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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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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검은 그림자의 여인 ― 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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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12-27 10:32:54
조회수
379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현재의 두 국가 체제를 인정하고 그 위에서 경제, 문화 등 남북교류를 진행해 나가면서 단계적으로 연방제 국가로 나가야 하는 것이 현실적인 것이지요.”
“국가연합은 바로 남한이나 미국에서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름은 연방제라고 하지만……”
“저는 통일정책에 관여한 것이 아니고 젊은 친구들이 만들어 온 것을 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깊은 얘기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전민련식 통일방안은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과 비슷하다고 보는데 그들의 사상은 수령관이나 주체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체사상은 가장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며 민주적인 사상이 아닌가요?
지금은 6월항쟁 이후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NL노선이 운동권의 대세입니다.
주체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관입니다. 6·25 후에 북이 초토화되었는데 김일성 수령님이 다 해결했지요. 수령님은 국가의 중심이며 수령님 때문에 북한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수령님의 사상을 잘 계승하고 있는 사람이 김정일 지도자이기 때문에 북한의 지도자로 옹립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과거에 빨치산 활동에 가담하여 오대산, 지리산 등지에서 활동하였지요.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옆구리에 총을 맞고 더 이상 빨치산 활동을 할 수 없어 하산했습니다. 나는 남북분단의 희생자입니다. 나의 희망이 남북통일이고 그래서 통일운동을 하는데 모든 힘을 보태고 있어요. 손 선생도 통일사업을 열심히 해주기 바랍니다.”
“저는 4·19 당시 민족통일연구회 총책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지역 학생시위를 주도했었지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통일운동에 대하여는 관심이 많습니다. 남북통일이 되려면 쌍방이 자기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서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양보할 것을 양보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비참한 역사를 하루빨리 극복하려면 어떻게든 통일을 이룩해내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통일운동에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손 선생…… 통일운동을 하려면 옷도 깨끗이 입고 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잠바 차림으로 다니지 말고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깨끗하게 양복을 입고 다니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입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려면 활동비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좀 가지고 왔으니 이 돈으로 양복도 사 입고 활동자금으로 써주십시오.”
그녀가 흰 봉투에 든 수표 1,500만 원(500만 원권 수표 2매, 100만 원 자기앞 수표 5매)을 건네주자 손병선은 몇 번 사양하다가 ‘고맙게 쓰겠다’면서 이를 받았다. 이후 이선실은 손병선을 포섭하기 위해 계속해서 1990년 8월 16일 손병선에게 온라인으로 200만 원을 송금하여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990년 8월 중순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 인근 하얀집 다방에서 손병선을 만난 이선실이 주위를 둘러보고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말했다.
그때 종업원이 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그들이 주문한 커피를 탁자에 놓았고 그녀는 자신의 커피를 조심스럽게 젓고 나서 가만히 스푼을 받침 접시 위에 내려 놓았지만 커피는 입술에 대고 마시는 시늉만 했다. 하지만 남자는 황급히 커피를 마시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커피잔 너머로 주위를 예리하게 둘러보았다.
“손 선생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실은 나는 북에서 온 사람입니다. 손 선생과 북의 국가정책을 도와주는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고 손 선생의 협조를 얻고 싶습니다.
지금 그 가부에 대하여 대답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시간을 줄 테니까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까?”
“너무 갑작스러운 제의가 되어 당황스럽습니다.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얼마나 시간을 주면 되겠습니까?”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나 이야기하시지요.”
그 후 1990년 8월 하순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 건물 지하 레스토랑 ‘스크린’에서 손병선을 만나 조용한 구석 자리를 골라 앉은 후 그에게 말했다.
“손 선생,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것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보았습니까?”
손병선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이선실은 갑자기 양손으로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낮고 힘 있는 목소리로 간곡히 요청했다.
그녀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확실하게 대못을 박을 순간 말이다. 그녀는 오랜 공작 경험을 통해서 절호의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었다.
“동지! 도와주세요! 우리 조국통일을 위해서 같이 일해 봅시다.”
손병선이 굳은 표정이 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열심히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도발적이 되었다.
“나는 조선노동당에서 파견되었소. 이제 손 선생을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동지는 이제부터 영광스런 조선노동당의 충성스러운 당원입니다. 손 선생의 당원 부호는 ‘비봉 11호’입니다. 우리 당의 당원이 된 것을 충심으로 축하하오. 동지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당을 꾸리는 사업입니다.
