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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북한이탈주민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6-28 11:51:59
조회수
489
북한이탈주민











사회주의 제도여!

우리는 너를 보며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네가 있었기에 우리는 국제 미아가 되었고 목숨을 구걸하고

밥 동냥하는 거지가 되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부끄럽다.









대성공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이탈하여 대한민국으로 내려온 탈북자 또는 탈북민의 법률상 용어는 북한이탈주민이다. 법적으로 북한이탈주민은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 (북한)에 주소, 직계가족, 배우자, 직장 등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북한을 벗어난 후 외국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국 국적 조선족은 탈북자가 될 수 없다.

1993년 이전까지는 대체로 귀순자 또는 귀순용사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의 경제난으로 북한을 이탈한 주민이 늘면서 탈북자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탈북자라는 용어의 어감이 부정적이어서 다른 용어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어 공식적으로는 법률상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을 사용하고 있다.

그 옛날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시절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은 귀순자를 사선을 넘어 자유민주주의를 택한 ‘귀순용사’로 간주하였는데 그들은 국가유공자 대우를 받고 엄청난 금전적 보상을 받았다. 우선 아파트 한 채 (당시 시가 3천만 원)를 무상으로 받았고 그 외에 별도로 아파트 두 채 값에 해당하는 정착금을 받았으며 본인이 원하는 대기업에 대졸 자격으로 취직이 되었다.

정부는 이들을 통해 북한 공산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적극 홍보했다. 귀순자에게 주는 정착금이 국민 계몽에 드는 비용과 비교 계산하면 전혀 아깝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1980년대엔 ‘의사, 변호사 위에 귀순자가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귀순북한동포보호법’은 귀순자를 국가유공자에서 생활 능력이 결여된 생활 보호 대상자로 전환하여 정착금 지원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현재의 ‘북한이탈주민의보호및정착지원에관한법률 (북한이탈주민법)’은 기존의 ‘귀순’의 개념을 ‘북한 이탈’로 대체해 자립, 자활 능력 배양에 중점을 둔다.

탈북자의 국내 정착을 위한 처우와 지원은 북한이탈주민법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탈북자는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천신만고 끝에 입국한 후 먼저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 (또는 중앙합동신문센터)에 수용되어 합동신문을 받는다. 탈북자로 위장해 국내에 침투하는 간첩을 색출하기 위해서이다. 탈북자가 갈수록 늘고 그에 따라 탈북자를 가장한 직파 간첩의 침투 가능성도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합동신문센터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국정원이 관할하고 신문 역시 국정원의 조사관들이 주도한다. 다른 기관들은 형식적인 들러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군사정권 시절 악랄한 고문과 온갖 나쁜 행패 때문에 악명이 높았던 옛날 중앙정보부 (중정)는 언젠가 국가안전기획부 (안기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하는 짓은 똑같았다. 그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국가정보원 (국정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전히 이름만 바꾼 것인지 체질도 많이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데 합동신문센터에서 특히 국정원의 조사관들에 의한 과도한 강압적인 조사가 알려지면서 국내 입국을 꺼리는 탈북자들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합동신문 과정에서 진술거부권이 보장되지 않고 변호인 조력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최장 180일까지 독방에 구금된 상태로 엄격한 조사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합동신문센터의 어두운 과거와도 연관이 있다. 합동신문센터의 전신은 ‘대성공사’이다.

원래는 한미 양국의 군사작전 지휘권이 미군에 있었기 때문에 한미 양해각서 ‘미8군 정보훈령 Ⅰ- 65’에 의거하여 한국 내 모든 군사정보 활동을 미8군 정보참모부에서 통제하고 있었다. 502 군사정보단은 A (알파), B (브라보), C (찰리) 등 3개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A중대는 한미 합동으로 북한 귀순병, 귀순 민간인, 체포 간첩, 자수 간첩, 송환 어부 등을 상대로 신문했고, B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방첩활동을 했고, C중대는 미군 단독으로 대북공작을 수행했다. 그런데 A중대의 업무가 1974년 국군 정보사령부로 이관되었다. 이때부터 대성공사가 설립되어 대방동 소재 수용소 관리와 탈북자들의 신문은 정보사령부가 관할한 것이다.

