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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제목

<유중원 대표 단편선> 어머니와 딸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5-25 10:10:28
조회수
503
어머니와 딸



이 세상에는 딸만큼 귀찮고 짐스럽고 다루기 힘든 것도 없다.
─ 메난 드로스

소녀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 명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기 어머니이다.
─ 버나드 쇼





1. 공황장애
그녀는 톨 게이트를 지나 직선도로에 들어서면서부터 막 속력을 내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백미러를 보는 순간 어머니의 죽은 얼굴이 언뜻 어른거렸던 것이다. 핸들을 잡은 손이 벌벌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심장이 곧 멎는 줄 알았다. 도저히 운전을 할 수가 없어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겨우 차를 세웠다. 한 시간쯤 차 안에 앉아 있었더니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기억을 더듬어 가장 가까운 대형 병원을 생각해냈다. 그러고 나서 즉시 차를 몰고 그 병원 응급실로 갔다. 이런저런 검사를 다 받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그 이후부터 운전 중에 차가 속도를 내거나 터널로 들어가거나 폭이 좁은 고가도로를 지날 때면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녀의 병은 ‘공황장애’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불안 증상을 가리킨다.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무대 공포증이나 스트레스가 무척 많은 가수, 탤런트, 배우 등 유명 연예인들이 많이 앓고 있다.
공황장애는 통계에 의하면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많다. 여성이 두 배 정도 많은 나라도 있다. 공황장애의 전조 증상은 공황 발작이다. 공황 발작은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고 식은땀이 나는 증상이 한 가지 또는 두 가지 이상 나타날 때를 말한다. 공황 발작이 반복되면 공황장애가 된다. 공황장애는 평온한 상태에서 갑자기 발작하는 경우는 드물다. 방아쇠는 극심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가 지속되고 반복되면 뇌의 편도체가 비정상적으로 자극을 받아 고장이 난다. 편도체는 스트레스를 관장하는 부위로 공포를 느낄 때 활성화된다. 별다른 자극이 없는데도 공포 반응이 일어난다.
그런데 지나친 음주도 공황장애를 유발하는 원인의 하나다. 사람이 많은 곳을 가기보다 혼자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면 공황장애 위험이 올라간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정신적 불안 지수가 높아졌다가 상황이 종료되면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에서 과도하게 높아지거나 스트레스가 끝났는데도 불안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공황장애다.
일반인에게 공황 발작이 있어도 그것이 공황장애 증상이라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그래서 진단이 늦어진다. 숨은 공황장애 환자이다. 공황 발작을 경험한 사람은 다시 발작이 올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를 ‘예기 불안 (anticipatory anxiety)’이라 하는데 이 때문에 직장, 학교 등 사회생활에 큰 문제를 겪게 된다. 주로 터널, 엘리베이터, 지하철, 비행기처럼 일상생활과 밀접한 폐쇄적 공간에서 공황 발작과 예기 불안이 나타나기 쉽다. 공황장애 환자 10명 중 4명은 우울증 환자, 4명은 알코올 중독자라는 보고도 있다.
그녀는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정신과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꼬박꼬박 먹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심장이 막 뛰고 불안한 증상이 개선되지 않았다.
공황장애 치료법은 두 가지다. 첫째, 약물치료다. 6~12개월 정도 항우울제 (SSRI,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계열)와 항불안제 (벤조디아제핀 계열)를 함께 투여한다.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물은 불안감이 심한 기간에만 사용한다. 단계적으로 용량을 줄이기 때문에 중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둘째, 인지행동 치료다. 공황장애의 특징을 교육받고 호흡법 등을 통해 스스로 이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한다.
공황장애를 치료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술이다. 그녀는 숙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지하철을 타고 어디를 가다가 공황 발작을 경험했다. 가슴이 아프고 죽을 것 같아 지하철에서 내려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어떤 스트레스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느낄 때면 그때마다 술을 마셨다. 전날 밤에도 과음을 했던 것이다.


2. 알코올 중독
그녀는 자괴감을 잊으려 또 술을 찾았다. 항상 딱 ‘한 잔만이야’로 시작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방안에는 술병이 수없이 나뒹굴고 있었다. 수차례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도 스스로 증상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밖에 나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 소위 말하는 소셜 드링킹은 아니다. 집에서 혼자 마시는 키친 드링킹으로 증상을 키웠다. 게다가 과음 후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전혀 없었다. 그녀에게는 가까운 지인도 별로 없었고 가족과도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으므로 주변 사람들이 알코올 의존 증상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술에 취한 채 화장실에 다녀오다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해 병원에 실려 갈 정도가 되어서야 알코올 의존 증상이 심각한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과는 뒤늦게 결혼하고 나서 성격 차이로 불과 몇 년 지나서 이혼하였다. (실제는 성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 원인은 전적으로 그녀에게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시도할 때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며 몸이 차갑게 굳어버렸다. 그때마다 남편은 화를 벌컥 내면서 방을 뛰쳐 나가버렸다.)
이혼이라는 충격적인 사건 때문에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갖게 되었고 그 질환들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알코올을 마치 치료제처럼 자가 처방하다 알코올 의존 증상이 나타났다. 그녀는 그때부터 알코올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래서 다니던 좋은 직장에 사표를 냈다. 그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알코올 중독으로 점점 진행되었다. 그때는 가끔 자살 충동을 느꼈다.
