욕망을 온몸으로 느끼며 맹렬하게, 거의 미친 듯이 썼다. 그 한 해 동안 작품 전체의 내러티브, 사건, 인물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써댔다. 장면에서 장면으로, 장에서 장으로 글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 글쓰기에서 내게 언제나 가장 어렵고 하기 싫은 일은 덜어내기였다. 나는 언제나 덜어내기보다는 쓰기가 더 기질에 맞았다. 게다가 나 자신의 원고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얼마간의 능력마저도 네 해 동안의 맹렬한 글쓰기 탓에 적어도 한동안은 꺼내 쓸 수도 없을 만큼 망가져 있었다. …… 그 잔인한 도륙을 자행하면서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온 마음을 쏟아 써 내려갔던 수많은 멋진 글 토막이 무자비하게 잘려나가는 참상 앞에서 내 마음은 요동쳤다. …… 책은 내 손을 떠났고 이제 더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담한 실패감이 몰려왔다. 내 글이 책이 되어 나오는 것이 나는 언제나 두려웠다. 출간이 내 작업을 완성시켜 주기에, 거기에 도달하려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해 왔으면서도 말이다. 정말 어떤 글이든 인쇄되어 세상에 노출될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절망에 빠져들곤 했고, 출판사에 책의 출간을 다음 시즌으로 미뤄달라고 간청했을 뿐 아니라 문예지 편집자들에게 손질을 좀 더 할 때까지, 그게 뭔지 나조차 명확하게 알 수 없는 추가 수정 작업을 마칠 때까지 작품 게재를 한두 달 미뤄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 글쓰기가 중노동이라는,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중노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누구든 좋은 작품을 완성하려면 온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하며, 간혹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우연한 영감에 의지하지 말고 목적 달성을 위해 열심히, 끊임없이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작가로서 가장 진지했고 성실했던 토마스 울프는 말했다. 그의 책 「The Autobiography of an American novelist」에서 발췌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그는 1938년 9월 15일,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3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 나는 지금, 여기, 우리에 관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관점과도 관계되지만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관심이 많아서 사회소설 또는 사회비평소설을 쓰고 있다. 현실 세계의 리얼리티를 토대로 하여 아주 건조한 산문체로 세밀하게 묘사한 情景을 배경으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살아 숨쉬는 인간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 속 세계에는 분명한 實體가 있고 眞實이 들어 있으며 그 자체에 意志가 있다. 나는 절대 이야기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방임하지 않는다. (작가의 성실성이 드러나는) 이야기는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다.
나는 참고 문헌에서 얻은 방대한 지식과 내가 일상생활에서 직접 관찰한 實在를 소재로 또는 도구로 활용하여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사회소설을 쓴다. 그래서 그 안에 내재한 주제와 문체상의 기교와 단어와 행간 속에 암묵적으로 삽입한 은유와 서사적 맥락에 의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重力이 충만한 소설을 쓰려고 무던히도 애를 쓴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 소설은 (사회적 의미가 충만한) 주제가 중요하다. 그것이 모티프가 된다. 소설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나는 추상적 표현주의 화가들이 ‘우리는 주제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주제만이 정당하다’고 한 선언에 공감한다.
그 소설은 논픽션의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논픽션을 토대로하여 픽션을 가미한) 논픽션 소설은 비판적 리얼리즘에 의한 社會小說이고 歷史小說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대충 헤아려보아도 내가 쓴 논픽션 소설은 단편인 ‘그날 밤의 비밀’ ‘야! 그 얘긴 하지마’, 중편인 ‘외톨이 테러리스트’ ‘배신 혹은 전향’ ‘검은 그림자의 여인 - 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장편소설인 「광화문 광장」「증언」등이 있다. 나는 논픽션을 쓰면서 역사적 인물, 사건, 실재를 왜곡, 조작, 오용, 남용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오직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이면, 빈 공간 등에 한하여 합리적 추론과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들 사회소설은 (비판적 리얼리즘과 정확한 언어에 기초한) 다양한 법률적 쟁점과 우리가 법조계라고 부르는 특수한 세계의 이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法律小說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법률소설은 내가 처음 그렇게 이름을 붙였지만 과연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은 필연적으로 법적인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 사건이 안고 있는 양가적 측면과 모호성, 복잡성을 소설로 형상화하는데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설이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엄숙한 통찰과 미학적 관점에서 냉철한 묘사, 섬세한 디테일, 진지한 문학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한다.
