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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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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검은 그림자의 여인 ― 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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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12-27 10:31:30
조회수
479
3. 검은 그림자의 여인

안기부 수사관들은 그때부터 이선실과 신순녀는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나서 신순녀의 신원 추적에 나선 것이다. 그 후 실제 인물인 신순녀라는 여성에 대해 신원을 조사한 결과 신순녀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 상계리 305번지 출신으로 아버지 신길서와 함께 일곱 살 때인 1924년께 일본 고베에 갔다. 그곳에서 정○○와 결혼하여 정○○를 낳은 후 1960년 4월 28일 니가타항에서 만경봉호를 타고 북송된 사람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연고자가 국내 및 일본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전주에 살고 있는 언니 신양근을 찾아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했더니 진짜 동생 신순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양근에게 “어떻게 친동생인지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동생이 일곱 살 때 일본으로 가면서 헤어졌기 때문에 얼굴을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부모님의 나이와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고, ‘어렸을 때 언니 등에 업혀 살았다. 언젠가 한 번 언니한테 호되게 매를 맞은 적이 있다.’라고 어렸을 때 둘만이 아는 기억을 말해 주었으니까 틀림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한편 신양근의 장남인 백덕산 등 연고 가족에게 대방동 사무소에서 입수한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 조사했으나 그들 역시 이선실을 진짜 신순녀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사팀은 북송자인 신순녀가 어떻게 국내에 영주 귀국하여 살 수 있었는지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북한의 공작수법상 분명히 이선실과 신순녀는 다른 사람이고 이선실이 신순녀로 위장했을 것이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사팀은 주일본 한국 대사관에 파견 근무하는 안기부 요원에게 대방동 사무소에서 입수한 신순녀의 사진을 보내면서 긴급히 신순녀의 일본 연고 가족들을 통해 이 사진의 인물이 진짜 신순녀인지 여부와 행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9월 하순경 그 요원이 일본 고베에 거주하는 진짜 북송교포 신순녀의 이복동생 신성복을 만났다. 그 요원은 본부에서 보내온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람이 진짜 누나 신순녀가 맞느냐고 확인했다.
“왜? 대사관에서 그걸 새삼스럽게 조사하려고 하지요. 20여년 전 일을……?”
“글쎄요? 뭔가 신원 파악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가짜 신순녀예요. 북한에 있는 누나 신순녀는 일본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얼굴을 잘 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나는 일본에서 살기가 어려우니까 자진해서 북한으로 갔지요. 시기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974년쯤인가 고베에 살고 있을 때 이 사진의 인물이 찾아왔습니다. 내 부모사진을 보여주면서 ‘내가 너의 누나 신순녀다. 부산에서 살다가 쇼와(昭和·일본 히로히토 시대의 연호) 40년에 밀항, 도일하여 오사카의 출입국관리소에 자수하여 신순녀라는 사실을 인정받고 외국인등록을 했다. 사람들이 네가 살고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 찾아왔다’라고 하여 처음에는 별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지요. 내 누나는 내가 얼굴을 잘 아는데 말입니다. 얼마 전에는 북한에 있는 누나로부터 평양에서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편지도 받아보았지요.”
“그래서요……?”
“어쩐지 여자가 불쌍해 보였습니다.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별의별 사연이 많거든요. 우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같은 동포끼리…… 조센징이라고 온갖 멸시를 당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대사관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기는 하나요? 그 여자가 이렇게 말했어요.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네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요. 자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저는 고아처럼 자랐어요. 확실한 신분이 필요합니다. 날 좀 도와주세요. 우리는 누가 뭐래도 틀림없이 남매예요. 절대로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돈은 충분히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금전적으로 별다른 손해도 없고 해서 그렇게 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요원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곧이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곧이듣든 말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조총련도 아니고 민단도 아니오. 여기는 일본이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이 아니란 거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일본 경찰을 부르겠소.”
“진정하십시오.”
“조국이 우릴 위해서 해준 게 뭐가 있죠?”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죠.”
“마지막으로 만나거나…… 연락한 게 언제쯤이죠?”
“남한으로 완전히 귀국한 후에는 만나지 못했지요. 그리고 전주에 있는 가족들도 80년대 중반쯤에는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고 합니다. 대방동 집을 팔고 나서부터……”
그 요원은 조사 보고서와 신성복으로부터 입수한 진짜 신순녀의 사진을 본부로 보내왔다. 진짜 신순녀의 사진을 보니 대방동 사무소에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주민등록을 하면서 부착해 놓은 사진과는 한눈에 보아도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대방동 사무소에 부착된 사진은 신순녀로 위장한 이선실의 사진이었던 것이다. 이선실은 북한에서 북송된 신순녀를 만나 신순녀의 신원 및 어릴 때의 추억 등을 자세히 들은 후 암기해서 그녀로 행세한 것이다.
이선실의 행적을 추적해 보니 그녀는 국민등록, 외국인등록, 모국방문단 입국, 영주 귀국 및 국내에서의 주민등록 발급 등 일체의 서류를 만들면서 완전히 신순녀로 위장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이선실이 북송교포 신순녀로 위장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선실의 출신지, 본명 등 정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수사팀은 계속 이선실이 은거했던 아지트를 찾아다니며 숱한 주변 사람들의 진술을 통해 이선실의 행적에 대해 조사했으나 그녀의 진짜 이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단서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 합동 수사팀은 약 20여 일에 걸쳐 밤낮으로 밀항자, 실종자, 월북자, 4·3 사건 연루자, 북송자를 중심으로 이선실이 남파돼 활동 기간 중 사용했던 이선화라는 이름과 수사팀이 추적한 것을 조사한 결과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된 일명 이옥녀, 이선녀 등의 실체를 찾아내기 위하여 온갖 자료를 추적했다. 그들은 이선실이 가장 빈번히 사용했던 이선화를 중심으로 각종 자료를 검색했다. 그 과정에서 이선실과 나이가 비슷한 제주 출신 이선화라는 이름을 10여 명 발견했으나 현지 확인 결과 그들이 찾는 이선실은 아니었다. 계속하여 같은 방식으로 이옥녀, 이선녀의 신원을 추적해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이선실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들은 무언가 어려운 수수께끼를 푸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타나서 얼핏 모습을 드러냈다가 금방 사라져버리는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그래도 수사관들은 이선실이 분명히 제주도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다시 한번 그 이름들을 검색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이선화와 이름이 앞뒤로 바뀐 월북자 이화선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혹시 지금까지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이선화가 이화선의 이름을 뒤바꿔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 것이다. 먼저 이화선의 기본 신원을 추적해 보니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 552 출신으로 밝혀졌다. 대정읍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열람했으나 이화선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아 제적부를 열람해 보니 이재춘의 맏딸로 등재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대정읍사무소 호적창고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이화선의 호적등본, 제적등본을 모두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이화선은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 552 출신임이 밝혀졌다. 또 이선실이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외국인등록을 할 때 세대주로 신고한 이창해는 이화선의 6촌 동생으로 밝혀졌으며 이선실이 이미 검거된 간첩 황인오, 손병선, 손○○ 등과 일본의 연락거점으로 약속한 ‘오사카시 이쿠노구 모모다니 3-15-12’에 살고 있는 이행자, 송태영은 이화선의 친동생인 이치효의 딸과 사위라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이선실의 실체가 압축되기 시작했다. 계속 추적한 결과 94세가 되는 생모와 친동생이 제주도에 그리고 시가, 외가 식구들이 서울 등지에 많이 살고 있고 일본에도 많은 친척들이 살고 있음이 확인됐다.

