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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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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검은 그림자의 여인 ― 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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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12-27 10:33:08
조회수
602
5. 1990년 10월 17일 밤,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쌍묘

황인오 포섭, 입북
1990년 6월 중순 이선실은 서울 중구 명동 소재 YWCA 회관에서 개최된 민중당 창당 발기인대회에 참석하여 사회자로부터 “이선화 여사는 평생을 바쳐 번 돈을 우리 민중당에 헌납하셨다.”는 소개의 말을 들었다.
그날 대회가 끝난 후 인근에 있는 상호미상 식당에서 장기표의 처 조○○가 민가협 회원들에게 “이분이 평생을 고생해서 번 돈을 민중당에 헌납하셨습니다. 전에 우리 민가협 사무실을 얻을 때 돈을 보태주신 분도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소개하자 이선실은 “나는 민중당을 지지하는 사람인데 혼자 살면서 삯바느질로 평생 모은 돈을 헌납한 것뿐입니다. 너무 약소합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조○○가“이분은 서울대 대자보 사건으로 구속된 서울대생 황인욱의 모친인데 아들 3형제가 감옥생활을 하였고 지금은 출소하여 잘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황인오의 어머니 전○○을 소개했다.
이선실이 “아드님들은 뭘 하느냐?”고 묻자 전○○은 “둘째 아들 황인오는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셋째 아들 황인혁은 성남에서 노총에 다니고 있어요. 넷째 아들 황인욱은 서울대에 재학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선실은 “그렇습니까? 다음에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데 집 전화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인오와 같이 살고 있습니까? 인오에게 할 얘기가 있는데 인오 집 전화번호도 알려 주십시오.”라고 부탁하였으나 전○○이 황인오의 집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우선 전○○의 연락처만을 알아내는 등 포섭 대상 인물에 대한 사전 정보를 그날 입수했다.
1990년 7월 초순 서울 마포구 서교동 소재 민중당 창당준비위 사무실에서 개최된 민중당 여성분과위 결성식에 참석하여 민가협 회원 10여 명과 다과회를 하고 인근 하얀집 지하다방으로 내려와 전○○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조용히 한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전○○이 “나중에 집으로 전화를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했다.
1990년 7월 초순 이선실은 전○○에게 전화로 “나는 평생을 혼자 사는 몸으로 인오를 양자로 삼고 싶습니다.”라는 구실로 황인오의 전화번호를 재차 물어 황인오의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1990년 7월 중순 이선실은 황인오의 처 송○○에게 전화하여 황인오가 저녁 10시가 넘어 귀가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날 밤 10시쯤 관악구 신림4동 511-8호 당시 황인오 집에 재차 전화하여 황인오에게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제의하여 그 주 일요일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1990년 7월 하순 어느 날 오후 1시 이선실은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인근에 있는 공중전화로 황인오에게 “신대방역까지 왔는데 집이 어딘지 모르겠다”라고 연락한 후 수박 한 통을 구입하여 마중 나온 황인오의 동생 황인욱의 안내를 받아 황인오 집을 찾아가 “밖에서 황 선생을 기다리는 분이 있으니 잠시 같이 나갔다 오자”고 제의하여 황인오의 승낙을 받고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때 이선실은 황인오의 손목을 붙잡고 “사실은 내가 민가협 활동을 하고 있어 황 선생 어머님도 잘 알고 있고 황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특별히 황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신대방 전철역 근처에 와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하자”고 하여 지하철 2호선 신대방 전철역 인근 제방둑에 있는 벤치로 유인하여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파간첩 권중현에게 인계, 간첩으로 포섭토록 했다.
그 후, 1990년 10월 초순 이선실은 관악구 봉천동 소재 전○○ 집을 방문, 황인오, 송○○, 전○○, 황인욱 등과 저녁 식사 후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손잡고 일하면 살길이 생기지요.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다. 그 방법은 우리 공화국을 위해 일하는 것이요. 이북에 가면 살길이 열려요. 인오는 이달 안에 북에 갈 것이니 준비를 하라. 극비사항이다. 북에 가면 김정일 비서는 물론 주요 인사들과 만날 것이요. 기간은 4~5일 걸릴 것이니 준비물 등은 차후 다시 알려 주겠소. 인욱이는 북에 갈 명단에 들어 있지 않으니 평양방송을 듣고 있어라.”
1990년 10월 초순 이선실은 관악구 신림동 황인오 집에서 황인오 부부, 전○○ 등에게 “북에 가는 문제는 우리가 다 알아서 주선할 테니 걱정할 것 없소. 4~5일만 다녀오면 된다니까. 북에 갈 때는 애 아빠가 집에 있는 것처럼 하고 절대 비밀을 지켜야 하오.”라고 지시했다.

1990년 10월 16일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인근 돌곶이산에 있는 쌍묘 부근에서 이선실은 권중현, 김동식, 황인오 등과 만나 대기하면서 황인오에게 “나는 해안 침투를 여러 번 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말을 하며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랫동안 이중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자기 기만과 자기 방어에 능숙했다. 하지만 매번 두려웠다. 그때마다 악몽을 꿨다. 그녀는 그 두려움을 직시하고, 인정하고, 그것과 춤을 추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녀는 한때는 천천히 흐르는 세월이 지겨워서 마음고생을 했는데 이제는 너무나 빠른 세월 때문에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아픔마저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여자로 태어났으니까 그저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고 싶었다. 부엌에서 음식을 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남편과 잠자리에 들고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고, 들판에 나가서 밭일을 하고,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험난한 인생역정은 그런 삶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삶은 단순한 직선이 아니라 나선을 그리며 수축하고 증폭했다.
