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제목

< 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12) - 배신과 배은망덕, 용서 혹은 복수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04-27 14:13:31
조회수
473
작가의 말 – 배신과 배은망덕, 용서 혹은 복수



브루투스, 너마저!
― 카이사르

장편소설 (가제)「증언 證言」은 실화소설이고 역사소설이고 분단소설이다. 그래서 역사적 실재를 증언한다. (하지만 나는 역사적 인물, 사건, 실재를 왜곡, 조작, 오용, 남용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하면서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역시의 이면, 빈 공간에 한하여 합리적 추론과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그래도 문학성을 살리기 위해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쳐서 역사적 실재를 왜곡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증언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잔혹함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역사상 모든 독재정권의 본질적 속성이었으니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희 유신체제도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도 똑같았다. 그러므로 나는 북은 악이고 남은 선이라는 선과 악의 이항 대립으로 보지 않는다. 북쪽에는 2,300만의 인민들이 현실적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북한은 가혹한 독재체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의 내적 논리가 있다. 남과 북이 서로 실체를 인정하고 포용하고 화해하지 않는 한 우선 평화는 요원하다. 남과 북이 서로 복수만 생각하면 우리 민족의 미래는 없다. 우리가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전쟁으로 간다면 그건 민족의 파멸일 뿐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배신과 배은망덕, 관용과 용서 혹은 복수에 대해서 성찰하려고 시도했다. 배신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배은망덕은 받은 은혜에 비례하지 않는다.) 소포클레스는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마음이다’라고 했다. 카이사르는 23군데 자상을 입고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배신은 매우 흔한 일이다. 누구나 인생 역정에서 배신을 하고 배신을 당한다. 누가 살아가면서 배신을 안 할 수 있는가. 끝없이 쏟아지는 거짓말, 그것도 일종의 배신 아닌가. 배신에는 은밀한 쾌감이 숨어있다. 배신은 우리 삶의 필수품이다. 죽마고우 같은 친구 간 배신, 부부 간 배신, 연인들의 배신, 가족 간 배신, 민족적 배신, 역사적 배신. 그래서 비극 작품은 거의 대부분 배신과 복수를 주제로 한다. 성경 역시 배신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기독교 교의는 용서를 강조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복음 6 : 27~28) 그러나 이해타산이 없는 순수한 용서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용서는 자기 기만이고 가식이고 위선일지 모른다.
배신을 당하면 분노, 증오, 응징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용서보다는 복수가 먼저이고 당연한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 21 : 24~25)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지고지순한 원칙으로 내세우는 ‘죄형법정주의’란 다름 아닌 인류 역사에서 면면히 내려온 복수의 관념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신곡을 쓴 알리기에리 단테는 중세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상 가장 비겁한 배신자로 예수를 밀고해서 배신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롯 (그리스어로는 이스카리옷) 유다와 카이사르를 배신한 (그의 양자 혹은 심복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지목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들던 날 밤에 ‘내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했지만 유다의 배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예수는 죽은 후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브루투스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부정하고 독재의 길로 가고 있는 카이사르를 제거해서 꺼져가는 공화정의 불씨를 살리려고 했지만 카이사르의 정식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타도되어 복수를 당했고 결국 공화정은 무너지고 로마제국은 세습 왕조 체제가 된다. 카이사르는 사망한 지 2년 후 원로원에 의해 신 (神) 율리우스 ― 디부스 율리우스 (Divus Julius) ― 로 추대되었다.
그런데 단테는 배신을 최악의 범죄로 간주했다.
