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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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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사하라」의 ) 에필로그 ― 2010년 봄, 벌교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10-11 12:00:51
조회수
307
(장편소설 「사하라」의 ) 에필로그 ― 2010년 봄, 벌교

나는 살아생전에 바람둥이 산부인과 의사와 심현숙의 만남과 열렬한 사랑 혹은 육체적 사랑, 배신과 결별의 과정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런데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대담한 심현숙이 그런 꾀죄죄한 얼치기 인간한테 당했다는 게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혹시 뛰는 여자…… 나는 남자……
그리고 이제서야 손희승이 진즉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 길이 없었지 않았는가.
내가 죽은 지 10년 후 그녀 역시 나이 들고 철이 든 후 벌교의 내 무덤으로 찾아왔다. 내 무덤은 너무나 평범해서 망주석이나 동자석, 장명등, 곡장, 비석 같은 것은 세워져 있지 않다. 봉분 앞에 작은 상석만 있을 뿐이다. 그녀는 상석에 화사한 꽃바구니를 올려놓고 큰절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 자초지종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한 줌 하얀 뼈만 남아서 영원히 사막에 묻히기를 바랐다. 내가 죽는다면 그곳은 사막이어야 했다. 사막은 신성했고 신이 살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몰아의 경지에서 신을 환희로 포옹하는 황홀경을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신은 나에게 현현하지 않았다. 사막의 빛이 너무 강렬해서 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거기에 있고 싶었다. 황무지에도 온갖 생명이 넘치는 날이 올 것 아닌가.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만발하고 새가 날고 짐승이 뛰어다닐 것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마 아득한 훗날이 될 것이다.
나는 몰아의 경지에서 평생 동안 나를 짓눌렀던 상처를 마침내 치유했다. 사막이 내 상처를 어루만져 준 거였다. 엄청난 햇살은 생명의 빛이었다. 내 마음속에서 때로는 격렬하게 싸우며 대립했던 자아와 또 다른 자아가 마침내 화해를 했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정말 짧은 순간이지만 생전 처음 커다란 행복을 맛보았다.
인간은 삶의 지혜에 대한 깨어남 또는 깨달음을 통해서 자신의 신을 발견하고 자신의 신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 보면 무상 無相 無常 無想 無償 이라는 신적 경지에서 나는 오히려 신은 간단히 말할 수 없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형언할 수 없다. 신은 모른다. 혹은 신은 알 수 없다. 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회사는…… 내가 젊음을 바쳐 봉사했던 우리 회사는 담쟁이넝쿨이 무성한 회사 건물의 앞뜰에서 새삼스럽게 회사장으로 장례식까지 치러주었다. 그건 회장님이 나를 무척 아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날 회장님은 염치불구하고 무척 많이 울었다.
회장님은 세심하게 배려했다. 무거운 장송곡 대신 내가 좋아했던 샹송을, 아프리카 음악을 들려주었으니까. 조문객들은 생뚱맞다고 어리둥절했겠지만.
그들이 나를 벌교의 선산으로 데리고 왔다.
그게 우리 관습이고 전통이니까 어쩌겠는가.
어린 시절 추억이 어린 바닷가로.
아버지와 동생이 묻힌 남쪽 바다로.
순천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선산으로.
집안 당숙이 되는 아저씨가 돌봐주는 선산 묘역에는 증조부와 증조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 아버지와 동생의 가묘, 어머니의 묘소가 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한 세대가 지나서 처음 벌교에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련한 추억이었다. 경전선 완행 열차, 열차가 정차하는 벌교역 역사, 벌교 소화다리, 벌교 천변의 작은 언덕과 길섶에 무수히 피어있는 붉은 상사화, 강 하구의 갈대밭과 철새들, 여자만 갯벌, 득랑만 방조제, 세 칸짜리 무지개 다리인 벌교 홍교, 벌교 버스 정류장의 풀빵 아저씨가 생각난다. 긴 여름날이면 어머니, 동생과 함께 바닷가 뻘밭에서 밀물이 들어오는지도 모르고 늦게까지 조개를 캐고 낙지를 잡던 일 - 그때 바다를 빠져나오느라고 혼비백산했었지. 어머니가 조개와 산낙지, 무, 대파, 고추를 넣어 시원하게 끓은 국물 맛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버지와 동생이 죽기 전까지는 가난했지만 그런대로 행복했었다.
그녀는 그때 술 한 잔을 봉분에 뿌리고 나서 자신도 한 잔을 단숨에 꿀꺽 삼켰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 좋아했던 독한 술이지. 나도 당신 때문에 독한 술을 마시게 되었지만. 이제는 약한 거는 너무 싱거워서 마실 수가 없어.