그러므로 실제 세계의 인과율과 타당성, 상식, 논리를 뒤엎는 (장르소설 또는 하위 장르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SF와 판타지에는 관심이 없다. 일본 소설의 오랜 전통인 (미주알고주알 칭얼거리는) 1인칭 사소설도 딱 질색이다. (1인칭 시점은 나도 자주 애용하고 있지만 쓰기 쉬운 만큼 어느 면에서는 아주 안이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지적 시점 또는 작가 시점이야말로 이런 류의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유용하다. 창조주인 작가에게 유연한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점은 고정되어야 한다는 또는 고정되어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1인칭 시점이건 전지적 작가 시점은 얼마든지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시점은 당해 소설 속에서 인물의 관점, 생각, 느낌, 기억, 직관, 의견, 주장, 의식의 흐름 등으로 표출된다. 그 인물은 작가 또는 화자, 서술자일 수도 있고 작중 인물들일 수도 있다.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에 관해 참고할 만한 표본적인 소설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주인과 하인이 있다.)
내가 지금 (현실 도피적인) 장르 소설이나 공상과학물은 진정한 문학이 아니고 리얼리즘 소설만이 주류 문학이고 고급 문학이고 진지한 문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분류 자체가 오늘날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 예술 풍토에서는 난센스에 불과하다.) 나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조지 오웰처럼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작가도 아니다. 나는 진정한 리얼리스트이면서 또한 스타일리스트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maverick이 될 수 있겠지만 극단적 금욕주의자는 아니어서 저항 문학을 대변하거나 기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게 그런 과격한 용맹성과 불타는 의지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날 조금은 알고 있지만 나의 소심함을 생각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젠더, 레즈비언, 게이, 퀴어, 성차별, 페미니즘, 마르크스 주의, 기후 변화 등 거시적 관점을 요구하는 오늘날의 현실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의지력이 강한, 규범적이고,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한다. 디테일의 마법이 살아나는 그림을 그리듯 생생한 묘사를 통해 작가적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나는 서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소설에는 다른 예술의 형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소설만의 독특한 능력과 경이로움은 내면의 갈등을 형상화할 때 드러난다. 소설가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깊숙이 침투해서 미묘하면서도 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하면서 깊이 있는 글을 쓰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항상 적절한 단어와 문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완벽한 문장과 문단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화려한 형용사와 부사를 남용해서 금욕적이고 담백한 散文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설교하는 글을 쓰게 된다.
나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가 바라던, (나의 예술가적 영혼을, 내 온전한 애정을, 내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때 칸트가 말한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허구가 아니고 모두 진짜 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소설 속 세계의 因果性 법칙. 蓋然性과 내적 법칙. 개연성과 가능성. 逼眞性 (verisimilitude) 또는 그럴듯함 (plausibility). 타당성. 논리의 일관성.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의 배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必然性.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거의 모든 소송에서 입증의 정도와 관련하여 개연성은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개연성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민사재판에서는 입증의 정도에 관해서 ‘고도의 개연성’ 또는 ‘상당한 정도의 개연성’을 기준으로 하지만 형사재판에서는 법과 판례가 제시하는 기준은 ‘합리적 의심이 없는 정도 (beyond a reasonable doubt)’이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 의심이란 피고인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 아니고 피고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말한다.
그렇다고 소설에서의 개연성이 낮은 정도라도 상관없다고 할 수는 없다. 소설은 진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모든 종류의 소설에서 진실은 인과관계 또는 實在 (reality)의 근거가 되어야 하므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개연성이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이야기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의 연쇄이다. 그러므로 인과성의 연쇄야말로 당해 소설의 Masterplot의 토대가 되어 소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인과관계가 소설 속 내적 논리에 따라 진실하게 성립하면 확실히 개연성과 필연성, 핍진성, 타당성이 따라오고 그래서 (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 주제가 드러난다. 하지만 소설에서 리얼리티를 토대로 한 얽히고설킨 인과성의 설정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소설가의 기예가 필요하다.
