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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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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배신 혹은 전향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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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08-22 12:36:19
조회수
574
누구는 ‘부부란 한 손 속의 두 손가락이다. 죽을 때까지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북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과 남편을 남겨두고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남자는 동물적 생존 본능에 의거 살아남기 위해서 냉철하게 실리를 택했다. 그는 안기부에 적극 협조하고 그 대가로 형을 면제 받았으며, 여태껏 보호를 받으면서 재혼해 잘살고 있다.

최정남의 남파 임무 중 하나가 새로운 공작 대상자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최정남은 당시 재야 단체 기관지 「자주의 길」에 실린 정대연의 기고문과 김영환과 대담 논쟁 등을 분석해 나름대로 대학 총학생회장 출신인 정대연이 사상적 토대가 확고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포섭하기 위해 접촉한 것이다. 그런데 그냥 만나자고 하면 이상히 여길까봐 김영환의 이름을 판 것이다.
하지만 최정남은 김영환이 북한 공작망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전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은 철저히 단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직접 연결된 라인이 아니고는 서로 모른다. 남파 공작원들은 초대소에서 교육받을 때 서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대낮에도 우산을 쓰고 다니게 할 정도로 철저하다.
다만 안기부의 조사 과정에서 최정남은 ‘90년대 초 남조선 대학생 두 명이 (평양에) 왔다가 김일성을 만나고 간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라고만 진술했다. 그래서 국정원은 누가 다녀왔는지 단서를 포착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누군지 알아낼 수 없었다.
김영환 역시 최정남의 존재나 고영복 교수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알 수가 없었다. 당시 고영복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일부의 오해, 즉 김영환이 아니라) 이북 억양의 이원태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었다. 안기부는 그를 잡지 못했다. 다만 고정간첩망 (고첩망)의 일원이라고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발신지 추적이 되는 전화와 안되는 전화가 있었다, 지금은 모든 전화가 다 발신지 추적이 되지만. 그 전화는 당시 발신지 추적이 안 되는 전화였다. 그래서 추적에 실패했다.
하지만 최정남은 안기부의 조사 과정에서, “북한에서 간첩 교육을 받을 때 담당 과장인 윤택림으로부터 ‘1980년대 후반 동남아인으로 위장한 부부간첩 1개 조가 남한에 완벽하게 합법 침투한 후 자신들의 국적을 세탁한 나라의 음식점을 내고 그 나라 대사관으로부터 개업식 축하도 받는 등 활동하다가 1992년 북한 공작원 이선실 사건이 터지자 살던 집도 버리고 급거 복귀한 후 지금은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리고 1999년 8월 김경환을 수사하던 중에 1990년 1월경 말레이시아 화교로 위장한 남파 간첩 진운방에게 포섭됐었다는 진술을 얻어내고, 원진우의 사진을 김경환과 하영옥에게 제시하여 원진우가 진운방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런데 여수 앞바다에서 격침당한 반잠수정 속 원진우는 남한의 실존 인물인 원진우의 신원 사항을 도용하여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사용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김영환은 1997년 10월 18일 중국으로 출국했다. 최정남을 만난 정대연이 기자회견 (10월21일)을 하기 전이다. 중국에서 무역업을 하는 처를 만나러 간 것이다. 그 전에도 처를 만나러 간 적이 있고 처는 그 당시 중국에서 사업을 했다. 그런데 정대연이 기자회견에서 ‘최정남이 김영환의 소개로 왔다면서 북한에 함께 가자고 했다’고 밝히자 간첩 행위, 민혁당 등 자신의 과거 행적이 드러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귀국하지 못하고 계속 중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이다.

최정남 사건을 계기로 그 당시 안기부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1월 21일이다)가 입수한 김영환의 대북 연계 혐의를 입증하는 단서는「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라는 난수 해독용 장편 소설이었다.
안기부는 최정남이 체포되고 나서 김영환이 자기 집에 있는 책을 없애라고 연락한 사실을 감청 등 여러 수단과 방법을 통해 알아냈다. 안기부는 압수수색 영장을 발급받아서 김영환 집에 있는 수많은 책 중에서 그 책을 찾아낸 것이다. 그러자 김영환은 그 책을 압수해 간 사실을 알고 안기부가 단서를 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안기부는 그 책이 난수 해독용 책이라고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난수를 풀지 못했다.
김영환이 말했다. “조앤 그린버그의 소설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는 여느 집 서재에 꽂혀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한 350페이지짜리 소설책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책이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간첩들이 사이에는 주고받을 메시지가 있을 때 숫자를 사용하여 암호화하는데, 이를 해독하려면 서로 간에 약속된 책이나 잡지가 필요하다. 나에게는 북한과 약속된 해독의 키워드가 바로 「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였다. 부부간첩단 사건이 터지고 나서 국정원이 우리 집을 압수수색 했을 때에 그 책을 가져갔는데, 많은 책들 가운데 그것이 난수표 해독용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1999년, 반성문과 공소보류
1999년은 단기 4332년이고 불기 2543년인 해였다.
2월 12일 미국 상원은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안을 부결시켰다.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서울에서 ‘마이클과 친구들’이라는 자선 공연을 개최했다. 6월 30일 경기도 화성군 소재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사건으로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 4명 등 23명이 숨졌다. 7월 16일 탈옥수 신창원이 2년 5개월 만에 검거되었다. 12월 31일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을 퇴임했다. 10월 29일 KBO 리그에서 한화이글스가 창단 이래 처음으로 우승을 했다. (그 이후 한화이글스는 다시 우승을 해본 일이 없고 거의 해마다 꼴찌를 달리고 있다.)
김영환은 7월 29일 귀국해서 구속되기 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전향 여부에 대해 국정원의 심사를 받았다. 국정원은 8월 9일부터 16일까지 네 번 심사했다. 한 번은 시내 대공상담실에서, 세 번은 호텔에서 했는데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첫날에는 ‘본인 것’만 얘기하겠다고 하면서 이러저러한 것을 진술했다. 결국 1989년부터 북쪽 간첩이었다는 사실, 밀입북해서 김일성을 만난 사실까지 진술했다.
심사과정에서 국정원 수사관이 대화 내용을 녹취했다.
김영환은 네 번째 심사를 마치고 8월 16일 돌연「말」지를 찾아가 ‘밀입북한 사실이 없는데 국정원이 간첩 사건을 조작하려 한다’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고 홍콩으로 몰래 출국을 시도했다.
