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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해무 海霧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2-04-27 13:05:13
조회수
439
해무 海霧




12월 겨울 안개가 나무에 감기고……


서울 영등포구 대림2동에 자리잡은 대동초등학교는 대로변에서 한 블록 들어가 있다. 주위에는 명지성모병원과 대림파출소가 있다. 아침 일찍 정문 앞엔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가 많았다. 초등학교 2학년쯤으로 보이는 한 여학생이 “마마, 짜이찌엔”이라고 엄마를 향해 손을 흔들자 어머니는 마주 손을 흔들면서 “니 하오하오 팅 라오쓰 더 화”라고 화답했다. 학교 앞에서는 등하굣길에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더 자주 들린다.
대림로를 중심으로 중국 동포와 본토 중국인이 많이 모여 사는 대림동 차이나타운 거리에는 중국어로 쓰인 간판을 내건 가게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휴대폰 판매점 직원은 “라이라이!”를 외치며 호객행위를 한다. 그 거리에는 벤츠나 아우디 같은 고급 외제차가 심심치 않게 지나가기도 하고, 한껏 치장한 애견과 함께 산책하는 주민의 모습도 눈에 띈다. 골목 양쪽으로 음식점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지만 널브러진 쓰레기 없이 정돈된 모습이다. 옛날에는 살인, 강도 등 칼부림 사건도 나고 했지만 요즘엔 그런 얘기를 들은 지 오래됐다. 높은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동네 분위기도 크게 바뀌었다. 이곳은 범죄가 줄어들다 보니 주거 환경이 개선돼서 중산층으로 자리 잡은 중국 동포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한탐정협회 회장이 발급한 정식 탐정사 자격증이 있는 디스커버리 탐정사무소의 노련한 직원이 지하철 7호선 대림역에서 나와 5백 미터쯤 떨어진 도림천변 대림벧엘교회 인근에 있는 황토색 6층 연립주택을 방문했다. 총 가구수는 열두 가구이다. 입구에 있는 우편함 401호는 텅 비어 있다. 그는 401호 현관문에 음량 증폭기를 댔다. 희미하게 TV 소리가 났다. 가스 검침표를 보니 월 사용량이 일반 가정의 1/3 수준이어서 외국인이 숙소로 쓰고 있거나 1인 가구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잠깐 동안 비상계단에서 자동차 키를 들고서 숨죽여 기다렸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그는 직접 부딪쳐 보기로 하고 현관 벨을 눌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직원들이 3일 동안 교대로 행인인 것처럼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연립주택 입구를 주시했다. 그들은 소형 변형 카메라가 설치된 안경을 끼고 있거나 자동차 키를 들고 있었다. 하루종일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사진 속 대상 인물이 밖으로 나왔고 근처 슈퍼마켓에서 무언가 사 가지고 들어가는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의뢰인이 준 사진 속 인물인 장해식이 틀림없다. 사진 속 얼굴보다는 훨씬 홀쭉하고 늙어 보였다.


장해식 사장은 원래 중국 길림성 화룡현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인데 20대 초반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갔고 그 후 중국 공산당 혁명의 성지인 산시성 연안으로 가서 모택동의 홍군에 입대하여 군인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국공내전 당시인 1948년 10월 홍군이 창춘을 포위할 때 국민당군과 치열한 전투 중 사망했다. 그래서 장해식은 혁명 유가족 자격으로 동생들과 함께 중국 공산당에서 대학까지 마칠 수 있게 지원을 받아 명문 대학인 북경 정법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이십 대 말에 벌써 조선족 출신 중국인 신분이었지만 엘리베이터를 제작 수출하는 한국의 대기업 북경 지사장이 되었고, 중국 내 정법대 출신 인맥을 활용해서 탁월한 영업실적을 올렸다.
그렇지만 조선족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에 회사에서 승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퇴직하고 나서 직접 무역회사를 차린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중국에서 값싼 농산물인 호두, 땅콩, 고구마순, 버섯 등을 들여와 서울 경동시장 농산물 도매상들에게 넘겼다. 그러나 중국 농산물은 값도 싸고 물량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규제 때문에 수입에는 몇 가지 제한이 있었다. 반면에 북한산 농산물은 국내로 수입할 때 내부 거래로 취급되면서 관세가 면제되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인기 있는 농산물을 중국 현지에서 싼값으로 대량 구입하여 북한 남포항에서 속칭 ‘포대갈이’라고 하는 농산물 세탁 과정을 거쳐서 북한 당국의 원산지 증명서를 발급받아 남한으로 가지고 내려오면 막대한 수익이 생겼다. 그리고 나서 지금은 칭따오에서 칭따오 맥주를 수입하고 있다.
