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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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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 (16) - 장편소설 「사하라」의 재재재재재 수정판의……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10-11 11:58:48
조회수
297
작가의 말 (16) - 장편소설 「사하라」의 재재재재재 수정판의……

나는 2007년부터 지금 (2022년)까지 장편소설 「사하라」를 붙들고 있다. 그렇다고 이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2011년 종이책 초판을 냈고 2016년 재재 수정판을 출간했었다.) 내가 계속적으로 쓰고 또 쓰고 수정하고 수정할수록 소설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더욱더 미완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쓰면 쓸수록 확신을 잃어간다.
유명한 건축가이면서 사막 여행가인 김규현과 인물들, 풍경과 언어, 그들의 세계와 작별을 할 때가 된 것일까. 하지만 이 (마지막) 소설 역시 초고일 뿐이다. 아니 초고의 초고일 뿐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소설은 완성을 거부하면서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언제쯤 작품과 화해할 수 있을까? 작품은 정신세계가 무한한 것처럼 똑같이 무한하다. 작가는 결코 작품이 완성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작품은 존재하지만 완성된 것도 완성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작품은 존재하지만 고독하다.
나는 이 소설을 궁극적으로 끝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믿음도 없다.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끝도 없는 절망감, (무의지적 기억과 의식의 흐름에 따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지식의 잡탕이고 허영일 수 있는 백과사전적 지식을 빠짐없이 기술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단념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는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핵심 부분만은 벗어나거나 변화되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필요 없는 부분은 또는 필요 이상의 부분은 삭제가 가능할까? 작품은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으므로 완전히 허물어버릴 수는 없다.

나는 남쪽 바다, 벌교, 부산, 서울, 티베트, 타클라마칸 사막, 리비아의 트리폴리 (타라불루스), 말리의 통북투, 젠네, 보츠와나의 오카방고 삼각주, 세네갈의 다카르, 알제리의 도시 타만라세트, 아하가르 산맥,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평원, 모로코의 마라케시, 카사블랑카, 사하라와 사막, 아라비아 반도, 보르네오 섬, 뉴기니 섬, 아마존 강 상류,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베트남의 빈롱, 아프가니스탄, 알제리와 알제, 스페인의 그란나다, 그리스의 크레타 섬, 프랑스의 투르빌, 파리, 마르세유, 사하라의 부족 투아레그, 낙타, 사자,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비극, 신라 고승 혜초, (위대한 여행가) 오디세우스, 무슬림과 쿠란, 건축가의 세계, 아버지, 어머니, 형제애, 전쟁 등을 배경으로 하여 (그러나 사하라와 사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소설 속 주요 등장 인물로 기능하는 하나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방랑자 혹은 순례자의 여행, 탐험, 방랑, 모험, 그것들에 대한 갈증, 고향과 귀환, 신과 종교, (정신분석학적 분석이 필요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심리적 갈등과 상처, 이중인격의 문제 (자아와 또 다른 자아의 대립이라는), 자아 성찰, 인간의 이율배반적인 욕망, 성적 탐닉 또는 성의 억제, 전쟁의 비극, 건축과 예술, 술과 알코올 중독, 임신과 낙태, 후회와 반성, 사랑과 삼각관계, 생명의 소중함과 자기 살해, 배신과 복수, 용서와 화해, 사랑과 이별, 사랑과 질투, 생명 존중, 운명과 비극, 죽음, 無相, 無常, 無想, 無償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하여〔그리고 플래시백 (flashback), 상호 텍스트 (intertext), (절대적인 또는 상대적인) 리얼리즘, 의식의 흐름 (내적 독백), 회상과 기억, 기억과 망각, 해피 엔딩이라는 내용과 형식에 대해서도〕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신은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한때 존재하긴 했지만 이미 죽었는지? 그 신은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을까? 우리에게 과연 신이 필요할까? 왜 어떤 신만이 유일무이한 신이란 말인가? 왜 유일신이 아니라 수많은 복수의 신들이 문제란 말인가? 어떻게 해야 신을 절대적으로 숭배할 수 있는가? 신성불가침 또는 신성모독이란 무엇인가? 금기란 무엇인가? 신성모독이 곧 신성을 증명하려는 몸부림이란 말인가? 신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가? 근본적인 무신론자로 개종하거나 변신할 수 있을까? 만일 진정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은 아주 조용할 것이고 그래서 어떤 (유일무이한 것이 아닌) 징후만 남아있을 거 아닌가? 라는 근원적 문제들은 지금도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도저히 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난제이다.
우리는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규현은 전지전능한 유일신과 그 종교를 배격할 뿐이다. 위선적인 종교에 대한 완강한 거부의 몸짓이었다. 그러므로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니다. 그는 사막에서 자신만의 신을 찾아 끊임없이 돌아다녔지 않은가. 그는 자문자답한다. 나의 신은 누구인가? 그 신은 존재하는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살아있는 모든 개체를 존중했고 거기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실존의 토대인 존재의 깊고 근원적인 생명력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론자이면서 범신론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나는 항상 기분 전환용으로 대충 읽을 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체험하여야만 하는 소설을 염두에 둔다.
열정적이고 필사적인 소설.
우리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이야기는 지금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근원적 차원의 통찰이고 기나긴 인생역정에 대한 은유가 아니겠는가.
누군가 말했다. ‘인간 본성에 대해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자신에게 배웠다.’ 그러므로 작가가 창조했던 인물은 작가 안에 있다. 김규현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적은 그 자신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었다.
그가 사막에서 죽게 되다니. 내가 창조한 인물인데 나는 너무 당황했고 그의 야윈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김규현! 규현! 규현! 규……! 현……!” 나는 울컥하면서 그만 목이 메었다.

