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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독자의 (공개) 편지 (上)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7-22 15:03:10
조회수
585

독자의 (공개) 편지

김경욱 작가의 소설 「나라가 당신 것이니」를 읽고 나서


1. 머리말


나는 최근 김경욱 작가의 장편소설 「나라가 당신 것이니」를 읽었다. 나는 2021년 6월 26일자 경향신문 17면 ‘삶과 책’에 실린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의 서평을 읽고서 이 소설이 며칠 전 초판이 출간되었음을 알았다. (2021년 6월 23일 출간, 값 14,800원, ISBN 978-89-546-8052-3 03810, 문학동네)

나는 김경욱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고 이전에 그의 소설을 읽은 적도 없다. 그는 소설집 「베티를 만나러 가다」「위험한 독서」「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소년은 늙지 않는다」「내 여자친구의 아버지들」, 장편소설 「황금 사과」「천년의 왕국」「동화처럼」「야구란 무엇인가」「개와 늑대의 시간」, 중편소설 「거울 보는 남자」 등을 이미 발표했고, 우리나라 주요 문학상인 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견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의 장르 (genre)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문학 비평에서는 장르를 문학의 유형 또는 종이라고 하지만 문학 작품을 분류해 온 장르는 그 수가 너무 많고 이러한 분류에 쓰이는 기준도 아주 다양하다. 가령 애정소설, 역사소설, 전쟁소설, 농촌소설, 도시소설 등의 분류는 소재의 특성을 토대로 하여 소설의 장르를 규정한다. 장르의 구분은 책을 사려는 독자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독자들은 대개 그 소설이 로맨스물, SF, 미스터리, 판타지, 역사소설, 전쟁소설, 사회소설인지를 확인하고 자기 취향에 맞춰 책을 구매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의 경우에도 소설을 집필하면서부터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장르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건, 인물, 실재가 제재 (題材)가 되어 소설의 주된 배경이거나 스토리 전개 또는 플롯의 구성에서 핵심적 요소로 작용하기는 하지만 정통적인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장르소설인 미스터리 탐정소설 (detective story)이나 고딕식 괴기 공포물도 아니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타임슬립형 또는 좀비소설도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학적 소설 (sociological novel)이라고 할 수 있을까. 판타지 (fantasy)라고 할 수 있을까. 카니발적 (carnivalesque)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술적 리얼리즘 (magic realism) 계열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소설 (anti-novel)이라고 할 수 있을까. 블랙 코미디 (black comedy)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학적 소설은 작중 인물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성격, 기능 및 영향과 그 인물들에게 미치는 사회적인 일들에 주로 주의를 집중하는 문제 소설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판타지는 소설 속 사건이 터무니없는 가공의 세계에서 일어나거나 초자연적인 성질을 띠거나 아니면 일어날 수 있는 일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관한 예상을 대개 무시하는 소설을 말한다. 카니발적 소설은 러시아 비평가 미하일 바흐친이 만든 용어이다. 카니발레스크는 전통적 문학 정전의 가정들을 용어와 무질서를 통해 전복시키고 해방시키는 문학 양식을 말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은 사건 및 인물의 리얼리즘적 묘사와 환상문학의 요소들, 흔히 꿈, 신화, 동화에서 끌어낸 요소들을 결합한다. 반소설은 의식적으로 기존의 관습에 반하는 부정적인 양식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전통적 요소를 삭제하고, 전통적 규범을 깨뜨리며 과거의 소설 기법과 관례에 의해 독자에게 설정된 기대들에 어긋나게 하는 수법들에 그 효과를 기대하는 소설을 말한다. 그래서 프랑스 누보 로망 (nouveau roman)은 표준적인 소설 요소들을 생략한 작품이란 의미에서 반소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블랙 코미디 또는 블랙 유머는 인간 혐오증 또는 염세주의에 빠진 인물들이 환멸과 냉소를 표현하는 문학 형식이다. 그것은 확신과 희망이 없이 운명이나 운수 또는 불가해한 힘에 의해 지배당하는 인간들을 보여 준다. 일종의 부조리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카프카의 소설들 (「심판」「성」「변신」), 이오네스코의 희곡,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소설은 은퇴한 중정 공작원들이 활약하는 21세기 현대판 첩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 현대 첩보물이라고 선언하지 않았는가.) 그렇다고 첩보물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독자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미스터리적 요소도 없고 화려한 액션이 넘치는 스릴러 첩보물도 아니지만 말이다. 완벽한 형태의 첩보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소설은 소설 속에서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가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세계 내에서 리얼리티를 기반으로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을 획득하거나 또는 현실 세계를 토대로 하면서도 완벽하게 가상의 인물과 가상의 사건을 시간적 연쇄와 인과관계의 연쇄로 엮어 스토리를 전개한다. (이언 플레밍의 모험 액션 첩보물인 007 시리즈처럼 말이다. 그런데 제임스 본드가 활약하는 영화가 너무 유명해서 원작소설은 영화의 명성에 묻혀버린 감이 있다. 대표적인 첩보소설로는 존 르 카레의 소설들을 들 수 있다.)