대성공사는 그 당시 남한에 입국한 모든 탈북자들이 반드시 거치는 곳이었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에 온 북한 주민들이 맨 처음 수용되는 곳이자 남한 주민으로 공인받는 곳이었지만 정식 명칭은 ‘정부중앙합동신문센터’였고 약칭은 ‘중앙신문단’이었다. 대성공사는 위장 명칭으로 겉으로는 일반 회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탈북자 조사와 정착 교육을 맡은 1급 국가보안시설이다. (지금도 대방동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간판은 떼어냈지만 낡고 우중충한 건물로 남아 있고 여전히 똑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때는 탈북자들이 1차적으로 중앙신문단에서 중정, 경찰청, 국방정보본부, 정보사령부, 보안사 등 5개 기관으로 구성된 합동신문조의 신문을 받았다. 탈북자들은 이곳에서 합동 조사를 마쳐야만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일반 사회로 나갈 수 있었다. 모든 탈북자는 아주 강압적인 조사에 의해 자신이 북한에서 평생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모두 털린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모든 정보를 남김없이 탈탈 털리게 된다.

북한 정보 당국은 2000년대 중반까지 운영된 대성공사의 위치, 약도, 건물은 물론이고 탈북자들에 대한 주요 신문 사항을 알아내기 위해서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그러한 특별 임무를 부여한 공작원을 파견하기까지 했었다.

그 옛날 그곳에서는 온갖 불법이 횡행했다. (아마 그 수치스러운 관행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내려오고 있을 것이다.) 탈북자들은 조사 과정에서 상당수가 공포감을 느꼈다. 폭언과 욕설을 듣기 일쑤였다. 구타 및 가혹 행위 같은 물리적 폭력을 경험했다. 또한 일부 탈북자들은 거짓말탐지기를 이용한 조사를 받았다.

탈북자들은 대성공사에 도착하자마자 지하 조사실에서 조사관들에게, “우리는 전문가야! 알겠어! 척 보면 알 수 있지. 아니면 냄새를 맡아보면 알 수 있지. 지금 썩은 냄새가 난단 말이야. 너 이 새끼, 위장 탈북한 거 맞지. 간첩 냄새가 나고말고. 그러니까 순순히 자백하라고. 어디 소속이야? 인민무력부 정찰국이야? 노동당 작전부야? 보위사령부인가? 아니면 어디야……? 그리고 공작 목표가 뭐야?”라든가, “야, 이 새끼야, 여길 왜 왔어. 북한이 싫으면 북한에서 싸울 것이지.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천국이 아니란 말이지.”라든가, “너는 북한에 있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간쓰레기야.”라든가, “여권이 없으니까 국적도 없어. 감쪽같이 죽여서 화장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그런다고 북쪽에서 우리에게 항의하겠어.”라는 폭언을 들었다.

그렇지만 여자 탈북자 중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사람은 더욱 가혹한 조사를 받았다. 그때는 남녀 조사관들이 함께 들어와서 조사를 했는데 여자 조사관이 더 지독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수십 차례나 얼굴과 뺨을 때리고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온몸을 후려치고 침을 뱉었다. 그녀가 말했다. “독한 년! 독한 년 같으니라구. 빨리 불란 말이야. 버텨봤자 네 년만 손해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단 말이지. 북한의 특수부대에 여성요원으로만 구성된 ‘모란꽃소대’가 있단 말이지. 거기 소속 아냐?”그녀는 너무 때려서 손바닥이 빨갛게 붓자 입으로 호호 불어가면서 또 다시 때렸다. 이번에는 남자 조사관이 합세했다. “조금 쉬어…… 나한테 맡기라고. 손을 찬물에 담그라니까…… 그래야 부기가 빠진다고.” 그는 옆 방을 가리키면서 전기 고문실로 끌고 가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 단계에서는 피조사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면서 무조건 굴복한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쓰게 된다.

그러나 탈북자의 경우에도 노동당 간부나 고위직 출신이면 특별한 대우를 받고 북에서 지위가 하찮은 별 볼 일 없는 대부분 탈북자는 그냥 그렇게 대우를 받는다. 교도소 수감자들의 경우 신분 격차를 지칭하는 ‘범털’과 ‘개털’의 차이만큼 간극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엄연히 신분상 차별이 있고 대우도 그만큼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평양에서 고위직이면 서울에서도 고위직 대접을 받는 것이다.