자신의 정체성과 씨름하면서 자신을 혐오했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의 무력한 삶에 심각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돌이켜보면 사랑은 찬란한 무지갯빛이 아니었다. 죽음처럼 강한 것도 아니었다. 슬픔과 후회뿐이었다. 하필 사랑의 대상이 남파 공작원이었으니. 운명이었다. 그 멋진 남자를 만나서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그의 금빛 찬란한 사상과 이념에 점점 세뇌당했다. 그것들이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뒤흔들고 혼란에 빠뜨리고 심지어 부추겼다. 그때부터 골수 공산주의자로 변모했다. 그녀는 그때 그가 모진 고문을 당하여 죽자 분노했었다. 그래서 삶의 궤적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심연의 미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가 사랑이라며 단단히 붙잡고 있는 것은 꿈결처럼 사라질 것이니 / 가슴은 망각에 빠지고 두 눈은 깊은 잠에 빠지리라.

[강화도는 서해안에서는 가장 크고 역사가 깊은 섬이다. 한강 하구와 강화만의 서해 바다가 만나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황해북도 개풍군과 황해남도 배천군과는 지척에 있다. 개성과 해주는 평양과 기차 노선이 연결되어 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38선이 남북을 가로막고 있었지만 강화도에는 공공연히 북으로 올라가는 월북자들과 남으로 내려오는 월남자들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그 당시에는 남북간 바다를 통한 밀무역이 성행했다. 6·25 전쟁 기간 중에는 노동당 연락부 소속 대남 공작원들이 수시로 강화도를 통해 남파되었다가 임무를 마치고 나면 그 길로 되돌아갔다. 강화도는 그때부터 남파 간첩들이 드나드는 가장 중요한 루트였다. 1970년대 이후에는 해주의 해군 기지에서 출발한 반잠수정들이 제집 드나들 듯 왔다갔다 했다. 왕복 5시간이면 가능하기 때문에 공작 모선 없이 반잠수정의 왕래가 가능했다.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와 화도면 내리는 삼산면 석포리와 마주보고 있다. 건평리나 내리에서 출발한 반잠수정은 주문도와 소연평도, 대연평도 사이 바다를 거쳐 해주로 들어가게 된다. 1989년경 김낙중은 건평리 해안에서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을 만나 공작모의를 했고, 1990년 10월에는 거물간첩 이선실 일행이 바로 거기서 반잠수정을 타고 해주를 거쳐 북으로 올라갔으며, 1년 후인 1991년 10월에는 김영환과 조유식이 역시 반잠수정을 타고 해주를 거쳐 북으로 올라갔다. 1998년 11월에는 하영옥이 심재춘과 함께 강화군 화도면 내리 해안에서 밀입북을 대기하다가 반잠수정이 군에 발각되어 접선에 실패하면서 밀입국 계획이 미수에 그친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이선실은 여권이 있어 제3국을 통해 얼마든지 입북할 수 있었는데도 75세의 나이로 반잠수정을 타고 입북한 것은 황인오를 안심시키려고 한 행동이었다. 북한 당국은 이선실이 해외를 통해 복귀할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권중현에게 지시했었다. 그녀가 75세의 노인이어서 해상을 통해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복귀하는 것이 무리이고 사고 위험이 높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음속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버리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면서 ‘가다 죽어도 좋으니 선생들과 함께 해상으로 복귀하겠다’고 완강하게 주장했다.
그녀는 말했다. “나를 진짜 할머니 취급하면 섭섭하지. 나는 젊은 시절 수십 번이나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나들었어. 공화국의 영웅이라고……. 안기부 사람들은 헛물만 켜지. 내 암호체계는 도무지 풀지 못했어. 아마 영원히 풀지 못할걸. 내가 북으로 돌아가고 나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겠지.”
김동식은 당일 아침 6시 45분~7시 사이에 평양방송을 통해 접선 신호 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그는 라디오를 평양방송 주파수에 맞추고 약속된 신호 노래가 나오는지를 확인했다. 계획된 시간에 접선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북한 공작부서와 공작조가 미리 약속한 제목의 노래가 나오면 당일 접선을 할 수 없다는 뜻이고 노래가 나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접선을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약속된 노래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정대로 접선할 것으로 판단하고 계획대로 접선 장소인 강화도를 향해 출발했다.
이선실과 김동식은 버스를 타고 접선 장소 근처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약수터에서 다시 만나 네 명(이선실, 권중현, 김동식, 황인오)이 함께 북한 공작부서가 무전 지시를 통해 지정해준 접선장소인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의 쌍묘까지 접근했다. 쌍묘에 도착한 일행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묘지 주변 숲에서 은폐해 대기하면서 준비했던 간식으로 식사를 했다.
밤 11시 30분, 이선실 일행은 쌍묘 부근에서 출발하여 약 10분간에 걸쳐 접선할 해안 뻘밭으로 이동했다. 거기서 다시 북한 해상공작 기지에서 공작선편으로 남파되는 호송 안내조와 접선을 위해 대기했다. 밤 12시, 일행은 남파된 호송 안내조와 3회에 걸쳐 타석신호 후 접선했다. 그들로부터 방수용 고무 옷을 건네받아 입고 20여 분간 뻘밭을 걸어서 이동하여 바다에 반잠수 상태로 대기 중이던 반잠수정에 탑승해서 황해도 해주를 통해 복귀했다.

