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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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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변호사가) 웬 소설을……?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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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등록일
2022-07-07 14:39:28
조회수
439
5. 나는 훔치거나 모방한다.
어떤 작가도 무에서 출발할 수는 없다. 위대한 작가들 중에서 누가 무에서 창조를 이루어냈을까. 그들은 무에서 작품을 창조한 조물주란 말인가. 우리가 쓰는 언어를 누가 발명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우리는 다만 과거를 기억하고, 모방하고, 가끔 훔칠 뿐이다. 나의 언어 속에는 남모르게 훔친 남의 글이 내재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거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수만 년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의, 익명의, 이름 있는 이야기꾼, 작가들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넘게 똑같은 형식과 내용, 재료, 주제를 가지고 우려먹었으니, 단언컨대 새로운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변형이고, 변주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졌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미 3,000여 년 전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남의 것을 훔치고 모방을 하며 배운다. 내가 무슨 탁월한 상상력이나 번뜩이는 영감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모방. 모방의 모방. 절도. 모조품. 반복. 위선. 위악. 진부함. 클리셰 Cliché.
그런데 모방과 절도의 가장 고귀한 형태인 표절의 한계는?
상호 텍스트 (intertext) 또는 상호 텍스트성 (intertextuality)이란?
최근 문학 이론가들은 그걸 ‘상호 텍스트’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한껏 미화시키고 있다. 그들은 애써 표절의 문제점을 외면한 채로 모방 또는 영감이라고 하였다. 모든 작품은 다른 많은 작품들과의 연결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 작품은 그것이 선택하고 반복하고 변형하여 도전하는 이전의 작품들에 의해서만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필립 솔레르스는, ‘모든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의 접점에 위치한다. 모든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의 다시 읽기이자 강조이자 한데 엉겨 굳어짐이자 이동이자 깊이이다.’이라 말했고, 엘렌 모렐-앵다르는 ‘모든 텍스트는 인용들을 쌓아올려 만든 것이고,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형시킨 살아있는 글이다. 글쓰기란 다시쓰기다.’라고 했다.
롤랑 바르트는,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고,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않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에서는 변용과 증식이 일어난다.
바르트는 문학에 있어 모방이나 표절의 문제는 어쩌면 문학 언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저작권 개념을 원리적으로 부정했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 주로 누구로부터 모방을 하고 배우고 있는가. 문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끊임없이 무작정 읽었으니까 널리 모두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별히 누구로부터라고 의식하지는 못 한다. 그러나 작가가 지독하게 읽지 않으면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그 동안 수천 권의 책 (그 책들은 우선 소설에서부터 역사, 철학, 문학, 법학, 생물학, 동물학, 천문학, 지리, 여행기, 기타 잡서 등등 수십 종에 달하지만)을 읽고 또 읽었고, 지금도 매일 눈이 짓무르도록 매일 책을 읽고 있으니,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경우를 어떻게 기억할 수 없다. 기억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변경, 왜곡, 조작, 소실된다.
나는 호르헤스가 말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도 아라비안나이트에서 1001개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세헤라자데’도 아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참으로 애매하고 모호하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조금 전 일도 그렇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기억은 변경, 왜곡, 조작된다.
다만 그들 책들로부터 무슨 대단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책들의 의미와 내용이 내 잠재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깊이 스며들어 정신적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얼굴을 들이밀고 나온 얼마 되지도 않은 내 작품들에는 소위 말하는 메타 텍스트적 또는 상호 텍스트적 요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들어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야할 것이다.
소설은 자기 자신 속에서, 독자 속에서, 작가 속에서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독자들의 몫인 해석을 스스로 하고 그것을 끝까지 해체한다. 그것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실재를 세밀하게 포착하여 개별적으로 쪼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장편소설 사하라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여러 부분이 중·단편 소설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소설 간에는 종속 관계 또는 차용 관계는 성립되지 않으며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다. 그렇다고 상호 배타적이지도 않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고심 끝에 의도한 바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자료와 주석을 참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내가 구축한 세계를 더욱더 확장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담론 (장편에서는 불가피하게 매몰될 수밖에 없는 작은 주제들인)을 부각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되풀이 되는 특정한 인물과 주제. 주제가 반복되고 주인공의 목소리가 누적되면 하나의 총체적인 목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걸 가지고 전혀 근거가 없고 개념 정리가 안 된 해괴망측한 용어인 자기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자기 표절의 원조는 다름 아닌 신 자신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었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이야기의 뒤에는 그 인물들의 또 다른 삶이 있다. 그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소위 후일담, 그 후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 않은가. 그런 이야기를 추가하고 싶은 것이다.
다만 작가가 자신의 창작 과정을 지루하게 내세우면 그건 촌스럽고 오만하고 진부하다고 비난받을 수 있다. ‘예술가여! 창작은 하되 말하지는 말라!’ 라는 금언을 되새겨야 하리라. 그러나 이는 유명작가에게나 해당하는 일이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나 같은 무명에게는 상관없는 일 아니겠는가.

6. 역사가 짧은 소설에도 미래는 있는가.