「말」지 1999년 9월호는 「김영환 긴급 인터뷰 - 『국정원, 대규모 간첩단 사건 조작 위해 나를 회유 협박』」이란 기사를 언론사 가운데 최초로 보도했다. 이 인터뷰에서 김영환은 ‘나는 1991년에 북한에 간 적이 없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난 적이 없다. 국정원이 내가 수괴인 간첩단 사건을 조사 중이다. 「시대정신」편집팀 등 연루자는 수백 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1999년 8월 18일 오후 6시 35분 김포공항에서 대한항공 605편을 타고 홍콩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 전날 어머니에게 “어머니 제 내복과 돈 좀 가지고 김포공항으로 와 주십시오”라고 전화를 했다. 어머니는 그 전화를 받고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아들이 김포공항으로 오라는 것은 국외 탈출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청바지에 티셔츠, 운동모자를 쓰고 배낭 하나를 매고 있었다. 비행기 표는 어머니가 공항에 도착해 이미 돈을 지불했다. 시간이 남은 어머니와 아들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그가 말했다.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도와준 분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합니다. 그 사람들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소재도 모르고, 어디서 뭔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그들의 활동을 확인시켜줄 수가 있겠습니까.”
국정원 수사관들은 김영환이 출국 직전 긴급체포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인 8월 19일 오전 9시 서울 충무로에 있는 인터넷 서점 ‘알라딘’ 사무실에서 이 회사 대표 조유식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고, 같은 날 밤 11시경 서울 신림동 길에서 하영옥을 긴급 체포했고, 8월 20일 모 여대 시간 강사 심재춘을 체포했고, 9월 4일 말지 기자 김경환 (그 당시 정치팀장)을 집에서 체포했다.
그들을 체포 연행해서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한 것이다.
국정원 수사관들은 국정원법에 의해 특별사법경찰관의 지위를 갖는다. 피의자를 신문하여 자백을 받을 수 있는 권한이 있고 (그들은 자백은 증거의 왕이니까 자백을 받기 위해 온갖 가혹행위와 모진 고문을 했다), 그들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일정한 요건 하에 공판장에서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유죄 판결의 근거가 된다.
이 대화는 8월 말쯤 어느 날 국정원 조사실에서 정식으로 조서를 작성하기 전 오고 간 문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가 호텔에서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우리끼리 하는 거요. 다시 말하면 조서에 정식 기재되는 것이 아니란 말이요. 여기서 잠시나마 당신을 북한식으로 선생이니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아시오. 그건 아주 어색하지.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는데…… 제이 인칭대명사인 ‘당신’이라는 말은 아주 아름답지.
김영환 : 저는 상관 없습니다. 험한 욕지거리도 감지덕지한 데 말이죠.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는 당신이 중국에서 귀국했지만 열흘 동안이나 자유롭게 풀어주었어.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8월 9일인데 장소는 당신과 상의해서 조사실이 아니라 대공 상담실에서 만난 거야.
그것도 당신이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고 해서 대한극장 매표소 앞에서 만나 대공 상담실로 모시고 간 거란 말이지.
김영환 : 귀국하자마자 즉시 연행해서 조사하지 않고 풀어주어서 의아하게 생각하긴 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두 번째부터는 서울 모 호텔에서 만난 거야. 그러니까 간첩 용의자로 조사하기 위해서 만난 게 아니라 전향과 관련해서 심사하려고 한 거지. 그래서 농담도 하고 웃으면서 아주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눴단 말이지. 점심시간 때 인근 식당에 가서 돼지고기를 안주로 술을 한잔하고 칼국수를 먹었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당신에게 술을 권했는데 먹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두 잔을 먹었어.
알고 보니까 당신은 술을 좋아하진 않더구만.
김영환 : 그랬었지요.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을 어떻게 처리할지…… 긴가민가했지. 위에서도 딱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 그러니까 당신을 체포 구속할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해외로 도망치려고 한 거야.
대단한 귀빈이나 되는 것처럼 호텔에서 모시고 가서 조사가 아니라 그냥 대화를 나눴는데 말이야.
김영환 : 무슨 이용가치가 있었겠죠. 북쪽에 뭔가 보여주려고 말입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오버하지 말라고. 95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였거든. 그걸 분석하면서 우리도 헷갈렸단 말이지. 위장용인가 해서……
우리는 당신이 민혁당 해체를 선언한 97년 7월을 분수령으로해서 그 전에는 약간 흔들렸고, 그 후에는 완전히 전향한 것으로 판단했었지만.
아마 북에서도 반신반의했겠지. 당황했을 거야. 신 같은 존재로서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주석까지 나서서 두 번씩이나 특별히 만나주고 격려까지 했는데 말이야.
전향한 남파 간첩들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기에게 인사하는 전설적인 여간첩 이선실을 몰라보고 ‘저 여편네가 누구냐?’고 했다지만…… 당신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고 있었고 높이 평가했다고 했어. ‘우리 사회과학원 학자들보다 낫다’고 말했다지.
오죽했으면 김 주석이 당신에게 ‘선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했을까.
김일성은 황인오는 만나주지도 않았거든.
북한 입장에서는 당신은 그렇게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수성가한 영웅적 존재였던 거야.
김영환 : 그쪽에서 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너무 과분하게 평가한 겁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도 놀랐으니까. 설마 했지…… 어떻게…… 그렇게까지…… 진짜 간첩으로 변신까지 할 수 있었는지.
김영환 : 죄송합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 소설책 말이야. 그걸 압수하고 나서 어느 정도 단서를 잡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어. 최정남이 당신을 들먹였지만 그때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어. 그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어. 그저 이름 정도만 알고 있더라고.
그런데 당신은 중국에 머물면서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난 것으로 지레 겁먹고 벌벌 떨었단 말이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워낙 큰 죄를 지었으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김영환 : 그 소설을 진즉 없앴어야 하는데 제가 실수한 거죠.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은 처음에는 그 소설책에 대해서 메모같은 것을 써서 넣어두는 책이라고 얼버부리려 했어. 원문 제목이 I never promised you a rose garden 이었어. 그 소설은 조앤 그린버그의 메디컬 서스펜스 소설이라고 소개되었지. 유대계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정신분열증이라는 병의 증상과 치료과정을 통찰력 있게 묘사하고 있었어.
우리는 당초에는 그게 난수 해독용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다만 책 제목이 너무 어려웠거든.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 그래서 갑자기 의심한 거야. 하지만 노련한 암호 해독 전문가들도 해독할 수 없었어.