단순하게 예를 들자면, 북한의 고위층으로 온갖 호사를 누렸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경우 탈북은 정치적 망명으로 미화되었고 특사 취급을 받았다. 안기부가 비밀리에 관리하는 안가에서 정중하게 대접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고 그 후에도 정부에서 마련해 준 강남의 호화주택에서 살았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탈북자 조명철은 2009년 6월 통일부 산하 통일교육원의 원장으로 취임하는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 대학이 어떤 대학인가. 북한에서는 신적인 존재인 김일성의 이름이 붙어있지 않은가. 로열패밀리 출신인 김정일과 그의 이복동생인 김경진, 김평일 등이 모두 거기 출신이다. 그런데 남한의 임수경은 그들과 대학 동문이다. 그녀는 김일성종합대학의 명예 졸업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계급투쟁에 대해서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에 남한에만 내려오면 처지가 뒤바뀔 거로 생각한다. 북한에서 못 살고 천대받고 멸시받던 사람은 여기오면 더욱더 대우를 받고, 북한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잘나가던 사람은 북한 체제에 충실히 봉사했으니까 그에 따른 제재와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게 북한식 계급투쟁 이론이었다. 그러나 탈북민 사이에서도 분명히 계급 구분이 있었다. 금수저 출신 탈북민들은 정부의 보호와 지원 덕택에 안정된 직업을 갖고 잘 살았고, 흙수저 출신 탈북민들은 실업과 빈곤에 허덕였다.

지금은 국정원이 직접 관할하는 중앙합동신문센터가 경기도 시흥시 조남동에 있다. 탈북자가 입국하면 개인마다 다르지만 조사기간은 대개 1주일 정도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채 독방에 수용되어 합동 조사관들과 대면하여 지속적으로 조사를 받는다.



탈북자들은 합동신문센터 내 탈북민 거주 숙소에서 임시 기거하면서 먼저 건강 검진, 질병 치료, 심신 안정 등을 위해 통상 2~3주간 사전 준비 과정을 거친 후 본격적인 조사를 받는다. 그러고 나서 조사를 통해 ‘진성 탈북민’으로 확인되면 (다시 말하면 위장 탈북한 간첩이 아니라고 확인되면), 통상 4~5주간 센터에 대기하면서 소양 교육, 질병 치료, 시내 견학 등에 참여한다.



그 후에는 통일부 산하 하나원 교육 일정에 맞추어 입국일 순서에 따라 하나원에 입소한다. 거기서는 한국 사회를 알아야 되기 때문에 먼저 역사를 배운다. 남한 사회에 어떻게 정착해야 되는가. 수업도 받고 실습도 한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돈 쓰는 것을 실습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하고 같이 가서 물건 사보고 교통카드 대고 버스를 타기도 한다.

1999년 경기 안성시에서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라는 명칭으로 문을 연 하나원은 지금까지 3만여 명의 탈북민을 교육해 배출했다. 대다수 탈북민에게 하나원은 한국에서 첫 발걸음을 뗀 제2의 고향으로 기억된다.



하나원은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 북한이탈주민법을 제정하고 나서 설립됐다. 북한의 경제난으로 탈북민 수가 늘어남에 따라 이들에 대한 사회적응 교육 시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하나원이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은 합동신문을 거친 뒤, 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부여받고 탈북자 정착 지원을 받겠다는 내용의 각서인 ‘보호동의서’를 쓰고나서 하나원에 입소하여 12주간 문화적 이질감 해소, 심리 안정, 직업 상담 등 사회 적응 교육을 받는다. 이 기간 중 정부는 탈북민에게 새로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하여 가족관계를 등록하고, 직장을 알선하며, 집을 마련해 주는 등 이들의 사회 정착을 준비해 준다.

대다수 탈북민은 서로 만나면 상대에게 “하나원 몇 기냐”고 인사처럼 묻는다. 하나원 기수는 탈북민에겐 대학교 학번과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매달 한 번씩 합동신문을 마친 탈북민이 하나원에 들어오면 순서대로 기수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나원이 갈 길은 여전히 멀다.

하나원을 졸업한 탈북민이 가장 문제점으로 꼽는 것은 역시 교육 문제이다. 다양한 연령과 성별, 교육 수준, 경력을 가진 탈북민이 모이다 보니까 각자의 수준에 맞는 교육 과정은 애당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직업교육이 형식적이고 천편일률적이니 무엇보다 지루하다는 불만이 제일 많다. 개인별 맞춤형 지도 시스템이 절실한 것이다.

