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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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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독자의 (공개) 편지 (下)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8-21 13:30:57
조회수
474
(38) 전직 공작원들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2019년 겨울로 보인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머리끝이 곤두서도록 차고 매서운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고, 추수가 끝난 옥수수밭이 차창 밖으로 끝없이 스쳐갔다). 그리고 2020년이 된다. 2020년에는 공화, 민주 양당 대선후보를 뽑는 전당대회가 열리고 그해 11월에 제46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 인물들은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시작해서 안전기획부 시절까지 상사와 부하의 관계에서 수많은 공작을 수행하면서 끈끈하게 결속되어 거의 영혼까지 결합된 관계이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들을 이용해서 배반하고 그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사상 최초의 미국과 북한의 정상회담을 저지하기 위해서’ 또는 ‘미국과 북한 간 국교 수립을 저지하기 위해서’ 염소를 시켜 드라구노프 소총으로 미국 대통령을 저격하고 나서 전직 남한 특수요원들에게 뒤집어 씌우려는 목사님의 계획. 그러니까 염소는 오즈월드 대역이 아니라 진짜 오즈월드였다. (387면)

(…… 그분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미북 평양 정상회담을 족히 일 년 전부터 내다보셨다는 건가. …… 공화 · 민주 양당 전당대회와 지역 대학교 미식축구팀의 전국 대회 출전이 걸린 홈경기가 겹친 날을 하루 앞두고였다. 누구 하나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내일을 운명의 날, 디데이로 점찍는 분위기였다.) (351면)

2020년 미국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그날 디데이에 트럼프가 저격 암살의 대상인 것이었다. (트럼프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경솔하고 즉흥적이고 신경질적이고 화를 잘 내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 소설을 읽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것 아닌가.)

이 부분이 (소설 속에서 사전 준비도 없이 또한 인과관계의 연쇄도 없이 느닷없이 튀어나오는데) 극적인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을까.

작가는 이 부분을 Picarus Ex Machina (연극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하는 악인) 또는 Deus Ex Machina (작가가 스토리가 막히면 궁여지책으로 사용하여 플롯을 해결하는 장치)로 사용한 것일까.

그런데 2020년과 2021년을 돌이켜 보자. 2020년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조 바이든 후보와 현직 대통령인 공화당의 트럼프 후보가 격렬하게 맞붙었고 조 바이든 당선자는 2021년 2월 제4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 당시는 대통령 선거 때문에 미국 국내는 긴박한 상황이었고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 정상회담을 할 계제는 아니었다. 설사 미국과 북한이 정상회담을 한다고 가정하더라도 미국과 한국은 물론 온 세계가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그만큼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중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후 사정이나 과정에 대한 서술이나 맥락도 없이 정상회담이건 국교수교이건 간에 그걸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미국과 한국 간 국제관계에 비춰 볼 때, 작금의 시대 상황, 시대적 맥락, 시대 정신, 시대의 감수성에 비춰볼 때 건전한 상식으로 가능한 일인가. 지금, 여기, 우리는 평화와 안정을 원한다. 그건 우리 시대 인류의 간절한 염원이다. 테러는 인류의 적이다. 소설은 상식을 벗어나도 된단 말인가. 소설에서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이란 무엇인가. 결국 작가의 어설픈 트릭을 현명한 독자는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4. 역사적 사건들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과거는 현재 속에서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다. 이 소설에는 1967년부터 1998년까지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이거나 또는 우회하거나 에둘러서 스토리의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 그들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에서 시작하여 박정희 유신독재체제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거쳐서 김대중 대통령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무렵까지 그 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동안 중앙정보부 (중정)는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로, 국가정보원 (국정원)으로 명칭이 바뀐다.

이들 사건은 우리 현대사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난 사건들이기 때문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아주 쉽게 어떤 사건인지 특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 속 역사적 서술을 혹시 환원주의적 서술로 볼 여지는 없을까.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다. 세상의 모든 학자들을 환원주의자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작가들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환원주의를 복잡다단한 현상이나 사실을 단순하고 일반적인 인과법칙으로 환원시켜 재구성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 소설에서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할 때 인과법칙은커녕 그 비슷한 것조차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중앙정보부

중앙정보부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KCIA)는 우리나라의 특별 중앙행정기관으로 정보, 첩보, 수사 업무를 담당하는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기관이다. 1961년 5월 20일 설립됐고, 그해 6월 10일 법률 제619호 중앙정보부법이 제정됐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을 보위하기 위해 김종필이 주도하여 설립한 것이다.

그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부 실력자가 된 다음 해 5월 전국 비상사태를 선포하여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그 무렵 그는 보안사령관이면서 중앙정보부 부장이 되었다. 그가 제5공화국 대통령이 된 다음인 1981년 4월 8일 그동안 온갖 악명을 떨쳤던 중정을 개혁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중앙정보부를 폐지하고 국가안전기획부를 신설했지만 사실상 명칭만 바꾼 것에 불과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1999년 1월 21일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되면서 안기부는 폐지되었다.

현재 (2020년) 인권유린의 대명사처럼 된 국정원의 최대 문제점이었던 수사권은 법률 개정으로 경찰청으로 통째로 이관하도록 되어 있다. 이제 국정원은 수사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정보 업무에만 매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할 수 있다.


(2) 동베를린 사건 또는 유럽 거점 간첩 사건

…… “비쩍 마른 중년 여인네들 상반신만 주구장창 그려대던 화가. 우리한테야 취리히 간첩단 수괴였지만, 그 사건으로 오히려 국제적 스타가 될 줄이야. 소더비에서 한국미술사상 최고 낙찰가라니, 말이 되나.” (123면)

…… 국제사회는 물론 국내 예술계와 학계까지 발칵 뒤집어놓은 취리히 간첩단 사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던 예술가, 학자 열여섯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사건. 그 불순분자들 중에서도 핵심인물의 작품이었으니 수사 결과 발표 당시 언론에 공개하지 않은 압수품들 중 하나였으리라. 주제네바 북한 대표부가 대남 적화 사업 유럽 거점으로 건재한 상황에선, 유럽에 체류중인 인사들을 간첩으로 포섭하려는 시도가 현재진행형인 시점에서 사건의 전모를 공개하기 어려웠을 터. 그때 이미 주목받는 화가였으니 어쩌면 공작금 조로 오간 증거물일 수도 있었다. (130면)

…… 유학생 간첩단을 일망타진하러 간 비엔나에서도, 공관에서 암약하는 쥐새끼를 색출해야 했던 파리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계 미술사에 빛나는 클림트의 <키스>가, 고흐의 <해바라기>가 그런 식으로 내 인생을 코앞에서 비껴갔다. (136면)

동베를린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시절인 1967년 7월 8일, 중정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당시 중정은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가운데 유럽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노가 포함되어 있었고 그들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간첩으로 지목한 교민과 유학생을 서독에서 납치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했었다 (GK-6717 공작계획).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서독 정부와 외교 문제를 빚기도 했다.