어머니

하고픈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나는 몹시도 오랫동안 타향에서 지냈습니다. 그래도 날 가장 잘 이해해 주시는 이는 언제나 어머님 당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친인척을 중심으로 수사를 병행키로 하고 먼저 이화선의 막내동생인 이창계를 조사했다.(그들 가족은 가파도를 떠나 대정읍에 살고 있었다.) 이창계는 “나는 큰누나 이화선이 출가한 이후에 출생했고 또한 어머니로부터 누나 이화선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 이화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라고 진술했다. 이어서 생모 김경량에게 신순녀로 위장한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하며 이화선이 맞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생모는 그 사진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더 이상 살펴보지도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확인을 거부했다. 그때 그들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는 기색을 포착했고 직감적으로 김경량이 분명히 자기 딸 이화선이 틀림없음에도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고 느꼈다.
(어머니는 절대로 자식의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두 시간에 걸쳐 생모를 설득했으나 그녀는 끝내 진술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차선책으로 이화선의 출신지인 가파도에 가서 70세 이상 되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원주민인 이화선의 5촌 외숙모 이정이 할머니를 만나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했다. 그녀는 “화선이가 많이 늙었구나. 어릴 때 화선이의 이목구비가 그대로 남아있네. 이마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깊이 패어 있는 등 어릴 때 이화선의 이목구비와 틀림없어요.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화선이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할 수 있지요. 내가 첫눈에 화선이라고 얘기한 것을 놓고 어떻게 이름을 기억하느냐고 하겠지요. 그런데 그 집의 맏딸 이름이 화선이었기 때문에 가파도에서는 그 집을 화선이네 집으로 불렀어요. 또 화선이 어머니, 화선이 아버지 식으로 통했습니다. 우리 또래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압니다.”라고 말했다.
이화선과 동갑인 가파도 원주민 강옥선 할머니를 만나 이선실의 사진을 제시하자 그 할머니 역시 “키가 작고 얼굴과 입 모양이 어릴 때 이화선의 모습과 똑같네요. 지난번 간첩 사건 발표 때 텔레비전을 보고 이선실이라는 사람이 이화선과 많이 닮았구나 하고 생각을 한 일이 있었지요.
화선이는 성격이 사근사근하며 공손했고 예의도 바른 아이였어요. 또 아버지, 어머니가 일본을 드나들어서인지 옷도 깨끗했습니다. 우리는 늘 화선이가 부러웠어요. 나는 돈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지만 화선이는 다녔어요. 우리는 열 살만 넘으면 물질을 나갔는데 화선이는 물질도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과거 일제시대 일본을 많이 출입했다는 원주민인 이도해 할아버지 역시 이선실의 사진을 보더니 이선실과 이화선이 동일인이라고 했다.
“화선이가 다녔던 가파국민학교는 과거 김성숙이라는 사람이 세운 신유의숙에서 시작됐지요. 김성숙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운동도 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대중당 소속으로 5대 국회의원도 지냈지만 5·16 이후에는 회색분자로 몰렸습니다. 화선이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이었던 장종식은 해방 후 북한에 가서 문교부 장관을 했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4·3 사건 때에는 가파국민학교 선생 중에도 빨갱이로 몰려 총살당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화선이는 이런 선생들 밑에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그리고 4·3 사건 때 아버지 이재춘이 일본에 다니면서 낳은 이복동생인 이창하도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습니다.
화선이는 가파국민학교를 중퇴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일본에 갔으나 아버지는 그때 동경 부근에 있는 삼택도라는 섬에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모집하여 해산물 채취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선이는 도쿄에서 가내 수공업체에 다녔습니다. 화선이가 김태종과 결혼하여 대마도에 살다가 애기가 없으니까 부산으로 와서 젊은 남자와 어울려 다닌다는 소문이 났었습니다.”

내 딸 이화선이 틀림없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다. 먼바다를 건너온 찬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금방이라도 비가 뿌릴 듯한 날씨였다. 어느새 가늘고 차가운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파도가 거칠게 물거품을 일으켰다. 갈매기 두 마리가 그 바람 속에서 멋진 공중곡예를 부리듯 허공에서 춤을 췄다.
그들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이선실이 이화선과 틀림없다고 판단했으나 아무리 주위에서 이선실과 이화선이 동일인이라고 하여도 생모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하는 데 어떤 진술도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들은 다시 김경량을 조사하기 위해 대정읍 하모리 대정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집으로 가서 그녀의 손자인 이태봉과 아들 이창계를 참석시키고 손자 이태봉을 임시 통역으로 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그녀는 90세가 넘는 고령으로 귀가 어두운 데다가 심한 제주도 사투리를 사용했기 때문에 통역이 없으면 말이 통하지 않아 조사가 잘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계속 진술을 거부했다. 침묵 속에서 30분가량이 지나자 그녀는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노인의 입매가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갑자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이 사진은 내 딸 이화선이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울먹일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수사관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그녀의 실체를 찾는 지리한 조사는 종점에 다다른 것이다.

이선실은 1916년 1월(호적상 1917년 2월 13일생)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가파도)에서 아버지 이재춘(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다 1977년 8월 사망)과 어머니 김경량의 6남 1녀 중 맏이로 출생했는데 그 이름은 이화선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물도 곱고 머리가 명석했지만 생활이 어려워 11세 때인 1927년 가파도 신유의숙 4학년을 다니다 중퇴했다. 재학 시 그녀는 장종식 등 젊은 교사들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해녀 일을 할 줄 몰라 14세 때인 1930년경 어머니와 함께 당시 일본 도쿄 부근 삼택도에서 제주도 출신 해녀들을 모집, 해산물 채취업을 하던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가내 수공업체 공원 등으로 전전하다가 3년 만에 혼자 귀국했고 어머니는 6년 후인 1936년 귀국했다.