탈북자들이 하나원을 졸업하고 남한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때부터 온갖 수모와 시련을 겪게 된다. 남한 사람들은 그들이 폐쇄적이고 낙후된 북한에서 왔다고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업신여긴다. 그들을 동남아에서 들어온 밀입국자와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탈북자를 위한 직업 사다리는 부실하다. 탈북자들은 취업을 해도 대부분 사회 밑바닥 저임금 일자리이다. 그들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건설 현장 등 일용직은 물론이고 편의점, 음식점, 커피숍에서 최저 임금을 받으며 임시직으로 허드렛일을 한다.

그러므로 탈북자들은 자기 보호 본능에서 탈북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중국인 또는 조선족 행세를 하게 된다. 부모들은 자식에게도 탈북자란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 탈북 청소년들은 왕따 당하지 않기 위해 탈북자 가정 출신이란 사실을 감춘다. 탈북자 자식이란 사실을 친구들이 알아챌까 봐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탈북자

김명자는 2009년 7월 10일 저녁 늦게 태국 방콕 쑤완나품 공항을 출발하여 새벽녘에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행 3명과 함께 바로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올라 중앙합동신문센터로 갔다. 거기서 탈북과 관련한 조사를 받았다. 먼저 진술서를 작성하였다.



진술서



저는 2006년 2월, 회령시 유선동 근처 두만강을 도강하여 중국으로 왔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 10명인데 년령이 18세부터 25세까지인 미혼녀성들이었습니다. 우리 10명은 중국에 도착하였지만 낯선 곳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헤매다가 대오가 너무 방대하여 세 패로 갈라져 제각각 집을 찾아들어갔습니다. 다행히 그 마을은 몽땅 조선족이 살고 있는 마을이기에 언어가 통해서 좋았습니다. 우리 4명은 한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더니 집주인은 인차 불을 켜고 문을 열어주면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집으로 들어간 우리는 이렇게 오게된 사연을 말했더니 불쌍한 사람들이라면서 밥을 주고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하여 우리는 그곳에서 하루 묵고 이튿날 떠나자고 하니 목적 없이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집주인보고 사정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살려고 왔는데 아무 곳에나 시집을 보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집주인은 한참 생각하던 끝에 그러면 하룻밤을 더 묵어라 하고는 사처에 전화를 걸어 총각이 있는가를 소망하고는 이튿날 아침 택시를 불러 우리 4명을 앉히었습니다. 그리고 송강진에 2명을 떨어놓고, 다시 한 시간가량 가서 조선족 마을에 우리 2명을 각각 4,000원에 팔았습니다.

우리는 제각기 남자를 만났습니다. 나만 복이 없게도 술주정뱅이 남자를 만났는데 술을 마시고는 누구하고나 걸고들며 심하게 술주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애가 나서 별란 방법을 다하여 얼리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여 저는 그 집에서 석달을 겨우 살고 끝내 견디지 못하여 남자 몰래 가만히 집을 뛰쳐나와 온 밤을 걷고 걸어서 신합이라는 마을까지 왔습니다. 저는 온 밤을 끄스개 신을 신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나온 것이 너무 지치고 발에 물충기가 쳐서 걸을 수 없게 되자 거리바닥 가로등 밑에 앉아 쪽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 가설하는 한 청년이 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저를 흔들어 깨우면서 왜 바깥에서 자느냐고 묻자, 저는 그만 서러워 울면서 사실을 말했더니 저를 불쌍히 여기어 한 친구 집에 먼저 데려다 놓고 여기서 푹 쉬라고 하고는 일이 끝이 난 다음 오후 차로 우리집에 함께 가자고 하였습니다. 약속대로 그 청년이 와서 저를 데리고 100리나 되는 길을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알고보니 그 집은 가난하여 아들이 30이 되도록 장가들지 못했습니다. 내가 들어가니 그 집에서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면서 누구인가고 어머니가 물으니 그 청년은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주워온 사람이요” 하고 말하자 온 집식구들은 난데없이 며느리가 생겼다고 너무 좋아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그 집에서 3년을 살았는데 아들을 하나 낳았습니다. 남편 되는 사람은 마음씨가 착해 저는 마음 놓고 이 집에서 열심히 집안일을 하면서 큰 망설임 없이 끝까지 살려고 했습니다만 그 집 역시 너무 가난했습니다. 남편이 말하기를 여기서 너무 고생하지 말고 남조선으로 가라고 타일렀습니다. 거기 가서 사람답게 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아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잘 키울테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면서 반드시 대학까지 공부시키겠다고 했습니다. 남조선으로 가는 길에 중국 공안에게 붙잡힐 수 있으니까 중국인 행세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중국 옷으로 갈아입고 출발하였는데 남편이 태국 국경까지 함께 데려다주었습니다. 우리는 헤어지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조사관이 질문을 하고 김명자는 대답했다.

