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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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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중편소설> 배신 혹은 전향 (4)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08-22 12:34:00
조회수
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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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김영환 (金永煥)과 윤택림
1989년이면 제6 공화국 노태우 정권 시절이다. 그해 1월 1일 해외 여행이 전면 자유화되었고, 5월 2일 동의대학교 사건이 발생했으며, 6월 4일 중국 천안문 사건이 일어났고, 7월 1일 의료보험제도가 모든 국민에게 확대 실시되었다. 6월 30일 전대협 대표 임수경 (그 당시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4년)이 단신으로 극비리에 평양에 도착해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 뒤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 축전에 참가해서 북한 학생위원회 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1995년까지 조국통일 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투쟁 등 8개 항의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1984년 봄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겠는가. 언뜻 보기에는 잠을 자는 듯 게으른 봄이 이제는 눈이 부시게 다가온다.
그해 봄, 파란 하늘은 부드러운 햇살로 가득했지만 봄의 색깔인 초록빛은 아직 옅었다. (오만불손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독재정권의 본색을 점점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암울한 시절이었다.
김영환은 어느덧 3학년이 되었다. 그 무렵 김영환이 활동하던 서울대 공개 서클인 고전연구회 멤버들 가운데 언더의 필요성을 느낀 사람들이 뭉쳐 (주로 82학번을 중심으로) 그들만의 언더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을 ‘고연 언더’라고 불렀다. 그때 멤버들이 나중에는 구국학생연맹, 반제청년동맹, 그리고 민족민주혁명당 (민혁당)까지 이어지는 주사파 핵심 그룹의 인맥을 탄생시켰다.
이듬해 (1985년) 지하 서클 고연 언더의 명칭을 단재사상연구회 (단연)로 바꿨다. 단재는 초기에는 강력한 민족주의자였지만 나중에 아나키스트가 되었던 신채호 선생의 호다.
1986년 3월 서울대 한 강의실에 지하 서클 소속인 운동권 학생 1백여 명이 집결했다. 참가자들은 이곳에서 국내 최초 NL (national liberation) 노선의 학생운동조직인 ‘구국학생연맹’을 조직하기로 했다. NL은 반제직투론을 주창한 반미 자주화 노선이었다. 한국 사회는 미국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맨 먼저 미국을 축출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CA와 PD는 사실 1970년대 운동권에서부터 맹아가 존재했기 때문에 NL은 나중에 생긴 그룹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반면에 PD (people’s democracy) 노선은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을 모델로 삼아 민주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단계로 간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면 북한을 동맹 세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CA는 제헌의회 (constituent assembly)의 약칭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면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다시 헌법을 만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자는 가장 노골적인 혁명 노선이었다.
NL노선이 대학 캠퍼스를 벗어나 사회 운동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다. PD계열은 6월 항쟁 당시 제헌의회 소집이라는 관념적이고 과격한 구호를 외쳤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NL계열은 독재 타도, 직선제 쟁취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구호를 내걸고 여러 반체제 세력과 연대해서 활동했다. 6월 항쟁이 승리로 끝나면서 PD계열은 몰락에 가깝게 위축된 반면 NL계열은 활동 범위가 크게 넓어졌다.
하지만 80년대 학생운동의 시작은 80년 5월 광주였다.
김영환이 언젠가 말했다. 80년 5월 광주는 80년대 초반 학번인 우리의 20년대 청년 시절을 정면으로 관통한 시대의 키워드였다. 누군가는 함께하지 못해 미안해했고 누군가는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피가 끓었으며 또 누군가는 배후를 찾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것이 역사적 숙제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5월이고 광주였다.

80년대 중반 무렵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발악을 하던 시절이어서 고문 기술자들의 전성기였다. 그 당시 악랄한 고문의 3대 명소는 안기부 남산 분실, 보안사 서빙고 분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등이었다. 1980년 봄, 김재규 장군은 서빙고 분실에서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온갖 몹쓸 고문을 당했다. 1985년 가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의장 김근태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0여 일에 걸쳐 순서대로 몽둥이질, 잠 안재우기, 물고문, 고춧가루 고문, 고문 기술자 이근안 경감에 의해 전기 고문을 당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1986년 6월에는 권인숙 양이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공문서 변조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연행되어 문귀동 경장으로부터 성고문을 당했고, 1987년 1월에는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86년 11월 ‘민족해방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김영환은 1심에서 징역 15년 구형에 7년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년 1개월을 복역하고나서 1988년 12월 정치범들이 대거 풀려날 때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물론 그 역시 체포되고 나서 어김없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조사를 받기 위해 끌려간 곳은 안기부 남산 지하실이었다. 거기서 장장 47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첫 사흘은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잠 안재우기와 몽둥이 찜질만 했다. 먼저 기를 쑥 빼내어 저절로 불도록 하는 수법이었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처음으로 조사가 시작되었다. 연속 27일 동안 쉼 없이 정말 죽지 않을 만큼 얻어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맞아도 과연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맞았다. 온몸이 퉁퉁 부어올라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여서 세면대에 고인 물에 비친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를 뻔한 적도 있었다. 빵처럼 부어오른 살을 꾹 누르면 푹 들어갔는데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오기까지 몇십 분이 걸렸다. 계속 얻어맞다보니 동물적 심리상태가 되어 고통받는 것과 고통받지 않는 것, 이 두가지만이 사고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 고문 집행자는 ‘너는 골병이 들어 제 명에 못살 거다’ 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 무렵 김영환과 서울대 법대 82학번 동기이자 고전연구회 멤버였던 하영옥은 자신이 주도해서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하는 지하 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 준비위원회’를 이미 만든 상태였다. 반제청년동맹은 김일성이 청년 시절 만주 길림에서 결성한 비합법 지하 청년 혁명조직의 이름이다. 반청은 민혁당의 모태가 된 전위조직이었다. 반청은 1989년 3월 3일 공식 출범했는데, 김영환은 하영옥의 권유로 이 조직에 가입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반제청년동맹 활동을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회 (전민연)’ 조국통일위원회 위원 직함으로 활동하던 김영환은 1989년 7월 초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철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 남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약속 장소에 나가자 전화를 걸어왔던 그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김영환을 만나자마자 서슴없이 자신의 정체를 털어놨다.