지금 우리 소설들은 이야기는 내용이 너무 빈약하고 변곡점에서 느닷없이 또는 지나치게 비틀어서 탈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지겨워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랬으니 현대 소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와 비교하면 그 역사가 극히 짧은 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일부 평론가들과 작가들 스스로 소설에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수요는 늘어나지 않고 계속 줄어드는데 이상한 소설은 공급과잉인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나는 자신을 비평가가 아닌 소설가로 간주한다. 그러나 소설이 아닌 소설적인 것의 소설가이다. 나는 소설적인 것(romanesque)을 사랑한다. 그러나 소설이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1960년대 초반 미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레슬리 피들러가 소설의 종말을 선언한 이후 보편화되기 시작했지만, 소설이 죽었다는 생각은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모더니스트들 사이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T.S. 엘리엇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모든 가능성은 플로베르와 헨리 제임스에 와서 끝이 났다고 선언했다. 현대에 와서는 텔레비전과 영화, 컴퓨터의 보급과 인터넷의 발달과 같은 대중문화의 번성으로 인해 소설이 누리던 특권은 대부분 사라졌다. 소설은 각종 영상 매체들과 경쟁할 수 없는 낡은 양식으로 판명된 것이다. 더욱이 반소설의 등장 등 소설의 서사적 형식의 고갈 역시 소설의 죽음이라는 관념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소설은 모든 예술 형식 중에서 충분하리 만큼 열려있고, 길고, 폭 넓고, 대담하고 진득하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상처를 입기는 하겠지만, 어떻든 영원히 살아남을 만큼 내구성이 있는 것이다.
중국 춘추시대 정나라의 유명한 학자이면서 중국 최초의 직업 변호사였던 등석은 논변 이론에서 좋은 말을 ‘큰말 大辯’이라고 하였고, 하찮은 말 또는 나쁜 말을 ‘작은말 小辯’이라고 분류하였으니 소설은 분명히 하찮고 나쁜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小說은 中說도 아니고 大說도 아니고 雜說이다. 소설은 잡초처럼 질기고 포용 능력 역시 한계가 없다. 소설은 잡설이므로 그 내용 속에 논문이나 학설, 시나 에세이, 르포, 잠언, 오마주, 패러디, 독백, 철학이나 과학, 온갖 잡설을 다 풍부하게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소설의 정체성은 훼손되지 않으니. 오! 너무나 위대한 잡설이여.
이제는 소설의 본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인간의 일생이란 삶과 죽음의 연속과 순환이다. 처음, 중간, 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 역시 그러한 연속과 순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소설은 살아남을 것이다.
인류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고 스토리리슨닝 애니멀이기 때문에 결코 이야기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타자와 언어를 매개로 하여 이야기를 교환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성의 본질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 섭취에 대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이다. 우리는 천일야화를 읽으면서 인간의 그 욕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정확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리얼리티가 살아있어야 한다. 이게 소설에 대한 나의 확고한 지론이다.
롤랑 바르트는 강조했다. 소설에서 세부적인 것이야말로 즐거움의 대상이어서 텍스트를 읽게 하므로 세부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가장 덜 오염되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생명력이 긴 것으로 간주하였다. 실상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살아남는 것은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아닌 바로 아주 세부적인 삶의 일상적인 양상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모더니즘,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지금은 이미 사라져버린 장르인) 마술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설일지라도 그 소설이 구축한 허구의 세계 속에서 인과관계가, 앞뒤가 잘 들어맞는 꽉 짜인 이야기여야 할 것이다.
소설은 현실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한다. ‘왜 소설보다 현실이 이상해 보이는가. 소설은 어쨌거나 말이 되어야 한다.’(마크 트웨인)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작가는 가능한 선까지, 그리고 가능한 한 자세히 소설이라는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움베르토 에코)
그렇다고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에서 비극의 원칙으로 가장 중요시 했던 반전이나 반전의 반전, 반전의 연속이 소설에 필수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에코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대해서 ‘과잉의 시학’이라고 하였다.
나는 자신의 경험을 정직하게 간직하고 있다. 사람들의 오랜 경험은 인간 내면의 가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삶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으면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걸 잃은 후에야 겨우 뭔가를 깨닫는다. 나는 인간 삶과 죽음의 조건, 인간의 운명과 같은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탐구할 생각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 안에 죽음을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이 죽음이고 죽음의 시작이 삶이다. 죽음은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것이다.

7. 사하라에 대한 단상들 (1)
지금부터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읽지도 않고, 여하한 형태의 비평도 해주지 않는) 장편소설 사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겠다.