대법원 상고심에서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윤이상은 최종적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음악인들과 서독 정부가 우리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여 복역 2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이응노 화백은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아 복역 중 1969년 3월 석방되었고 그 후 프랑스로 귀화하여 1983년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다. 그는 6·25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기 위해 동베를린에 갔다가 중정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감옥생활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베를린 사건의 주 무대는 동베를린이었다. 그 당시 서독의 서베를린에서 동독의 동베를린까지는 어느 정도 통행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유학생과 교민들이 동베를린을 드나들었던 것이다. (김학민 지음, 「만들어진 간첩」 참조.) 그러니까 동독 주재 북한 대사관이면 몰라도 스위스의 ‘취리히’, 주‘제네바’ 북한 대표부, ‘비엔나’, ‘파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 당시 재판을 받은 관련자 23명 중에서 사형 (정규명, 정하용), 무기징역 (조영수), 유기징역 8명, 집행유예 7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 등이었다. (하지만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와 외교 마찰 해소 차원에서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형 집행을 면제하였고, 정규명, 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다.)

그 당시 동베를린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화가는 이응노 화백이 유일한데 그의 작품이 소더비 경매에 나온 일이 없기 때문에 한국미술사상 최고 낙찰가로 낙찰된 일도 없었고 (더욱이 우리나라에서 소더비 경매는 1990년대 이후의 일이다), 이응노 화백의 그림이 100억대를 돌파한 일도 없었다. 그 무렵, 까마득한 옛날에 100억대라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수천억원에 해당할 것이다.


(3) 1972년 김일성 · 이후락 회담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냉각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여는 결단을 내리고 4월 26일 그동안 극비리에 진행된 북한과 접촉 결과를 보고받은 후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특수지역 출장에 관한 친필훈령을 발령했다.

그 당시 막후 비밀접촉은 남측 정홍진 (중정 협의조정국장)과 북측 김덕현 (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지도원)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이후락이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하여 5월 3일 저녁 평양대극장에서 혁명가극을 관람한 후 김영주와의 2차회담을 마치고 모란봉초대소에 돌아온 것은 밤 10시 10분이었다. 그날 밤 12시가 넘어서야 이후락은 김일성을 만날 수 있었다.

이후락이 평양을 극비리에 방문할 당시 유일한 수행원은 위 정홍진이었다. 이 소설에서처럼, 하급 공작원 (라이카)이 수행할 수는 없었다. 1972년이면 라이카는 기껏해야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어야 한다. 그는 25년 후인 1997년 말쯤 안기부를 퇴직한다.


(4) 문인 간첩단 사건

1974년 1월 7일 9시 30분, 명동 코스모폴리탄 다방에 모인 문인들과 기자들에게 유인물이 돌려졌다. 이호철이 일어서서 <개헌지지 문인성명>이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이호철이 성명서를 읽기 시작하자 곧바로 정복경찰과 사복형사들이 다방 안으로 들이닥쳐 성명서 낭독은 중단됐다. 다음날 오후 5시 대통령긴급조치 1, 2호가 발동됐다.

이호철의 이름이 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은 20여일이 지난 2월 5일 석간에서였다. 신문기사 제목은 ‘문인 · 지식인 간첩단 적발’이었고, 이 ‘간첩단’에는 그를 비롯해 임헌영 (평론), 김우종 (평론), 정을병 (소설), 장백일 (평론) 등 4명의 문인이 포함돼 있었다. 그 당시 검찰이 무리한 기소를 감행한 이유는 피고인들이 1973년 11월 문인 60여 명의 연명으로 된 개헌요구 성명에 참여했기 때문이며 문단 내지 지식인 사회에 그런 개헌운동의 확산을 저지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검찰수사 결과, 당초 보안사의 발표 내용과는 달리 간첩죄 항목은 빠지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상의 금품수수, 찬양 · 고무, 회합 · 통신 등으로만 기소되어 ‘문인간첩단’이라는 보안사의 호칭 자체가 허구임을 드러냈다.

1심 선고는 그해 6월 28일에 있었는데, 정을병은 무죄로, 임헌영, 김우종은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이호철에게는 징역 1년 6개월 (구형 7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10월 2일에 선고된 2심에서는 그와 함께 장백일도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이 소설에는 문인 간첩단 사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그것은 언론에 던져준 제목이었고 캠퍼스 지하 이층 문서보관실 (명예의 전당이라 불렸다)에 보관된 파일 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타란툴라. 유신 반대 작가 시국선언을 주동한 빨갱이들을 간첩으로 엮은 공작이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다른 많은 공작들처럼 그 역시 그분 작품이었다. …… 시인들은 눈만 껌벅거리거나 말없이 눈물짓기 일쑤였고 비평가들은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을 집요하게 따지고 들었다. 소설 쓰는 인간들은 좀 달랐다. “구상중인 소설 얘기요.”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게 업이잖소.” 구라쟁이들 아니랄까봐 눈 하나 깜짝 않고 둘러댔다. 얼굴 두껍기가 가히 대하소설이었다. (118~119면)

과연 그랬을까.