황인오(黃仁五)
1992년 8월 안기부는 김낙중 관련 간첩단 사건을 수사했다. 1992년 8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일 동안 김낙중과 심금섭, 노중선, 권두영을 체포했다. 그리고 9월 10일부터 10월 20일까지 한 달 동안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조직원 검거 작전을 진행했다.
1992년 8월 초순 안기부는 먼저 민중당 공동대표를 지낸 김낙중이 간첩활동을 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하면서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김낙중은 1988년 12월 한국을 방문한 북경 사회과학대학 교수 이상문의 소개로 남파간첩 최○○과 이홍배를 만났고 그들의 간첩활동 제의를 수락했다. 1990년 여름 최○○로부터‘무두봉 11호’라는 암호명을 받았고 공작활동에 필요한 난수표와 음어표, 단파라디오, 독약 앰플도 함께 받았다. 최○○는 김낙중에게 “동조자를 포섭, 지하망을 구축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90년 10월 말에는 또 다른 남파간첩 임○○을 만났다.
임○○는 김낙중에게 두 가지 지령을 내렸다. 첫째는 곧 창당될 민중당에 입당하여 조선노동당의 지도를 받는 전위 정당으로 육성하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당 운영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테니 핵심인물을 포섭해서 14대 총선에서 반드시 원내에 진출시키라는 것이었다.(이선실은 물론이고 김낙중과 접선했던 남파간첩들은 모두 공작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북으로 복귀했다. 그러므로 안기부는 그들을 체포해서 조사할 기회가 없었다. 그 당시 안기부는 얼마나 무능했는가? 10년 동안이나 수많은 지령문에 들어있는 수수께끼같은 요소인 X를 끝내 풀지 못했으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정체 불명의 할머니가 좌파 정당의 각종 모임에 거의 공개적으로 나타나서 활동했고, 여러 차례에 걸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는데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김낙중은 1990년 11월, 민중당 결성을 주도하고 있던 이재오를 만나 그 자리에서 민중당 입당 의사를 밝혔다. 이재오는 김낙중이 민중당 공동대표가 되는 것에 동의했다.
민중당 침투에 성공한 김낙중은 남파간첩에게서 받은 공작금 210만 달러를 명동과 남대문에 있는 암달러 시장에서 환전했다. 그 가운데 7,900만 원을 14대 총선에 출마한 민중당 후보들에게 선거자금으로 지원했다.
김낙중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전 민중당 정선지구당 위원장 정운환이 김낙중으로부터 북한 공작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1992년 3월 14대 총선 당시 민중당 후보로는 가장 당선가능성이 높았던) 정운환을 조사하자, 정운환은“친구인 황인오로부터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돈을 지원받았다”고 진술했다.
1992년 9월 초 김낙중이 30여 년 동안 북한의 고정간첩으로 활동했다는 당국의 중간 수사 발표가 나왔다. 여기서 김낙중이 강화도 건평리 해안을 통해 북한의 공작원과 접선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황인오는 긴장했다. 강화도 건평리는 2년 전 자신이 밀입북하고 귀환한 루트였을 뿐만 아니라 최호경이 결성한 주사파 비밀조직인 ‘1995년 위원회’가 평양에 파견했던 조직원이 밀입북하고 귀환했던 곳이었다.
황인오는 9월 9일 저녁 7시 30분부터 8시 사이에 수유리 식당에서 아내와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는 7시 20분부터 북부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생맥주집에 앉아 마주 보이는 식당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8시가 지나도 아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안기부는 도청을 통해서 황인오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 수유리로 간다는 첩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황인오의 아내 송○○을 미리 체포한 후 그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때 황인오는 가벼운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다음 날 교신에 쓸 건전지와 발신 전문 초안, 조직원 명단이 등산용 조끼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들이 일제히 권총을 겨눴다.
“꼼짝하지마.”
“황인오, 너를 체포한다.”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너 말이야…… 마누라를 기다리는 것은 헛수고야. 우리가 이미 신병을 확보했지. 그러니까 순순히 굴라고.”
“제 처를…… 무슨 죄가 있다고……?”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우리가 판단하는 거야.”
“야! 시간 없어. 일단 가자고. 남산 분실 알고 있지. 거기서 정식으로 조사를 할 거니까.”
그는 그 즉시 안기부 남산 분실로 연행되었다.
지하 조사실은 작은 방이었는데 벽과 천장은 흰색 방음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테이블 같은 긴 철제 책상과 의자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불온한 공기가 감돌고 담배, 사람 땀, 피 냄새가 났다.
그때 젊은 수사관이 회색 수의로 옷을 갈아입히고 나서 곧바로 50대 수사관이 들어왔다. 그 수사관이 질문하고 젊은 수사관은 타이핑을 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황인오와 김낙중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빠져나올 구멍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압수된 전문 초안, 조직원 명단 등에 의해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이 뻔했다. 그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배어 있었다. 심장은 아주 천천히 고동치면서 가라앉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인생은 빨리 배워서도 안 되고 지름길로 가서는 더욱 안 된다.’ 그 순간 체념했다.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더 험한 꼴을 당하기 전에 술술 진술하기로 작정했다.