북한은 1989년 7월 남한 주체사상의 원조라 불렸던 김영환과 접촉했다. (그가 강철이라는 필명을 사용해서 여러 글을 썼던 것은 86년의 일이었고 「강철서신」이라는 책은 89년에 나왔다. 이 책은 그가 편집 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쇄되고 나온 다음에 이런 책이 나온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책에는 그가 쓰지 않은 글이 강철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글도 한 편 있었다.) 남파 간첩 윤택림은 김영환을 만나 북한과의 연계를 권유했다. 그는 북한과 직접 연계하는 것이 가져올 여파 때문에 고민 했지만 근본적으로는 혁명을 위해서 협력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감하고 이를 수락했다. 윤택림과 접촉을 통해 북한과 긴밀히 연결되면서 김영환은 이를 계기로 반제청년동맹 (민혁당의 전신) 위원장을 맡게 되고 1992년 3월 민족민주혁명당 (민혁당)을 출범시킨다. 민혁당은 그 당시 남한 내 최대 규모의 주사파 지하조직이었다.
민혁당의 정조직원은 100명가량이었다. 거기에 17개의 RO (revolution organization, 혁명조직)을 포함한 400명 정도의 조직원이 있었다. 그들이 민혁당의 뿌리였다.
김영환이 말했다. 1989년의 4월과 1990년 4월의 내 신분은 달랐다. 1989년에 나는 다른 중앙위원들과 다를 바 없는 남한의 자생적 주사파였지만, 1990년에 나는 남파 간첩을 만나 조선노동당에 비밀 입당한 신분이 되었다. 북한과 직접적인 연계선을 갖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주사파 운동권에서는 상하 지위와 명령 복종 관계를 규정하는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 요건이다.

1989년 6월 중국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한 학생과 시민들을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 해 내내 인민해방군은 천안문 광장에서 민중 봉기의 마지막 흔적들을 지우고 있었다. (동과 서, 독재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대결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11월 붕괴되고 나서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12월 몰타 회담에서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함께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해 5월 3일 부산 동의대학교에서 입시 부정을 이유로 학내 시위가 벌어졌다. 그때 전경 5명이 학생들에 의해 감금되고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사망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현장에서 학생 94명이 연행돼 그중 77명이 구속되어 31명이 2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받았고 46명이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다.
1989년 7월 초 그날 김영환이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던 것이다.
“지금 집 앞에 있는데 만날 수 있습니까?”
그는 당시 운동권 사람들은 대개 가명이나 위장된 직함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또 누가 연구 자료 같은 것이 필요한가 싶어서 별다른 의심 없이 나가보았다.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 남성이 노량진 사육신 묘지 건너편 골목의 공중전화 박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중간 키에 풍채가 좋았지만 평범한 얼굴이었다. 검은 테 안경을 썼고 서울 말씨였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으나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 남성이 말했다.
“잠깐 함께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살며시 미소를 건네면서 말했다.
“무슨 일로……?”
그가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북한에서 온 연락 대표입니다. 김 선생과 통일 사업에 관해서 논의하고 싶습니다.”
김영환은 그 순간 당황했다. 약간 흥분하기도 했지만 평소의 평정심을 잃지는 않았다. 본능적으로 주위를 돌아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며칠 후 12시에 평양방송을 들어보면 나올 것입니다. 그걸로 확인하면 될 겁니다.”
윤택림이 말한 내용은 ‘평양의 김영희 씨가 서울의 이경수 씨에게 보내기로 한 편지는 읽어드리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이었다.
〔1980년대 말, 북에서 남파된 두 사람의 간첩이 있었다. 윤택림과 진운방이다. 1989년 결성된 지하조직 반제청년동맹 초기, 윤택림은 김영환과 접촉했고, 진운방은 김경환과 접촉했다. 같은 지하조직에 있었지만 김영환과 김경환은 처음에는 서로를 몰랐다. 간첩조직은 원래부터 서로 단절된 점조직이다. 김영환은 나중에서야 김경환을 알게 되었고 그가 진운방을 소개해준 것이다. 그 후 북한은 혼선을 피하기 위해서 조정을 했다. 김영환을 총책으로, 김경환을 하부 연락책으로 한 것이다. 그런 후 윤택림은 북한으로 철수했고, 진운방은 남한에 계속 남았다.
윤택림은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다섯 차례나 남파되어 성공적으로 인무를 수행했기 때문에 영웅메달 1개, 김일성 훈장 1개, 국기 훈장 1급 4개를 받은 전문 공작원이었다. 90년대 말에는 대외연락부 5과장이었다.
김동식은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 정각사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체포된 뒤 전향한 북한 공작원이다. (본명이 곽인수이고 2014년 통진당 해산사건에서 정부 측 증인으로 출석해서 증언했었다.)