그 당시 그는 건물까지 매매하게 된 것이다. 지하철 노량진역에서 장승배기역 쪽으로 올라가는 장승배기로 뒤쪽 이면 도로 골목에 그 건물이 있다. 대지 70평에 지붕은 박공벽에 맞배지붕을 얹어 놓은 색이 바랜 붉은 벽돌 3층 건물이 서 있는 것이다. 1층은 ‘북경반점’이라는 간판이 붙은 중국집이고, 2층은 ‘유한회사 대명상사’ 사무실이고, 3층은 살림집이다.
그는 외동딸이 북경에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고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아내까지 북경에서 살고 있었으므로 가족들을 만나고, 중국의 수출회사와 업무를 협의하기 위해 거의 두세 달에 한 번꼴로 중국에 출장을 다녀왔다.

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는 깊은 산속에 있다. 너무 깊은 산골이어서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푹 쉴 수 있다. 좁은 산길을 아슬아슬 오르면 부락들이 산자락에 흩어져 있다. 멀리 떨어진 마을끼리는 2시간을 걸어가야 할 정도로 첩첩산중이다. 겨울에 눈이 오면 완벽하게 고립된다. 그래도 소백산 우아한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산간벽지에 있으니 그 옛날 이곳에 살던 화전민은 6·25 전쟁이 난 지도 몰랐다. 지금도 화전민이 생활하던 너와집, 신령스러운 엄나무가 지키는 서낭당이 남아 있다. 변변한 슈퍼마켓 하나 없다. 편의시설이 없어 불편하지만 도리어 그 점이 매력적이다. 도시생활에 찌든 사람이 느긋하게 쉬면서 안식을 누리기 좋다. 우체부가 제일 싫어하는 마을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어느 날.
초겨울이고 평범한 어느 날이다. 하늘은 맑고 연립주택 앞마당 작은 정원에는 흰 서리가 내려앉았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다. 검은 테 안경 속에서 얼굴 윤곽이 더 날카로워 보인다. 다소 짙은 눈썹은 눈을 조금 내리누르는 듯하다. 그는 두 눈으로 기민하게 거실을 둘러본다.
장해식은 지금 컨디션이 좋지 않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럽다. 침묵이 흐른다. 그의 얼굴에서 침묵이 배어난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말없이 앉아 상대방을 응시한다.
그 난데없는 낯선 침입자는 도자기 그릇들을 박살낸다. 깨진 그릇 조각들이 바닥으로 미끄러진다. 장해식의 심장이 빠르게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열기가 얼굴과 온몸을 휩쓸고 땀이 줄줄 흐른다. 낯선 사람은 아주 큰 소리로 말한다. 하지만 그도 큰 소리로 말한다. 언쟁이 벌어지고 목소리가 거칠어진다. 젊은 남자가 갑자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사납게 후려친다. 그가 쓰러지며 문틀에 등이 거세게 부딪힌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그는 마룻바닥에 고꾸라진다.
그들은 이제 소파에 마주앉아서 담배를 피운다. 낯선 침입자는 커피잔을 내려놓고 액체의 희미한 떨림을 지켜본다. 배경이 보이지 않는 젊은 여자의 사진. 풍성하게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로 늘어뜨려 묶은 모습이다. 사진에는 여자의 옆모습도 담겨 있다. 여자의 눈은 어느 지점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진정하라구. 너무 소동을 부리면 아랫 집에서 경찰에 신고할 거야. 그러면 경찰이 5분 내로 출동할 거라고.”
“그렇겠지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 공작원의 기본 수칙을 잊었습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절대로 흥분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배신자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냈지 않습니까.”
“왜? 소음총을 쏘지 않고? 차라리 독약 앰플을 주거나? 여기서 깨물고 죽을 테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총도 없고 앰플도 없습니다.”
“그럼…… 말해 보게. 무엇 때문에 날 찾아왔나?”
“저를 소개하겠습니다. 정찰총국 소속 맹주석 소좌입니다.”
“그렇군……. 날 내버려두지 그랬어.”