문 : 진술인에 대해서는 태국 대사관에서 기초적인 조사를 이미 하였습니다. 추가적으로 조사하겠습니다. 만약 거짓 진술하면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중국으로 추방해버립니다. 그러면 그 이후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요.

중국에서 북한으로 송환하면 이번에는 어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가겠지.

답 : 저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문 : 태국의 난민수용소에서는 어떻게 생활했나요?

답 : 녀성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한 방에서 100명 넘게 함께 있었어요. 방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에 너무 덥고 좁고 하니까 녀자들끼리 싸움도 많이 했어요. 북한에서 바로 온 사람 있고 중국에서 살다 온 사람 있고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습니다. 북한 사람들 성격이 괄괄하니까 싸움도 세게 했습니다.

문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보안성이 발행한 이 공민증이 진술인의 공민증인가요.

답 : 맞습니다.

문 : 공민증에 적혀 있는 이름, 성별, 생년월일, 난 곳, 사는 곳 등이 다 사실 그대로인가요.

답 : 맞습니다.

문 : 두만강을 건널 때 일행이 10명이었는데 그 경위를 설명하시오.

답 : 우리 일행은 전부 회령 출신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는데 여기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으니 연길로 가서 노래방이나 식당 등에서 일을 하면 굶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국경경비대원들은 그들도 회령 출신이어서 돈 벌려고 도강을 한다고 하면 눈을 감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무사히 도착했으나 우왕좌왕하면서 연길로 가보지도 못하고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문 : 일행 중에서 누구와 가장 친했나요.

답 : 정순남입니다. 고등중학교 1년 후배인데 출신 성분과 학업성적이 우수해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선발되었고 3년제 전문대학까지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백화점 창고에서 과자 등 물건을 몰래 빼내 팔았는데 그게 발각되어 국가재산탐오죄로 처벌받을 처지가 되자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문 : 진술인은 여자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해서 활동한 사실이 있나요.

답 : 저는 학교성적도 좋았으나 출신 성분이 나쁘다고 연좌제에 걸려서 가입이 좌절되었습니다.

문 : 정순남의 소식을 알고 있나요.

답 : 그때 이별한 후 모릅니다.

문 : 2년 전 탈북해서 내려왔지.

답 : 저는 몰랐습니다.

문 : 진술인은 언제쯤 국내로 입국하였나요.

답 : 저는 2009년 5월 초순경 태국으로 들어가서 방콕 이민국감호소에 수감되었다가 두 달 후 방콕 공항을 출발하여 다음 날 인천 공항으로 입국하자마자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문 : 회령시에서 태어났던 집을 기억할 수 있나요.

답 : 저가 어렸을 적에 이사를 했고 그 후에도 두 번이나 이사를 했습니다.

문 : 진술인이 다녔던 인민학교와 여자고등중학교 위치를 정확히 말해보세요.

답 : 필요하다면 저가 약도를 그려드릴 수 있습니다.

문 : 진술인의 출생, 성장과정 및 학력이나 경력에 대해서 말해보시오.

답 : 저는 1979년 6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회령 곡산농장 영농반장으로 복무했던 아버지 김지호 (1996년 6월 암으로 사망)와 어머니 조인선 사이 1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하여 성장하면서 함북 회령시 소재 덕흥인민학교 4학년을 거쳐 동명여자고등중학교 5년을 졸업하고 나서 농업설계사무소 예산원에서 2년을 근무했고 그 후 농촌경영위원회 남새 직매점 부기원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가족은 원래 평양특별시 용성구역 용추동에 살았는데 1960년경부터 북한에서 ‘주민등록 재정비’라는 명목으로 출신 성분이 불량한 사람들을 평양에서 지방으로 추방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때 우리 선조 중에 과거 면장을 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시로 추방되었습니다.

문 : 학교를 졸업한 사실이나 직장에서 복무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나요.