당은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사업을 진행하여야 합니다. 시대 상황이 바뀌었어요. 그러자면 현 민중당 내에서 30대의 유망한 당원 몇 명을 확보해서, 비밀 지하당을 조직해야 합니다. 1979년 ‘남민전’사건 이후 10여 년간 북한과 연계를 맺고 활동한 지하당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김종태 동지가 통일혁명당을 조직할 때 너무 과욕을 부려 사업을 방만하게 꾸리다가 실패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손 선생은 핵심 당원 몇 명만을 확실하게 조직하여 지하 지도부 구성사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민중당 내에서 30대로서 가장 핵심적인 활동능력을 갖춘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보세요?”
“지금 민중당 내 30대 중견간부 중에서는 이○○, 이○○, 김○○ 등이 핵심적 활동능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과 이○○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똑똑하고 당내에서도 신망이 높아 적합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김○○는 성격이 과격하고 독단적이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일단, 이○○과 이○○에 대해서만 잘 관찰해서 요해한 후 접근 포섭토록 하십시오. 그 외 당원으로 포섭할 사람으로는 30대 초반, 중반으로 하고 나이 많은 사람이나 과거 전과가 있는 사람은 피하도록 하세요. 너무 욕심을 부려 독단적으로 일을 결정 활동하지 말고 반드시 당의 지시에 따라서 행동해야 합니다.
국내의 다른 지하망에서 선이 들어와도 응하지 말고 거절하세요. 복선연계가 되면 아주 위험하지요. 우리는 분리분할의 원칙, 횡적연계금지, 단선연계 원칙, 월선금지가 철칙입니다. 손 선생은 어느 정도 자금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입니다. 우선 활동자금으로 1,500만 원을 가져왔으니 민중당 활동과 당원 포섭 활동비로 보태쓰도록 하세요.
어떤 망은 허황된 보고만 하면서 자금만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자금은 자체적으로 해결하고, 문제가 생기면 그때 자금을 요구하도록……하세요.”
이선실은 흰 봉투에 활동자금 명목으로 1,500만 원(자기앞 수표 100만 원권 15매)을 넣어 손병선에게 주었다.
손병선이 말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을 포섭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선실이 말했다. “앞으로 서로 연락할 것에 대비하여 교육이 필요해요. 교육을 할만한 은밀한 장소가 없겠습니까?”
“내 둘째 딸년이 신촌에서 혼자 방을 얻어 살고 있는데 직장을 나가기 때문에 낮에는 방이 비어있습니다. 그 방을 이용하면 될 것 같습니다만……”
그들은 간첩교육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손병선과 함께 레스토랑을 나와 밖에서 기다리던 30대 초반의 건장한 체격을 갖춘 남자를 만나서 소개했다.
“내 조카뻘되는 아이인데 인사하시오.”
라고 하자 손병선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면서
“반갑습니다, 손병선입니다.”
라고 말했고 그는 서울 말투로 공손하게“김동식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웃었다. 웃는 얼굴은 호감을 준다. 하얗고 고른 치아가 드러났다. 그가 말을 할 때는 수줍어하는 듯 시작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아주 조리있게 정확하게 말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조직 원리인 단선연계나 분리분할, 횡적연계금지의 원칙들을 철저히 준수했다. 그래서 1990년 남파간첩 최○○이 김낙중을 포섭하여 ‘무두봉 1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했고, 1989년 여름 남파간첩 윤택림이 주사파의 핵심인물인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을 포섭하여 ‘관악산 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했으며, 1990년 7월 이선실이 황인오를 포섭해서 ‘대둔산 1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했지만, 서로 간 아무런 횡적연계가 없었고 각자 개별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모르고 있었다. 또한 김낙중은 1990년경부터 민중당의 공동대표였고, 김영환은 북한을 다녀온 후 1992년 3월에 민족민주혁명당을 창당했으며(그 전신인 반제청년동맹은 1989년 3월 결성되었다), 황인오 역시 북한을 다녀온 후 1991년 7월에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지도부를 결성했지만 그들은 서로 간 존재를 모른 채 독자적으로 활동한 것이다. 민혁당의 경우 노동당 대외연락부의 5과장이었던 남파간첩 윤택림(그는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다섯차례나 남파되었다)과 남파간첩 진운방(1998년 가을 다시 남파되었을 때는 원진우)의 지도 검열을 받았다.