“우리도 별수없지요. 거래처 사람이 3억 원의 납품 대금을 떼먹고 잠적했다고 하면서 탐정사무소에 맡겼지요. 그 사람들 꽤 고생을 했습니다. 6개월을 넘게 추적했으니까요.”
“본부에서는 날 배신자로 생각하나? 그럴 만도 하지. 오 년 동안이나 잠적해 버렸으니까. 그런데 왜 이제서야……?”
“본부 고위층은 난감했을 겁니다. 오랫동안 주저주저한 거죠. 철석같이 믿었는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난…… 배신 같은 거는 모르네.”
“그렇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배신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충분한 근거가 있지요. 만약 배신했다면 우리 조직이 송두리째 넘어갔을 텐데 그러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쪽에서 끝내 전향을 거부하니까 감쪽같이 처단해 버렸거나 아니면 감금 상태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한 거죠.”
“남한 사회는 개방 사회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감금할 수는 없을 걸세.”
“그러니까 비밀리에 재판을 하고 나서 교도소에 집어넣어 감시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끊임없이 회유하고 조직의 전모를 불라고 강요하겠지요. 워낙 거물 인사니까요. 정 불지 않으면 거짓말 탐지기, 최면술사, 프로파일러를 동원하거나 신통한 자백약을 억지로 먹일 수도 있겠지요. 본부에서는 우연한 교통사고나 암에 의한 병사도 생각했습니다. 이유 없는 행방불명도 고려했습니다.
고정간첩을 오래 하다 보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지치거나 타성에 젖거나 남한 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럴 수도 있거든요.
남파 공작원 중에는 소리 소문 없이 행불이 된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사실 그럴 경우 몸속에 마이크로칩을 심은 것도 아닌데 찾을 방법이 막연한 거죠. 본부에서도 판단하기가 난감하지 않겠습니까. 영웅적 행위로 평가할 수도 없고 배신자로 처벌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네. 난 스스로 잠적한 거야. 내 마지막 임무는 말일세…… 탈북자 단체를 관리하는 것이었네. 남한에는 탈북자가 3만 3천 명 정도 있는데 탈북자 단체는 80개가 넘는다네. 말이 관리이지 그저 들락날락하면서 그런 단체 사람들하고 어울린 게 전부라네.
북쪽 사람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 그 사람들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지.
누구는 사이비 북한 인권운동가가 되고, 일당 2만 원을 받으면서 극우파 시위꾼이 되고, 교회에 나가면 돈을 주니까 기독교 신앙 간증인이 되고, 북한인민전선해방군 사령관이고, 국정원 정보원이고, 공사현장의 막노동꾼이고, 여성들은 대개 뒷골목 식당의 종업원이나 유흥업소로 밀려나 있었지.
그 무렵 남한 당국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미국의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인 F-35A 도입을 계획하고 있었지. 그 전투기는 우리 방공망에는 걸리지 않는 첨단 스텔스 기능을 가지고 있지. 레이더에 잡히더라도 골프공 크기 정도로 보여서 다른 물체와 구분하기 어렵단 말이지. 평양의 지하 지휘소나 미사일 기지, 핵 시설 등을 은밀하게 타격할 수 있지. 이 때문에 인민무력부 총참모부가 가장 무서워하는 전략무기라고 할 수 있네.
반드시 도입을 저지해야만 했네. 나는 본부의 지시대로 도입을 저지하려는 남한의 단체 조직원들을 만나 설득했고 북경 현지 식당에서 내가 조달한 자금을 전달했지.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걸 알게나. 고정간첩의 시대는 끝났어. 공작이란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야. 사람 포섭해서 조직 만들고 확대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되지는 않거든. 장기간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애써 만들어 놓은 지하당 조직이 어느 순간 깨지는 거야.
고첩의 정보수집 활동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네. 남한 같은 열린 사회에서는 최고급 기밀이 아닌 웬만한 정보는 인터넷이나 매스컴을 통해 다 공개되고 있단 말이지. 그걸 본부에서는 대단한 정보로 착각하고 있단 말이야.”
“2010년 황장엽 살해 미수 사건을 기억하시겠죠. 공작원들 사이에서는 그게 무리한 공작이었다는 비판이 은근히 나돌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지요.”
“2010년 봄 탈북자를 가장해서 내려왔던 공작원들은 모두 국정원 조사에서 걸렸지. 결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야. 공작이란 실패도 있고 성공도 있지만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지. 우리도 수없이 경험한 일이 아닌가. 많은 준비와 인내심이 필요하지.