21세 때인 1937년 가파국민학교 동창으로 당시 부산에 살고 있었던 김태종과 결혼하여 남편을 따라 대마도, 부산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 이후 어머니 김경량은 자신의 딸인 이화선을 만나보지 못했다.
1940년 그녀는 남편과 함께 대마도로 건너가 그곳에 살면서 자신은 삯바느질을 했고 남편은 잠수부 생활을 했다. 해방이 된 후 1947년 남편과 함께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영도에 정착해서 생활을 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당시 4세쯤 된 양녀를 얻어다 키우며 살았다. 다음 해 가을경 그녀는 이복동생인 이창하가 4·3 사건 때 억울하게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때가 10월 중순경인데 육지에서 경찰과 군인들이 섬으로 계속 들이닥쳤다. 주민들을 마을 앞 공터로 모두 불러 모았다. 그때 나오지 않고 숨은 사람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녔다. 그 일은 서북청년단 단원들이 수행했다. 그때 마을 앞 골목길을 지나가던 어떤 60대 노인을 잡더니 동내 불순분자가 누구인지 대라고 명령했다. 그 노인이 나는 모른다고 항의하자 뭇매를 때렸다. 그 노인은 그 자리에서 총살됐다.
당시 계엄령하에서 어떤 종류의 배도 출항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창하가 마라도 등대와 연락을 했다는 혐의로 끌려 나왔는데 실제 그런 일은 없었다. 그날 가파도에선 네 사람의 주민들이 가파국민학교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마을 주민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학교로 나가서 그 광경을 지켜보도록 강요받았다. 포승줄에 꽁꽁 묶인 피해자들은 일 분도 안 되어 총살됐고 그들은 그날로 섬에서 떠났다.

그때 남편 김태종과는 부부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녀는 의지가 강했지만 충동적이고 성마르고 고집이 셌다. 남편은 그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가 조금만 쓴소리를 해도 버럭 성을 내면서 대들었기 때문이다. 밤이 되면 온갖 구실을 대며 남편을 밀쳐냈다. 그녀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당신도 당신 알아서 하라구요. 다른 여자를 만나도 상관없어…… 혹시 이혼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나는 임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까.”그러자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대마도로 밀항했다. 그는 대마도라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했다. 홀로 된 이화선은 부산 영도에 살던 고향 친구의 집에서 더부살이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 바다의 밤 풍경은 아름다웠다. 밤이 깊었다. 밤바다는 칠흑처럼 캄캄했다. 가덕도에서 출항한 밀항선은 작은 어선이었다. 그날 부둣가 작은 술집에서 일행은 안주도 없이 막걸리를 홀짝거리면서 밤이 깊어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해안 순시선은 그때쯤이면 기지에 정박해 있다. 그 배에는 다섯 명의 밀항자들이 타고 있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대한해협을 건너면 된다. 밀항선은 해협을 지나 대마도 북섬 접근하면서부터 엔진을 끄고 조류의 흐름에 맡겼다.
1948년은 다사다난했다. 2월 26일 유엔 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 결의가 있었고, 4월 3일 남로당이 주도한 5·10 총선거를 반대하는 폭동인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수립되었고(그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중앙청에서 엄숙하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공포했다), 9월 9일 김일성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그때 북한 헌법 제103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는 서울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는데 북한은 1972년 개정 헌법에서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꿨다).
10월 18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했던 국군 제14연대가(군에 침투해있던 남로당 계열의 일부 대원들에 의해) 반란을 일으켰다(여순 10·19 사건).
이선실은 그해 겨울 남로당 영도지역 비밀 세포인 (남포동 쪽 영도다리 입구 부근에서 선술집을 하는) 30대 중반의 여자로부터 몇 마디 간단하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다음 남로당에 가입했지만 여맹원으로 활동은 미미했다. 그 당시는 1947년 가을부터 남로당이 비합법 정당으로 규정되면서 조직원들이 지하로 잠적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49년 가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6·25 전쟁이 발발하기 8개월여 전이었으므로 부산은 폭풍전야처럼 아직은 조용한 항구도시였다.
그 질긴 비린내와 / 해조음이 득실거리는 포구에서부터 / 해운대 해수욕장에 이르기까지 / 꽃뱀처럼 뻗어있는……
운명적 만남이었다.
그 남자는 30대 초반의 잘생긴 인민군 총사령부 정보국 소속 정보장교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철원 복계역에서부터 걸어서 38선을 넘었고 포천을 거쳐 서울로 왔으며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는 레닌과 스탈린의 공산주의 이론에 정통한 열렬한 코뮤니스트였다.
그는 해군 전문가로 임무는 부산항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선박의 입출항 상황, 항만의 하역 능력, 부두와 연결된 철도 레일, 군수품 창고의 위치, 부산에 주둔하는 군부대 현황, 특히 해군 함정의 입출항 상황 등을 면밀히 점검했다.
그날은 거친 바람이 불고 하늘에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아침나절이었다.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 나서 뱉어 발로 짓이겼다. 옅은 연기가 콧구멍에서 빠져나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외투 안 주머니에서 재빨리 사진기를 꺼내서 정박 중인 해군 수송선의 사진을 여러 각도에서 정신없이 찍던 중 순찰하던 두 명의 경비 헌병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그때 도저히 체포에 저항할 수 없었다. 헌병이 카빈총의 방아쇠에 집게손가락을 걸고 등짝을 쿡쿡 찔렀기 때문이다. 그 즉시 경남 방첩대(CIC)의 부산지부로 넘겨졌고 육군 중위와 이등 중사가 수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등 중사가 다그쳤다.
“너는……? 이 새끼……? 사진을 찍다가 현장에서 체포됐어. 현행범이란 말이야.”
“서울사람입니다. 부산에 놀러왔어요. 군함을 처음 보니까 신기했지요.”
“네놈 시민증은 엉성했어. 위조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
“자백하라니까. 그러면 용서해 줄 테니까. 노동당 연락부 소속이야? 아니면 조총련계 공산분자야?”
“……”
“너는 빼도 박도 못해. 사진기에서 필름을 빼내 모두 인화했지. 어마어마하더군. 그래도 묵비권을 행사할 거야?”
“……”
육군 중위가 느닷없이 자신이 신고 있던 흙이 묻은 군화를 벗어 머리통과 얼굴을 마구 내리치고 나서 지시했다.
“이 새끼 안되겠어. 죽도록 맛을 보여주라고.”