신곡에서 지옥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죽은 어린 영혼이나 또는 그리스도 이전에 태어난 위대한 시인, 철인으로서 선행을 행한 자들의 영혼이 사는 (그래서 지옥에 있으면서도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림보라고 하는 제1원, 애욕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 쉬지 않고 불에 타는 지옥의 폭풍에 시달리는 제2원, 탐욕가들이 케르베로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3원, 낭비와 인색한 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제4원, 분노한 자들이 스틱스 강의 흙탕물에 잠겨 벌 받고 있는 제5원, 이교도들이 불타는 무덤에 누워 있는 제6원, 폭력을 사용해 죄를 지은 영혼들이 미노타우로스에 의해 벌 받고 있는 제7원,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자를 사기한 유혹자, 아첨꾼, 고성죄인, 점성술사, 마술사, 도박꾼, 위선자, 도둑, 사기꾼 집정관들, 불화와 분열의 씨를 뿌리는 자들, 화폐위조가, 연금술사 등 죄인들이 열 개의 굴속에 갇혀 있는 제8원, 친족을 배반한 영혼들, 조국과 자기 당파를 배반한 자들, 친구와 동료를 배반한 영혼들, 은인을 배반한 영혼들이 코치토스의 얼음 속에 파묻혀 있는 제9원이 있다.
그러므로 상층 지옥에서 하층 지옥으로 내려갈수록 죄는 더욱 무겁고 따라서 형벌은 더욱 가혹한 것이다. 단테는 배신자들을 가장 무겁게 처벌한 것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97년 2월 북경 한국 총영사관으로 들어와 망명 신청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그해 4월 23일 필리핀을 거쳐서 서울로 들어왔다. 김영삼 정권의 말기쯤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김씨 왕조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정립한 인물로 지금까지 탈북이건 망명이건 간에 남으로 내려온 최고위층 인물이었다. 그래서 남북한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김재규 장군은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독재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발터 권총으로 확인 사살까지 했고 그가 죽자마자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유신체제는 순식간에 종말을 고했다.
두 사건은 17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그들은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신성 불가침의 존재인 최고 지도자를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배신을 할 충분한 이유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감행할 만한 대의명분이 있었다.

황장엽 선생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논현동 안전가옥.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사라졌다.
황장엽 선생은 북한의 김씨 봉건왕조 체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북한이 하루 빨리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민족분단의 비극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한 몸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는 충분히 활동할 여건이 안 되었으므로 아무런 실질적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2010년 10월 10일 87세의 나이로 논현동 안전가옥에서 노환으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년 후인 2011년 12월 17일 열차 안에서 심근경색으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하지만 김재규 장군은 위대한 혁명을 성취했다. 바람 없는 천지엔 꽃이 필 수 없고,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 (無風天地無花開 無露天地無結實)
그에 의해 스탈린 체제처럼 지독했던 유신독재는 붕괴되고 제6공화국 체제가 성립하는 단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물론 그 중간에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집권이라는 과도기가 있기는 했다. 1987년 6월 혁명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날 밤 김재규 장군이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그때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사는 온갖 혼란과 비극적 상황 속에서 몇십 년을 후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을 배신한 것이 아닐까. 그걸 배신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가족을 희생시킨 것이다. 황장엽 선생의 가족들은 (망명 당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망명한 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부인은 자살했고 자녀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가혹한 결과인 것이다. 김재규 장군의 경우 그의 가족들은 전두환 도당에 의해 일부 재산이 몰수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죄 없는 남은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희생과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들에게 가해진 온갖 비난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배은망덕과 대의명분 사이에서 말 못 할 고뇌를 겪었다. 그들은 민족적 운명이 걸린 대의명분 앞에서 그 하찮은 옛날 봉건왕조 시대의 잔재인 천륜을 저버렸다는 배은망덕을 이겨낼 수 있었다 (올바른 명분은 용기와 힘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가혹한 운명이었다.

배신에 대한 대가는 용서 또는 관용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호메로스는 ‘복수는 흘러내리는 꿀보다 훨씬 더 달콤하다’라고 했지만. 김재규 장군의 경우 헌정 질서를 파괴한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도당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잔인한 고문과 모욕과 폭력을 행사했다. 박정희로부터 쿠데타 기술과 철권정치의 의지를 전수 받은 전두환은 먼저 불문곡직하고 폭력을 행사해서 철저한 복수를 감행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명백한 단순 살인인데도 그보다 죄질과 형량이 훨씬 무거운 무서운 죄인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했다. 그 당시 전국적인 비상계엄체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급해서 민간 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워서 무슨 군사작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하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자마자 서둘러 3일 만에 사형집행을 하였다. (최근 김재규 장군의 유족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재심 신청을 하였다.)
