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변호사가) 웬 소설을……? (上)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07-07 14:37:06
조회수
449
(변호사가) 웬 소설을……?


꾸준히 글을 써라!
절대 항복하지 말고!
— 카프카


1. 늙은 변호사라니까.
원로라는 말은 어떤 업에 오래 종사하여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을 일컫지만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자칭 원로가 득세하였던가. 그 고리타분한 단어가 풍기는 역겨운 여운 때문에 나는 그걸 질색한다. 당연히 나는 원로 변호사가 아니다. 내가 무슨 경험과 공로가 많은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군대식으로 자칭 고참 변호사라해도 별 무리는 없으리라.
법조인 경력 30여 년에 얼마나 많은 소장과 준비서면, 기타 법률문서를 작성, 제출하였는가. 그런데 소장과 준비서면은 그 독자가 우선적으로 판사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는 판사를 설득하기 위해 그것들을 정성스레 작성해서 법원에 제출한다. 그들이 과연 우리들이 정성을 들여 작성한 만큼 정성 들여 읽기나 할까? 쓰기보다는 읽기가 훨씬 쉬운 일인데 말이다.
나는 폼 잡고 법대에 앉아서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의 표정과 몸짓, 언행, 숨소리에서조차 그가 준비서면을 읽지도 않았고 사건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런 판사일수록 더욱 거들먹거리니. 나는 온몸에서 기운이 쏙 빠져버린다.
그때부터 나는 법정이 몹시 낯설어 지면서 일종의 공포감을 느낀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리고 판결문을 받아보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음을 알게 된다. 그 판결문을 쓴 판사 역시 자신의 판결은 믿지 않을 테니까. 더욱이 그들은 사회 경험도 없으면서, 전문 지식도 결여되어있으면서, 이상한 편견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러나 이때 냉정하게 말하자면 승소 판결을 선고한 판사에게는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글쎄, 변호사들은 각자 너무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지금 나는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껍데기와 알맹이를 구분하는 단순화, 이분법적 경향에 영향을 받아 ‘우리’와 ‘그들’로 영역을 나누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지 모르겠다.
왜?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 하는가. 그들은 막강한 사법 권력을 배경으로 유권해석을 한다. 그들이 판결한다. 그들이 결론을 내려버린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쯤해서 스스로를 위로해야 한다. 그들은 가끔 자신이 전지전능한 것처럼 착각할까, 그렇다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아니면, 한번쯤, 가감 없이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고 ‘신이시여, 신이 계시다면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소서, 지금 죽고 싶나이다.’라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을까.
그들 역시 매우 하찮은 보통 인간이다. 우리 모두는 한낱 보잘 것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 그러니 만날 허구한 날 기록을 읽는데 얼마나 지쳤을 것인가. 얼마나 지겨울 것인가. 그래서 직업적 매너리즘에 빠져서 설렁설렁 눈대중으로 대충 읽고 대충 판단하지 않을 것인가.
판결을 내리는 인간.
그러나 (모든 글에는 대게 ‘그러나’가 들어있다), 그들은 겸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휘두를 줄을 모른다. 그들이 자기 직업을 언제 부끄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언제 자신에게 의혹을 품어본 일이 있었던가? 한 번쯤 법대에 앉아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긴장감 때문에 셔츠가 땀으로 후줄근하게 젖은 경험이 있었던가? 그들은 언제, 가끔 악몽을 꾸는 일이 있었던가? 그런 악몽 때문에 불면하는 밤들이 있었던가?
그들은 검고 칙칙한 유니폼을 입고 무대 위에서 지그재그 춤을 추는 광대들이다. (어느 현직 부장판사는 ‘표현의 자유가 신음하는 나라’라는 부제가 붙은 「법복은 유니폼이 아니다」라는 (자기 기만의) 책에서, 당연히 현직 판사답게 판사라는 직업을 과대 평가하면서 유니폼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들의 폐쇄적 획일주의는 불협화적인 다성음의 세계에 결코 적응할 수 없다. 자폐적이어서 세상과 소통은 불가능하고 세상과는 불화한다.
종결자로서 갖게 되는 오만한 권위의식. 과대망상증 환자. 완고한 관료주의 피해자 혹은 수혜자. 유전무죄 무전유죄. 전관예우라는 위대한 관습의 신봉자.