그녀는 부산역 다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숨을 고르고 나서 입을 다물고 무심해하는 태도를 보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녀는 자신을 부각하거나 깊은 인상을 심어주려고 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이화선 동지…… 말씀 많이 들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하고 말을 걸었을 때 그 순간 무너졌다. 그의 중력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자연의 법칙이었다.
그때부터 그들은 그녀의 집에서 남몰래 자주 만났으며 그녀가 부산항의 여기저기를 안내했다. 그는 강렬한 남자였다. 이념적으로 철두철미하면서도 다정다감하고 육감적이었다. 그 남자는 여자를 사랑할 줄 알았다. 그의 손놀림은 정말 우아했다. 결코 주저하지 않았고 한껏 부드러웠다. 그녀의 육체가 살아 숨 쉬기 시작했다. 흥분과 황홀경, 절정.
그의 아지트는 남포동이나 영도에 있는 여관들이었다. 부두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행세하면서 일주일 단위로 옮겨 다니며 투숙했다. 그러면서 부산역 근처의 ‘내고향’이라는 다방에도 가끔 들렸다.
그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선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함구했는데 그가 임시로 묵고 있는 여관방을 수색했을 때는 작업복 등 몇 가지 옷들과 세면도구, 낡은 여행용 가방, 예리하게 벼린 단도 한 자루, 이불 가장자리에 숨겨 놓은 아직 인화하지 않은 수십 통의 필름이 발견되었지만 무전기나 권총은 없었다.
소지섭 인민군 총위(국군 대위에 해당하는 계급)는 며칠만 더 있으면 왔던 길을 되돌아서 복귀할 예정이었다. 그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몸속에 지니고 있던 독약 앰플을 삼키고 죽었다.
그녀는 절망감에 분노했다. 그녀는 울었다.‘그것들이…… 자본주의 주구들이 죽였다. 내가 목숨을 걸고 원수를 꼭 갚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고 1950년 이른 봄 양녀를 친구 집에 맡겨놓은 채 월북했다. (그것이 첫 월북이었고 그 후 남파 공작원이 되어서 수십 차례나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다.)
이선실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소지섭 총위가 가르쳐준 대로 남로당 종로구책을 종로 화신백화점 지하실 다방에서 남몰래 만났다. 그가 말했다. “동무는 위대한 결심을 했소. 북조선은 인민들의 낙원이오. 김일성 동지가 불철주야 인민들을 돌보고 있기 때문이오. 내가 소개해준 동무는 정치보위부에서 파견한 고위급 인물이오. 그래서 신임장을 써줄 수 있는 거요. 신임장만 있으면 북조선에서는 어딜 가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 거요.”
이틀 후 그녀는 광화문의 ‘날개다방’에서 암약 중이던 고위급 공작원을 만났는데 그가 월북 경로와 월북 안내인을 소개해주고 신임장을 써줬다. 이제 그녀는 38선을 통과해 평양으로 가서 정치보위부 본부로 가면 되었다.
그날 새벽 개풍군 토성면과 인접해 있는 개성의 서쪽 오공산 부근 38선은 너무나 고요했다. 벌써 화창한 봄이었지만 산속을 가로지르는 찬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38선 북쪽에는 38경비대 또는 38보안대, 자위대 등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남쪽 국방경비대의 초소를 멀리 우회해서 산기슭을 지나는 길을 따라 걸으며 숲을 통과하고 풀숲을 가로질렀으며 냇가를 건넜다. 웅덩이 냇물에는 봄의 변덕스러운 푸른빛이 감돌았다.
월북을 안내하는 안내인과 함께 38선을 넘었다. 마침내 인민의 낙원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는 뒤로 돌아서서 하염없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가파도의 남쪽 바다가, 영도 다리가 생각나고 바닷바람에 우글쭈글해진 어머니의 얼굴이 가물가물 떠올랐다. 어머니는 어느덧 오십 줄에 들어섰다.
북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이었다. 북에 가도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친척도 없고 지인도 없었다. 그 남자가 살아서 북으로 돌아갔더라면……. 그가 그녀의 인생 행로를 바꿔 놓았으니까.
그때는 새로운 출발이었지만 미래는 암담할 만큼 불확실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선택한 삶이었다. 무조건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그녀는 이제부터 자본주의와 그 주구들을 타도하는 공산주의 투사로 살아갈 예정이었다.
금천을 거쳐 사리원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곧 전쟁이 시작될 터이지만 그 어디에도 전쟁이 일어날 거란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정확하게 무엇 때문인지 분명치 않았지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사리원의 큰 거리 길가에 있는 전봇대에는 붉은 글씨로 쓴 포스터들이 너덜너덜하게 붙어있다.
‘위대한 지도자이시며 조선 해방의 은인이신 스따린 대원수 만세!’
‘조선을 해방시켜준 위대한 붉은 군대 만세!’
‘소련인민과 조선인민의 영원한 친선 만세!’
6·25 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던 이화선은 8월 초순경 정치보위부 소속으로 인민군 복장을 하고 서울에 내려와 정치 공작원으로 활동하다가 남편 김태종의 형인 김태능을 서울에서 만난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북조선으로 돌아가면서 ‘대한민국은 반드시 멸망하고 인민공화국이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고 장담했다.)
남편 김태종은 이선실이 월북해서 연락이 끊기자 대마도에서 조만순과 재혼하여 2남 4녀와 또 다른 성명 미상녀로부터 아들 1명을 출산하는 한편 부산 영도에 살고 있던 양녀를 데려다 키우면서 북송 직전까지 대마도 북지부 조총련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이화선을 못 잊어 1971년 8월 25일 이화선을 만나보기 위해 처, 차남, 4녀, 성명 미상녀로부터 출산한 아들, 양녀 등을 데리고 니가타항에서 망경봉호를 타고 입북했다.
이화선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북으로 후퇴하자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서 노동당 산하에 있는 ‘금강학원’에 들어가 공산주의 사상학습을 받았고 그 후 노동당 경공업위원회 과장, 황해도 여맹 간부를 거쳐서 평양시 여맹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63년 봄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격렬한 증오를 또다시 의식했다. 철천지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안일하게 지내서는 안되었다. 그건 무위도식이나 다름없었다. 최일선에서 뼈가 부스러지도록 싸워야 했다. 그녀는 김일성에게 직접 ‘조국통일사업에 일생을 바치고 싶다’고 탄원하여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전담하는) 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 대남공작원으로 임명되었다. 공작원 양성소인 ‘695 정치대학’에서 전문적인 간첩교육을 받고나서 휴전선을 수없이 넘나들었으며 1966년과 1973년에는 과거 연고지였던 부산으로 남파되어 암약하다가 복귀한 바 있다.