김재규 장군의 재판은 민간 법정에서 3심을 거쳐 충분히 심의해서 단순 살인인지 여부를 가려야 했고 사형집행은 시간을 두고 국민들의 도덕적 평가와 법 감정에 의한 정당한 심판을 거친 후에 집행 여부가 결정되었어야 했다.
전두환 일당은 대법원 재판 과정에서 단순 살인이라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데려가 모진 고문을 했다. 물론 다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은 전두환의 하수인으로 그의 지시에 충실히 복종했다. 그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서 김형욱 전 정보부장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배신한 행위는 어떠한 대의명분도 없는 순전히 자신의 일신을 도모하기 위한 아주 전형적인 배신이었다. 그래서 그의 망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망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부정축재한 많은 돈과 가족을 챙겨서 미국으로 도망간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다.
박정희는 그 독한 성격대로 당연히 복수를 택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서 국가기관을 동원해 집요하게 그를 추적하고 마침내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심복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앞장선 충실한 문지기이고 일등 공신이었지만. 박정희는 그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후련했을까. 그러나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했다. 복수는 다시 복수를 일으키므로 악순환을 낳는다. 그 자신이 20일 후 총을 맞고 죽었지 않은가.
이번에는 김형욱이 지하에서 복수를 한 셈이다.
[박정희가 누구인가? - 박정희는 일제 침략 시기 대구사범학교 출신 초등학교 교사로서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혈서를 쓰고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군 장교가 되어 항일독립군 토벌에 가담했다. 그는 두 번의 창씨개명을 통해 스스로 일본인임을 선언하고 실천했다. 첫 번째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 (高木正雄)이고, 두 번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岡本實)로 완전히 일본식 이름이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군인 박정희는 재빨리 한국군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박정희와 그 형 (박상희,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장인) 등은 남로당 당원이었고 1948년 제주 4·3 항쟁 때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은 군대 내 남로당원들의 선동에 따라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남로당 조직이 드러나고 박정희는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로당 동료들의 명단을 제공하고 석방되어 군에 복귀하고 6·25 전쟁 직후 장군으로 진급했다. ‘친구를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13)라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말이다.
그는 1969년 한밤중에 불법 날치기를 통해 3선 개헌에 성공했고 1971년 대통령 출마 연설에서는 “다시는 이러한 방법으로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공언했다. 과연 그는 유신독재체제 하에서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거듭된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역사를 속였다. 그는 배신자이다. 하지만 장기 집권 기간 내내 조국 근대화를 외치면서 경제 발전을 위해 매진했고, 지금 우리가 선진국 문턱에서 이만큼이라도 잘 살고 있는게 그 덕택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 무작정 매도할 수만은 없다. 보는 시각과 관점에 따라 천차만별 달리 평가할 수도 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런데 북한 정권은 원수 갚을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견디면서 장작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맛본다는 와신상담을 선택했다. 북한은 2010년 이른 봄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의 기획 지휘하에 황장엽 선생을 살해하기 위해서 두 사람의 공작원 (동○○과 김○○)을 탈북민으로 가장해서 남한으로 파견했지만 그들은 국정원이 운영하는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적발되었다. 그때는 황장엽 선생이 87세의 고령으로 자연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연사하기 전에 살해하여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남파 공작원들은 그해 4월 20일 구속되었고, 7월 1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10년 및 자격정지 10년이 선고되었으며 (검사는 15년을 구형했지만), 그 후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나는 수천 쪽에 이르는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다 읽었다.) 