“야! 임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겠지. 순순히 불란 말이야. 묵비권을 행사하면 피차 피곤하지.”
“우리가 알고 싶은 건 김낙중과 심금섭과의 관계야?”
황인오가 말했다.
“안기부가 틀렸어요.”
“뭐야……?”
“저는 김낙중과는 관계가 없어요. 그 사람 얼굴도 몰라요.”
“이 새끼가…… 오리발……”
“혹시…… 중부지역당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거야?”
“여기가 어딘줄 알고……”
“잠깐만…… 너무 서둘지 말자고…… 한번 들어나보지……”
“알겠습니다. 어디…… 자세히 말해보라고.”
“완전히 잘못 짚었소. 나를 제대로 건지긴 건졌는데…… 나는 그쪽이 아니요. 나는 지하당 사업을 한 사람이요. 중부지역당이란 말입니다. 내가 그 총책이요.”
“틀림없겠지……?”
“내가 다 말하겠소. 그러니 때리지는 마시오. 고문이라면 지긋지긋해요.”
“그걸 알라고…… 우리가 그걸 좋아해서 하는 게 아니야. 안 불면 어쩔 수 없다니까.”
그는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나서 여러 번 조사를 받았다. 특별사법경찰관은 그때마다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고 그는 조서에 손도장을 찍었다.
안기부 남산 분실에서 황인오는 그 무시무시한 고문을 당하기 전에 서둘러 자신의 정체와 그동안 활동 상황 등을 완전히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잔뜩 겁을 집어먹었고(가족까지 모두 구속되었으니), 초조하고 긴장했다. 지나간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오래전인 것 같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바로 조금 전의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정정당당하게 맞서기로 결심한다. 역사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
그 순간 중부지역당은 물론 안기부가 10년 동안이나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이선실의 실체가 드러났다. (분리분할, 단선연계의 원칙에 의해 김낙중과 이선실 간에는 직접적인 연결 관계가 없었다. 그래서 김낙중 수사 과정에서는 이선실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황인오의 중부지역당 수사 과정에서 비로소 이선실의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 7월 말 이선실이라는 노파와 권중현이라는 사나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니 내가 좀 더 똑똑하고 분명한 지혜를 지녔었다면.
그렇게 새로운 막노동 인생의 건강한 출발을 하고 있을 무렵인 90년 7월 하순의 어느 날 이선실이라는 노파가 나를 찾아왔다. 이선실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전 정보가 있었다. 일찍 혼자 된 노파인데 그동안 식당과 바느질 등으로 모은 재산을 각종 민주단체에 쾌척하는 등으로 운동권 일각에서 칭송이 자자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민중당 건설 작업에 크게 도움을 준다는 소문을 들었다.
집에 찾아온 이선실이 예상한 대로 어머니와 우리 3형제의 민주화 투쟁 경력, 특히 기본 계급으로서 탄광 노동운동에 헌신한 내 전력에 대한 칭찬을 하다가 잠깐만 나가서 얘기하자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잠깐만 나가자는 것이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나섰다.
신대방역 둑방의 벤치로 가니 웬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나이가 있었고 노파는 어느 틈에 사라지고 없었다. 반쯤 머리가 벗겨진, 165센티미터 가량의 키에 다부진 사나이였다. 거두절미하고 빨리 용건을 털어놓도록 재촉하는 나에게 사나이는 자신이 북에서 왔다고 말했다.
“북이라니! 평양 말이오?”
나를 만나보라는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찾아왔다는 것 아닌가? “나는 주사파도 아니다. 그런데 왜 김 주석이 나 같은 사람을 어떻게 알고 만나보자는 것인가?”라는 내 반문에 사나이는 “나는 대외연락부에서 파견됐습니다. 황 선생님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투쟁해 왔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북 동원탄광 사태를 영웅적으로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장을 폭파하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황 선생님을 만나보라는 김일성 주석님의 지시를 받고 찾아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다…… 그만두고 당신이 북에서 왔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습니까? 그러고 나서 무슨 용건이 있는지 얘기해야 할 것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그 사나이는 그렇다면 약 10여 일 후인 8월 5일과 6일 밤 12시 정각에 평양방송을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그날 12시에 시보가 울리고 나서 적기가가 방송된 다음 “평양에 사는 이철봉이가 서울의 박춘호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정에 의해 다음번에 보내 드립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나온다. 그것이 바로 신분 증명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확인이 되면 그 다음날인 8월 7일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는 것이다.
처음 듣는 이북 방송이고 단파 라디오도 없어서 보통 라디오로 들으려니 잡음만 나고 잘 잡히지 않았다. 10여 분 전부터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적기가’후렴 부분이 들리고 이어서 사나이가 약속한 북한 여성의 목소리가 잡힌 것이다.
우리집 근처 다방에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권중현은 “황 선생, 우리와 함께 통일 사업에 협력해 주시오.”라고 제안하였다.
“나는 통일 운동의 경험이 없을뿐 아니라 전국적 범위의 상층운동이 내가 직접 할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황 선생이 구체적으로 할 일은 좀 더 논의해보겠지만…… 황 선생이라고 갈라진 조국의 통일에 관심이 없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그야 그렇습니다. 나 역시 나라의 통일과 민중해방을 위해 필요한 일이고, 또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라면…… 언제든지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듭 밝히거니와 나는 평소 주체사상 맹종자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지녀왔소. 당신들과 무언가를 도모하기엔 적당치 않은 것 같소.”
