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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쥐새끼 박멸 작전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04-27 13:24:36
조회수
395
쥐새끼 박멸 작전




1997년 6월
1997년 6월 당시 장해식은 한국으로 들어와서 본사에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본사는 강남역 부근에 있었다. 그는 그 회사의 초대 북경 지사장이었지만 그때는 북경 지사의 직원이 서너 명에 불과했으니 아주 초라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때 그가 지시받은 임무는 성남의 빌라로 두 사람의 공작원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다. 그는 무슨 핑계를 대고 회사 영업용 차량을 빌렸다. 그리고 오후 6시경 안산시 시화방조제 북쪽 오이도 활어판매장 부근에서 만나 함께 간단한 식사를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암호는 한쪽은 ‘벌써 봄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이고, 다른 쪽은 ‘그러게 말입니다. 세월이 참 빠르지요’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보통 북한 사람들과 머리 모양이 달랐다. 완전히 남한 스타일이었다. 한 사람은 키가 170센티미터 정도에 보통 체격이고 얼굴은 전체적으로 각이진 얼굴에 구릿빛에 억세보이는 차가운 인상이었다. 그는 담배 중독자처럼 보였다. 그는 처음 담배는 꽁초가 될 때까지 맛나게 피웠고 그러고 나서 바로 불붙인 두 번째 담배는 손가락에 끼고 있었으나 피우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불만 붙였을 뿐 입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앞뒤로 혹은 좌우로 흔들어대다가 입술에 대기는 했지만 막상 입안으로 들어가 연기를 내뿜지는 않았다. 또 한 사람은 덩치가 작고 마음씨 좋은 아저씨같이 생겼다. 겸손하고 자상해 보이고 학교 선생님같이 보였다. 그들은 똑같이 운동화를 신었고 낡은 진바지에 반소매 셔츠 차림이었다. 조원은 30대 중반이고 조장은 40대 초반으로 보였다. 젊은 조원이 회색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다.
그들은 건설 현장의 일용 노동자처럼 보이게 꾸몄다. 두 사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완전히 남한 사람처럼 행세했다. 초대소에서 적구화 교육이 아주 훌륭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그들은 ‘누굴 만날 일이 있다. 중요한 물건을 전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장해식은 또 다른 고정 간첩과 접선한 줄로만 알았다.
두 사람은 며칠 전 태안의 안면도 해안으로 침투해서 서산에서 머물다가 시외버스를 타고 안산으로 올라온 것이다. 안산에서 성남까지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승용차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다. 경원대학교 근처 빌라들이 늘어선 뒷골목 부근에서 내렸다. 주위가 한적한 곳이었다. 6월이었지만 밤이 되니까 약간 추웠는데 그날 밤 초생 달이 떴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거기서 함께 한 시간 정도 대기했다. 그리고 장해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왔다.
그들은 밤이 으슥해지자 빌라 옥상에서 4층으로 배관을 타고 내려와 침입했다. 그리고 소음기가 달린 총을 사용했다. 한밤중이었고 빌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거실에서 온몸이 벌집이 되도록 총을 쐈다. 그들은 분노했다.
그게 바로 ‘쥐새끼 박멸 작전’이었다.
그건 엄중한 이중의 경고였다. 첫 번째는 그 무렵 남쪽으로 망명한 거물급 인사에 대한 경고였다. 반북 활동을 자제하고 얌전하게 굴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두 번째는 남한 내 조직원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누구든지 배신하면 죽는다는 것이다. 북은 가만히 있지 않고 반드시 보복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그날 밤 늦게 다른 요원이 그들을 픽업해서 강화도로 데려왔고 다음 날 저녁 강화도 해안에서 공작선에 오를 수 있었다. 임무를 완수한 두 공작원은 강화도에서 잠수정을 타고 곧바로 북한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그들은 본부가 무전 지시를 통해 지정해준 접선 장소인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묘지까지 접근했다. 묘지에 도착해서 마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묘지 주변 숲에서 숨어서 대기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산기슭을 타고 500미터가량 올라가서 다른 공작원이 숨겨놓았던 방수복을 찾아 입었다. 방수복을 착용한 그들은 다시 논두렁을 타고 해안을 향했다. 해안에 도착해서는 50미터가량 되는 갯벌을 통과해 수제선 가까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반잠수정 운용 요원들과 접선했다. 그들은 반잠수정에 승선하도록 도와주었고 반잠수정은 해안 경비 초소에서 서치라이트가 비치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북쪽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멀리서 등대 불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갯벌 위에는 마치 소금을 뿌려놓은 것처럼 수천 수만의 하얀 물빛이 아득한 꿈결인 듯 그렇게 반짝였다.


1985년, 그 해
북의 입장에서 보면 1985년은 아주 중요한 해였다. 1980년 5·18 광주 사태 이후 남한 사회가 진보적 대학생, 노동자를 중심으로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터질 것처럼 긴장감이 팽배해 있었다.
1985년에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2월 12일 국회의원 선거였다.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후 야당다운 야당이 없었다. 당시의 제1야당이라고 하는 민한당이라는 정당은 거의 신군부가 만들어준 정당이었다. 당시 집권당이 민정당이었다. 민한당은 민정당의 2중대란 이야기가 그때 나왔다.