소설에서 창의성이란 어떤 것을 포함시키고 어떤 것을 제외시킬지를 결정하는 어떤 선택을 의미한다. 가끔은 절제와 금기가 필요하다.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로 설교를 기도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야만 하니까, 자의식 과잉이고,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수정과 수정을 수십 번, 수백 번 거듭하다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있다. 서사 능력이 고갈되어 쓰고 쓰다가 막히면 결국 미완으로 남아서 쓰레기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 즉시 글 쓰는 것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작가로서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수없이 많은 좌절을 겪으면서 고질적인 자기 의심을 경험하고 있다. 소설가들은 홀로 작업하기 때문에 다른 예술가보다 더 스스로를 의심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나는 끊임없이 내 방식대로 쓰고 고친다. 자기 목소리를 찾아가거나 만들어야 한다. 작가는 계속적으로 쓰면서 작가가 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다.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靈感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오르한 파묵이 말한 오스만 터키의 속담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3. 나는 2007년부터 지금 (2022년)까지 장편소설 「사하라」를 붙들고 있다.

[먼저 작가의 입장에서 밝혀야 할 일은 이브라함의 토착 언어는 베르베르어 계통의 방언인 투아레그어인데 그는 프랑스어를 제2의 언어로 습득했다. 김규현은 모어가 한국어이지만 프랑스로 유학해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들은 프랑스어로 대화한다. 이브라함의 프랑스어는 제2의 언어여서 거의 자연스러웠지만 김규현의 그것은 한국식 억양에 의한 외국어여서 듣기에 훨씬 불편했을 터였다. 그래도 그들은 이심전심으로 충분히 의미가 통하는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게 작가의 의도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아름다운 혹은 슬픈 대화는 이 소설의 형식과 구조에 있어서 뼈대를 이루고 있다. 플래시백 기법이 불가피했다. 그들은 지금 목이 말라서 거의 죽어가고 있으니 앞날을 한 치 앞도 전망할 수 없다. 아무런 희망이 없었으므로 지나간 과거를 회상할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우리말로 쓰였다. 소설이니까 그들의 프랑스어 대화 원문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여 그들의 대화를 번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자기번역(self-translation)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본(authentic)과 파생본(derivative)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것이 상실된다는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작가가 고민한 부분이지만) 외국 소설의 티가 나고 번역투의 문체는 불가피했다. 작가가 그러려고 의도한 게 아니었다.]

이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내가 계속적으로 쓰고 또 쓰고 수정하고 수정할수록 소설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래서 글을 쓰면 쓸수록 확신을 잃어간다. (2011년 종이책 초판을 냈고 2016년 재재재 개정판을 출간했다. 현재 시점에서 더 이상 종이책의 출간은 불가능하다. 2022년 말 최종 버전은 블로그에 실려있다. https://blog.naver.com/jungwon4760/222747311815)
유명한 건축가이면서 사막 여행가인 김규현과 인물들, 풍경과 언어, 그들의 세계와 작별을 할 때가 된 것일까. 하지만 이 (마지막) 소설 역시 초고일 뿐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설은 완성을 거부하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작품과 화해할 수 있을까? 소설은 정신세계가 무한한 것처럼 똑같이 무한하다. 작가는 결코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작품은 존재하지만 완성된 것도 완성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작품은 존재하지만 고독하다.
나는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찾아서 변주를 거듭하면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을 여러 개 쓸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끝도 없는 절망감, (무의지적 기억과 의식의 흐름에 따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지식의 잡탕이고 허영일 수 있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빠짐없이 기술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단념하지 못한다. (수백 권의 책을 읽고 수천 매의 사진을 탐구한다.) 혹시 도덕적 설교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채홉이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비결은 그들에게 이것저것 전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말이다.
나는 끊임없이 바꾼다. 대담하게 바꾼다. 어떤 부분도 더 이상 바뀌지 않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재미와 기쁨, 순수한 감동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무작정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지도 않는다.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과 버전, 목소리가 있고 기준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동어 반복의 금지. 반복의 거부 (하지만 이것처럼 간과하기 쉬운 것은 없다).
산만하게 이야기하면서 곁가지를 치고 있다고 의심하면서도, 관련없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나타난다고 의심하면서도, 묘사가 그렇게 길 필요가 있을까 의심하면서도 한 단어, 한 문장이라도 잘라내기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불필요한 장식물을 치워버린다고 생각하지만.