김영환 : 제가 속았지요. 뭐. 국정원에서 우리가 다 안다고 추궁하니까 저로서는 난수를 푸는 책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죠. 그 막강한 국정원이 안다고 하니까 믿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저는 그 소설책을 들춰가며 난수를 해독하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까지 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은 총 98회 지령을 받았어. 그 중에서 26회는 평양에 가기 전에 받았고 72회는 그 후에 받았는데…… 마지막 지령이 내려온 게 작년 6월이었어. 당신이 알려준 대로 그 소설책을 이용해서 모든 지령 내용을 확인한 거야.
그리고 나서 당신은 남파 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당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조유식과 함께 북한에 갔다 온 사실, 김일성을 두 번 만났단 사실도 다 털어놓았지.
김영환 : 그때는 모든 걸 털어놓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모진 고문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었을 겁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를 이용해 먹으려고 한 거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어. 그렇게 잘 해줬는데…… 뭐 국정원이 간첩 사건을 조작하려고 한다고……?
김영환 : 제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엄혹한 남북 분단 상황에서 이데올로기 갈등을 겪으며 남과 북으로부터 동시에 버림받은 한 청년의 갈등과 고뇌라고 봐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특별사법경찰관 : 「말」지는 좌파의 입이긴 하지만…… 우리는 「말」지에 나온 기사는 거의 외울 수 있어. 철저히 분석하거든. 거기에 우리가 모르는 의외로 많은 정보가 숨어있지. 「말」지 기자를 한 조유식은 91년 11월호에 ‘한국군의 신국방 전략과 군비 증강’, 92년 9월호에 ‘지금도 미 핵 잠수함이 들어온다’, 94년 12월호에 ‘북한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성자이대로 떠오르고 있다’, 96년 6월호에는 ‘북한군의 판문점 진입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등 대북 보고용 기사를 썼단 말이지.
그러니까…… 북쪽에서는 너무 노골적으로 활동하자 ‘신분이 노출될지도 모르니 보안상 조심하라’고 지령을 내려보내기도 했단 말이지.
김영환 : 제 입장을 이해 해 주십시오.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의 지위는 뭐야?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거야? 대충만 이야기 해 보시지.
김영환 : 당 강령의 핵심은 수령론과 민주기지론, 대동단결론, 반종파 투쟁론, 통일전선론 등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령론에 의하면 수령의 지위는 확고하고 수령의 지시 명령에 의해서 조직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합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어련하겠어……
김영환 :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어서 빨리 도망치라는 메시지겠지.
수령이라면…… 그들을 설득해서 자수시켜야…… 그래야만 그들도 광명을 찾을 거 아닌가. 자기 혼자만 살아남으려고 하면 그건 비겁한 거야.
김영환 : 탈북자들을 만나서 북한의 가혹한 현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제가 평양에서는 불과 17일 동안 체류했습니다. 그때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거죠. 정치범 수용소 말입니다. 평양 방송에서는 ‘특별독재구역’이라고 하더군요. 특히 요덕수용소를 경험하고 탈북했던 강철환씨와 안혁씨의 증언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렇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지. 그런데 말이야…… 황장엽 선생을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나? 우리는 그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만 털어놓고…… 정작 알고 싶은 것은 말을 안 해. 잘 협조하지 않고 자기 고집만 대단하지.
김영환 : 제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런데도……?
김영환 :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까요.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를 우습게 본 거야. 옛날이 그립지.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때는 무조건 개 패듯 두들겨 팼으면 되니까.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을 해도 되고.
매에는 장사 없다고 그쯤 되면 다 불었어. 우리가 묻지 않는 것도 스스로 만들어서 진술했어.
김영환 : 지금은 아니라고요? 국민들이 믿을까요?
‘개 버릇 남 주나’라는 속담을 아시겠죠. 저에게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지요. 안기부이건…… 국정원이건…… 공포의 대상이지요.
그 옛날에 얼마나 지독하게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까. 그것도 47일 동안이나 말이죠. 사건을 조작하고…… 억지 자백을 받아내려고……
특별사법경찰관 : 그건 옛날 일이라니까. 지금은 아니야.
진술 거부권을 행사할 건가? 그건 시간만 잡아먹는단 말이야. 우리는 호텔에서 당신의 이미 말한 거 죄다 녹음해놨어.
그것도 비밀 녹음한 게 아니라 당신의 동의 하에 녹음한 거란 말이야.
숨소리나 기침 소리까지……
민변 변호사들이 도와주는데도 한계가 있을 거야. 소송은 결국 증거 싸움이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보물선이 있지. 거기에 모든 게 들어있거든.
그런데 말이야…… 보물선 때문에 하영옥은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지. 그래서 인정할 건 인정했어. 걔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김영환 : 제가 알 바 아니지요. 하영옥은 개성이 강하고 외골수예요.
특별사법경찰관 : 그렇게…… 무책임하게…… 지나가는 말투로 말해도 될까?
김영환 :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들은 1982년부터 둘도 없는 절친이었어.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당신 결혼식에도 참석 했을거고…… 함께 사진도 찍었겠지.
그런데 말이야…… 그 당시 당신은 틀림없이 북쪽 간첩이었단 말이지. 그것도 아주 거물이었어. 무슨 배짱으로 서울 한복판에서 그렇게 공개적으로…… 우리가 완전히 당한 거지.
김영환 : 저는 결혼할 나이가 돼서 결혼한 것뿐입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가 지난번에 자필 진술서를 좀 써달라고 요청했지. 당신에 대한 심사 결과를 윗선에 보고하려면 심사했다는 근거가 있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당신은 끝내 못 쓰겠다고 잡아뗐어. 그러면 일문일답식의 진술조서라도 남기자고 제의했지만 그것도 안 된다고 했지.
김영환 : 그랬었지요.
특별사법경찰관 : 우리가 그때 전향서건 준법 서약서건 형식을 차치하더라도 전향서를 쓰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어. 당신의 입장을 이해했으니까. 당신도 인정할 거야. 그렇지? 하지만 변신이건 전향이건 했다면 그것을 자필로 입증하는 절차는 있어야 했거든. 그게 우리의 원칙이야.
그런데…… 당신은 마지막으로 오늘 밤에 충분히 생각해보고 쓰더라도 내일 아침에 쓰겠다고 말했어. 그러고 나서 돌연 말지와 인터뷰를 한 거지.
핸드폰도 꺼버리고.
김영환 : 조직의 배신자가 되기 싫었습니다.
자기의 죄를 털어놓는 것도 어려운 판에 자신으로 인해 동지들까지 연루가 되니까 인간적으로 고민스러웠습니다. 전향과 배신은 별반 뚜렷한 차이가 없습니다. 그게 그거죠. 동전의 양면 같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은 사상적으로는 전향할 수 있습니다만 인간적으로는 배신하지 못하는 거죠. 자신의 칼로 동지들을 찌를 수는 없었습니다.
