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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 (11)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7-29 13:52:23
조회수
293
나는 2007년부터 장편소설 『사하라』를 쓰기 시작했다. 2011년 4월 초판 (333면)을 발간한 이래 수정판 (352면), 재수정판 (403면), 2016년 4월 재재수정판 (588면)을 발간했다. 그런데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다. 2021년 7월 말쯤 재재재수정판을 다시 쓰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중인물들이 아우성을 쳤으니까. 유망한 건축가이면서 사막 여행가인 김규현과 이브라함, 다른 인물들, 풍경과 언어, 그들의 세계와 도저히 작별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100권이 훨씬 넘는 참고문헌을 읽고, 5,000여매의 사진, 수백 편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았다.

나는, 사하라와 사막, 사막의 부족 투아레그, 낙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비극, 무슬림과 쿠란, 마르세유, 타만라세트, 벌교읍, 남쪽 바다, 사진과 사진가의 세계, 건축과 건축가의 세계,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그러나 사하라와 사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로 기능하는 하나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여행, 원시의 순수성, 고향과 향수, 귀향, 떠남과 되돌아옴, 어머니와 동생, 가족의 사랑, 니힐리즘, 신과 인간, 신과 종교, 사랑과 이별, 사랑과 증오,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불륜, 원죄 의식, 운명과 비극, 자살 (self-murder)과 죽음, 인간 행위의 지고지순한 순수성이란 무엇인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용서와 화해라는 익숙하지만 무거운 주제들에 대해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신은 누구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는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도저히 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난제이다. 하지만 나의 신에 대한 관념은 김규현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인격신을 신봉하는 쪽에서 비난조로 말하는 불신자, 이교도라는 점에서 공통적이긴 하지만.

그는 너무 순수해서 아니면 너무 순진해서 아나키스트적이고 센티멘털리스트이다. 허무주의자이고 절대적 가치를 믿지 않는 회의론자이고 운명에 순응하는 운명론자이다. (그는 2000년 뜨거운 여름 사하라 사막의 남쪽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죽음의 필연성. 소설의 필연성.)

그렇지만 나는 인생역정에서 아주 치열한 삶을 살았으므로 (헛된) 이데올로기나 어떤 경향, 이즘, 도그마에 휘둘리지 않는 합리적 이성을 중요시하는 실용주의자이다.

김규현은 마르셀 프루스트와 달리 광장공포증은 아니고 폐소공포증을 앓았다. 그래서 둥근 지구와 무한 공간이라는 사막으로 떠난 것이 아닐까. (프루스트는 말했다. “나는 기묘한 인간이다. 죽음이 해방시켜 줄 때까지 덧문을 닫고 생활하며 세상의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올빼미처럼 꼼짝 않고 어둠 속에서만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머지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마는 젊은 나르키소스 같은 나르시시스트는 아닐 것이다. 반대로 자기 혐오증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그는 초월주의자일까? 엄청나게 복잡한 현실세계에서 수학적 논증과 엄밀함으로 건축설계를 하는 김규현이 순수한 초월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세속적인 쾌락의 삶을 멀리하고자 했고 육체를 학대하는 고행의 삶을 살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양극단을 피해서 중도의 삶을 살려고 추구하지 않았지 않은가.

「월든 (Walden or Life in the Woods)」을 쓴 유명한 초월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대해 그의 전기를 쓴 랠프 월도 에머슨은 말했다. “그처럼 모든 것을 버린 삶을 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직업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혼자 살았으며,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고, 투표도 하지 않았고, 세금 납부도 거부했으며, 육식도 하지 않았고, 포도주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담배도 모르고 살았다. 또한 자연주의자였지만 덫을 놓지도 않았고, 총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승부욕, 식욕도 없었고, 열정도 느끼지 않았으며, 짐짓 우아해 보이지만 결국 하찮은 것에는 전혀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는 예언자이거나 순교자, 시인, 가장 위대한 시인일지 모른다.