답 : 졸업증명서를 가지고 있으니까 제출하겠습니다. 또한 저가 고등중학교 다닐 때 찍은 사진, 가족 사진, 남새 직매점에 다닐 때 찍은 사진을 필요하시다면 제출하겠습니다.

문 : 오빠에 대해서 진술하시오.

답 : 오빠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사이에 북한과 중국 국경을 비법월경하면서 담배, 술, 약초, 장뇌삼, 꿀, 오미자, 골동품 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북한 돈과 중국 인민폐를 가지고 사고 팔았고 그다음에는 이익이 많이 남는 빙두라는 마약 밀매를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그때 회령시 보위부에서는 한국과 적선 (한국과 전화 연락을 하거나 지령을 받음)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이유를 대면서 뇌물을 요구하고 감금을 하고 온갖 폭행을 하면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오빠는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오빠가 수용된 후 저희 가족은 점점 살길이 막막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헤매며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너라도 중국으로 가서 살아야 한다. 내가 동생은 어떻게 해서든지 먹여 살리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처음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탈북하였으나 중국 공안에 검거되어 강제 북송된 후 보위부 조사를 받고 노동단련대로 이동된 후 한 달 만에 방면된 후 일행들을 만나 재탈북하였습니다.

우리 일행은 국방경비대원에게 인민폐 500원을 주고 당시 강폭이 30미터이고 수심 1미터인 두만강을 건너 중국 쪽으로 갔던 것입니다.

문 : 왜 동생은 데리고 나오지 않았나요.

답 : 저의 동생은 어렸을 적에 소아마비를 앓아 몸이 몹시 불편했기 때문에 함께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문 : 지금까지 탈북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답 : 1990년대 중반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그때는 녀성들이 장마당에 나가고, 집에 돌아와 밥하고 설거지하고, 애 키우고, 집안 청소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자는 까딱도 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지기는 했습니다. 돈 버는 녀성들이 늘어나면서 남자들이 집안 청소 정도는 합니다. 그래도 녀성은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문 : 북한은 해방이 되고 나서 1946년에 ‘남녀평등법’을 제정하는 등 여성들의 권리를 위해서 나름 노력했지 않은가요.

답 : 북한은 여전히 봉건적인 가부장제 유교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에는 남성이 매우 적습니다. 녀성이 압도적인 비율로 많습니다. 그래서 녀성들은 남편감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일부에서는 6·25 전쟁 때 남자들이 워낙 많이 죽어서 녀성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고 합니다만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북한에서는 남자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성은 17살 때 군대에 들어가 10년 동안이나 복무합니다. 군대에서는 각종 위험한 공사판에 안전장비도 없이 동원되어 무리로 떼죽음을 당하고 고통을 잊기 위해서 독한 술을 엄청나게 마십니다.

문 : 북한에서 여성들은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남한에서는 여성들이 점점 결혼을 기피하고 있고 애를 낳는 것도 싫어합니다.

답 : 제가 알기로는 북한 녀성들은 결혼하려는 욕구가 아주 강합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결혼해서 애가 없으면 모자란 녀성으로 취급을 당합니다.

문 : 북한에서는 남자가 모자라니까 결혼을 하려면 여성들끼리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지 않은가요.

답 : 웬만한 남자는 금값이 됐습니다. 녀성은 결혼하려면 혼수 정도는 전부 장만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결혼할 때 녀자 쪽에서 가전제품과 장롱, 이불 등을 다 가져가는 실정입니다. 그러니까 결혼 자금을 녀성이 훨씬 많이 쓰는 거죠.

문 : 진술인의 친구나 친척, 학교 동창생 중에 탈북하여 남한에 정착한 사람이 있나요.

답 : 회령시는 두만강과 붙어있어서 중국으로 넘어가 탈북한 회령시 출신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남한에 정착하면 찾아볼 생각입니다. 남한에는 탈북자 모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문 : 진술인의 경우 의심할 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답 : 감사합니다.

문 : 남한에 살면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답 : 아직 정신이 없습니다. 북에 있을 때도 출신 성분 때문에 대학에 가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는데 남한에서는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가능할지……? 듣기로는 영어 실력 때문에 대학교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들어가도 학업을 따라갈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문 : 열심히 노력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나원에서 사회로 진출하면 어려움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꿋꿋하게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남한 사회는 북한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어느 정도 돈을 모으면 북한에 계시는 어머니께 송금하세요. 어머니와 연락하고 송금하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북한 가족에게 송금을 해주는 브로커가 있어요.