냉정히 평가하자고. 내 책임은 있을 수 없어.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그때 북경 지부장도 책임이 없어. 단순한 연락책에 불과했으니까. 그걸 물불 가리지 않고 서둘러서 지시한 본부 윗대가리 책임이야.”
“오해는 풀린 것 같습니다만…… 완전히 납득이 된 건 아닙니다. 우리 공작원 세계에서는 영웅처럼 떠받드는 최장기 고첩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
“어쩔 수 없었다네. 나도 인간이란 걸 이해해 주게. 보통 사람이란 말이지. 오랫동안 말 못할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지. 특히 아내가 암으로 죽으면서 급격히 무너졌네. 본부의 지시 때문에 북경으로 가서 임종을 지켜볼 수도 없었지.”
“사모님은 영면하셨습니다. 그때 고두현 지부장께서 대좌님의 신상에 대해서 몹시 걱정을 했습니다. 국정원 쪽에서 뭔가 의심을 하고 있다는 정보가 있었거든요.”
“그랬었지. 본부에서 북경의 일류 병원에 입원시켜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치료를 도와주었지. 시체도 화장하지 않고 북으로 운구해서 혁명열사 능에 안치해준 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감격했다네. 그 점에 대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지…… .”
“그런데 왜……?”
“어느 날 갑자기 우울, 강박, 환청이라는 불청객이 나를 찾아왔지. 나의 생각,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왔어. 마치 악귀에 조종당한 것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환청이 들리면서 신경이 예민하여 고함을 지르고 말이야. 그때는 자해하거나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생겨나지. 그런데 말이야. 병원에 가면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단 말이야. 누군가 귀에다 대고 속삭이고 조롱하고 명령하고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전생 등을 알려주었네. 계속해서 악몽을 꾸거나 헛것이 보이고 귀신까지 보였지.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도망가기로 했네. 건물도 처분하고 회사도 정리했지. 주민등록도 사실상 말소되어서 무적자가 된 거야.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거지. 그러고 싶었네.
대충 정리가 끝나니까 단양 산골로 들어간 거지.”
“그런데 왜 돌아오신 거죠? 거기에 계속 계셨으면 끝내 찾지 못했을 텐데요.”
“너무 무료했지. 정신병이 다 나으니까 다시 화려한 도시가 그리워졌지. 그리고 누군가 돌아가자고 꼬드겼다네.
다시 물어보겠네. 맹 소좌의 임무는 뭔가?”
“대좌님을 모시고 올라오라는 지령이 떨어졌습니다.”
“그건 당초 약속과는 어긋나는 거야. 난…… 처음부터…… 여기 남한에서 죽을 때까지 살기로 돼 있었어. 어떤 경우에도 북쪽으로 소환하지 않는 조건이었지. 나는 이미 자유의 맛을 실컷 맛봤기 때문에 북에 가서는 살 수 없다네. 그 대가로 나는 충성을 다 바쳤지 않은가. 이제 와서…… 내가 도망가지는 않을 거니까 내일이라도 총을 가지고 와서 쏴 죽이게.”
“이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내 딸과 손주들이군.”
“얼마 전에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옮겼습니다.”
“너무하군. 딸까지…… 인질로……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군.”
“인질이라고 말하기에는…… 어쨌든 본부가 관리하는 평양 근교 초대소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북경에서 잘 살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북경 지부장이 무슨 일인지 평양으로 소환되었습니다. 저는 그 경위를 전연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패막이 사라진 거죠.”
“지부장이 궁금하군? 평양으로 소환되었단 말이지……. 그렇다면…… 가장 최상의 경우라면 좌천돼서 한직에 머무르는 거고…… 아니면 그 성격에 자살을 했을 수도…….”
“본부에서는 오 년 동안의 행적을 자세히 알고 싶은 겁니다. 아마 강하게 조사를 할 겁니다. 거짓말 탐지기도 동원할 거구요. 그래도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으면 되는 거죠.
저도 보고서를 잘 써서 올리겠습니다. 실제 조사해보았더니 남은 자금은 일 원 한 푼 손대지 않았더군요.”
“그렇단 말이지…… 그건 당연한 거니까 더 이상 거론하지 말게나…….”
“공작원의 세계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본부의 명령은…… 지키지 않으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의 운명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군. 올라가는 방법은?”
