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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배신 혹은 전향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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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08-22 12:35:15
조회수
772
1998년, 하영옥 (河永沃)과 원진우
1992년 3월 24일 14대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좌파 계열의 민중당은 총득표수 1.55%를 획득하는 데 그쳤다. 4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붕괴되었고,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북한과 대만의 눈치를 보면서 극비리에 협상을 이어가다가 마침내 정식 수교했다. 벌써 한 세대 전의 일이다. 12월 18일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12월 22일 공산주의 국가인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과 정식 수교했다.
10월 29일 연세대 마광수 교수가 「즐거운 사라」소설이 외설이라는 이유로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에 의해 60여 일 동안 구속 수감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검사는 승승장구해서 나중에 검찰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마 교수는 이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심신이 피폐해져서 심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는데 세 번째 시도에서 자신이 살던 아파트 난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그해 3월 국회의원 선거가 한창일 때 민혁당이 비밀리에 출범했고, 7월 말경에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이 결성되었다. (두 개의 지하조직은 전혀 별개여서 서로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에서 각기 별도 관리 조종하고 있었다.)

민혁당 창당은 김영환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면담하고 온 뒤 10개월 만의 일이다. 조유식이 드보크를 통해 전달받은 3억 원의 자금이 설립과 활동비로 사용되었다.
민혁당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 (NLPDR)을 달성하려고 북한 지령임을 내세워 결성한 지하 조직이었다. 그들은 철저한 종북 세력이었다.
김영환과 하영옥, 박금섭 이들 세 명이 중앙위원회의 중앙위원이었고 김영환이 중앙위원장이었다. (이석기는 그 당시 경기남부위원장에 불과했다.)
종북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독재정권의 노선을 따른다.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면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주한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 등의 대남적화 전략에 동조한다.
그들은 북한의 핵과 인권 유린, 3대 세습에 대해서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 (종북사회학자 송두율이 수령독재체제 합리화를 위해 개발한 논리)을 주장한다.
김일성에 대해서는 ‘자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한 탁월한 혁명가, 노동계급의 위대한 수령’이라고 찬양했고,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향도의 태양’으로 미화했다. 또 주체사상을 ‘사랑의 원리를 밝혀준 사상’,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이라고 찬양하고, ‘합법 비합법 수단을 총동원해 그런 사상의 전파 활동에 전력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미국에 예속된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고 ‘민족해방투쟁을 통해 민족자주정권을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또 ‘혁명’의 사전 작업으로 ‘노동현장에서 혁명조직을 꾸리되 이념 소조를 통해 영입 대상 인물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켜 남한 혁명의 전위 투사로 육성한다’는 운동 방침을 정하는 한편, 오직 전술적 차원에서 온건 노선을 표방하는 ‘혁명정당’ 건설을 시도했다.
그들은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말했다. 당의 건설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이념 정당’이라는 간판을 내건다든지 선명한 이념을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 그것은 일반 대중에게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줄 우려가 있다. ‘인간성 회복’, ‘공동체 문화 창달’, ‘사람 중심의 사회 발전’과 같이 우리의 이념은 어느 정도 담으면서도 대외적으로 과격해 보이지 않게 보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 더 큰 문제는 통진당 국회의원 중 북한의 지령을 받고 우리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간첩’ 출신이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대남 지하당인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 수도남부지역사업부 총책 이상규씨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민혁당 사건 이후 지금까지 사상 전향 여부를 밝힌 적이 없다. 전향을 입증할 발언도 찾을 수 없다. 이들이 전향하지 않았다면 어떤 생각으로 국회의원직을 수행할까 (2014년 12월 19일 선고된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면서 이들도 의원직을 상실했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A&nNewsNumb=201207100015)

하영옥은 김영환 다음으로 민혁당의 제2인자였다.
1982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하영옥은 1989년 ‘반제청년동맹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김영환 (‘관악산 1호’)에 이어 ‘관악산 2호’가 됐다. 1990년 5월 28일 서울 도봉산에서 김영환의 입회 하에 ‘조선노동당’의 현지 입당식을 거행하고 ‘관악산 2호’라는 대호를 부여받은 것이다. 그때 당원증 번호가 102호라는 것도 고지받았다. 그 자리에서 하영옥은 “조선노동당에 입당해 매우 영광스럽고 당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할 것을 맹세한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김영환은 1997년 7월 민혁당의 해산을 선언했다. 중앙의원 3명 가운데 2명이 찬성하고 하영옥이 반대했다. 반제청년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산시키면서 민혁당을 결성한 지 5년 만의 일이었다. 민혁당 해산에 하영옥은 거칠게 반발했다.
그날은 초여름의 화사한 날이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실내는 숨이 막힐듯한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푸른 하늘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영옥은 뭔가 미심쩍었다. 그래도 미심쩍어하는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 순간 가슴이 갑자기 죄어드는 것 같았지만 - 다시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어금니를 꽉 깨문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불안하고 초조하다. 얼굴을 찌푸리면서 시선을 외면하려고 하지만 불가능했다. 자기가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고 핍박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잠시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그는 분노했다. 그건 김영환에 대한 것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그가 무섭게 노려본다.
그가 말했다. “너희들이 뭔데 제멋대로 조직을 와해시키고……. 이 조직은 실질적으로 내가 만든 거란 말이야. 내가 반청을 만들었고 그걸 이름만 바꾼거란 말이지. 너는 조직 활동에서 대동단결과 반종파 투쟁을 강조했어. 같은 편인데 나누어져 싸우면 종파주의가 된다는 거지. 바로 지금 너가 하는 행동이야말로 종파주의인 거지.”
김영환이 말했다.
“이건 최후 통첩이야. 번복은 없어. 내가 대충 이야기하는 게 아냐.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이란 말이지. 잘 알고 있겠지만…… 작년 말부터…… 우리 조직은 완전히 둘로 나뉘어서 마비 상태에 있었지. 더 이상 널 설득시킬 방법이 없어. 그래서 포기한 거야.
다시 말하지만 2:1로 결의가 된 거야. 이건 민주적인 절차야. 절대적으로 복종하라고.”
“네 마음대로…… 그렇게는 안 될걸. 해체는 말이 안 돼. 다시 말하지만 민혁당 본래의 사상과 정책, 노선을 따르지 못하겠다면 생각이 바뀐 사람들이 탈퇴하는 것이 옳은 거고 당을 해산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그렇지 않은가? 너희 둘을 탈퇴한 것으로 처리하면 될걸……”
“그렇게는 안 되지. 내가 중앙위원장으로서 확실하게 해체를 선언한 거야. 민혁당은 민중을 위해서 복무하는 혁명조직이지.
그런데 북한 권력자들은 지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어. 민혁당의 이념, 사상을 북쪽에서 찾는 것은…… 말하자면 연목구어야.”
“너는 민혁당을 이끌 능력이 없어. 민혁당을 해체하려는 것은 조선노동당에서 탈퇴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런 거지. 조선노동당에서 탈퇴하는 것이 중요한 거야.”
“우리 조직의 정통성을 인정하라고. 그건 네가 짊어진 최종…… 최고의…… 책무이자 운명이야.”