사하라에서 김규현(金圭賢)은 투아레그족 청년 이브라함(Ibraham)과 함께 사하라 사막 남쪽을 여행하던 중, 고물 자동차가 고장 나고 사막 속의 사막에 갇히면서 목이 말라 갈증 때문에 죽는다. 아주 솔직히 말해서, 과격하게 말하면 그는 사막에 완전히 매혹되어 사막에 미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사막에서 목말라서 갈증으로 죽어야 했지만, 나는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결코 사막에 완전히 매료된 바도 없고 더욱이 사막에 미친 사람도 아니다. 이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순진한 독자들 몇몇은 자주 그와 나를 동일한 인물로 오인하기 때문에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작가이지만 작가와는 분리된 소설의 화자와 작중 인물의 타자성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작가는 배우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작가는 배우처럼 자기와는 전혀 다른 배역과 다른 인간성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상상적 세계인 소설 속 인물을 실제 인물과 동일시하고 싶은 독자의 정당한 욕망을 이해한다. (그게 바로 감정이입이고 그래서 독자는 작품에 푹 빠져서 계속 책장을 넘긴다고 하지 않는가) 작가와 (또는 화자와) 소설의 주인공이 미분화된 고백 형식의 사소설, 1인칭 소설이 한 때 (일본의 초기 자연주의 문학 시절) 일본 소설의 전통이 된 적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김규현은 실재하는 인물이거나 어떤 인물의 모방이 아니다. 작중 인물은 인간 본성의 은유인 예술적 창조물이다. 그는 3차원적인 입체적 주인공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그렇게 어리석고, 무구한 사람을 어디서 찾을 수가 있을까. 왜 그는 자기 스스로 설정한 경계선에 갇혀 모진 고통 속에서 살다가 일찍 죽어야만 했는가. 이게 이 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제기하는 진지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떤 이유로 이 세상에는 온갖 죄악과 부조리, 고통과 고난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 사악한 인간이 고통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인간은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무구한 사람이 크나큰 고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정의로운 인간이 사악한 인간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사악한 인간들이 횡행하고 그들이 세상을 좌지우지 지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는가. 정말 위대한 유일신이 존재하는가.
그런데 기독교의 종말론적 계시론은 ‘때가 온다.’고, 악의 시대가 거의 끝나간다고 강조했다. ‘회개하라, 복음을 철썩 같이 믿어라.’ 그리고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어떤 고통도 없고 가난도 없는, 진리와 정의, 평화만 있는 유토피아,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2,000년이 넘게 기다렸지만 어떤 기미도 느낄 수 없으니 독실한 범신론자인 내가 유일신을 믿지 않는 이유이다. 나는 이 세상에는 악과 선이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고 악의 세력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믿는다. 악은 필요악이고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일부 독자들은 말한다. “소설이 쓸데없이 어려워요. 그래서 몇 장 넘기다 읽기를 포기했지요.”, “소설에 깊이가 있기는 해요.”, “소설이 너무 재미없어요. 재미가 없으면 소설이 아니지요” (하지만 재미가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지루하다는 것이다. 소설의 지루함이란? 왜 소설이 꼭 재미있어야 할 책무라도 있다는 말인가? 왜 소설이 난해하고 불투명하고 지리멸렬하면 안 되는가.), “김규현이 누구예요. 인터넷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실제 인물이 맞나요.”, “그런데 사하라에는 몇 번이나 다녀왔지요?”
(이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밖에. 내가 가기는 했었던가……? 그러면 몇 번이나……? 아니면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던가? 그게 진실일 것이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이 그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음을 눈치 챘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 더 주의 깊게 끝까지 읽어보세요.”라고 말할 용기는 없다. 일상생활에서 너무 바쁜 그들이 그걸 왜 읽겠는가. 수긍이 간다. (그러니까 폴 오스터의 말이 생각난다. 그는 글쓰기를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것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스탕달은 1822년에 지금은 너무나 유명한 연애론을 출간했지만 그 당시에는 11년 동안 단 17권 밖에 팔리지 않았다. 그때 출간 당시 스탕달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 책의 평판이 어떤지, 출판사에 넌지시 물어 보았다. 출판사 영업 직원이 대답했다. “그것은 신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도 집어 들거나 펴보려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사하라는 지금 신성한 책이 되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일단 책을 발표하고 나면 그 작품은 자신의 손을 떠난 것이고 세상으로 나간 책은 자신만의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소설에 대해 자부심과 자포자기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러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실낱같은 존재의 개연성만 있어도 그 책은 얼마든지 실재한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으니, 그 책도 가냘픈 생명력으로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소설을 다시 읽기가 민망하면서도 여전히 그걸 붙잡고 있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내게는 너무 중요하다. (나는 사하라를 수십번씩 수정하면서 수백 권의 참고 문헌을 읽고 또 읽었고, 5,000매 이상의 사진을 엄밀하게 검토했고, 30편이 넘는 다큐멘터리 필름을 돌려보았다.)
소설의 배경을 바라볼 때 대가는 그것을 단지 충실하게 묘사하는 일은 피하는 법이어서 사실 그대로 그리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만을 전달하려고 한다는데, 나는 대가는커녕……. 하지만 생생한 배경은 또 하나의 인물이다. 사하라는 아랍어로 황무지 또는 사막이라는 의미이지만 신의 정원인 사막에 대한 세밀한, 생생한 묘사를 어떻게 소홀히 할 수 있었겠는가.

8. 나는 어떻게 소설을 써야할까?!