진운방 부부는 1987년 4월 말레이시아 화교로 위장해서 남파된 후 말레이시아 음식점을 운영하며 공작 활동을 하다가 1992년 9월 이선실 사건이 터지자 전세로 살던 집도 버리고 황급히 북으로 복귀했다.]

1990년 9월 초순 이선실은 남파간첩 김동식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손병선을 만나 전에 약속한 대로 손병선의 간첩교육을 시키기 위해 손병선의 차 편으로 서대문구 창천동 13-101호 딸의 자취방으로 이동하였는데 차 안에서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나는 북에서 임무를 띠고 내려왔는데 처음 왔기 때문에 지리도 익숙치 않고 여러 가지로 잘 모르는 것이 많으니 잘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등 자신이 남파간첩 임을 밝히자 손병선은 김동식에게 “이곳에서 활동하려면 주민등록증이 문제일 텐데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다. 김동식은 “그런 것은 문제없습니다. 직접 해결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김돈식이라는 이름으로 된 주민등록증을 꺼내 보여주자 손병선이 살펴본 후 돌려주면서 김동식에게 “위조를 감쪽같이 했군요. 대단합니다.”라고 하자, 김동식은 “이곳에 있는 동안 손 선생님의 신세를 많이 질 테니 잘 부탁합니다.”라고 했고, 손병선은 “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날 오후 1시쯤 딸의 자취방에 도착한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내 고유의 암호체계를 손 동지에게 넘겨줄 거요. 통신연락 방법은 어려운 것 같지만 찬찬히 잘 들으면 쉽게 배울 수 있지. 나도 이런 것을 혼자서 쉽게 하고 있어. 김동식 동지가 이 분야의 전문가이니까 잘 배우도록 하시오.”라고 말하자, 동석한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통신에는 상향과 하향이 있는데 상향은 현지에서 북한 본부로 보내는 것을 말하고 하향은 본부에서 현지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현지에서 본부로 보낼 때는 무전으로 보내고 본부에서 현지로 보내는 통신은 A-3 방송을 통해서 하게 됩니다. 무전 연락이 안 될 때는 은서 편지를 써서 해외 연락처를 이용하여 보고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때 이선실이 휴대하고 있던 소형 가방에서 메모리식 무전기 1대, 기본암호표 및 난수표 등을 꺼내 방바닥에 펼쳐놓고 무전기 조작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김동식이 말했다.
“이 무전기는 메모리기계와 송신기계로 분리되어 있는데 사용할 때는 하나로 결합하여 사용합니다. 송신장소는 정북에서 서쪽 방향인 개성을 향하여 북사면을 선택해야 합니다. 현지에 도착하면 먼저 안테나선과 지선을 설치한 다음, 메모리 기계에 숫자 전문을 입력시킵니다.
발신기용 밧데리를 묶은 후 발신 시간이 되면 발신기에 크리스탈을 꽂고 안테나를 연결합니다. 발신기와 메모리기를 연결시켜 정해진 발신시간의 몇 분 전후해서 여러차례에 걸쳐 발신합니다. 그리고 발신이 끝나면 즉시 무전기를 해체하고 사용한 밧데리는 땅에 묻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김동식은 발신 난수조립 방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먼저 한글로 작성된 전문을 암호표에서 찾아서 숫자로 바꿉니다. 숫자로 된 전문 앞에 자신의 고유번호 ‘720’(손병선 출생월일)을 씁니다. 작성된 숫자전문 밑에 난수를 써놓고 비산술식으로 합하여 보낼 전문을 완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A-3방송을 이용한 지령수신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매월 3일과 18일 24:00에 평양방송을 청취하여 수신합니다.
먼저 방송에서 적기가가 나온 후 호출부호가 나오면 거기서 불러주는 숫자를 받은 적은 다음 그 숫자전문을 수신난수로 감하여 성경책과 암호표로 해독해서 지령을 수수합니다. 손 선생 호출번호가 아니더라도 받아 적는 연습을 평소에 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서 김동식은 은서서신 작성 및 연락방법에 대해서 설명했다.