이 소설이 일종의 첩보물이라면 그에 따른 전형적인 상황과 전형적인 인물이 나타나야 된다. 소설의 플롯에서 전형적 상황이란 결국 전형적 인물 (stock character)이 행동하는 상황을 말한다. 전형적 인물은 어떤 특정한 문학 장르에 되풀이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전형적 인물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분위기는 기분과 환경과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문학 작품에 퍼져 있는 음조 또는 기분인데, 그것은 사건의 진행 (행복하건, 불행하건, 재앙이건 간에)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북돋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특히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 계신 분’ (265면) 이후부터 아주 이상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장르를 구분하는 데 혼선이 일어난다.) 현대 첩보소설이나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 등은 엄밀하게 리얼리티를 토대로 하는데 리얼리티를 상실하면 소설을 망치게 된다.

그걸 반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전은 소설 속에서 미리 준비되어 있거나, 복선 (foreshadowing)으로 깔려 있거나, 배경 속에 암시되어 있거나, 어쨌거나 어느 정도 예고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의 연쇄와 인과관계의 연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뜬금없이 나타난다. 김기왕 실장이 전지전능한 신이거나 마술사처럼 나타난다. 그러니까 그들의 풍비박산 난 가정사의 비극도 그가 조종한 것이다.

너무 괴기스럽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괴기 소설도 아니다.) 당혹스럽다. 궤변이고, 횡설수설이고, 어불성설이다. 소설이 아니라 잡문이다. 이 소설은 타락했다. (첩보) 소설의 본질, 특징과 관련해서 작가와 독자 간 묵계가 깨졌다면, 소설의 필수 요소인 소설 속 내적 논리에 근거한 리얼리티, 개연성, 필연성, 핍진성이 파괴되어 신빙성, 설득력, 신뢰성이 없다면 그 소설은 이미 소설이 아니다.

(어떤 종류의 소설이건 간에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개연성이란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됨으로 논리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 개연성에는 일반적인 물리적 개연성과 주인공의 내적 논리에 비추어본 정서적 심리적 개연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주인공의 말과 행동이 정서적 심리적으로 진짜라는 느낌을 줘야 한다.)

소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작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이다. 그 진실은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현명한 독자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면, 논리적 타당성이 통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상식이 안 통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궤변이 아니고 잡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 말의 힘은 그 진실에 달려 있다.

그 가치 때문에

내 말은 사람들의 입과 정신 속에 계속 살아 있다.


작가가 쓴 소설 속 가상의 세계는 다른 세계와 구별되면서 자율적이고 자족적이어야 한다. 허구의 세계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고유한 우주를 형성한다. 그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는 자신들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이건 간에 무에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와 인간 경험 속에 존재하고 있던 재료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야기의 설정이 허구라고 해서 아무거나 이것저것 그 안에 욱여넣을 순 없다. 그래서 리얼리티가 중요한 것이다.

장르소설의 경우처럼 그 상상한 세계가 황당무계한 곳이더라도 그 소설의 상황에 맞는 일정한 종류의 인물과 사건들만이 가능성과 개연성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는 반드시 개연성의 내적 법칙에 따라야 한다.

