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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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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검은 그림자의 여인 ― 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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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12-27 10:31:07
조회수
514
검은 그림자의 여인 ― 어느 할머니 간첩의 실체를 찾아서



첩보 활동은 가장 미묘한 것이며 그것은 어디서나 필요하다
- 손자





1.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서울형사지법 합의21부는 1993년 2월 26일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어 사형이 구형된 황인오 피고인(36)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반국가단체 구성 등)를 적용,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피고인 황인오를 무기징역에 처한다.”
재판부는 판결 이유를 설명하면서‘피고인이 월북하여 북한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뒤 남파되어 국가기밀을 수집하는 등 간첩행위를 한 점은 엄벌에 처해 마땅하나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 점 등을 참작해서 극형은 피한다’고 밝혔다.
한편 합의22부는 이날 북한공작원 이선화가 간첩인 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구속 기소된 전 민중당 정책위원장 장기표 피고인(47)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죄(불고지)를 적용, 징역 1년을 선고하고 회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회합죄가 인정되려면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첩과 접촉해야 하나 이선화가 간첩인 것을 안 뒤 만난 것은 특별한 목적 없이 만난 것으로 보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1992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국을 뒤흔들었던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에 대한 1심 재판이 3월 19일 손○○(전 민중당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손병선의 딸)에 대한 선고를 끝으로 모두 마무리됐다.
이번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은 총책 황인오와 중부지역당 강원도당 지도책 최호경 등 주모자들이 극형을 모면하고 관련자 64명 중 과반수가 구형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다. 황인욱(황인오 동생)의 약혼자인 정○○ 등 20여 명은 국가보안법 사건, 특히 간첩 사건에서는 보기 드물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안기부가 당초 발표했던 남로당 이후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라는 명성에 걸맞지 않게 선고 내용은 전체적으로 낮았다. 왜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나게 됐는가. 제6공화국 체제하에서 시국 공안 사건에 대해 관대해진 사법부의 변화된 입장이 반영된 것일까?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사건의 본질에 대한 안기부나 검찰의 시각과는 다르게 법원의 시각은 시대 상황에 맞춰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서울형사지법의 네 개 합의부는 ▲황인오가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내려와 반국가단체를 결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공작금과 권총 등 공작 장비가 전달된 사실 등 관련자들의 혐의 내용을 모두 인정했다.
하지만 법원은 ▲황인오를 데리고 월북한 대남공작원 이선화(李仙花)가 북한 조선노동당 서열 22위인 정치국 후보위원 이선실(李善實)이라고 단정할 증거가 없으며 ▲황인오가 만든 지하조직의 이름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는 점을 판결문에서 밝혔다.
피의자신문조서 등 수사기록에 근거한 공소장에는 중요한 범죄사실로 ▲황인오가 1990년 7월 초 자신의 어머니 전○○으로부터 ‘민가협에 자주 나오는 이선화라는 할머니가 있는데 과거 민족운동을 하다 지금은 식당 일을 하면서 민중당에 돈까지 내놓은 훌륭한 사람이다. 너를 만나고 싶어 하니 한번 만나 봐라’라는 말을 듣고 70대 중반의 이선화라는 할머니를 만난 경위 ▲그녀로부터 대남공작 지도책 권중현을 소개받아 만난 사실 ▲같은 해 10월 17일 경기도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뻘밭에서 이선화, 권중현 등과 함께 반잠수정을 타고 월북한 사실 ▲입북 6일째 되던 날 평양 근교 대동강변에 위치한 한 초대소에서 이선화가 배석한 가운데 노동당 입당식을 거행한 사실 ▲대남 공작원 이선화는 조선노동당 서열 22위인 정치국 후보 위원의 지위에 있는 거물간첩이라는 사실 ▲황인오는 노동당 사회문화부장 이창선의 지시에 따라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다는 사실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황인오는 재판과정에서 이선화가 거물간첩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도 문제 제기를 했다. ‘우리 조직의 명칭을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라고 할 경우 북한의 조선노동당 산하 1개 지역조직, 즉 조선노동당 평양시 지역당과 같은 하부조직으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우리는 조직간부 일부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그 지도를 받으면서 노동당이 추구하는 통일사업 수행을 위해 조직을 구성한 것이지 조직 자체가 조선노동당의 강령과 규약을 따르고 실천하는 산하 조직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법원은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검찰 및 안기부에서 진술보다 법정 진술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부가 남한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별도의 반국가단체 수괴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조직을 움직여온 것으로 보는 것이 실질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1심 재판 결과, ‘북한 권력서열 22위인 이선실이라는 거물급 대남공작원이 이선화란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황인오를 포섭하여 북한 노동당의 하부조직을 남한에 건설하려 했다’는 핵심적인 공소사실은 인정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로당 이래 최대의 간첩단 사건이 별 볼 일 없는 단순한 간첩단 사건 또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비춰지게 된 것이다.