“은서시약은 무색 폴리에스텔 조각을 아세톤에 녹여 액체로 만든 후 그 액체를 알콜에 섞어 다시 증류수를 타서 만들면 됩니다. 은서작성은 흰색 종이에 무색의 시약을 이쑤시개나 잉크가 안 묻은 펜에 묻혀 쓰고 말린 다음, 다시 물 묻은 갱지를 그 암서 위에 덮어 씌워 같이 부풀립니다. 부풀린 은서는 책갈피 속에 넣어 말리면 은서로 쓴 표식이 없어지게 되며 그때 그 위에 영문으로 간단한 인사말을 타자로 쳐서 보내면 됩니다.
은서를 보낼 때는 절대 국내에서 발송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해외에서 발송해야 하며 수신지 주소는 일본의 주소로, 발신지는 ‘서울에서’라고만 써서 보내면 됩니다. 일본 쪽 주소는 오사카시 이쿠노구 모모다니 3-15-12 송태영 이행자입니다. 해외 여행 시 1주일 정도 여유를 두고 서신을 보내야만 해외에서 연락이 가능하지요.
앞으로 접선에 대비하여 손 선생의 가명을 하나 지어야 하는데 기억하기 좋은 이름이 있습니까.”
손병선이 말했다.
“내 친구중 과거 4·19 때 학생운동을 같이하다가 1989년에 암으로 죽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이름이 ‘나○○’입니다. 그 이름으로 하면 쉽게 잊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손 선생님의 가명은 나○○으로 정하고, 상대방은 내 이름인 ‘김돈식’으로 하지요.”
그때 이선실이 끼어들어 말했다.
“손 선생, 내가 기념품을 하나 사주려고 하니 함께 근처 금은방에 좀 갑시다.”
“금은방이야 이 근처에도 많이 있으니 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만…… 기념품은 무슨 기념품인가요?”
“꼭 필요한 것이니…… 일단 금은방에 가서 보고 나중에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이선실, 손병선, 김동식 등 일행은 자취방을 나와 신촌로타리 부근에서 김동식은 상호 미상 책방에 들어가 책을 보면서 대기하고 이선실은 손병선과 함께 부근 도장집에서 ‘나○○’, ‘김돈식’이란 이름으로 목도장 2개를 새기고, 다시 부근 금은방에 들려 같은 모형의 금반지(16K, 1돈) 2개에 ‘○’자와 ‘돈’자를 각각 새겨 구입한 후, 김동식과 다시 합류하여 근처 다방으로 들어가 차를 마시면서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말했다.
“이 금반지와 도장은 앞으로 손 선생이 우리 조직원을 만날 때 상호 인식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접선 시 상호 약정된 접선방법에 따라 ‘김돈식씨냐, 나○○이다’라고 하여 1차 신분을 확인하고, 만약에 나○○ 또는 김돈식이라는 사람이 또 한 사람 더 나타나게 되면 2차로 금반지에 새겨진 글씨 ‘○’자와 ‘돈’자로 확인하고, 그래도 미심쩍을 경우 이 도장으로 재확인토록 하도록 하세요.”
1990년 9월 초순 이선실은 김동식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2차 통신교육을 위해 손병선을 만났다. 그의 차편으로 자취방으로 가서 약 3시간에 걸쳐 무전기, 난수표 등 통신 문건 일체를 꺼내 놓고 손병선은 김동식의 지도아래 지령 전문 수신 및 해독방법, 무전기 설치방법, 보고문안 작성 후 난수를 조립 숫자로 환산하는 방법, 보고문안 숫자를 무전기에 입력시키는 방법, 입력시킨 문안을 무전기로 송신하는 방법 등에 대해 세밀하게 재교육을 받았다.
이어서 이선실이 정치사상 교양을 교육했다.