80년대 중반에는 학생운동이 어느 한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 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운동 이념도 한 해가 다르게 새로운 내용으로 채워졌다. 한국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반미 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철서신’이나 ‘기수 (일명 해방서신)’ 등 지하 팜플렛이 여기저기 전파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중적 영향과 관련해서 보면, 그 당시 가장 큰 사건은 1985년 5월 미문화원 점거 사건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미제 침략주의에 대항하는 기념비적 사건이었기 때문에 쌍수를 들어서 환영할만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1986년 10월에는 NL 노선의 학생운동조직인 ‘구국학생연맹’이 주도해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 (애학투련)’의 발대식을 개최하려고 한 건국대 사태가 있었고, 1987년 6월에는 역사적인 6월 항쟁이 있었다.
그런데 1985년부터는 학생운동이 매우 복잡한 혁명이론을 만들어 내고 치열한 이론논쟁이 벌어졌다. 반정부시위도 격렬하고 다양해졌다. 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은 민족민주혁명을 의미하는데, 기본적인 인식은 한국 사회의 모순 구조가 민족적 모순과 파쇼적 모순이 중첩되어 있다는 것이다. 민족적 모순에서 소위 반제투쟁이 나오고, 파쇼적 모순에서 반파쇼 투쟁이 나온다. NDR이 나온 다음에 조금 더 있다가 NLPDR이라는 게 나온다. 그게 바로 National Liberation and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이라는 민족해방민중민주혁명이었다. 이게 너무 크니까 분열해서 PD하고 NL이 갈라진 것이다. 나중에 NL은 주사파 쪽으로 가고, PD는 정통 맑스주의 쪽으로 갔지만 NL에 밀려서 소수파로 전락했다.
NL은 PD 계열을 민족적 현실을 외면하고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무작정 추종하는 사상적 사대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독재정권의 노선을 추종했다. 김일성에 대해 ‘자주적 사회주의를 건설한 탁월한 혁명가 또는 노동계급의 위대한 수령’이라고 찬양했고,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향도의 태양’이라고 미화했으며, 주체사상이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으로 사랑의 원리를 밝혀준 사상’이기 때문에 합법 비합법 수단을 총동원해 널리 전파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이 1985년 4월 16일부터 4월 19일까지 진행되었다. 노동조합원 중심으로 약 2천 명이 임금인상을 관철하자고 주장하면서, 머리띠도 두르고 플래카드도 들고 스크럼도 짰다. 이전에는 이 정도의 파업이 없었다. 대기업에서 이런 조직적인 파업은 이게 시작이었다. 그때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대우라는 큰 회사에서 수천 명이 파업을 하고, 스크럼 짜고 회사를 점령하다시피 하여 보통 큰 사건이 아니었다.
신대방동 일대 가리봉동 쪽에 공장이 밀집되어 있어 구로공단이라고 했다. 거기에 봉제공장이나 이런 것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대우어패럴, 부흥사, 로옴 코리아 등이 거기에 있었다. 대우어패럴 파업 사건도 대우자동차 사건과 시점이 거의 같다. 1985년 6월이다. 하지만 연쇄적으로 일어난 파업의 규모나 노동자의 조직 형태는 예전과는 매우 달랐다. 그리고 더욱 격렬해졌다.
1989년 5월에는 아직까지도 동의대학교 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이 있었다. 그 당시 부산 동의대에서는 입시 부정이 학생들에 의해 밝혀져 학내 시위가 벌어지고 이때 전경 5명이 학생들에 의해 감금되면서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화재와 추락으로 숨졌고 91명의 대학생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강철서신의 저자이고 주사파 두목이었던 김영환은 1989년 7월께 남파 간첩 윤택림 (북한대외연락부 5과장)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대학 후배 조유식과 함께 1991년 5월 16일 강화도 해안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타고 입북해 김일성을 두 차례 면담하는 등 14일간 머물다가 제주도 인근 해안으로 귀환했다.

김명남은 1985년 10월 하순에 단독으로 평양을 떠났다. 그는 이미 계획했던 대로 침투준비를 빈틈없이 끝냈다. 그날 그는 초대소에서 노동당 사회문화부 부장과 부부장, 과장, 지도원들과 점심식사를 했다. 그들이 배웅하는 가운데 초대소를 출발한 그는 벤츠 승용차를 타고 출발지점인 남포항으로 향했다. 남포항에 도착한 그는 지도원의 소개로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작전부 부장, 부부장 등 간부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그들의 안내로 남포항에 정박해 있던 전투선박으로 갔다.