“주민등록도 없고 여권이나 비자는 말소되었습니다. 아마 출국금지 처분이 내려졌을 겁니다.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공항을 통해서 출국할 수 있는 길은 막혀 있습니다.”
“공작선이 내려온단 말인가?”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틀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본부에 보고를 하고 구체적인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지금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지만…… 깊이 사귀는 여자가 있지. 옛날에 단양에 놀러왔었는데 그때 만났다가…… 그녀가 독촉해서 함께 돌아왔지.”
“처음 듣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함께 가고 싶네.”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육군 여군 장교 출신이니까 강인하다고 할 수 있네. 오래 전에 대위로 전역했지.”
“그래도…… 자식이 있다면…… 순순히 동의할까요?”
“그럴 염려는 없지. 옛날에 치과 군의관과 결혼했어. 무슨 이유였는지 밝히지 않으니까 알 수 없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이혼했다고 했어. 그 후 쭉 혼자 살았다고 하더군.”
“솔직히 말씀드려서 거추장스런 장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쑥스럽지만…… 우리는 너무 사랑하니까 지금 헤어질 수는 없다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그냥…… 며칠간 어디로 휴가 가는 것처럼 말할 수 없나요?”
“그럴 필요는 없네. 반드시 함께 갈 거야. 공산주의에 대해서 뭘 모르긴 하지만…… 나와 함께라면 결코 월북을 주저하지는 않을 거야. 본부에 이런 상황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 주게.”

2011년 5월 제주국제공항. 맹주석은 공항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북경에서 직항편으로 입국하는 길이었다. 그는 중국 국적으로 중국 여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대남공작 전문 기관인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이다. 오랫동안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남한 침투를 준비한 이른바 ‘직파 간첩’이었다. 그가 어렵지 않게 국내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여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호적부를 이용해서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왕샤오징’이란 이름을 쓰면서 운전면허증과 여권을 발급받았고 싱가폴, 태국, 서울, 경주, 제주도를 관광을 빙자해서 여러 차례 오고 갔다.
그의 아버지는 원래 자강도 만포시 출신이지만 오래전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단둥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았다. 그는 중국에서 나서 자랐고 북한과는 직접적인 연고는 없다. 다만 평양의 김일성종합대학교에 3년간 유학을 했을 뿐이다.
그는 ‘탈북자’가 아니다. 북한이탈주민보호법은 북한에 주소와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고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만 북한이탈주민으로 인정한다. 중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은 완전히 중국인이지만 중국 동포로 분류된다. 그들은 취업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국내로 들어와서 취업을 할 수 있다. 중국에는 대략 250만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맹주석은 중국 동포이지만 처음부터 아예 중국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 수출입 회사의 상용 여권으로 수시로 들락날락한다. 그의 주된 임무는 한국에 진출해 있는 중국 기업의 서울 주재 임직원들과 인맥을 형성하고 그들을 통해서 다시 첨단 무기를 수출하거나 수입하는 한국 기업의 임직원을 만나 무기의 수출입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회사의 임원 명함을 가지고 사업가로 행세하며 적당한 대상을 찾아 포섭한다. 때로는 자신의 신분을 조국평화통일사무소 사무국이나 해외동포연락사무소 사무국 국장 등 그럴싸한 이름으로 포장한다.
포섭 공작은 대상자 물색에서 시작해 북한으로 보내는 것으로 끝났다. 중국 관광객으로 위장해서 중국으로 가고 북한으로 들어간다. 포섭 대상자가 북한에 들어가면 대남공작부서 소속 주체사상 이론가, 심리학 전공 교수, 세뇌 담당자들이 차례로 대상자를 설득해서 최종적으로 간첩으로 만든다.
그는 포섭 대상자를 발견하면 다가가 친해지면서 경계심을 풀게 했다. 온갖 구실을 만들어 잦은 만남을 통해 서로 지인이 되는 작업을 진행한다. 사람을 포섭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청춘남녀 간에도 메일 몇 번 주고받고 채팅 좀 했다고 연애할 수 있는 게 아니듯 포섭도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게 효과가 가장 큰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된 경험이 있거나 현재 그런 사람이라면 더욱 포섭하기가 쉬웠다.