먼저 대남혁명의 필요성에 대하여 ‘남북대화는 계속하되, 기본적인 대남정책은 혁명을 통한 변혁운동이다. 공화국의 인민들은 북과 남의 통일에 대비하여 남조선 인민들이 잘살 수 있도록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공화국은 우리식 사회주의 정책을 위해서 전 인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하고 있으며 신체 부분 중 머리라 할 수 있는 수령을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고 있다. 10년 이내에는 반드시 통일이 이루어지니 확신을 가지고 지하당 건설사업에 매진하라.’라고 말했고,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주체사상은 김일성 수령이 창시하신 세계 유일의 사상으로,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 현실에 맞게 창시하신 불멸의 사상이다. 주체사상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고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상이다.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며, 인간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운명은 달라질 수 있다. 남쪽 운동권에서 돌고 있는 주체사상은 자생적이 아니고 북한 것을 말만 바꾸어 그대로 베낀 것이다. 김일성 수령이 창시한 주체사상은 우리 인류사회에서 마지막 가지고 나갈 위대한 사상이며, 공화국은 이를 중심으로 조선식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남조선에는 주체사상에 대한 원전이 많이 나와 있으니 구입해서 읽어보도록 하라.’고 말했고, 통일론에 대하여는 ‘통일방식은 고려연방제에 의해 통일이 되어야 하며 흡수통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다. 1민족, 1국가, 2체제의 연방제 통일방안이야말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하나로 되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 평화적인 통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미군은 반드시 철수되어야 하고 남조선내 핵무기도 모두 철수되어야 한다. 현재 공화국에서는 전 인민이 통일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으며 통일을 위해서만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 선생도 조국 통일을 위해서 살 수 있는 마음가짐을 굳게 갖고 노력해 달라.’고 말했고, 남조선 민정당 체제하에서는 ‘반공이념으로 합법적인 노동당건설이 어려우니 민중당은 기본적으로 평민당, 민주당 등 야당을 적극 지원하여 그 지원을 바탕으로 범민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군부정권인 현 집권 여당을 무너뜨리고 일단 야당이 집권하게 하고 야당으로부터 확실한 지분을 확보하여 야당 집권 하에 민주화가 성숙되면 합법적 노동당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안기부 같은 폭압기관이 해체되고 국가보안법이 개폐되면 우리당 건설이 훨씬 수월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철폐, 미군철수는 지속적으로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손 선생은 너무 과격한 주장이나 활동을 일체 금하고, 오히려 젊은 학생들에게는 우경화 쪽으로 보이는 것이 좋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이제 잘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공화국의 통일정책이 관철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무전기 조작은 여전히 자신이 없는데 한 번 더 연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확실히 알기 위해서 현장실습을 한 번 더 해보자. 장소가 어디가 좋겠는가?”
“제가 화훼업을 하면서 다녀본 바에 의하면 정신문화연구원 뒤편 청계산 쪽이 조용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1990년 9월 중순 이선실은 약속대로 무전교육을 위한 현장실습을 위해 김동식과 함께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손병선을 만나, 그의 차편으로 실습장소인 청계산으로 가던 중 청계산 고개 입구 우측에 있는 음식점에서 약 50미터 가량 떨어진 간이막사에 앉아 약 2시간에 걸쳐 대화식으로 손병선에게 공작임무 및 기본방향에 대하여 지시했다.
“그동안 수차 이야기했지만 손 선생이 해야 할 일은 민중당 내에 핵심적인 청년 몇 명을 확보해서 지하당을 구축하는 것이요. 통일혁명당이 그 모델이 될 수 있어요. 민중당은 기본적으로 ○○당이나 ○○당 등 야당을 지원해야하고 그 지원을 바탕으로 야권 모두가 통합되어 집권 여당인 군부정권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집권 여당이 무너지면 연대했던 야당으로부터 확실한 지분을 확보하고 계속 국가보안법 철폐 및 공안기관 해체를 주장하여 합법화된 민중당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때 손 선생은 민중당이 노동당의 노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핵심 인물을 조종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푸락치를 제거하는 일을 해야 해요.”
김동식이 무인함 운용에 대해서 설명했다.
“장소를 선정할 때는 서로가 인식하기 쉬운 분묘, 건물, 다리 같은 변형되지 않는 곳으로 해야 합니다. 장소가 선정되면 땅을 약 30센티미터가량 파고 물건을 묻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날 12:00경 무전기 실습을 위해 정신문화연구원 뒤편 고개 위에 차를 세워 놓고 함께 김동식이 이선실의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온 무전기 세트를 손병선에게 넘겨준 후 이선실은 차에 대기하고, 김동식과 손병선은 함께 우측으로 200미터가량 산속으로 들어가 김동식이 낚시대를 변형시켜 만든 안테나를 설치하고 무전기와 배터리를 연결한 후 작성해온 숫자로 된 보고문을 메모리기에 입력한 다음, 김동식이 손병선에게 “이번에 실습할 보고문안은 손 선생이 입당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문안을 입력하여 무전기에 수정편을 끼우고 출력 버튼을 눌렀다.