북한 대남 공작원들은 대남침투를 ‘전투’라고 부르는데 전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선박이라는 의미에서 ‘전투선박’이라고 하며 다른 말로 공작선 또는 모선이라고도 한다. 선박 뒤쪽에 작은 배인 자선을 싣고 다닌다고 해서 모선이라는 용어를 쓴다. 공작선은 길이가 약 30미터 정도 되는 철제 선박인데 위장을 위해 중국 어선과 같은 모양으로 건조했다. 그래서 배에는 조타실을 겸한 선장실과 갑판, 선실, 기관실 그리고 어창이 있었다. 하지만 내부에는 고도의 특수훈련을 받은 20여 명의 전투원들과 함께 많은 무장장비가 탑재되어 있었다. 선박 엔진도 고성능 엔진을 장착했기 때문에 평시에 항해를 할 때에는 일반 어선들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지만 위급한 상황에 부닥치면 최고 40노트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다. 전투선박에 승선하기 전에 그를 안내할 전투원들을 소개받았다. 전투원들은 30대 중반의 전투 조장과 30대 초반이나 20대 후반의 조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포항을 출발한 전투선박은 40시간가량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중국 산둥반도에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북한 국적의 3,000톤급 석탄 운반용 화물선 옆에 정박했다. 그리고 상선으로부터 물, 부식물, 기름 등을 보충하고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침투 지역인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날 밤 늦게 제주도 남단 공해상에서 중국 어선들 틈에 섞어 끼었다. 다음 날 저녁 다시 반잠수정에 옮겨 타고 제주도를 향해 항해를 계속했다. 그들이 자선으로 옮겨 타고 모선에서 출발한 시간이 저녁 9시경이었는데, 그로부터 약 3시간 후인 밤 12시경 제주도 서귀포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에 도착했다. 그 섬에서 잠수복을 갈아입고 전투원 두 명과 함께 서귀포 해안을 향해 헤엄쳐 갔다.
남파 공작원과 헤어진 전투원들은 길을 되돌아가서 다시 자선과 모선을 타고 북한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이틀 후 김명남은 제주를 출발해서 목포까지 가는 ‘카페리호’ 여객선에 승선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을 선택한 것은 일요일이 다른 요일보다 상대적으로 관광객 숫자가 많을 것이고 그렇게 붐비는 승객 속에 섞여 있으면 검문 검색과 감시가 덜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페리호는 6시간 정도를 항해하여 그날 낮 1시경에 목포항에 도착했다. 그는 목포역 근처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낸 다음 저녁밥을 먹고 나서 목포역에서 통일호 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그는 서울에 도착한 후 오랫동안 암약해온 늙은 고정 간첩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서 한 달여가량 휴식을 취했다. 그의 주선으로 마포구 서교동 빌라에 전셋집을 얻었고 좌파 단체 인사를 만나서 아주 중요한 도움을 받았다. 그 인사의 도움으로 교묘하게 신분 세탁을 하고 서교동 동사무소에서 합법적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았다. 그러고 나서 무슨 사단법인이나 재단의 상임위원, 무슨 협회의 집행위원, 조국평화통일 사무국이나 해외동포 사무국의 국장, 대일 무역을 하는 업체의 대표의 명함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 수시로 공작 자금을 지원받았다. 조총련 연락망을 통해서 엔화를 전달받으면 신세계백화점 뒤편 남대문 시장의 암달러상에게서 환전을 했다.
그는 6개월여가 지나면서 서울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슬슬 작업을 시작할 때라고 여겼다. 먼저 운동권의 문제 학생들이 하숙, 자취하는 일명 ‘대학촌’인 신림동이나 봉천동 등지의 다방, 경양식집, 주점, 중국음식점, 서점 등에 은밀하게 드나들었다. 그들 장소에는 ‘군부파쇼 타도하자’, ‘태산이 높다하되 대머리의 밑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등 불온 낙서가 충만했다.
그러면서 골수 주사파 인물들, 종북파 시민단체 인사들, 학출이건 노출이건 노동운동 출신의 좌파 성향 인물들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해서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인사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 시절에 고문으로 유명한 장소가 몇 군데 있었다. 남영동은 치안본부 대공분실이고 서빙고라는 데는 보안사 대공분실이고 남산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을 말하는데 이 세 곳이 고문으로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공안사범들은 전부 여기서 조사를 받으면서 물고문, 전기 고문을 받았다. 김명남은 오랫동안 신분을 위장한 채 활동하면서 재야 단체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때 들어가서 고문을 받았던 인사들을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포섭’이라는 말은 남한 용어이고 북한에서는 ‘흡수’라는 말을 썼다. 남한 현지에서 포섭 대상을 선정할 경우 반드시 본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일단 포섭 대상이 선정되면 본부에 암호문으로 된 이메일을 보내서 간단한 신상 정보를 보고한다. 그때는 ‘좋은 상품 (포섭 대상)이 있어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본사의 의견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보낸다. 이미 포섭된 대상들 중 변절의 기미가 보이거나 이중간첩이라는 의심이 들면 ‘전번에 계약한 그 상품이 변질되어 사용할 수 없으므로 계약을 파기하려고 한다’는 식으로 통신문을 작성한다. 그로부터 대개 한 달쯤 지나면 대상자에 대한 세세한 인적사항이 내려온다. 이 자료엔 대상자의 학력, 가족 관계, 친분 관계 뿐만 아니라 정치적 성향, 가입하고 있는 단체, 취미 활동까지 담겨 있다. 국내에 거주하면서 암약하고 있는 고정 간첩들이 수집한 자료다.
포섭 대상자에게는 먼저 다가가 친해지면서 경계심을 푸는 게 우선이다. 잦은 만남을 통해서 더욱 친해지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게 한다. 그리고 나서 주체사상에 빠지기 시작하면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상당히 어렵게 된다.