그 당시 구속됐던 임헌영이 말했다. …… 밤도 낮도 모른 채 며칠인가 지났다. 틈틈이 징집당해온 근무병들에게 경비를 맡긴 채 있을 때는 그들이 노골적으로 나를 동정하고 있음을 알았다. 어떤 병사는 “망해라!”라고 소리질렀다. 가끔씩 외출이 허용되는 그들은 자진해서 집으로 전화연락을 해주겠다고 제의해왔으나 처음에는 믿어야 할지 망설여졌다. 이내 그게 진실임이 밝혀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어떤 수사담당자도 쉴 시간에 와서는 은근히 동정해주곤 했다. 천장의 텔레비전과 녹음장치를 가리키며 말은 않고 글씨로 ‘반공법은 문제가 많다’고 쓰면서 걱정 말고 먼지 털고 나가는 셈 치라는 충고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은 항상 당대의 정치상황에 따라 좌우된다. 풀려날 것 같던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으면서 담당이 사법경찰관으로 교체되었다.

며칠을 지내는 사이에 저절로 조연현 · 신상웅 · 홍기삼 · 이복숙 제씨가 조사를 받고 나갔고, 최종적으로는 이호철 · 김우종 · 정을병 · 장백일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이 남았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간행위원회 편,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 2」 참조.)

위와 같은 임헌영 문학평론가의 진술에 따르면 이 소설의 서술은 실제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어떻게 작가는 이런 식으로 서술할 수 있는가. 그때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던 문인들 (임헌영, 이호철, 장백일, 정을병, 김우종 등은 우리 문단의 최고 원로들이다)이 이 소설을 읽었다면 얼마나 어이없어할까? 아니면 쓴웃음을 지었거나? 분노했을까? 더욱이 문인 간첩단 사건은 그 당시 보안사가 수사를 담당해서 검찰로 송치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중앙정보부가 수사한 걸로 나왔다. 더군다나 ‘그분’ (김기왕 실장)이 수사를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이게 말이 되는가. 작가는 제멋대로 역사적 사실을 부정 왜곡 조작하였다. 작가의 상상력은 역사를 부정 왜곡 조작하는 데 발휘되는 게 아니다.


(5)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박정희 대통령은 KBS 당진 송신소 개소식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연회를 가졌다. 연회 중에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에 가슴과 머리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날 밤의 상황에 대해서는 단편소설 「그날 밤의 비밀」, 「야, 그 얘긴 하지 마」 참조)

사망자

박정희 (대통령),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정인형 (대통령 경호처장), 안재송 (대통령 경호부처장), 김용섭 (대통령 경호관), 김용태 (대통령 운전기사)

처벌받은 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 대법원은 1980년 5월 20일 내란목적 살인죄와 내란수괴 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 등을 적용해 사형을 선고한 육군본부 계업고등군법회의가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는 1980년 5월 2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 살인죄 무기징역.

박흥주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대령) : 그는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단심으로 재판을 받았다. 1980년 3월 6일 총살형.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성옥 (중앙정보부 궁정동 안가 운전기사)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이기주 (궁정동 안가 경비과장)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김태원 (궁정동 안가 경비원) :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유석술 (궁정동 안가 경비원) : 증거 은닉죄 징역 3년형.


(6)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11월 15일 일본 공안조사청은 “김일성이 암살됐고, 그를 암살한 군인들이 중국으로 도피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고, 이 소식이 일본 증권가와 외교가에 전해져 관심을 끌었다. 11월 16일 조선일보는 ‘북괴 김일성이 총에 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렸다. 이 호외 기사는 세계적인 뉴스로 주목받았다. 조선일보는 처음엔 피격설이었으나 이틀 뒤인 18일부터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단정해 보도한다. 신문 12면 중 7면을 김일성 사망 사건 기사로 채웠다. 그러나 정작 당일 11월 18일 오전 10시 몽골 인민혁명당 서기장 잠빈 바트뭉흐를 영접하기 위해 김일성이 평양순안국제공항에 나타나면서 세계적인 오보가 되었다.

그 당시 국가안전기획부는 여러가지 전후사정과 북한의 동향을 분석한 결과, 김일성이 암살되었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주장하며 상황을 좀 더 지켜볼 것을 제언했으나, 국방부나 언론 등의 기관을 통해 이미 정보가 새 버린 상황이라 이는 묵살되었다. 사망설을 사실상 공인해 버린 건 국방부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안기부 측은 불만을 표했다. (출처 : 나무위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참조)


(7)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사망 사건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쯤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당시 연행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한 경찰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요절했다. 11시 45분경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현장에 도착해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도 다음 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그는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요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로 대공분실 509호실에 출입했던 오연상으로부터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하며,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결국 기자회견 4일 만인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 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사했다”고 “가혹행위”로 죽었음을 시인하였다. (장편소설 「광화문 광장」 참조. 이 소설의 최신 버전은 블로그 참조.)


(8)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은 노태우 정권의 실정에 항의하는 분신이 잇따르는 가운데 1991년 5월 8일 당시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연합 사회부장의 분신자살 사건에 대해 검찰이 김기설의 친구였던 단국대학교 화학과 재학생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해 처벌한 사건이다.

강기훈은 법원으로부터 목격자 등 직접적인 증거도 없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결과와 정황에 따라 자살방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받고 1994년 8월 17일 만기 출소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16년 만인 2007년 11월 13일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제58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국가의 사과와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2014년 2월 13일 재심 판결에서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검찰이 제시한 필적 감정이 신빙성이 없다면서 유서 대필 및 자살 방조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판결에 불복하여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재심에서 강기훈의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위키백과, 강기훈 유서대필 의혹사건 및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편, 「유서사건 총자료집」 참조.)

이 소설에서는 국정원 직원이었던 제록스가 ‘자살 당사자와 위조 혐의자의 필체 사이에서 아슬아슬 외줄을 타며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만들어냈다’고 되어 있지만 (348면) 그 당시 문서 위조의 혐의로 처벌받은 사람은 ‘강기훈’이었고, 피위조자인 ‘김기설’과 위조자인 강기훈의 필적을 대조하여 감정한 사람은 국과수의 문서 감정 담당자인 ‘김형영’이었다.

그런데 작가는 그 사건과 관련하여 ‘한 투신자살자의 유서가 조작되었다는 한마디로 가미카제식 죽음의 광기에 찬물 끼얹는 것을 넘어 극렬 운동권 전체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힌 공작’이라고 했다. (348면)

1990년대 초반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투쟁하다 절망하여 자살한 젊은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을 극렬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들의 고귀한 죽음을 (일제의 군국주의 망령인) 가미카제식 죽음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지, 이게 작가의 관점인지 묻고 싶다.


