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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님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6-08 12:54:01
조회수
238
○○○님
(그는 절친이라고 할 수 있으나 10년 쯤 터울이 진 새까만 후배이기도 하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형…… 형……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그래? 그건 백수건달들이나 하는 거야.”)

내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신간 소설을 자네에게 건네면서 (오해는 하지 말게. 나는 항상 내 소설에 의구심을 품고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은 후 몇 세대 동안 소수의 진지한 독자들이 읽을 거라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있다네), 두서없이 이러저러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평소 버릇대로 요령부득의 말을 했을 거야.

그래서 追伸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사랑하는 아우님이라고 부르고 싶네. 그대가 동의한다면 말일세. 재벌 회사의 사장님이니까 얼마나 공사다망한지 잘 알고 있다네. 문학에는 눈꼽 티끌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 (자네 눈빛을 보면, ‘형님 책은 아직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어요.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네요.’) 그러니 새로 나온 소설을 건네는 게 정말 꺼려진다네. 하지만 자네에게 보내지 않는다면 엄청 결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 (우선 내가 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걸세.)

惠存
이 단어를 결국 생각하고 말았네. 그러므로 내가 책을 보낼 때는 읽으라는 뜻은 없고 글자 그대로 잘 보관해 달라는 의미만 있지. 그러니 책을 읽지도 말고 버리지도 말게.
내가 죽고 난 다음에 혹시 내 생각이 나거든 혹은 눈물나게 보고 싶거든 그때 이 책들을 읽어 보게나. 내 글 속에는 나의 지식과 경험, 지혜, 천재성의 편린 아니면 우둔함이나 어리석음, 온갖 감정, 사유, 의지, 뿌리깊은 본성, 특징들이 스며 있으니까, 그걸 읽으면 내 심장과 영혼 속에 어느새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나의 내면 속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악마도 느낄 수도 있을 걸세.

괴테가 말했지.
내 생각 속에서 내가 저지르지 못할 범죄는 없다.

내가 짐작하건대, 자네가 만약 내 글을 진지한 자세로 눈을 부릅뜨고 읽게 된다면, 나를 새삼 발견하려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것, (모든 글에서는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표면적인 것과 숨겨진 의미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니까) 행간에 숨어 있는 것, 나의 거친 숨결을 찾으려고, 다시 말하면 숨어 있는 내면의 자아를 찾으려고 노심초사하겠지. 자네만은 그러리라고 생각하네.

자네가 알 수 있겠나?
나는 고흥 바닷가 가난한 피난 시절에 대부분의 인간들이 견뎌내기 힘들었을 모멸감 (그래서 체홉은 ‘어릴 적 나는 어린 시절을 갖지 못했어.’ 라고 말했겠지만)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왔지. 그러므로 나는 문학을 경배하게 되었고 엄밀하고 경건한 태도를 가지고 격조 높은 문체에 집착하게 되었지.
소설에도 나름대로 엄격한 윤리가 있지. 내가 창조한 작중 인물들은, 살인자이거나 사기꾼인 경우에도 최소한 인간적 품위를 지니고 있지. 나는 언제나 자신의 인물들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대했지. 나는 플로베르처럼 내가 창조한 작중 인물에게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 실존 인물로 착각하는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말일세.
나는 작가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야기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네. 그렇다면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이기보다는 이야기하는 인간인 호모 나란스 (Homo Narrans)라고 할 수 있지. 인간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기억하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거야. 어쨌거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

러시아 작가 투르게네프가 말했었지. “너는 자신이 쓰려고 하는 소설의 등장 인물을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으며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가?” 나는 자네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내 소설 속 작중 인물로 설정할 수 없었다네. 내가 다시 뒤져봐도 없었어. (사실 자신이 모델이 된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 대부분 화를 내지.) 등장 인물을 만들려면 (다른 인물들과 뒤섞어야 하니까) 적어도 여러 명의 실제 인물이 필요하다네. 소설가는 인물화가처럼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니까. 소설 속 인물은 신뢰할 수 없고 복합적이고 모순투성이고 (내 경험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없지.) 감정이 풍부하고 조금은 지성적이고 그의 내면에는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어야 한다네. 그래야만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는 실존 인물을 그릴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자네는 너무 착해빠지고 정직해서 겁쟁이지.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네.) 그러니까 도저히 작중 인물이 될 수 없는 거야. 다시 말하면 인간적으로 매력이 없다는 말일세.

내가 글을 쓰도록 나를 이끈 것은 고독이라고 할 수 있네.
요즘엔 망각이 점점 더 빨리 찾아온다네.
자기 작품에 집착하지 않고 포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2018년 여름
서초동 사무실에서
작성일:2021-06-08 12:54:01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