소설은 작가와 독자 간에 암묵적으로 체결한 약속을 전제로 한다. 소설은 허구인데 작가는 진실이라고 말하고 독자는 모르는체하면서 그렇다고 믿는다. 독자는 불신을 잠시 보류하도록 공공연히 요청을 받는다. 독자는 속아 넘어가기 가장 쉬운 사람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자신을 속이는 ‘꿈의 예술가’이고, ‘가짜라고 알려져 있지만 진짜처럼 느껴지는 착각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거짓말이 없다면 인류는 절망과 지루함으로 죽어버릴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
글 쓰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서는 글 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는 글 쓰는 방법을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글을 쓴다. ‘어떻게 글을 쓸 것인가’하는 질문은 ‘왜 쓰는가’라는 질문과 ‘무엇이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질문은 답변이다. (폴 오스터)

나는 어느새 리얼리즘 또는 사회적 또는 비판적 리얼리즘을 신봉하는 작가로 변모하면서 디테일에 집중한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 그래서인지 반복해서 세밀한 묘사에 집착하고,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소설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려고 분주하다.
소설은 이야기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우화적인 의미를 동시에 담아내야 하느냐를 가지고 고심하고, 너무 진지하고 지나칠 정도로 엄숙한 것은 현대의 이단이기 때문에 유머와 난센스가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느끼고, 내 주변의 이야기, 사소설은 대부분 너무나 어리석고 사소한 주제이기 때문에 결코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비판적 리얼리즘을 신봉한다면 사회의식의 고취, 정신 대 물질의 대립, 자연의 법칙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법칙인 ‘약자생존의 법칙’ 등을 주제로 한 소설을 써야만 할것이 아닌가. 하지만 도스토엡스키 소설들의 작중 인물처럼 살인과 범죄에 병적으로 집착하면서 타락하고 일그러지고 삐뚤어진 역겨운 인물들을 모방하거나 창조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인간성이 풍부한 정상적인 인간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특이한 단어를 발견하면 지워버리고 평이한 단어로 대체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뻔하고 흔해빠진 상투적 어구만은 피해야만 한다. 내가 창조했던 인물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그가 까칠하고 악인인 경우에도 말이다. 표현이 멋있지만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문단을 살리려고 하지 말고 버릴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과감하게 삭제하면 미심적었던 부분 전체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을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상상력을 무한정 발휘할 수 있으니까 쉬워 보이지 않는가, 또 환상특급 같은 부류의 소설은 어떠한가, 어쨌거나 기괴한 이야기들 아닌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니 나의 경우는 고지식한 엄숙주의 때문에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일상생활에서나 소설에서 애매하거나 무질서한 것을 견디질 못하는 습성을 이제는 버려야만 하지 않을까, 지금쯤은 절대로 못 버릴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누군가 소설은 과도해지기 쉬운 장르라고 지적했지만 (보르헤스는 “모든 장편소설은, 최고 수준의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군더더기가 들어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단 한편의 장편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구차한 변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가망 없을 정도로 소설이 지루하게 길어지면 안 되니까, 적당한 선에서 끊거나 삭제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끝맺을 것인가? 그걸 어떻게 잘 알 수 있을 것인가. 작중 인물이 작가로부터 해방되어 질주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아니면 철저히 통제해야만 하는가, 인간의 내면 속으로 파고들어 가야한다. 내가 누굴 흉내 낼 수 있을까, 지금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누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부인하고 싶기 때문에, 아니면 뭔가 숨기고 싶어서인가. 또는 어떤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아무리 온 세상이 인정하는 법칙이라고 해도 그 법칙을 무작정 추종하지 않고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누구도 존경하지 않는다는 니힐리스트 때문인가, 그렇다면 스스로 니힐리스트 또한 센티멘탈리스트임을 자인하고 있는가. 나는 소설에서 역사적, 지적 요소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야기 속 인물과 행동, 사건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역사는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역사는 허구이고 기껏해야 반쯤만 진실이 아닐까, 역사는 선택이다, 그렇지만 명백한 역사적 진실을 왜곡, 조작, 부정, 무시, 남용, 오용해서는 안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인훈의 「광장」과 김경욱의 「나라가 당신 것이니」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에 쓰여지지 않은 역사의 이면, 빈 공간, 침묵, 암흑을, 역사에 편입되지 않은 무시되고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 사실들을 발굴 해야 한다. 역사가들은 실제 역사의 이면에 존재하면서 역사에 희생돼 매몰되어 버린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모든 요소가 왜 시계장치처럼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할 것인가, 좀 더 혼란스럽고 거칠고 대담하면 어떻게 될까, 19세기 정통 리얼리즘 소설처럼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한, 견고한 플롯과 인물, 토대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러나 현실보다 더 초현실적이고 상징적인 것은 없다. 헤밍웨이처럼, 내가 한 편의 이야기를 끝 마쳤을 때 텅 비고, 슬픈 느낌이면서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철학적 주제와 관련한 사색을 소설의 기본 토대로 삼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시된 수많은 테마들과 모티브들이 변주되면서 분해되고 용해되며 서로 뒤엉켜서 화음을 이루고 결국에는 통일성을 이루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타고난 소설가는 아니기 때문에 또한 지금쯤 모든 감수성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면 표류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쓸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강박적일 만큼 헌신과 열정,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감 부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죽을 때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심혈을 기울여 몇 번씩이나 수십 번씩이나 수정하고 수정한다. 결벽에 가까운 수정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임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건 우울한 아이러니이다. 그런데 글이란 수정하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는다. 이미 발표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고치고 또 고쳐야 한다. 고쳐야만 한 편의 글이 탄생한다. 소설도, 시도, 에세이도, 편지도, 소장이나 준비서면도 고치고 고쳐야 한다.