그 후 노동당 대외연락부는 이화선을 장기간 남한에 침투시켜 적화통일을 위한 대남공작을 시키기 위해 북송된 교포 신순녀의 신원을 상세히 암기시킨 후 그녀의 신분을 위장토록 철저히 교육했다. 이화선은 신순녀로 완벽하게 위장한 후 1974년 초 북한 공작선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침투했다. 그해 3월 일본 도쿄 아라카와 구청에서 자신의 6촌 동생이자 조총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창해를 세대주로 하여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외국인등록을 했다. 그리고 나서 그 당시 고베에 살고 있는 진짜 신순녀의 이복동생 신성복을 찾아간 것이다.
그 후 이화선은 일본에서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재일교포를 포섭해서 입북시키기도 했고 또한 재일교포 북송선인 만경봉호가 니가타항에 입항할 때는 직접 배에 승선해서 북한 공작원과 만나 공작 모의를 하고 당의 지시 사항을 들었다. 이러한 공작 성과를 인정받아 당시 김일성은 이화선에게 보신용 웅담을 직접 보내주기도 했다.
이화선은 남한에 침투, 장기적으로 공작기반을 구축할 목적으로 1978년 5월 고베에 살고 있는 진짜 신순녀의 이복동생 신성복에게 “전주에 사는 언니(신양근)를 만나러 가자”고 하여 그와 함께 모국방문을 신청했다. 1978년 6월 4일 단오절 모국방문 단원으로 함께 국내 입국하여 전주시 평화동에 살고 있는 신양근의 집을 찾아갔다.
그때 이화선은 신양근에게 부모 성명과 둘만이 알고 있는 어린 시절 추억을 화제로 남매지간임을 확실하게 인식시켰다. 그녀는 그 집에서 체류하면서 전주시내, 김제 금산사, 광주 무등산을 관광하고 신양근의 식구들에게 세이코 손목시계, 카메라 등을 선물하는 등 완전히 한 가족으로 행세한 후 일주일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에 도착한 즉시 전주 신양근에게 안부와 함께 영주 귀국하여 고국 땅에 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발송했다.
그 후 이선실은 1979년 1월 말 일본으로 건너가 북한의 공작지령에 따라 망경봉호를 타고 북한으로 일시 복귀했다가 그해 7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79년 9월 29일 세 번째로 국내에 입국하여 신양근의 집에 체류하면서 조국에 뼈를 묻고 싶다며 영주귀국 의사를 표시했다.
그녀는 향후 자신의 공작 아지트로 활용하기 위해 신양근의 넷째 며느리에게 “일본에서 살던 집을 팔아 1,000만 엔을 가져왔다. 영주 귀국하게 되면 살 집이 필요하니 미리 구해달라.”고 부탁하여 서울 동작구 대방동 344-5번지 단층 양옥집을 3,675만 원에 샀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친족 관계라는 확신을 주기 위하여 신양근의 차남 백덕만의 명의로 그 집을 등기하고 그해 10월 16일 일본으로 돌아갔다.
1980년은 5·18 광주항쟁이 일어난 해였다.
그해 3월 30일 이선실은 영주 귀국하기 위해 이불, 구형 텔레비전, 녹음기 2대, 재봉틀 1대, 오토바이 1대, 카세트라디오 1대, 의류 등 생활도구를 가지고 김포 공항으로 입국, 전주에서 상경한 신양근의 장남 백덕산, 4남 백덕조 등 두 명의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안내로 전주시 평화동 1가 617-2 신양근의 집에서 일시 거주하면서 그해 4월 15일 국내 주민등록을 위해 전주의 한 사진관에서 주민등록증 신청용 사진을 촬영했다.
이선실은 4월 22일 당시 전주 평화동사무소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백덕산의 주선으로 신양근의 주소지인 전주시 평화동 617-2에 신규 주민등록을 하여 완전한 합법신분을 취득했다.
1980년 5월 15일 이선실은 앞서 구입해 놓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 344-5로 이주, 은거하면서 1981년 11월 9일 신양근의 3남 백덕만 명의로 했던 그 집을 자신의 명의로 등기 이전했다. 이때 자신의 본적을 전북 완주군 이서면 상계리 305번지에서 거주지인 대방동으로 전적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국내 및 재일 신양근 집안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예컨대 신순녀의 가족이 찾아오면 “뭐 하러 자꾸 찾아 오느냐? 돈이 탐이 나서 그러느냐?”는 식으로 민망하게 만들어 따돌렸던 것이다. 그래도 진짜 신순녀의 가족들은 ‘이상하네. 왜 갑자기 이럴까? 마음이 변했나? 우리가 뭘 잘못했나? 찾아가기도 더럽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혈육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러한 괄시를 무릅쓰고 가끔 찾아가곤 했다.
‘내가 죽으면 재산이 전부 어디로 가겠느냐. 결국 너희들에게 갈 테니 그리 알고 있어라.’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선실은 신순녀의 원적지인 전북 완주에서 대방동 344-5로 본적을 옮긴 후 신길동 소재 영동교회에 다니기도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로부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인지 1982년 1월 영동교회에서 알게 되어 친구처럼 지내오던 집사 정옥주를 통해 김옥기(대한교육보험 외무사원)를 소개받고 그녀를 수양딸로 삼아 자신의 대방동 집 방 한 칸에 무상으로 입주시켜 신변안전 조치를 취했다.
1982년 4월 김옥기와 함께 수안보 관광을 다녀오는 등 자연스럽게 국내 정세수집 및 활동에 익숙해졌다. 이 무렵 이선실은 자신의 가명인 신순녀 명의로 대방동 아지트에 신규 전화(813-7063)를 설치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이화선’(어릴 때 본명이면서 호적상 이름인데 이 이름은 그녀가 30대 초반 월북할 때까지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은 북으로 간 후 본명 또는 정식명칭이 ‘리선실’로 바뀌었고(북한은 두음법칙을 무시하므로 성씨 ‘이’를 ‘리’로 부른다), 1980년 이후 남한으로 위장해서 영주귀국한 후에는 주민등록상 이름은 ‘신순녀’였지만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에는 ‘이선화’였으며, 안기부 등에서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은 ‘이선실’이었다.