그들은 자기들만의 좁은 세계에 꽁꽁 묶여있다. 법의 한계를 알고 법대 너머에는 훨씬 깊고 넓은 세계가 있음을 모른다. 맨날 전가의 보도처럼 사법권의 독립을 외치면서 자신들의 판결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져있다. 그래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어려운 전문용어와 복잡한 문장으로 쓴다.
경험칙과 논리칙을 앞세워 자유심증주의를 신봉한다. 법관의 심증 형성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법률은 명시적으로 자유심증주의를 인정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법관의 경험은 그들의 세계가 좁은 만큼 지극히 협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소송기록의 행간에 숨어 있는 인간들의 절실한 꿈과 절망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열정도 없다. 그저 법률과 판례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급급할 뿐이다.
나는 법복을 입고 높은 법대에 앉아있는 거야. 지금 법복의 무게를 느끼고 있지. 너희들은 우러러보고 있겠지. 그렇지 뭐! 알게 뭐야! 내 일도 아닌데! 미국의 어느 판사가 말했다지. “말하게 해줘라, 그게 적법절차다.” 그런데 말이야, 듣기 싫고 뻔한 이야기인데 왜 그걸 끝까지 들어주어야 하지? 법정은 거짓말 경연장이야. 거짓말 듣는 데도 한계가 있을 거 아냐. 그러니까 이건 알라고. 판사도 인간이란 걸! 로봇이 아니란 말이지! 지겹다고! 정말이지! 매일 기록을 읽고 판결문을 쓰는 게! 그건 중노동이야! 판사는 노동자야! 다시 말하면 글 쓰는 노동자란 말이야!
당연히 그 중에는 기록을 꼼꼼하게 읽고 고뇌하면서까지 판단하는 판사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물의 무게를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 고심한다.
결론인즉, 나는 그런 서면을 작성하는데 지쳤고, (세상 물정도 모르는) 그런 판사들에게 재판을 받는 일도 우스웠고, 우울한 현실이다. 물론 그들 탓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사법제도의 모순 때문인가, 아니면 결국 인간의 문제인가?
(플라톤이 벌써 2천 5백 년 전에 말했다. ‘판사는 젊은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판사는 자기 자신의 사악성 때문에 악을 저절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남의 악성을 만년까지 오래 관찰함으로써 악을 알게 된 사람이어야 한다.’)
법조인으로서 지난 30여 년간은 진실과 허위, 법정에서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똑같은 말들의 반복 (그 닳고 닳은 말들 속에 언어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침묵의 언어, 언어의 정수인 은유는 없으니, 나는 관습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변론하면서도 그 공허한 말을 경멸하고 증오했다.), 관료주의와 매너리즘, 자기기만, 궁상스럽고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자기연민과의 기나긴 싸움이고 패배의 시간이었다.
나는 사물과 현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가차 없이 무위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지금 무능한 변호사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그 중과부적의 일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지금 단절 또는 절단이 필요하다. 나의 완전히 벌거벗은 영혼이 그걸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나는 평생 동안 변호사 업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내 손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절실하게 느낀다.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으니. 나의 방언으로 내 글을 써야한다는 갈망. 불안 강박 관념. 그걸 잠재워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나이에 원로 변호사 또는 원숙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원로 혹은 원숙이라는 느글느글한 단어는 교할이나 노회老獪라는 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여전히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을 것이다.

2. 나는 왜, 누굴 위해서, 소설을 쓰는가?
동물농장과 1984를 쓴 에릭 블레어는 작가가 소설을 쓰는 네 가지 동기를 열거하였다.
첫째. 순전한 이기심. 남들보다 똑똑해 보이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죽은 후에도 기억되고 어린 시절 자기를 무시했던 어른들에 보복하고 싶은 욕망. 그게 작가의 동기, 그것도 강한 동기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둘째. 역사적 충동. 사물/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발견하여 후대를 위해 이것들을 기록해 두려는 욕망. 셋째. 정치적 목적.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넷째. 미학적 열정. 이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언어의 아름다움과 단어의 적절한 배열이 지니는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좋은 산문의 단단함을 알아보고 좋은 이야기의 리듬을 인지하는 즐거움.