안기부가 또다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의도에 따라 불확실한 사실들을 과대포장하여 침소봉대했다는 비난이 거세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1992년 12월 18일 거행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형사재판에서는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증거재판주의가 대원칙이다(형사소송법 제307조 제1항). 이 경우 無罪 개념은 죄가 없는 경우뿐만 아니라 유죄의 증거가 없는 경우도 포함한다. 그러므로 형사사건의 판결문에서는 실체적 진실을 증명할 증거가 나타나지 않으면 ‘유죄의 증거가 없으므로 무죄다’라고 설시한다.
법원이 비록 검사의 이 부분 공소사실을 배척했지만 이는 이선화가 이선실과 다른 인물이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 허구의 이름이라고 확인한 것은 아니다. 다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 부분에 대한 판단을 잠시 유보한 것일 뿐이다.
어느새 봄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선잠을 자듯 게으른 봄이 이제 눈을 뜨고 다가서 온다. 그날, 선고 공판이 끝나고 나서 호송 버스를 타고 서울중앙지법에서 서울구치소로 돌아가면서 그는 생각했다. 버스는 일정한 속도로 예술의 전당 밑 우면산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지난밤에 무슨 꿈을 꾼 것 같지는 않다. 마음이 온통 뒤숭숭해서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없었지만 그래도 새벽녘이 되어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었다면 틀림없이 기억이 날 터였다. ‘안기부 수사관들이 제일 악질이고 검사는 그 다음이며, 판사는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하다 못해 멍청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렇게 단순하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검사가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면서 태연하게 사형을 구형했었지. 사형! 사형!!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라고 했는데…… 검사 새끼는 우리 가족을 풍비박산시켜 놓고서…… 그것도 모자라서. 나만 구속하면 될 일이지 왜 죄 없는 가족들까지? 어머니, 아내, 동생, 제수씨까지 말이야. 이건 신종 연좌제야. 그런데 판사는 생색을 내면서 무기징역을 때렸지. 그러니까 나더러 평생을 감옥에서 썩으라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결국 한 통속이야. 짜고 치는 고스톱이야. 너희들은 말하겠지. ‘감옥에서는 최소한 생활이 보장된다니까. 거기서는 적어도 굶어서 죽는 일은 없어. 먹을 것도 주고 옷도 주고 잠자리도 주고 아프면 치료해주고. 그러니 그 속에서 죽을 때까지 썩으라고. 그게 무기징역의 의미야.’ 너희가 막장을 알아?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이야. 이 세상 끝이라니까. 삶의 막장이라고 할까. 후끈거리는 지열 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하다고. 안전등에서 흘러나오는 한줄기 불빛이 암흑을 걷어내지. 곡괭이를 휘둘러 석탄을 캘 때마다 땀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온몸을 휘감지. 나는 막장에 들어간 첫날을 기억하지. 어떻게 잊어버릴 수 있겠어. 막장 들어가는 게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거 같았으니까. 막장에서 일하는 탄광 노동자도 인간이란 말이야. 인간이라니까…… 우리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고. 난 그 권리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투쟁한 거야.’
버스가 터널을 빠져나와 과천 우면산 연결도로에서 막 속도를 내는 순간 외제 승용차가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차선을 변경해서 끼어들자 버스는 움찔하면서 속도를 줄였는데 그때 하마터면 충돌이나 접촉사고가 날 뻔했다. 운전기사가 욕설을 내뱉었다. “나쁜 새끼! 운전 똑바로 해!!”그 순간 황인오는 미망인지 사색인지 깨어났다. 그리고 곧장 버스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 채 잠에 빠져들었다. 하루 종일 대기하고 재판을 받으며 너무 긴장했었는데 이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던 것이다.


2. 안기부와 李善實의 20년 전쟁

안기부와 검찰이 주장하는 이 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들은 무엇인가. 또 그 증거들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중앙정보부는 전두환 정권에 의해 1981년 4월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었고 안기부는 김대중 정권 들어선 후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북이 그 당시 내려보낸 지령문(전문)들은 안기부 같은 전문기관도 10년 이상 해독하지 못했을 정도로 불규칙한 난수(亂數)의 배열로 일관돼 있었다.