“나는 널 이해할 수 있어. 20년이건 30년이건 고수해왔던 자신의 이념, 사상, 노선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면 자신의 인생 전체가 완전히 무시되고 무너지는 거지. 그걸 본능적으로 두려워한 거야.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닫는 거야.”
하영옥은 속이 심하게 메슥거렸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폐가 부풀어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절망적인가. 출구가 있을까? 그는 발작적으로 빈 물컵을 바닥에 내리쳤다. 컵이 산산조각나면서 유리 파편들이 튀었다.
김영환이 하영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가 사무적으로 말했다.
“명중했군 그래…… 그걸로는 부족하지. 유리 조각으로 팔목을 그으라고…… 그래야 피가 철철 흐르면서 분이 풀릴 것 같은데.”
“그건 입만 살아 있는 자칭 혁명가가 할 소리가 아니지. 배신자 주제에…… 그렇지…… 배호 가수의 ‘사랑의 배신자’가 생각나는군. 이건 사랑의 배신이 아니라 혁명의 배신이지만.
가사를 바꾸면 되는 거야. 배신자여! 배신자여! 혁명의 배신자여!”
“우선 흥분하지 말라고. 왜? 뜬금없이 흘러간 유행가가 나오지? 우리는 철저히 냉정해야 하지. 그래야만 대화가 성립되는 거야. 솔직하게 말하자고.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잔 말이야. 그러면 오해가 생기지 않으니까.”
“무슨 예언자인 척 하지마. 잘난 척하지 말란 말이야.
비겁한 자식…… 허위와 위선에 가득 찬 네 인생을 돌아보라고. 엉성한 실수들의 반복이었어. 그런 생각 안 드나? 그렇지만 이번 일은 최악의 실수라고 할 수 있지.”
“지난 시절…… 나의 오류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지. 설마…… 내가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인생의 황금기인 30대 중반 이 나이에 순진무구하다는 건 어리석다는 뜻이니까.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아. 기성세대에 진입한 거지.”
“아주 복잡한 사람이었지. 복잡한 인간은 왔다 갔다 하지.
너는 지금 감정을 감추려고 애쓰지만…… 얼굴은 너를 배신하고 있지.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니까.”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으니까.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오가면서 또는 현실과 상상을 오가면서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공중그네 타기를 했으니까.”
“북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두 번이나 만나고 내려와서 민혁당을 창당했으면서…… 평양을 다녀온 후에는 북한 공작원 신분으로 70회가 넘는 지령을 받았으면서…… 그때부터 벌써 북을 비판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 거야. 다시 말하면 시계 추처럼 좌에서 우로 왔다 갔다하면서 흔들리고 있었던 거야. 그게 나약한 지식인 프롤레타리아의 전형적인 태도이지.”
“내가 그렇다고 인정했잖아!
내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친북적인 분위기가 운동권에 널리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거야.”
“혁명은 직진이야. 지그재그로 에둘러 가면 틀림없이 실패하게 돼 있어. 너의 지금 행동은 이 땅의 자주와 민주, 통일을 위해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의 등에 칼을 꽂는 행위인 거야. 이걸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단순한 변절이 아니라 배반이라고 해야 정확할 거야.”
“내 입장이 돼보라고. 역지사지라고 하지. 나는 평양에 갔다 왔어. 김일성도 직접 만났다니까. 너는 대담한 상상력이 부족해.”
“주제넘게 충고할 필요는 없어. 이건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야. 의지의 문제인 거지. 네가 91년 5월 북으로 갈 때 나를 데려가려고 했지. 그러니까 너 밑에 있는 부하처럼 생각한 거야. 그렇게 해서 통신 연락책으로 만들려고 한 거지. 하지만 나는 단칼에 거절했어……”
“나는 심사숙고해서 내 신념과 이상을 변화시킨 거야.”
“너는 강철이 아니라 고철이 되어버렸지. ‘간생이’이란 말이 있지. 경상도 말로 간사스러운 놈을 말하는 거야.”
그때, 두 사람 사이에는 1982년 봄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만난 이래 15년 동안에 걸쳐 얽히고설킨 미묘한 적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장편소설 또는 중편소설 한 편쯤은 쓸 수 있을 만큼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험난한 세월이었다. 항상 쫓기면서 가파른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기어오르는 시간이었다.
김영환이 말했다.
“우리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꼭 최악의 일이 일어난다니까. 다시 말하면 - 인생에서는 가끔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일어난단 말이지. 나는 낙관론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관론자도 아니야.”
“내가 솔직하게 인정해야겠지. 나는 너를 벗어나지 못했어. 어리석게도 무조건 추종했어. 너는 아주 숙련된 이야기꾼이니까. 너의 교묘한 언설을 논박할 만큼 내 논리가 부족했단 말이야. 너는 자신의 논점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장점이 있었지. 그래서 네 주제는 그만큼 일목요연했어. 아주 세련되게 치장을 했고 우리 동지들은 거기에 속아 넘어갔지. 주술이 들어있었으니까. 화려한 산문이었지만 어떤 영감이 들어있진 않았어.
오직 프로파간다만 펄럭였지.
허세였단 말이지. 그래서 무지막지한 악취가 풍겨나지. 자기 기만이고 위선이고 심각한 사기였단 말이지.”
“내 맘대로 떠들어 보라고. 끝까지 들어줄 테니까.”
“그렇지만…… 로직도 의지도 힘도 부족했지. 그게 네 한계…… 솔직하게 인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역설적이지. 너는 내 꽁무니에 숨어서 지냈으니까. 단지 관점의 차이를 가지고 그렇게 왜곡하고 있어.”
“돌이켜 보니까…… 우린 불공평한 조합이었어. 너희 둘은 언제나 한 편이었으니까. 난 너희들에게 이해받지 못했어. 항상 불청객 신세였지. 하지만 나는 전부 다 기억하고 있어. 완벽하게…… 네가 툭툭 내뱉은 말 전부를 기억하고 있다니까.”
“시대가 완전히 변했다니까. 시대정신을 외면하면 안 되지.”
“나는 뭐야? 네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너는 맨날 잘난 체하는 소영웅주의자야. 너 때문에 그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감옥까지 갔는데. 뭐…… 시대가 변했다고. 80년대이건 90년대이건 시대는 변하지 않았어. 그대로란 말이야.”
김영환은 목이 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나에게도 한때는 활활 불타오르는 혁명의 열정이 있었지만 그건 거대한 착오였단 말이지. 너는 후회할 거야. 완곡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모두는 시대착오적이었어.
이제 벗어나자고. 늦지 않았다니까. 현실을 직시하잔 말이야.”
“너 혼자만 살려고…… 자수하고 반성문을 쓰고 전향한다면 넌 정말 더러운 배신자가 되는 거야.”
“오죽했으면 주체사상의 창시자인 황장엽 선생께서 내려왔겠어. 그것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사지에 남겨두고. 나는 황 선생의 망명을 보고 주체사상은 완전히 끝났다고 보는 거지.”
“그럴 수도 있겠네. 네 주체사상은 황 선생의 것을 그대로 베낀 거니까. 표절이란 단어로는 부족하지. 너는 황 선생의 이론을 훔친 절도범이고 횡령범이야.