특별사법경찰관 : 그리고 한때는 둘도 없는 열렬한 혁명 동지였어. 닮은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룬다고 했는데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을 거라고. 혁명이라는 언어는 전율을 느낄 만큼 강렬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시적이란 말이지. 둘 다 혁명가로서 시인의 기질이 있을 거 같은데……
김영환 :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시와는 거리가 멀었죠.
하영옥은 엄청 수학을 잘해요.
특별사법경찰관 : 당신들이 헤어진 과정이 몹시 궁금하지. 왜 그랬을까? 찰떡 궁합이었는데…… 언제나 당신이 앞장섰고 그는 뒤를 따라다녔지만. 하여간에 당신은 그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잘 알고 있을 거야.
김영환 :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성인이 다 되어서 만났습니다. 이해타산으로 맺어진 단순한 지인 관계일 수도 있습니다. 속속들이 비밀의 속내를 다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거죠.
지금…… 어제 일처럼 너무나도 또렷하게 그날 일이 떠오르는군요. 우리는 격렬하게 논쟁을 했지요.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계속 침묵만 지키다가 도중에 나가버렸죠. 우리가 헤어질 때는 원수가 되어서 헤어졌어요. 그의 정당한 요구를 모두 거절했지요. 무슨 심보인지 오기가 발동했거든요. 솔직해야죠. 마지막까지 제가 가진 권력을 과시하려고 한 겁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미안하군요.
특별사법경찰관 : 이제는 별수가 없어. 중간에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끝까지 수사해서 기소 의견으로 송치하는 거지. 아마 10년쯤은 대전교도소에서 살아야 할걸. 거기에다 자격정지 10년이 붙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네 인생은 완전히 쫑나는 거야.
우리를 원망하지 말라고.
자업자득이니까.

국정원의 수사 결과 북한이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의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주사파 핵심 세력들을 포섭하여 조선노동당에 가입시킨 뒤 북한의 직접 지도를 받는 지하당을 구축하여 혁명 운동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서야 처음으로 민혁당의 실체가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 당시 김영환은 자신의 사상 전향 배경을 「말」지에도 공개했고 국정원에도 밝혔지만 서로 모순이 되는 대목이 있었다. 그런데 난수풀이용 그 책을 들이밀자 김영환은 ‘아차, 이게 아니구나’ 싶었던 모양이다. 보물선에서 나온 민혁당 관련 각종 문건이 수록된 3.5인치 플로피 디스켓과 CD, 간첩 원진우가 사용한 수첩과 전자 수첩 등에서 상세한 민혁당의 조직표까지 나오니까 위기감을 느낀 것이다. 자신을 따르던 조직원들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들을까 봐 고민했던 것이다. 그래서 김영환의 주장에 의하면 민혁당 관련자들에게 도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말」지를 찾아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국정원도 김영환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몰래 출국을 시도한 것이다.
김영환은 구속되고 나서 처음에는 자기도 괴롭다고 진술을 거부했다. 그러나 네 차례 심사 과정에서 만난 수사관들과 다시 만나자 ‘호텔에서 이미 다 까발렸는데 이제 와서 부인해 봐야 뭐하겠냐’며 「말」지에 거짓말하고 도망간 것에 대해 사과했다.
그런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구속 중에도 국정원 수사관한테는 다 진술해 놓고 가족이나 변호사한테는 진술을 강요당했지만 진술하지 않은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서 담당 변호사들도 구속 초기에는 국정원이 없는 사건을 조작하려 하는 것으로 오해했고 일부 언론은 고문 가능성을 제기했다. (「공작 2」 109~114쪽 참조)
국정원은 1999년 9월 김영환과 조유식이 사상 전향 의사를 밝히고 조사 과정에서 과거를 뉘우치고 관련 조직원의 자수를 적극 권유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서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공소보류 의견으로 구속 송치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7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도 공소보류를 결정하여 석방했다. (그들은 검찰로 구속 송치되어 1개월간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에서 검찰 조사를 받고 나서 공소보류 결정으로 석방되었던 것이다. 공소보류는 국가보안법 피의자에게만 적용되는 제도이다. 공소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보류해두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해당 범죄의 법률상 시효와 상관없이 2년이 지나면 공소권이 자연히 없어지고 만약 필요하다 생각되면 2년 안에 언제든지 기소할 수 있다.)
그리고 자진 출두하여 자수하고 반성문을 제출한 15명의 민혁당 당원들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서울지검에 일괄 불구속 송치하였고, 공안부는 이들에 대해 기소유예로 처리하였다.
그렇지만 체포된 후에도 끝까지 전향치 않았던 하영옥과 심재춘, 김경환에 대해서는 9월 20일 서울지검에 각각 구속 송치하였고, 그들은 대법원까지 올라가 재판을 받았다.
이석기 경기남부위원장은 1999년 민혁당 사건 당시 3년간 도피하다 2002년 5월 검거되어 2003년 3월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5개월 복역 후 2003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특사 때 공안사범으로는 유일하게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2005년 8월 15일 광복절 특사 때 복권되었다. 2012년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후보 2번으로 출마해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김영환은 그를 무시하는 투로 평가했다.
이석기는 민혁당 내에서 5~6위 정도의 서열을 갖고 있는 핵심인물이라고 소개하고 있던데 지하혁명당은 서열 같은 것을 정하지 않는다. 내가 중앙위원장이고 이석기가 지역위원장이지만 대중정당과 지하혁명당은 운영 시스템이 완전히 다르다. 점조직 형태로 운영되는 지하혁명당의 성격상 나는 이석기를 알아도 이석기는 나의 존재를 모르는 철저한 단선연계가 유지되었다. 나는 이석기를 개인적으로 만난 적조차 없다.
민혁당의 원류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NLPDR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 창립 세대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데, 다소 학구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했다. 경기남부 (민혁당의 지역조직 명칭은 경기남부였지만 통합진보당에서는 경기동부라고 하였다)의 투박하고 저돌적인 기질은 중앙에서 결정한 것은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김영환이 1999년경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반성문을 쓰려고 할 즈음 황장엽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때 황 선생은 반성문을 쓸 것을 적극 권유했다고 한다. 그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북한의 봉건왕조체제에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황 선생은 김영환에 대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김영환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김영환이 석방되고 난 후인 2000년부터 2010년 10월 황 선생이 사망할 때까지 150회 정도 교류했다.