당신한테 고백해야만 하겠지.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말이야, 하여간에 말을 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내 속이 풀릴 거거든.
그런데 당신이 죽고 나서 10년이 훌쩍 흘러갔지.
그 10년 동안에? 내 인생이 그렇고 그랬었지.
당신은 사막과 태양의 열렬한 숭배자였지. 거기는 당신의 지성소였던 거야. 나는 믿고 있어. 당신은 너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쯤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있겠지.”
그녀는 처음에는 히스테리에 빠진 것처럼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차츰 정신을 차렸다.
나는 그때 멀쩡하게 (또는 온전하게) 살아있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그리고 그녀를, 심현숙을 이해했고, 연민을 느끼고 사랑을 느꼈다. 그러니까 조금도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지나간 일을, 오래전의 일을 새삼스럽게 꺼내 이러쿵저러쿵 따져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간은 참으로 좋은 약이다.
그날은 아침까지만 해도 남녘에 가녀린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지난밤에는 제법 천둥이 치면서 한동안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였다. 오랜 봄 가뭄 끝에 내리는 단비였다. 농부들은 봄 농사 준비에 분주하였다. 정오를 지나면서부터 하늘은 맑게 개어서 부드러운 봄 햇살이 온 산천과 들녘을 두루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요즈음도 골프를 많이 치는지 햇빛에 적당히 그을려서 여전히 보기 좋은 얼굴로 건강해 보였다. 그리고 여섯,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예쁜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그녀를 쏙 빼다 닮았다. 아이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차서 명랑했고 스스럼없이 묘지 주위를 깡충거렸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엄마하고 나 사이에 비밀인 거야?”
“얘는…… 그렇다니까.”
그녀가 재혼한 것인가? 그러나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그녀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한사코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애는 너무 귀여워서 꼭 안아주고 싶다. 마치 나의 딸인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딸이라면 내 딸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녀와 나는 정식으로 이혼한 적이 없으니 내가 죽은 후 그녀는 미망인으로 상속인이었다.
그 어린 애를 보는 순간 그때 우리는 진정한 화해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생명력이고 아름다움의 상징인 그 어린애는 우리의 딸이고 미래의 희망이니까.

우리들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탐욕과 쾌락은 어쩔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이를 탓할 수 있으랴. 내 자신이 부끄럽다. 그리고 미안하다.
삶을 배우려면 일생이 걸리니까.
나는 아주 일찍부터 내 인생역정에서 끊임없이 고통을 겪어야만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금욕의 서약’같은 거였다. 그래서 인간이 탐익하는 쾌락 혹은 유희를 멀리 해야만 한다는 자기 파괴적인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버렸다.
그 뿌리 깊은 원죄 의식 때문에 인간의 생명의 원천인 쾌락과 욕망, 즐거움을 거부하였으니. 나는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다.
나는 아무튼 남은 생애 동안 그녀가 인생을 즐기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다만 딸을 잘 키워야 할 것이다.
그녀가 하소연하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날 이해해주다니……. 당신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특별한 감정을 가졌었지. 다른 사람들과는 확실히 달랐어. 약간 머뭇거리고 서툴렀거든.
하지만 작은 메모지에 빠른 속도로 나의 캐리커처를 우스광스럽지만 아름답게 그렸어. 그래서 홀딱 넘어갔다니까.
당신이 살아있었다면 벌써 57살이 되는군. 그때 살았더라면 당신은 무척 강인하니까 100살까지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회사에서는 계속 올라가서 틀림없이 대표이사가 되었을 거라구요. 당신이 올라가기 싫어해도 어쩔 수 없이 올라갔겠지. 회사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라구.
사막과 아프리카 여행, 그 여행은 내가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건 당신만의 여행이었지. 오직 당신 혼자서 가야만 하는 여행. 누구도 함께 갈 수 없는……. 나는 외로웠어. 너무 외로웠다니까. 나는 독자적인 삶을 완전히 포기하고 종속된 삶을 살 수는 없었어. 나는 어떻게 생각해도 독립적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때 당신의 시체를 찾으려고 타만라세트에 갈 수는 없었어. 그리고 회사에서 장례식을 할 때도 가지 않았어. 내가 그때 남몰래 눈이 빠지도록 서럽게 울기는 했지만…… . 무슨 염치로 거기에 갈 수 있었겠어. 나도 인간으로서 자존심이 남아있었지.