다시 말하지만 자신을 기망 한 거야. 그리고 수많은 동지들을 기망하고. 난 그걸 애써 눈 감았지. 우리 조직을 유지해야 하니까.”
“내 주체사상은 논리적으로 확고했어…….”
“황 선생은 북한 내 권력 싸움에서 불리하니까 도망쳐 나온 것일 수도 있어. 과대평가 할 필요가 없는 거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나는 북한에 가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 김일성 주석은 아주 옛날 빨치산 시절의 사고 방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어. 완전히 그대로야. 그리고 김정일이 이어받았어. 북한은 봉건세습왕조일 뿐이야. 가망 없어. 가망 없다니까. 우리가 민주기지라고 상상했던 사회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걸 보고 나니까 절망할 수밖에 없었어.”
“너는 이미 자본주의에 깊이 물들어서 변절되었지.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지.”
“네가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탈북자들을 보라고.
그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지.”
“우리는 혁명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
해산이라니…… 그건 자멸하는 길이야. 김일성 주석이 죽었지만 사상, 이념, 정신은 지금도 엄연히 살아있는 거지.
주체사상을 배신하고 조선노동당을 배신한 배신자야! 너는 더러운 변절자야!”
“우리가 지금 헤어지면 다신 만날 일은 없겠지.”
하영옥은 결론적으로 김영환에 대해 변절자, 또는 배신자라고 맹비난하면서 연계선 (북한접촉망)과 남은 공작자금, 무전기 등을 넘기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특히 무전기를 넘기면 북과 직접 연결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영환은 그런 요구를 모두 무조건 거절했다.
그들은 악수도 없이 헤어질 때 흔히 하는 작별 인사도 없이 그렇게 굳은 표정으로 헤어졌다. 하영옥은 그가 헤어질 때 비웃듯이 희미하게 웃었다고 생각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 언제나 굳어있고 딱딱한 얼굴인데 말이다. ‘너는 웃고 있군. 눈물을 흘려도 모자를 판에…… 나는 외치고 싶은데…… 나는 절규하고 싶은데. 목구멍에서 지금 뭔가 치밀어 올라온다고.’
그는 목이 메이면서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목이 심하게 말랐다. 뭔가 한 모금 축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자꾸 끊기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려 애쓰며 입술을 깨문다. 그는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기억 속에 무수한 풍경들이, 인물들이 선명하게 혹은 희미하게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무성한 녹색 잎들이 서걱대는 가로수의 우듬지를 쳐다본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나른한 공기 속에서 가벼운 바람 한줄기가 가로수길을 따라 지나갔다. 7월의 작렬한 햇빛이 보도블록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때는 김영삼 정권의 말기였고 1997년 4월 20일 주체사상 이론을 정립한 황장엽 선생이 김덕홍 동지와 함께 망명해서 서울에 도착했다. 황 선생은 그 해 1월 30일 평양의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 속 평양은 잿빛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대동강에서부터 올라온 자욱한 회색 안개가 깔려있었다. 공항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설 때 마음이 그만큼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아내가 혼자 집 앞까지 배웅을 나왔다. 여느 때처럼 그를 보내는 아내를 보며 다시 한번 갈등에 시달렸다. 이번 길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끝내 아내에게 희미한 암시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난밤에 잠 못 이루고 마냥 뒤척이면서 망설이다가 굳힌 결심 그대로였다.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무엇보다도 이번 일이 그의 뜻대로 될지 안 될지가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 하영옥은 어떻게 해서든지 민혁당을 살리기 위해 그가 장악하고 있던 영남위원회와 경기남부위원회 (위원장은 이석기였다)를 중심으로 당 조직을 수습하고 재건해서 민혁당의 강령과 규약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 당시 전북위원회는 김영환 쪽이었고 나중에 김영환이 반성문을 쓰고 전향하자 그들 대부분은 자수해서 광명을 되찾았다.

1998년의 경우 뉴욕 월가에서 대형 헤지펀드사인 롱텀 캐피털 매니지먼트 사태가 일어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사상 초유의 금융위기로 말미암아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해서 신음하고 있었다.
1998년 2월 25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되고 15대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되었다. 3월 13일 사상 최대 규모인 2,300여 명이 대사면, 복권되었다. 4월 21일 독일의 테러단체 독일 적군파가 자진 해산했다. 6월 10일부터 7월 12일까지 프랑스에서 제16회 프랑스 월드컵 대회가 개최되었다. 8월 4일 현대그룹은 북한과 유람선 관광 사업을 위한 합영 회사의 설립계약을 체결했다.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금강호가 출항했다. 11월 26일 대도 조세형이 16년 만에 석방되었다. 12월 18일 해군은 거제도 남쪽 해상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격침했다.
1998년경 그 당시 「말」지의 기자였던 김경환은 북한 관련 운동에서 손을 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10월 초순 경 6년 만에 느닷없이 진운방이 나타났다.
진운방은 옛날의 콧수염을 말끔하게 깎고 나서 여수 돌산읍 율림리 해안으로 침투해서 서울 마포에 있는 월간 말지 사무실로 김경환 기자를 찾아간 것이다. 그때 진운방은 국내 실제 인물인 ‘원진우’의 주민등록증 (자기 사진을 붙여서) 소지하고 옛날 진운방이 아니라 원진우 행세를 하면서 노골적으로 하영옥과의 접선을 부탁했다.
그가 말했다. 민혁당은 이미 해산됐고 지하당 운동을 할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차마 신고할 수는 없었다.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었고 그의 아내와 딸이 북한에 있기 때문이었다. 진운방은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는데 다시 만났을 때는 얼굴이 새까맣고 깡말라 있었다. 위암 말기였다. 그는 위암 말기 환자로 처자식을 북한에 남겨둔 채 새삼스럽게 다시 남파됐던 거야.
김경환은 2000년 1월 13일 오전 서울지방법원 형사23부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의 최후진술에서 말했다. 저는 민혁당의 실체를 인정합니다. 민혁당은 1997년 초기의 노선을 포기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믿고 따른 주체사상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이념의 문제로 법정에서 사법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물론이고 사상이 법정이 아닌 다른 공간들 속에서 자유롭게 공개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 검사는, ‘김경환이 지난 10년 동안 반제청년동맹, 민혁당, 조선노동당 등에 가입해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남한 체제 전복을 목표로 활동해왔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안보를 위협한 명백한 범죄 행위’라고 하면서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했다.

1998년 10월 하순경이었다. 가을 바람에 낙엽이 지고 있었다. 온 천지에 햇살이 가득했다.

들마다 늦은 가을 찬바람이 움직이네.
벼이삭 수수이삭 으슬으슬 속삭이고
밭머리 해그림자도 바쁜 듯이 가누나.
무 배추 밭머리에 바구니 던져 두고
젖먹는 어린아이 안고 앉은 어미 마음
늦가을 저문 날에도 바쁜 줄을 모르네.