이같이 잠시 대화가 오고 가고 나서 권중현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 청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조원이며 우리들의 회동을 엄호하는 중이라고 소개하였다. 167센티미터가량의 키에 보기 좋을 만큼 살찐 체격으로 썩 부드럽고 순한 인상의 27세가량의 젊은이였다. 권중현의 딱 벌어지고 강단 있어 보이는 체격과 기관원 같은 인상에 비해 유복한 환경에서 팔자 좋게 자란 청년처럼 보이는, 한마디로 공작원이라는 인상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 청년은 자신을 김동식이라고 소개했다.

권중현은 그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황인오는 대둔산 11호라는 대호를 부여받았고 김춘배, 이윤하, 정중건이라는 가명을 번갈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준법서약서를 쓰고 특별사면으로 석방됐다.

우리 일행은 해주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조선의 관문이라는) 평양 순안공항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만수대 광장에서 김일성 동상을 참배했다. 그때 이선실은 감격에 겨워 동상의 받침대 위에 놓인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인 김일성 발등을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사회문화부 사람들로부터 온갖 환대를 받았다. 사회문화부는 대남 조직을 총괄하는 대외연락부의 위장 명칭이었다.
내가 돌아올 무렵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이창선 부장으로부터 아주 은밀한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가 지시했다. “황 선생, 서울에 내려가면 남한 사회에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려 보시오. 다름 아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을 다녀오셨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거요. 다시 말하면 남한 전역이거나 대학 사회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 인민 등을 위로하시는 등 신출귀몰해서 남조선 인민들이 김정일 동지를 열렬히 흠모하고 있다는 내용의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거요. 이것은 일체 비밀이요. 부부장이나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황 선생만 알고 결행하시오.”
두 번째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결성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너무나 크고 어려운 임무였다. 그리고 무전기, 권총 (벨기에제 FN BDA 콤팩트 권총), 일화 500만 엔과 주체사상 교양 책자 등을 가지고 함께 올라간 남파 간첩들은 평양에 그대로 남은 채 혼자서 반잠수정을 타고 건평리 해안을 통해 돌아왔다.
황인오는 1991년 7월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동시에 ‘한국민족 민주전선 중부지역위원회’였다) 지도부를 결성하고 총책이 되었다. 다만 북한과 관계없는 자생적인 조직임을 주장하기 위한 위장 명칭으로 ‘민족해방 애국전선’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과정에서 황인오는 중부지역당을 안기부의 창작이라고 거짓 주장을 했고, 또한 이선실의 높은 지위에 대해서는 평양에 가기 전 서울에서 권중현으로부터 이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지위에 있는 거물 간첩이라고 들은 바 있었고, 평양에 갔을 때도 이창선 부장 등이 윗사람으로 깍듯이 모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었지만 이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결국 1심 판사들은 어리석게도 황인오의 허위진술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이선실은 그때 북으로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지만 기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제 간첩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했다.

김동식(가명)
권중현(조장)과 김동식은 1990년 5월 말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으로 침투했다. 그들은 침투준비를 빈틈없이 끝내고 이미 계획했던 대로 5월 26일 평양을 떠났다. 이날 초대소에서 담당 부부장과 과장, 지도원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담당 과장과 지도원들이 배웅하는 가운데 초대소를 출발한 일행은 벤츠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출발지점인 남포항으로 향했다. 그들은 남포항에 정박해 있던 전투선박으로 갔다. 북한 대남 요원들은 대남침투를 ‘전투’라고 부르는데 전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선박이라는 의미에서 ‘전투선박’이라고 하며 다른 말로 공작선 또는 모선이라고 한다. 선박의 뒤쪽에 작은 배인 자선을 싣고 다닌다고 해서 모선이라는 용어를 쓴다.
공작선은 길이가 약 30미터 정도 되는 철제선박인데 위장을 위해 일본 어선과 같은 모양으로 건조했다. 하지만 내부에는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20여 명의 전투원들과 함께 많은 무장장비가 탑재되어 있어 그 전투능력은 웬만한 전투를 치르고도 남을 것이다. 엔진도 고성능엔진을 장착했기 때문에 평시에 항해를 할 때에는 일반 어선들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지만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최고 40노트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다.
남포를 출발한 다음 이틀 동안 항해를 계속해 중국 산둥반도에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북한 국적의 상선 옆에 정박했다. 그리고 상선으로부터 물, 부식물, 기름 등을 보충하고 얼마간 휴식을 취한 다음에 다시 침투지역인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다.
다시 항해를 계속해 5월 30일 저녁에는 제주도 남단 공해상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반잠수정에 옮겨타고 제주도를 향해 항해를 계속했다. 그들은 자선으로 옮겨타고 모선에서 출발한 시간이 저녁 8시경이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후인 밤 11시경 제주도 서귀포시 보목동 앞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숲섬에 도착했다.
숲섬에서 다시 잠수복은 갈아입고 전투원 두 명과 함께 서귀포시 보목동 해안을 향해 헤엄쳐 갔다. 밤 12시경 보목동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고 해안으로부터 100미터 이내에 있는 묘지에 도착했다. 잠수복을 벗어 전투원들에게 넘겨준 다음 묘지를 차후 접선 및 무인포스트 장소로 약속했다.