알코올에 중독되면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관장하고 충동적 행동을 제어하는 뇌의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 특히 여성은 남성보다 체내에 지방이 많고 수분이 적은 데다 해독에 필요한 알코올 탈수 효소가 부족하다. 따라서 술을 조금만 마셔도 혈중 알코올 농도가 높아져 뇌가 오랜 시간 영향을 받는다. 여성 환자에게 “술을 끊지 못하는 건 의지가 부족해서다”라고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랜 기간 몰래 이어온 음주 습관은 의존 단계로, 다시 심각한 중독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마지막 단계는 만성 알코올 중독이 되면서 상실된 기억을 자기가 만들어낸 환상으로 대체하는 심각한 기억상실인 코르사코프 증후군을 앓게 된다. 그런데 더욱 나쁜 것은 알코올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센 것을 찾으면서 결국 마약 같은 약물 중독으로 빠져들 수 있고, 그러면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만 아니라 완전히 패가망신하게 된다. 다행히 그녀는 그런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3. 요양 병원
그녀는 결국 알코올 중독이 불안 강박 증세로, 다시 중증 공황장애로 발전했다. 그렇게 사이가 서먹서먹했던 어머니가 죽고 나서 그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녀는 일종의 희열을 느꼈지만 곧 죄책감을 느꼈다. 연명장치의 경고음이 울릴 때마다 죽어가던 어머니의 여윈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때는 어머니가 무언가 마지막으로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도 짧은 단 한마디도 목구멍에서 끄집어낼 수 없는 상태였다.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너무 슬퍼서 참았던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하면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던 것이다.

아! 쓰디쓴 액체여!! 달콤한 악마여!? 술 한 모금을!!??

그래서 경기도 광주의 한 요양 병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그러나 혼자 걷는데 지장이 없고, 언어 소통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 외래 진료를 받아도 무방한 이른바 사회적 입원 환자다. 물리 재활 치료를 받지만 굳이 입원까지 할 필요가 없는 환자다. 혼자서 일상생활이 가능한 환자이기 때문에 간병인은 필요 없다. 스스로 라면 끓여 먹고 빨래하고 청소도 한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이렇게 시작된다.
새벽 4시 일어나서 샤워, 명상, 신문과 책 보기, 아침 먹고 물리치료, 점심 먹고 정신과적 치료, 저녁 먹고 TV로 영화를 보다 밤 10시 취침. 병원 생활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녀는 말한다. “집보다 병원이 더 좋다. 편리하니까”라고 병원 예찬론을 편다.
중소도시 외곽에 위치한 그 병원은 멀리 빽빽한 전나무 숲 때문에 어두워 보이는 산비둘기의 은거지인 뒷산을 배경으로 사방이 소나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사이로 풍부한 물줄기가 콸콸 넓은 들판으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집은 따로 없다. 이 병원 꼭대기 층인 5층 뒤쪽 병실이 사실상 집이다. 방안에는 창이 남쪽으로 크게 나 있고 여기저기 화분이 놓여 있다. 창틀에 운동화가 있고 빨래 건조대에는 수건, 속옷 등이 널려있다. 바닥에 마루가 깔려 있어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마치 가정집 같은 분위기다.
방안에는 여기저기 살림살이가 가득하다. 침대 옆에는 3단 책장이 있는데, 잡지, 시집이나 소설 등 여러 권의 책들, 틈이 날 때마다 소일거리로 끼적거리는 낙서 또는 온 정성을 다 바쳐 그리는 만화나 데생을 하는 두툼한 몇 권의 화첩, 복용하고 있는 약, 영양제, 가방 등 소지품이 놓여 있다. 좁은 탁자에는 고추장, 랩, 참기름, 두유, 커피, 유리컵, 커피 포트, 유산균 음료, 반짇고리, 때수건, 외출복 등이, 침대 링거 거치대에는 모자와 우산이 걸려 있다. 그렇지만 방 안은 깔끔하다. 모든 것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으므로 항상 지금 모습 그대로 있어야 하며 창문을 열거나 방문을 열면서 따라 들어오는 먼지들 외에는 어떤 것도 더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그녀의 공간은 3평 남짓이다. 그래도 혼자 살기에 충분한 독방이다. 여기서 의식주를 혼자 해결하면서 3년을 살았다.
이 병원에는 그녀 같은 장기 입원자가 10여 명이다. 병원이 집이 되면서 일종의 커뮤니티가 생긴다. 그녀는 그들을 나이에 상관없이 ‘언니, 오빠’라고 부른다. 체조, 노래 강습, 스트레칭 강습에 빠지지 않는다. 야외 운동으로는 배드민턴을 가장 좋아한다. 그녀는 “이런 건 밖에서 하기 어려운데, 병원에서는 다 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녀는 기초 수급자라서 진료비가 한 푼도 안 든다.
그들은 병원 생활이 불편해서 어떡하든 집으로 가려고 할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다. 오히려 “집보다 병원이 좋다”고 말한다. 대부분 고혈압, 당뇨병, 뇌졸중, 척추질환 등 만성병 환자들이다. 왜 병원이 좋을까. “식사 빨래가 다 해결돼요. 하다못해 전기세까지 복잡한 게 다 해결되니까 좋죠.”라고 말한다.
친구가 생기고 아파도 걱정이 없다. 83세 남자 환자는 “말벗이 있다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한다. 82세 여성은 “조금만 아파도 의료진이 ‘어디가 아프냐’고 묻고, 감기라도 걸리면 감기약을 즉시 지어주는데 어떤 자식이 그렇게 하겠어”라고 말한다. 외출, 외박도 자유롭다. 한 할아버지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여럿이서 장애인 콜택시나 일반 택시를 불러 나간다”고 했다.
이러한 사회적 입원의 가장 큰 이유는 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70세 할머니는 “죽어도 병원에서 죽어야지. 집이 없어 갈 수도 없어”라고 말했다. 88세 여성 환자는 “집에 가라고 할까 봐 죽겠어”라고 말했다. 집이 있어도 문제다. 어떤 환자는 8년째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곧잘 걷고 양손도 자유롭다. “이렇게 건강한데 왜 입원했냐”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는 “다시 쓰러질까 봐 염려돼 병원을 나가기 무섭다”고 말했다.