(9)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정원식 총리 밀가루 폭행 사건

1985년 5월 23일 삼민투위 주도로 서울대, 고려대 등 5개 대학 남녀 학생 73명이 현재의 서울특별시청 을지로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 미국문화원을 기습 점거했다. 미문화원 도서관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공개 사죄하라’는 등의 구호를 적은 종이를 창문에 붙이고 주한 미국대사와 면담을 요구하며 2층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다. 72시간 만인 5월 26일 자진 해산하고 연행됐다. 경찰은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 신정훈 등 25명을 구속했다.


정원식 계란 투척 사건 또는 한국외대 사태는 1991년 6월 3일 오후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강당에서 당시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어 교수직을 사퇴하는 정원식에게 계란, 밀가루, 페인트, 소주병, 맥주병, 유리조각, 인분 등을 집단으로 투척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그 무렵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의 임시 시간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가 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 전교조를 불법화하고 전교조 인사들의 구속과 불이익 조치를 취한 데 대한 학생 운동권의 집단 반발이었다. 전교조 불법화 문제와 강경대 치사 사건과 학생운동가들의 분신 자살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학생운동권의 정부, 문교부 당국에 대한 반감은 거셌고, 전교조 불법화와 전교조 소속 교사들의 집단 해고를 강행한 정원식은 운동권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계란과 밀가루, 페인트를 뒤집어쓴 정원식의 사진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0) 1994년 카터 · 김일성 회담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북한 주석과의 평양 회담은 1차 북핵 위기를 대화 국면으로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 당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의혹으로 시작된 한반도 핵 위기는 1994년 6월 중순까지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1994년 6월 15일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전격 방문한 카터 전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방북 사흘째인 6월 17일 대동강변에서 카터와 김 주석의 뱃놀이 회담은 남북관계에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직접 만나겠다는 김 주석의 의사를 확인함으로써 역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 합의의 돌파구를 열었다. 분단 이후 최초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 남북정상회담이 7월 말쯤 평양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었다. 하지만 김일성이 7월 8일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당시의 남북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11) 1997년 판문점 총풍 사건과 제15대 대통령 선거

…… 97년 대선 직전 그분을 모시고 간 북경. 공식 직함도 없이 막후에서 기획만 하던 그분이 전면에 나서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었다. 단군 이래 최초로 나라가 빨갱이들에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천위 쿠데타 빼고는 뭐든 다 해봐야 했다. 선거 사나흘 전 휴전선에서 인민군과의 무력 충돌을 연출하는 공작도 그중 하나였다.

…… 그 중요한 공작에 수행원으로 발탁된 건 돈 가방 때문이었다. 미화 오백만 달러가 든 검정 보스턴백. 착수금 내지 계약금으로 준비한 그 지폐 다발은 일이 성사되는 즉시 스위스 비밀 계좌로 송금될 돈이었다. (238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측의 지지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오정은과 (사업가) 한성기, (대호차이나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는) 장석중 3명이 중국에서 북한 아태평화위의 박충을 만나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부탁하였다는 사건이다.

총풍 3인방은 우선 국정원 직원들이 아니다. 그들은 베이징 루프트한자센터 캠핀스키 호텔에 묵으면서 북측의 리철운과 김영수, 특히 아태평화위 참사 박충 (박충은 가명이고 실명은 강덕순으로 북한 베이징 대선공작반의 실무 총책이었다)을 만나 총풍 사건을 협의했다. 그 당시 한성기는 ‘진로그룹 고문’ 또는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 특보’ 명함을 가지고 자신이 대단한 거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박충을 만나 “1개 소대만 움직여 주면 된다”고 강조하며 설득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래서 총풍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그 당시 안기부 조사에서 한성기는 “12월 8일 조선호텔 스위트룸에서 500만 원을 받았다”고 진술했으나, 검찰 조사부터는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 당시 안기부와 서울지검 공안1부가 밝힌 사건의 개요는, 위의 비선 3인조가 1997년 11월부터 이회창 후보 지원 방안을 모의해 ‘총격 요청’을 모의하는 한편, 대선정책 보고서를 작성해 이회창 후보에게 전달했고, 12월 10일 장석중 · 한성기가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북한 측 인사를 만나 대선 3~4일 전에 총격전을 벌여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김당 지음, 「이중스파이 흑금성의 시크릿파일 공작」 참조.)

2003년 7월 26일, 대법원은 1997년 대선 직전 북한 인사와 접촉, 휴전선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혐의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 등)로 기소된 오정은 전 청와대 행정관 등 이른바 ‘총풍 3인방’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2∼3년에 집행유예 3∼5년씩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고, 이들의 북한 인사 접촉사실을 알고도 수사 지시를 내리지 않은 혐의 (국가보안법상 특수직무유기)로 기소된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 무렵 위 총풍 사건과는 별도로 권영해 안기부장이 직접 관여한 ‘아말렉 공작’이 있었다. 이 사건 역시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회창 후보 측에 유리하도록 북풍을 공작한 사건이었다. 이 공작의 경우 권 부장은 아말렉 공작의 착수금조로 5만 달러를 지급했다. 그래서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처음으로 안기부의 수장이 안기부법 및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김당 지음, 「이중스파이 흑금성의 시크릿파일 공작」 참조.)

그러니까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일어났던 총풍 사건에서 누구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처벌받지는 않았다. 다만 북한 측 인사를 접촉한 것이 인정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을 뿐이다. 전술한 것처럼 총풍 3인방은 국정원 직원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미화 오백만 달러라는 거액이 착수금 내지 계약금으로 준비한 사실도 없었고 스위스 은행 비밀 구좌로 송금을 운운한 사실도 없었다.