김경욱은 어설프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흉내내려고 시도한 것일까. 마술적 리얼리즘은 특히 남미 인디오 세계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민담, 신화, 동화, 전승을 토대로 한다. 남미의 독특한 풍토, 전통, 분위기 때문에 문학적 깊이와 향기를 가질 수 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의 고독」과 그의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라」를 보라.) 하지만 마술적 리얼리즘은 21세기 현대 첩보물인 이 소설과는 도대체 어울릴 수 없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역사적 사실을 패러디하려고 의도한 것인가. 그러나 패러디는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패러디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작가가 패러디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다면 패러디 소설을 좀더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혹시 코미디를 소설로 연출하려고 한 것인가. 여기저기 정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코미디 같은 장면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주제나 제재라는 관점에서 보면 코미디로는 도저히 적당치 않다. 코미디는 지극히 가볍고 유쾌해야 하는데 미북정상회담이나 미북국교수립,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저격 암살 같은 심각하고 무거운 제재와는 도대체 어울릴 수 없다.



2. 작중 인물들, 시간적 배경, 공간적 배경


이 소설은 리얼리즘 소설인가, 아니면 판타지 같은 것인가. 현대 첩보물이니까 의심할 나위 없이 리얼리즘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역사적 사건, 인물, 실재가 소설의 재료가 되어 스토리 진행의 핵심 요소로 등장한다.

작가는 소설의 제재를 마음대로 취사 선택할 수 있다. 이야기의 재료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한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성적인 인물들, 흥미진진한 사건들, 다채로운 배경 등등은 모두 스토리의 재료가 취사 선택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재료의 선택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문학적 취향, 관점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제재는 현대 첩보물의 그것으로는 잘못 선택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작가의 무지, 역량 부족으로 좋은 재료를 가지고 소설을 지리멸렬하게 잘못 쓴 경우가 아닐까.

공간적 배경으로, 서울, 평양, 의정부, 미국 아이오와 주, 아이오와시티, 콘 벨트 옥수수밭, L.A. 코리아타운, 맥아더 공원, 로즈데일 공동묘지, 이문동 중앙정보부 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남산 분실, 지하철, 청송교도소, 낙원동과 낙원상가, 극장, 서빙고역, 종로3가, 보신각, 헌법재판소, 정곡도서관, 한국종합예술학교, 남산타워, 왕릉, 음지못, 미국 문화원, 서울 남부지검, 금융조사2부, 취리히, 비엔나, 압구정동, 한남동, 제네바 북한 대표부, 국립현대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 (MOMA), 국군서울지구병원, 궁정동 안가, 아파트,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지리산, 영남 알프스, 인사동, 북경, 자금성, 어바인, 헐리우드, 용산전자상가, 플라자 호텔, 창경궁, 남대문시장, 안국역 사거리, 댈러스, 김일성종합대학, 몽골 울란바토르 등등이 등장한다.

(작가들은 가끔 공간적 배경인 현실 속 장소에 대해 실명을 쓰지 않고 가명을 쓴다. 현실 속 어떤 장소의 실재에 구애되지 않고 또한 위험성을 회피하면서 자유스럽게 말하고 상상력을 발휘하기 위한 장치로 가명을 사용한다. 프루스트의 ‘발벡’, 토마스 하디의 ‘웨섹스’, 윌리엄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 카운티’, 앤서니 트롤로프의 ‘바체스터’, 노먼 메일러의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에 나오는 가상의 공간인 ‘아노포페이 섬’, 김승옥의 ‘무진’처럼 말이다.

그런데 드라큘라 성의 위치는 루마니아 관광청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작가가 지어낸 상상 속 공간일 텐데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시간적 배경은, 지금, 여기,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2010년 ~ 2020년대를 말한다. 우리 시대를 직접적으로 표상하는 방탄소년단 (BTS), 카톡, 구글, 보이스피싱, 회색 후드 티, 재건축, 시세차익, 통증 클리닉, 콜라텍, 스타벅스 등의 단어가 등장한다.

로즈데일 공동묘지의 묘비에는 ‘Ki Wang Kim, Mar. 1920 ~ Feb. 2019’라고 새겨져 있고 (283면), 미국 제46대 대통령 선거의 해인 2020년이 나온다.

그렇지만 작중 주요 인물들은 70대 중반으로 보이는데 플래시백 기법으로 그들의 소년 시절이 묘사되기 때문에 시간적 배경은 194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은, 김일성, 카터, 도널드 트럼프, 내란 모의의 수괴라고 한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정원식 전 총리, 이후락, 유서대필 사건의 강기훈, 박종철, 김재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응노, 천경자 화백, 윤이상 (작곡가),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끼오, 유리 겔라, 주사파 넘버원, 중정 부장, 중정 1차장, 케네디, 오즈월드, 맥아더, 암스트롱, 보안사령관, 기무사령관, 대도로 이름을 날린 어느 죄수, 문인 간첩단 사건의 인물들, 동베를린 사건의 인물들이다.