하지만 소설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는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핵심 부분 (또는 고도로 조직화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체계)만은 벗어나거나 변화되지 않아야 한다.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고수해야 한다. 작가들은 저마다 유일무이하다. 그렇다면 (알갱이와 쭉정이를 구분해서) 필요 없는 부분은 또는 필요 이상의 부분은 문장의 리듬과 상관없이 무조건 삭제가 가능할까? 작품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완전히 허물어버릴 수는 없다.
나는 왜 그걸 있는 그대로 (불가침의 영역을 가진) 독립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못할까?
어느 날 갑자기 소설이 낯설게 느껴지면서 긴 서사를 깨부수고 싶은 간절한 욕망 때문인가? 지나치게 수정을 거듭하다가 그만 통째로 망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평생동안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스토리에 대한 혹은 작가 자신에 대한 고질적인 자신감 결여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인가?
작가 스스로 불신하는데 어떻게 하여 독자가 그 소설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말하는 독자는 연필로 여기저기 밑줄을 잔뜩 치고, 구석구석에 메모를 하고, 세밀하게 주를 달고,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고 또 읽고, 죽을 때까지 책을 간직하는 그런 진지한 독자를 말한다. 작가는 그런 독자에게 떳떳해야 한다. 작가적 양심과 품격으로 작품의 진실성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한다. 그렇다고 나는 그에게 최면을 걸고 유혹하고 넋을 빼놓고 감동에 빠지게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와 (도저히 불가능한) 정확성, 객관성에 대한 끈질긴 집착. 신과 종교, 자연, 운명, 지독한 고통에 대한 탐욕, 악몽, 원죄 의식,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과 반추. 인간 본성이나 원초적 세계관에 대한 작가적 공감.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수수께끼와 유쾌한 유머. 개성 있고 독립성이 강한 여성들의 초상. 사랑과 애증, 이별에 대한 세밀한 묘사.
내 글쓰기 작업은 계속 진화하고 있는가?
문장에서 힘을 빼고 간결하면서도 조밀하게 압도하는 문장을 쓸 수 있는가?
우리말의 언어의 농도, 언어의 리듬, 언어의 울림, 언어의 멜로디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위하여……?
순수 예술을 위하여……?
김규현은 사막의 남쪽에서 죽었다. 유대인 의사는 사망 원인을 self murder로 기록했지만 사인은 확실치 않다. 그의 죽음은 숭고했는가. 그는 허무주의자인가. 그게 자발적 죽음이었다면 (나는 판단을 보류하지만) 작가는 인물의 자유를 존중해야만 할 의무가 있다. 그의 자아는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죽음은 강박이고 욕망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의 장소가 사막이었으니까.
그가 기능과 능률, 디자인을 생명처럼 여기는 유명한 건축 설계사이긴 해도 (경제학에서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행위자를 지칭하는) 호모 이코노미쿠스 (Homo Economicus)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지도 않고 행복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무시하고 두려워하고 회피한다. 사랑 증오 환희 슬픔 쾌락 같은 감정을 극도로 억제한다. 끊임없이 불안 강박에 시달리면서 자신을 의심하고 부인하며 자기 희생과 고통과 고난을 달게 감수한다. (그래서 어떤 독자가 유쾌하게 동일화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극히 건강해서 어린이용 동화와 만화를 좋아하고 힘든 시기에는 희극적이고 풍자적인 소설을 읽으며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로맨티스트다. 따뜻한 인간적 지성과 감미로운 예술적 감각으로 설계도 작성이라는 자기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그는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그는 성공한 건축가이다.
그는 죽어가면서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았을까? 불안과 강박 때문에 분열된 그의 자아들은 서로 화해했던 것일까? 그는 인물들과 사물들과 세상과도 화해했던 것일까? 그는 마침내 어떤 진실에 도달하면서 운명적 죽음을 맞이했는가? 그는 그가 애써 찾았던 신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죽어가면서 비로소 신적 경지에 다다를 수 있었던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의 죽음은 작가가 의도한 소설적 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결말은 (진정한) 작가에게도 인물에게도 곧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결말이 작가가 미학적 도식 또는 문학적 문맥에 사로잡힌 작위적이고 상투적이고 겉치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뻗어나가면서 더 많은 것을 설명하고 진술하려고 한다. 그건 거대한 서사를 시도하는 무의식적 욕망이고 탐욕이고 허영심이고 타락이고 분수를 모르는 과욕이다.