그러나 나는 위 네 가지 동기 또는 욕망 중에서 순전한 이기심이나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은 가지고 있지 않다. 특히, 나는 정치적인 것, 추상적인 이념, 주의 같은 것은 잘 알지도 못하고, 역사의식도 사회의식도 희박하니 그 운동에도 무관심한 편이다.
나는 이데올로그, 사회 변혁가, 운동권,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여문학이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같은 것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2022년인 지금 시점에서는 그렇게만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문학적 관점은 그동안 변덕스러울 만큼 상당한 변천을 겪었기 때문이다.)
오직 지금 / 여기 / 우리를 증언하고자 하는 약간의 충동과 열렬한 미학적 동기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예술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마지막 열정이 남아 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완고한 울타리를 파괴하고 싶고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세계로 모험을 감행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시를 좋아했다. 많은 시집과 시론을 읽었다. 시인은 마치 연금술사 같다. 그러나 멜랑콜리하긴 하지만 시적 재능과 감수성, 상상력, 익숙한 일상 언어와 낯선 시적 언어 간 차별성에 관한 감각, 시적 언어의 응집성과 중의성, 흐릿함과 불확실성, 언어의 리듬 감각이 부족하고 정신적 엄격성이 결여된 내가 시를 잘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독자 (또는 청자에게) 시적 대상에 대한 특별한 인식과 함께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의미적 또는 문체적 일탈이 일으키는 ‘놀랍고, 힘있고, 낯선 무엇’이라는 텍스트의 ‘전경화’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하는 시에 있어서 시행의 형태와 위치라는 관점에서 ‘낯설게 하기’는 나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현대시는 언어의 감각적 힘에 경도된 나머지 언어를 파편화시키고, 문법과 관습을 파괴하고 의미를 해체하고 있으니 어찌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아주 일찍부터 시 쓰기를 포기했다.
나는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의지력이 강한, 규범적이고,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한다. 디테일의 마법이 살아나는 그림을 그리듯 생생한 묘사를 통해 작가적 기쁨을 누리기를 원한다.
나는 서사 (narrative)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하면서 깊이 있는 글을 쓰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항상 적절한 단어와 문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완벽한 문장과 문단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가 바라던,(나의 예술가적 영혼을, 내 온전한 애정을, 내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때 칸트가 말한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허구가 아니고 모두 진짜 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소설 작품 속 세계의 인과성 법칙. 개연성과 내적 법칙. 개연성과 가능성. 핍진성 (verisimilitude) 또는 그럴듯함 (plausibility).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필연성.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생각의 흐름이고 감정의 흐름이고 기억의 흐름이고 감각의 흐름이고 환상과 환각의 흐름이며 혹은 그것들을 혼합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는 다른 예술의 형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소설만의 독특한 능력과 경이로움은 내면의 갈등을 형상화할 때 드러난다. 소설가는 인물의 생각과 감정에 깊숙이 침투해서 미묘하면서도 시적으로 표현한다.
나는 창조주, 모리아크의 ‘모든 작가들은 신과 가장 흡사해야 한다’는 명제에 따른 신이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사르트르는 소설적 자유 (romanesque liberté)론에서 전지적 시점과 관련하여 작가의 상상력과 그 한계를 지적했다. 소설가는 신이 아니라고 못박았다. 소설가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소설은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 이야기되는 사건의 연속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전지적 권능을 일방적으로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의성이란 어떤 것을 포함시키고 어떤 것을 제외시킬지를 결정하는 창의적 선택을 의미한다.
나는 결국 수정과 수정을 수십 번, 수백 번 거듭하다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항상 걱정하고 있다. 서사 능력이 고갈되어 쓰고 쓰다가 막히면 결국 미완으로 남아서 쓰레기가 될 것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 즉시 글 쓰는 것을 그만둬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를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휠덜린의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처럼 말이다. (나는 휠덜린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불을 찬양했고 스스로 신이라고 생각했으니 에트나 화산의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영원히 신으로 남으려 했던 것이다. 불은 생명의 근원이고 파괴의 근원이다. 불은 마지막 정화이다. 장엄한 불과 신적 인간의 죽음. 그걸 어떻게 인간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휠덜린은 튀빙겐의 탑 속에서 36년 동안이나 혼자 살며 글을 썼지만 끝내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 그는 정신분열증에 걸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의 광기는 위장된 것일 수도 있었지만.)
