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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에세이> 나는 논픽션 소설 (또는 역사소설)을 쓴다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6-08 12:53:08
조회수
379
나는 논픽션 소설 (또는 역사소설)을 쓴다



나는 (비판적 리얼리즘과 정확한 언어에 기초한) 다양한 법률적 쟁점과 우리가 법조계라고 부르는 특수한 세계의 이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사회소설의 일종인 법률소설을 쓴다. (물론 법률소설은 내가 처음 그렇게 이름을 붙였지만 과연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은 필연적으로 법적인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들 사건이 안고 있는 양가적 측면과 모호성, 복잡성을 소설로 형상화하는데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러면서도 소설이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엄숙한 통찰과 미학적 관점에서 냉철한 묘사, 섬세한 디테일 또는 진지한 문학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가.
나는 법과 정의, 법률 세계의 실상, 어두운 이면을 아주 잘 알고 있으므로 그런 것들을 피할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눈을 돌려 버릴 수가 없다. 우리 시대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면 법조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법적 차원의 고발을 하려는 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발산하려는 의도는 없다. 작가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으면서도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언제든지 지금, 여기, 우리에 관한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관점과는 전혀 관계 없이 실존적이고 구체적인) 사회적 조건들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필연적으로 사회소설을, 역사소설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논픽션 소설은 (특히 소설은 문학과 사회의 연관 관계라는 관점을 토대로 하여, 또는 문학작품을 역사적 사회학적 문서로 보는 일부 맑스주의 비평가의 관점에 따라 쓴) 비판적 리얼리즘에 의한 사회소설이고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자서전, 회고록, 여행기, 기타 논픽션은 유동하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담는데 적합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논픽션의 경우에도 인물의 생각과 느낌, 상상력은 실제 일어난 사실과 뒤섞이게 된다. 그러므로 논픽션은 현실 세계와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사실 (fact)에 대해서만 쓰는 게 아니다.
그런데 논픽션 소설은 단순한 논픽션이 아니고 본질적으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역사소설과 관계된다. 논픽션 소설은 미국에서 뉴저널리즘이라고 불리는 경향의 소설들과 유사하다. 허구적 인물과 허구적 플롯을 배제하고 작가의 관점, 윤리관, 사상과 경험적 사실을 결합한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논픽션 소설이건 역사소설이건 사회소설이건 간에 이들 소설을 쓸 때 나는 에세이형 소설을 쓴다. 소설에 에세이를 결합한 것이다. 에세이는 소설 쓰기에서의 ‘보여주기’ 보다는 ‘말하기’에 가깝다. 자유스럽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학술 논문 (treatise)과 다른 점은 그게 체계적인 완전한 논리적 실체라고 자처하지도 않으면서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라 일반 독자를 위해서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문학적 관점이나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일인칭 사소설은 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다. 사소설은 보통 일본 근대소설의 가장 독특한 형태로 간주된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에게 전수되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잡기는 했지만 말이다. 일반적으로 사소설은 단순히 작가 자신의 생활에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고백의 형태로 폭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통념화되어 있다. 작가 자신의 사사로운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작가의 감춰진 비밀을 까발리는 대신에 보통 사소한 신변사의 의미를 반추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아주 사소한 일들을 이러쿵저러쿵 까발릴 필요가 있을까?)
나는 2018년에 1987년 6월혁명과 2017년 촛불혁명에 관한 논픽션 역사소설인 「광화문 광장」을 종이책으로 발표했다. (다만 최신 버전은 블로그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에서 읽을 수 있다.) 2019년 역시 논픽션 소설인 고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와 관련한 구속 기소와 기나긴 재판 과정, 그 이후 그를 극심한 우울증과 죽음에 이르게 한 험난한 인생역정에 관한 「2019 즐거운 사라」와 유신독재라는 엄혹한 시대에 일어난 민청학련과 (비극적인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인혁당 사법살인 사건, 내가 존경하는 강신옥 변호사님의 사상 초유의 변론과 관련한 구속 사건을 함께 정리한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를 발표했다.
가장 최근에는 김재규 장군이 일으킨 혁명에 관한 단편소설「그날 밤의 비밀」, 「야, 그 얘긴 하지마」, 남북 분단 상황과 관련한 「남과 북」,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 김근태 의원이 당한 23일간에 걸친 지독한 고문에 관한 「자백과 고문」을, 「낙태와 대리모」를 인터넷에 올렸다. 그리고 2010년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살해하기 위해 탈북민으로 위장하여 남파된 공작원에 관한 장편소설 (가제) 「2010」을 썼다. 이 소설은 여지껏 출판사를 찾지 못했으므로 언제 출판될지는 기약이 없다.
우리는 시대의 침묵에 담긴 목소리와 절규, 외침을 들어야 한다. 그 시절은 아주 오래된 과거가 아니고 바로 얼마전이었는데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
논픽션 소설과 역사소설은 장르적 관점에서 그 개념을 규정할 때 어떻게든 구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는 실제 차이는 아주 애매하여 종이 한 장 차이도 없다. 서로 겹치는 것이다. 논픽션 소설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역사소설이 된다. 역사소설은 역사적 사실 또는 팩트를 기반으로 하면서 소설의 형식을 빌려 관련 인물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그들이 행동하게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게 되는데 이윽고 클라이막스에 도달하여 종착역에 이르게 된다.
역사 소설가는 소설 속에서 핍진성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가 선택한 시대를 철저하게 조사한다. 역사소설은 과거 시대의 충실한 재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과거 시대 역사적 사실을 적절하게 반영하여 현재의 삶을 비추어 보는 데에 그 본래적 의미가 있다. 역사소설에서는 역사적 상황과 인물들의 실존, 즉 실제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문학적인 수단으로 증명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의 시대를 오늘의 감각에 맞추어 재현함에 있어 어느 정도의 시대착오는 불가피해진다. 역사소설에 있어서 오늘날의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날의 작가이기 때문이다. 역사소설의 언어는 오늘날의 독자에게 지나간 시대를 가까이 접근시키는 것을 핵심문제로 하고 있다.
역사소설의 폐단은 역사적 소재를 낭만적으로 통속화한다. 그리고 역사적 인물을 영웅적으로 과장하거나 역사적 실재를 지나치게 개별화된 사생활의 영역으로 귀속시킨다. 김동인, 유주현, 박종화 등의 역사소설들은 역사적 소재를 통속적으로 낭만화시킨 보기들이다. (한용환 저, 「소설학 사전」 참조)
논픽션 소설 또는 역사소설은 팩트와 픽션 또는 픽션과 진실 사이에 놓인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작가의 시각과 관점이 은연 중에 또는 노골적으로 노출된다. 작가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관점에서 여과된 사실이고 선택된 사실이다. 그리고 가끔(그래서는 절대로 안되지만) 독자들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수정, 왜곡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조금 더 높은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조작은 불가피하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졸저, 「최인훈의 ‘광장’ 다시 읽기」 참조. 이 책 전문은 블로그 https://blog.naver.com/jungwon4760 에서 읽을 수 있다.)
진짜와 가짜를 뒤섞으면 가짜보다 더한 가짜가 된다.
우리들이 그들 사건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시대의 에피소드 또는 가십거리로 전락하여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썼다.
그 소설들에 있어서 내 역사적 관점이 천편일률적이어서 뻔했는지, 어떤 편향에 사로잡혀 외눈박이였는지, 선악의 대결로 몰고 가면서 납작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관점에 서지 않으려고, 그래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 서려고 노력했지만 불가피하게 주관적이었고 선택적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 그 소설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 되었다.
작성일:2021-06-08 12:53:08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