차 안에서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이 무전기 세트와 장비를 손 선생이 받아서 사용하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하면서 손병선에게 무전기 1세트, 은서용 시약 1병 및 폴리에스텔 조각 1개, 수신용 단파라디오 1대, 암호해독용 성경책, 암호표 난수표, 낚시대형 안테나 1개, 나침반 1개 등을 주고 나서 말했다.
“권총이 있는데 받겠습니까?”
“권총이 있으면 부담만 되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비밀사업을 하는 사람으로 총이 언제 필요할지 모르니 호신용으로 권총도 갖고 있으시오. 큰 것으로 가지겠소, 작은 것으로 가지겠소.”
“작은 것이 숨기기에 좋겠으니 작은 것으로 주십시오.”
그때 이선실은 흰 천으로 둘둘 말아서 손가방 속에 숨겨두었던 벨기에제 소형 부로우닝 권총 1정, 소음기 1개, 탄창 2개, 실탄 12발, 총기 손질용 기름 등을 주었고, 그 후 손병선 차 편으로 김동식과 함께 서초구 양재동 지하철 3호선 양재역까지 가서 하차하여 전철로 귀가하였다.
1990년 9월 중순 이선실은 레스토랑 스크린에서 다시 손병선을 만났다.
“지난번 손 선생 입당보고에 대한 축하지령이 내려왔어요. 오늘은 무인함 장소 선정을 해야겠는데 어디가 좋겠습니까?”
손병선이 말했다.
“헌인능과 우면산 꽃동네 뒷산에 있는 문중묘지가 좋겠습니다.”
“그곳은 손 선생의 지구당 구역인데다가 꽃 재배하는 사람들 중에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보라매 공원이 어떤가요?”
“보라매 공원은 제가 다니기에 불편합니다. 수유동 쪽으로 가면 열사들 묘가 드문드문 있고 조용하니 그 부근이 좋겠습니다. 또는 한강 변 쪽으로는 절두산 공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지에 직접 가서 조사한 후 정하기로 했다. 그때 레스토랑 밖에서는 김동식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날 도봉구 수유동 4·19 묘소 입구를 지난 곳에 위치한 북한산 국립공원내 묘소 배치도를 보고 공원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묘소를 선정하고 답사하여 묘소 비석축대 동남쪽 모서리 밑을 무인함으로 설정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동식은 소형 카메라로 동 위치를 촬영하였다.
다시 그날 김동식을 동행하고 손병선과 함께 마포구 합정동 소재 절두산 성당에 도착, 현장 답사를 하여 성당 뒤쪽 한적한 곳에 위치한 3인 여인상 중 가운데 여인상 뒷면 받침대 밑을 무인함으로 하기로 결정하고 역시 김동식이 사진 촬영을 하였다.
그곳에서 이선실이 손병선에게 말했다.
“무인함은 결정되었는데…… 접선장소 및 인식신호를 할 수 있는 곳은 어디가 좋겠습니까? 두 군데 정도만 정해보시지요.”
“여기 절두산 공원 무인함으로 정한 여인상을 한군데 정하고 나머지 하나는 양재동에 있는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는 양재 시민의 숲 공원이 조용하여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 오후 늦게 손병선, 김동식과 함께 서초구 양재동 윤봉길의 기념관이 있는 양재 시민의 숲 공원에 도착해서, 공원을 둘러보던 중 손병선이 공원 입구 진입로에 있는 ‘여의교’를 가리켰다.
“저기 여의교 다리가 어떻습니까.”
그래서 여의교를 제2 가두접선 장소로 결정하는 동시에 여의교 서남쪽 난간 기둥에 새겨진 여의교의 ‘여’자 위에 동그라미 표시를 하여 인식신호 장소로 정하고 김동식이 사진촬영을 하였다.
그곳에서 김동식이 말했다.
“접선요령은 지정된 정확한 시간에 이 장소로 나와서 손목시계를 왼손에 감아쥐고 시간을 몇 번 보면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에게 접근하여, 가명인 나○○을 사용하여 상대방이 김돈식이라고 하는지 확인하여 접선해야 합니다. 만약 미심쩍을 때는 지난번에 준 반지와 도장을 꺼내어 서로 확인한 후 접선하십시오. 약정된 시간에 접선장소에 상대방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3분 이상 기다리지 말고 즉시 현장을 이탈해야 합니다.”
1990년 9월 하순 이선실은 스크린 레스토랑에서 손병선을 만났다.