그가 말했다. “윤택림은 1999년 당시에는 북한 대외연락부 5과장이었다. 한때 남한에 5개의 망을 한꺼번에 운영했다. 그중 하나가 김영환이었다. 윤택림이 북한에 돌아온 뒤 그의 활동 성과를 자료로 만들어 모든 공작원이 돌려 봤다.”〕
남파 간첩 윤택림 (가명 김철수)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정말로 평양방송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 날 그를 다시 만났다.
여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지루한 여름날에 더위는 불같이 타오를 것이다.
김영환은 독학으로 주체사상을 공부하고 NLPDR 이론도 만들어냈는데 이렇게 남파 간첩까지 접선하게 되니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사실 언젠가는 마주칠 것이라고 숙명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주 빨리 스물여섯의 나이에 찾아왔을 뿐이다.
김영환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가 지시를 내리겠습니다. 제 지시는 본부의 지시 사항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우리는 가끔 접선해야 합니다. 서로 알고 있는 정보의 교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각별히 보안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마세요.
지금부터 내 이름은 ‘김철수’입니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저한테 어떤 직책을 부여해 주십시오. 그게 필요합니다.”
“그렇지요. 빠른 시일 내에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을 하는거요. 그러려면 입당식이 있어야 하지. 조선노동당 규약을 철저히 암기해서 숙지해야 하오. 그 규약의 깊은 뜻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공작원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게 끝나면 암호명을 부여할 겁니다.”
“무전기 등이 필요할 텐데요?”
“내가 무전기와 난수표 등 필요한 것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무심하게 묻는다.
“북한 인민의 생활 수준은 어떻습니까?”
“남한의 상류층보다는 못하지만 하류층보다는 잘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북한을 방문하여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십시오.”
“저에게 기회가 있을까요?”
“그렇고 말고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본부에 연락해서 일정을 잡겠습니다.”
“남한에서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이 있나요?”
“자본주의는 빈익빈 부익부이지요. 돈이 지배하는 사회는 천박해요. 돈보다는 인간이 중요합니다.”
“북한에서는 진정한 공산주의 사회가 실현되고 있나요?”
“장담하건데…… 우리는 평등 사회요. 우리끼리 잘살고 있소. 자본주의식 약육강식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 말씀에 동의할 수 있을까요?”
“그걸 알아야만 하오. 우리만의 내적 논리가 있습니다. 주체사상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이념이고 사상이오. 자본주의는 계속적으로 타락할 수 밖에 없어요. 내가 남조선에서 몇 달 살아보니 피부로 느꼈습니다. 자본주의는 결국 소멸할 거요. 남조선 인민들이 하루빨리 그걸 알아야만 해요.”
“조금 민감한 질문을 해도 될까요?”
“우리는 동지입니다. 꺼릴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1983년 10월 아웅산 테러 사건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지금 남한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자작극이라느니 북한의 소행이라니 하면서 말입니다.”
“북쪽에서는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믿거나 말거나 6·25 전쟁도 북침이라고 주장하고 있소.”
“제가 대학 2학년 때죠. 우리는 지금까지도 정부의 발표를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군사정권을 도저히 믿을 수 없으니까요. 왜……? 당사자 본인은 멀쩡하고 주변인만 죽었을까요?”
“북한군 특수 부대가 했습니다. 그건 빼도 박도 못하는 진실입니다. 세 명의 폭파 전문 특수 요원이 ‘동건 애국호’를 타고 9월 9일 옹진항을 출발해서 15일 새벽 버마 랑군강 입구에 도착한 겁니다.
그날 실수가 있었지요. 너무 일찍 누른겁니다. 그래서 철천지원수는 살아남았습니다.”
당시 운동권에서는 ‘북한의 소행이다.’, ‘남한의 자작극이다.’하는 논쟁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계속 주장했었다. 그것을 북한 간첩이 그 앞에서 ‘우리가 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시인한 것이다. (사실 그때 운동권에서는 ‘북한의 소행이라 하여도 통쾌하다’라는 반응마저 적잖았다. 그만큼 전두환 대통령을 증오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김영환은 윤택림과 관악산 등산 등을 하면서 6~7차례 더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윤택림이 물었다. “반제청년동맹을 출범시키면서 왜 당 명칭을 쓰지 않았나요?”
김영환이 대답했다. “남한에서 유일한 전위당은 한국민족민주전선인데 약칭해서 한민전이라고 했습니다. 당이라는 명칭을 쓰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라고 생각한 거죠.”
“한민전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어요. 그냥 노동당 사회문화부에서 임의적으로 쓴 명칭에 불과해요.”
“한민전이 실체가 없다면…… 정식으로 지하당을 만들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조선노동당처럼 당 명칭을 사용하는 거죠.”
“남한에서 혁명운동을 주도하는 지하혁명당의 건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당 명칭을 써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지하당을 결성하고 나서 적극적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합법적인 진보정당이 필요합니다. 김 선생께서 합법적인 진보정당과의 연계 방법에 대해서 깊이 연구해 보십시오. 그 정당을 지하당이 지원하고 조종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김영환은 윤택림에 의해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했다. 입당식은 관악산에서 진행되었다.
그날, 그들은 인적이 거의 들지 않는 관악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헉헉대며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며 솔잎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렸다. 다람쥐가 소나무 꼭대기를 향해 잽싸게 달아날 때 발톱에 나무껍질이 긁히는 소리가 났다.
공기는 상쾌하고 신선했다. 머리 위로 가을 낙엽이 살포시 떨어진다. 멀리서 아득히 도시의 소음이 들려왔다.