안기부는 그 전문들을 해독하기 시작하면서 1980년 10월 15일 자 로동신문에 발표된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 명단에 리선실이 포함돼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선화의 북한에서 본명(또는 정식명칭)은 리선실이고, 그 발표를 통해 남한에서 대남 공작중이던 이선실에게 임명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선실에게 보낸 전문 중에는‘계획대로 ○○년 ○○월 ○○일 ○○시 ○○로 해안을 통해 황인오를 대동하고 복귀하라’라는 내용도 있었다. 안기부는 ‘이 지령 내용은 황인오가 월북할 때의 상황과 똑같다’라며 ‘결국 이선실이 황인오를 포섭한 뒤 북한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고 그에 따라 황인오를 입북시킨 사실이 더욱 명백해졌다’라고 판단했다.
만일 전문 내용이 정확하다면 이선실은 평범한 대남공작원이 아니라 안기부 주장대로 권력서열 22위 고위 공작원임이 분명해진다. 또 영웅 칭호까지 수여 받은 것으로 미루어 그는 남파 기간 중 이번 사건 말고도 또 다른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전문의 수신자, 즉 이선실이 장기표, 손병선 등 민중당 관계자들과 접촉하고 황인오를 월북시키는 등 이번 사건을 총지휘한 이선화와 동일인이라는 점을 어떻게 인정할 것인가?
안기부는 그 근거를 전문의 해독 경위에서 찾고 있었다.
이번 사건 수사과정에서 안기부는 방대한 양의 전문들 중 일부를 해독해 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됐다고 밝혔다. 즉 손병선과 그의 딸 손○○을 조사하던 중 이들이 이선화로부터 전문의 송신 수신 교육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안기부는 곧 손병선 부녀가 이선화로부터 전수 받은 전문 해독 방법에 따라 보관 중이던 전문들을 해독하기 시작했다. 통신 전문요원들의 끈질긴 작업 끝에 동일인의 것으로 분류돼 온 수백 건의 전문이 그 부녀가 제시한 해독 방법으로 풀린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손병선 부녀가 실제로 이선화로부터 직접 전문의 송신 수신 교육을 받았는가 여부다. 다시 말해 그들 부녀가 이선화의 전문 해독 방법을 그대로 전수받았는지가 문제 되는 것이다.
안기부는 이에 대해 “공작원 개인마다 고유의 지령 해독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특별한 사유, 이를테면 검거나 사망 등의 사유가 없는 한 평생동안 유지된다”라고 밝히고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들 부녀가 이선화로부터 고유 해독체계를 그대로 전수 받은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안기부는 이 전문의 해독으로 이번 사건에서 제기되고 있는 가장 큰 의문, 즉 ‘안기부가 이선실을 검거하지 못했으면서도 어떻게 그의 10여 년 동안의 행적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해소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에 그녀의 행적이 소상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에 검거 여부와 관계없이 활동 내용을 알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안기부 수사관들에 의하면 ○○년 ○월 ○일 ~ ○월 ○○일간 ○차에 걸쳐 지령된 내용 중에는 ‘북과의 연계는 당 지도부만 알고 하부조직에는 위장명칭인 민족해방 애국전선으로 하라’는 등 ‘당’이란 명칭이 나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안기부 수사관들은 황인오가 북한의 지령대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을 결성했으며 민족해방 애국전선은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중부지역당의 위장 명칭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전문이라는 결정적 증거는 검증을 요하는 부분이 많다. 북한 A-3 방송 채록 및 전문 보관 과정, 그들 부녀가 제시한 해독체계를 그 방대한 전문들에 적용해 해독 가능한 것들을 찾아내게 된 경위, 북한 당국으로부터 영웅 호칭까지 부여받을 정도로 뛰어난 공적을 세운 고위공작원이 위험을 무릅쓰고 왜 자신의 전문 해독체계를 그대로 전수해 주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검증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안기부 측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것은 ‘북한 권력서열 22위 리선실’에 대해 북한 당국이 침묵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 측은 이번 사건이 안기부의 자작 모략극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안기부가 이선실로 발표한 사람이 북한 권력서열 22위의 실제 리선실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안기부의 이선실이 조작된 인물이라면 북한이 이를 반증하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어쨌든 ‘이선실 간첩단’ 사건은 안기부 주장이 사실이라면 과거의 일반적인 간첩단 사건과는 차원이 다른 중대한 사건인 것이다.