하지만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오르한 파묵이 말한 오스만 터키의 속담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쓰고 또 쓰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그러나 나는 아주 최근에서야 인간에게 영감이란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얼마나 많은 사악하고 나쁜 영감이 인간의 의식 또는 무의식 속에 배태되어 있겠는가. 그러므로 영감이 얼마든지 인간을 혹은 작가를 올바른 길이 아니라 그릇된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 또는 연쇄살인범들은 어떤 영감 때문에 희대의 악마가 되었을까.
로버트 맥기는 영감에 대해 이렇게 비아냥 거렸다. ‘경험이 풍부한 작가들은 이른바 영감이라는 것을 전혀 믿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영감이란 작가의 머릿속 맨 꼭대기에서 찰랑거리고 있던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을 말하는데, 이처럼 의식의 표면에 머물러 있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영화나 소설들에서 본 것들이게 마련이다. 월요일에 어떤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에는 그렇게 좋아 보이던 것이, 하룻밤 자고 나서 화요일에 다시 살펴보면 그 상투성 때문에 구역질이 날 지경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나는 (지금쯤 국가와 사회의 집단 기억에서 사라진 전쟁인) 월남전 참전, 나트랑 102 야전병원, 생사의 기로를 헤매야 했던 정체불명의 열병, 환각과 망상, 죽음의 공포, 그리고 그 전쟁에 대한 섬광과 같은 총체적 기억이 일으킨 정서적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 동안 상상력 과잉이었고, 불안증과 공포감, 편집 성향, 과대망상에 시달렸기 때문에 글쓰기는 즐거움 (또는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 강박관념이었다. 쓰고 또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절제와 금기가 필요하다. 번지르르한 미사여구로 설교를 기도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란 결국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야만 하니까, 자의식 과잉이고, 지독한 자기중심주의자,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최근, 2022년 3월쯤 월남전 참전 기억과 망각을 바탕으로 실재와 상상력이 기묘하게 뒤섞인 장편소설 인간의 초상을 발표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나이에 한심할 정도로 무명작가일 뿐이다. 그게 멸시받은, 저주받은 작가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내가 베스트셀러를 쓸 수 있을까? 어떻게 하여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내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는 소설의 문학적 가치 또는 책으로서의 완성도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부분 상업적 수단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다. 여기에 대중의 변덕이 부동符同한다. 그러니까 그게 어중이떠중이들이 들고 다니는 허접쓰레기 같다면 내가 그런 걸 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나는 움베르토 에코가 말한 모델 독자가 필요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관점에 따라 특정한 부분을 다른 부분보다 중요시하고, 별로 흥미롭지 않아 보이고 생뚱맞게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해석을 시도하고, 일부 대목이 애매모호하거나 이해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러한 모순을 말이 되도록 읽으면서 스스로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 몇 사람이라도 내 소설의 배경과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소설 속에서 독자 나름의 분석과 해석, 추론을 통해 창조적 행위인 작가도 모르는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의미를 찾아내는 진지한 독자가 필요한 것이다.
신비평 이론에서는 ‘의도의 오류 (intentional fallacy)’라고 했고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 (La mort de l’auteu)’이라고 표현했듯이, 독자의 텍스트에 대한 창조적 개입에 의한 내재적 해석, 다시 말하면 독자가 스스로 해석의 맥락을 구축한다면, 왜 그게 불가능하겠는가?
독자는 작가와 함께 책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작가는 소설을 매개로 하여 독자와 일대일로 만나니까, 그러니까 한 권의 소설에는 오직 한 명의 독자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 독자가 현명한 독자이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질없는, 터무니없는 몽상이 아닐까. 내가 지금 어이없게도 무슨 독자를 운운하고 있는가. 내가 감히 현명한 독자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3. 내가 정말 작가일까?!