그녀는 가끔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시내의 술집으로 가서 치킨에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들어왔다. 어떤 날은 자신이 술에 견딜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서 물을 안주로 하여 소주를 2병 이상 마시기까지 했다. 그러고 나서 밤늦게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은 늦여름 장맛비가 억수처럼 내렸다. 막내 고모가 병원으로 처음 찾아온 것이다.
고모가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니. 아무 연락도 없이 병원에 숨어있다니.”
“고모님 죄송해요. 제 입장이 그래요.”
“내가 널 찾으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단다.”
“전……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너는 핸드폰이나 스마트폰도 없는 거니?”
“그게 있으면 안 되지요. 세상과 인연을 완전히 끊으려면 그게 없어야 해요.”
“얼굴은 좋아 보이는데 건강은 어떻다니?”
“아주 좋아졌어요. 여기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니까요. 누구하고도 엮일 일이 없잖아요.”
“그랬었구나. 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5년이 넘었구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얼마 후 네가 감쪽같이 사라졌으니까.”
“오빠 내외가 그렇게 더럽게 구니까 꼴보기 싫어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요.”
“네 오빠가 너무 심하긴 하지. 단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인데. 너희 엄마는 오빠만 싸고돌고.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그러지 말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지만…… 그런다고 엄청 싫어했지.”
“그걸 새삼스럽게…….”
“내가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네가 숨어있는 동안 많은 일이 벌어진 거지. 너도 궁금하겠지?
네 전남편 말이다…… 같은 학교 처녀 선생과 재혼해서 벌써 사내 애가 둘이나 된단다.”
“참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 사람 참 괜찮아요. 제 잘못이죠. 전 너무 여려서 상처받기 쉬웠어요. 그래서 성적으로 불감증이었던 거죠. 제가 본능적으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차갑고 융통성 없이 구니까 남편을 더 멀어지게 만든 거예요.”
“이혼할 때는 성격 차이라고 강조하더니……. 성격 차이 때문에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고 했었지 않니?”
“그게 그거죠 뭐.”
“결혼하면 뭐니 뭐니 해도 속궁합이 중요한 거야. 너희 둘은 그때 썩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거든. 모든 면에서 말이야.
혹시……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거 아냐? 불감증이 아니라 네 속에 남성적인 면이 들어있었던 거……?”
“제가 자신을 의심해 봤어요. 하도 어머니가 오빠를 싸고 도니까 저 역시 남자가 되고 싶기는 했어요. 남자로 태어났더라면…… 했어요. 그래서 남자애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의 옷을 입고 싶었지요. 하지만 여자에게 끌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심한 경쟁심이나 질투심만 느꼈거든요. 그러니 양성애자나 레즈비언은 애당초 불가능했어요.”
“그렇다면…… 짐작이 가는구나. 네 엄마가 널 그렇게 키웠으니까…….”
“고모님도…… 이제 와서 엄마 탓하면 뭐하겠어요”
“네 엄마가 시골 출신이었으니까 서울 남자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거야. 자신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데 아버지의 나긋나긋한 서울말씨를 들으면 황홀했을 거 아니겠어…… 그래서인지 아버지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순진한 아버지는 완전히 넘어간 거야.”
“아버지가 엄마한테 꼼짝 못 하긴 했었죠.”
“오빠는 그래도 명문대 의대를 나오고 성형외과 전문의 아니니. 마누라는 정신과 의사이고. 떵떵거리고 잘 사니까 부족한 데라고는 눈곱 티끌만큼도 없었는데.”
“저 잘난 맛에 사는 거죠.”
“그런데 그 많은 재산은 다 오빠한테로 가고…… 오빠는 시치미를 딱 떼고 있으니. 여기 와서 보니 네 사는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래도 옛날 옛날에는 부잣집 딸인데…….”
“절, 내버려 두세요. 어쩌겠어요.”
“네 오빠가 신사동 네거리에 큰 성형외과를 낸 거야. 처음부터 욕심을 부려 너무 크게 벌인 거지. 중국 관광객을 겨냥해서 여러 명의 브로커를 고용해 환자를 유인한 거야. 그런데 갑자기 사드인가……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서 관광객이 뚝 끊기고 폭삭 망한 거지.
뒷수습을 하면서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무슨 문제가…… 그게 의료사고가 났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검찰 조사도 받았는데 구속 직전까지 갔지만 검찰 출신의 유명한 변호사를 써서 다행히 풀려난 거야.”
“잠깐만요! 그런 일이 어떻게?”
“그렇지 뭐. 욕심이 지나친 거지. 아주 무모했어. 은행 돈은 물론이고 사채까지 끌어다 시작했으니…… 우리 동창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파다했으니까.”
“그 잘난 오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단 말이죠! 절대로 그런 실수를 하진 않을 거 같았는데.”
“완전히 망해버렸으면 속이 후련했을 텐데…… 사람 마음은 비슷하니까 너도 동감일걸.”
“그렇구 말구요. 오빠도 인생의 쓰디쓴 맛을 봐야한다구요.”
“그런데 이 말은 안 할 수가 없구나. 넌 알고 있었니, 원지동 쪽이 지하철이 통과하면서 엄청 뜨고 있는데 그곳에 네 엄마가 큰 땅을 가지고 있었더구나.”
“전…… 처음 듣는 얘긴데요.”
“네 엄마 속을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래서 네 오빠만 살판 난 거 아니니. 땅이 크니까 일부는 쪼개서 팔고 그 돈으로 남은 땅에 병원 건물 짓는다고 하더라.”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땅을 팔아서 그 빚을 해결하고 남은 거로 병원 건물을 짓는다는 거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던 건 네 엄마가 있었으니까.”
“고모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죠?”