그 무렵 하영옥은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김경환이 소개한 원진우와 처음으로 접선했다. 그는 그날 북한이 자신을 김영환 대신 민족민주혁명당 총책으로 임명한 사실을 통보 받으면서 입북 제의를 받았다. 그 당시 하영옥 역시 민혁당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북과의 연계망과 자금 지원이 절실했었다. 물실호기였다.
(국정원의 수사 기록에 의하면 - 그는 3학년 때 성적 불량으로 제적됐다. 방위병으로 복무하고 제대한 후에는 잠시 반월공단에 있는 배전반 제작 회사에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이 무렵 황학동 골동품 시장에서 구한 일제 단파 라디오를 통해 자기 집에서 평양 중앙방송과 ‘구국의 소리’ 방송을 들었다. 87년 재등록하고 2년 후 졸업했다. 졸업 후 몇 년 동안은 속셈학원 원장, 수학 과외교사를 했으나 이 당시에는 일정한 직업 없이 고시 공부를 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고시촌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92년부터 민혁당 총책인 김영환으로부터 두 달에 4백만 원씩 총 1억 원을 받았고 이 중 일부를 하부조직에 내려보냈다.)
그때 원진우와 접선하면서 그에게서 대북 보고용 무전기 2대, 난수표, 편지지 1장 분량의 은서용지와 인터넷 연락방법이 기재된 병풍식 소책자 한 권을 받았다. 또한 3개의 호출부호를 받았고 인터넷을 이용한 지령의 송수신 방법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공작금으로 5백만원과 엔화 50만엔을 받았다.
그는 심재춘과 함께 무전기를 비닐백에 싸서 관악산 등산로에서 몇백 미터 계곡 쪽으로 들어간 평평한 작은 풀밭에 서 있는 소나무 밑을 오십 센티미터가량 파서 숨겨놓았다.
앳된 여자 종업원이 수줍은 미소를 띠며 과일 주스 두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실내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 한가했다. 하지만 진운방은 본능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끊임없이 분위기를 살핀다.
그는 빼빼마른 몸에 얼굴은 어둡고 초췌했다. 하지만 아주 침착했고 철저히 자신의 목표에 따라 행동했다. 그래서 약간의 유머감각도 있다. 그가 하영옥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말했다.
“나는 지금 저승 문턱에 서있어요. 곧 염라대왕이 문을 열거요. 그렇지만 혁명의 열정은 살아있지. 김 동지로부터 들었을 거요. 잘 아시겠지만 나는 얼마전에 북에서 내려왔소. 김정일 동지의 직접 지시가 있었소. 김영환에 대해 알고 싶소. 그와는 접촉이 끊겼어요. 도대체 행방을 알 수가 없지.”
“그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그의 진의를 알고 싶소. 혹시 위장용인가? 아니면……?”
“위장용이라니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작년 7월 민혁당 해체를 선언한 이후 만난 사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변절이건 배신이건…… 했단 말이요?”
“그렇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미련을 깨끗이 버리십시오.”
“우리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을거요. 그게 공화국의 법이요.”
“잘 알겠습니다.”
“민혁당의 운명은……? 남한 내 최대 지하혁명조직이었지 않소.”
“제가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그는 인수 인계를 거절했습니다. 제가 그간의 경위를 말씀드리죠. 우리는 오랫동안 싸웠습니다. 그는 진즉부터 마음이 변했어요.
제가 해체를 절대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너희들은 탈퇴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북과 연계선, 무전기, 남은 자금을 인계하라고 요구했지요.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무전기는 구식이어서 이미 폐기 처분했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하 동지를 김정일 최고 지도자의 이름으로 이미 총책으로 임명했소.”
하영옥은 갑자기 모든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온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그는 감격했다. 마침내 위대한 조선노동당이 그를 인정한 거였다. 진운방에게 동지의식을 느끼고 조선노동당에 대해서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낀다.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감사합니다. 조선노동당에 대하여 충성을 맹세합니다. 보란 듯이 조직을 재건해서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저는 원래 경기남부위원회와 영남위원회를 관장했습니다. 그쪽 조직들은 해체를 원칙적으로 무효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민혁당의 뿌리인 RO는 살아있단 말입니다. 북과의 연계선과 자금 지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재건이 가능합니다.”
“여기서 당분간 활동하는데 증명서가 필요하오. 내가 지금 원진우의 주민증을 사용하고 있지만 주민증 기재 내용이 사실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원진우의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하루빨리 서둘러 주세요.”
“그런 건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거든요.”
“지령이 내려오는대로 우리는 함께 북으로 가야합니다. 북에서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하고 사상 교육과 공작원 훈련을 받아야 하오. 그리고 나서 복귀하는 거요.”
“어떻게 올라가지요?”
“그건 염려할 것 없소. 항상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저는 장소를 말하는 겁니다.”
“강화도가 될 것입니다. 거기는 황해남도와 가장 가깝지요. 그쪽 물길은 손바닥 보듯이 훤하지요. 반잠수정이 내려올 것입니다. 강화도 본도에서 해주까지는 조류의 흐름을 타고 빨리 가면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지. 해주에는 서해함대 기지가 있어요. 중간에 북방한계선을 통과하는 거요. 강화도에서 NLL까지는 25분가량 걸리지요. 거길 통과하면 우리 바다요. 나는 북으로 돌아가면 배신자에 대해서 보고서를 제출할 겁니다.”
“제가 준비할 것은……?”
“김정일 최고 지도자 동지에게 바치는 충성의 편지를 준비하시오. 그리고 민혁당의 현황과 앞으로의 운영 계획 등에 대해서 준비하시오. 본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민혁당은 우리의 희망이고 미래입니다. 우리는 하 동지를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분골쇄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북한은「말」지 1998년 5월호에 실린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김영환의 기고문을 보고 반신반의하면서 김영환의 진위를 파악하고자 했지만 김영환과는 연락이 단절된 상태였다. 1995년에는 남한 내 지하 전위당의 총책인 김영환이 북한을 비판하자 북에서는 ‘김영환의 진의, 연락 통해 보고바람’이라는 지령을 내려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최종 변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원진우를 다시 남파한 것이다. 원진우는 김영환과 만날 수 없게 되자 당시「말」지 기자로 있던 김경환을 통해 하영옥과 접촉하여 민혁당을 검열했다.)
그 며칠 후 직파 간첩 원진우가 심재춘의 집에 일주일가량 숨을 수 있도록 은신처를 제공하고 군경의 검문을 피해 간첩 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했다. 또한 1998년 11월 11일에는 원진우와 함께 강서구 화곡6동 동사무소로 가서 위임자란에 원진우 이름을 기재하고 인근 문방구점에서 판 원진우 명의의 목도장을 날인한 주민등록서류 발급 신청서를 동사무소 직원에게 제시하고 주민등록 등본 및 초본 각 1통을 발급받아서 원진우에게 주었다. (실제 인물인 원진우는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적이 없었다. 남파 간첩이 그 주민등록증을 어떻게 위조했는지 경위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반잠수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10월 초순쯤 서울에 도착해서 고정 간첩과 접선했을 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북에서 내려올 때 지참했을 수도 있다.)
그 무렵 하영옥은 원진우로부터 김정일이 직접 하사하였다는 ‘광명성’이라는 대호를 새로 부여받았다.