포섭의 최종 단계는 방북이다. 방북하고 안 하고는 엄청난 차이이다. 일단 북한에 가면 세뇌시키는 프로들이 있다. 대남 공작부서의 요원들 뿐만 아니라 대학 교수까지 동원된다. 그들은 심리학자이고 최면술사에 가깝다. 포섭 대상들이 세뇌되면 김일성, 김정일에게 혈서를 쓰면서 충성을 맹세하고 노동당에 가입하고 대남 공작원이 되어 공작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렇지만 그는 포섭 대상에 대해 본부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는 그런 절차를 생략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받았다. 그래서 공작원이 내려올 때는 조장과 조원 두 명이 내려오는 게 원칙이지만 그의 경우에는 혼자 내려올 수 있었다.
그는 그 당시 남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자세히 분석해서 상세한 보고서를 본부로 올려보냈다. 운동권 내부에서는 서로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북한과 연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했다. 자기들끼리 노골적으로 ‘너희는 라인이 있느냐’고 묻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 – 레닌주의를 신봉하는 PD파는 몰락 직전이고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NL이 대세라고 하면서 그러니 혁명적 정세가 아주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특히 재야 운동권은 노동운동가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한때는 NL과 PD가 대립하였지만 PD는 완전히 퇴조하고 있고 NL이 독주하고 있다. 하지만 현 정권은 문민정부라는 허울 밑에 미 제국주의에 대한 예속화가 심화되어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을 군사독재정권처럼 똑같이 탄압하고 있는데 과거 운동권 중에서 출세주의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했다.
본부에서는 그런 보고서를 검토하고 나서 너무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분석했기 때문에 모두 놀랐다. 그를 영웅처럼 생각한 것이다.그 당시 북에서 너무나 궁금한 사항이었던 갑자기 급증하기 시작한 탈북자 입국 현황, 종북주의 좌파 세력의 형성과 정치 세력화 가능성, 주사파 동향, 도시산업선교회, 어용 노동 귀족, 강원도 사북과 고한에서의 탄광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처음부터 노동자였던 활동가를 말하는 노출과 대학생이나 지식인 출신 노동운동가인 학출의 관계와 대립,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 철수, 남북정상회담 가능성, 남한의 핵과 잠수함 개발 능력 등 따끈따끈한 정보와 극히 민감한 부분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보내온 것이다.
그 보고서들은 그가 ‘신동아’나 ‘월간조선’, ‘월간중앙’, ‘말’ 같은 월간 시사종합지의 기사, 유력 일간지의 정치면이나 경제면 기사, 정부 간행물, 인터넷, 전문 서적, 일본 극우 성향 잡지의 기사, ‘역사비평사’나 ‘북한연구소’에서 나온 책들, 그가 (자신을 일본 유학을 다녀온 프리랜서 기자라고 소개하면서) 접촉한 인물들에게서 취재한 내용을 짜깁기해서 편집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보고서는 너무 긴 장문이었으므로 무전 통신이나 인터넷으로 보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 내 연락거점을 운용했던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통해 전달했던 것이다.
그가 언젠가 감쪽같이 전향하고 말았는데 본부에서는 까마득하게 몰랐다. 그의 경력이나 출신 배경, 철저한 정신무장과 사상을 검토해 볼 때 도저히 의심할 수 없었다. 계속 조총련 라인을 통해서 막대한 공작금을 내려보냈던 것이다.
그는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독일의 통일을 정점으로 시작하여 구소련이 붕괴되고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가 연쇄적으로 해체되는 걸 보면서 사상적으로 동요되었다.
남한에서 오래 살다 보니까 북한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 사회의 자유를 맛보았다. 1980년대 말쯤이면 교복 자유화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던 젊은이들이 나이키 신발을 신고 폴로 셔츠를 입고 링 귀걸이를 달고 선글라스를 쓰고 소니 워크맨으로 헤비메탈을 들었다. 그게 그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이었다. 그들은 주말마다 압구정동에서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고 종로에서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먹었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을 직접 목격하면서 시민들이 지독한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숨지고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학교 앞에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목숨을 잃었다. 그해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기나긴 민주화 투쟁에서 선봉에 섰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분열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의 괴수였던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이 북한 공산주의 이념과 체제에 뼛속 깊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김일성 주체사상의 허구성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노동당 본부에서는 그를 의심하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만약 누가 의심을 했다면 그 사람은 그걸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담당 지도원이 그런 의견을 잠시 내비쳤지만 바로 묵살되었다. 더 이상 문제를 삼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숙청되었을 것이다. 그가 막강한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북한에서는 정통 가문이라 할 수 있는 김일성 장군님의 직계 혈통인 빨치산 가문 출신이고 그래서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소련 모스크바대학에 3년간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는 엘리트였고 실세 중 실세였다. 그가 남한에 내려올 때는 보통 공작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고 계급도 몇 단계는 위였다. 그런데 본인이 자청해서 내려온 것이다. 1980년 이후 남한의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니까 자신이 내려가서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했는지, 조선노동당 지하당을 조직할 수 있는지 등 상황 파악을 직접 해야겠다는 것이다.


1992년, 늦은 가을
가을은 여름이 타고 남은 것이다.
안개와 무르익은 열매의 계절이다.