이 소설은 무척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 사하라의 모래 사막처럼…… 남쪽 바다처럼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가. 작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소설의 전통적인 관습과 보편적인 문법을 벗어나는 복잡하지만 독자적인 구조 속에 리얼리티를 토대로 한 문학적 장치들 (배경과 사건, 픽션과 논픽션의 중간 쯤되는 에피소드들, 인물들, 극적 대화, 독백, 은유, 의식의 흐름, 초월, 체념, 무상, 설명, 진술)을 정교하게 배치하였는데, 그래서 정직하고 생생하고 숙명적이고 심오한 살아 숨 쉬는 영혼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것들을 연주하고 변주하는 교향악이라고 한다면, 심미적 아름다움이, 문학적 아름다움이, 고귀한 도덕적 정신이 깃들어있다면, 도덕적 진지성을 복원하고 추구하며 거기에 존엄성을 부여하려고 시도했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초상」
나는 (지금쯤 국가와 사회의 집단 기억에서 사라진 전쟁인) 월남전 참전, 나트랑 102 야전병원, 생사의 기로를 헤매야 했던 정체불명의 열병, 환각과 망상,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 전쟁에 대한 섬광과 같은 총체적 기억이 일으킨 정서적 트라우마 때문에 한동안 상상력 과잉이었고, 불안 강박, 편집 성향, 과대망상에 시달렸다.
우리는 “왜 여기서 싸워야 하는지?” 끊임없이 의문이 들었다. 우리들에게 정부의 공식적인 전쟁 명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국가가 명령했기 때문에 와서 싸울 뿐이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대결에서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라는 정부의 선전은 그저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보충병에 불과했다. 우리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개성을 지닌 인물이건 간에 군복을 입는 순간 똑같은 전쟁 부품으로 취급되었다.
열대의 폭우, 맹렬한 더위, 위협적인 정글, 전투를 위한 끝 모를 행군. 화약 냄새, 땀 냄새, 오줌 냄새, 피 냄새, 시체 썩는 냄새.
전쟁터에 던져진 우리들은 자주 자신이 개성과 존엄을 가진 인간임을 망각했다.
기억과 망각은 서로 반대이면서 상호적이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기억은 항상 망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망각되었다고 영원히 잊혀진 것이 아니며 반대로 기억 속에 있다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잊은 것을 어떻게 기억한다는 것이며 기억하는 것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전쟁소설은 기억과 상상의 혼합물이다. 기억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회고록이나 수기일 뿐이다.
나는 성장소설이나 사회비평소설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므로 냉전시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대결에서 서로 이념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벌이는 말의 잔치가 주제가 될 수 없다.
참혹한 전투 경험, 전쟁의 허무, 전쟁이 가져오는 인간의 비극, 전쟁에서 귀환 후 겪는 트라우마, 인간의 발가벗겨진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 것도 아니다.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인간의 기억과 망각에 관한 이야기.

모든 전쟁의 공통점은 인간이다.
전쟁은 젊은이들을 희생시키기를 좋아한다. 전쟁은 흥미진진한 역사소설을, 평화는 지루한 소설을 만들어낸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전쟁이 즐거운 것이다.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노인들이지만 싸우고 죽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또한 전쟁에 뒤따르는 고통과 슬픔과 승리도 젊은이들의 몫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난, 사랑, 전쟁을 알기 전에는 인생의 맛을 전부 맛보지는 못한 것이다.

餘論 - 뭔가 덧붙일 말이 남아있단 말인가?

나는 왜 직접 해설하려고 하는가. 그건 독자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일이 아닌가. 독자에게도 무한한 자유가 있다. 誤讀도 읽는 방법 중 하나일 수 있다. 독자가 받아들이는 방식, 즐기는 방식은 훨씬 더 자유스럽다. 나는 진지한 독자를 존중해야 한다.

김규현은 무신론자가 아니다. 오히려 범신론적 유신론자이다. 신을 찾으려는 초월을 향한 욕망은 온갖 고행을 자초한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죽음이 그를 매혹한다. 죽음이 그를 치유한다.