김영환의 반성문 요지
저는 중고교 때부터 정부에 비판의식을 가져 대학에 들어와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가담하게 됐고 역사와 사회현상에 대한 명쾌한 해석을 내린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려 사회주의 학생운동에 빠져들면서 시위에 적극 나서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제가 4학년이던 85년부터 기존 학생운동이 민족자주나 반미문제에 소극적인 점에 불만을 갖고 반미운동을 도입했고 이는 학생운동의 대세로 됐습니다.
저는 강철서신 등의 글을 써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주사파라는 운동권 최대세력이 탄생했습니다.
그 후 체포돼 2년 정도 복역하고 나왔으며 89년 2월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남파공작원에 포섭돼 북과 연계를 맺고 91년 5월 밀입북,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92년 강철환 안혁 등 탈북자들의 증언은 북의 비참한 실상을 깨우쳐 줬습니다.
97년 2월 황장엽 비서가 망명하고 식량난으로 부한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 김정일 정권의 타도를 호소하고 민혁당 중앙위원회를 열어 해산 결정을 했습니다.
북한 동포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북한 인권 실상을 널리 알리고 북한을 민주화시키기 위해 모든 힘을 바치고 싶습니다.
99년 10월 4일
김영환

(민혁당을 설립해서 중앙위원장을 맡은 가장 주범격인) 김영환은 반성문을 쓰고나서 공소보류 처분을 받았으나 하영옥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다.
김영환은 반성문을 쓰고 전향하면서 오랫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과도한 강박 불안, 편집증에서 헤어날 수 있었던가? 그는 주체사상의 정립과 민주기지론에 입각해서 북한과 연계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실현하려는 욕망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좌절했고 심신이 피폐해지고 무기력해졌을 것이다. 삶의 원동력을 상실했고 삶의 의미 찾기에도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그런 일련의 과정에서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초월할 수 있는 정신적 면역력인 회복탄력성이 부재했을 것이다. 그에게 술과 담배, 중독성이 있는 약물 같은 위안물이 있었을까? 그 대신 내적 긴장감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과 깊이 있는 대화를 했을 것이다. (만약 자신과의 대화에 실패했다면 그가 아무리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하더라도 각종 공포증, 공황장애, 범불안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같은 것을 겪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전향한 김영환과 전향을 끝까지 거부한 하영옥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으로 평가할 순 없을 것이다. 하영옥이 전향을 하고 반성문을 썼다면 그 역시 공소보류로 석방됐을 것이다. 그 대신 8년 형을 선고 받고 4년을 복역했다. 왜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반성문 쓰는 게 뭐 대수라고? 바보 같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를 민족반역자로 매도할 수 있는가? 한 인간의 신념, 사상, 의지를 그런 식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대의 길을 가라. 남들은 뭐라고 하든 내버려 둬라. 누가 무슨 자격으로 그를 비난, 폄하 할 수 있는가?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하영옥은 통렬하게 논박했다. (이 기고문이 실릴 당시는 1999년 7월이었고 자신을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 관련자로 소개했다. 그러므로 이 글이 실제 쓰인 시점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영옥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1999년 8월 23일이었다. 그 당시 그는 37세였다.)
이런 취지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다음 많은 나날을 번민하며 지냈다. 정말 내가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결국 너와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마음은 괴롭고 머리는 무겁고 때로는 모든 것을 잊고 현실에서 벗어나 멀리 도망가 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 처음「월간조선」에 실린 너의 글을 보았을 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어찌할 줄을 모르다가 차츰 마음이 가라앉은 뒤에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 버린 너에 대한 강한 원망과 함께 마음 저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분노를 참기 어려워 괴로워했다. …… 그래 쓰자! 이미 엎질러진 물, 언제나 그래오지 않았던가. 너는 엎지르고, 나는 그 물에 옷을 더럽히고 살을 데이고 마음을 다치고. 좋다, 이번에는 종결짓자. 차라리 잘되지 않았는가? …… 어떤 행동을 하거나 입장을 표명할때 그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의 조언과 충고에 귀 기울이게. 자네는 항시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서 결론을 내린 다음에 형식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토론을 하고 일을 벌이곤 했네. 자네의 그 자기중심적인 행동 탓에 이미 나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받은 바 있네. …… 자네에게 여기서 매운 소리를 하나 해야겠네. 나는 그때 자네의 행동을 보고 자네가 소영웅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공부한 지 두세 달만에 어떻게 주체사상에 대한 팜플렛을 쓰고 한번 제대로 해보기도 못한 노동운동과 관련된 지도지침 같은 글을 쓸 수 있었겠는가. 스스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게나. …… “동지는 무슨 사건으로 잡혀 왔소” 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할 말이 없어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뭐 강철사건 관련자라고나 할까요” 하며 얼버무리던 것이 서대문 구치소에서의 내 모습이었다네. 생각해 보게나. 본때 있게 한번 일을 해 보겠다고 노동현장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아무런 일도 해 보지 못하고 자네하고 토론 몇 번 했다는 이유로 잡혀들어가 고문당하고 징역살이를 했으니 왜 억울하지 않았겠는가. …… 안기부 수사관들의 무차별 난타에 호흡이 끊겨 하마터면 아무도 모르게 죽을 뻔도 했다네. 병원에서 내 처참한 모습을 보며 누워있자니 너무나 기가 막혔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저질러진 일을. 나는 그때 이렇게 반성했네. ‘동지를 제대로 설득해서 민중적 관점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당한 일이다. 이것도 내 잘못이니 겸허히 반성하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자.’ …… 무엇을 하든 자기 주관에 빠져 이렇다 저렇다 고집스럽게 내세우고 자신을 반성할 줄은 모르고 온갖 논리를 갖다 대서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태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하는 법이네. …… 더 들어보게. 자네와 같이 이북정권에 대해 극단적인 비판, 반대의식을 가진 사람조차도 자네더러는 ‘간쟁이’라고 하더란 말일세. 그 말뜻이 무엇인지 자네는 잘 알 걸세. 경상도 말로 ‘간사스러운 놈’이라는 욕이라는 것을. …… 내가 이런 걸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자네에게 큰 타격이 될 줄은 알지만 밝힐 건 밝혀야겠네. 자네처럼 그토록 극단적으로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에게 돌아갈 말이 그런 말 말고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나. 게다가 극우세력이라고 자네를 좋게 볼 줄 아는가. 내가 보기론 절대 그렇지 않네. 