역사적 실재로는,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志向한다’, 중앙정보부 (KCIA), 중앙정보부 실장, 국가안전기획부, CIA, 동독 슈타지, 이스라엘 모사드, 주사파, 화랑담배, 양담배, 충무김밥, 방탄소년단 (BTS),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중앙TV, 연탄가스, 몽유도원도, BMW, 신춘문예, 보이스피싱, 타란툴라, 소더비 경매, 선거법 위반, 횡령죄, 클림트의 <키스>, 고흐의 <해바라기>, 피카소의 <게르니카>, <원초적 본능>, 프로 야구, 삼청교육대, <수사반장>, 태극기, 성조기, 이스라엘 국기, 일장기, 「학원」, 「소년」, 빨치산, 전기고문, 물고문, 시바스리갈, 빨갱이, 카톡, SNS, 몬산토, 전국 경필 쓰기 대회, IMF 외환위기, 아이비리그, 내란음모죄, 유전무죄 무전유죄, 북한 소형 잠수정, 연탄가스 중독, 노벨문학상, 한용운의 ‘님의 침묵’, 콜라텍, 텔레비전 홈쇼핑, 재건축, 시세 차익, 대박이냐 쪽박이냐, 차명 계약, 종합상사, 제야의 종, 휴대폰 속 인터넷의 바다, 교통경찰, 레커차, CCTV, 스타벅스, 공공칠가방, 발터 PPK 권총, 포드 픽업트럭, 폭스바겐 비틀, 토요타 캠리, 회색 후드 티, 로데오 경기,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 등등이 나온다.

역사적 사건으로는, 동베를린 간첩 사건, 문인 간첩 사건, 1979년 10‧26 사건, 1980년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취임,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1994년 카터와 김일성 회담, 1997년 북풍사건,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1998년 속초 잠수정 침투 사건, 주사파 등등이 등장한다.

작가가 어떻게 그것들을 부정 왜곡 조작 오용 남용할 수 있겠는가. 그게 소설가의 특권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건 역사에 대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무엇보다도 진실에 대한 반역 (反逆)이다. 그렇게 하면 소설은 진실해야 한다는 절대적 명제에 어긋나는 것이다. 소설일수록 진실해야 한다. 작가의 상상력은 부정 왜곡 조작하는 데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사건, 인물의 이면, 빈틈에서 발휘되는 것이다. 작가가 진실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면 결국 독자를 속이고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면 작가의 자격이 없다.


작품 그리고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바로 신뢰성이다. 신뢰성은 얻기 쉬운 편이지만 잃어버리기도 쉽다. 명백한 사실을 잘못 쓰는 것만큼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일도 없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에 속하는 정보라 해도 이 세상 누군가는 작가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 것이며, 작가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 서슴지 않고 지적할 것이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한 후,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인 닐 더그래스 타이슨은 영화에 나타난 너무나도 명백한 천문학적 실수를 지적하며 캐머런 감독을 질타했다. 배가 난파된 뒤 여주인공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별자리가 그 시간과 장소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캐머런 감독은 이 영화를 3D 버전으로 재개봉할 때 이 장면을 올바르게 수정했다 (빈센트 M. 웨일스).


이 소설은 중앙정보부 출신의 은퇴한 정보요원인 ‘나’가 주인공이면서 화자인 일인칭 소설이다. 그런데 일인칭 시점은 화자가 직접 감각적으로 느꼈거나 알고 있거나 경험하거나 추론하면서 다른 인물이나 상황, 사건에 대해서 말하기 때문에 시점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일인칭 화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뒤통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정통 스파이 스릴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에서 과연 1인칭 시점이 적절했을까 의문이다. 1인칭 시점의 소설에서는 화자가 말하는 모든 것에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거리가 확보되지 않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적인 측면이 있고 007류의 첩보소설이기 때문에 작가와 서사 간 거리 그리고 독자 서사 간 거리를 객관적 시점에서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데 1인칭 소설은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화자의 개입은 철저히 배제되고 인물들의 행동과 사건들은 주로 대화나 묘사에 의해서만 제시되는 하드보일드 문체 (hard-boiled style)여야 하는데 이 소설은 서술이 한없이 늘어지고 지지부진하여 그런 문체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이 소설은 1인칭 소설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작가는 습관적으로 1인칭 소설을 썼을까?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 1인칭 소설과 전지적 시점의 3인칭 소설의 이해득실을 왜 따져 보지 않았을까?