1992년 늦은 가을 어느 날 그가 갑자기 ‘나를 북으로 복귀시켜 달라. 지하혁명조직의 핵심 인물인 남녀 두 사람을 대동 월북하겠다. 내가 직접 골수 주사파 남녀 두 명을 조선노동당에 현지 입당시키고 ‘청계산1호’와 ‘청계산2호’라는 공작 대호를 부여했고 당원증 번호도 부여했다. 입당식은 청계산 국사봉에서 김일성 장군님 초상화를 걸어놓고 거행했다.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과 조선노동당의 영도를 따라 혁명 과업을 수행하겠다’고 충성 맹세를 했다. 그들에게 임시 방편으로 무전기 설치와 철수, 작동 방법, 전문 작성 방법과 암호전문 해문 방법, 난수 조립법, 은서 사용 방법, 인터넷을 통한 송수신 방법 등 통신 연락과 비상시 탈출 방법 등을 교육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은 김일성 주석을 직접 만나 교시를 받고 싶어 한다. 노동당에 정식 입당시키고 무전기 사용과 암호 해독, 사격술 등을 숙련된 기술자 수준으로 철저히 훈련시켜야 한다. 그들은 30명의 투사로 구성된 강력한 조직을 지휘하고 있다.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에서 정부종합청사, 미국대사관, 국세청 등을 폭파할 것이다. 그들에게 폭파 훈련을 시키고 강력한 폭발물을 제공해야 한다.’라는 비밀 통신문을 보냈다.
그래서 15명의 어부가 탄 어선으로 가장한 35노트의 쾌속 공작선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에 전남 무안 쪽 해안으로 접근했다. 그 공작선은 3일 전 남포항의 대남공작 해상기지를 출발해서 서해안 공해상을 타고 내려와 양자강 하류 바다에서 3천톤급 화물선으로부터 기름과 식량, 물 등을 공급받았다.
공작선은 그날 석양 무렵부터 공해상 바다에서 중국 어선으로 가장해 고기를 잡는 시늉을 했고 어둠이 내리자 본격적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섬뜩하리만치 무한대로 펼쳐진 바다가 묵묵히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바다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광대한 별들의 무리가 쏟아내는 광채 때문에 짙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밤의 어둠은 말없이 아득함과 슬픔에 젖어 있다. 밤은 낯설고 적의를 품고 있다.
바다는 여전히 잔잔했고 바람은 포근했다. 배의 엔진은 가벼운 신음소리를 내고 파도의 흰빛 물마루가 뱃전에 부딪혀서 포말이 되어 흩어졌다. 그들은 느리게 항해해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무선 통신은 완전히 끈 채였다. 해안 동남쪽 가까운 지점에 있던 덤불 속에 숨어 있는 주인 없는 무덤이 접선 장소였다.
새벽녘 해 뜨기 전 바다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를 때 전투원들을 상륙시키려고 한 것이다. 배 안에 갑자기 고요한 긴장감이 감돈다. 그들은 신경을 곤두세웠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조타수는 엔진을 끈 채 배를 선회시켜 방향을 바꾼다. 전투원들은 방수복을 입고 세 사람이 입을 여분의 방수복을 챙겨 반잠수정을 내릴 준비를 마쳤다. 그들은 모든 게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서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섬의 바위틈 둥지에서 잠들었던 제비갈매기들이 벌써 깨어나서 배 주위를 한가롭게 선회했다. 해변은 황량하다. 파도는 해안가 좁은 암벽 기슭 아래 펼쳐져 있는 거친 모래밭으로 밀려와 부서졌다. 해무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오른다. 안개 속에서 해변의 모래톱은 보이다가 사라졌고 또다시 나타났다.
그 해안에서 몇 킬로미터 앞에는 조그마한 무인도인 암벽의 섬이 있었다. 육지에서는 중무장한 특수부대 타격대가 매복해 있었고 섬 뒤에는 해군 함정들이 숨어있었고 공군 전투기도 대기하고 있었다. 완벽한 육해공군 합동입체작전이었다. 국군은 숨을 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서 수십 발의 조명탄이 터졌다. 강렬한 조명이 새벽 바다를 환하게 밝히면서 배의 모습이 떠올랐다. 공작선은 당황했고 공해상으로 퇴각을 시도하면서 여기저기 무반동포, 기관포를 난사했다.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처럼 여러 척의 해군 함정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그게 바로 남쪽에서 말하는 ‘독 안에 든 쥐 작전’이었다.
그 당시 평양과 무안 간 서해안 하늘에는 암호 교신이 쉴 새 없이 날아다녔다. 하지만 본부에서도 차마 자폭하라고 지시할 수는 없으니까 너희들이 좋을 대로 알아서 하라고 했을 것이다.
결국 자폭했다. 다 죽었다.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게 끝났다. 파도의 웅성거림도 들리지 않는다. 쪽빛 찬란한 하늘에 아침 해가 눈부시게 솟아오르자 안개는 상쾌한 공기와 쏟아지는 햇살에 쫓겨 물러가고 새벽녘 불가사의한 회색빛 풍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사건은 웬일인지 남쪽 정부에서 발표하지도 않았고 신문에 나지도 않았다. 본부는 그게 암호가 노출된 것인지, 공작선이 해안에 접근하면서 실수한 것인지, 그가 배신한 건지 등에 대해서 검토를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특히 그가 배신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1993년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본부는 부부 공작원을 내려보낸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조사했다. 오랫동안 잠수를 타면서 활동했던 고위 정보원과 접선하는 데 성공했고 그 작전에 대해 소상히 알려준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배신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1995년 이른 봄 벚꽃이 만발할 무렵 안기부 요원들이 통신 감청을 통해 그들을 추적하여 경기도 가평의 골짜기 시골 마을의 허름한 농가에 들이닥쳤을 때는 남자 공작원은 그때 마침 집을 비우고 있었는데 여자는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앰플을 깨물고 자살했다.