안기부(그 당시는 중앙정보부)가 이선실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의 한 중간 간부가 남한으로 망명하면서 가져다준 아주 중요한 정보 때문이었다.

남한 출신으로 이화여전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한 뒤 돌아와 사립학교 교사생활을 한 인텔리 여자. 해방 뒤 남로당에 입당, 제주 4·3 폭동에 참여했다. 6·25가 나자 경성의전 출신의 남편 김학선(1956년 사망)과 월북했다. 그 이후 당 경공업위원회 과장, 평양시 여맹부위원장을 거쳐 1963년 김일성에게 직접 호소하여 대남공작원이 됐다. 간첩양성소인 695 정치대학을 졸업한 뒤 1966년에 간첩으로 남파됐고 몇 차례 남한을 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본명은 이선녀(李善女)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망명자의 제보에 따라 그녀의 남한 내 과거 행적조사를 벌였으나 실체 확인에 실패했다. 이선녀란 이름 하나만 갖고 이화여전 동창회는 물론이고 그녀와 비슷한 행로를 밟은 용의자들을 추적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남편 김학선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경성의전 학적부 등을 조사했으나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훨씬 나중에 안기부의 첩보망에 계속 들어오는 이선실의 행적은 놀라웠다. 그 이전에는 이선실은 북한에서 한 번도 행적이나 사진이 공개되지 않았다.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면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행사에도 일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가 1974년 공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고, 1980년 3월 공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본에서 남한으로 입국했으며, 1990년 10월 남한에서 월북했기 때문에 그동안 그녀의 행적이 공백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그러던 그녀의 행적이 처음 보도된 것은 (북한으로 복귀한 후인) 1991년 1월 김일성이 조총련 부의장 신상대, 범민련 공동의장 윤이상 등을 접견할 때였다.

1973년에 남파되어 부산에서 몇 개월간 특수 임무를 수행하고 귀환. 1974년부터 일본에서 북한공작 거점을 지휘. 1979년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에 임명되고 나서 김일성에 의해 직접 조선노동당 남조선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었고 1980년 제6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위원 등으로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대의원에 당선된 이래 10기까지 계속 선출되었다. 같은 해 4월 김일성의 70회 생일에 즈음해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1991년 1월 한국민족민주전선 부위원장에 임명된 이래 대남 비밀공작 부문의 주요 책임자로 일했다. 1992년 4월 김일성의 80회 생일 기념연회에 당 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으로 참석했다.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당시 국가장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안기부는 1992년 9월 중순경부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본격적으로 수사하는 과정에서 총책인 황인오로부터, 지난 1990년 10월 17일 남파간첩 이선화, 권중현, 김동식과 함께 강화도에서 반잠수정으로 월북한 일이 있었고, 그때 해주를 거쳐 평양 순안비행장에 가니까 북한의 대남공작 부서인 사회문화부 부장 리창선 등 고위 인사들이 직접 영접하여 극진한 환영을 해주었으며, 이선화는 환영식장에서 보니 리창선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이선화는 키가 약 155cm 정도 되고 머리는 반백이거나 염색했으며 금테안경을 쓰고 다녔다는 내용의 진술을 받아냈다.
안기부는 공개할 수 없는 각종 첩보 및 정보 자료를 통해 황인오가 진술한 이선화는 지난 1980년 이후 북한 언론 등에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북한 정권 수립 44돌 행사 당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권력서열 22위로 발표된 이선실’과 동일인임을 밝혀내고 이선실이 1980년 이후 행적이 전혀 없다가 1990년 10월 북한으로 복귀 후 1991년 1월에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점으로 보아 황인오와 함께 입북하기 전까지 국내에서 간첩으로 암약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1992년 9월 18일부터 이선실의 남파 기간 중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전담 수사팀이 12명 4개 조로 편성되었다. 먼저 전담 수사팀은 이선실의 남파 기간 중 은신처를 찾기 위해 황인오를 직접 신문했다.