로버트 맥기는 작가와 관련해서 저자 (author), 권위 (authority), 신빙성 (authenticity) 세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저자라는 말은 원래의 뜻이 ‘창조자’이기 때문에 작가 됨의 진정한 조건은 지식에 있으므로 진정한 작가란 어떤 매체를 사용하건 자신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신과 같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작가가 글을 쓰다가 더 이상 한 줄도 쓸 수 없는 벽에 부딪힌다면 소설을 쓸 지식이 고갈되면서 기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한 작가의 작가됨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쓴 글에서 느껴지는 진정한 작품으로서의 권위이다. 이처럼 권위를 가진 작품은 독자들이 그 작품에 대해 신빙성을 갖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내 소설은 엄밀하게 리얼리티를 토대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소설 속에 내재하는 주제이건 문학성이건 인물이나 배경이건 간에 작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이고 독창적이라고 스스로 자신할 수 있을까? 내밀한 울림이 있는 자신만의 문체로 성숙한 작가라고 인정받을 수 있을까?
나는 작가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작가라는 점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있는가? 나는 홀로 외롭게 소설을 쓰는 행위를 사랑하고 그 고독을 견뎌낼 줄 아는가?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인정받지 않아도 견뎌낼 수 있는가? 작중 인물들이 실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실적일 수 있다고 믿고 있는가?
소설 속 가공의 세계가 실제의 세계보다 훨씬 근원적이라고 믿고 있는가?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믿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사랑, 고통받고 있는 영혼에 대해서 공감하면서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고 하는가? 꿈에 대한 사랑, 단순히 그 끝이 어디인지 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상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즐거움을 알고 있는가? 유머에 대한 사랑, 삶의 균형을 회복시켜주는 여유를 알고 있는가? 언어에 대한 사랑, 소리와 그것들이 주는 감각, 문장의 구성과 그 의미에 대한 탐구가 주는 재미를 알고 있는가? 완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쓰고 또 고쳐쓰는 열정이 있는가? 대담하게 독창성을 추구하며 조소를 당할 때에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좋은 작품을 소중히 여기고 나쁜 작품을 싫어하며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아는 내밀한 감각이 있는가?
내 나이 60을 넘어서니 이제 서야 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論語의 六十而耳順이라는 경구가 비로소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리고, 꼭 쓰고 싶다면 세상을 알아야 할 만큼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소설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사상누각처럼 곧 허물어져 버리는 초라한) 자신감이 생긴다. 유능한 작가란 작가 자신이 내면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숙해야만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상극하는 모순된 목소리와 세계관들이 생생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좋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헤테로글로시아 heteroglossia.
나도 지금쯤 마음만 굳게 먹으면 어떠한 세상이라도 창조할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언제쯤이면 ‘내가 정말 작가일까’하고 자문자답할 수 있을 것인가. 비록 실패한 작가임이 판명난 후라도 말이다.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전에는 제대로 된 단 한 편의 에세이나 소설 같은 산문을 써본 적이 없었으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한 때는 문학청년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그렇게 무심할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하여간에 정신적으로 동맥경화에 걸리는 때인 이 나이에 무슨 소설을 쓴다고 하면, 소설작가가 되겠다고 우기면, 누군들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겠는가? 남들은 20대에 등단해서 젊은 시절 한창 문명을 날리고 60대쯤이면 벌써 반 은퇴하여 원로 대접을 받는 데 말이다.
더욱이 미국 작가 조나단 레덤의 친구인 작가 (그의 이름은 모른다.)는 “역사적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소설가들은 35세에서 50세까지의 나이가 전성기라는 사실을, 그 나이가 바로 젊음의 열정과 경험이 만나는 교차로이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10년 전쯤, 사하라의 초고 30매 정도를 몇몇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진지한 조언을 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한결같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본업인 대학교수나 변호사 일에 전염하라고, 격려 아닌 격려를 쏟아냈다. 그들 모두가 문학에는 거의 무지막지한 수준의 동료 변호사였으니 말이다. 그 중에서 막역한 후배인 Y변호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형님, 제발 그만 두세요. 유치한 짓 그만 두란 말이에요. 사람들이 노망들었다고 욕할 거예요.”하면서, 노골적으로 핀잔을 했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취중진담이라고나 할까. 나는 아연실색 하였다. 내 하찮은 소설이 아니라 무릇 인간의 한심함 때문에 오랫동안 절망하였다.
그러나, 그런 노골적인 야유도 나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커다란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도와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작가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오직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자신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만 한다.