1998년 11월 19일, 진운방, 하영옥, 심재춘 등 셋은 강화군 화도면 내리 해안에서 대기하면서 밀입북을 시도하다가 그들이 타고 가려던 북한 반잠수정이 기관 고장을 일으키면서 강화도 인근 해역에서 군에 발각돼 밀입북 계획이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그들 셋은 겨우 탈출해서 서울로 돌아왔다.
1998년 11월 27일 하영옥은 원진우와 함께 신세계백화점 건물 뒤편에서 암달러상에게 일화 70만 엔을 환전한 후 활동비 명목으로 현금 500만원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심재춘에게 원진우를 안내하여 복귀 장소인 전남 여수를 사전 정찰하도록 지시했다. (「진보의 그늘」 50~52쪽 참조)
김영환이 말했다. 강화도에서 발각된 잠수함에 탑승할 예정이었던 인물은 간첩 원진우와 남한 국적의 하영옥, 심재춘 등이었다. 그중 하와 심은 내가 당수격인 중앙위원장으로 있었던 민혁당의 당원들이었다. 민혁당은 내가 잠수함을 타고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을 만나고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입당한 후 만든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지하혁명당이었다. 하영옥 등이 강화도에서 북한에 가려다 실패하고 여수에서 반잠수정이 격침된 1998년 그날 나는 중국에 있었다.

심진구는 19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그 당시 안기부에 불법 구금되어 구타 등 가혹행위를 당하고 혐의가 조작되었으니 이를 바로잡아 달라고 진실 화해위에 청구했다. 진실 화해위의 결정을 근거로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2012년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6년 전 사건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검찰은 1986년 심진구를 구속 기소하면서 공소장에 그가 김영환, 하영옥과 모의해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동맹을 모방한 반국가 단체 지역노동자 해방동맹 건설을 획책했다고 했다.)
심진구는 무죄 선고 직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김영환을 만난 것을 후회한다. 심진구와 김영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90년대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했던 자생적 전위당 민혁당의 두 주역 김영환과 하영오는 모두 심진구와 얽혀있다.
심진구가 김영환을 처음 만난 때는 1984년 1월 무렵이다. 심진구는 진실 화해위에 진실 규명을 요청하기 전인 2007년 7월 오마이뉴스에 보낸 글에서 김영환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했다.
영환이! 우리가 처음 만난 1984년 1월 20일경 서울 구로3동의 이광우의 자취방이 생각나나. 고교 동창인 광우는 내게 자취방을 불쑥 찾아온 자네를 서울대 공법학과 2학년 (82학번) 김영환이라고 소개했지. 학교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자네는 OB팀 (고전연구회)에서 활동한다고 했지. 학내 사정에 과문한 내가 무슨 맥주회사 야구팀이냐고 묻자 자네는 단재 신채호와 정약용 선생을 연구하는 학교 동아리 모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네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의 단상은 이것이 전부였네 자네는 대학 2년 선배인 광우와 나의 대화와 토론을 곁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었지. 그러다가 내가 고향에서 올라와 광우의 자취방에서 자고 가는 날이 빈번해지자 지적 호기심이 컸던 자네는 사상학습을 함께하자고 졸랐지.
하영옥은 심진구와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영환이가 철학과 경제학 공부를 많이 한 노동자 형이 있다. 너도 꼭 만나봐야한다고 해서 심진구 씨를 처음 만났다. 만나보니 나이가 우리보다 서너 살 위인데 대학은 안 나왔지만 사색과 연구 수준이 웬만한 대학생보다 높았다. 고교 때 마르크스 주의 비판서들까지 찾아서 읽었다고 했다.

하영옥 (그 당시 37세)은 1999년 9월 반국가단체 (민혁당) 설립 혐의로 기소되어 무기징역이 구형되었으나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징역 8년에 자격 정지 8년이 확정되었다. (대법원 제2부는 2000년 10월 12일 하영옥 피고인에 대한 상고심에서 피고인과 검찰 측 상고를 모두 기각하면서, ‘민혁당은 창당 경위와 목적 등에 비춰볼 때 국가 변란을 1차적 목적으로 하는 지위 통솔 체계를 갖춘 반국단체로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면서 남한 사회를 ‘식민지 자본주의 사회’로 규정 짓고 반미 자주화와 반파쇼 민주화를 기치로 민족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하고자하는 노동자 농민의 전위당이다.’라고 설시했다.)
그는 4년간 복역한 뒤 2003년 4월 30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이후 경기도 어느 도시에서 학원 강사를 하고 있었다. (2012년 당시 그랬고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그 후 일은 알 수 없다.)
2012년경 그가 민혁당 재건을 꾀하고 있다고 동아일보가 보도하자 하영옥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무리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해도, 선입견에 (맞춰) 내가 뭐 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식으로 함부로 소설을 쓰는 짓은 너무한 게 아닌가”라고 항변했다.
그 무렵 하영옥이 말했다. 나는 출소 후 일신상의 어려운 문제들이 있어, 아무런 사회적 활동도 못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 살아왔고 살고 있다. 내가 나름의 결심으로 내 길을 가는 동안, 내가 겪는 고초를 보면서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하시던 아버님, 어머님 두 분 모두 가슴에 한을 품으신 채 근자에 돌아가셨다. 크나큰 불효를 저지르고 만, 못나고 못된 아들이 되어 슬픔을 견딜 수 없었으나, 나에게는 딸린 자식들이 있으니 이를 떨치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 나는 묵묵히 열심히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며,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 나라의 자주화와 민주화 통일을 위해 애쓰시는 많은 분들께는 늘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장차 때가 되면 나도 이분들의 노고에 함께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아니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마음이라 하여 보수언론들이 허위와 날조 속에 소설을 써가며, 나를 함부로 매도할 권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https://m.khan.co.kr/politics/politics-general/article/201205191311361#c2b)

성탄절을 며칠 앞둔 1998년 12월 17일 늦은 밤.
신은 활동을 위해서 낮을 만드시고 휴식을 위해서 밤의 장막으로 우리를 감싸주신다. (코란)
초겨울 밤바람은 쌀쌀했다. 바다는 짙은 어둠에 쌓여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검은 바다의 고요.
전남 여수 앞바다 해안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초병에 의해 북한 반잠수정이 발견되었다. (그날 밤, 여수시 돌산읍 임포리 해안 초소에서 관측병인 김태완 이병은 열상추적장비로 바다를 주시하던 중 밤 11시 15분경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해안에서 2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선박 한 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선체의 절반 이상이 물 속에 잠긴 채 날렵하게 생긴 선박은 첫눈에도 어선과는 달랐다. 5t 크기 선박에는 안테나와 해치 2개가 설치돼 있었고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김 일병은 간첩선임을 직감했다.)
공작 모선은 여수 근해 공해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잠수정은 돌산 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진운방을 태우고 모선으로 향했다. 하지만 남쪽 해군의 추적을 눈치챈 모선이 일본 영해로 도망가면서 반잠수정은 갈 곳을 잃게 된다.