4. 할머니 간첩

1986년 3월 서울대의 한 강의실에서 NL노선의 학생운동조직인 ‘구국학생연맹(구학련) ’이 출범했다. 이들이 내건 NL의 핵심 주장은 반미 반독재 자주화 노선으로 미국을 축출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구학련은 그해 10월 건국대에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발대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정부가 강경진압에 나서면서 1,288명이 구속되고 말았다. 주사파의 핵심 인물인 김영환은 그해 11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 1개월을 복역하고 198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1987년으로 넘어가면서 전국적으로 NL계열의 총학생회가 등장하고 전국 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가 결성되었다.

문익환 목사
그해 이선실은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문익환의 어머니를 가끔 방문하고 돌아와 김옥기에게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그 집 며느리를 존경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녀는 어느 날 문익환이 목회자로 있는 ‘한빛 교회’에 다녀온 후에는 “문익환 부인은 참 훌륭한 사람이다. 남편이 교도소에 있어도 남편에게 불만이 없고 시어머니에게도 잘하고 있다. 구김 없이 꿋꿋이 잘 생활해 나간다. 문익환의 어머니는 나이가 97세임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있어서 글씨도 잘 쓰는 것을 보니 너무도 부럽게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는 왜 이렇게 훌륭한 여성 지도자들이 별로 없느냐. 한국 여자들은 게을러서 일도 안 하고 손톱에 매니큐어만 칠하고 있다.”고 얘기를 하는 등 문익환 일가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선실은 이후 도봉구 수유동 소재 문익환의 집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문익환의 어머니와 처 박용길과 친교를 유지했다.
1987년 6월에는 역사적인 6월항쟁이 있었다.
그해 12월에는 이선실은 김옥기에게“문익환 씨 부인이 일하고 있는 민가협에 가서 일을 도와줘야겠다. 문익환 씨 어머니에게 적은 돈이지만 용돈을 조금 주었어. 민가협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가서 문익환 씨 부인과 사오십 대 여자들을 만나서 함께 지내니까 좋더라고. 민가협 사람들은 감옥에 있는 양심수들의 가족이니까 하나같이 한이 맺혀있었어. 남민전 가족들도 회원이야. 그들은 주제가로 김남주 시인의 ‘죽창가’를 부르지. 민가협의 조직 원칙은 담보물 우선주의야. 조직 간부는 담보물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이지. 여기서 담보물은 양심수이고 안은 감옥을 말하는 거야. 그들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민가협에 매월 회비를 내고 있지.”라고 말했다.
1989년 1월 그녀는 문익환 집을 신년 인사차 방문해서 문익환으로부터 「꿈이 오는 새벽녘」책자 한 권을 받고 돌아왔다.
그녀는 1989년 5월 하순에는 대방동 집에서, 김옥기에게 문익환의 집에서 받아왔다는 약과 한 상자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가서 보니까…… 문익환의 집 살림살이는 보잘것없더라.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많더라. 동생이 매달 30만 원씩 보내 준다고 했어. 할머니는 아들이 감옥에 있어도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굳세게 살고 있더라니까.
목사님이 하던 일을 할머니와 부인이 다 하고 있었어. 한빛 교회에 갔다가 어머니와 함께 집에 들렀더니 부인이 이것이 산 것이 아니고 선물로 들어온 것이니 약소하지만 가져가라고 하면서 주기에 받아왔어.”

1989년 3월 25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상임고문인 문익환 목사와 유원호, 재일작가 정경모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같은 시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대변인인 소설가 황석영도 평양에 도착했다. 4월 2일 문익환 목사 일행은 김일성 주석과 두 차례 회담을 가진 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9개 항에 이르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88년 1월 1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신년사에서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하면서 남한의 각 정당 당수와 김수환 추기경, 백기완과 함께 문익환 목사를 초청했다. 그해 남한에서는 6·10남북학생회담 무산과 8·15남북학생회담 출정식 등 청년·학생들의 통일운동이 정부의 저지를 받았고, 각계의 남북교류 제의가 거부되는 등 통일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중단된 남북 간의 대화를 위해 문익환 목사 일행은 북한의 초청에 응하는 방식으로 방북을 결정했다.
(‘나는 걸어서라도 갈 테야.’라는 자신의 시구처럼 분단의 금기를 넘어서 방북을 감행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 일행은 평양공항에 도착한 후 발표한 성명에서, “일찍부터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마음을 열고 민족의 장래를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김일성과 회담 후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가진 공동성명에서 “7·4남북공동성명에서 확인된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해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한반도 분단 반대, 정치군사회담 추진과 이산가족문제 등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공존 원칙에 입각한 연방제 방식의 통일 지지, 팀 스피리트 합동군사훈련이 남북대화 및 평화통일과 양립할 수 없음을 확인하고, 전민련이 제안한 범민족대회 소집을 지지하는 등 9개항을 발표한 것이다.
문익환 목사 일행은 10일간의 방북 일정을 마친 뒤 일본을 거쳐 4월 13일 귀국했다. 정부는 이들이 귀국하자마자 사전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키가 큰 할머니
1987년 12월 이선실은 대방동 집에 자칭 강원도에서 왔다는 키가 큰 여동생(67세 가량의 할머니)과 그녀의 아들이라는 이동진(28세 가량)을 불러들여 이들과 함께 근 1년을 동거했다. (언니라고 하는 이선실은 155센티미터 남짓에 불과한 작은 키였지만 동생은 170센티미터가 넘는 큰 키였으므로 김옥기는 이름을 모르는 그 할머니를 ‘키가 큰 할머니’라고 불렀다.)
당시 옆방에 기거하던 김옥기가 퇴근하여 귀가하자 처음 보는 키 큰 할머니와 28세 가량의 남자가 와 있어 이상히 여기던 차에 이선실이 “이 할머니는 여동생이고 이 총각은 내 조카 동진이다”라고 하면서 이들을 소개했다.
김옥기는 그들과 처음으로 인사교환을 한 그날 밤 8시께 그녀 방으로 건너온 이선실에게 물었다.“전에는 남동생밖에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무슨 여동생인가요?”이선실이 말했다. “그렇게 말했었지. 이 동생과는 핏덩어리인 채로 헤어졌기 때문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 그래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이 동생이 일본으로 연락을 해서 알아보니까 내가 안양에 산다고 해서 안양 부흥아파트에 갔다는 거지. 집주인이 대방동으로 이사 갔다고 해 이곳으로 찾아왔다고 하더라니까. 당분간 갈 데가 마땅치 않아 여기에서 같이 살아야 할 거야.”