그제서야 노동당 수뇌부는 몇 년 동안 농락당한 것을 깨닫고 발칵 뒤집힌 것이다. 처음에는 진짜 공작원으로 열심히 활동했고 그 후 언제부터인가 전향을 한 것이다. 북은 이중 스파이의 역공작에 꼼짝없이 당한 것이다. 비로소 반역을 알았고 배신감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북은 공작원 명부에서 이름을 지워버렸다. 그냥 쥐새끼라고 불렀다. 악마 중의 악마이고, 배신자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배신자였으니까.
북한의 정보기관은 공작원들을 훈련시킬 때 이 사건을 교훈 삼아 철저하게 교육을 했다. 공화국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정말 전광석화와 같은 작전이었다.
김명남은 즉사해서 좋았을 것이다. 그 무엇도 생각할 틈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북은 작은 구멍에 감쪽같이 숨어있는 그 쥐새끼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틀림없이 안기부에서 애지중지 보호하고 있었을 텐데……
그는 1991년 언젠가 제 발로 걸어서 들어갔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 정문에서 시위 도중 명지대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을 거뒀다. 그 후 그의 죽음을 있게 한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대학생 3명이 연이어 분신자살을 했다.
그 무렵 저항 시인에서 생명 사상가로 변신한 김지하 시인은 ‘죽음을 이용하지 말라’고 준엄하게 꾸짖었고, 서강대 박홍 총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 살아 있는 우리들이 이들의 실상을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러면서 ‘어둠의 세력’은 실존 단체가 아니라 죽음을 선동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지칭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명남은 죽음의 굿판에서 육체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견디기 힘든 정신적 동요를 겪으면서 어떤 성스러운 영감을 얻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울컥 솟아올랐다.
그는 안기부 방첩과에서 전향의 진정성을 확인하기 위하여 엄격한 조사를 받았다.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거쳤고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도 썼다. 그렇게 해서 이중간첩이 되었다. 새로 주민등록증과 그 당시 안기부 산하 무슨 연구소의 연구원 자격으로 의료보험증을 발급받았고 운전면허증은 정식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발급받았다.
그리고 성형수술을 했다. 한국인치고는 매부리코처럼 너무 높은 코를 조금 낮추고 쌍꺼풀 수술을 했으며 사이가 벌어져서 금방 태가 나는 앞니 두 개를 뽑아내고 인공치아를 심었다. 항상 머리를 새카맣게 염색을 하여 길게 기르고 다니면서 수십 개의 안경을 상황에 따라 번갈아 썼다. 그리고 가끔 여러 종류의 모자를 쓰고 주로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남한의 보통 중년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안기부의 비밀 안가에서 칙사 대접을 받았다. 특급 호텔만큼 깨끗하고 화려한 침실에 자면서 매끼 그가 원하는 대로 식사를 했으며 어떤 책이든 마음대로 골라서 독서를 하고 TV 시청을 했으며 가끔 외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안내원을 자처한 감시원이 따라나서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는 1년여쯤 지나자 싫증을 내기 시작하면서 밖으로 옮겨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도저히 갑갑해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은 자유를 찾아서…… 해방되기 위해서…… 전향한 것이지 돼지우리에 갇혀 있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를 전담한 직원은 아직은 시기상조이며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그건 본부 고위층의 의견이란 것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완강했다. 자살 소동까지 벌인 것이다. 그는 병실에서 깨어나자마자 ‘도대체 말이죠…… 제가 스스로 죽겠다는데 왜 죽지 못하게 하나요? 이건 제 고유의 권리란 말입니다.’라고 항변했는데, 정말 죽고자 하는 진짜 의도가 있었는지 아니면 애초에 자살 의도가 없었는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 보여주기식이었는지 분간하기가 애매했다.
그래서 성남시 태평동에 대지 50평, 건평 35평의 단층 단독 주택을 마련해서 살게 하였다. 그는 그 주택에 도청 장치 등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호신용 권총을 요구했지만 권총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안기부에서 주선한 중년의 아주머니가 파출부로 근무했다. 그 아주머니는 정기적으로 그의 동태를 보고했고 가끔 그가 연구소로 출근한 후에는 안기부 요원들이 그의 집을 비밀리에 방문해서 의심스러운 정황이 없는지 수색을 하고 갔다.
그는 아주머니에게 단단히 지시했다. 절대로 소포를 받지 말고 무조건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하라고. 자기한테는 소포를 보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폭탄이 장치된 소포가 배달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그는 바퀴벌레가 너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이사를 갈 것을 고집하면서 이번에는 아파트를 요구했다. 그리고 감시받기 싫으니까 아주머니 없이 혼자서 조용히 살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파트의 경우 출입하는 주민들이 많아 보안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성남시 외곽의 4층 빌라로 옮기게 된 것이다.
그는 그 당시 북쪽 대남공작 라인의 조직 체계와 지휘관들, 중국 주재 북한 공작원들의 신상 정보 등을 제공했지만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특히 국정원이 애타게 알고 싶어 하는 남한에 뿌리박혀있는 고정 간첩망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므로 그의 효용성은 이제 수명을 다한 것이다.