모선이 다급하게 지시했다. ‘금강산 나와라. 여기는 묘향산이다. 우리는 발각됐다. 도킹은 불가능하다. 전속력으로 도망가라. 모든 조치는 스스로 판단하라. 보안상 이유로 통신을 끊는다.’
다음 날 새벽 해군 초계함인 남원함에서 함수 76mm 함포와 40mm 함포 사격에 의해 거제도 인근 바다에서 반잠수정을 격파, 침몰시켰다. 해군은 1999년 1월 20일 반잠수정이 격침된 위치에서 450m 정도 떨어진 수심 150m 해저에서 반잠수정을 발견했고 1월 22일부터 잠수정 인양 작업에 착수했다.
국정원은 그 무렵 북한의 침투 활동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 반잠수정은 가동 거리가 짧기 때문에 북한의 항구에서 출발하여 남해 끝자락까지 자체로 이동할 수 없다.
이 반잠수정은 공작 모선이라고 불리는 어선을 가장한 특수 선박에 실려 북한 서해 남포항을 출발했다. 모선은 중국 쪽 해안으로 빙 에돌아 공해를 타고 제주도 인근을 지나 남해안에 닿았다. 국정원은 공작 모선이 남포항을 출발한 때부터 위성을 통해 위치를 파악하고 그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주시하고 있었다. 모선은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내려놓았다. 남포항에서 출발한 공작 모선을 정보 기관이 특별히 주시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그 한 달 전 강화도에서는 잠수함 침투 실패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강화도 주둔 해병대는 인근 얕은 바다 물속에서 고장 난 반잠수정을 수리하면서 나온 망치로 땅 땅 땅 두드리는 소리를 포착하고 조명탄을 쏘며 수색작전을 벌였는데 해안가 뻘밭에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눈이 내려서 접선 장소를 확인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던 중 이들을 태우러 남파되었던 반잠수정이 잠시 고장을 일으킨 것이다.) 공작원을 태우고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보였다. 탑승하지 못한 공작원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은 접선에 실패하자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황급히 돌아왔었다. 그때부터 원진우는 고시생이라고 속이고 서울 봉천동 ‘우등고시원’에 숨어지내며 북과 연락했다.) 머지않아 다시 데리러 오기 위해 강화도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접근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이 바로 여수에서 격침된 반잠수정이다.
북은 남파 간첩 원진우를 복귀시키기 위해서 반잠수정을 12월 17일 여수 해안가로 보내기로 했다. 원진우는 12월 16일 고시원에서 나와 여수로 내려갔는데 하영옥과 심재춘이 동행했다. 그 당시 하영옥도 반잠수정을 타고 입북하기로 했지만 항해 기간이 4일 이상 걸린데다가 개인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뒤로 미루어졌다.
하지만 하영옥은 여수에서 북한 반잠수정 호송원들과 접선하면서 “수고가 많습니다. 원 선생님을 잘 부탁합니다.” 말하고 그들과 악수까지 나누고 헤어졌다. 그는 반잠수정이 우리 해군에 쫓기는 것을 알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신림동 PC방에서 인터넷을 이용해서 북에 보고문을 냈다. ‘중개인 (간첩 원진우)이 출발했다. 교통사고 (반잠수정 격침)이 난 것 같은데 결과를 알고싶음’이라고 보냈고, 북은 다음 해 1월 ‘중개인은 사망했다. 영업 (간첩활동)에는 지장 없을 것임’이라고 통보했다.
탑승한 공작원의 신원을 확인해보니 몇 년 전에 말레이시아 화교로 위장하고 남한에 살았던 남파 간첩 원진우 (그 당시 이름은 진운방)였다. 그는 하영옥으로부터 받은 ‘김정일에게 바치는 충성의 편지’, ‘민족민주혁명당 현황’ 등이 담긴 디스켓 등을 전달받아 반잠수정으로 복귀하던 중이었다. (그 반잠수정에는 하영옥이나 심재춘은 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고 그 대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갔다.)
원진우의 행적을 따라 추적하다 보니 거기에서 하영옥과 자동차로 이동하다 과속 단속 카메라에 찍힌 사진이 나왔다. 원진우가 북한에 보고하려고 암호화하여 갖고 있던 수첩의 전화번호는 김영환의 중국 연락처와 조유식, 하영옥, 김경환 등 민혁당 핵심 간부와 관련자들의 연락처였다.
여수 앞바다에서 반잠수정을 격침 인양한 것을 계기로 수사가 급진전됐다. 국정원은 그 반잠수정을 ‘보물선’이라고 불렀다. (이 보물선을 수사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민혁당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보물선에는 여섯 명의 승선자 시체가 나왔는데 다섯 명은 호송 업무를 맡은 북쪽 전투원이었고 한 명은 귀환하는 공작원이었다. 그게 바로 원진우였다.
원진우의 수첩에 적힌 모든 전화번호 (12개)가 ‘비산술식 덧셈’으로 변환된 민혁당 당원들의 연락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는 김영환·, 조유식보다 하영옥, 심재춘 쪽에서 먼저 나왔다. 하영옥 또는 심재춘이 원진우의 주민등록 등본이나 초본을 떼어준 증거가 확실히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영환이 중국에서 귀국 탄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하영옥과 심재춘 건은 이미 증거 확보가 끝나 있었다. 다만 ‘큰 건’을 잡기 위해 발표를 늦췄을 뿐이다.
〔심재춘은 (국정원의 수사기록에 의하면) 서울대 사범대 체육교육학과 88학번이다. 대학 입학 후 서울대 동아리 연합회 회장과 총학생회 사무국 부국장으로 있으면서 주체사상에 심취하여 각종 학내외 반정부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1991년 5월경 반제청년동맹에 가입했다. 1998년 10월 하영옥의 지시를 받고 북한 직파 간첩 원진우에게 은거지를 제공하고 11월 20일 강화도 해안에서 북한 공작선과의 접선에 실패한 하영옥과 직파 간첩을 자신의 승용차로 서울까지 도피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1월 28일에는 하영옥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승용차로 원진우와 함께 복귀 접선지역인 여수 돌산도 해안을 사전 정찰하며 군경 검문 실태, 해안 군부대 현황, 주변 지형 등을 탐지 수집하여 보고했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하여 ‘광명성 91호’라는 공작 대호를 부여받고 하영옥의 통신 연락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보물선에서는 필름 2통이 나왔다. 바닷물이 들어가 부식된 사진 필름을 수차례에 걸쳐 복원해서 현상해 보니까 희미하게나마 윤곽이 드러나고 촬영 날짜가 찍혀 있었다. 1998년 11월에 여수 돌산 해안가 등을 찍은 사진들이 나왔다. 복귀할 장소를 사전 답사한 것이다. 그때부터 원진우는 북으로부터 침투 중인 간첩이 아니라 북으로 복귀 중인 간첩이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래서 복원한 필름을 토대로 날짜별로 행적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주위 시선을 피하느라 차 안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와이퍼나 윈도 브러쉬 같은 차량 부품과 차에 붙인 스티커 같은 것이 일부 사진에 찍혀 있었다. 그것을 근거로 차량을 추적 조회한 결과 하영옥의 하부선인 심재춘의 차라는 것이 확인됐다.