그들은 KAL 호텔 근처에 있는 묘지 주변의 소나무 밑에다 침투하면서 입고 왔던 옷과 무전기를 비롯한 공작 장비 일체를 매몰했다. 당시 매몰했던 장비 및 물품은 단파무전기 2대와 그에 따르는 문건,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 2정과 실탄 수류탄 4발, 야간투시경 1개, 그들이 입고 있던 점퍼, 바지, 운동화, 속옷 등이었다. 그들은 제주도로 침투한 후 제주도 지역과 대전 지역에서 약 1개월간 현지 적응 과정을 거친 다음, 서울로 들어가 ‘북안산’ 즉 이선실을 접선해야 했다.
유성에 도착한 그들은 임시로 1주일 또는 10일가량 체류하기로 계획하고 리베라호텔 근처에 있는‘벌나비’ 하숙집에 갔다. 권중현이 일하다가 허리를 다쳐 온천 치료차 유성에 온 것으로 구실을 대고 일단 1개월간 하숙하기로 예약을 한 다음 여장을 풀었다. 약 1주일 동안 유성에서 하숙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환경과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권중현은 곧바로 서울에 사는 이선실을 찾아 가자고 했다.
그들은 상경하기에 앞서 권중현과 함께 대전역으로 가서 공중전화를 이용해 서울 동작구 대방동에 살고 있던 이선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선실의 연락처는 북한에서 침투준비를 하는 과정에 담당부서로부터 넘겨받아 기억해둔 것이었다. 이선실은 마침 집에 있었다. 이선실과 사전에 약속된 내용으로 통화하면서 대방동 집으로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영등포역에서 전철로 갈아타고 대방역에서 내린 다음 이선실이 살고 있던 동작구 대방동 대방사우나 뒤편 2층 벽돌집까지 걸어갔다. 물론 전화번호와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부터 서울 지도와 약도를 통해 구체적인 집 위치를 파악한 상태에서 남파되었으므로 찾아가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신분은 당시 이선실이 위장하고 있던 신순녀의 고향 전주에서 취직 때문에 올라온 조카들로 위장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모여 상의한 끝에 권중현과 김동식은 따로 셋방을 얻어 나가서 생활하는 것보다 이선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선실이 전세로 살던 2층 주택의 빈방 하나를 쓰기로 했다.

“공작원들이 실제 남파되어 활동하는 경우 그 기간이 몇 개월 혹은 그 이상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때 여자 문제 즉 성욕은 어떻게 해결합니까? 특히 젊은 공작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중요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신의 경우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주머니에 돈도 많고 적구화 교육을 통해 배웠기 때문에 술집이나 사창가에 가서 어떤 방법으로 성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또 콘돔을 사용하면 성병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공작원들은 남한이나 현지에 파견되었다 복귀하면 반드시 신체검사를 하는데, 이때 성병에 걸린 것이 밝혀지면 명예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 셈이 됩니다. 공작원들은 자존심 하나 갖고 사는 사람들인데 간부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남조선 혁명을 잘하라고 귀한 당자금을 공작금으로 주었더니 그 돈으로 계집질이나 하고 성병까지 걸려서 돌아왔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할 것 아닙니까? 남들의 따가운 시선이 무섭고 자존심 상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6. 1999년 혹은 2000년, 늙은 여간첩의 최후

그녀는 가장 완벽했고 또한 드라마틱한 늙은 여간첩으로 기억된다.
이선실의 정체가 낱낱이 밝혀진 것은 그녀가 이미 남한을 떠난 후였다. 안기부는 그녀가 북으로 영구 복귀하고 2년이 지난 1992년 가을에서야 그녀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황인오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수사하면서다. 하지만 1990년 10월 북한으로 복귀한 후 언젠가 은퇴하고 80세가 지나서 마지막 시기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녀의 말로가 무난하고 평탄했을까?
말년의 이선실에게 우리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선실은 북으로 복귀 후, 통일전선부 대남연락소에 근무하며 자신의 공작원 생활 30년 노하우와 특기를 십분 살려서 공작원 양성에 나섰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사후 돌연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노동당 경공업부로 배치된다. 그녀에겐 좌천성 인사였다.
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이선실이었지만 그녀 역시 사람이었다. 오랜 기간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동했던 그녀에게 공화국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했다. 그녀가 경공업부에 배치됐을 때는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고 김정일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된 ‘고난의 행군’의 시기였다. 그녀는 개혁파 인사들과 만나면서 상부에 외자 유치와 개혁 개방을 주장했다. 그녀의 튀는 행보가 북한 지도층의 눈에는 곱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현실은 절망적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 분노가 두려움을 압도해 준다면…… 자신의 마지막 생애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북한에 심화조(深化組) 사건이 터졌다.
심화조 사건이란 1996~2000년 사이 발생한 사상검증 대학살 사건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단순한 사상검증 사건이 아닌 김정일 정권 내부에서 일어난 권력투쟁 사건이었다. 반당 반혁명 분자를 분쇄한다는 명목으로 당 유력인사들이 대거 제거된 숙청 사건이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는 혼란기에 공포 정치를 통해 권력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그 무렵 개혁 성향이 강했던 이선실 역시 이러한 광풍에 휘말렸다. 이선실은 심화조 사건 말미였던 1999년 말쯤‘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된다. 미제국주의 간첩으로 남한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고 북한 내부를 와해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침투한 자라는 것이다.