답 : 감사합니다.



그녀는 중국에서 출발한 지 거의 6개월이 다 되어서야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남한 사회로 진출하였다.

정부는 북한이탈주민법에 따라 탈북자가 남한에 내려온 뒤 5년 동안 보호한다. 거주지 관할 경찰서의 신변 보호 담당 경찰은 주기적으로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탈북자의 초기 정착을 돕는다. 탈북자는 신변 위협 정도에 따라 3등급으로 분류해 다르게 관리한다. 하지만 탈북자들은 신변 보호 제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일종의 감시나 인권 침해 등으로 여겨 의식적으로 연락을 끊기도 한다.

그녀는 말했다. “솔직히 경찰이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려 들면 북한에서 지독한 감시가 떠올라 몸서리를 칩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남한 사회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열심히 노력해서 사이버대학을 졸업하고 보육교사 2급, 사회복지사 2급, 제과제빵 자격증을 땄다. 물론 취업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화학 제품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에서 영업 팀장으로 일한다.

어느덧 한국에 온 지 12년이 되었다. 중국에 남겨 둔 아들이 가끔 눈에 선하여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그녀는 회사에 자리를 잡자마자 하루 빨리 결혼해서 안정을 찾기 위해서 어느 결혼정보회사 사이트에 접속했다. 신청서에 결혼 희망 상대로 학교 교사나 회사원을 기재하고 회원으로 가입한 후 가입비 200만원을 송금하였다. 몇 번 회사가 소개해 준 남자를 만났지만 그들은 탈북자인 것을 알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그래서 옛날 회사에서 공원으로 일하는 중국 조선족 출신을 찾아가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초등학교와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들과 딸이 있다.

그녀는 먹고살려고 두만강을 건넜고 몇 년 후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동기는 없었다. 그때 뜬소문으로 듣기로는 한국에만 가면 살 집을 주고, 죽을 때까지 병 치료도 해주고,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평화스럽게 아무런 걱정 없이 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하나원 동기들이다. 그들과는 자주 연락하고 주말이면 만나서 커피도 마시고 치맥도 마신다. 그리고 북한 관련 정보도 교환한다. 그녀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동기들은 탈북자들 단체에 가입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에 나가기 때문에 북한 관련 소식에 정통했다.

그렇지만 탈북자는 가난하고 게으르고 농땡이라는 시선 때문에 괄시를 받는다. 그래서 일터에서는 처음부터 불이익이 시작된다. 임금이 최저 임금 이하로 깎이고 그나마 취업도 어렵다. 탈북녀는 주로 뒷골목 작은 식당에서 주인으로부터 온갖 괄시를 받으면서 일한다.

그녀는 한 번 경기도 북쪽 철원 출신인 것으로 이력서를 써냈었지만 그녀의 말투를 듣고 나서 금방 들통이 났다. 그래서 한두 번 보고 말 사람들에게는 경기도 사람이라고 하고 오래 만나야 될 사람들에게는 중국 조선족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북한에서 왔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녀는 하나원을 수료하면서 부여받은 주민등록번호를 어렵사리 변경하였다. 주민등록 뒷자리 3자리 (‘125’)가 하나원 주소지인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때문에 탈북자 출신이라는 것을 남에게 노출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기존 본적지인 ‘경기도 안산시’에서 새로운 본적지인 ‘경기도 철원’으로 변경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도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숨긴다. 아이들도 부모 모두 중국 조선족 출신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아이들한테 진실을 말해야 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모두가 잠든 늦은 밤이면 거울 앞에 서서 입에 볼펜을 물었다. 매일 한 번씩 입에 볼펜을 물고 어린이 동화책을 소리 내서 읽는다. 사람들을 만날 때 북한 출신이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면 말투부터 바뀌어야 한다. 남한 사람처럼 말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남한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부지불식간에 북한에서 쓰던 말투인, 가령 ‘이자 왔어? (지금 왔어?)’ ‘섟갈린다 (헷갈린다)’ ‘인차 와 (빨리 와)’ ‘남새 (채소)’ ‘날래 (어서 빨리)’ ‘일 없다 (필요없거나 싫다)’ ‘고뿌 (컵)’ ‘조동 (직장을 옮기는 것)’ 등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작성일:2021-06-28 11:51:59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