(황인오는 1992년 9월 9일 체포된 후 온갖 폭력과 고문으로 악명높은 그 무시무시한 안기부 남산 분실에서 20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때 황인오로부터“이선화를 그녀가 살고 있는 집에서는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다.”“1990년 9월 초순경 남파간첩 권중현을 대방전철역 부근에서 만나 함께 장승배기로 걸어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권중현이 대방동의 한 주택가를 손으로 가르키며‘우리가 할머니(이선화 지칭)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이 근처에 있는 이층집이다, 2층에 방 3개를 전세로 얻어 살고 있는데 그중 방 1개를 가난한 모녀에게 주어 같이 살고 있다.’‘우리가 살고 있는 집 대문에는 방범순찰함이 부착되어 있어 수시 경찰관들이 대문 앞에 오기 때문에 우리를 잡으러 오는 것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두근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9월 20일. 가을 날씨치고는 무더운 날씨였다. 일기예보는 비가 내릴 거라고 했지만 하늘에 비구름은 한 점도 없었고 산들바람이 가끔 불었다.
오전 10시부터 수사관들은 직접 황인오를 데리고 대방전철역 부근에서부터 노량진의 장승배기 쪽으로 신길초등학교와 숭의여중고교, 주공 아파트, 공군 부대 주변 골목길을 도보로 걸으면서 권중현이 가리켰던 주택가를 찾으려고 했으나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그 일대 주택가의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채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황인오 자신도 2년 전의 일이고 그 지역이 잘 모르는 지역이어서 10여 시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결국 문제의 주택가를 찾지 못했다.
다음날인 9월 21일에도 수사관들은 다시 4개 조로 나누어 대방동, 노량진 2동 일대를 통·반장 등을 중심으로 가가호호 방문하여 본격적인 탐문 내사를 했지만 그곳 주택가는 주민들의 전출입이 빈번할 뿐 아니라 주민들이 옆집 사람을 잘 몰라 이선실 등 남파간첩들이 은거했던 아지트를 찾는 데 또다시 실패했다.
그들은 잔뜩 화가 났고 불평불만을 토로했다.
선임 수사관이 말했다. “아무리 이년 전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직접 걸었던 골목을 기억할 수 없단 말인가? 멀쩡한 사내 녀석이 말이야.”
“그 자식이…… 우리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그 새끼가……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틀림없이 우릴 속인겁니다. 뭔가 골탕 먹이려고 말입니다.”
“……”
그래서 그들은 황인오가 허위진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엄중하게 다시 신문을 하였다. “야! 이 새끼!! 똑바로 말해……”황인오가 말했다. “대방동 주택가가 틀림없다니까요. 제발 믿으세요. 왜? 속고만 살았나요?”“그래. 말해봐.”“권중현이 어느 날 ‘내가 살고 있는 집 부근에 개업한 목욕탕에서 준 것이다’라고 하면서 대방사우나라고 인쇄된 볼펜 한 자루를 준 일이 있단 말입니다.”
9월 23일 수사팀을 2개 조로 편성, 한 팀은 동사무소, 구청 등에 가서 대방동, 노량진 일대 목욕탕 중 상호가 대방사우나로 되어있는 곳을 찾는 한편 다른 한 팀은 직접 현지에 나가 대방사우나의 소재 파악에 나섰다. 그날 오후 1시쯤 직접 현지에 나가 있는 팀이 문제의 대방사우나를 찾아냈다. 그래서 수사팀은 직접 목욕탕 주인 김모씨를 접촉하여 개업기념으로 볼펜을 만든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해보고 개업기념 볼펜을 제작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들은 권중현이 대방사우나를 이용했으면 그들이 숨어있었던 곳도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일대 주택가를 찾아 다시 탐문에 들어갔다. 그날 오후 3시쯤 목욕탕 뒤편 주택가에 살고 있던 어떤 주민으로부터 ‘대방동 13-61번지 2층 양옥집에 2년 전에 신 씨라는 일본 할머니란 사람이 살았다. 그 집에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모녀가 지금도 살고 있다. 그 할머니는 키도 작달만 하고 머리는 반백이며 금테안경을 끼고 있다.’라는 제보를 받았다. 즉시 대방동 13-61번지를 찾아가보니 황인오가 말한 것처럼 그 집은 2층 양옥집이었고 대문 앞에 방범 순찰함이 부착되어 있었다. 수사팀은 이 집이 틀림없이 이선실이 은거했던 집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그때 동시에 장기표 담당 수사팀으로부터‘장기표의 수첩에 신순녀 명의의 전화번호(T. 813-7063) 가 있는데 그 전화번호가 노량진 전화국 관할이니 참고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수사관들은 그 전화번호를 가지고 노량진 전화국의 협조를 받아 1990년 8월경 가입자 및 설치장소를 확인해보니 대방동 13-61번지로 나왔다.