간첩 포섭의 종지부는 방북이다. 방북하고 안 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일단 북한에 가면 세뇌시키는 프로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세뇌된 포섭 대상자들은 김일성, 김정일에게 혈서를 쓰면서 충성을 맹세하고, 노동당에 가입함으로써 대남 공작원이 된다. 그리고 공작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들에게 부여되는 가장 기본적인 업무는 지하당 구축이다.

“내일 출발합니다. 본부의 지시 사항입니다.
주말이어서 초소 군인들도 애인을 만나러 외출해야 되니까 들떠 있겠죠. 제가 직접 운전을 할 겁니다. 아직 구체적인 장소를 말씀드릴 단계는 아닙니다. 대산리 쪽인지 월곳리 쪽인지 말입니다. 월곳리라면 돌머리다리 배수로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간조인지 만조인지 물때가 중요합니다. 배수로에 물이 꽉 차면 곤란하거든요.
한강 하류를 건너서 개풍군으로 가는 겁니다. 거리가 2킬로미터 정도로 가깝습니다.”
“거긴 북방 한계선인데 경비가 엄청나게…….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군. 강화군 교동면이면 황해남도 연백군 해남리까지 그리고 김포시 월곳면이면 개풍군 신흥리까지 1.2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데…… 다시 말하면 그쪽이 거리가 훨씬 짧단 말이지.”
“월곳리 주변에는 크고 작은 배수로와 수문이 다섯 군데나 있습니다. 내일 급박하게 출발하는 것도 수문에 물이 많이 안 차는 날을 택한 겁니다.”
“배수로의 수문을 통과한단 말이지?”
“강화도 북쪽 해안에는 이중 구조로 된 철책들이 늘어서 있고 철책에는 센서와 카메라가 북쪽을 향해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 철책에는 ‘통제구역’이라고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습니다. 배수로에는 가로 세로 약 1.5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배수구가 있습니다. 성인 남자라도 몸을 조금만 숙이면 충분히 지나다닐 수 있습니다. 바로 위에는 철조망이 설치돼 있지만 이 배수구를 지나서 따라가면 곧장 한강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수구에 설치된 철책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을 겁니다. 거기에서 중무장한 북쪽 전투원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다가 방수복과 물안경, 산소호흡기를 건네줄 겁니다. 반잠수정을 소형화해서 물속에서 움직이는 수중 추진기로 가는 겁니다.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배수구를 통과합니다. 그때쯤에는 한강 하류 바다에서부터 해무가 짙게 피어오릅니다.
지금부터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이제부터 정식으로 ‘강화도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내가 지시를……?”
“그렇습니다. 전 계급이 소좌에 불과합니다. 대좌님께서 행불이 되자 제게 찾으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뿐입니다.”
“나에게 총을 갖다줄 수 있겠나? 만약의 경우에는 나도 총을 쏘면서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본부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총을 쏘아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칫하면 오발할 거라고…… 오히려 총을 소지하고 있다면 압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만약의 경우입니다만…… 어떤 경우에도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겨울이 오면 봄이 어찌 멀겠는가?
겨울은 사람을 더 깊이 품어 준다.

12월 중순 겨울이지만 날씨는 포근하다. 그들은 오전 10시쯤 여의도 KBS 별관 주차장에서 만났다. 맹주석이 검정색 구형 소나타를 몰고 왔다. 그가 말했다. “두 분을 모시게 돼서 영광입니다. 옛날 중국집 할 때 사장님과 거래했습니다. 칭따오 맥주를 공급해 주었죠. 주말이니까…… 오랜만에 강화도에 가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거기는 가볼 곳이 많지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아닙니까.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소나타는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온 다음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쪽으로 달린다. 오른쪽으로 한강을 끼고 양화대교 성산대교 월드컵대교 가양대교 방화대교 남쪽을 달려서 행주대교와 철새도래지를 지나면서부터 김포 한강로로 접어들어 김포대교 교차로에서 서울 외곽순환 고속 국도를 통과했다.