그들은 말없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는다. 윤택림이 앞장서서 걷는다. 그는 관악산의 작은 봉우리들, 샛길, 계곡의 물줄기, 지류, 굽이 등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파 간첩들은 혹독한 훈련을 통해서 독도법과 지형도를 잘 알았고 지형지물을 한눈에 익히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김영환은 끊임없이 갈등을 느낀다. 하지만 어차피 통과해야 할 거룩한 행사였다.
김일성 초상화나 인공기를 걸어놓지 않고 윤택림의 지시에 따라 조선노동당 규약에 대한 문답 형식으로 당성 심사를 받은 다음 입당 청원서를 선서 형식으로 낭독했다.
김영환이 받은 대호 (代號, 암호명)는 관악산 1호였다. 공작금 9백만원과 구식 무전기, 10개의 호출부호 (이 중 3개의 호출부호는 비상용이었다), 난수표를 받았고 난수 해독용 책은「나는 너에게 장미의 화원을 약속하지 않았다」로 정했다.
이제 조선노동당의 현지 당원이 된 것이다. 전두환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을 안고 대학에 들어가 사회주의 이념에 경도되고, 반미주의와 친북주의를 만들어내고, 지하조직을 만들고, 적발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고, 다시 지하조직에 가담하고, 급기야 남파 간첩을 만나 북한 간첩이 되는 기구한 운명의 굴레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리 특이한 삶의 궤적이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남한 혁명가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은 두 달에 한 번씩 평양방송을 통해 연락을 했다. 이를테면 방송에서 먼저 네 자리의 호출 부호를 말한 뒤 “전문을 보내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이어 숫자를 방송한다. 그러면 난수표와 해독표를 보고 지시 사항을 판독하는 식이었다.

1991년 2월경 김영환은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어느 빵집에서 김경환을 만나서 ‘진운방과 나 사이에서 중간 연락책으로 활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상호연락, 접선방법, 비상시 보안대책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1991년 8월 중순에는 그를 조선노동당에 입당시키고 ‘관모봉’이라는 대호를 부여했다. 그때부터 김경환은 김영환이 작성한 대북보고 문건들을 건네받아 진운방에게 넘겨주면 그가 북으로 보냈다.
김영환은 관악산에서 현지 입당할 무렵, 윤택림에게 받은 무전기가 있었다. 그런데 구식이어서 메시지를 전송하기가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보통 100~150자 정도의 짤막한 전문만 보냈고, 200자가 넘는 내용은 보내기 어려웠다. 1991년 북한을 다녀온 뒤에는 조유식이 디지털 방식으로 된 신형 무전기를 드보크를 통해 전달 받았지만 그 무전기 역시 긴 내용을 주고받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진운방을 통하면 하나의 짐을 더는 셈이었다. 북한과 길게 이야기할 내용이 있으면 장문의 문서를 준비하고, 진운방이 그것을 마이크로 필름에 담아 해외를 오갈 때 전달하는 방식으로 소통이 진행됐다.
진운방은 아내 종옥청과 딸을 데리고 일본을 통해 입국해서 활동했다. 그 당시 동남아식 콧수염을 멋있게 길렀고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누가 봐도 말레이시아 거주 화교라고 할 수 있었는데, 강남구 논현동에서 말레이시아 전통 음식점인 ‘삿떼리아 코리아’를 운영하고 있었고 명동에서는 ‘마코 인터내셔널’이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경환은 1989년 9월 중순 경부터 ‘삿떼리아 코리아’에서 진운방 (陳運芳), 종옥청 (鍾玉淸) 부부와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레이시아 국적의 화교로 위장한 북한 대외연락부 소속 공작원이었다.
진운방은 몇 달 지나고 서로 얼굴이 익숙해지면서 ‘나는 말레이시아 화교지만 사실은 조선족 출신이다. 북한에서 통일 사업을 하러 온 사람이다. 김 선생이 활동 중인 반제청년동맹 조직에 대해서 출범 초기부터 이미 알고 있다. 함께 통일 사업을 해보자.’고 제의를 했고, 그때부터 김경환은 포섭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92년 9월 26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 무렵 신변의 위협을 느낀 진운방 부부는 황급히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 부부는 종로구 동숭동에서 전세로 살고 있었다. 황급히 떠나면서 집주인에게는 ‘주택구입 자금을 가지러 중국에 다녀오겠다’면서 전세금 3천700만원 등 8천만원 상당의 재산과 가재도구들을 그대로 남겨둔 채 홍콩으로 출국한 것이다.
그 후 한달 뒤 전셋집 주인에게 국제전화와 편지를 통해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딸은 죽었고 나는 다리를 많이 다쳐 걸을 수가 없어서 한국에 갈 수 없다. 내가 남겨둔 007 가방, 핸드백, 수첩, 사진, 팩스 서류 등을 DHL편으로 홍콩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진운방의 소식은 두절됐다.
그때 북쪽 본부는 김영환에게 ‘조직 안전 위해 본부 련락원 철수시켰음. 현지 관계자들에게는 해외 여행중 교통사고로 중상을 당해 입국못하는 것으로 위장했음’이라는 내용의 통지문을 보냈다.

1990년 7월 하순 경, 황인오는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던) 전설적인 늙은 여간첩 이선실과 남파 간첩 권중현을 만났다. 그는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반쯤 머리가 벗겨졌고 165센티미터 가량의 다부진 몸매였다.
