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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15)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09-29 15:17:16
조회수
344
작가의 말 (15)


1990년대는 격동의 20세기 마지막 10년간이었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있었고 수많은 크고 작은 군사 분쟁과 전쟁, 대공황을 겪었다. 6 · 25 전쟁 (내가 어린 시절 겪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과 베트남 전쟁 (국가의 지상명령에 의해 참전해야 했던)도 있었다.
나의 90년대는 서초동 시절의 시작이었다. 그들과 나는 ‘our contemporaries’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북 분단의 희생자이고 엄혹한 시대의 희생자이고 역사의 희생자이다.
(사회비평소설이면서 분단소설인) ‘배신 혹은 전향’은 대략 140,000자 (700매)로 긴 중편소설에 속한다. (주제를 명백하게 살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중간에 끊을 수 없어서 말이다.) 초고를 가지고 계속 수정하고 수정했다. 수정은 글쓰기의 본질적 특성이다. 하지만 어느 부분은 그냥 싹둑 삭제하고 싶다. 나는 가끔 단순화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무차별적으로 삭제하고 잘라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게 가능할까. 또다시 환원할 것이다. 끊임없이 시달릴 것이다. 수많은 망설임의 흔적을 지워야 한다.
나는 소설의 심연 속에서 한없이 헤매인다. 거기는 얽히고설킨 미로의 정글이다. 소설의 확고부동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그 자체 안에서 무한히 변화하면서 부단히 갱신한다면……. 그걸 작가가 아니라 진지한 독자가 확인할 수 있다면…….
나는 언제쯤 내 소설과 ‘놀라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완벽주의 작가는 아니다. 완벽, 완벽주의자. 완벽주의는 독이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고 해도 신 역시 결함투성이여서 완벽할 수 없다. 나는 그라포마니아 (graphomania. 濫書症 환자. 앞뒤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쓰고 싶어 하는 못 말리는 사람) 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라포마니는 그라포포비아 (graphophobia. 글쓰기 공포증)와는 정반대의 개념이고 글쓰기 사랑을 의미하는 그라포필리아 (graphophilia)와는 의미가 약간 닮아있다.
오랫동안 지극히 단순 명쾌한 법률 문서를 작성하고 학술 논문, 판례평석을 쓰는 버릇이 몸속 깊숙이 박혀 있어서 (그건 이제 작가에게 두말 할 것도 없이 독이 되었다) 열린 공간, 모호함, 이중 의미를 담아내는 글을 쓰는데 애를 먹고 있다.
나는 현재의 문단 트렌드와는 아주 동떨어지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엄밀한 리얼리티를 토대로 한 사회비평소설과 법률소설을 줄곧 쓰고 있다. 우울한 현실이다. 그렇지만 분단소설에는 관심이 많다. 분단소설은 결국 역사소설이다. 역사적 인물, 사건, 실재, 맥락 등을 조작, 왜곡, 부정, 무시, 오용, 남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작가란 무엇인가? 지금 여기 글 쓰는 자에게 무슨 보상이 따르는가? 나는 여전히 무명작가이다. 그래서 4권 분량의 초고를 진즉 완성했음에도 여러 출판사들은 모두 내 원고를 거두절미하고 거절했다. 안 팔리는 책을 왜 출판하겠는가? 책을 쓰는 일도 어렵지만 출판하는 일은 더욱 어렵다.
예술밖에 모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는 예술지상주의자들.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나는 산문주의자다. 사르트르는 시의 현실 참여적 기능을 부정하면서 참여 (engagement) 문학의 범위를 소설에 한정시켰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시는 너무 짧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참여문학과 관련하여 그것이 문학의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사르트르가 지적했었다) 문학이 자기 자율성을 명백히 의식하기에 이르지 못할 때, 그리고 일시적인 권력이나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하고 있을 때, 요약하건대 문학이 자기를 무조건적인 목적으로 보지 않고 어떤 수단으로 보고 있을 때, 그런 문학은 이미 독립성을 잃은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극단적인 예가 구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과 북한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에는 작가가 살았던 그 시대의 인간의 삶과 고통이 담겨 있다. 사실 모든 작품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작품에는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시대 정신, 맥락, 인물들의 경험과 기억 등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정치와 무관하다는 헛된 주장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물론 문학이 정치에 종속돼서는 안되지만 말이다. 정치, 사회, 경제와 문학은 절대 분리할 수 없다. 문학과 그것들은 결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학이 무슨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무언가에 대항하는 무기도 아니다. 문학은 무력하다. 문학은 시대를 짊어져야 할 책무나 의무가 없다. 작가에게 무슨 힘이 있단 말인가? 오늘날 문학은 순전히 작가 개인의 자기 표현일 뿐이다. 문학은 기록할 뿐이다. 그러면 어딘가에 가 닿을 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글을 쓰는 일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엄청나게 노동집약적이다. 그래서 자본이 필요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개인적 성취감을 제외한다면 어떠한 성과도 보장되지 않는다.
나는 관습적인 소설 쓰기를 거부한다. 소설 쓰기에 절대 법칙이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칙에는 무수한 예외가 존재한다.
내 고유 냉정한 스타일, 개념, 관점, 반론 (마침내 하나의 강력한 권력이 된 반론 자체에 대한 반론), 주제, 문체, 문학적 정체성, 나에게만 특유한 특징을 고수할 것이다.
독창성이라고……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상호 텍스트란 무엇인가? 그건 자기 중심주의적 태도, 자기 방어적 자세를 취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고독한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 없어서 일인칭 인칭대명사 ‘나’를 몹시 싫어하면서 말이다.
자신으로부터 도피해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파괴해야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소설과 (사회적으로 통찰력 있는 깊은 의미의) 주제에 대해서 절실하게 책임감을 느낀다. 작가만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은 마치 각인처럼 이야기와 주제 속에 흔적을 남기게 된다. 그렇지만 난해한 모호성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왜 나까지 소소한 것에 매달려야 할까?
문학 평론집 ‘최인훈의 광장 다시읽기’에도, 최근 나온 장편소설 ‘인간의 초상’에도 수십 매의 사진을 넣었다.
소설은 진실을 추구한다.
사진이야말로 명백한 증거물이다.



작성일:2022-09-29 15:17:16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