“네 올케의 어머니하고 내가 여고 동창생 아니니. 모처럼 몇몇 사람만 모이는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그 여잘 만나게 된 거지. 원지동에 병원 짓는다고 얼마나 떵떵거리며 자랑하던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거야. 어머니 땅을 상속받아서 반은 팔아서 빚을 청산하고 남은 땅에다가 5층 건물을 지으면 1층은 커피숍으로 내주고 2층은 성형외과, 3층은 정신과 의원을 차린다는 거지.
그래서 내가 긴가민가해서 사람을 시켜 조사를 해 보았거든. 등기부 등본을 보니까 틀림없더라. 옛날 옛적에 네 아버지가 동생들 모르게 어머니 이름으로 사 놓은 거야. 그 시절에는 거기가 구석지에 있는 허허벌판이었으니 헐값으로 샀겠지. 용케 팔아먹지 않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은 거야. 지금은 신분당선이 지나가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니까 천지개벽을 한 거야.”
“엄마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되죠?”
“네 엄마에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할 건 없다. 이미 돌아가셨지 않니. 모녀간에는 항상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 깊은 갈등이 있는 법이니까.”
“저도 어머니 일은 지금쯤 깡그리 잊어버려야겠죠.”
“누가 아니라니…… 내가 너희 남매 문제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네가 오빠를 만나서 멱살을 잡고 따지든가, 정 아니면 소송이라도 해야겠지.”
이야기가 대충 끝나고 고모는 병원을 떠나며 핸드백에서 돈이 든 봉투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거 얼마 안 되지만 용돈이나……”


4. 어머니와 딸
그녀는 자기 병실에서 늦가을 비가 질척질척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고모가 다녀간 지도 석 달이 지났는데 아직 소송을 제기할지 말지 결정을 못 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빠가 크게 몰락했다는 말에 내심 안도하였지만 뜻밖에 불거진 그 땅 때문에 다시 재기할 수 있다는데 화가 났다.
그녀는 그때 대학에서 배운, 고통을 의미하는 ‘Schaden’과 기쁨을 뜻하는 ‘freade’가 합쳐진 독일어 단어 ‘샤덴프로이데’가 갑자기 떠올랐었다. 이 단어는 남의 불행이나 고통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잊고 있던 기억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지만 기억을 옛날로 돌이켜서 생각했다.
나는 내가 왜 이렇게 갈팡질팡하는지 모르겠다. 왜 세상과 거리를 두면서 홀로 사는 것에 이렇게 익숙한지. 왜 모든 것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는 건지. 왜 삶이 허망하면서 뜬소문처럼 느껴지는지.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무의미할 뿐이다.
내게 마음의 상처를 심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에게서 그런 타박을 들었다. 쌀쌀맞은 것, 냉정한 것, 저러니 정이 안 가지. 그렇게 말할 때의 엄마는 정말로 몸서리가 난다는 듯 치를 떨었다. 그러니 어린 마음에 나는 정말 차갑고 못된 아이인 줄 알았다. 나는 정말 차가운 여자인가보다. 그렇게 태어난 거지.
하지만 조금씩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 물정을 알게 되니까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표준에 가까운 여자아인데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엄마들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부당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나를 낳아준 친엄마가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계속 단정적으로 말하니까 서서히 나도 모르게 세뇌가 되어 갔다. 그러므로 엄마를 원망하며 남몰래 눈물을 흘리거나 엄마에게 따지면서 감히 대들지 못했다. 나는 여자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자괴감이 은연중 내 마음속 깊이 뿌리박혀 버린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엄마는 내가 남자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 너무 싫다고 불평한 적이 많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란 엄마는 남존여비 사상이 철저했고, 여자는 출가외인이고 결혼하면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내가 여고에 들어갈 무렵부터는 엄마는 아주 노골적으로 말했다. “그래, 넌 여자애야. 그걸 명심하라고. 여자는 좋은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해. 남편을 하늘처럼 알고 절대 순종해야 한다. 그러려면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지. 절대적으로 순결해야만 해.”
엄마가 엄숙하게 강조한 그 여자의 순결이라는 말은 모든 성적인 것에 대해서 굴욕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하였으니 나의 가슴에 대못이 박혀버렸다.
어떤 때는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마. 남자의 눈에 들고, 남자의 요구에 맞추고, 남자의 경제력에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지 말란 말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 메시지는 아주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하지만 어떤 때는 엄마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나에게 오랫동안 침묵으로 대했다. 침묵은 잔인한 학대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학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랬으니 엄마와 의사소통을 하는데 어려움이 너무 많았고, 오히려 다정한 막내 고모가 어머니처럼 느껴졌다. 엄마와는 그렇게 애매모호한 관계였으니 나는 당연히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엄마는 내가 잘못했다고 나무라면서도 구체적인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단 한 번 예외가 있었으니 중2 때 초경이 있을 무렵이었다. 화장실에서 얼룩진 팬티를 바라보며 몹시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슴이 봉긋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불편하고 거북하고 두렵고 혼란스러웠다. 그렇지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고 상의할 친한 친구나 언니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엄마가 말했었다. “절대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여자는 누구나 다 거치는 것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화장실에서 나올 때도 어디 더러워진 곳이 없는지 한 번 더 살펴보란 말이야. 혹시나 옷 어디에 묻지 않았는지 꼭 확인해야 하지.”
초경이 시작되면 내가 드디어 어른이 됐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까, 그때부터 여자는 나머지 평생 동안 살아갈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다. 사실 생리는 사춘기부터 시작해서 폐경기 이후까지 여성들의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매달 피를 흘려야 했으니. 가끔 심한 생리통을 앓았고 그래서 두려웠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생리가 중단되면서부터 정신적 속박에서 해방된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거의 본능적으로 오빠와 나를 눈에 띄도록 차별 대우를 했다. 오빠는 그때 온갖 특혜를 받으면서 특권층으로 살았다. 그렇지만 오빠와 나는 남매였으니까 어린 시절 사이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랬다. 오빠는 뛰어나게 공부를 잘해서 엄마의 큰 자랑이었으니까 나는 오빠를 부러워하고 시샘을 한 것은 사실이다.