권중현이 말했다. “나는 대외연락부에서 파견됐습니다. 황 선생님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투쟁해 왔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사북 동원탄광 사태를 영웅적으로 주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미스유니버스 선발대회장을 폭파하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황 선생님을 만나보라는 김일성 주석님의 지시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권중현은 황인오를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그 후 황인오는 대둔산 11호라는 대호를 부여받았고 김춘배, 이윤하, 정중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0년 10월 17일 저녁 무렵 강화도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황인오는 남파 간첩들인 이선실, 권중현, 김돈식과 함께 북한의 공작 침투용 반잠수정을 탔다. 반잠수정은 남쪽으로 내려와 삼산면 남쪽 끝에서 강화만 쪽으로 올라가 NLL을 통과해서 황해남도 옹진반도와 연백군 사이 해주해협을 지나 해주에 도착했다.
그들 일행은 다음 날 새벽 해주 해군기지에 도착한 다음 벤츠 승용차를 타고 변두리 허허벌판으로 이동했다. 먼지가 자욱한 거리에 반바지 차림의 두 명의 소년이 나무 밑에서 놀고 있다가 그들이 탄 차가 지나가자 장난스럽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나서 깔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날 밤 서해 바다에서 올라온 얕은 밤안개가 뻘밭을 감쌌다. 바다의 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건너편 등대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뻘밭은 소금을 뿌려놓은 듯 수만 개의 하얀 물빛이 아득한 꿈결처럼 반짝였다.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절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고요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건평리 해안에서 방수복을 입고 긴 고무장화를 신고 북한 호송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발이 깊숙이 푹푹 빠지는 검은 뻘밭을 지나갔다. 새벽 2시경 그들은 대기하고 있던 북한의 공작 침투용 반잠수정에 올라탔다. 반잠수정이 깊은 바다로 나와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엔진 소리에 귓전이 윙윙거렸다. 차가운 밤바람에 온몸이 덜덜 떨렸지만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그들 일행은 해주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조선의 관문이라는) 평양 순안공항으로 날아갔다. 도착하자마자 먼저 만수대 광장에서 김일성 동상을 참배했다. 그때 이선실은 감격에 겨워 김일성의 발등을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흐느꼈다.
황인오는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사회문화부 사람들로부터 온갖 환대를 받았다. 사회문화부는 대남 조직을 총괄하는 대외연락부의 위장 명칭이었다.
특별 영화실에서 세 시간 동안 임수경 양의 방북 활동을 담은 영화 한 편과 김일성 주석의 국제적 사회주의 영도자로서 위대함을 부각하는 영화 두 편을 봤다. 그리고 북한에서 제일 호화로운 식당에서 특별 대접을 받았다. 산해진미가 가득한 식탁에는 북한에서 나오는 술이란 술은 모두 내놓은 듯 술병이 즐비했다. 그들은 함께 건배했다.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장군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건배했고, ‘다가오는 95년에는 기필코 김일성, 김정일 두 분을 통일의 광장에 높이 모실 것을 맹세’하는 건배를 했고, ‘이선실 할머니의 10년간의 공작활동을 성과적으로 마치고 무사히 귀환한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고, ‘황동무의 용맹한 결단과 사회주의 조국 공화국 북반부에 무사히 돌아온 것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다.
그는 돌아올 무렵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이창선 부장으로부터 아주 은밀한 지령을 받은 것이다. 그가 지시했다. “황 선생, 서울에 내려가면 남한 사회에 한 가지 소문을 퍼뜨려 보시오. 다름 아닌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을 다녀오셨다고 소문을 퍼뜨리는 거요. 다시 말하면 남한 전역이거나 대학 사회에 김정일 동지께서 축지법을 써서 남조선 인민 등을 위로하시는 등 신출귀몰해서 남조선 인민들이 김정일 동지를 열렬히 흠모하고 있다는 내용의 소문을 만들어 퍼뜨리는 거요. 이것은 일체 비밀이요. 부부장이나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고 황 선생만 알고 결행하시오.”
두 번째는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결성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너무나 크고 어려운 임무였다. 그리고 무전기, 권총 (벨기에제 FN BDA 콤팩트 권총), 일화 500만 엔과 주체사상 교양 책자 등을 가지고 함께 올라간 남파 간첩들은 평양에 그대로 남은 채 혼자서 반잠수정을 타고 건평리 해안을 통해 돌아왔다.
황인오는 1992년 7월 말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북한과 관계없는 자생적인 조직임을 주장하기 위한 위장 명칭은 ‘민족해방 애국전선’이었다)을 결성하고 총책이 되었다.

남한 조선노동당 당원들의 맹세문
- 나는 수령님께 무안히 충직한 수령님의 전사이다.
- 나는 영생 불멸의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주체형의 혁명가이다.
- 나는 조선의 영예로운 전사이다.
- 나는 민중과 운명을 같이하는 민중의 벗이다.
- 나는 목숨바쳐 조선과 혁명을 지킨다.
- 나는 한국민중의 애국적 전위이다.

하지만 그는 9월 9일 서울 북부경찰서 (지금은 서울 강북경찰서) 맞은편 생맥주 집에서 체포되었고 안기부의 수사과정에서 비로소 오랫동안 암약해온 이선실과 남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그 당은 탄생하자마자 한 달여 만에 소멸되었다.
중부지역당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안기부는 10년 동안이나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가 할머니 간첩 이선실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선실은 그때 북으로 올라가서 다시는 내려오지 않았지만 기구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제 간첩으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당하던 중 사망한 것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1991년 5월에 무슨 사건들이 일어났던가?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앞에서 시위 도중 (사복을 입은 경찰 체포조인)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강경대 학생이 숨을 거뒀다 (그의 장례식은 당국의 비열한 탄압과 방해를 받으면서 우여곡절 끝에 5월 14일, 18일, 20일 세 번이나 거행되었다).