…… 북경에서의 거래만 성사됐어도 …… 입찰 금액에 공을 하나 더 그렸어야 했어. …… 우리가 북측 대남사업부를 반장들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240면)


(12) 1998년 6월 속초 잠수정 침투 사건

1998년 6월 22일 4시 33분, 유자망 그물을 검사하던 동일호가 속초 동쪽 해상에서 서서히 항해 중인 소형 잠수정을 발견, 휴대 전화로 속초 어업무선국에 연락하였고, 이후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용신호가 스크루가 그물에 걸린 잠수정을 발견하여 신고하였다. 6월 22일 4시 35분에 동해안 초소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고, 5시 20분에는 해군의 대잠 헬리콥터가 현장에 도착하였다. 4시 40분에 해양 경찰이, 5시 30분에 해군 전투정이 현장으로 출동하여 6시 10분에 잠수정의 선체가 확인되었다.

잠수정은 13시 30분경 동해 앞바다로 예인되어 대기하던 중에 다시 침몰하였다. 잠수정은 25일 밤에서 26일 오전에 걸쳐 다시 인양되었다. 인양된 잠수정 내부에서는 9명의 승조원과 공작원이 피를 흘리거나 총에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김대중 대통령은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8년 2월 25일 취임하였다. 그런데 이 소설에 의하면 작중 인물들 (라이카, 피셔맨, 재단사, 김기왕 실장 등)은 내란죄의 수괴이고 빨갱이인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그 무렵 안기부에서 파면 등으로 쫓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1998년 6월 22일에 속초 잠수정 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그들은 이미 안기부를 퇴직한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그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단 말인가.

동해안에서 잠수정 사건은 속초 잠수정 사건이 유일하다. 그 당시 북쪽 승무원들은 전원 사망했다. 그런데 추적의 포커스가 엉뚱한 곳에 맞춰진 사이 두 명의 승조원이 휴전선을 넘어 달아나고 말았다고? (170면)



5. 결어


이 소설은 현대 첩보물임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는 쭉쭉 뻗지 않고 쓸데없이 복잡해서 명쾌하지 않다. 유기적 통일성이 결여되어 긴장감 없이 늘어지고 혼란스럽다. 작가는 스토리의 진행에 있어서 전혀 불필요한 쓸데없는 에피소드를 늘어놓으면서 길을 잃고 헤매인다. 상투적인 표현과 부정확한 메타포가 여기저기 출몰한다. 이 소설을 끝까지 읽으려면 지겹고 당황스럽고 속이 거북해진다.

소설에서 리얼리티,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이 무슨 역할을 하고 기능을 하는가. 그것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리얼리즘 소설이건 장르소설이건 간에 소설에서 시간의 연쇄와 인과관계의 연쇄 속에서 내적 논리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상식을 벗어나거나 타당성을 벗어나거나 역사적 실재에 어긋나거나 명백한 사실에 어긋나도 안 된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리얼리티도 부족하고, 역사적 사건, 인물, 실재를 오해하고 부정 왜곡 조작 오용 남용했기 때문에 개연성이나 필연성이나 핍진성도 희미하다.

21세기 현대 첩보물에 첨단 무기 대신 신적인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가. 작가는 개성이 풍부한 입체적인 인물을 형상화하고 아주 정교하게 사건을 구성하여 플롯을 지그재그로 진행하여야 하는데 그 대신 리얼리티를 생명으로 하는 소설에 맥락에 닿지도 않는 신 같은 인물을 등장시켜서 스스로 소설을 파괴한 것이다.

작가에게 그런 특권이 있는 게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에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 작가들은 초고가 완성된 후에도 여러 차례 또는 수십 차례에 걸쳐 수정 보완하면서 냉철하게 자기 검열을 해야 한다. 그래도 소설이 아니면 스스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작가는 소설은 소설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한 것일까.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시간과 공간과 그 모두를 거스르는 존재를 그려보겠다며 자판과 씨름한 몇 달 영감의 발원지인 아파트 단지 조깅 트랙을 밤마다 한 시간씩 돌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은 당연히 허구다. 현실세계의 어느 일단이 겹쳐진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력 빈곤 때문임을 밝혀둔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 변명으로 이 소설이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까. 독자들이 그 변명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 소설 속에서는 작가의 성실성, 진지성, 성숙성, 강렬성은 찾아볼 수 없다. 작가는 소설의 본질에 대해서, 소설의 진실성에 대해서, 작가의 본분에 대해서, 작가의 정직성에 대해서, 작가의 상상력에 대해서, 소설 쓰기에 대해서 고뇌하고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

작가는 현대 첩보물을 쓸 준비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먼저 현대 첩보소설의 대명사인 존 르 카레의 소설들, 켄 폴릿의 소설들, 문학동네가 펴낸 장르문학 시리즈 등을 읽었어야 했다. 그것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어 그 소설들의 정수를 파악했어야 했다.)

작가들은 미시사 (微視史)를 전공하는 역사학자처럼 치밀하게 지금, 여기, 우리의 사회 현상, 제도, 법률, 생활상 등을 고찰해야 하는데 작가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서 현장 (예컨대 중정 본부가 있었던 이문동이나 한남동, 압구정동, 낙원동 등등.)을 답사한 일이 있는가. 그렇지만 미국 L.A. 로즈데일 공동묘지와 아이오와 주의 옥수수밭까지 요구하진 않겠다. 그리고 관련 인사들 (중정이나 안기부에 근무하다 은퇴한 요원들)을 만나 그 시절 이야기를 들은 사실이 있는가. (위에서 인용한 움베르트 에코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어떻게 현장 답사를 하였는지, 다시 한번 되새겨보자.)

우리나라 일부 작가들은 너무 무모하다. 왜 팩트 체크를 하지 않는가. 역사적 인물, 사건, 실재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하고 참고문헌을 읽고 공부하지 않는가. 작가들은 참고문헌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참고문헌 없이는 소설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말이다.

소설의 경우에도 모든 종류의 참고문헌들을 통해 매개 혹은 필터링을 거쳐야만 제대로 쓸 수 있고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은 소설이니까 대충 쓰는 것이 아니다. 그건 소설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이다.

나는 청소년 시절 축구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열렬한 팬이었고, 10여 년 전 프로 축구 경기에서 승부 조작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의 재판 때문에 변호인으로 1년여 동안 10번이나 공판정에 출석했었다. 변론 준비를 위해서 (불구속 상태인) 피고인을 수십 차례 면담했고, 수백 페이지의 사건기록을 암기할 정도로 수십 번 읽고 분석했다. 나는 축구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 그래도 단편소설 「우리들의 시간」을 쓸 때 축구에 관한 10권의 전문 서적을 읽었다.