그래서 문제의 13-61번지 소재 집주인의 허락을 받은 후 2층으로 올라가서 당시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던 김점숙 모녀를 만났다. 그들은 부인이 경계심을 풀고 스스럼 없는 태도로 말할 수 있게 한껏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그때 그녀는“같이 살았던 할머니 이름이 신순녀이다. 그 할머니는 우리에게 ‘나는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다. 일본에는 지금도 이복동생들이 살고 있고, 고향은 전라도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 할머니는 1990년 8월 말인가 9월 초순쯤 건강이 안 좋아 강원도 기도원에 간다면서 이사를 갔으나 지금까지 한 번도 연락을 받지 못했다. 그때 잠시 함께 살았던 조카들도 나갔다. 조카들이 모시고 간 것이다. 조카들과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어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방은 아직 비어있다. 그 할머니는 키가 매우 작고 머리는 반백이다.”라는 취지의 진술을 얻어냈다.
그들은 이선실이 이선화라는 이름을 쓸 줄로 추정했었는데 신순녀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대방동 사무소에 가서 확인해보니 김점숙 모녀의 진술대로 그 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신순녀였고 주민등록도 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선실과 신순녀는 동인이명인지 아니면 전혀 서로 다른 별개의 인물인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이선실과 신순녀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 과연 신순녀가 누구인가에 수사의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반장님…… 우리가 뭘 잘못 짚은 거 아닌가요? 이선화가 아니라 엉뚱하게 신순녀가 튀어나왔지 않습니까?”
“이건 당연히 예상했어야 하는 건데. 너무 안이하게 결론을 내린 거야. 두 개의 이름 사이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고…… 이걸 하루빨리 찾아 내야만 하지. 여기에 이번 수사의 승패가 달려 있어.”
대방동 사무소의 협조를 받아 신순녀가 1980년 4월 주민등록증 발급 당시 또한 1983년 12월 주민등록증 갱신 당시 주민등록부에 부착해 놓은 흑백사진과 칼라사진 1매를 입수하였다. 그날 밤 입수된 신순녀 사진을 구속되어 조사받고 있던 황인오, 어머니 전○○, 동생 황인욱, 처 송○○ 등에게 제시하자, ‘1990년 10월 황인오가 월북할 때 같이간 이선화가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선실과 신순녀는 동일인임을 확인하고 9월 24일부터 신순녀의 신원 추적에 나섰다. 먼저 이선실이 은거했던 대방동 13-61번지에 가서 김점숙 모녀를 재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이선실이 사용하다 남기고 간 악어핸드백, 카메라, 책자 등 총 19종 38점을 넘겨받았고 이선실이 그 집에서 사용하던 장롱, 씽크대, 냉장고, 문갑 등도 넘겨받았다. 감식반은 먼저 집 주위와 방 안에서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고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얼마나 치밀하게 지웠는지 이렇다 할 지문이 채취되지 않았다.
다만 입수된 책 중에는 문익환의 처 박용길이 저술한 문익환의 옥중 서한집인 「꿈이오는 새벽녘」이 있었는데 그 책에는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1989년 새해에 신순녀님께 문익환 드림’이라는 문익환의 친필 서명이 들어있었다.
수사관들은 결국 이선실이 북송교포 신순녀로 위장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이선실의 출신지, 본명 등 실체는 오리무중이었다. 단지 북에서 남파된 간첩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녀에 대한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었다. (또한 두 명의 조카들의 정체가 의심스러웠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집 주변에서 탐문 수사를 벌였지만 아무도 그 두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몹시 당황하고 있었다. 수사에 쫓기고 있었으니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위에서는 속도 모르고 심하게 다그쳤다. 하지만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수사 방향을 재정리하면서 지금까지 조사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해 집요한 재조사 끝에, 이선실이 1990년 7월 「민중당보」에 제주도 출신 이선화 75세라는 이름의 축시를 기고한 바 있고, 국내 암약 시 포섭한 국내 간첩들에게 ‘나는 4·3 사태 때 피해를 입은 가족이며 이름은 이선화이다’라고 말했던 점, 신순녀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국민등록 및 외국인 등록을 할 때 제주 출신자들을 그 보증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점 등을 알아내고 이선실은 제주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 그 무렵부터 제주 현지 수사관들과 합동으로 이선실의 신원 추적에 나섰다.
작성일:2022-12-27 10:31:07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