1999년 3월 18일 보물선을 완전히 인양했는데 3월 말까지 누구누구의 전화 번호인지 다 확인한 것이다. 하영옥과 심재춘의 범죄사실은 남파 간첩의 신분 위장용 주민등록 등본이나 초본을 떼준 기록, 1차로 강화도에서 복귀를 시도할 때 김포 강화도 간 기지국을 거쳐 통화한 휴대폰 통화 기록과 강화도에서 차량 검문 기록, 2차 복귀 장소인 여수에 심재춘의 차를 타고 사전답사 때 속도 위반으로 찍힌 무인카메라 사진 같은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반잠수정에는 관악구 신림동, 봉천동 일대에서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제과점 포장지, 쓰레기봉투, 가방, 안경집 등이 있었다. 이를 근거로 남파 간첩이 복귀하기 직전 신림동 봉천동 등에서 은신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수사진들이 13개 동이 있는 신림동과 12개 동이 있는 봉천동 지역의 여관, 고시원, 원룸, 하숙방 등을 탐문 한 결과 관악구 봉천6동의 ‘우등고시원’에서 원진우 명의의 입실 원서를 발견했다. 여기에 찍힌 목도장 역시 반잠수정에서 나온 도장과 일치했다. 남파 간첩 원진우는 이곳에 1998년 11월 22일부터 12월 16일까지 묵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김영환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러던 중 중국에 있던 김영환이 1999년 7월 초 가족을 통해 귀국 탄원서를 (김대중 대통령의) 청와대에 제출한 것이다. 그는 7월 29일 중국에서 돌아와 국정원의 심사를 받기 시작했다.
국정원 김은환 수사단장이 인터뷰 과정에서 말했다.
우리는 (보물선에서 관련 증거를 수집한 후) 하영옥, 심재춘 사건을 다 확정해 놓고 ‘큰 건’이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조갑제 「월간조선」편집장의 주선으로 김영환의 모친이 청와대에 귀국을 허용해 달라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청와대는 국정원에 처리 의견을 물어본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은 ‘김영환이 반제청년동맹 조직과 관련되어 있으나 본인이 ‘말’지와 「월간조선」등을 통해 김정일 타도 투쟁을 주장한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국정원은 김영환에 대해 기소중지는 물론 출입국에 관한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다. 다만, 집에서 두뇌난수 책자가 발견됐기 때문에 심사는 해봐야 하겠다’고 답신했다.

1997년, 최정남 부부간첩
1997년은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해였다. 그해 말 IMF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전설적인 투자 귀재 재일교포 3세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는 1997년 닷컴버블 붕괴 시기에 7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 당시 주식시장 역사상 최대 규모의 손실로 꼽혔다.
1997년 2월 15일 밤 탈북자인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정체불명의 괴한으로부터 권총으로 저격당했다.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무기징역과 2,250억 원의 추징금을,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는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 원을 선고했다. 4월 20일 황장엽 조선노동당 국제담당 서기가 망명했다. 8월 6일 KAL 801편이 괌에서 추락하여 228명이 사망하고 26명이 부상을 입었다. 8월 19일 유엔 통계국은 세계인구가 57억 5천 100만 명이라고 발표했다. 9월 12일 박초롱초롱빛나리 (박나리)양이 13일 만에 숨진 채 발견되었다. 용의자는 20대 여성으로 몸값을 노리고 여성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11월 21일 정부는 절체절명의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12월 19일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었다. 12월 22일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특별사면복권으로 석방되었다. 12월 30일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사형 집행인) 흉악범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97년 10월경 울산에서 최정남 부부간첩이 체포되었다. 실제 부부 사이였던 최정남과 강연정이 발각된 것이다.
(최정남은 1962년 5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나 1984년 4월 사리원대 4학년 재학 중 간첩으로 선발되어 1989년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강연정은 1969년 10월 평양에서 태어나 1986년 9월 고등중학교 졸업 직후 간첩으로 선발되어 1994년 8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아버지가 인민군 고위 간부인 점과 외모를 인정받아 선발되었다. 1990년 11월 결혼해 1992년 1월 아들 최남혁을 낳았다. 아들은 남파되지 않고 부부가 체포될 당시 평양에서 자라고 있었다.
1997년 7월 30일 오후 7시쯤 공작 모선으로 남포항을 출발해 공해상으로 남하, 제주도를 돌아 일본 대마도 부근 공해상에서 거제도로 접근했다. 그 배에는 무장 전투원 20명, 호송 안내원 3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공작 모선은 8월 2일 밤 9시경 거제도 앞 공해상에서 5톤 상당의 반잠수정을 내렸다. 거제도 해안에는 레이더기지가 있었으나 12마일 밖에서부터는 완전 잠수로 항해했기 때문에 포착하지 못했다.
11시경 거제도 해안 500m 지점에서 두 사람은 수중 침투 장비로 갈아입은 채 반잠수정을 떠났고, 11시 30분경 경남 거제군 갈곶리 해안에 상륙했다. 그 후 이들은 20일간 경주 부산 광주 등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6개의 드보크를 설치하고 현지 적응 훈련을 했으며 8월 23일에는 서울 구로동에 숙소를 마련했다.
안기부는 수사 과정에서 경주 민속공예촌 야산, 서울 관악산, 서울 봉천동 장군봉 체육공원 등에 있는 드보크를 찾아냈는데, 거기에는 체코제 CZ 83 권총 3정, 실탄 170발, 수류탄, 파카 만년필 독총, 독약 앰플 등 인명 살상 장비 10종 205점과 무전기, 난수표 등 기타 간첩 장비 총 54종 284점을 발굴했다.)

그 무렵 (9월에서 10월 중순 경) 부부간첩은 관악산 등지를 등산하면서 심정웅을 6번 만났다. (그들은 관악산과 울산 태화사지 부도 안내판, 여의도 쌍둥이 빌딩 등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도 찍었다.) 그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동작설비분소장이었던 심정웅은 북의 지령에 따라 국가기간시설인 철도와 지하철에 침투해 39년간 고정간첩으로 암약해 왔다.
부부간첩은 그에게 새로 암호 해독법과 신형 무전기 사용 방법을 교육시켰고, 조국 통일상을 수상했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며, 김정일에게 바치는 충성의 편지를 받아내고, 유사시 지하철을 마비시킬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
심정웅은 김포군 통진중학교 2학년 때인 1958년 둘째 당숙인 간첩 심웅섭의 권유로 경기도 김포군 대곶면 마을 앞 해안에 정박해 있던 공작선을 타고 입북해 간첩 교육을 받았다. 이때 “교통고등학교 (현 철도고)에 진학한 뒤 철도청에 들어가 유사시 철도를 마비시키라”는 지령과 함께 철도를 뜻하는 ‘철마산 66호’라는 공작 대호를 받았다.