말랑말랑한 감성적인 글을 쓰는 일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학술논문이나 법학 전문서를 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상쾌한 일이다. 우선 글과 미묘한 감정의 흐름이 교류하면서 서로 유쾌하게 소통할 수 있었다. 펜은 지금 시대에 원시적인 필기구이다. 나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길 줄 모른다. 그 신비한 물건을 두려워한다. 그건 신성불가침의 존재이기 때문에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손으로 고통스럽게 쓰면서 내 몸과 글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말들이 내 몸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여러분은 느리게 쓰는 기쁨을 아는가. 종이 위에 끄적거리는 감각을 아는가. 우리는 가끔 글이 엄청 편리하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가장 단순한 도구들만 있으면 쓸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그 운율 때문에 감탄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말이 그렇게도 아름다운 줄은 미처 모르고 살아 온 것이다.
8층 코너에 있는 구석 방.
그 방 (내가 그 당시 소속된 로펌의, 소송서류 더미가 여기저기 잔뜩 널려있고 법률서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내 사무실이었는데)은 남향이여서 고층 빌딩 사이를 뚫고 침입한 햇빛이 늘 찬란하였다. 그 빛의 수다스러운 달변이 나에게 패배를 안겨 주었다.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하였다. 나는 그때 자포자기하여, 또는 의혹과 자기불신 때문에 사악한 범죄를 마음속에 상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만약 내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폭력이나 칼을 휘두르는 상해, 살인, 간통, 형법 제201조가 규정하는 범죄를, 그 중에서도 간통을, 그렇다면 마음속에 상대가 있었던가, 물론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욕망을 자극하는 여자가 있었긴 하다. (그러나 그 후 형법상 간통죄는 사라졌으니 얼마나 후련한 일인가.)
아니면 하릴없이 비감에 젖어 황폐했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던가. 패배는 인간의 영혼에게 승리보다 깊게 침투한다. 패배는 비장함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승리한 그리스 도시들보다 비극적으로 패배한 트로이를 더 기억한다.
그 경이로운 빛이 나의 가슴 속에 강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내 가슴 속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왔다. 그래서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읽고, 쓰는 일처럼 괴롭고 유쾌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한 문장을 완성하고 마침표를 찍을 때면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 마침표는 배가 항구에 도착하여 바다 밑바닥으로 던지는 무거운 닻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읽어보면 늘 불만족스럽다.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다. 문장의 밀도와 완성도가 괜찮은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날 괴롭힌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쓰레기가 아닌지, 얼마나 지루하고 보잘 것 없는지, 그런 느낌을 받는 날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취미삼아, 재미삼아 쓰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다 소진하는 일이니 한갓 취미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소설이란 쓰는 것이 아니라 제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왜 쓰는지를 모른다. 나는 무엇을 쓸 것인지,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잘 모른다. 다만 글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 때문에 글을 쓰고 글을 써야 이야기가 생기기 때문에 쓰고 있다.

4. 지옥과 연옥, 천국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한 주에도 수십 장의 글을 썼다. 변호사의 주 업무인 소장이나 답변서, 준비서면, 가끔 형사 고소장, 법률의견서 등을 쓰는 일 말이다. 그 이외에도 나의 주 전공인 국제거래와 신용장거래, 금융거래와 관련해서 제법 두툼한 법학 전문서 12권, 이들 분야에 대한 120여 편의 학술 논문과 판례평석을 발표하였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유머라곤 한 마디 없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법률전문가를 위한 난해한 글 말이다. 가슴 뭉클한 아름다운 문장은 없다. 거기에는 부사와 형용사의 사용이 절제되어 있다. 당연히 문학 작품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감정은 실려있지 않다.
그리고 200여 편의 사설과 기타 칼럼을 마감시간에 쫓겨서 두서없이 갈겨썼다. 그래도 어떤 형태의 글이건 자족성이 있어야 한다.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은 유의미하고 설득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결 같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명쾌하며, 한 치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는 논리 정연한 존재들이었다. 법은 아주 단순 명쾌한 것이다. 유죄이면 유죄이고 무죄이면 무죄이다. 유죄도 아니고 무죄도 아닌 중간 영역은 있을 수 없다. 애매모호한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법은 단순 명쾌하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그러니 법률 문서도 단순 명쾌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세상만사, 인생사 중에서 어느 것 한가지인들 그렇게 명쾌하고 논리적일 것인가. 모두가 불분명하고 확실치 않은 것 투성이일 뿐이다. 인간 삶의 조건 역시 의문 투성이인 것이다. 그러니 주식 투자도, 사람 사는 일도 고달픈 것이다.