나는 나이가 삼십이 훨씬 넘었을 때도 여전히 어린 시절 엄마의 모진 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란 작자가 한술 더 떠서 나의 열등감을 더욱 키웠다. 그랬으니 아무리 자기 스스로를 달래고 안심을 시켜도 내 마음 밑바닥에 새겨진 열등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한때는 여느 모녀 관계처럼 허물없이 엄마와 잘 지내고 싶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엄마와 화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진 않았다. 항상 거리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내 마음의 상처가 그 원인인지, 아니면 엄마가 아직도 나를 차다고 느끼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냉랭한 악순환이 여전히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지하실 계단에서 실족하여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고관절이 조각나고 무릎과 골반 뼈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가 병원 수발을 들어야 했다. 그 일을 자연히 내가 맡게 된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때는 내가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간병인을 쓰지 않고 돌보기로 한 것이다. 이 불행한 사고가 나에게는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엄마에게 평생 못 해 드린 딸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엄마의 그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기회로 본 것이다.
나는 비록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엄마의 마음만은 편안케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무렵에는 금단 증세를 치료하는 새로 나온 약을 충분히 먹으면서 이를 악물고 술을 끊었기 때문에 잠시 증세는 아주 호전되어 정상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앳된 티가 나는 둥그스럼한 얼굴에 잘 어울리게 머리를 짧게 커트하고 염색을 하였으며 얼굴에 화장을 하면서 핑크빛 립스틱을 바르고 몸에 꽉 끼는 청바지를 입었다.
자기 혐오의 감정에서도 벗어났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추락하자 굴욕감을 느꼈던 것이다. 내 자신의 강력한 의지로 이 불행한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 처음으로 엄마를 위해 애교도 부리고, 재롱도 떨었으니. 엄마의 몸 여기저기를 자꾸 주무르고, 등을 쓸고, 볼을 비벼댔다. 엄마의 몸은 이미 등짝은 딱딱하게 굳어있고 뱃살은 늘어지고 쭈글쭈글해져서 아무도 만져주지 않는 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불안해서 이따금 엄마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도무지 정이 안 간다던 딸에게 온몸을 맡기고도 한 번도 무슨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엄마는 그저 눈을 질끈 감고 나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도 이제 그만 생각하기로 단념했다.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든, 알게 뭐람. 나도 이제 마흔이 넘었어. 내 인생이 있는 거야.
어느 날 엄마가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말했다.
엄마가 마음이 아픈 이유는 아버지였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못 느꼈지만 점잖고 조용했던 아버지는 유독 어머니에게만은 쌀쌀하였다는 것이다. 자식들은 부부지간의 속내를 모르는 법이다. 자식을 둘씩이나 낳았지만 정을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밖에 다른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짐작하기로는 그 이유가 명문대 대학원까지 나온 아버지와 여고를 졸업한 엄마와의 수준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너무 많이 배워서 박식하고 매사에 빈틈없는 사람이라 무식한 아내가 눈에 안 찼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이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딸을 향해 은연중 발산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변명을 믿지 않는다. 그건 위선이고 자기기만일 뿐이다.
어머니는 진주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작은 회사에 다니던 중 노처녀 시절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순 서울 토박이였고, 명문대 대학원까지 나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옛날에 대학 나온 여자가 얼마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에는 남자들만 대학에 갔으니까 여자가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극히 보수적이면서도 성격이 강했으므로 아버지에게 절대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착한 아버지를 쥐고 흔들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머니는 자신이 여자이면서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전통적인 남존여비 관념에 익숙했고, 여자는 결혼하면 출가외인으로 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직 오빠만이 남자이니까 친자식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정형외과에서 대수술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고관절이 문제였다. 정상적인 생활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근 1년 동안 내내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신체적 기능은 현저히 떨어지고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게 되자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인지능력과 판단력이 저하되고 충동성과 약간의 공격성이 수반되는 증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서울 근교에 있는 요양 병원으로 옮겨 입원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치매 증상이 완전히 중증이어서 딸마저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어느 날 오빠 내외가 요양 병원으로 문병이랍시고 꽃바구니를 들고 찾아왔다. 그동안 거의 찾아온 일이 없었는데.
그때 오빠가 말했다.
“내가 병원 일 때문에 너무 바빴단다. 성형외과라는 게 스트레스만 많이 받고…… 옛날 같지 않으니까…….”
그녀가 말했다.
“용건이 뭐에요? 용건 없이 여기에 올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 피차간에 시간이 없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지. 너도 잘 알겠지만…… 어머니 재산이란 게 다 쓰러져가는 거여동 집밖에 없지 않느냐. 그동안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그게 변두리에 있는데 몇 푼이나 나가겠느냐. 어머니 예금은 전부 치료비에 들어갔고.
그러니까 네가 상속포기 각서를 하나 써주었으면 좋겠구나. 당연히 병원이 잘 되면 그 수익 중에서 생활비를 부담할 거야.”
“어떻게 그런 말씀을……?”
“잘 생각해봐.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한 일이야. 너도 그동안 너무 고생했는데 이제부터라도 편히 살아야 될 거 아니야.”
“편히 산다고요? 뭘 어떻게 해서…….”
“내가 하나뿐인 오빤데 널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니. 오빠를 믿으라니까.”