교통고를 졸업하고 1963년 철도청 기사로 임용된 심정웅은 1966년 당숙과 함께 2차 월북해 노동당에 입당해 재교육을 받았으며, 1984년 서울지하철공사로 전직해 시설 분야에서 줄곧 근무해 왔다. 그러면서 남파 간첩들에게서 공작자금, 무전기, 난수표, 인식표 등을 제공받았다. 심정웅은 자신이 근무한 철도, 지하철 등 국가기간시설에 관한 정보를 남파 간첩 김낙효와 여러 차례 접선하면서 넘겨주었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10년 및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

부부간첩은 1997년 2월 15일 발생한 이한영 암살사건이 북한의 소행임을 밝혔다. 그 당시 경찰 등 수사기관이 대대적인 조사를 진행했지만 범인을 밝힐 수 없었다. 그런데 부부간첩이 이 사건의 범인은 남파 공작원 최순호와 윤동철이라고 밝힌 것이다.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테러 전문 요원들인 2인조 특수 공작조는 그 사건이 발생하기 일 개월 전에 남파되었고 그들은 이한영을 미행하면서 추적해 살해한 것이다. 1997년 2월 15일 9시 52분, 김정일의 처조카 탈북자 이한영은 경기 성남시 분당동 서현동 시범현대아파트 418동 14층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으로 총을 맞은 후 10일 후인 25일 사망했다.
범인들은 대기하던 차량을 타고 고속도로를 통해 남해안으로 갔고 공작용 잠수함을 타고 북으로 복귀했다.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들은 그 후 재남파에 대비해 얼굴 성형수술까지 받았다.

최정남은 1997년 8월 초 남한 내 기존 조직인 고영복 전 서울대 교수, 심정웅 서울 지하철 공사 동작설비분소장 등에 대한 지도 검열과 공작 대상자 포섭 임무를 띠고 거제도 해안으로 침투해서 삼개월 가량 활동하다가 뜻밖의 사건으로 체포된 것이다.
고영복 교수는 그들 부부 간첩과 6차례에 걸쳐 자신의 서울대 연구실 등지에서 만났다. 그때 고 교수에게 북한 노동당 창건 50돌 (1995년 10월 10일)에 조국통일상에 수여되었다는 사실이 통보되었다. 최정남이 말했다. “교수님! 존경하는 서울대 교수님! 조선노동당은 창건 50돌을 맞이해서 교수님께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조선노동당은 창당이래 주석님의 탁월하신 영도로 온갖 가시밭길을 헤치고 전진하면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 상은 아무에게나 수여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국 통일을 위해서 불철주야 헌신하신 분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냉철하게 평가하시어 직접 결정한 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조국이 통일되면 교수님은 틀림없이 서울대 총장님으로 승진하실 겁니다. 그날을 기다려 주십시오.”
고 교수가 답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너무 과분한 상을 주셨습니다. 백골난망입니다.”
고 교수는 그 무렵 체포되어 구속 기속되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회합, 통신)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2년의 실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래서 서울대 인사위원회는 명예교수직을 박탈했다. 1년 3개월 복역 후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을 계기로 단행한 1999년 2월 25일 특별사면에서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에 복권되었다.

1997년 10월 21일 남파 간첩 최정남은 재야 단체 간부 정대연을 만났을 때 “김영환 선생 소개로 왔다”고 밝혔다. 그러다 정대연은 안기부의 무슨 공작으로 오해해서 그를 신고했고 엿새 후인 10월 27일 체포된 것이다. (민주주의 민족통일 울산연합 집행위원장이었던 정대연은 그 당시 김영환의 변신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자주의 길」 (3호)에서 ‘세상이 바뀌어도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며 김영환의 주장을 비판했고 이 비판을 김영환이 재비판하고 그가 재차 반박하면서 논쟁은 뜨겁게 달아 오르며 노선 투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김영환이 ‘대꾸할 가치를 못느낀다’고 발을 빼면서 그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었다.)
1997년 10월 21일 정대연은 “남녀 2명이 찾아와 북한에서 왔으며 북으로 함께 가자”고 말했다며 간첩신고를 했다. 그는 이들 2명을 안기부에서 보낸 함정으로 착각하고 자진 신고한 후 기자회견을 열어버린 것이다. 당시 안기부에서는 이런 프락치를 보낸 적이 없어서 북한 간첩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1997년 10월 27일 오전 11시 30분 울산 코리아나호텔 커피숍에서 정대연을 재차 접촉하려던 남녀 간첩 2명을 현장에서 검거했다.
처음에는 남녀 간첩이 진짜 부부 사이인 줄 몰랐다. 다만 남녀 간첩이 함께 내려온 것은 아주 이례적이어서 뭔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했다. 그들에게서 캐내야 할 비밀이 많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생포해야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숍은 갓 내린 풍미 가득한 커피 냄새가 가득했다. 그들은 적당히 끼리끼리 나눠서 자리를 잡고 시치미를 뚝 떼고 손에 따뜻한 머그잔을 쥐고 커피를 마시는 흉내를 내고 있었다.
체포 당시 그 커피숍과 1층 로비, 비상구, 호텔 주변 건물과 골목에는 30여 명의 안기부 무장 요원들이 사복을 입고 일반 시민으로 가장한 채 걸어서 왔다갔다 하거나 몸을 숨기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기부 요원들은 그들 일행이 커피숍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일제히 권총을 빼 들고 3명을 겨냥했다. 요원들이 덮치자 여자 간첩은 가느다란 목소리로 "여보, 여보…"란 외마디 소리를 질렀지만 남자 간첩은 별다른 반항 없이 순응했다. 그래서 예상과는 달리 상황이 싱겁게 종료된 것이다.
그 순간 안기부 요원들은 혹시 수류탄으로 저항하거나 자폭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몹시 긴장한 채 권총을 빼들고 외쳤다.
“꼼짝하지마!”
“움직이지마!”
“움직이면 쏜다!”
“옳지! 그대로 있는 거야.”
“잘하고 있지.”
최정남은 이내 눈을 감고 포기한다. 그는 아내를 외면한다. 항복한다는 표시로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린다. 그는 안도한다. 자신이 이 순간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고, 이렇게 체포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 지긋지긋한 공작원 생활을 끝내고 싶었다. 그는 남한에서 체포된 일부 공작원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잘살고 있음을 어깨너머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연정은 절망적인 모습이다. 심장이 오그라든 것처럼 느껴지고 위장이 쥐어짠 듯 경련을 일으킨다.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다. 힘들게 침을 삼킨다. 눈물이 흐른다.
염색한 검은 긴머리를 뒤에서 묶고 멋내기용 안경을 쓰고 위장한 젊은 여자 요원은 구석진 자리에 홀로 앉아 있다. 그녀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 아련한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남자 요원이 눈짓을 해서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녀 곁으로 다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착하기도 해라.” 그리고 나서 강연정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녀는 현장 요원으로 선발되어 고된 실전 훈련을 받았지만 처음으로 작전에 투입되어 약간 긴장했었다. 수류탄이 눈앞에서 터지면서 파편이 사방으로 튀는 환상이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쓰디쓴 에스프레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안 가득히 감도는 진한 커피향을 음미하면서 봄에 나온 고한우 가수의 데뷔곡인 ‘암연’의 가사를 되새기면서 자신을 달래고 있었다.
작성일:2022-08-22 12:35:15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