내가 아는 한 톨스토이도, 헤밍웨이도, 피츠제럴드도, 샤토브리앙도, 드 메스트르도, 밀란 쿤데라도, 소설가 대부분, 시인들도 모두 끊임없이 수정했다. 르 메스트르는 그의 아오스토 골짜기의 문둥병자를 17번이나 고쳐 썼고,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 있거라의 결말 부분을 47번이나 고쳐 썼고, 프루스트는 죽기 전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초판본을 고쳐 썼다.

9. 사하라에 대한 단상들 (2)
무라카미 류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 소설에서 당신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요?”라고 묻자 “그것에 대답할 수 있다면 소설 따위는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음은 작가가 주제넘게도 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독자의 입장에서 비평적 관점으로 말하는 것이다. 작가는 최초의 독자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내 안에서 작가와는 분리된 다른 존재, 즉 작가를 의심하는 비평가적 독자로 존재할 수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사하라는 소위 말하는 액자소설인지 모르겠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쓰고 또 쓰는 과정에서 전혀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많은 주제를 포용하게 되고 그 주제들이 위태롭게 소설의 구성을 떠받치고 있다.
그것은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데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사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칼날 위에 서서 이야기가 이야기를 낳고, 다시 낳고, 그렇게 해서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강박증 환자였던 샤푸리 야르 왕은 이야기를 듣는데 몰입했고, 그래서 그들은 일시 그 한계적 상황을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서있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고 여러 겹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이야기에 몰두했기 때문에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죽음의 악몽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란 그런 것이다. 말하는 쪽이나 듣는 쪽이나 몰입하게 하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롤랑 바르트가 ‘쓰는 사람의 영광, 감옥, 고독’이라고 한 순전히 개인적인 독특한 작가만의 언어 스타일로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작가는 소설에 나타나는 특유하고 반복적인 언어 스타일과 소설의 구조, 테마 등에 의해 소설의 정체성 (narrative identity)을 확립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사하라는,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유럽으로 건너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서구 문명사회에서 온갖 풍상과 슬픔, 모멸을 겪은 사람, 사막의 여행 가이드 이브라함과 건축설계사이면서 오직 인간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서 정글과 사막만을 여행하는, 오디세우스처럼 험한 길을 방랑하는 건축 설계와 감리, 엔지니어링 회사인 (주)공간의 김규현 상무가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갈증으로 죽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이 사막 도시 타만라세트를 출발한 것은 2000년 6월 15일 이른 아침이었다. 그 며칠 후 사하라 남쪽에서 사막의 미로에 갇혔다. 김규현 상무는 46세의 나이로 7월 9일 죽었다. 이브라함은 그 이틀 전에 죽었는데 짐작키로는 32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더 이상 내일은 없었다. 오직 과거를 이야기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자신의 지나온 인생 역정을 담담하게 서로에게 들려주었다. 소설 사하라는 분해 또는 해체할 수 있는 여러 이야기 조각들을 주워 모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하라 남쪽 사막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렇게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작가가 의도적으로 비참하게 죽게 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플래시백 (flashback)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릴없이 죽음을 기다리면서 그의 내면에서는 과거의 기억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들, 내적 대화, 환상, 꿈, 추측, 기대, 욕망들이 뒤죽박죽 섞이면서 의식의 흐름을 형성한다. 그리고 만성적인 말짓기증(confabulation)환자처럼 화려한 공상 속에서 아랍 왕자의 에피소드를 지어내기도 했다. 그가 니힐리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어느정도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지만 건축가로서 현실적 감각은 살아있다. 정상적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 세상, 미래에 대해 좀 더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능력이나 장점에 대해 과장되게 믿지 않는다. 과거를 기만적으로 유리하게 기억하지 않으며 자신의 통제력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우울증적 현실주의자(depressive realist)이다.)
우선, 여행소설이어서 여행의 의미, 그것의 목적,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의 허무감, 호모 에렉투스인 인간이 어떻게 해서 허리를 펴고 걷게 되었는지, 걷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을 떠난다. 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 또는 고향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난다. (김규현과 이브라함처럼 말이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고향에 대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평생 동안 고통을 받았다.) 고향이란 무엇일까. 고향은 ‘고향의 푸른 잔디(green green grass of home)’처럼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그리움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향과의 단절은 끊임없는 고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리의 이별’에서 H처럼 말이다.)