그들은 2020년 여름 만기출소했다. 지금은 지방에 있는 법무부 산하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 시설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출소한 후에도 다시 10년의 자격정지 형이 집행되고 보안관찰법에 의한 보안관찰의 대상이 된다. (자격정지 형을 선고받으면, 공무원이 되는 자격, 공법상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법률로 요건을 정한 공법상의 업무에 관한 자격이 당연히 정지된다. 자격정지의 선고를 받은 자는 이를 검찰청이 관리하는 수형자원부에 기재하고 지체 없이 그 등본을 형을 선고받은 자의 등록기준지와 주거지의 시, 구, 읍, 면장에게 송부한다. 형사소송법 제476조 참조.) 어쨌거나 그들은 보안관찰법이나 출입국관리법 등에 의해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해외 출국은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까지 몇몇 역사소설을 쓰면서 ‘역사 다시 쓰기’를 시도했는데 이 소설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역사적 사건과 인물, 실재, 가상의 내러티브, 작가의 관념이 결합된 소설인) 인프라 소설을 쓰려고 시도했다. 소설은 허구의 세계를 형상화하지만 그 허구의 세계는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그 세계 속에서 필연성과 핍진성이 살아있어야 한다. 소설은 진실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 인물, 실재를 왜곡, 조작, 부정, 오용, 남용해서는 안된다. 그런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정말 힘들다. 그래서 실제 사실을 왜곡해서 흥미 위주로 스토리를 전개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작가로서 미학적 관점에서 소설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그 어두운 이면을 찾아서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역사적 맥락과 합리적 추론을 토대로 신빙성 있는 상상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므로 극히 일부분을 제외한다면 거의 전부가 명백한 역사적 실재이다.

톨스토이는, ‘예술가와 역사가의 임무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사건과 인물에 대한 내 책의 묘사가 역사가의 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역사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개념이 공상이 아니라 역사가가 모을 수 있었던 한에서의 역사 기록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술가는 역사가와 마찬가지로 사료를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내 소설 속 역사 인물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부분에서 나는 허구를 지어내지 않고 사료를 이용했다. 그 사료는 내가 집필하는 동안 하나의 장서를 이루었다. 여기에 그 제목들을 적을 필요는 없겠지만 나는 언제라도 참고 문헌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새뮤얼 존슨의 전기를 쓴 제임스 보즈웰은 말했다.
‘…… 자료를 모으고 생략된 부분을 채우고 서류 더미 속에서 자료를 찾는 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드는지 자넨 상상도 못할 걸세.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짜증스러운지도 자넨 꿈에도 모르겠지. 자료를 정리하고 다듬는 것에 비하여 이런 사전작업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몇 번이나 포기할 생각을 했는지 몰라. 때때로 날짜 하나를 바로잡기 위해서 런던까지 단숨에 달려가야만 했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누구도 나에게 찬사를 보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난 사소한 부분을 수정하기 위해서 런던까지 갔지. 이런 나의 노력에 대해 그 누구도 칭찬하지 않겠지만 실수나 오류에 대해서 비난이 쏟아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
맨부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영국 작가 힐러리 맨틀은, ‘저는 자료조사는 힘닿는 대로 꼼꼼히,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추측은 아무런 사실자료가 존재하지 않을 때만 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런 추측도 합당해야만 하고요. 자료에 틈이 있어서 그것을 메울 때도 사실에 비추어 봤을 경우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들 인물에게 저는 그 정도의 학문적 연구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연구 결과가 정확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요.’라고 말했다.