1988년 1월 초순 김옥기는 마루에 나와 있던 키가 큰 할머니에게 “어디서 살았습니까? 할머니의 친동생인데 하나도 닮지 않은 것 같네요?”라고 말을 건네자, 그 할머니는 “강원도 공사장에서 인부들 밥을 해주는 함바를 하면서 살았지. 언니는 아버지를 닮았지만 나는 어머니를 닮았어. 나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아주 어렵게 살았어. 신세 지는 것 같아 차마 올 수가 없어서 이제서야 왔다네.”라고 얘기를 하며 자신의 과거가 순탄치 않았음을 은연중 암시했다.
며칠 후 김옥기는 그들 모자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한창 일하고 배워야 할 젊은 청년이 이렇게 빈둥빈둥 놀아서 되겠느냐?”고 하자 그 청년은 멋쩍게 웃으며 “저는 배운 것도 없고 강원도 시골에서는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놀고 있었습니다. 일자리가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는 1988년 1월 중순 당시 대방동 집의 세입자인 이강숙의 소개로 빙그레 우유 노량진 대리점 배달원으로 취직해서 1988년 3월 22일 퇴직 때까지 약 384만 원가량의 판매실적을 올렸고 그 판매수당으로 약 53만 원을 벌었다. 그는 1988년 3월 중순 대리점에서 주민등록등본과 재정보증서를 요구하자 “주소지가 강원도이므로 강원도에 다녀와야 합니다. 얼마 전 다리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관절염이라고 해서 앞으로 일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는 핑계를 댄 후 그만두었다.
그 무렵 김옥기가 이선실에게 말했다.“…… 함께 지내기가 불편하고 돌봐줄 동생이 있으니 이사를 가야합니다. 전에 살던 대방동 344-5번지 집을 팔았지 않았습니까. 그 집을 팔 때 이익을 많이 남겼지요. 그리고 나서 더 큰 집을 살 때 내가 보탠 1,200만 원을 돌려주세요. 다시 그 집을 팔 때 생긴 이익금도 생각해 주십시오. 할머니는 부동산 투기를 하는 재주가 있어서 대방동에서만 집을 두 번이나 사고 팔면서 이익을 많이 남겼어요.
돈이 없으면 제 앞으로 가입한 적금 2,000만 원을 찾아서 쓰겠습니다.”
이선실은 1988년 2월 8일 김옥기가 광명시 철산동 주공아파트 855동 301호로 이사할 때 일본제 재봉틀 한 대를 선물로 주었다. 그 후 1988년 8월 중순 철산동 주공아파트로 찾아온 그들 모자는 김옥기에게 “언니가 몸도 불편하니까 이곳으로 이사시키면 어떨까? 입에 틀니를 해서 잘 씹지를 못하더라고. 언니한테 들어보니까 집을 팔고 이익을 남겼지만 돈 관리를 잘못한 거 같아.
그래서 다시 집을 사지 못하고 전세를 살고 있어. 자세한 내막은 말하지 않으니까……? 나는 다시 강원도에 가서 밥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곧 떠나야 하지. 대방동에서 살면서 할머니를 좀 돌보지 뭐 하러 여기까지 이사를 왔을까?”라면서 김옥기를 원망하는 말을 한 후 떠났다.
이들 모자 공작조는 실제 모자 지간으로 노동당 연락 대표의 신분으로 이선실을 찾아와 함께 살면서 이선실에게 본부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1988년 12월에 북으로 복귀했다.

북한 정권 초기인 1946년 북조선로동당은 벌써 대남공작 전담 기구로 ‘서울공작위원회’를 설치했다. 이후 문화연락부, 사회문화부, 대외연락부, 225국 등으로 이름을 바꿨고 2015년 4월 문화교류국이 됐다. 이 조직은 엘리트 공작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전담한다. 이들 공작원들은 존경하는 명칭인 ‘선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뼛속까지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되어 있다. 이선실은 그 당시 사회문화부 소속이었다. 그런데 위에 나온 이동진 역시 225국 소속으로 김동진이라는 이름의 여권을 가지고 여러 차례 국내에 침투한 사실이 있고, 그 후에는 문화교류국 소속 부부장급 고위공작원이 되어 리광진이라는 이름으로‘자주통일 충북동지회’와 민노총 전현직 간부들을 중국 베이징에서 포섭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진보적 대중 정당
1989년 1월 초 이선실은‘진보정당 준비모임’소속 구성원들과 함께 관악산 등반대회에 참가한 후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중국집에서 식사를 할 때 자신을 이선화라고 소개했다.
1989년 11월경 마포구 서교동 354-6 신영빌딩 4층에 있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한 준비모임(약칭 준비모임)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면서 500만원을 제공하는 한편, 장기표, 처 조○○ 및 ‘민가협’ 회원들과 친교를 유지하는 한편 1989년 12월 중순에는 도봉구 쌍문동에 있는 장기표의 아파트를 방문하기도 하였고, 1989년 12월 하순경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장기표로부터 청계 피복노조위원장 김○○의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를 허락한 후 다음 날 아지트 현장 확인차 집으로 방문한 장기표를 약 30분간 만났다. 이때 이선실은 속이 안 좋다는 이유로 커피 등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세입자인 김점숙 모녀로부터 커피잔과 커피 등을 빌려서 장기표에게 대접했다.
1989년 12월 30일 이선실은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장기표로부터 그가 쓴 「우리 사랑이란 이름으로 만날 때」라는 책(첫 장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1989년 12월 30일 장기표’라고 기재)을 받았으며 1990년 1월 초에는 장기표 집을 방문, 그에게 ‘민주화 운동에 돈도 없을 텐데 생활에 보태쓰라’면서 활동자금 100만 원을 제공했다.
이선실은 1990년 3월 강화도 양도면 돌곶이산 장군석에서 드보크를 발굴해서 북이 내려 보낸 공작금을 수령했으며 1990년 6월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대방동 집에 남파간첩 권중현(50대), 김동식(20대 후반)을 입주시켜 약 3개월간 함께 살았다. 당시 그 집 세입자인 김정숙 모녀는 아침 일찍 직장(여의도에 있는 한식당)에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는 관계로 권중현은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김동식과는 딱 한 번 얼굴을 마주치고 서로 가볍게 눈인사를 했지만 구체적인 대화를 나눈 일은 없었다.

손병선 포섭, 간첩교육
이선실은 1990년 2월 하순 진보정당 준비모임에서 개최한 관악산 등반대회에 참석하여 손병선을 알게 된 후 1990년 4월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손병선이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요.”
이선실이 말했다.
“손 선생이 모임에 참가하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잘해 주십시오. 이제 더 이상 우리 진보세력들이 분열하지 말고 국민속에 뿌리를 내리는 정당으로 컸으면 좋겠습니다. 재야의 요구를 제도권에 반영할 수 있는 당이 필요하지요.”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데 많은 지도 부탁합니다.”