미학적 토대에서 인간 삶의 조건, 삶과 죽음,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신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신은 존재하는지 마는지, 신은 살았다가 언제부터인가 죽어버렸는지, 그건 타살인지 자살인지. 사막에는 정말 신이 존재하는지, 김규현은 자신의 신을 찾았는지, 그 신이 그들을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인간의 영혼은 불멸하는지, 꿈이 무엇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꿈을 꿔야 하는지, 꿈은 영혼의 자양분이다. 인간의 운명은 무어란 말인가, 운명까지도 유위전변有爲轉變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운명은 예정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다면 작가의 길고 긴 삶의 궤적에서 작가의 크고 작은 운명들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그리고 전쟁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20세기는 위대한 전쟁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었지만, 애당초 더 참혹한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을 잉태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래서 존 키간은 “대부분의 성인에게 전쟁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있다는 것이 20세기의 비극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전쟁이 남긴 참화가 개개 가족과 인간에게 끼친 후유증은 인간 비극 그 자체이다. 자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서부전선 뫼즈 강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포로가 되어 포로 수용소에서 5년을 보냈다. 김규현의 두 삼촌은 6.25 전쟁에서 전사하였다. 그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에 거의 폐인처럼 살다가 바다에서 자살한 것처럼 죽었다. 작가는 1969년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에 직접 참여했건 목격자에 불과했던 간에 그 후 오랫 동안 전쟁이 남긴 정서적, 심리적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을 받게 된다.
작가는 사하라에서 이러한 전쟁의 비극을 주제로 삼아서 고발하려고 의도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책은 작가 자신을 위해 썼던 것일까.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마 유령을 위해 썼을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 누가 전쟁의 비극에 관심이 있겠는가.
그런데 주제어 key word인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이 소설의 구성에 있어서 미학적 욕망이라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체로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것들은 소설의 정체성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들은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모티프, 행동과 실존적 상황을 통해서 점차 드러나게 된다.
사하라, 사막, 낙타, 사막의 도시 타만라세트, 거룩한 신부님, 유목민인 투아레그족, 아프리카, 사바나, 사헬지대, 밀림, 원시 부족, 분쟁, 사자, 에이즈, 남쪽 바다, 늙은 여자, 사이코패스, 종교의 타락, 무슬림, 움미인 마호메트, 위대한 여행가 오디세우스, 불운한 반 고흐, 영원한 여성인 어머니, 언제나 그리운 동생, 갈증과 죽음, 고독, 침묵, 망각,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미래, 절망, 농담, 희극, 무無, 무상無相 無常 無想, 등등.
또한, 김규현은 건축가이므로 건축의 미학, 그의 플라토닉 연인이었던 (그러나 플라톤은 살아생전에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손희승은 사진 작가였으므로 사진의 미학,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죽으면서 또다시 이별하므로 이별, 약간 멜로 드라마적이고 감상적이고 유미주의적이긴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와 그의 아내 심현숙은 열렬히 사랑하고 육체적 쾌락을 누리고 그리고 결별하였으므로, 달콤 씁쓸한 육체적 사랑과 쾌락의 의미, 에로티시즘, 오르가슴, 나르시시즘, 아이러니, 결별의 의미 같은 것 등.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창조한 작중 인물 모두를 깊이 사랑한다. 그래서 그는 동성애자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일 것이다. 그는 그들 인물 중에서도 지극히 쾌락주의자이고, 현실적이고, 잔인하고, 개성이 강렬한 심현숙을 가장 사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처럼 능굴능신能屈能伸하게 변신하는 치명적인 악녀는 아니기 때문이다. 본래 팜므 파탈은 프로이드가 히스테리아라고 명명했던 소름끼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녀는 밝고 건강했기 때문에 히스테리아 환자는 아니다. 그녀의 눈은 가끔 빛났지만 사악할 만큼 뇌쇄적이지는 않다. 그녀는 사치스럽고 변덕이 심했지만 옷차림새와 행동은 섹시하지 않다. 그녀는 고루한 관습과 심리적인 속박에서 해방된 자주적인 여성이었고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현명하다. 소설은 그녀의 그런 성격을 명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작가는 지금도 그녀 같은 멋진 여자를 실제 만날 수 있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인물을 창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주제 중에서도 이별의 주제는 인간 삶의 조건, 삶과 죽음(죽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신의 존재 여부, 여행의 의미와 함께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뼈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순전히 작가의 견해일 뿐이다. 작가가 죽은 후라도 어떤 유별난 비평가가 나타나서 또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 슐라이어마허는 ‘비평가는 작가 자신보다 더 많이 안다.’고 했으니까……. 그러나 그에게는 비평할 용기와 함께 찬양하는 용기가 필요하리라.)

10. 소설에서 주제란 무엇인가?!
Motif는 문학에서 자주 반복되어 나타나는 하나의 요소, 사건이나 기법이나 공식의 한 유형을 말한다. 자주 반복되는 시의 개념이나 공식을 지시하는 오래된 용어는 ‘진부한 문구’라는 의미의 Topos이다. 테마(Theme)는 모티프와 서로 바꿔 쓸 수 있으나 이 용어는 문학 작품 속에서 (묵시적이건 명시적이건 간에) 구현되어 독자를 이해, 설득시키기 위한 추상적인 주장이나 메시지를 의미한다.