“내가 본부에 건강이 안 좋다고 연락을 했더니 본부에서 나에게 나이도 많은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속히 돌아오도록 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나는 빨리 정리를 하고 본부로 복귀하기로 하였으니 나머지 일은 손 선생이 알아서 사업을 잘 추진해 주세요.
내가 공화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 선생은 나에게 우리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답례로 물건과 입당 결의문을 작성해서 주세요.”
“답례품은 무엇으로 해야 하지요? 결의문은 또 어떻게 써야 하나요?”
“답례품은 도자기나 꽃병 같은 것으로 2개를 준비해 보세요. 결의문은 입당 후 활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맹세문 형식으로 쓰면 됩니다.”
“저는 평소 글을 잘 안 쓰고 지금 당장 민중당 대외협력위원장으로 지구당 만드는 작업이 급한데, 언제 제가 물건을 사러 다니고 편지를 쓸 수 있겠습니까?”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민중당 활동이나 열심히 하세요.”
그때 이선실은 동석한 위 김동식으로 하여금 손병선에게 “잘 보관하였다가 사용토록 하라.”는 주의사항과 함께 지난번 무인포스트로 확정한 곳과 사람을 만날 때 주의사항을 정리한 흰색 편지지에 조그만 글씨로 쓴 비상연락 및 접선방법 설명문을 주도록 지시하였다.
이선실이 말했다.
“우리는 곧 북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일주일 후 사당전철역 남쪽 노상에 있는 벤취에서 만납시다.”고 한 후 헤어졌다.

1990년 9월 하순 이선실은 김동식과 함께 동작구 사당동 사당사거리 부근 벤치에서 손병선을 만났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이제 곧 본부로 복귀하게 되지요. 앞으로 민중당이 창당되면 열심히 활동해서 주요 직책을 맡도록 하세요. 민중당내 핵심 청년당원 김○○과 박○○에 대해서는 꾸준히 요해하여 그들이 갖고 있는 대북관, 혁명관을 파악해보고 확신이 서면 포섭하여 노동당에 입당시켜야 합니다. 그들을 포섭할 때는 결코 서두르지 말고 우선 인간적인 신뢰를 구축한 후 포섭해야 하오.”
손병선이 말했다.
“제가 지금 관여하고 있는 단체는 ‘재경 ○○○ 동문회’입니다. 처음 결성 시부터 관여해 왔지요. 또한 1980년도에 제가 주도하여 결성한 ‘서울 ○○협회’는 현재 회원이 2,000~3,000명가량이 됩니다.”
“앞으로 이들 단체와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고, 가능한 한 이들 단체도 민중당 지지세력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세요. 현재 민중당은 PD계열이 강한데 손 선생이 이들을 점차 NL계열 성향으로 바뀌도록 해야 합니다.
87년 6월항쟁 당시 PD계열은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관념적이고 과격한 구호를 외쳤습니다. 반면에 NL계열은 독재타도, 직선제 쟁취 구호를 내걸고 각계각층과 연대해 활동했어요. 그때부터 PD계열은 소멸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한 일은 핵심 청년들을 잘 꾸려 당을 주도해 나가면 가능할 것이요.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긴 안목으로 10년을 내다보고 활동해야 해요. 필요한 자금은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만…… 급한 일이 생기면 지원을 요청하세요. 우리 활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비밀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일이 흐트러지게 되는 것이니 조그만 실수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김동식이 말했다.
“그간 여러모로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할머니를 모시고 가야 합니다. 앞으로 몸 건강하십시오. 충실한 임무수행을 부탁드립니다.
조국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조직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보고를 해 주세요. 공화국에 돌아가면 손 선생의 적극적인 활동사항을 자세히 보고하겠습니다.”
할머니는 계속 틀니가 말썽이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기 전 항상 틀니가 제자리에 자리를 잡도록 꽉 단단하게 끼웠다.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는 발음이 새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서울 말씨를 쓰면서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북쪽 언어나 제주도 방언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했다.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 틀니를 빼면 그때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요즘은 뭔가 뒤숭숭하면서 자주 꿈을 꿨다. 당으로부터 복귀 지시를 받고 나서부터였다. 다시 북으로 돌아가면……? 그녀는 주로 새벽녘 얕은 잠에 들어 있을 때 꿈을 꿨는데 그 꿈들은 언제나 초현실적이 아니라 현실 상황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것이었다. 그 옛날 휴전선을 넘나들던 젊은 시절의 일이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구체적으로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노동당 대남 공작 부서는 그녀의 나이와 건강을 걱정했다. 75세의 할머니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너무 오랫동안 잠복 활동을 했으므로 꼬리가 길면 밟힐 수가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일본과 남조선에서 괄목할 만한 공작 성과를 이루었다. 이제는 더 늦기 전에 북으로 복귀시킬 시기가 된 것이다.