이때부터 이선실은 그에게 자신이 혁신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시한다. 이후 이선실은 준비모임 사무실에서 그를 매주 1~2회 만나 접촉했다.
한편 이선실은 1990년 4월 13일 강남구 삼성동 소재 KOEX 4층에서 개최된 ‘민주정당 건설을 위한 민주연합 추진위원회(약칭 민연추, 구 준비모임) ’결성대회에 참석, 민연추 깃발을 들고 단상으로 등단하기도 하였다. 이날 결성대회에는 유명인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참석을 하였고 이들과 악수를 나누기도 하였다.
1990년 4월 민연추 사무실에서 개최된 여성분과위원회 정책토론회 및 민연추 제1차 중앙위원회 등에 참석했고 1990년 6월 19일 민연추에 온라인으로 300만 원을 송금했다.
1990년 6월 하순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재정위원 회의에 참석한 손병선을 만났다.
그녀가 말했다.
“오늘은 무슨 안건을 토의하였길래 회의가 이렇게 길었습니까?”
손병선이 대답했다.
“지금 당 재정문제가 어려워 거기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당 재정이 많이 부족합니까…… 내가 뭐 도와줄 게 없을까요……”
“당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가 매일 고장이 나서 당장 복사기를 1대 사려고 하는데 가격이 500만 원 가량이 되어 걱정입니다.”
“내게 저축한 돈이 있으니 그 복사기 내가 한 대 사드리겠습니다.”
며칠 후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 이선화 기증이라고 표시된 복사기가 도착했다.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준비위 사무실에서 개최된 민중당 여성분과위 결성식 및 민중당사 현판식에 참석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면서 1990년 7월 9일 민중당 창당준비위에 온라인으로 150만 원을 송금했다.
그녀는 1990년 7월 중순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상임집행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손병선과 이○○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이 손병선에게 “손 선생님, 오늘 시간 있으면 우리들에게 손 선생님의 농장 구경을 좀 시켜 주시오.”라고 제의를 하자 손병선은 이선실에게 “이 선생님도 함께 가보시지 않겠느냐?”라고 제의하여 이선실은 이○○과 함께 손병선 승용차 편으로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 156번지에 있는 손병선이 경영하고 있는 고려농원을 방문하여 약 1시간에 걸쳐 비닐하우스에 재배 중인 장미 등을 구경한 후 그날 오후 손병선 승용차 편으로 서초구 양재동 지하철 3호선 양재역까지 와서 그곳에서 전철 편으로 귀가하는 등 손병선과 더욱 가깝게 지냈다.
1990년 7월 하순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손병선을 만났는데 그가 말했다.“이 선생님, 점심이라도 함께 할까요?”
“나는 음식을 아무거나 못 먹고 가려서 먹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무렵에는 점점 틀니 때문에 음식을 꼭꼭 씹기가 힘들었고 끊임없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럼, 차나 한잔 하시지요.”
그래서 사무실 인근 지하 다방 ‘하얀집’에서 손병선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손병선이 말했다. “당의 재정문제가 어렵습니다. 당이 자립해 나가려면 뭔가 수익사업을 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당이 살아나가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재정확보입니다.
재정 확보방법에 대해 과거 내 경험을 얘기한다면, 해방 후 제주도에서 부산으로 나와 당(남노당 지칭)에 가입하여 재정사업을 할 때 여성당원들이 시장에서 장사를 하여 당 재정을 도왔습니다.
민중당도 전 지구당을 동원해서 재정사업도 하고 후원금 모금도 해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당에서는 농산물 직거래 판매로 수입을 올리는 방법과 후원회에서 후원금을 갹출하여 당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데 재정은 상당히 어려운 실정입니다. 한 달에 후원금, 당비 등으로 500~600만 원 정도가 들어오는데 지출은 약 1,000만 원 정도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는 도저히 당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후 이선실은 승용차 편으로 귀가하면서 그에게 말했다.
“나는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해녀 생활을 하다가 제주 4·3 항쟁 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 놈들 사이에서 극심한 고생을 하면서 생활했습니다. 그 후 국내에 들어와서는 혼자 살며 삯바느질을 하면서 살아왔단 말입니다.”
“저도, 과거 농민운동을 하며 좌익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다 온 아버지 밑에서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때는 낮에 구두닦이와 날품팔이, 신문배달을 하며 야간학교에서 독학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해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얻어 나간 후 가정을 버리는 바람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면서 고등학교를 두 군데 옮겨다니면서 공부하여 부산대에 입학하였지요. 고등학교 다닐 때…… 만난 아내와는 대학 2학년 때 결혼했는데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 저를 뒷바라지했습니다. 4·19 당시에는 부산대 정치학과 4학년이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민족통일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5·16 후 감옥살이를 했지요. 감방에서 나와서 취직도 제대로 안되고 하여 부산에서 꽃 농사를 시작했고 그것을 지금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신상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동작구 대방동에 있는 국정교과서(주) 앞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 말했다.
“집이 이 근처에 있으니 내려주세요. 여기서는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몸도 불편하신데 집까지 태워다 드리겠습니다.”
이선실은 언제나 차에서 내려 걸어서 귀가하는 등 공작 원칙대로 자신의 은거지는 숨겼다. 이날 이선실은 손병선의 성분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1990년 8월 중순 이선실은 민중당 창당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손병선을 만나 인근 지하다방 하얀집으로 자리를 옮겨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요즘 혈압이 높고 손발이 떨리고 저려요. 숨이 차서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힘들지요. 올 겨울은 따뜻한 곳에 가서 쉬어야 될 것 같습니다.”
“어디 쉴만한 곳이 있는가요?”
“내가 몸이 불편할 때는 가서 쉬는 곳이 있지요.”
“급히 연락할 일이 있으면 어디 있는지 알아야 우리가 찾아보기라도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혼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젊은 사람들한테 괜히 피해주기는 싫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그 당시 배포된 민중당의 정강 정책에 포함된 통일문제에 대해서 지적했다.
“지금 당정책위에서 입안된 당의 정강 정책 초안이 나온 것을 보았는데 그 내용에 포함된 통일방안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에요. 남북 분단은 민족적 비극입니다. 하루빨리 통일이 돼야 합니다. 나는 전민련식 1민족 1국가 2체제 연방제 통일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민중당 연방제는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고 상호교류를 통해 단계적으로 2개의 정부로 연방정부를 구성하여 통일하자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데 2개의 국가가 존립하고 각각 독립하여 국가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2개의 정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분단 상태를 고착화하는 거예요.”
손병선이 말했다.
작성일:2022-12-27 10:31:30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