김규현은 건축 예술가이고 손희승은 사진 예술가이다. 그들은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그들은 인생이라는 예술을 추구했고 죽어서 그 예술을 완성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예술 없이 우리가 살 수 있을까? 예술은 진실이다. 예술의 극치는 예술을 감춘다.
김규현은 사하라 사막에서, 손희승은 아프가니스탄의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예술을 위해서 (또는 예술 때문에) 죽었다. 그건 진정한 예술가의 숙명같은 운명이다.
심현숙 (그녀는 현숙이라는 이름이 촌티 난다고 싫어했지만 말이다).
그녀는 멋쟁이이지만 팜므파탈은 아니다. 그녀야말로 현대적 여성의 표본이다. 고집이 세고 이해타산이 분명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있으니까. 난 작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녀를 사랑한다. 그렇지만 나는 작가로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녀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거대하고 통 큰 이야기는 방대한 규모로 인물과 배경, (명시적이건 내재적이건 소설의 궁극적 의미인) 주제를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웅장한 책을 쓰려면 웅장한 주제를 골라야 한다. 누구의 말처럼 벼룩을 주제로 오랫동안 살아남을 위대한 책을 쓸 수는 없을 거 아닌가. 이런 소설을 쓰는 일은 필사적으로 매달려야 하는 중노동이지만 말이다. 온 힘을 집중해야 하고 끊임없이 매달려야 한다.
나는 긴 소설이 어떻게 구성되고 변형되며 완성되는지 그 고유한 과정의 비밀을 터득하고 있는가? 하지만 그런 도저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인물들의 일생일대에 걸친 긴 스토리 라인을 만들면서 확고부동한 구조 속에서 소설의 핵이 되는 장면을 매개하기 위해 이야기의 속도를 조절하고 이야기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숨 쉴 공간을 마련하였는지는, 작가의 관점에서 여전히 많은 의구심이 든다.
나는 엄밀한 리얼리티에 근거해서 (지금, 여기, 우리의) 실존적 이야기를 서술하고 묘사하고 진술하려고 했다. 그래서 실제 현실과 직접적으로 관련성이 없는 상징, 우의, 알레고리, 초현실주의, 도착적인 담론 또는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플롯을 배제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이 한번도 없다.’고 말하는 체험 문학 혹은 고백 소설을 지향하려고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의 (대단치도 않은) 사생활을 징징대면서 함부로 폭로하는 노출증 작가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중 인물들은 작가의 육체와 정신세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하면, (엘리엇이 내용을 완전히 뽑아내는 힘겨운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레몬 짜기 학파’라고 했고, 영미 비평계에서는 ‘자세히 읽기’ 스타일이라고 했던) 신비평에서 말하는 작가와 작품이 완전히 분리 독립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작품은 작가에게 환원될 수 있을까? 또는 작가가 작품에 환원될 수 있을까? 독자는 그 인물 (특히 건전하고 정직하며 의지가 굳고 자기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긍정적 인물인 김규현)만의 독특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의 관점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자아의 심연까지 들여다 볼 수 있을까? 그건 독자가 그 인물과 뗄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강렬한 감정에 의해서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정신이 일체화하는 경우에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독자는 작품 속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내용 (contents)과 형식 (form)의 (불안과 내적 긴장을 유발하는) 대립, 불일치, 부조화를 혹은 (질서, 조정, 총체적 완성을 의미하는) 조화를 추구했는가? 문학에서 우선하는 것은 내용인가 아니면 형식인가. 형식이 없는 내용은 불가능한 것이고 내용이 없는 형식은 무의미하다. 그것들은 서로 철저히 융합 용해되어야 하지만 극단적으로 상충하고 반목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형식은 언어 파괴적인 초현실주의적 또는 표현주의적 문체일지라도 글에서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 불쑥 튀어나온 불필요한 장식용 돌덩이가 아니다.
여기서 문체는 내용이 아니라 내용을 담는 형식, 즉 형식과 관련되는 문학적 작문의 면모라고 할 수 있다. 문체에 관해서는 ‘문체는 곧 사람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우는 낭만주의 문체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구조주의 비평가들의 문체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소설의 형식에서 관습적 소설 쓰기를 거부한 혁명적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와 「피네건의 경야」이다. 그 후에는 명백한 플롯의 부재, 산만한 에피소드, 어휘나 구두법, 문장을 실험한 반소설 anti-roman이 있다. ― 한용환 저, 「소설학 사전」 참조.