그는 신의 주위를 떠나지 못하고 떠도는 방랑자인가? 그는 신의 부정을 부정하는 사람인가? 신이 말했다. ‘그대가 이미 나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나를 찾아서 걷지는 않았으리라.’ 그는 평생 자신의 신을 찾아서 헤매었지만 결국 신적 경지라고 할 수 있는 無相, 無常, 無想에 도달했을 뿐이다. 나는 그가 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세계의 밖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인격신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범신론자이거나 독실한 무신론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의 범신론은 지극히 단순하여 다른 범신론과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우나무노는 ‘범신론은 위장된 무신론에 불과하다 ’고 하였고, D.H.로렌스는 ‘현대의 범신론자들은 모든 것 안에서 신을 볼 뿐만 아니라 그 사진도 찍는다 ’고 하였다.

(범신론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스토아 학파, 인도의 우파니샤드 세계관,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지동설을 주장한 브루노의 범신론, 스피노자의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그 뿌리가 매우 깊다.)

나는 모든 생물체 (식물과 동물, 인간을 포함하여)에는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살아있는 자연이야말로 그 자체로 인간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이다. 어찌 신이 없는데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의 색깔을 굳이 구별한다면 식물의 신은 짙은 녹색이고 동물과 인간의 색은 누르스름한 빛깔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신에 관한 짧은 견해는 이론 수준이 아니다. 누군가는 위대한 작가는 위대한 이론가라고 말했지만 내가 탁월한 이론가라고 할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과대망상이고 피해망상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재, 눈에 보이지 않는 궁극의 실체에 대한 심오한 통찰과 성찰을 통해 이론과 테마, 담론을 형성할 만큼 나만의 독립된 이론 체계를 아직 확립하지 못했지 않은가. 그렇지만 (내가 아무리 숙고해 보아도)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나는 신에 관한 심오한 이론을 정립할 만큼 풍부한 학식과 (자신의 이론에 명료성과 깊이를 더하는) 지성이 부재하고, 냉철한 비판 의식이 부재하고, 자신만의 신에 관한 독특한 가치관이 부재하고, 인격신과 현대 과학기술의 충돌과 모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관점이 부재하고, 인간 삶의 고통을 깊이 통찰하는 감수성이 부재하고, 뼛속 깊이 사무치는 통렬한 인생 경험이 부족하고, 문학적 상상력이 부족하고, (데이터를 활용하여 심층 기술 thick description하는) 리서치 능력이 부족하고, 현대 사회의 테크놀로지, 생명과학, 기후 변화에 대한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기분 전환용으로 대충 읽을 소설이 아니라 체험하여야만 하는 소설을 염두에 둔다. 열정적이고 필사적인 소설. 우리의 삶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깊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는가.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여행소설이기 때문에 엄밀한 리얼리티를 토대로 하여 사실적인 묘사를 하였다. 하지만 사막의 장벽에 가로막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엄혹한 현실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플래시백 장치를 활용했다.

그들은 과거의 무수한 기억들을 소환했다.

여행소설의 특성상 서술하고자 하는 실재들에 대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직설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어서 절제된 표현이나 은유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걸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저 평범해 보이지만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서 다양한 측면에서 읽을 수 있거나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의미와 암시된 의미를 함께 읽어야 하는 그런 묘미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까? 새뮤얼 랭혼 클레먼스 (마크 트웨인)는, “소설이나 역사에서 멋진 인물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에게 푹 빠져들었다. 이미 우리가 알던 사람이기도 하고, 강을 오가며 이미 만났던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 않은가.

이 소설의 (크고 작은 많은) 주제들, 인물들, 배경, 플롯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날카로운 질문들, 그것들을 넘어서는 문제 제기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해답, 설명, 해석과 재해석, 평가와 재평가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이제 독자에게 맡긴다.

(나의 모든 소설과 에세이에서처럼) 시적 감흥과 삶의 지혜, 도덕률이 가득한 성서와 쿠란, 신화와 전설, 섬광처럼 전율케 하는 촌철살인의 경구, 금언, 시들을 가끔 원문 그대로 또는 거기서 의미를 얻고 그 핵심 단어들을 따온 경우 이들 문장은 특별히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다.

다만 재재재수정판은 아직 종이책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느 출판사에서 선뜻 출판해 주겠는가. 최신 버전은 블로그에 실려 있다.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2021년 7월
작성일:2021-07-29 13:52:23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