손병선이 김동식에게 말했다.
“할머니 건강도 좋지 않으니 잘 모시고 올라가십시오.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선실이 말했다.
“조국이 통일되면 제일 먼저 내가 내려오겠어요.”
김동식이 말했다.
“저는 이곳에 처음 왔는데 기회가 되면 다시 올 수 있겠지요.”

김동식은 거물 간첩 이선실과 접선해서 대동하여 1990년 10월 17일 북한으로 귀환했다. 이 공적으로 1990년 10월 24일 공화국 영웅 칭호 및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5년 후인 1995년 9월 고정간첩 ‘봉화 1호’를 대동 복귀하기 위해서 제주도 은평리 해안을 통해 2차 침투에 성공했으나 부여의 사찰에서 봉화 1호를 접선하는 과정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과 총격전 끝에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그때 함께 내려온 다른 조원은 총을 맞고 사망했다. 그는 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이었는데 그의 다른 이름은 곽인수이다. 곽인수는 2014년 10월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2013헌다1)에서 정부 측 증인으로 출석해서 증언했다.

그들은 거기서 약 1시간 30분 동안 대화를 하였다.
그때 이선실은 손병선에게 ‘공화국으로 돌아가서 손 선생의 입당 답례로 줄 선물을 내가 준비했다. 그리고 입당 결의문을 써왔으니 결의문에 서명해 달라.’고 하면서 손병선에게 입당결의서를 건네주었다.
그 입당결의서는 ‘저는 조선노동당 당원으로서 조국과 당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지도자 동지의 지도를 따를 것을 맹세합니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입당결의서를 받아 읽어본 손병선은 그 결의서 밑에 날짜와 이름을 쓰고 서명한 후 이를 다시 이선실에게 건네주었다. 이선실은 손병선으로부터 입당결의서를 받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이 돈은 그간 내가 살던 집 전세금 뺀 것하고 그동안 쓰다가 남은 것을 모두 모은 거요. 2,000만원 정도 되는데 가져가서 지구당 사업하는데 사용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손 선생 사진이 있으면 한 장 주세요. 공화국에 가서 보고하는데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흰 봉투에 2,000만원(자기앞수표 500만원권 1매, 100만원권 15매)을 넣어 손병선에게 제공하고 나자 손병선은 민중당 창당 시 신고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촬영해 두었던 명함판 사진 1매를 건네주었다.

1990년 10월 초순 이선실은 민중당 당무회의에 참석, 민중당 당직자로부터 2,000만원을 특별 헌금하셨다는 소개와 함께 참석한 당무위원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 후 1990년 10월 17일 이선실은 입북한 후 A-3 지령 방송을 통해 손병선에게 북한에 무사히 도착하였음을 알려주었고 1990년 11월 10일 민중당 창당대회 시에는 창당 유공자로 선정되었다.

손병선은 1992년 8월 18일부터 26일까지 중국 북경대학에서 개최된 ‘제4차 조선학 국제학술회의’ 참석을 구실로 방중하여 북한 공작원을 접선하고 사업 보고를 하면서 그동안 무전지령만으로 미흡했던 활동 방향을 지시받았고 공작금 2만 달러를 받은 후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1992년 9월 21일 경기도 용인에서 개최된 평통자문회의 용인지회 월례회의에 참석하여 방중 소감을 발표했다. 이때 손병선은 “북측 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이론 수준이 가장 높은 정예분자들로 그들의 연설을 들어보면 그 분위기가 마치 주체사상 이론강습장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이런 불필요한 행사에 많은 돈과 인원을 무질서하게 보내는 것은 주체사상 학습만 받고 돌아오는 꼴이 되어 국력의 낭비만 된다”고 역설했다.
그렇지만 중국에 갔을 때 북한 공작원으로부터 받은 공작금 2만 달러에 대해서도 끝까지 숨기다가 자신의 하부망인 딸이 검거되자 비로소 2만 달러 수수사실을 실토했다.
작성일:2022-12-27 10:32:54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