자네에게 이용가치가 있을 때 이용하려고는 할지 몰라도 자네를 신뢰하지는 않을 걸세. …… 자네가 내 질문에 논리적으로 어떤 해명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이런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네. 즉 자네가 이런 주장을 요란하게 들고 나오는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것이네. 바로 이남의 지배세력, 그 중에서도 극우세력과 미국에 대해 나는 이렇게 변했으니 잘 좀 봐주십시오, 날 좀 믿어 주시오, 옛날의 김영환이 아닙니다’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속셈이 아닌가. 나는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되네. ……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네. 자네가 감히 “피와 눈물이 메마른 사람”어쩌고 하면서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 잘 분간을 못하는 사람’ 운운했는데 도대체 자네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인가. 똥 뀐 놈이 성낸다더니 정말로 딱 그쪽이 아닌가. …… 얼마 전 고문으로 출세한 정형근이라는 자가 한국을 대표하여 유엔 인권위에 참석하는 걸 보면서 ‘세상에 어찌 저럴 수가 있나’하고 분개했던 적이 있네. 정형근은 자네도 잘 알겠지. 바로 우리가 고문을 받던 그 시절에 수사책임자이며 고문의 실질적 지휘자였던 자가 아닌가. 그자가 이번에는 그의 그런 행각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방양균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는데 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니겠는가. …… 그 당시 자네의 얄팍한 공명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직접적인 경우만 해도 수십명에, 간접적인 경우까지 치면 수도 없이 많지 않은 그래도 그 사람들 모두 그 길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고 참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놓고 이제 와서 수많은 사람들의 등에다 칼을 꽂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행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피와 눈물이 메마른 사람” 운운하는 말이 입 밖에 나온단 말인가. …… 노동운동을 주제로 다룬 자네의 글은 그것에 대한 조사 연구가 거의 전무했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는가. 그 외에 다른 글들도 대부분 자주적인 연구라기보다는 자기의 독창적 연구인 것처럼 서술한 글들이 사실은 거의 다 ‘방송’에 나오는 것 아니었던가. 어떤가, 이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 이쯤에서 이 글의 결론을 내려야겠네. 자네는 그동안 소위 주사파의 대부니 뭐니 하면서 명성을 누려 왔네. 나를 비롯한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의 직접적인 관련자들은 너의 그 명성이 허명임을 아는 터라 자네의 행보에 대해 적잖이 우려하며 지내왔네. 우리도 나름대로 자네에게 지적도 하고 비판도 하곤 했지만 이미 허명에 사로잡힌 자네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았네. 그래도 같이 운동하던 사람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어서 우리는 참고 또 참아 왔네. 그 고통을 이미 진구형이 자신의 삶으로 웅변해 주고 있네.
(1997년 7월호「말」지에 실린 하영옥의 기고문 ‘네 멋대로 사는 건 좋지만 더 이상 운동을 팔지 말라’ 참조)


2020년, 에필로그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와 19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는 격동의 20세기 마지막 10년간이었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 있었고 수많은 크고 작은 군사 분쟁과 전쟁, 대공황을 겪었다. 6 · 25 전쟁 (내가 어린 시절 겪어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과 베트남 전쟁 (국가의 지상명령에 의해 참전해야 했던)도 있었다.
그들과 나는 ‘our contemporaries’이다. 하지만 그들은 남북 분단의 희생자이고 엄혹한 시대의 희생자이고 역사의 희생자이다.
지금 21세기 대명천지에 살면서 되돌아보면 그 시대 사건과 인물들은 기억에 떠오르지도 않는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지금과 그 시대는 격세지감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시대는 변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1987년 6월 항쟁에 의해 제5공화국이었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붕괴되었다. 제6공화국 헌법은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되었다. 제6공화국이 성립하면서 노태우 정권 (1988.2.25.~ 1993.2.24.), 김영삼 정권 (1993.2.25.~1998.2.24.), 김대중 정권 (1998.2.25.~2003.2.4.)으로 이어졌다. (제6공화국은 우리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지금까지 35년 이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만큼 정치 사회는 안정되고 경제도 발전해서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것이다. 잊을만하면 가끔 당리당략에 따르는 것으로 보이는 즉흥적인 헌법 개정 운운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경우 봉건세습왕조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김정일로 이어졌는데 그는 2011년 12월 17일 사망했다. (김정일은 傳記에 의하면 백두산 산꼭대기에서 태어났다. 그가 탄생하자 제비들이 하늘을 날며 환호했고, 그가 출생하던 순간에 무수한 별이 밤하늘을 밝혔고, 겨울이 봄이 되었으며, 무지개 두 개가 나란히 하늘을 수놓았다. 하지만 그의 집권 초기인 90년대 후반에 북한은 식량 기근으로 수십만 명이 아사한 ‘고난의 행군’을 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김정은으로 세습되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살아생전에 1995년을 ‘남북 통일사업 완수의 해’로 정했다. 그래서 남한의 일부 골수 주사파들은 ‘1995년 위원회’라는 조직까지 만들었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다행스럽게도 (?) 그 1년 전에 사망한 것이다.
1985년 100포인트였던 주가지수가 1989년 초에는 5년 남짓 기간동안 10배 가량 상승해서 사상 최초로 1000포인트를 찍었다. 1987년 11월 29일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인도양의 미얀마 해상에서 KAL 858 여객기가 공중 폭파해서 사라졌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이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제 24회 하계 올림픽이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로 떠났다.
그해 6월 10일 (내가 즐겨 찾아보는) 이어영 편저, 「금성판 文章百科大事典」이 발간되었다. 편자는 머리말에서 ‘누에는 거칠고 푸른 뽕잎을 먹고도 부드럽고 하얀 명주실을 만든다. 나는 이 책이 상상력과 독창력을 가진 여러 독자들에게 슬기로운 문장의 실을 뽑아 낼 수 있는 푸른 뽕밭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라고 썼다.
80년대에는 통행금지가 사라지고 교복 자유화가 시행되고 국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다. 그 당시 중 ·고등학생들은 나이키 신발을 신고 무슨 스포츠 용품 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에나멜 가방을 들고 다녔고, 대학생들은 폴로 셔츠와 스노우 진바지를 입었으며 소니 walkman이 ‘must have item’이었다. 그리고 주말이면 원두 커피를 마시고 맥도날드 햄버거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었다.
하지만 80년대는 군사독재정권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온갖 종류의 고문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지금의 MZ세대는 금시초문이어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시절의 고문 기술은 유구한 전통이 되어 계승되면서 더욱 발전하고 교묘해졌고 악랄해졌던 것이다.