그 후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대학생 3명이 연이어 분신 자살을 했다. 전남대 박승희, 안동대 김영균, 경원대 천세용 세 사람은 그 당시 모두 대학 2학년생이었다.
5월 5일 자 ‘조선일보’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저항 시인에서 생명 사상가로 전향한) 김지하는 ‘젊은 벗들에게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사흘 뒤인 5월 8일 서강대 박홍 총장이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말했다. “살아서 싸우지 죽긴 왜 죽어?”
“하루아침에 목숨을 두고 제비뽑기를 하고, 시체 팔이를 하는 패륜적 무리들이다.”
1991년 5월 8일 서강대학교 건물 옥상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전민련의 사회부장인) 김기설이 유서를 남긴 후 분신 투신해 숨졌다. 그 당시 (전민련의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은 유서 대필로 자살방조죄를 저지른 역사상 유일무이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1,151일의 감옥살이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2012년 10월 1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대법원은 재심을 결정했고, 2014년 2월 13일 서울 고등법원은 원심판결 (서울고등법원 1992.4.20. 선고 92노401 판결)을 파기하고 공소사실 중 자살방조죄의 점은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불복해서 6일 뒤 상고했고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했다. 유서대필 사건이 발생한지 24년이 지나서야 강기훈은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유서대필 사건의 핵심 쟁점은 필적 감정이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5명 감정인에 의한 재감정 결과 이들은 일치해서 필체가 다르다는 의견을 제시해서 1991년 당시 국과수 문서감정실 소속 감정인 김형영의 감정을 뒤집었다.〕

1991년 5월 봄날에 김영환은 북한에 갔다.
1991년 2월 평양방송을 통해 “적당한 시기에 통신 연락을 담당할 조직원 1명을 대동 입북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1991년 3월 초순경 김영환은 먼저 하영옥에게 방북 동행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래서 대학 1년 후배이고 과거 ‘구국학생연맹’ 활동을 같이 했던 조유식에게 “통일을 위해 아주 중요하고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같이 할 수 있겠느냐”는 제의와 함께 “나는 북한과 연결되어 활동하고 있다. 내가 머지않아 위로 올라갈 예정인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는 입북 권유를 하여 승낙받았다.
조유식은 1989년 10월경 울산 현대중공업 하청업체에 용접공으로 위장 취업했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징역 1년 6월) 만기 출소하여 쉬고 있었다.
1991년 5월 초 김영환의 연락을 받은 조유식은 16일 오전 가족들에게 “울산에 처리가 안 된 일이 있어 내려간다”고 말한 후, 그날 밤 김영환과 함께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해안에서 북한 호송원 두 명을 접선하였다. (건평리 해안은 그 전 해인 1990년 10월 17일 자정 무렵 남파 간첩 이선실에게 포섭된 황인오가 그들 일행과 함께 북한의 반잠수정을 탔던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썰물 때였고 김영환은 밀물 때였다.)
그날 저녁 그들은 외지에서 놀러 온 관광객처럼 가장하면서 ‘바다에서 난 것은 바다의 맛을 살려야 한다’, ‘냉동 식품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라는 철학을 가진 강화읍 어느 한정식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나서 인근 다방에서 믹스 커피를 마셨고, 그 후 택시를 타고 건평리 쪽으로 이동했다.
5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일몰에 물든 분홍색 구름이 솜털같이 바다 위로 부풀어 올랐다가 어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밤이 깊어 가면서 흐릿하게 해안가를 맴돌던 엷은 회색 안개가 바람에 쫓기듯 걷히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나는 아주 부드러운 밤이었다. 별빛에 물들은 밤하늘에는 보라색이 감돌고 있었다. 물기슭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지만 소나무 숲 주위의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고요했다. 그들은 그 아름다운 밤 풍경을 마음속에 새길 여유가 없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건평리 해안가 숲속에서 들릴락 말락 하는 소리로 띄엄띄엄 끊어서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지루한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린다.
김영환은 생각한다. 오늘이 1991년 5월 16일이야. 지금부터 꼭 한 세대 전인 1961년 5월 16일 그 빌어먹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지. 그날은 화요일이었지만 오늘은 목요일인 거야. 최용준 가수가 ‘목요일은 비’라는 노래를 불렀지.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어 그래서 이렇게 눈물 흘렀니’.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역사적인 밤이야…… 하지만 우리는 숨을 죽이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지. 우리가 결국 발각된다면…… 암호가 서로 맞지 않으면 어떡하지? 초소에서 총알이 쏟아지고 온몸이 벌집이 된다면…… 그건 비명횡사가 될 것이다. 그들이 무슨 사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선 맥이 풀릴 것이다. 그러면 없었던 일로 간주하고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야 하리라.
밤 12시가 될 무렵에서야 잠수복을 입은 북한의 두 명의 호송원이 살금살금 숲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암호를 교환했다.
여자와 사랑과 장미꽃은 사월의 날씨처럼 잘 변하지요.
오월은 푸른 하늘만 우러러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선임인 조장이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북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갈 겁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남쪽 괴뢰군 초소의 서치 라이트만 조심하면 됩니다. 서치 라이트에도 간격이 있습니다. 그 간격을 이용해야만 합니다. 있는 힘껏 빨리 달려야 해요.”