첩보 기관은 어느 조직이든 자족적이고 자체 논리로 움직인다. 이중간첩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면 잔인하게 버려질 수도 있다.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당초 약속한 대로 그에게 새로운 신분과 살 곳을 마련해주고 보살피기는 하지만 때로는 적의 손에 죽게 하는 것이 편리할 때도 있다. 언제든지 그쪽의 잔인한 소행으로 발표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 무렵 본부는 참으로 애를 태웠다. 그 자식이 계속 거기 안가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거기는 언감생심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쥐새끼가 거기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는데 근무는 연구소에서 계속한다고 했다. 그게 몇 단계를 거쳐서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세포들은 서로 존재를 전혀 모르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북쪽 요원 두 명이 걔 출퇴근 시간에 맞춰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했었다. 북은 연구소 애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는 음식점이나 술집 등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쥐새끼의 동선을 찾아낸 것이다. 아무리 성형수술을 하고 변장을 해도 소용없었다. 키가 175센티미터인데 키를 키우거나 줄이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조금 독특한 걸음걸이를 걸었다. 아주 거만한 모습이었다.
그는 공화국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반역한 것이다. 지독한 스트레스와 광기에 가까운 고양된 감정의 힘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입술은 아이러니한 체념과 가벼운 비웃음을 띠고 있다. 그는 정신적으로 망가져 가고 있다. 남과 북으로부터 이중으로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계속 그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고 언젠가는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이 언제든지 그를 찾아내서 총을 발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울 강박증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갈수록 심해졌다.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효과가 아주 좋다는 수면제를 먹어도 소용이 없다. 정신과 의사는 최후의 처방으로 충격요법을 제시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때 성남의 거리에서 마주쳤던 두 명의 젊은 남자는 누구였을까. 눈초리가 매서웠지 않는가. 몸이 단단하고 눈초리가 매서운 걸 보니까 틀림없이 북에서 내려왔을 거야. 나를 찾고 있다고. 너무 지루한 일상, 좆같이 더러운 내 인생. 가끔 총에 맞아 죽는 악몽을 꾸고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잠에서 깼다. 덜덜 떨리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가 울부짖었다.
“나도 인간이라구. 어떤 후회도 뉘우침도 없는 게 아냐. 잔인한 짐승이 아니라니까. 너희들은 날 이용해 먹은 거야! 날강도 같은 놈들! 남과 북이 다 똑같다고! 배신자들 같으니라구! 왜? 어리석게 모선을 접근시킨 거야.
모선은 공해상에서 대기하고 반잠수정을 보냈어야지. 반잠수정은 파도에 묻히니까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단 말이지. 너희들이 작전 원칙을 어긴 거야. 자선의 전투원들이 생포되면 내가 그들을 잘 설득해서 남쪽에서 정착해 살도록 할 작정이었어. 그렇게 약속이 되었단 말이지.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은 전투원이 탄 모선이 접근했느냐 말이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큰 배가 해안으로 접근하면 남쪽 해군들이 금방 탐지하고 말지. 그들이 몰살당한 게 내 탓이라고 할 수 있어? 나는 죄가 없다고……”

1997년 6월 그날 저녁 밤늦게 방탄 조끼를 입고 등산용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검정 군화를 신은 괴한 두 명이 빌라의 옥상에서 가스 배관을 타고 내려왔다. 그들은 전문가답게 아주 능숙한 솜씨로 거실 창문을 깨고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그때 쥐새끼는 거실 소파에 망연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그가 창밖을 내다보자 어둠이 꿈틀거리면서 인간의 형체가 그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무시무시한 공포에 질려서 몸이 굳어버렸다.
쥐새끼가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드디어 오셨군.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지.”
“……”
“너희들 어느 쪽이야? 남쪽이야! 북쪽이야!”
“……”
“오랜만에 보는 소음 총이군.”
“……”
“귀머거리야…… 왜 대꾸가 없지. 그것도 지시 사항인가?”
“……”
“한 발만 심장에 쏘라구. 그러면 충분하니까.”
“……”
그들은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처음 한 발의 총알이 그의 가슴을 뚫고 들어왔을 때 죽음이 임박하여 머릿속에 갇혀 있던 회색 안개가 걷히면서 아주 짧은 찰나적 순간에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았다. 괴한들은 총을 쏘고 나서 그대로 빠져나갔다.
그는 즉사했다.


2010년 10월
지하철 노량진역에서 장승배기역 쪽으로 올라가는 장승배기로 뒷쪽 이면 도로 골목에 대지 70평에 지붕은 박공벽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색이 바랜 붉은 벽돌 3층 건물이 서 있는데, 그 건물 2층에 ‘유한회사 대명상사’의 사무실이 있다. 장해식 (張咍飾) 사장은 40대 말인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데 중국에서 명문대학인 북경 정법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그래서 20대 말에 벌써 조선족 출신 중국인 신분이었지만 엘리베이터를 제작 수출하는 한국의 대기업 북경 지사장이 되었고, 중국 내 정법대 출신 인맥을 활용해서 탁월한 영업실적을 올렸다. 그는 그동안 쌓아 올린 영업실적을 인정받아 국내 본사로 들어와 중국 담당 수출업무를 담당하며 부장까지 승진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는 중국 조선족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때문에 임원급까지 올라갈 수는 없었다. 그는 미련 없이 퇴직하고 나서 작은 무역회사를 차린 것이다. 물론 그 회사에서 근무할 당시 회사의 도움으로 한국 국적을 무난히 취득하기는 했다.