나는 서평을 읽고 이 소설을 사서 읽었다. (나는 경향신문의 애독자이긴 하다.) 서평자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성실하게 읽긴 한 것일까. 왜? 서평자는 무수히 많은 이 소설의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왜? 서평자들은 비판은 온데간데없고 무조건 과도한 상찬 일색일까. 나는 매주 주요 일간지의 토요판에 실린 일부 또는 상당수의 서평이 출판사 편집자가 이메일로 보내준 걸 그대로 전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 출판사의 상업주의와 서평은 서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게 아닐까?

앤서니 버제스가 말했다. ‘서평자들은 책을 그다지 유의해서 읽지 않는다. 그들의 직업이란 어리석음과 악의, 문학적 무지와 친연성을 지닌다. 심지어는 작가라는 직업보다 더 그렇다.’

소설이건 아니건 간에 좋은 글이 책이 되어 나오기까지는 편집자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이 소설을 출판한 출판사는 전통 있는 문학 전문 대형 출판사이다. 이 소설의 편집자는 최초의 독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이 소설의 초고를 받았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잘 읽었을까. 그래서 어떤 문제점을 발견했을까. 편집자는 이 소설에서 적절하지 못한 단어, 문구, 미완성 문장을 발견하여 지적했는가? 편집자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첨삭했는가? 이 소설의 온갖 오류를 지적해준 적이 있는가? 그 문제점을 가지고 작가와 긴밀하게 논의를 했던 것일까. 편집회의에서는 어떤 의견들이 오고갔는가. 어떻게 해서 편집자들은 이 소설의 무수히 많은 문제점을 간과했는가. 아니면 알고도 묵살했는가. (그랬다면 그건 독자를 깔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이 서평인지, 비평문인지, 현명한 독자의 독후감인지, 그냥 단순한 에세이형 가벼운 논문인지 (어쨌거나 서론, 본론, 결론으로 진행하니까)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한다.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작가에게 매정하게 대하기 싫어서 또는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겸손해 보이려고 하진 않았다. 이 경우 겸손은 위선이고 자기 기만이기 때문이다.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가. 나는 성실성과 정직성을 바탕으로 냉철하고 정확하게 지적하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을 재독 삼독하면서 정독했지만 오독했을 수도 있다.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나의 문학적 관점에 스며 있는 어떤 편견이 암암리에 작용했을 수도 있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작가의 관점과 의도는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보이긴 하다. (이 글이 작가에게 약이 되었을까? 독이 되었을까?) 김경욱 작가 (편집자와 서평자를 포함해서)가 나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면 겸허하게 수용해서 이 글을 수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참고문헌

작가됨의 진정한 조건은 지식에 있다. 진정한 작가란 어떤 매체를 사용하건 자신이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라면 신과 같은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한다. 이때 한 작가의 작가됨을 증명해 주는 것은 그가 쓴 글에서 느껴지는 권위이다. 작가의 사회적 책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해 봐야한다. 작가들에게는 단 한 가지의 책임만이 필요하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란 일상 생활에서는 남에게,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까지 거짓말을 하더라도, 작품을 만들 때만은 진실을 말하는 존재이다. 거짓말과 거짓말쟁이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정직한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언제나 사회적 책임감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여기 참고 문헌들은 내가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도록 내 책장에 꽂혀 있거나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오래 전부터 읽어왔던 것이다. 일부는 재독 삼독을 하면서까지 정독했고 일부는 필요한 부분만을 골라서 읽고 메모를 하고 수없이 물음표를 찍는다. 그런 물음표는 인터넷을 검색하게 하고 다른 참고 서적을 읽게 만든다.

(신비평에서 말하는 독자적 실체인) 소설을 읽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는 읽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작가는 이 책들을 포함해서 그 이상의 관련 책들을 읽어야만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출신 작가 HA JIN (본명은 진쉐페이)이 쓴 장편소설 「전쟁쓰레기 War Trash」는 최인훈의 「광장」과 주제 면에서 아주 흡사하다. 두 소설은 모두 한국전쟁을 소재로 이데올로기와 전쟁포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 진은 몇 년에 걸쳐 위 소설을 썼는데 참고문헌이 23권에 달한다. 위 소설은 미국에서 펜 포크너상을 수상했고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그는 말했다. “대부분의 사건들과 세부사항들이 사실적이긴 하지만 이 소설은 논픽션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픽션이며 모든 주요 인물들도 허구적이다.”