이야기란 때로는 이야기를 말하는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고 했다. 글읽기와 글쓰기는 내게 세상과 인간의 삶과 사물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매개 수단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어떤 이야기는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에는 필연적으로 주제인지 메시지인지 아이디어인지 의미인지가 내재해있다. 그것들이 글 속에서 딱히 선명하게 나타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소설가가, 이야기꾼이 특정한 주제에 의식적으로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극작가 닐 사이먼은, 그냥 쓰고, 절대 주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작품에 대한 리뷰를 읽고 나서야 자기가 무엇에 대해 썼는지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그 개념이 가변적이고 모호해질 수 있는) 몇 개의 지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이고, 고상한 단어들만이 주제어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바이블」을 쓴 대니얼 조슈아 루빈은, “ ‘결혼’ 이것은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화두이다. 우리는 화두를 가지고 있고 주제는 그 화두에 대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로버트 맥기는, ‘주제라는 단어는 작가들에게 점점 뜻이 분명치 않은 용어가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가난, 전쟁, 사랑 같은 것들은 주제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설정이나 장르들에 연관되어 있다. 진정한 주제는 한 단어가 아니라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한 이야기 속에서 더 이상 축약할 수 없는 의미를 표현해 주는 의미가 명쾌하게 드러나는 한 문장. 필자는 개인적으로 주도적인 아이디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주도적인 아이디어는 작가의 주요 선택들에 규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또한 작가가 선택한 이야기에서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덜 중요한지, 어떤 것이 주도적인 아이디어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삭제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작가의 미학적 선택을 인도하는 또 하나의 창조적 훈련이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예술에는, 소설, 이야기, 희곡, 시, 음악, 미술, 조각, 영화, 드라마, 만화, 신문기사, 텔레비전 뉴스, 신중한 언어에는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중요한 것이건 사소한 것이건, 모두가 (작가가 의식했건 못했건 간에) 주제가, 즉 진리가 알게 모르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제는 언어와 그것의 또 다른 형태인 침묵에 있어서 본질적 특성인 것이다. 심지어 사소한 말, 농담에도 그것은 들어있다. 우리가 흔히 ‘뼈 있는 농담’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작가는 주제를 의식하거나 주제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야기에는 그것이 저절로 따라오니까 말이다.
그러나 조지 오웰은 성급하게도 모든 글쓰기는 프로파간다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말했다. “프로파간다는 모든 책의 심장부에 숨어 있다. 예술 작품은 어느 것이든 각각의 의미와 주제, 즉 정치적, 사회적, 혹은 종교적인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작가는 동물농장과 1984에서 주제와 담론을 너무 일찍 명백하게 드러내 놓고 스스로 결정을 해버렸다. (조지 오웰은 1948년 11월 「1984」의 원고를 탈고했고 48을 뒤틀어서 제목을 「1984」로 정했다. 그 소설이 1949년 1월쯤 완성되었더라면 제목은 「1994」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그 책이 출간되고 나서 6개월 만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물론 줄거리가 단순한 덕분에 철학적, 정치적 분석을 부각시킬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우리 소설 중에 최인훈의 「광장」 만큼 주제를 너무 일찍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를 망친 소설도 드물 것이다. 작가의 자의식 과잉이었다. 그건 초보 작가가 쓴 미숙한 습작품이어서 그런 것이다. 상세한 것은 졸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를 참조.)
하지만,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소설에서는 주제가 희미하고 불명확하고 다의적이어서 그걸 둘러싼 해석의 갈등은 독자의 몫이 된다. 소설에는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야할, 작가가 주절주절 말하지 않고 비워두어야 하는 여백, 즉 빈자리 leerstelle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실인 즉, 소설은 무엇을 쓰느냐 (또는 이야기 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데 나는 여전히 어떻게 쓰는지를 잘 모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긴 소설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가 중첩되고 다양한 주제가 공존하고 있으니까 독자들은 자신만의 관점에서 읽고 싶은 대로 읽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가 내 소설에서 어떤 관점으로 무엇에 중점을 두고 읽게 되건 그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상관할 필요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건 독자의 몫이다.
다만, 무엇을, 무엇에 관해서 쓸 것인가, 주제와 담론과 관련해서 우리의 삶에서 근본적인 것들, 삶의 조건, 신이나 죽음, 자유 등의 문제에 대해 에세이를 쓰면, 에세이는 소설적인 기교나 우회로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명쾌하게 담대하게 쓸 수 있으니까, 나는 소설과 함께 여러 편의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독자들의 오독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친 듯한 반복. 쓸데없는 중복.
그러므로…… 이건 나에게는 유일한 사람인 현명한 독자를 오해하여 모욕하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독자는 나의 불안과 강박, 경박성, 조급성, 충동적인 성격을 이해해야만 한다. 톨스토이는 ‘인간은 육체 안에서 무력하지만 정신 안에서는 자유롭다’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나는 여기에서 고백해야 할 것이다. 나는 끝날 때까지 다시 주제와 인물, 사건을 반복한다.