그 도시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아주 매혹시켰어. 멀리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서 온 이국적인 이름……
나는 아주 일찍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예술을 포기했어. 그 후에는 딜레탕트 축에도 낄 수 없었지. 완전히 속물이 되었으니까. 당신은 건축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지. 그래서 유명한 건축가가 된 거지. 하지만 돌이켜보면 당신의 인생역정은 한편의 숭고한 예술이었어. 당신은 승리했으니까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 예술가의 열정이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지.
진정한 예술가야. 진정한…… 난 당신한테 언제나 열등감이랄까 패배감을 느꼈던 거지.
나는 마음속으로 당신을 의식하면서 자아 박탈감 같은 감정을 느껴야 했어. 그게 날 자포자기하게 만들었을 거야.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반항하고 싶었을 거야. 지금 내가 변명하는 게 아냐…… 그렇다니까…….
그렇지만…… 당신의 진짜 모습은 무엇일까?
진실을 말하자면…… 당신은 누구든지 자기 일에 간섭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했었지. 어린애처럼 반사적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는 거야. 너무 쉽게 상처를 입는 사람이었어.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서 환심을 사려고 한단 말이지. 그게 모순 아니고 뭐겠어?
왜? 강렬한 분노를 품고 있으면서 그걸 폭발시키지 못했던 거야. 그게 바로 고통의 원인인데 말이야. 왜? 폭력적일 수 없었던 거야. 그랬으면 나도 그걸 감수했을 거라고. 그때 당신이 날 마구 때려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니까.
가끔 당신이 보고 싶으면 내려올게. 워낙 거리가 멀어서 자주 올 수는 없지만…….
지금쯤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당신은 땅속에 있으면서도 그녀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겠지. 그렇게도 사랑했으니까.
그 사진 기자는 이 년 전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죽었어. 여자인데 용감하게 죽었지.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거의 자살행위였어. 그 여자는 신문사에 있다가 프리랜서가 된다고 뛰쳐나왔다고 하더군.
그러니까 당신의 회사에서 무슨 잡지사로, 다시 신문사로 그렇게 옮긴 거지.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갔고. 누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아마 자신을 향해 증오에 차서 눈에 핏발이 선 군인들이 교차 사격을 하는 모습을 찍으려다가……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다는데……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당신은 날 끔찍이도 아껴주었던 보호자였지만 그녀에게로 마음이 가버린 배신자였지. 나는 배신감, 질투, 시기심, 복수심 때문에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던 거야.
그 배신감을 삭이는 데 십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을 거야.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오해했을지도 모르지. 당신은 여자를 의식적으로 두려워하니까. 내가 처음 만났을 때 그 때문에 끌린 거지만……. 왜?! 여자가 접근하면 바보처럼 도망가는 거야. 모르긴 해도…… 그 여자 역시 하염없이 짝사랑했을 것 같네.
그때는 내 몸속으로 지금 들어오는 게 누구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지. 정체 모를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니면 그게 김규현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몰라.
나는 그때 숨을 헐떡이면서도 깜짝 놀라서 몸을 움츠렸던 거야. 남자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번들거리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지. 그래서 힘껏 밀쳐냈어.
그리고 내가 당신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지금도 꿈을 꾼단 말이지. 왜 자꾸 꿈속에 나타나는 거야. 그것도 몽설이었다고. 왜? 날 괴롭히려고? 복수하려고? 그러나 후회하진 않아. 어쩌겠어. 그리고 용서하라고 빌지도 않겠어. 부질없는 짓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결국 용서할 거야.
…… 그랬던 거야. 나는 당신이 사막으로 떠날 때마다 ‘빨리 돌아오세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세요. 보고 싶을 거예요. 너무 보고…… 꼭 돌아온다고 약속하세요. 약속을……’라고, 간절히 기도했었지.”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오! 사막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당신이 그걸 알 수 있을까? 거기라면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하지만 당신한테는 너무 미안하지. 내가 무슨 말을……. 스스로 경계선을 그었던 거야. 정신적인 경계선을…….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니까 그 신성불가침의 경계선을 넘은 적이 없었어. 나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던 거야. 사막에서 그 선택은 불가피했어. 나 혼자만 살아남을 수는 없었어. 도덕적 신념이 허락하지 않았지.
그건 말이야……, 바다에서 죽은 아버지와 동생에 대한…… 이브라함에 대한…… 그리고 당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었고 예의였기도 했지.”

봄비가 다시 굵은 비가 되어 내리면서 온 산천과 들녘을 촉촉하게 적실 것이다.
작성일:2022-10-11 12:00:51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