“그래도 될까요? 어머니가 아직은 숨이 붙어 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요? 오빠를 어떻게……? 그러면 다른 재산은 없단 말인가요? 뭘 알아야 포기할 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니까…… 왜 그러니? 오빠를 못 믿겠니. 내가 네 친오빠야. 그래도 우린 가족 아니니.”
“그래요. 우린 가족이군요. 가족이란 말을 참으로 오랜만에 듣게 되네요.”
“물론이고말고.”
그래서 그녀는 오빠가 이미 문안을 작성해 온대로 전 재산을 포기한다는 상속재산포기 각서를 써주게 되었다. 오빠는 이미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인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았기 때문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요양 병원에 입원한 지 1년여 만에 돌아가셨다.


5. 소송 ─ 자필유언장, 상속재산포기 각서, 유류분 반환 청구
그녀는 2018년 이른 봄, 변호사를 선임하고 나서 법원에 오빠를 상대로 상속재산 분할청구와 함께 유류분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다. 생전 처음 해보는 소송이었다. 그것도 오빠를 피고 (김명수)로 하여 자신이 원고 (김명자)가 된 소송이었다.
피고의 변호사는 그녀가 진즉 상속재산포기 각서를 썼다는 사실과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자필증서로 유언을 하였는데, 그 유언장에 의하면 모든 재산을 피고에게 주기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또한, 유류분 청구는 이미 시간이 지나서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머니가 자필로 쓰고 무인을 한 유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정형외과에서 대수술을 받았다.
이후로 요즘 몸이 부실하고 치매 증상마저 갈수록 심해지므로 언제 죽을지 몰라 이 유언장을 쓴다.
나는 배신감과 함께 인생의 허무감을 느낀다.
나는 송파구 거여2동 단독주택과 서초구 원지동 토지를 포함해서 내 모든 재산을 전부 하나밖에 없는 아들 (김명수)에게 물려준다.
딸은 출가외인으로 남의 자식이다.
그래서 재산을 한 푼도 물려줄 수 없으니 그렇게 이해하고 형제간 재산 분쟁을 하지 말 것을 유언한다.”

그녀의 변호사는 그 유언장을 작성할 당시 어머니가 치매 상태로 기억장애 증세를 보여서 약물치료를 받고 있던 점을 들어 유언장이 교묘하게 위조됐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필적 감정 결과 어머니 자필이 맞으므로 유언장은 유효하다고 판결하였다.
어머니는 옛날에 가계부를 꾸준히 쓰고 있었기 때문에 필적 감정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상속재산포기 각서의 경우, 상속의 포기는 피상속인 (어머니)의 사망 이후 상속이 개시되면서 일정한 기간 내에만 가능하고 가정법원에 신고하는 등 일정한 절차와 방식을 따라야만 효력이 있는데, 따라서 상속 개시 전에 한 상속포기 약정은 그와 같은 절차와 방식에 따르지 아니한 것으로 효력이 없다고 하였다.
(민법 제1019조는, ‘상속인은 상속개시 있음을 안 날로부터 3월 내에 단순승인이나 한정승인 또는 포기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편 유류분 소송의 경우, 원고에게 유류분 반환청구권이 인정되긴 하지만 원고가 어머니가 사망할 당시 상속이 개시된다는 점과 그 시점에서 모든 재산이 증여 또는 유증에 의해 피고에게 이전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상속재산 포기 각서를 쓸 당시에는 가족으로서 모든 재산 상황에 대해 포괄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1년의 기간이 경과하였으니 이 청구권은 시효로 소멸했다고 판단하였다.
(민법 제1117조는, ‘반환의 청구권은 유류분 권리자가 상속의 개시와 반환하여야 할 증여 또는 유증을 한 사실을 안 때로부터 1년 내에 하지 아니하면 시효에 의하여 소멸한다. 상속이 개시한 때로부터 10년이 경과한 때도 같다’고 규정하고 있다.)

유류분 제도는 망인이 유언이나 증여로 자녀 중 일부에게만 재산을 몰아줄 경우 나머지 상속인들의 생존과 생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생긴 제도이다. 가부장제 관습의 영향으로 실제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사문화됐던 유류분 규정에 따라서 소송을 제기하는 일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성들의 권리의식이 향상되면서 상속에서 제외되었던 여성들이 이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그러므로 생전에 자녀들에게 미리 증여하고 유언을 남겨 놨어도 나머지 자녀들이 부모 사후에 소송을 제기하면 자신의 유류분 (법정 상속분의 반)만큼은 무조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실제 유류분은 유언장보다 효력이 훨씬 강하다.
아! 위대한 여성들이여!! 부디 자신의 귀중한 권리를 행사하는데 주저하지 마시기를…….

원고는 1심에서 패소했다. 그날 검고 칙칙한 법복을 걸친 판사는 하늘처럼 높은 법대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건조한 목소리로 선고했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기각이라고…… 기각. 그녀는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하고 멍해지면서 머릿속이 완전히 텅 비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법정을 나설 때 다리가 후들거려서 걸음을 제대로 떼놓기도 힘들었다. 열흘 동안 밤낮으로 그날의 일을 곱씹으면서 망설이다가 항소하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1심 소송에서 패소하자 분노했고 항소심에서는 변호사를 바꾸기로 했다.
변호사가 말했다. “이왕지사…… 1심에서 하던 변호사가 계속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녀가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 도저히 신뢰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승소를 장담하더니만……. 그러면서 항소심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판사가 뭔가 오해했다고 했어요.”
“어떻게 된 거죠?”
“누가 소개해 줬어요. 사무장을 만났더니 대뜸 자기 변호사는 부장판사 출신으로 전관예우를 듬뿍 받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믿고 맡겼겠죠.”
“사무장이 아주 도도했어요. 뭐 싫으면 상관없으니 다른 데로 빨리 가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조급한 마음에 그렇게 된 거죠.”
“수임료가 엄청 비쌌을 텐데요.”