나는 작가로서 압도적으로 낙관주의 또는 긍정주의 편향 (bias)이다. 내가 쓰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나 사회주의 리얼리즘 혹은 포스트 모더니즘과는 동떨어진 실존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독자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위해서 쓸데없이 언어를 장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러 작가의 의도를 헷갈리게 해서 애매하게 표현하거나 또는 주제를 심오하게 보이려고 어설픈 시도를 하지 않는다. 實在에 근거해서 또는 (피상적인 관찰보다는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存在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토대로 해서 상상력에 불을 붙인 뒤 명료하고 정직하게 산문을 쓰기만 해도 독자들을 설득하고 문학적 감각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술지상주의적 작품도 아니고 막가파식 넷플릭스 작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리얼리즘과 판타지를 교묘하게 뒤섞은 튀기도 아닌 순수문학과 대중소설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간소설 middlebrow fiction이 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나는 지금 자기 잘난 맛에 취해서는 문학적 수사, Sentimentalism, Melancholy, Nihilism, Narcissism, Realism에 향수를 느끼고 있다.

지금 21세기 자본주의 사회는 컴퓨터와 인터넷과 AI가 지배하는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다. 종이책은 저물었고 그래서 발표할 지면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출판은 (수없이 거절을 당해야 하는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언감생심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나는 내 소설을 인터넷 여기저기에 올린다. 인터넷은 온갖 종류의 마법이 가득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적 조회수가 어느덧 백만 번 (?)을 넘어섰다. 내가 종이책에 발표했다면 불과 몇십 명 또는 몇백 명의 독자가 읽었을 것 아닌가? 온라인 상에 올리기도 쉽고 내리기도 쉽다. 글자 수나 매수에 제한이 없으니 무한정이다. 무엇보다도 자유자재로 수정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 일인가. 나는 끊임없이 수정한다.

우리의 삶은 길고 긴 시간의 연쇄이고 일련의 무작위적인 사건들이 연결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신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게 내 귀에 이상하게 들려야만 합니다. 역사적인 사건이건 사소한 사건이건 불문하고 하나의 사건은 언제나 비밀스러운 이면이 있기 마련이다. 裏面은 표면 속에 숨어있다. 이면은 암흑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거의 예외 없이 매우 복합적이고 자아 분열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악마와 천사라는 양면성, 어두운 면을 조금씩 가지고 있다. 사건과 인물, 실재의 이면을 탐색하는 것이야 말로 작가에게 부과된 중대한 책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인물들의 본래의 모습과 감정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이때 작가의 상상력이 작동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면의 진실을 끝까지 파헤쳐야 한다.
나는 40여 년간 법조인 생활을 했다. 누가 뭐래도 뼛속 깊이 변호사인 것이다. 법조인은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사실 또는 사건의 (실체적 혹은 물질적)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Fact check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모든 사소한 것까지 말이다. 그런 후에 (2000여 개가 넘는 각종) 법률의 규정과 난해한 법이론을 적용하는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지금, 여기 세상에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이다. 나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실용주의자이므로 무슨 과격한 이론이나 이념의 원리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술에 있어서 형식보다는 내용을 아름다움보다는 의미를 더욱 중요시한다. 그래서 내 소설은 철저히 거의 극단적으로 리얼리즘 소설일 수밖에 없다. (너무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면 예술적 상상력이 고갈된다고 했는데 그게 내 한계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즈음 누가 리얼리즘을 좋아하는가? 온통 판타지나 SF에 쏠려있지 않은가. 나는 시대의 트렌드에 불가역적으로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풍남항은 그 옛날 어선들이 드나들고 정박했던 내 고향의 작은 어항이다. 소록도는 육로로 가면 삼십 리 길을 버스를 갈아타고 종점인 녹동항까지 빙 돌아가야 했다. 거기서 10분쯤 연락선을 타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소록도로 들어갔다. 연락선은 거의 30분 간격으로 있었다.
풍남항에서 아름다운 섬 거금도와 고흥 반도 사이 해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조류의 흐름을 거슬러서 통통배인 작은 어선을 타고 가면 소록도 선착장까지 30분쯤 걸렸다.

나는 백마부대 용사로 월남전에 참전했고 지금은 매월 국가와 보훈부로부터 보훈급여금을, 서울시로부터 참전명예수당을 받고 있다. 나는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정체불명의 열대병으로 나트랑에 있는 102 야전병원에 40여 일간 입원했었다. 군의관은 나중에 퇴원했을 때 무슨 병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고 내가 살아날 가망은 일 프로 정도였다고 말했다. 기적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때가 1969년 여름이었다.
작성일:2023-01-31 12:38:07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