일평생 공화국을 위해 헌신한 공으로 영웅이 된 그녀가 말이다.
1974년 북한을 떠나서 16년 동안 일본과 남한에서 공작원으로 불철주야 고군분투하고 나서 다시 북으로 돌아온 지 10년이 된 시점이었다. 이미 일선에서 은퇴하여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겨우 연명할 때였다. 그녀는 어느덧 80대 중반 나이였다. 나이가 들고, 고질병인 소화불량과 편두통에 시달리고, 삶에 지치고, 어쩌면 그녀가 바라던 대로 삶은 풀리지 않아서 실망하고 있었다. 왜 나는 평생 그것에 매달렸던 것일까? 어리석었던 것이 아닐까?
새삼 돌이켜보면, 두 얼굴을 아주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살아야만 했다. 일생일대의 염원은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녀의 생애는 변증법적 모순이었다. 숨이 끊어질 듯 고군분투했던 것이 헛수고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사회안전성 별관 건물의 지하 조사실.
특수감찰반의 반장이 마구 악을 썼다. 그는 아침부터 대평곡주를 퍼마시고 술에 취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녀는 두 손에는 수갑이 채워지고 온몸은 쇠줄에 꽁꽁 묶여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있다. 그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며칠째 계속 물만 마시며 단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몸은 산송장처럼 빼빼 말라가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 입안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이제는 날짜도 요일도 언제인지 몰랐고 계절이 바뀐지도 알지 못했다.
평양의 겨울이 막 시작되는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스스로 연을 끊었던 제주도가 그리웠다. 봄이 되면 온통 들판을 옅은 녹색으로 물들이는 가파도의 청보리가 생각났다. 어머니는 100세가 넘었는데……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조사실 공간에 숨이 막힐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이 간나새끼! 남조선 자본주의에 물든 반역자!! 매국노!!!”
“뭐…… 매국노라고…… 나는 공화국 영웅이야.”
“영웅 좋아하시네. 자백하라니까.”
“뭘……? 자백하라는 거야?”
“스스로 죄를 만들어 자백하란 말이야. 모르겠어?”
나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를 또는 무엇을 저주하고 있는가? 끊임없이 자신을 속이며 가면을 쓰고 살은 죄, 연약한 여자이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던 죄, 언제나 혼자였고 외로운 삶을 살았으면서도 강한 척 남을 속인 죄, 감정이 극도로 메말라서 폐쇄적이고 인간 혐오증에 걸려 있었던 죄, 사랑은 부질없는 불장난이고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죄, 두려움과 공포증에 시달리면서 비관적이고 강박장애나 편집증에 시달린 죄,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처하면서 자신의 관점과 신념을 과대평가한 죄, 공산주의 전위로 최일선에서 투쟁한 전사로 착각했던 죄, 북한의 현실을 외면하고 인민의 고통을 모른 척했던 죄, 이제는 자신의 고통이 끝났으면 하고 바라면서 자기 살해를 생각했던 죄 등등.
“너희 같은 하찮은 것들이 함부로 입을 나불거리면 안 되지.”
“네년은 내 손아귀에 있어. 고분고분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가르쳐주지. 6·25 전쟁 때 미군 첩보기관에서 간첩 훈련을 받은 미제 간첩이란 말이지. 조국을 팔아먹은 미제 간첩 주제에…… 왜 사회주의 우월성을 비방했는가? 우리는 개혁 개방이 필요 없단 말이야. 알갔는가? 량심이 있어야 할 거 아닌가?”
“애송이 주제에…… 뭘 알겠어. 이건 권력투쟁이고 대숙청이야. 역사는 돌고 돌지. 채문덕이도 정성택도 언젠가는 똑같이 배신자 신세가 되어 처형될 거라고. 그렇게 전해주게.”
“이년이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
그날 밤 이상하게 생생한 꿈을 꿨다. 동생 이창하가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누님…… 날 살려줘!?”하고 애타게 울부짖었던 것이다. 그 꿈은 불길한 징조였다.
사형 집행자는 너무 화가 나고 흥분한 나머지 쇠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녀는 옆으로 쓰러졌고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흐른다. 그녀는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일어날 수 없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어떤 것도 보지 못했고 들을 수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자유로웠다. 無로 환원되었다.

이선실은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가장 완벽한 간첩으로 인정받았다.
그녀는 남다른 의지와 강한 정신력으로 자신에게 부과된 어려운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했다. 하지만 집요했고 편집광적이었다.
그녀는 철저히 냉정했다. 남한에서 10여 년 동안 활동하면서 제주도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고 오매불망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지도 않았다.
이선실이 1965년 한국에 침투해서 어느 지하조직의 위기를 수습하고 북한으로 복귀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 남측 군사분계선의 비상 경계 태세가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강화되는 바람에 호송을 담당하는 공작원과 접속을 못하고 보름간이나 비무장지대 얕은 언덕에 땅굴을 파고 숨어서 물만 마시고 자기 오줌을 받아먹으며 견뎌냈다. 다시 공작원과 만났을 때에는 몸무게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다 죽게 되었었는데 이 때문에 공작원이 계속 울면서 그를 업고 북으로 넘어갔다.