하지만 차는 직선 도로를 쾌속 질주하지 못했다. 차량의 흐름은 주말인데도 완만했다. 그는 자동차 유리창을 통해 눈에 익은 거리를, 강을, 다리를 내다보았다. 도시가 되살아났다. 감회가 새롭다. 아마 마지막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다시 돌려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죽도록 심문하겠지. 뭔가 복수를 하고 싶겠지. 그래서 말로만 들었던…… 지하 밀실에서 가혹한 고문을 당할지도 몰랐다. 며칠 동안 잠을 재우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지어낼 그럴듯한 스토리가 있을까. 그렇지만 나는 어느 것 하나 배신한 게 없지 않은가. 절대적인 극비사항을 누설한 일도 없었고. 뭔가 있다면 단순한 직무유기일 뿐이야. 나는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사람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 묵비권을 행사할 필요도 없다. 그건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협상 카드가 있을까. 그들에게 내가 처한 불가피한 상황을 당당하게 밝혀야 한다. 그래야만 내 딸도 살고 조송화도 살 수 있다. 나는 아직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말을 들을까.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고두현 지부장이 간절히 생각난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나를 지켜주는 방패막이였지 않은가…….
그는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태평하게 차의 리듬에 몸을 맡긴 채 가볍게 코를 골면서 잠들어 있다. 맹 소좌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무심하게 앞만 바라보며 운전을 한다. 그는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단 한 마디 말도 꺼내지 않았다.
차는 어느덧 일산대교 남쪽을 지나 왼쪽으로 꺾어서 김포시 통진을 통과했고 강화대교를 지나 강화읍에 도착했다. 바다에서부터 거친 바람이 불어와 그들을 환영했다.
강화읍에서는 유명한 한식당인 (‘담은 것이 그릇에 넘치도록 많게’라는 의미인) ‘안다미로’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그러고 나서 길상면 전등사로 갔고, 화도면 마니산 관광지에서 커피를 마셨고, 하점면 부근리 지석묘에 갔고, 강화자연사박물관이나 강화역사박물관에도 갔다. 그리고 강화십경의 하나인 월곳리 연미정에는 저녁식사를 한 후 가기로 했다.
오후 5시경이 되자 벌써 겨울의 짧은 해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산 너머로 사라진다. 맹주석이 말했다. “여기서 헤어지겠습니다. 저도 눈치가 있어야 할 거 아닙니까. 저녁식사는 두 분이 오붓하게 하십시오. 즐거운 밤이…… 되십시오.”
장해식은 여자와 함께 택시를 타고 월곳리로 갔다. 연미정에 올라갔다가 내려와서 ‘월곳황토집’에서 매운탕을 시켜서 술을 마셨다. 그 집 매운탕은 얼큰하고 시원한 것으로 유명했다. 생선뼈로 오랫동안 우려낸 육수에 매운탕의 주재료와 신선한 야채 비빔양념을 넣어 끓인 다음에 직접 반죽한 수제비를 떼어내어 팔팔 끓여 먹으면 그게 그렇게 별미였다.
더욱이 그 집은 모두 흡연석이어서 담배를 마음껏 피울 수 있어서 좋았다.
여자는 독한 고량주 때문인지 속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다시 더 마시라고 권했다. 다시 한 번 쭉 들이켰다. 그나마 독주가 들어간 뒤 몸이 나른해지고 기운이 솟구쳤다. 알콜의 영향 때문인지 몽롱하면서도 마음이 평온했다. 하루종일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졌다.
장해식이 말했다. “정말…… 미안하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소. 내가 신분을 밝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때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너무나 큰 거짓말인 거요. 그렇지만 나는 이미 그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했소.”
여자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이 즐거운 밤에…… 너무 심각한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요. 모든 게 당신의 결심에 달려있는 거요. 나는 한강을 건너서 북으로 가야만 하지.
그대가 함께 가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좋소. 만약 가고 싶지 않다면 여기서 헤어지면 되는 거요.”
“주말에 강화도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고 돌아오자고 했으면서…….”
“그러게 말이오. 어쩔 수 없었소.”
“아…… 진작 눈치챘어야 하는데. 사랑에 눈이 멀어가지고. 이래서 사랑하면 안 된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 서울로 돌아가면 되는 거요.”
“듣기 싫어요. 어련하겠어요. 진작 말했으면 안 올 텐데. 나한테…… 시간을 좀 줘 봐요.”
그녀는 연거푸 담배를 몇 대나 피웠는지 모른다. 어두워지는 하늘을 쳐다본다.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 무수한 과거의 기억들이 뚜렷하게 또는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나에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가. 소백산의 아스라한 능선이 떠오르고 아득히 멀었던 깊고 푸른 하늘도 떠오른다. 그가 누구인가. 남자는 언제나 의문 부호이다. 나는 어리석은 여자인가. 절체절명의 순간임을 깨닫는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망설이고 망설인다.