판타지 소설 작가인 데이비드 앤서니 더럼은, ‘역사 소설 속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실, 인물, 장소, 사물, 사례를 열거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책이라면 이러한 내용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역사적 배경을 지닌 소설은 이러한 사실에 생명을 불어넣어야 한다. 생생하고 현실감 있게 배경을 그리는 한편 일상의 소소함으로 구성한 디테일을 채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 유명한 소설 「무한한 재미 Infinite Jest」를 쓴 데이비드 월리스 (David Foster Wallace)는 말했다. ‘작가는 하나의 자질로서, 본인이 방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것처럼 독자에게 보여야 하죠. 행에서든 행간에서든 말이에요. 어떤 소재를 잘 알고 그 소재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 왔다는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해요. 작가는 독자의 신경 말단에 어떤 효과를 일으키길 원하니까요. 전 그런 걸 꽤 잘해요. 어떤 소재에 대해 상당히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어요. 실은 제가 아는 내용이 대개는 조금만 찾아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이죠. 아주 전략적인 조사 방법이에요.’
그는 그 소설을 쓰면서 약물과 중독에 관한 부분을 쓰기 위해 많은 시간 실제로 약물 중독에 걸린 사람들과 어울렸다. 다시 말하면 보스턴에는 재활시설이 열두 곳이 있는데 그중 세 곳에서 그들과 어울려 수백 시간을 보낸 것이다.
작품 그리고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신뢰성이다. 신뢰성은 얻기 쉬운 편이지만 잃어버리기도 쉽다. 명백한 사실을 잘못 쓰는 것만큼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에 속하는 정보라 해도 이 세상 누군가는 작가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 것이며, 작가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서슴지 않고 지적할 것이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한 후,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인 닐 더그래스 타이슨은 영화에 나타난 너무나도 명백한 천문학적 실수를 지적하며 캐머런 감독을 비난했다. 배가 난파된 뒤 여주인공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별자리가 그 시간과 장소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캐머런 감독은 이 영화를 3D 버전으로 재개봉할 때 이 장면을 올바르게 수정했다 (빈센트 M. 웨일스).

이 소설의 배경인 2010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대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술한 것처럼 그해 4월 황장엽 선생을 살해하기 위해 탈북자로 위장하여 남파되었던 공작원은 구속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고 황장엽 선생은 그해 10월 10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들의 구속이나 사망 사실은 신문에서 단신으로 간단하게 취급되었다. 그래도 그들 개인의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한 해였던 것이다.
나는 이 소설 속에서 ― 황장엽 선생의 「회고록」,「황장엽 선생의 마지막 대화」, 황장엽의 망명 실무를 맡았던 김덕홍 (72세)의 회고록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국가정보원의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사진들, 김영환 지음 「시대정신을 말하다」, 한기홍 지음 「진보의 그늘」, 북에서 내려온 공작원의 수기, 탈북자의 증언, 남파 간첩 관련 5000쪽에 이르는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재판의 최종 결론인 판결문, 공개된 자료 (위키백과사전의 평양직할시 행정구역 설명서 및 함흥시 행정구역 설명서·네이버 두산백과사전의 조선노동당 검색 출력물·2010년 9월 14일자 연합뉴스의 북한 조선노동당 조직도, 조선노동당 규약 ·디지털 북한백과사전 검색 출력물·2006년 8월 22일자 데일리NK의 기사·월간 「북한」 2006년 12월호 ‘북한의 대남전략·전술과 공작실태’기사·2009년 5월 10일자 연합뉴스의 ‘북 대남 해외공작기구 정찰총국으로 통합’기사·2010년 2월 18일자 중앙일보의 ‘북 군부 대남통 김영철, 공작총책으로’기사·2010년 8월 31일자 한국일보의 ‘김영철 정찰총국장 황장엽 암살 사건 기획’기사·1992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의 ‘북한군 비무장지대 침투서 사살까지’기사·2010년 5월 31일자 주간조선의 ‘김일성·김정일의 대한민국 공격사 65년’기사·2010년 9월 13일자 연합뉴스의 ‘북TV, 96년 강릉 잠수함 공작원들 영웅 미화’기사·2010년 6월 1일자 월간중앙의 ‘악명높은 정찰총국 35호실 500명 저승사자 출동대기’기사·2003년 12월 9일자 오마이뉴스의 ‘황장엽 출판기념회, 보수인사들 총출동?’기사·평양직할시의 위성사진·인터넷 구글어스 홈페이지 메인 화면에서 검색한 두만강 사진·중국 외교부 발행 중국 주재 외교관 명부·2010년 4월 4일자 연합뉴스의 ‘김정일, 황장엽씨 동물이하 매도’기사·2010년 4월 5일자 연합뉴스의 ‘북 매체 황장엽 무사치 못할 것’기사·2010년 10월 10일자 조선일보의 ‘황장엽, 계속된 암살위협 속에서도 북 비판 이어가’기사·2008년 8월 25일자 법률신문의 ‘대법원 탈북 피살 이한영 씨 유족에 대한 국가배상인정’기사·남파 공작원에 의해 피살된 탈북자의 유가족에게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문·황장엽 살해 협박범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인터넷 검색 사이트 네이버의 연길시 및 장춘시에 대한 검색물·인터넷 중국 기차역 운행 일정 검색 사이트 출력물·네이버 백과사전 황장엽 인물 자료에 관한 출력물·중국 도로 정보에 관한 인터넷 사이트 출력물·조선향토대백과사전), 기타 참고 문헌, 인터뷰 기사, 인터넷 검색 등에 근거해서 역사적 증언을 기록했다.