그들은 암호를 교환하고 나서 방수복을 입고 해안가 바닷물 속에 반쯤 잠긴 채 숨어 대기 중이던 반잠수정에 올랐다. 김영환과 조유식은 비좁은 배 밑창에 반쯤 누워서 비스듬히 앉았다. 호송원이 말했다. “선생님들 뚜껑 닫겠습니다. 지금 출발합니다.” 반잠수정이 건평리 해안을 빠져나갔다. 반잠수정은 맹렬하게 요동치면서 검은 바다 밤공기의 벽과 벽 사이를 가르며 빠르게 질주한다. 웅웅거리는 강력한 모터 소리와 물살 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은 계속 온몸이 덜덜 떨렸고 너무 긴장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먼바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하지만 (일당백의 특수 전투원인) 북한 호송원들은 경험이 많아서 아주 여유 있는 태도였다. 호송원이 ‘너무 추울 텐데 몸 좀 녹이라고요. 이럴 땐 술이 최곱니다. 이 술은 당 중앙에서 특별히 보낸 겁니다.’라고 말하며 작은 양주 한 병을 건넸다.
NLL을 넘어서자 호송원이 말했다. “여기서부터 공화국 바다입니다. 갑갑하시지요. 열어놓겠습니다.”
해주에 도착하자 선임 호송원이 ‘선생님 도착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육지에 발을 딛자 얼굴을 분간할 수 없는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 날 5월 17일 새벽 무렵 황해도 해주에 도착해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북한 사회문화부 소속 성명 미상 부부장, 대남공작 담당 부과장 윤택림 등의 영접을 받았던 것이다.
북쪽 억양의 낯선 사내가 말했다. ‘수고했시다. 어서 오시라요. 부부장입네다. 김 선생께서 크나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서 크게 기뻐하십네다.’
해주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조선의 5대 도시였다. 한양, 평양, 전주, 개성, 해주 순이었다. 한강과 예성강 하구 경기만과 해주만이 바닷길로 열려있다. 해주는 재령평야와 연백평야 덕분에 북한 최대 곡창지대이다. 재령평야의 젖줄은 재령강이고 연백평야는 예성강 하구에 있다. 해주 출신 역사적 인물을 꼽으라면 백범 김구, 안중근 의사, 장길산 등을 들 수 있다. 황석영 소설 「장길산」의 작중 인물들은 다들 해주, 개성, 강화도, 연평도 출신들이다.
하지만 해주는 1954년 북한의 행정구역이 황해북도와 남도로 개편되면서 황해남도의 도청 소재지가 되었고, 북한 해군의 주력 부대인 서해함대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해주 시내에는 석탄 연기에 그으른 듯 잿빛의 2층이나 3층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너무 초라하고 살풍경하다. 변두리 먼지가 자욱한 거리에는 ‘미군은 철수하라.’,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라는 낯선 현수막들이 걸려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변에 있는 집들은 대부분 상하수도나 전기같은 기본적인 시설도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김영환은 밀입북 9일째인 1991년 5월 25일 아침에 대남공작기구인 사회문화부 부장 (당시 이창선)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가서 묘향산 김일성 별장에서 김일성을 만났다.
그때 이창선이 말했다.
“김 선생! 김일성 주석을 만나 뵙는 것을 영광으로 아시오!
아무나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의할 게 있습니다. 절대로 말대꾸를 하면 안 됩니다. 어떤 곤란한 질문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용안을 정면에서 빤히 쳐다봐도 안 됩니다. 그건 불경한 짓입니다. 그리고 감격에 겨워서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다. 눈물이 안 나오면 억지로 짜내세요. 눈물이 나오면 닦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두세요. 주석님 앞에서 흐르는 눈물은 신성해요.
주석님은 신이에요. 신이란 말입니다. 공자님이나 예수님보다 더 높은 신이란 말입니다.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는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고 얼굴은 말끔하게 면도를 한 모습이다. 그는 말할 때마다 숱이 많은 눈썹을 씰룩이며 억지 미소를 지었는데 얼굴 전체에 부드러운 잔주름이 잔뜩 생겨났다가 금방 사라졌다. 화들짝 놀라서 곧바로 옷깃을 여미며 정색을 했기 때문이다. 유별나게 과민했고 신경질적이었다. 절망적일 만큼 괴팍하고 변덕스럽고 뇌가 없는 사람처럼 아둔했다. 완전히 비정상적인 인물이었다.
첫날은 별 얘기 없이 인사만 했고 다음 날에도 똑같은 방식으로 만났다. 오찬 자리에는 사회문화부 부장과 담당 과장이 배석했다.
김일성을 만나보니 그의 사상이나 국제정세 인식은 1930~40년대의 그것에 완벽하게 박제되어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도 모른 채 반세기가 지난 그때까지도 빨치산 활동을 하던 시기의 추억에 묻혀 그저 찬란했던 옛날만을 회고하며 살아가는 노인처럼 보였다.
(그 당시 80세의 늙은 노인이었던) 김일성은 원래 막무가내 혼자 떠벌이는 스타일인데다가 김일성 앞에서는 누구도 함부로 말을 못 하기 때문에 김영환 역시 조용히 훈시를 듣기만 했다.
김일성이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란의 라프 산자니 대통령이 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내가 ‘이란은 어떻게 혁명에 성공했느냐’고 물어봤더니 ‘따로 혁명조직이 있었던 게 아니라 회교조직을 통한 사상의 전파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사령관의 부관을 먼저 끌어들인 뒤 (부관의 상사인) 사령관을 항복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군인 30만 명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남조선 인민 천 명만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면 남조선 혁명은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
남조선 인민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는 것은 남조선 인민들이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상이 중요하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리는 사실을 폭로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상이 중요하다.
강철 시리즈라는 김 선생이 쓴 글을 많이 보았다. 내가 눈이 나빠 글자를 확대해 보았는데 참 훌륭한 글이었다. 특히 반미 투쟁과 관련된 글을 관심 있게 읽었다. 남조선에서 김 선생이 이끄는 혁명조직에 격려를 보낸다.