Ross, H.는 ‘문학 텍스트는 단지 뭔가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뭔가를 한다’라고 했으나, 나는 그 뭔가를 하는 일에 여전히 미숙하고, 그러니까 문학적으로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 Iser, Wolfgang은 ‘문학텍스트는 독자가 채워야 할 틈을 남긴다’라고 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작품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제시한 부분과, 내가 쓰지 않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 두 번째 부분이 중요한 부분입니다’라고 했으나, 나는 소리의 침묵과 공간의 여백에 둔감하여 지리멸렬할 때까지 웅얼거린다.
지나친 강조와 과정 때문에 텍스트는 명료할 수 있지만, 말하려고 했던 것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말하지 않았어야 했던 어떤 것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 나오게 된다.
그러나 칸트의 미학에 있어서 ‘무목적의 목적성’ 개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걸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 개념을 나름 문자 그대로 차용해서 쓸 수는 없을까.
독자가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작품 속으로 무의식적으로 몰입하여 감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되고 타자와 이 세상에 대하여 연민의 감정과 함께 공감하게 된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11. 사랑과 죽음, 이별에 대한 단상들.
지금쯤 벌써 절판되어버렸을 2013년에 나온 소설집 이별에 대해서 말할 차례이다. 그 소설집은 ‘사랑과 이별’에 대해 10편의 짧은 이야기를, ‘죽음과 이별’에 대해 12편의 이야기를 싣고 있다.
우리는 사랑하고 헤어진다.
우리는 태어나고 죽는다.
사랑과 이별.
사랑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버린다면 그게 어찌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모든 이야기의 영원한 주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진지한 예술의 영원한 주제는 사랑의 실패에 관한 것이다. 성공은 대개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나온다. 우리는 사랑하며 미워한다. 우리는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별을 동반한다.
짧은 사랑과 긴 이별 또는 영원한 이별. 이런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사랑이란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 한 번 이루어졌다가 영원히 잃어버리는 사랑을 말한다. 닥터 지바고에서 지바고와 연인 라라의 사랑과 이별처럼 (그 짧은 만남이란), 또는 사하라에서 김규현과 손희승의 사랑과 이별처럼, 또는 이브라함과 만수라의 이별처럼 말이다.
이별은 천 년 전에도 그랬다. ……날러는 엇디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잇고/ 잡사와 두어리마나난/ 선하면 아니 올세라……
김소월 시인은 32세 때 (1934년) 아편을 마시고 음독자살하였으니. 그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고 하였다. 떠나는 사람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분노와 배신감, 저주와 원망을 그렇게 쉽게 감출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한용운 시인은 ‘님의 침묵’에서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순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이별의 시간이 오기까지는 자신의 깊이를 모르게 마련이고(K. 지브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것이다.(W. 쿠퍼) 그리고 모든 이별에는 일종의 해방감과 함께 큰 고통이 뒤따른다. (C. 에이 루이스)
죽음과 이별.
죽음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 이별은 삶의 무상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죽음과 이별은 동의어가 아닐까. 이별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시공간의 멀어짐을 의미하지만,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운명적 결별을 의미하며 죽음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한 사람도 운명을 막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늦게 죽고 몇몇 사람들은 너무 일찍 죽는다. 선한 사람은 일찍 죽고, 악인은 늦게 죽는다. only the good die young. 이게 바로 그 소설의 큰 테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규현과 이브라함은 참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이지만 불의에 일찍 죽기 때문이다. (물론 김규현은 자살한 것인지 여부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이집트 의사는 사망원인을 suicide로 명기했지만 말이다. 그는 사막을 사랑했으니까 사막에서 죽을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죽음은 자유를 예찬하고 열망했던 그에게 궁극적인 자유가 아니었을까.)
죽음은 필멸하는 모든 생명체의 숙명이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도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거늘.’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누가 무엇 때문에 영원히 살기를 원하겠는가. 인생이 얼마나 지루하고 공허한데.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매일 살아가면서 죽음을 겪는다. 성 바울이 말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인간의 죽음에는 천수를 다 누리고 죽는 자연사(이때는 집의 침대 또는 병원의 침대에서 편히 죽는다), 날벼락처럼 닥쳐오는 뜻밖의 돌연사나 사고사, 자살, 살인에 따른 죽음, 천재지변(act of god) 같은 신의 짓궂은 장난에 의한 죽음, 막다른 운명의 장난에 의한 죽음, 오만한 인간의 광기에 의한 죽음, 전쟁과 혁명에서의 죽음, 제도적 살인 예컨대 국가기관의 고문, 학살 (우리는 현대사에서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대학살, 크메르 루즈 대학살, 북한의 폭정과 학살을 기억할 수 있다.),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운 멍청한 판사에 의한 살인 선고와 그 집행 등에 의한 죽음이 있다.
굳이 죽음의 과정을 분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지만 이별은 남는다.
그러나, 이별은 자유이다.
작성일:2022-07-07 14:39:28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