‘가보면 압니다.’ 검은 승용차에 타면 그때부터 욕이나 반말이 시작되었다. 영장의 제시도, 묵비권이나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수사관이 말해주어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의 고지 같은 것도 없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본인들도 자신이 끌려간 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조사실 (또는 취조실)은 헌법이나 형사소송법이 미치지 않는 성역이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밤낮으로 시도 때도 없이 신발을 벗겨서 얼굴 머리 때리기, 무수한 발길질과 뺨 때리기, 얼굴에 가래침 뱉기, 몽둥이질, 손바닥 발바닥 등 특정 부위 때리기, 손발톱 사이 찌르기, 손가락 사이 나무 막대기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기, 발가벗긴 몸을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기, 로프로 인정사정없이 등을 후려 갈기기, 터진 살갗에 소금물 붓기, 며칠 동안 흰 벽만 쳐다보게 하기,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 붓기, 손발톱 뽑기, 군대식 원산폭격, 통닭구이, 거꾸로 매달기, 비녀 꽂기, 체모 불태우기, 성적 수치심과 모욕감 자극하기, 며칠 동안 잠 안 재우기, 다른 사람들의 고문 소리 듣게 하기, 가족을 데려다가 고문하겠다고 협박하기, 실제 권총을 들이대고 쏴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기, 성기 고문, 물 고문, 고춧가루 고문, 전기 고문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억지 자백을 받아내고 그나마 조서를 자기들 마음대로 조작해서 범인을 만들었다.
온갖 가혹행위와 고문은 주로 고문의 3대 명소에서 공안 사범들을 조사하면서 사건을 조작하고 범인을 만들기 위해서 자행되었다. 그곳은 고문을 해서 범인을 날조하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인면수심의 악마들이 출몰한다. 그들은 고문을 당하여 파괴된 참혹한 모습의 희생자들을 바라보며 승리감에 도취되어서 히죽히죽 웃거나 은근하게 웃음을 흘린다.
그중에서도 안기부 남산 분실 지하 2층에 있는 제6국 (또는 제6별관)의 취조실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거기서 그 비극적인 인민혁명당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 (하재완은 물고문으로 인해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김용원은 전기 고문을 받는 도중 실신해서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했으며 온몸이 고문의 흔적으로 시커멓게 타 있었고, 서도원은 모진 구타로 인해 온몸이 피멍 자국 투성이에다 제대로 걷거나 심지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지도 못했다. 우홍선은 고문을 당할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전기 고문을 두 번만 더 돌리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이때 고문관은 술에 취해 있었다. 도예종은 고문이 계속되자 심장병인 협심증이 일어나서 여러 차례 졸도했다. 이수병은 소나 돼지도 그렇게 맞으면 죽을 정도로 몽둥이질을 당했다. 그는 몽둥이질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 겨우 계단을 올라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이 조작되었고, 김지하 시인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불법 체포되어 장기간 조사를 받았고, 김영환 하영옥 심진구 등은 1986년 민족해방노동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90년대는 새로운 (고속으로 질주하는) 밀레니얼 (Millennial) 시대로 넘어가는 문턱이었다. 그리고 세기의 전환기였다. 온갖 사건 사고로 얼룩지고 인물들이 사라진 10년간이었다. 그런 와중 (渦中)에도 5·16 군사 쿠테타 이후 지속된 군사독재체제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재평가도 없었고 한 세대를 풍미한 경직된 군사문화를 암묵적으로 관통했던 정신을 포착해서 비판하는 어떠한 노력도 없었다.
예술 분야에서도 암울하건 들뜬 열망이건 간에 세기말의 분위기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방가르드적인 혁신,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모더니즘의 흐름은 찾아볼 수 없었고, 성 담론이나 성 소수자, 페미니즘은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지도 않았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현실의 제약이나 문학적 규약을 초월하고 다양한 소설적 실험을 감행하면서 미지의 땅을 개척한) 교두보 역할을 할 소설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시기상조였을까. 여전히 구태의연하고 관습적이었다. 대체 무슨 시대가 도래했다가 사라진 것인가. 인위적으로 시대를 구분하는 게 부질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10년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 버린 것이다.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베를린 장벽이 1989년 11월 무너지고 나서 독일이 통일되었고 (1990년), 동구권 국가들은 공산주의 압제에서 벗어났으며, 공산주의 종주국이고 악의 제국이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되었다 (1991년).
1991년 크리스마스 저녁 7시 모스크바 크렘린 광장 게양대에 걸려있던 소련의 붉은 국기가 내려가고 그 대신 러시아 삼색기가 올라가면서 동서 냉전은 70여 년 만에 종식되었다.
퀸의 보컬리스트 (동성애자였던) 프레디 머큐리는 그 해 크리스마스 이브를 한 달 앞두고 사망했다.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엔딩곡은 ‘쇼는 계속될 것이다 Show must go on’였다.
90년대는 암울한 80년대를 점차적으로 벗어난 시기였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젊은 청춘들은 빈익빈 부익부라는 자본주의 체제의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면서 그 비정함에 반항하고 작은 성공을 꿈꾸면서 고군분투했던 시절이었다.
문민 정부가 들어선 90년대 들어서서 그들 80년대 학번의 운동권 학생을 지칭하는 ‘386’이라는 용어가 처음 생겨났다. 386은 1980년대를 젊은 청춘으로 살거나 죽어간 수많은 운동권 영웅들의 영웅 서사에서 주어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1990년대를 기준으로 30대 나이, 80년대 학번, 60년대 태생이라는 뜻으로 학생운동의 주역들이 정치권에 대거 진출하면서 언론이 붙여준 이름이다. 지금은 그냥 ‘86세대’라고 하고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는 세대가 ‘97세대’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들은 나중에 정치권에 진출해서 출세하기 위해 경력을 쌓으려고 학생운동을 했는지, 아니면 자기 신념에 따른 학생운동, 노동운동을 했으니까 불가피하게 정치권으로 진출했는지 여부를 우리가 판단하기는 난감한 일이다.)

그들은 지금 어느덧 60을 바라보고 있다. 인상의 황금기가 진즉 지난 것이다. 이제 삶의 끝자락인 죽음보다 늙어간다는 사실에 더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은 인간이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그들은 무신론자로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다. 인간의 가혹한 운명 앞에서 한없이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은 환상과 망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넘나들다가 이제는 (나이가 들자) 실제의 세계로 넘어왔다. 닳고 닳아서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 유물론자, 사회주의, 조선노동당 등 단어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사멸해서 조만간 사라져야 할 운명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철부지들의 불장난 같은) 간첩 활동과 지하 비밀 조직인 민혁당 창당,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결성은 그 뿌리가 80년대 암울한 군사독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는 하지만, 90년대 들어서서 국제적으로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유민주주의가 개화하기 시작한 제6공화국 문민정부 시절에 시작되고 종결된 것이다.