김영환과 조유식은 북한에 17일간 머물렀다. 북한 당국은 두 사람이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었다. 특별대우였다. 누구를 만나고 싶다고 하면 만남을 주선하고, 어디 가고 싶다고 하면 그곳에 데려갔다. 김정일이 보냈다는 산삼도 먹었다. 심지어 이왕 온 김에 백두산과 금강산도 보고 가시라고 권했지만 두 사람이 놀러 온 게 아니라며 거절했다.
조유식은 5월 17일 김영환과 함께 평양 근교 소재 모란초대소에 수용되어 15일간 무전기 사용법, 지령문 해독법 등을 교육받았다. 1991년 5월 하순경 초대소에서 김영환과 조유식은 사회문화부 부장, 부부장, 과장, 지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윤택림의 사회로 거행된 입당식에서 정식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조선노동당에 정식 입당하기 위해서는 당 규약과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먼저 학습해야한다. 이 원칙은 요약하자면 ‘위대한 김일성 동지 사상을 온 사회에 일색화 하기 위해 투쟁하고, 김일성을 충심으로 모시고, 김일성의 권위를 절대시하며, 무조건 김일성 교시를 신조로 담아 관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당성 심사를 받고 정식 당원 입당을 승인 받으면 당증을 수여 받는다.
그들의 머릿속은 대단히 복잡했지만 그래도 북한에 왔으니 또 한 번의 노동당 입당식이 열린 것이다. 남한에서 윤택림의 주선으로 입당한 것은 ‘현지 입당’이라 하였고, 북한에서 정식 입당을 하게 된 것이다.

5월 30일 김영환과 조유식은 함께 남포항 인근 대남공작 해상기지로 이동해서 어선으로 위장한 공작 모선을 타고 서해 공해상을 항해하여 양자강 하류에서 식량과 유류 보급을 받았다. 제주도 남단 공해상까지 이동한 후 작은 보트로 갈아타고 어떤 지점까지 이동하여 그곳에서 잠수복으로 갈아입은 후 추진기에 몸을 싣고 6월 1일 밤 11시경 서귀포 부근 모래사장에 도착했다. 당일은 서귀포 인근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비행기 편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조유식은 서울대 정치학과 83학번으로 김영환의 1년 후배였다. 김영환이 82학번 운동권의 대표 주자라면 그는 83학번 운동권의 리더로 평가받았다. 구국학생연맹, 반제청년동맹 때부터 아주 깊은 인연을 맺어왔었다. 그는 4학년 때 ‘구국학생연맹’의 투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구속 기소되어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그래서 1991년에 북한에 갈 때도 동행할 만큼 서로 신뢰가 깊었다. 그 후에도 북한과의 연락책을 맡았다. 북한 공작원 윤택림과 중국, 러시아, 싱가폴 등에서 만나서 자금을 전달받으면 비밀 장소에 보관했다가 김영환에게 전달했다.
(그 당시 김영환의 연락책은 조유식과 윤택림 라인이 있고 김경환과 진운방 라인이 있었다.)
그런 특수한 역할 때문에 나중에 민혁당 조직에는 함께하지 않았지만, 조유식은 김영환의 사상과 이념이 변화된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적극 지지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월간 「말」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김영환의 변화된 생각이나 신념을 「말」지를 통해 대외적으로 알리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김영환의 대북 연락책으로 활동했던 조유식 (암호명 관철봉)은 1999년 민혁당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인터넷 서점 알라딘을 창업해 운영하였다. 김영환과 함께 전향이 인정되어 공소보류 조치 돼 석방된 이후에도 알라딘 운영에 전념해오고 있다. 알라딘은 국내 대표적인 인터넷 서적 판매 사이트로 성장했다.〕
조유식이 훨씬 나중에 회고하는 것처럼 말했다. 조유식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나는 인상적인 장면 둘을 말했다.
먼동이 틀 무렵 황해도 해주 해안가에 내려서 승용차로 시내로 들어가는데 유리창이 깨지고 버려진 것 같은 건물들이 차창 밖으로 보였다. 내가 폐공장인가봐요 라고 말했더니 동승한 연락원이 아닙니다. 아파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깜짝 놀랐다. 남한보다 못살거라는 건 익히 짐작했지만, 마치 영화에 나오는 폐허의 도시를 보는 듯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충격이었다. 또 한번은 주체시상탑을 갔는데,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통로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카펫 바깥으로 걸어 올라갔는데, 그걸 본 관리인이 제 길로 안 갔다고 화를 내며 나에게 욕을 했다. 물론 내가 남쪽에서 온 손님이란 건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게 더 문제 아닌가. 굉장히 관료적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1992년 4월 12일 북한은 강화도 무인함에 공작금, 무전기 등을 매몰했으니 발굴할 것을 지령한다. 조유식은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의 드보크 (Dvoke, 간첩장비 비밀 매설 장소를 말한다. 무인포스트, 무인함이라고도 한다. 주로 북한에서 남파된 공작원들이 공작금, 무기류, 송수신기, 통신문건 등을 습기가 차지 않게 기름종이 등에 싸 플라스틱 통, 병 등에 담아 묻어 놓으면 고정간첩 등이 이를 찾아간다.)에서 40만 달러 (당시 약 3억원) 권총 2정 및 실탄, 무전기 2대, 보고용 난수표를 파내 김영환에게 전달했다. 이 40만 달러는 조유식 명의의 통장에 입금했고 민혁당의 결성과 활동 자금 등으로 사용됐다.
작성일:2022-08-22 12:34:00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