고두현 (高斗賢) 지부장은 중국 주재 북한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었다. 그래서 중국 외무부에서 발급한 면책특권이 있는 외교관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는 북한 인민군 소장으로 정찰총국의 북경 지부장이다. 1997년 그때 그는 노동당 작전부 작전 1과장으로 있으면서 ‘쥐새끼 박멸 작전’을 지휘했다. 그때는 북한의 거물급 인사였던 김학모가 남한으로 망명했으니까 공화국 전체가 뒤숭숭할 정도로 온통 난리가 났다.
그해 4월 김학모가 서울에 도착했다. 배신자 주제에 영웅 취급을 받은 것이다. 북은 핵 개발이나 미사일 개발과 관련한 극히 민감한 정보가 남한 당국이나 미국 CIA에 넘어갈지 모른다고 노심초사했다. 물론 그 당시 김학모는 그런 극비 정보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지만 혹시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서 뭔가 캐낼 수도 있었다. 그래서 경고를 보낼 필요가 있었다. 안기부가 내곡동 안가에서 철통같이 그를 보호하고 있어서 그를 직접 처치할 수는 없었다.
1997년 6월 당시 복수를 위해서 남파 되었던 두 명의 공작원은 아직까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성명 불상 공작원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빌라에 들어갔을 때는 김명남은 이미 이틀 전에 총상으로 죽어있었다. 거실은 끔찍한 피바다였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으니까 아마 기념으로 죽은 시체에다가 여러 발을 갈기고 나왔다. 방아쇠를 당기는 짜릿한 손맛을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증거품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사실대로 정확하게 보고했다.
그 당시 성명 불상 공작원들은 사회문화부 부장이 직접 간부들을 대동하고 초대소를 방문해 공화국영웅 메달과 증서,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했다. 그 공화국영웅 증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기로 결정하고 나서 김일성 주석의 결재까지 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공작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기 때문에 그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았다. 공화국영웅 칭호는 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영광과 존경의 상징이었고 선망과 희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김명남은 자살한 게 아니었다.
자살했다면 그 자리에 총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총은 없었다. 그리고 자살자는 자신의 몸 여기저기에 여러 발의 총을 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누구의 소행일까.
고두현 지부장과 장해식 사장은 2010년 여름쯤 중국 천진시의 한 식당에서 업무 협의차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사실이 있었다.
고두현 지부장이 말했다. “뻔하지 않은가. 걔들이 한 거야. 쥐새끼가…… 배신자 주제에 염치도 없이 안하무인 격으로 요구사항이 많았단 말이오. 그때는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 분수를 모르고…… 유흥가에서 돈을 물 쓰듯 했고 술이 만취해서는 온갖 행패를 부렸어.
여자를 소개해 주면 폭력을 일삼고 학대하니까 도망가버렸소. 더군다나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겠다고 생떼를 쓰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골치를 앓고 있었던 거지.”
장해식 사장이 말했다.
“그렇다고……”
“생각해 보라고…… 걔가 말이야 계속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절대로 보내줄 수 없지. 그런데 밀항이라도 해서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일본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찾아가서 망명을 하면 아주 골치 아플 것 아닌가.
또는 말이야…… 변신의 천재이니까 위조 여권을 만들어서 우선 동남아시아로 튈 수도 있었을 거야. 걔들 옛날 이수근의 위장 탈출 사건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을 거라고. 그때 이수근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일단 국외로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거든.
물론 어느 조직에서 처리했는지 명확한 증거가 없으니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일세…… 아마 어느 조직의 작은 그룹의 소행일 수도 있어. 걔들이 수뇌부 모르게 감쪽같이 처리한 거지. 이심전심이었을 거야. 추측하자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 당시 안기부는 당분간 극비에 부치면서 쉬쉬하다가 보름이 지나서야 간단하게 발표했어. 북에서 망명한 고위 인사가 두 명의 북한 공작원에 의해 서울의 모처에서 암살되었다고 했어. 그러면서 국과수에서 부검한 결과 시신에서 구경이 다른 두 종류의 총알이 나왔고, 모두 열한 발의 총알을 맞았는데 가슴에 아홉 발, 목에 두 발을 맞았다고 했어. 그들은 그걸 북한의 소행으로 돌리면서 북한의 테러리즘을 부각시킨 거야.”
“그럼…… 우리 요원들은 코에 손도 대지 않고 코를 푼 셈이군요.”
“그런 셈이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지.
우리는 그걸 교육용으로 활용했어. 우리 요원이 한 걸로 말이야. 그래서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은 거야. 그리고 걔들은 북한 소행으로 돌렸으니까 말이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렇게 단단했던 사람이 망가진 게 말입니다.”
“그렇게 망가질 수밖에 없었어. 그도 인간인데 그러한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소. 쥐란 동물은 아주 영리하고 신경이 예민하지. 본능적인 감각으로 위험을 회피할 줄 아는데 그놈은 쥐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어. 우리는 그를 납치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북으로 데리고 가서 모든 공작원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려면 너무 복잡해서 실패할 확률이 높았다네.”
작성일:2022-04-27 13:24:36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