그들은 그 당시 정신줄을 놓았거나 미망에 갇혀서 어리석게도 시대정신 혹은 시대상황을 완전히 역행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심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쫓기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을 것이다. 가족들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몹시 외로웠을 것이다. 심각한 우울증에 빠졌을 것이다. 불안 강박 편집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 파괴적인 비관론자가 되어 차라리 목을 매는 자살을 꿈꾸었을 수도 있다.
탈북자들이 폭로한 북한의 현실을 그들은 받아들였던 것일까? 백문 (百聞)이 불여일견 (不如一見)이라고 김영환과 조유식, 황인오 등은 북한에 가서 직접 비참한 현실을 목격했기 때문에 환멸을 느끼고 전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반면에 하영옥과 심재춘은 북한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어떤 환상을 버릴 수 없었고 그래서 전향할 수 없었던 것일까?
시대의 흐름에 그들의 신념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후회하면서 반성하고 있을까? 그들이 반성하고 전향했다면 어떤 심리적 갈등과 우여곡절을 겪었을까? 그 과정에서 변곡점은? 그들의 딜레마는 무엇이었나? 양가적 감정이나 이중적 시각 때문에?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꾸고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렸던 적이 있을까? 아니면 젊은 날의 치기, 해프닝, 시대착오적인 난센스, 에피소드쯤으로 가볍게 여기고 있을까? 이기거나 지는 이판사판의 일종의 게임으로 여겼던 것일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해 허탈해하고 분노하고 있을까? 자신들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인간들을 몹시 경멸하고 있을까?
하영옥은 어떻게 공포와 혼란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실존이라는 사회적 정글 속에서 어떻게 강박 장애를 극복하고 자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다중 인격자처럼 자아 분열을 겪었을 수도 있다. 불안 강박증 때문에 무수한 밤을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고 밀실 공포증 아니면 광장 공포증에 시달렸을 수도 있다.) 그게 혁명가에 어울리는 충성스럽고 성실하며 명예로운 길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그는 못 말리는 몽상가일까?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 무슨 번뜩이는 영감이 있었던가? 그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억지로 자기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독단주의자일지도 모른다. 혹은 온순하지만 무뚝뚝하고 뜻밖의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집이 세고 가끔 불타오르는 분노의 폭발을 억제하지 못하는 그런 고리타분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8년 형을 선고받고 감옥으로 갔던 것일까? 공판정에서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일까? 그건 역사적 증언이었을까? 아니면 有口不言이었을까?
조선노동당이라는 단어 자체가 바로 한 편의 시 (詩)였다. 이 단어에는 뭔가 유구한 역사와 도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숭고해서 형용할 수 없는 뼈를 깎고 피를 철철 흘려야 하는 무수한 고통과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거대한 의미가 함께 새겨져 있다.

내가 몇 가지 자료를 통해서 파악한 바로는 그들은 1997년 7월 초여름 민혁당의 해체를 선언한 이후 원수처럼 헤어졌다가 다시 우연히 만난 것은 2005년인가 2006년 써클 후배 장례식에서였다. (김영환이 악수를 청했더니 하영옥이 얼떨결에 악수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15년이 넘게 한 번도 만나지 않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간첩 활동, 지하조직 결성,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장기간 구속과 재판, 감옥살이 등을 하면서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온갖 역경을 겪었다. 그들에게 우리 같은 소시민들이 말하는 행복했거나 평화로운 시절이 있긴 했을까?
그들의 인생역정은 운명처럼 보이는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가혹한 운명은 반전과 반전의 반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모두 낱낱이 밝혀지지 않았다.
배신은 배신한 사람에게도 상처가 된다.
난 고백이나 회고록 등을 전부 믿지는 않는다.
그것은 결코 자기 자신을 진실하게 내보이는 것이 아니다.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쟁이이며 모든 고백에는 위선적인 동기, 과장, 미화, 자화자찬, 변명 또는 교묘한 선전이 숨어있다. 진정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말할 게 별로 없는 법이다.
그들은 한때 肝膽相照 (간담상조. 간과 쓸개를 서로 드러내 보일 만큼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절친한 사이) 또는 莫逆之友 (막역지우.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는 더할 나위 없이 친한 친구) 의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刎頸之交 (문경지교. 목을 베어줄 정도의 우정) 정도의 우정은 아니었을 것이고 管鮑之交 (관포지교. 끝까지 변함없는 돈독한 우정) 는 될 수 없었다.
혹시 민혁당 조직 내에서 권력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권력은 대등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우정을 버리고 아첨을 택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들은 지금쯤 과거의 쓰라린 기억들을 저 깊은 망각의 심연 속에 묻어둔 채 살아갈 순 없을까?
시간은 강물이 흘러서 먼 바다로 들어가는 것처럼 무한한 영원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시간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치유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만한 성자는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원수를 용서하고 잊어버리기로 하자.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처사이다. (A. 케네디)

나는 김영환과 하영옥은 물론이고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작중 인물 (전부 실명이다. 내가 창조한 허구적 인물은 없다) 누구도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었다. 그들과 깊이 있는 대화 (인터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그들의 참모습은 알 길이 없다. 여기에 이 소설의 한계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참고 자료에 근거해서 역사 실증주의자처럼 역사적 사건, 인물, 실재를 엄밀하게 묘사, 서술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인물과 사건에 관심이 많다. 아주 상세한 팩트를 존중해야 한다.
역사의 경우 모든 게 명명백백하게 기록된 건 아니다. 텅 비어 있는 여백이야말로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될 수 있는 곳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추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들의 글에는 실제 대화는 극히 짧게 소개되어 있다. (기억이란 믿기 어려운 것인데 그들이 소개한 대화를 그대로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하지만 본인의 말이니까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간 논쟁과 대화는 역사적 사실과 전후 맥락에 비추어 추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상상해서 보충하거나 새로 추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중편소설이라고 주장하는가. 어쨌거나 조금은 소설적 자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인칭 전지적 시점의 소설이지만 사회비평소설이면서 분단소설이고 역사소설이기 때문에 가공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적 인과관계의 사슬에 따른 진실에 더욱 충실해야 했다. 나는 논픽션을 쓰는 것처럼 Facts를 세심하게 조사했다. 그래서 참고 자료가 아주 중요했다.

일인칭 시점은 독자와 심리적으로 가장 거리감이 없는 시점이다. 일인칭 화자가 독자에게 직접 솔직한 의견을 진술하거나 또는 어떤 고백을 하면 화자와 독자 사이에 신뢰가 형성되면서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는 블로그 참조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작성일:2022-08-22 12:36:19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