1인칭 소설의 최대 약점은 소설 속에서 화자인 ‘나’와 작가 자신이 잘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소설은 작가의 고백 형식이므로 아주 노골적으로 작중 인물인 ‘나’와 화자인 ‘나’와 작가가 일치한다.) 반면에 3인칭 소설은 작가와 화자가 대체로 잘 구별되고 초점 인물도 누구인지 잘 구별할 수 있다.

3인칭 전지적 시점은 스토리를 바라보는 시야가 더없이 깊고 넓어진다. 그러므로 서술자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 화자 (또는 작가)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어디든지 무엇이든지 가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전지전능한 서술자를 ‘하나님의 목소리 (God Voice)’ 라고 부른다. 하지만 1인칭은 화자와 작가 자신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아 혼란을 야기하고 거기서 초점 인물도 화자인지, 작가인지, 작중 인물인지 혼동이 생겨서 이중 초점화가 일어나게 된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동시에 작중 인물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주요 인물들과 함께 전직 중앙정보부 공작원 출신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초점 인물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대화, 관점, 사고방식에는 그들의 언어, 단어를 써야 하는데 작가의 관점이나 언어, 단어가 여기저기 시도 때도 없이 수없이 개입한다. 그래서 플롯의 통일성이 깨지고 인물들 간 또는 사건 간 인과관계의 내적 연속성이 결여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노출된다. (캐릭터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줄수록 독자는 캐릭터를 더 많이 신뢰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 정보나 다 되는게 아니라 적절하고 타당한 정보여야한다. 그 디테일은 이야기의 흐름을 불필요하게 방해해서는 안된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자의식적 내레이터 (self-conscious narrator)로 보인다. 오류에 빠지기 쉬운 또는 믿을 수 없는 화자이다. 이 소설의 성격상 화자는 중요한 사실 관계와 세부 사항을 단순 명백한 목소리로 정확하게 전달해야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첩보소설에서는 필수적인 다차원의 입체적 인물 (round character)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평면적 인물 (flat character)로 나온다. 그래서 작가는 전형적인 공작원의 정체성 (identity)을 형상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작중 인물들

(1) ‘나’는 이름이 김도식이다. 늙어서 야뇨증과 요실금이 있다. 만성폐쇄각녹내장 환자이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투명 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아내는 파킨슨병에 걸려 있고 지금은 요양원에 수용되어 있다. 코드 네임이 ‘라이카’인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이다. 1972년 이후락 부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18번 사랑니에 자결용 청산가리 캡슐을 숨겨 갔다. 그는 김기왕 실장을 스승이자 삼촌이자 아버지이자 방아쇠였던 존재로 본다. 피셔맨은 ‘나’를 김감독이라 부른다. 그는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나 다름없었다.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아이. 남편 손에 타 죽은 여자의 아들이자 아내를 불태운 남자의 아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감옥에 있었다. 어머니 목숨을 앗아간 화재는 단순사고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방화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를 마녀처럼 화형에 처한 남자였다. 열두 살 때 그는 기지촌을 떠돌며 양담배를 훔치곤 했다. 양담배를 소지하기만 해도 십 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던 시절이었다. 소년원 같은 고아원, 아니 고아원 같은 소년원으로 그분이 찾아왔다. 그는 그분을 따라서 소년원 쇠창살 밖으로 나섰다. (272면)

그는 이 소설의 주된 인물 (main character) 또는 주동 인물 (protagonist)이다. 하지만 영웅은 아니다. 이 소설은 어떻게 보아도 영웅소설이 아니다.


(2) ‘김배우’의 코드 네임은 ‘피셔맨’. 지금은 퇴직한 종합상사 중역처럼 보이는 전직 중앙정보부 요원. 침구사 자격증도 없으면서 (또는 있는지 모르겠지만) 서빙고역 1번 출구 근처에서 ‘선샤인 통증 클리닉’을 운영한다. 그 병원 접수대 뒤에 <몽유도원도> 복제품이 걸려 있다. 피셔맨은 미국 어바인에 며느리와 손자가 있다. 큰손자 놈은 아이비리그가 목표고 둘째는 명문 사립고에 들어갔다.