“그렇지요. 듣던 거 보다는 몇 배나……”
“좀…… 깎을 수는 없었나요?”
“부장판사 출신이니까 당연히 비싸다고 했습니다. 어중이 떠중이 변호사하고는 격이 다르다고 했죠.”
“전…… 전관 경력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중이 떠중이 변호사인 거죠. 그래도 괜찮나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변호사님이 다섯 번째입니다. 다들 무조건 자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더 믿을 수가 없었죠.”
“저도…… 별 수 없겠지요. 변호사도 장사꾼이니까요. 변호사를 소명으로 하는 게 아니죠. 밥벌이로 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이길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그게 나아요. 쓸데없이 허풍떠는 것보다는 말이죠. 전 소송비용으로 몰래 모아둔 비상금을 거의 다 털렸거든요.”
“전관예우와 법조 브로커 문제는 우리 법조계의 뿌리 깊은 병폐죠. 그게 하루빨리 없어질 수 있을까요? 하지만 국민들의 의식도 문제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소송은 처음이니까 당황했었죠. 다들 전관예우를 들먹이더라고요. 그래야만 된다는 거예요.”
“잘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소송에서 패소하면 속이 많이 상하겠지요. 소송이란 게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데 말이죠. 그래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겁니다.”
“재판을 받아도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으니까…… 세상에 억울한 사람이 참으로 많겠구나…… 소송에서 뭐가 문제가 된 거죠?”
“그 변호사는 나름 열심히 했겠죠. 아주 거금을 받았으니.”
“저도 대학은 졸업했죠. 시시한 대학이지만. 그런데 판결문은 아무리 읽어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판결문…… 그건 수수께끼에요.”
“글쎄 말입니다. 법률 전문가인 변호사가 읽어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요.”
“판결문은 누굴 위한 거예요?”
“판사를 위한 거겠죠. 그러니까 판사의 구구절절한 자기 변명인 거죠.”
“법률이건 판결문이건 너무 어려워서 국민을 농락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어려워야 하죠?”
“쉽게 쓰는 게 가장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판사들은 쉽게 쓸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되면 권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애초부터 쉬운 것은 쓸데없이 어렵게 만들려고 무진 애를 쓰지요.”
“용어가 너무 낯설어요.”
“그 법률 용어가 모두 일본 거에요. 그걸 모방도 아니고 그대로 훔쳐온 거죠.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요.”
“일본 쪽에 양해는 구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 뻔뻔스러운 거죠.”
“항소심은 어떻게 될까요? 포기할까…… 그렇게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니까 너무 억울했습니다.”
“그걸 아셔야 합니다. 법률이 만능이 아니에요. 법률가도 그렇죠.”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이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죠? 법은 만인에게 평등한 거 아닌가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상식에 맞지 않는 법, 시대에 뒤떨어진 법, 부당하고 불공정한 그런 법이 수두룩합니다.
그런 법을 운용하는 사람들 역시…… 그중에는 악덕 변호사, 무능한 검사, 불량 판사가 있을 거 아닙니까.”
“변호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그게 진실인 거죠. 이건 말씀드릴 수가…… 제가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만약에 말입니다. 행운이 저를 찾아와서 제가 승소한다면…… 승소 사례금은 어떻게 되는 거죠? 1심 변호사는 그걸 엄청나게 요구했거든요.”
“저도 그걸 받아야겠죠. 저에게는 일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만약 승소한다면 승소금액의 5프로를 받겠습니다.”

항소심을 맡은 그 변호사가 가급적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판결이 선고되고 나면 이긴 쪽은 판결문을 거의 읽지 않습니다. 이겼으니까요. 하지만 진 쪽에서는 한 자 한 자 철저히 읽게 되죠.
기록을 검토해 보니까 유류분 부분이 약간 미심쩍어요.
변호사가 거길 간과했거나…… 하여튼 간에 입증을 소홀히 했을지 모르겠네요. 좀 더 따지고 들어가 봐야 하는데. 판결문을 보면 판사가 그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약간 얼버무렸습니다. ‘…… 주장에 부합하는 증거는 믿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했습니다. 판사들은 결론에 자신이 없으면 그렇게 씁니다. 일종의 공식처럼 되어있어요.”
“검토한 내용을 자세히 좀……”
“글쎄요…… 쉽게 설명한다는 게 정말 어려워요.
첫째, 원고가 작성한 상속포기 각서는 그 효력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건 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고 대법원 판례가 법의 취지를 확실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심 재판부도 그 부분은 정당하게 인정을 한 것입니다.
둘째, 어머니는 유언증서를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자필 유언증서의 경우에는 원래 유언자가 그 내용을 쓰고 연월일, 주소, 성명을 자신이 스스로 쓰고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유언자의 주소나 이름 등은 반드시 유언 전문이 쓰여진 같은 종이에 기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유언증서로서 일체성이 인정된다면 그 전문을 담은 종이와 연결된 종이에 기재하더라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장 대신에 지장을 찍어도 상관없고 유언증서에 문자를 삭제하거나 지우거나 삽입하거나 변경을 하거나 할 때도 유언자가 이를 직접 쓰고 도장을 찍어야 하나 유언증서를 보아도 너무나 명백히 틀린 부분을 정정할 경우에는 그 정정 부분에 도장을 찍지 않아도 효력에 영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작성한 자필증서는 당연히 유효한 것이고, 뿐만 아니라 필적 감정 전문가가 어머니의 가계부에 나타난 필체와 유언장의 필체를 비교해 보고 일치한다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더 이상 문제 제기를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글씨체는 상당히 달필이에요. 어머니 글씨인 것을 인정하시겠죠.