그런데 김경욱 작가는 (아무런 참고문헌도 읽지 않고) 불과 몇 달간 씨름하면서 이 소설을 썼다고 스스로 밝혔고, 최인훈 작가 역시 (참고문헌은 고사하고 간단한 신문기사에 의존하여) 불과 몇 달 만에 「광장」을 썼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김경재 지음, 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전두환 회고록」, 김충식 지음, 「남산의 부장들」, 정주진 지음, 「중앙정보부의 탄생」, 김당 지음, 「시크릿파일 국정원」, (일러두기에서 ‘이 책은 99%의 사실과 1%의 허구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등장인물들의 99%는 실명이다. 실명을 확인하지 못한 북한 사람 1명과 명예훼손을 우려해 성씨만 표기하고 이름은 OO으로 처리한 경우가 실명을 쓰지 않은 1%에 해당한다.’고 밝힌)「이중스파이 흑금성의 시크릿파일 공작」, 「무간도에 갇힌 이중스파이 공작2」, 허문명 지음, 「김지하와 그의 시대」, 안동일 지음,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정병진 저, 「궁정동 총소리」, 김근태 지음, 「남영동」, 홍윤표 지음, 「중국공산당의 스파이 전쟁」, 볼프강 크리거 지음 / 이미옥 옮김, 「비밀정보기관의 역사」, 스티븐 C. 메르카도 지음, 박성진 ‧ 이상호 옮김,「제국주의 일본 나카노학교의 그림자 전사들」, 유리 모딘 지음, 조성우 옮김, 「나의 케임브리지 동지들」, 한기홍 지음, 「진보의 그늘」, 반찬수 지음, 「NL 현대사」, 황인오 옥중수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김질락 옥중수기, 「어느 지식인의 죽음」, 김영환 저, 「강철서신」, 「다시 강철로 살아」, 김학민 지음, 「만들어진 간첩」, 대담 한인섭,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 인권변론 한 시대」, 안재성 지음, 「이현상 평전」,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간행위원회 저, 「한승헌변호사변론사건실록」,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저, 「유서사건 총자료집」, 조셉 칠더즈 ‧ 게리 헨치 엮음, 황종연 옮김, 유중원 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현대 문학 ‧ 문화 비평 용어사전」, 한용환 저, 「소설학사전」, 움베르트 에코 저, 김운찬 옮김, 「문학 강의」, 게오르그 루카치 지음 / 이영욱 옮김, 「역사소설론」, H. 포터 애벗 지음 / 우찬제 ‧ 이소연 ‧ 박상익 ‧ 공성수 옮김, 「서사학 강의」, 게리 솔 모슨 ‧ 캐럴 에머슨 지음, 오문석 ‧ 차승기 ‧ 이진형 옮김, 「바흐친의 산문학」, 로이스 타이슨 지음, 윤동구 옮김, 「비평이론의 모든 것」, 섀넌 매케나 슈미트 / 조니 렌던 지음, 허형은 옮김, 「미친 사랑의 서」, 프레드 캐플런 지음 / 김상문 옮김, 「사이버전의 은밀한 역사」, 토머스 울프 지음, 임선근 옮김, 「무명작가의 첫 책」,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 강의」, 스벤 슈틸리히 지음, 김희상 옮김, 「존재의 박물관」,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STORY」, 유기환 옮김, 「에밀 졸라 실험소설 외」,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학원 ‧ 간첩편 (VI), 기타 인터넷 검색 자료 등



미주(尾註, endnote)들

1) 로버트 맥키는 「STORY」에서 시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점은 이야기 속 세계라는 포괄적 공간에서 우리가 장면을 목격할 수 있도록 작가나 감독이 우리를 앉혀두는 자리다. 여기서 포괄적 공간이라 함은 대상의 좌우로 360도의 수평각과 상하로 360도 의 수직각이 둘러싼 공간을 말한다. 소설은 작가에게 대단히 폭넓은 시점 선택의 자유를 제공한다. 동시에 독자에게는 가장 통제가 심한 이야기 매체이기도 하다. 다른 매체들처럼 소설 역시 물리적 세계 안의 어느 위치에서든 장면을 바라볼 수 있지만, 여기에 인물의 정신세계 안의 주관적 관점이 추가된다. 일단 작가가 인칭(1인칭이나 3인칭 혹은 특이한 경우 2인칭)을 선택하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작가의 시선이 그 각도에서 움직인다. 우리의 지각이 작가의 손바닥 위에 놓이는 셈이다. 우리가 소설 문장을 따라가는 사이 작가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작품 세계 안의 특정한 장소, 시간, 사회 집단을 통과할 수도 있고, 어느 인물의 깊은 사유 속으로 들어가 인물의 합리화와 자기기만과 꿈을 목격할 수도 있다. 혹은 더 깊숙이 인물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인물의 원초적인 욕구, 공포스러운 악몽, 사라진 기억을 마주칠지도 모른다. 능숙하게 완성된 시점이 발휘하는 위력은 막강하다. 우리가 일부러 잠시 멈춰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상상력을 발동하지 않으면, 어느새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이야기꾼이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고, 들려주고 싶은 것만 듣게 된다.’


2) 로버트 맥키는 「STORY」에서 인물의 설정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일하는 작가들은 인물에 대한 전기와 심리를 다룬 내용으로 노트와 파일들을 채운다. 직접적으로 작품에 쓰이는 것보다 대개 열 배에서 스무 배에 이르는 자료들을 만들게 된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다. 상투성을 피하고 자신만의 예측하기 어려운 선택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도를 넘어서는 재료를 확보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보를 축적하고 나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작품 속의 세계에 쏟아붓고 싶다는 욕망은 피하기 어려운 유혹이 될 수 있다. 작가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작가와 인물 사이의 경계선을 넘고, 자신의 피조물을 그동안 자신이 행한 자료 조사의 대변인으로 만든다. 이를 위해서는 등장 인물의 행동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행동의 신뢰도가 확보된 후에도 이야기의 전개 과정을 통해 계속해서 신뢰도가 강화되어야 한다. 한 사건에서 다음 사건으로 넘어갈 때에는 원인과 그에 따른 효과의 발생에 설득력이 있어야 하고 논리적이어야 한다. 그보다는 이야기의 설정과 등장 인물들에 대한 작가로서의 지식이 작가의 개성과 만날 때, 다시 말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정리되지 않은 자료들 속에서 작가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들을 골라내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인적 스타일이 형성되는 것이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선택되고 이해된 사실이며, 재배열되고 의도된 사실이다. 존슨 박사는 책 한권을 쓰려면 장서의 절반을 뒤져봐야 한다고 말했는데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작중 인물을 세우기 위해 마을 사람 절반을 되짚어 봐야 한다.’