이 소설의 경우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였는데 남파된 테러리스트들의 경우 아직 실명을 밝힐 단계는 아니고 또한 작가로서 소설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가명 사용이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실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빈틈을 메우기 위해 실제 날짜를 변경했고, 몇 개의 장면을 만들어 삽입했고, 일부는 내용을 조금 비틀었고, 여러 곳에서 상황에 맞추어 대화를 일부 조정하고 보충했다.
그 당시 남파 간첩의 ‘황장엽 살해 음모’사건을 수사했던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의 담당 검사 (지금은 서울에서 변호사이다)는 암살조와 접선해서 암살을 조력할 남한의 고정간첩의 존재를 집중 조사했었다. 일반 탈북자로 위장해서 맨손으로 입국하였으니 이들에게 구체적인 방법을 지시하고 무기를 건네줄 접선책인 고정간첩이 있다고 의심하고 철저히 조사를 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살을 시도하는 등 그 부분만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실제 고첩과의 접선 없이 단독으로 범행을 실행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접선이 예정되어있었는데 끝까지 함구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은 것이다.
피의자신문조서는 경찰이나 검찰에서 피의자를 조사하면서 작성하는 핵심 서류이다. 자백은 증거의 왕이라고 했는데 자백은 전부 여기에 기재된다. 하지만 이 조서에는 범죄사실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 사항만 기재될 뿐이다. 조사 과정에서, 즉 문답 과정에서 수사관과 피의자의 다른 대화, 농담, 반말, 회유, 협박, 강요, 욕설, 고함, 폭력, 중얼거림, 생각, 감정 등은 절대로 기재되지 않는다. 그냥 넘어간다. (이 부분은 문답 과정에서 작은 글씨체로 표시하였다.)

나는 5년 동안이나 작가의 절벽에 시달리면서 초고를 완성한 후에도 우여곡절을 겪었고 원고를 불태워 없애버려야 한다는 강박 불안 절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열 번쯤 스무 번쯤 고치고 고치고 한 다음…… 완성이 아니라 끝을 맺었을 뿐이다. 하지만 뭘 장담할 수 있겠는가. 죽는 날까지 무슨 계기만 있다면 수정하고 또 수정할 것이다. 수정이야말로 모든 글쓰기의 본질적 속성이다.
(물론 어느 작가이든 훌륭한 작가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나 논거 같은 건 없다. 또한 형편없는 작가라고 확실히 증명할 방법도 없다. 문학적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당해 작품에 처음부터 내재해 있던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읽는다는 경험을 통해서 각자 발견 또는 발굴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진실은 하나가 아니라 독자의 숫자만큼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느냐는 것이다. 생존이야말로 그 작품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지표인 것이다.)
작성일:2022-04-27 14:13:31 175.209.21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