나도 지금쯤은 그 지겨운 흑백 논리의 멍에를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중간 영역인 회색의 영역이 무수히 존재한다.
유럽에서 중세가 끝나가고 르네상스가 시작될 무렵 왜 연옥의 개념이 탄생했는가. 더 이상 지옥과 천국이라는 이분법만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그래서 지옥도 아니고 천국도 아닌 중간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단테는 불후의 명작인 신곡에서 지옥과 연옥, 천국을 묘사했다.
그렇다. 세상을 살다보면 흑백논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희끄무레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래서, 완전히 검거나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악과 선, 미와 추, 진실과 진실의 부재가 사이좋게 공존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애매모호하여 대부분 회색인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그것이 이 세상을 가장 정직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소설의 형식을 빌어서 세상의 허공에 대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왜 없겠는가. 나는 세상과 풍경을, 인간과 사물을, 실재를 오직 이야기로 풀어내야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막 이야기인가. 사막에는 완벽한 침묵이 존재한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귀중한 말은 침묵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언어가 되기 전에 먼저 침묵과 조우한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황량한 사막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대지에서 울리는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그 사막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주술적 마력을 갖고 있었다. 초인간적인 대지의 기운이 엄청난 힘으로 인간의 영혼을 빨아들인다.
요즈음의 경박한 세상에는 하찮은 일상을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수필이나 에세이류, 여행기 또는 신변잡담을 무슨 의식의 흐름 수법이라는 그럴듯한 미명 하에 주절주절 써놓은 일기장 같은 소설, 자폐증에 걸린 사람의 중얼거림 같은 소설,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강박관념이 든 나머지 얼토당토 않는 소설들이 넘쳐 난다. (물론 신기하거나 새로운 것도 아니다. 클리셰일 뿐이다.) 그리고 언제까지 향토적이고 토속적이어야만 하는가? 그것이 한국적이란 말인가? 왜? 어째서 국민 정서 또는 감정 속에 한의 응어리가 뿌리 깊이 박혀있단 말인가? 언제까지 한恨 타령을 할 것인가. 그들 소설은 관습적이고 구태의연해서 실험 소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지금 나는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왜, 한이 우리 민족만의 고유 정서이겠는가. 무슨 근거로? 언제부터? 글쎄, (패배의식에 젖어서 자포자기하게 하고 숙명론에 빠지게 만드는) 일제 식민사관의 잔재임에 틀림없다.
두말할 것도 없이 한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정서이다. 이 세상 어디인들 분하고 억울한 일, 크고 작은 원한이 없는 사람이 없겠는가. 잘 살고 부강한 나라인 미국이나 유럽, 일본에는 그런 한 많은 사람이 없단 말인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박해받고 사는 사회적 소수자는 어디에도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어디에도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 비참한 자들, 억압받는 자들, 수모 당하는 자들, 짓밟힌 자들을 의미하는 레미제라블 Les Miserables 은 널려 있다.
그러므로 찌질이들의 찌질한 삶. 가난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 그것만이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여보게들 궁상 좀 그만 떨게. 우리 삶의 영역이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배달민족이 세계 방방곡곡 구석구석까지 진출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상의 끝인 파타고니아까지. 이제는 인간 삶의 보편적인 주제를 찾아서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글을 써야 되지 않겠는가.
지구촌. 국제화. 세계화.
(1990년대가 도래하면서 제6공화국이 정착하고 정치 경제 사회가 발달하면서부터, 특히 21세기 대명 천지가 도래하고 제1 플랫폼인 인터넷과 제2 플랫폼인 SNS를 잇는 인공지능(AI)과 증강현실(AR)의 세계인 제3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MZ세대가 주류인 세상이 되자 우리 문단과 평단을 쥐락펴락하면서 대단한 위세를 떨쳤던 그들 늙은 꼰대들이 끊임없이 주절거렸던 한 타령은 자취를 감췄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MZ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윤리 및 도덕에 관한 냉소주의와 상대주의, 주관주의로 기울어 가치관의 커다란 혼란 속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작성일:2022-07-07 14:37:06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