그녀가 말했다. “이미 늦었어요. 나는 당신을 버릴 수 없지. 자궁 속에 생명체가 꿈틀대고 있으니까…… 함께 지옥 끝까지라도 갈 수밖에 없는거야.”

한강 하류 서해안 강화도 바닷가.
저녁이 되면 밤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라서 허공을 절망적으로 헤맨다. 그때 물새들은 보금자리에서 잠이 들어 있다. 새벽이 오면 어슬어슬 어둠이 걷혀가도 아직 이슬을 머금은 채 흔들거리며 서 있는 갈대숲에는 새벽 안개로 변신한 밤안개가 자욱이 내려앉는다. 안개 속에 파묻혀 사방이 아직 분간이 안 되는데 벌써 잠에서 깬 물새들의 소리가 시나위 가락처럼 들려온다. 아침이 되면 안개는 떠오르는 태양에 떠밀려 시나브로 흩어진다.
하늘이 낮게 깔려 있다. 대기가 서서히 축축해진다. 높은 하늘이 농밀한 습기 속으로 사라진다. 잿빛 하늘이 그들을 맞이한다. 그들은 짙은 안개에 놀란다. 안개가 마치 견고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그들이 다가가면 장벽은 뒤로 물러나지만 여전히 앞을 가로막는다.
전투원 다섯 명이 배수구 안에서 그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짙은 어둠 속에서 무슨 환영처럼 어른거린다. 바닥에는 물기가 찰랑거린다. 그들이 장 대좌에게 정중하게 거수경례를 하는 것 같다.
상급자인 조장이 말했다. “대좌님, 어서 오시라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선 방수복으로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그들이 검은 방수복을 갈아입는 것, 물안경을 쓰는 것, 산소호흡기를 착용하는 것을 세밀하게 도와준다.
“초소는 아주 조용합니다. 모든 게 순조롭지요. 배수구를 벗어나면 풀섶과 모래밭을 통과해서 물속으로 잠수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만약의 경우 총격전이 벌어지면 그건 우리가 담당합니다. 무조건 물속으로 들어가세요. 우리 대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도와줄 겁니다.”
장해식 대좌가 말했다. “고맙네. 어서 서두르게.”
“조류의 흐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십 분이나 십오 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NLL을 넘으면 북쪽 해역인데 거기까지는 5~6분이면 갈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그 정도만 견디면 된다는 것입니다.”
도무지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고요가 주위를 지배하고 있다. 그들은 한강 쪽 배수구를 나와 몸을 숙인 채 초소 반대 방향으로 살금살금 돌았다. 칠흑처럼 어둡다. 밤안개가 그들을 감싼다.
그때 예기치 않게 맹렬하게 경계 경보가 울리면서 조명탄이 터지고 탐조등 불빛이 그들을 향해 달려온다. 그 불빛은 철책을 따라 모래밭으로 서서히 이동한다. 이제는 불빛이 여기저기 마구 휘젓는다. 공포에 사로잡힌 얼굴들이 절망적으로 일그러진다. 서치라이트가 머뭇거리며 그들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들이 지켜보는 동안 불빛이 그들 앞에서 딱 멈추었다.
그때 확성기에서 거칠게 명령을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됐다!
무기를 버리고 손을 머리 위로 올려라!
다시 말한다! 무기를 버려라!
사살하겠다!
머리가 아니라 머리통을 갈겨버리겠다!
항복하라!
항복을……!
조장이 말했다.
“여기는 우리가 담당합니다. 빨리 물속으로 달리세요.
어서요! 빨리! 빨리!”
전투원들이 ‘공화국 만세’라고 외친다.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연극적인 상황처럼 보였다. 그러고 나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서치라이트 불빛을 향해 총을 갈기기 시작했다.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불꽃이 꼬리를 이어 피어올랐다. 총성이 계속 울렸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해병대 군인들이 능숙한 솜씨로 자동 소총을 재빨리 장전했다. 그들은 사격을 하기 전에 잠깐 망설인 것 같았다. 장해식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땀에 젖은 손을 잡았다. 저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사격 개시! 사격! 정조준!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쏘고 있다. 피가 튀었다. 그들은 모래밭에 축 늘어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짙은 어둠이 내리덮였고 어둠과 함께 적막이 찾아왔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바닷가는 텅 빈 무대가 되었다.
작성일:2022-04-27 13:05:13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