아무리 노련한 공작원들이라도 비무장지대를 침투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외줄타기였다. 마치 거품처럼 끊임없이 동그라미를 그리는 철조망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그 풍경은 아득하면서도 씁쓸했다. 우거진 풀섶 속에 촘촘하게 설치된 지뢰밭과 여기저기 얽혀있는 고압전선 등 장애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야만 했다. 철조망 밑을 통과할 적마다 철조망이 그녀를 덮쳐서 목을 칭칭 옭아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남쪽 GP에서 쏘는 총알이 가슴을 관통할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그럴 때마다 남북 분단을 원망했다.
이선실은 1970년 5월 김일성의 특명을 받고 남조선 침투 준비를 할 때, 김일성이 “이번에는 늙어보이도록 분장을 하면 좋겠다.”고 조언을 하자, ‘어떻게 하면 늙어 보일까?’고 며칠을 고민하던 와중에 누가 “어느 책에서 보니 이빨을 다 뽑으면 10년은 늙어 보인다고 하더라.”하는 말을 듣자마자 나흘 동안에 이를 몽땅 뽑아냈다. 김일성이 ‘이선실이 이를 몽땅 뽑았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잣죽을 쑤어들고 와서 “조국이 통일되면 오늘의 이 고생도 옛말이 될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고, 이빨을 몽땅 뽑고 남한에 침투한 덕에 어느 산속에서 북측과 무전교신을 하고 내려오다가 산을 포위하고 수색하는 국군을 만났을 때 순식간에 틀니를 뽑고 80대 노인 행세를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사실 그녀가 여간첩으로서 지녀야 할 신체적 조건은 보잘 것 없었다. 그녀는 반백의 머리 또는 염색을 하고 안경을 쓴 평범한 얼굴의 키 155센티미터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대범한 면이 있고 친화력이 탁월했다. 마음씨 좋고 정겨운 할머니였다. 그래서 남파간첩들은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녀가 진보정당 창당에 간여하고, 민중당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손병선, 황인오를 포섭한 후 이들을 중심으로 간첩망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으로 지하조직 구축을 시도했던 때는 70대의 중반의 할머니였다. 지난 20세기 세계 첩보사에서 기억되는 섹스 어필을 무기로 삼는 여성 공작원들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김수임(金壽任) - (한국의 마타 하리로 불렸던) 김수임은 경기도 개성 출생이다.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빼어난 외모의 인텔리로 영어 회화, 통역에 뛰어났다. 세련된 영어 실력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통역 일을 했고, 그때 알게 된 주한 미군 헌병사령관 존 베어드 육군 대령과 옥인동에서 동거 생활을 했다. 존 베어드와 사이에 아들 김원일을 낳았다. 그녀는 진즉부터 (독일에서 공부한 엘리트 공산주의자) 이강국(李康國)과 연인 사이로 1946년 말 이강국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그를 자신의 집에 숨겼다가 1947년 월북시켰다. 이강국은 김일성 정권에서 초대 외무국장으로 발탁되었다. 이강국이 대남공작을 펼치는 과정에서 김수임은 자기 집을 남로당의 비밀 거점으로 사용하도록 했고 각종 고급 기밀을 빼돌려 이강국에게 제공했다. 존 베어드와 동거기간 동안 이강국의 지시에 따라 각종 간첩 활동을 한 혐의로 1950년 4월 초 전격 체포되었다. 가택 압수수색에서 권총 3자루, 실탄 180발, 북한으로 보내려던 많은 기밀문서들이 발견, 압수되었다. 그해 6월 15일 남한 육군본부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6·25 전쟁 발발 무렵 사형이 집행되어 총살되었다.
시인 모윤숙과 단짝친구로 재판 당시 모윤숙은 김수임을 적극 변호했다.
이강국 역시 6·25 전쟁 휴전 무렵 북한 인민 법정에서 미국 첩자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카와시마 요시코 - 만주식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센위, 중국식 이름은 진비후이, 자는 東珍, 영어식 별명은 Eastern Jewel. 남장여자. 1947년 요식적인 재판 끝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요시코는 마지막으로 "다른 한간 혐의자가 처벌받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처벌받게 해달라"고 청원했고, 이 청원이 받아들여져 1948년 3월 25일 베이핑 제1 감옥에서 뒤통수에 총알을 맞는 방식으로 사형에 처해진다.
정핑루 - 1940년 2월, 정핑루는 상하이 쉬자후이역에서 3발의 총알을 맞고 처형되었다. 왕징웨이 정권의 각료인 후란청의 아내 장아이링이 그녀를 소재로 소설 「色 戒」를 발표했다. 이후 이 소설은 대만의 영화감독 이안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여기서 탕웨이가 정핑루를 모델로 한 왕자즈를 맡았다.
마타 하리 -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활동한 스파이로 미녀 스파이의 대명사.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 자바섬에 살던 당시 배운 춤과 이국적인 외모로 돈을 벌려고 파리에 온다. 물랑 루즈 등을 무대로 선정적인 복장에 선정적인 춤을 추며 인기를 끌었다.
애나 채프먼 - 러시아 출생. 본명은 안나 바실리예브나 쿠셴코. 2010년 2월 미국에 핵탄두 개발 계획의 정보를 수집하는 스파이로 미국에 입국하여 미국인 행세하며 첩보 활동을 했다. 2010년 6월 27일 다른 9명의 첩보원과 함께 검거됐다. 러시아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상당한 대가를 지불했고 돌아온 그녀에게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참고 자료는 블로그(https://blog.naver.com/jungwon4760/222966917472) 참조
작성일:2022-12-27 10:33:08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