어머니가 스스로 유언증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그 효력이 인정되어서 원래는 상속재산을 오빠와 반반씩 나누어서 차지해야 하는데 그게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셋째, 유류분 청구의 경우 1년의 시효가 지났다고 하니까 그 점은 조금 억울합니다. 시효가 너무 짧아요. 물론 시효가 진행되는 것을 손쉽게 막을 수는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시효의 중단이라는 것입니다. 재판까지 안 가도 말입니다.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팩스로, 문자를 보내서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면 되는 거죠. 이를테면 말이죠…… 권리 침해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반환 청구의 의사표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률은 너무 어려워요. 유류분인가 뭔가가 인정된다면 어떻게 된단 말씀인가요?”
“다시 말씀드리면…… 자필 유언증서가 무효가 돼서 상속이 인정되었더라면 원지동 땅의 반이 원고에게 반환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유류분 청구만 인정돼도 4분의 1은 반환이 되니까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다니까요. 오빠와 관련해서 좀 더 이야기를 해보죠. 오빠가 병원에 문병 온 것은 아마 포기각서 때문이었겠죠. 그리고 훨씬 전에 원고 몰래 어머니를 만나서 유언장을 받아냈겠죠. 치매 환자도 초기에는 가끔 제정신이 돌아오거든요. 오빠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어머니는 오빠라면 깜빡 죽으니까 아무런 이의 없이 오빠 원하는 대로 써 주었을 거예요.”
“그렇군요……”
“오빠는 비열한 인간이죠. 병든 어머니를 내팽개치고 평생 용돈 한번 준 적이 없어요. 그래도 어머니는 하늘처럼 떠받들며 아들밖에 몰랐단 거 아니에요.”
“혹시 말이죠, 오빠가 단 한 번 병원에 온 이후에 오빠와 통화한 일 있던가요? 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장례식 때나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그 뒤치다꺼리 때문에 오빠와 만나거나 통화한 사실이 없었나요? 그때 원지동 땅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던가요?”
“그렇지요.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딱 한 번 통화한 사실이 있지요. 왜냐하면 장례식 비용 때문이었지요.”
“장례식 비용이라구요?”
“오빠가…… 오빠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네요. 창피하죠. 그때 그가 장례식 비용을 반반씩 부담하자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요?”
“제가 이야기했죠. 재산 포기까지 하였는데…….”
“그러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그래도 같은 자식이니까 반반씩 부담하는 게 당연하다고 했어요. 그게 인간의 도리라고 말했어요.”
“병원비는 누가 부담했었죠?”
“그건 어머니의 통장에서 전부 나왔어요. 그래서 오빠는 단 한 푼도 부담한 게 없었죠.”
“그랬었군요.”
“제가 절 좀 내버려 두라고…… 건들지 말라고…… 엄청 악을 쓰니까 전화를 그만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더라고요.”
“오빠가 엄청 열을 받은 거군요.”
“그 인간이 엄청 화를 냈죠. 그리고 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얘기는 안 했다는 거죠? 그렇다면 소송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거네요.”
“그럴까요? 하늘이 무심하지 않나요?”
“그러면 말이죠, 잘 한번 생각해보세요. 상속할 당시 당연히 원지동에 땅이 있다는 걸 알았을 거 아녜요? 가족들이 재산 관계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다는 건 그건 일종의 상식 아니겠어요? 그러고나서 그 각서를 쓴 거겠죠.”
“그건 정상적인 가정…… 그러니까 화목한 가정에서나 가능할 겁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우리 집은 어머니와 오빠 뿐이었죠. 저는 딸자식이니까 완전히 제외된 거예요.”
“그럼…… 언제쯤…… 알게 된 건가요?”
“전…… 까마득히 몰랐어요.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그래서 포기각서에는 막연히 모든…… 재산 인가, 전…… 재산 인가 그렇게 쓴 거죠. 원지동 땅 이야기는 오빠가 완전히 숨겼어요. 내가 알면 안 되니까 쉬쉬한 거예요. 고모님이 병원으로 면회를 와서 처음 듣는 얘기였어요.
고모님도 그걸 안게 얼마 안 되었구요. 실제 따지고 보면 고모님은 그 사실을 알자 그걸 알려주려고 저를 찾은 거죠.”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고모님은 누구 편이에요?”
“당연히 저를 편들겠죠. 고모님은 오빠인 우리 아버지와는 사이가 엄청 좋았어요. 큰오빠하고 막내 여동생 사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닌 엄청 싫어했죠. 오빠는 더욱 싫어했고요.”
“그렇군요. 고모님이 증인을 서줄 수 있을까요?”
“그건 틀림없습니다. 비록 여자이지만 정의감이 투철하고 정직한 분이니까요. 증인으로 나와서 정직하게 증언을 할 겁니다.”

항소심에서는 원고의 유류분 반환 청구권의 행사가 인정되었다. 원고가 원지동 땅에 대해 안 시점이 고모가 면회를 온 2017년 가을경이었고, 어머니가 자필 유언장을 쓴 사실은 소송이 제기된 후 피고가 그 유언장을 법원에 제출했을 때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여백 餘白
원지동 땅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지하철 신분당선이 통과하면서 상전벽해가 되었다.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오빠는 400평의 대지 중 이미 250평을 팔아서 신사동 네거리 부근에서 무모하게도 크게 벌였던 병원이 사실상 도산하면서 지게 된 큰 빚을 전부 갚고 남은 돈으로 150평 대지에 5층 병원 건물을 지으려고 서초구청에서 온갖 자질구레한 서류 절차를 거쳐 건축 설계도 끝내고 건설 업체와 공사 계약도 이미 체결하였지만 이게 완전히 무산되게 되었다. 100평을 동생에게 반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기로 하면서 요양 병원을 나왔고 막대한 유산으로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면서 부푼 꿈에 들떠있다.
작성일:2021-05-25 10:10:28 14.32.9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