그는 자백을 잘 받아내는 인간 거짓말 탐지기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 여동생이 한방에서 자다 연탄가스로 같이 죽었다. 피셔맨만 어찌어찌 기어나왔는지 의식을 잃고 마루에 쓰러져 있다 병원으로 실려가서 살아났다. 그는 천애고아가 되었다.

어느 날 고아원으로 목사 (김기왕 실장)가 찾아왔다.


(3) ‘김작가’의 코드 네임은 재단사다. 대장암에 걸렸다. 우리는 재단사를 도배장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중학교 신입생이던 시절 모 신문 신춘문예에서 역대 최연소 당사자가 될 뻔했다. 재단사의 아버지는 뺑소니 사고로 죽었다. 재단사의 형제가 고아원에 있었지만 동생만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 미소를 지을수록 사람들 표정이 굳곤 했다. 재단사는 디테일의 천재다. 말라비틀어진 뱀 껍질 같은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건 치명적 독 한 방울. (96면)


(4) 김기왕 실장은 그들로부터 ‘그분’ 또는 ‘목사님’이라고 불린다. 그는 나중에 미국에 가서 진짜 목사가 되었다. 그의 별칭은 소크라테스다. 그는 미국 대통령을 ‘독수리’라고 부른다. 그는 딸만 셋이다. 큰딸이 미국 시민권자다. 목사 생일은 추석 다음날이다. 그들은 김 실장이 청송교도소에서 출옥한 날 만난 뒤 이십 년 만에 미국에서 재회했다. ‘나’는 그분을 뼛속까지 다윈주의자로 간주했다.

그는 명목상의 죄목은 선거법 위반이었지만 결정타는 추가 기소된 횡령죄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이용한 부정 축재라는 고전적 시나리오. 처남과 동서 명의로 계약된 두 채의 아파트가 모함의 주재료였다. (124면)

그들이 비밀리에 모이는 안가는 베들레헴이다. 그는 베들레헴에 은신해 있다 체포됐다. 그의 라인은 하나같이 퇴직금도 제대로 못 받고 파면당했다. (파면당해도 일정 부분 퇴직금이 지급되고 공무원연금도 50%까지 지급된다.)

그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출범할 때 기획한 사람이고 프로 야구 출범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반동인물 (antagonist)로 밝혀진다. 그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고 모르는 게 없다. 그러니까 전지전능한 신적 인물이고 마술사이다.


(5) 염소는 중국 국적의 유학생 출신으로 김기왕 실장에게 고용되어 (또는 그의 제자이거나) 미국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저격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의 침실에는 저격용 망원렌즈가 달린 드라구노프 소총이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왜 염소라고 하였는가? 소설 속에서 이름은 인물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첫 번째 징표이다. 동화가 아닌 소설에서 염소라는 명칭은 소설의 품격을 떨어뜨려 삼류 소설로 전락시킨다.


(6) 그들 (라이카, 피셔맨, 재단사)은 지금쯤 70대 중반이다. 손자들이 아이비리그나 사립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40년대 중반쯤 이후 태어난 것이다.

작가의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작중 인물들을 명시적이거나 암시적으로 차별화하여 각자의 개성과 인간적 모습이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들을 형상화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 세 명 모두 똑같이 비슷하게 불우한 가정환경 출신이고 고아원이나 소년원 출신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 신체적, 심리적 특성이 제시되지도 않았다. 그들은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시대상을 구현하는 인물들도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고아원이나 소년원 출신이다. 정상 가정 출신이 하나도 없다. 그들의 인생 행로는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다. 작가는 공작원은 본래 고아원이나 소년원 같은 불우한 환경 출신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왜? 세 사람 모두 어렸을 때 가정은 풍비박산되고 그들은 고아원이나 소년원으로 들어가야 했는가.

공작원이야말로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 출신이어야 한다. 그렇게 비정상적인 극단적인 환경에서 자랐다면 어쩔 수 없이 심리적 콤플렉스를 지니게 되는데 이는 스파이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공작원일수록 정상적인 인간이어야 한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유리 모딘 지음 / 조성우 옮김, 「나의 케임브리지 동기들」, 단편소설 「고정 간첩」 참조.)
작성일:2021-07-22 15:03:10 121.138.194.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