3) 이탈로 칼비노는 「이탈리아 칼비노의 문학 강의」에서 소설의 시작과 결말에 대해서 말했다. ‘물론 전통적인 서사 형식에서는 완결성이 느껴진다. 동화는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고 승리를 거두었을 때 끝난다. 자전적 소설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결말이 된다. 교양소설은 주인공이 성장하면, 탐정소설은 범인이 밝혀지면 끝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소설과 단편소설 들은 결말을 그렇게 명쾌하게 제시할 수 없다. 어ᄄᅠᆫ 소설들은 연속되는 모든 것이 이미 표현된 것의 되풀이밖에 안 될 때, 또는 원하던 대로 완벽하게 커뮤니케이션되었을 때 끝난다. 어쨌든 시작과 결말은, 이론 차원에서는 대칭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미학 차원에서는 그렇지 않다. 문학사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서두들이 풍부한 반면 형식과 의미에서 진정한 독창성을 가진 결말은 아주 드물다. 아니 적어도 기억에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특히 장편소설에서 그렇다. 마치 소설이 처음 시작할 때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보여줄 필요를 느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4) 사르트르는 ‘소설적 자유(romanesque liberté)’에 대해서 말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르트르는 모리아크의 유명한 전제 ‘모든 작가들은 신과 가장 흡사해야 한다’를 전면으로 부정하면서 ‘소설가는 신이 아니다’라고 못박아버린다. 즉 ‘소설가는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며, 소설은 다양한 관점들에 의해 이야기되는 사건’의 연속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전지적 권능을 일방적으로 휘두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특히 작중인물의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는데, 사르트르는 작가가 작중인물의 자유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소설적 자유의 개념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따라서 이 개념의 등장은 전지적 시점으로 에워싸여 있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소설 혹은 관념주의 소설에 대한 비판적 의미를 가지게 한다. 비판의 내용은 기법상의 오류와 세계관의 문제에 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용환 저, 「소설학 사전」, 288~290면 참조)


5) 책은 발표하면 흔적이 남는다. 나다니엘 호손 (Nathaniel Hawthorne)은 자기가 처음으로 출간한 소설 「팬쇼」를 어떻게든 없애보려고 모두 사들여서 태웠다. 친구나 친지들에게 나누어 준 책도 다시 빼앗아 왔다. 누구에게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내조차도 호손이 죽기 전까지 그런 책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호손은 성공하지 못했다. 몇 권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호손은 죽었지만 오늘날 「팬쇼」는 여러 가지 판본으로 나온다.


6) 플로베르는, 「살람보」를 쓰면서 철저한 자료 조사와 관찰에 의해 역사적이거나 회화적인 세부 사항을 하나하나 묘사했고, 「부바르와 페퀴셰」를 쓰면서 농업과 원예, 화학, 해부학, 의학, 지질학 따위의 개요서들을 읽었다. 1873년 8월의 한 편지에서 194권의 책을 읽었다고 썼다. 1874년 6월에는 읽은 책이 벌써 294권에 달했다. 5년 후에는 에밀 졸라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내 독서는 끝났다네. 내 소설이 완성될 때까지 다른 책을 펼치지 않을걸세.” 하지만 그런 후에도 종교 책 읽기와 교육학에 몰두하였다. 1880년 1월에는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내가 두 친구들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탐독했는지 아는가? 1,500권이 넘는다네!”


7) ‘세 해 동안의 작업, 아마도 100만 5천개 쯤 되는 단어가 거기 담겼으니, 내 설명으로 전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가본 적 있는 마을, 도시, 군주, 나라에 대한 방대하고 엄청난 목록에서부터 미구 철도 주간객차의 하부 구조물, 스프링, 바퀴, 플랜지(바퀴의 테두리, 액슬로드 (차축 연접봉), 색, 무개, 질에 대한 시시콜콜 빈틈이 없고 눈앞에 보이는 듯 절절한 묘사까지, 없는 게 없다. 그 커다란 장부책 중 아무것이나 펼치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향해 쏟아낸 글 토막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 인구가 2만 5천명 이상인 마을을 나는 몇 개나 알고 있는가? 그 마을들 중 내가 그곳에 대해 뭔가 쓸 수 있을 만큼 특별히 잘 아는 곳은 몇 군데이며, 나는 그중 몇 군데에서 그곳과 중요한 창의적 접촉을 했다고 여길 만한 관찰이나 느낌이나 직접적인 부대낌의 경험을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장부책에는 또한 인구 2만 5천명 이하 마을들, 그리고 인구 3천 명 이하 마을들의 목록도 나올 것이다. 또 내가 얼마간 살아봐서 실용적 지식을 얻은 미국의 군과 주목록, 그런게 전혀 없는 군과 주 목록도 나올 것이다.’ (토머스 울프 지음, 임선근 옮김, 「무명작가의 첫 책 The Autobiography of an American Novelist」참조)


8) ‘글을 쓰다가 더 이상 한 줄도 쓸 수 없는 벽에 부딪쳐본 적이 있는가? 무시무시한 경험이다. 그렇지 않은가? 고문과 같은 시간이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는데 단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나가서 창고 청소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책상 위를 다시 정돈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 혹시 내가 돌아버린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될 때까지 그 짓을 계속하게 된다. 나는 그 치료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치료 방법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이다. 글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것은 더 이상 할말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재능이 나를 버린 게 아니다. 할말만 있다면, 설령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을 것이다. 재능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유지시켜 줄 지식이 고갈되면서 기아로 인한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될 뿐이다. 가지고 있는 재능이 제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무식한 사람이 글을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재능은 사실에 대한 지식과 아이디어들에 자극받아야 한다. 연구하라. 재능에 영양을 공급하라. 연구 조사는 상투성과의 전쟁에서 살아남는 길일 뿐 아니라 작가의 공포와 그것의 사촌인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로버트 맥키 지음, 고영범·이승민 옮김, 「STORY」, 117면 참조)


9) 오늘날 인터넷을 검색하면 온갖 정보와 자료를 모을 수 있다.

‘인류 역사가 쓰이기 시작한 이래 우리 인간에게는 망각이 정상이며, 기억이 예외였다. 오늘날은 디지털 기술이 널리 퍼지면서 망각이 예외이며, 기억이 정상으로 변했다. 아무튼 거의 모든 것이 저장된다. 그 어떤 것도 소실되지 않으며, 필요할 때마다 별 수고 없이 검색될 수 있다. 빅데이터와 정보폭발이다.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인류의 지식은 1750년에서 1900년에 이르기까지 150년 동안 이전의 두 배로, 다시 1900년에서 1950년까지 50년 동안 그 두 배로 늘어났다는 학계의 진단이 나왔다. 인터넷이 발명된 이래, 전 세계의 정보는 짧으면 5년에서 최대한 늦춰 잡아도 10년 사이에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순전한 전문 지식의 경우에 데이터와 정보의 양은 더욱 빠르게 늘어난다.’ (스벤 슈틸리히 지음, 김희상 옮김, 「존재의 박물관」 262~268쪽 참조)




작성일:2021-08-21 13:30:57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