나는 언제나 삶에서나 작품 속에서 카오스가 아니라 코스모스적 질서를, 리듬을, 휴식을 추구하지만 그 어느 것도 자신할 수 없다. 일종의 의심, 집착, 광기에 사로잡혀서 끊임없이 수정하고 수정하지만 말이다. (실패에 굴복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그런데 내용과 주제의 수호성인은 도스토옙스키이고 형식과 문학성의 수호성인은 (독자의 정서적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극도로 심미적이고 정교한 문체를 쓰는, 또한 문체의 선택에는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있다고 보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보코프는 도스토옙스키를 이류 작가로 평가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191~262면 참조).
나는 그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는 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어가 모국어이다. 그는 러시아어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평론을 썼다. 그러니까 누구보다도 (완벽주의로 소문이 난 작가이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원문으로 읽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해석, 재해석해서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독자적인 관점이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짜르시대 암흑처럼 어두운 러시아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는 (서구 문명과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멸시한 지독한 국수주의자로서) 너무나 러시아적 작가이다. 게다가 간질병 환자였고 고질적인 도박벽과 편집증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똑같은 음침한 주제를 가지고 거친 문장으로 끊임없이 지겹게 반복한다 (라이트모티프). 그 주제는 미치거나 정신질환을 앓거나 신경질적이고 가학적 취향을 가진 병적인 인물들이 출몰하는 스토리 속에 억지로 욱여넣어져서 너무 설익은 채로 과장되게 드러나 있다.
그는 당초부터 러시아 민족주의자들, 세기 말의 정신의학자, 임상 심리학자, 범죄인류학자, 급진적 비평가, 모더니스트, 그 후에는 (외국의)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과 번역가들이 절대적으로 추종하면서 너무 과대 평가 됐다. (19세기 말, 그 당시는 정신과학, 범죄인류학, 임상심리학 발전의 초기 단계로 검증된 확고한 이론이 정립되기 전이었으므로 낭설에 가까운 온갖 가설이 난무했었다.)
그에 대한 과도한 평가는 문학 비평에 있어서 관성의 법칙 또는 타성의 법칙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터무니없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용과 형식의 조화, 균형, 중용을 추구한 작가는 누구일까. 나는 두말할 것 없이 톨스토이를 꼽고 싶다. 그는 문학의 기법이건 주제와 내용이건 간에 문학 역사에서 최고의 작가이다. 주제는 심오하고 방대한 스토리는 엄밀한 역사적 실재를 토대로 정교한 플롯에 의해 확고부동하게 짜여있다. 그의 문체는 물이 흐르는 듯한 리듬감과 생동감 때문에 내용과 상관없이 즐거움을 선사한다. 주제는 명확하지만 플롯 속에 녹아있다. 그래서 탁월한 문학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연구 조사와 참고 문헌.
몇천 페이지에 달하는 수많은 자료 중에서 무엇을 포함시키고 무엇을 제외시킬 것인가. 이야기에서 ‘말해진 것’보다는 ‘말해지지 않은 것’ 혹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창의적 선택의 어려움.
창조적 한계.

의식의 흐름 (또는 생각의 흐름)은 내적 대화이다.
의식의 분열
야누스의 두 얼굴.
Leitmotiv.
Storytelling animal. Homo fictus.
Text. Subtext. Intertext.

오직 진실을 말해야 하는 작가의 책임. 3인칭 전지적 시점의 소설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작가란 자신의 이야기와 주제에 대해서 신과 같은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나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에서처럼) 시적 감흥과 삶의 지혜, 도덕률이 가득한 성서와 쿠란, 신화와 전설, 섬광처럼 전율케 하는 경구, 금언, 시들을 가끔 원문 그대로 또는 거기서 의미를 얻고 그 핵심 단어들을 따온 경우 이들 문장은 특별히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다.
재재재 수정판은 아직 종이책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종이책으로 출판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최신 버전은 언제나 블로그에 실려 있다.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2022년 10월
작성일:2022-10-11 11:58:48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