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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의 말 ―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5-25 10:09:31
조회수
394
작가의 말 ―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지금, 우리는 하릴없이 여기 서 있지만…….
길 잃은 양 떼.
21세기는 벌써 5분의 1이 지나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이고. 조만간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문학사적으로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진즉 지나서 지금은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서구 문학을 기준으로 할 때 20세기를 흔히 문학의 모더니즘 시대라고 한다.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美는 시대 상황이 바뀌면 형식을 달리한다며 예술의 역사성을 강조했다. 모더니즘은 시대가 변했음을 전제로 과거를 파괴하는 아방가르드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모더니즘이라는 용어는 논자마다 자기 편리할 대로 다르게 사용하므로 그 개념이 참으로 애매하긴 하다. 그렇다면 포스트 모더니즘이나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은 더욱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한 대로 같은 예술가 안에서 모던한 순간과 포스트 모던한 순간이 공존하기도 하고 번갈아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의 현상을 말한다는 의미에서 모더니즘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더니즘과는 결별하고 아주 동떨어진 대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나는 여기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철학 사상적 층위에서 해체주의나 구조주의와 관련한 후기 구조주의 관점에서 논의할 입장에 있지는 않다. 단지 post의 의미를 ‘넘어서 (trans)’ 또는 ‘반대 (anti)’라는 것이 아니라 ‘이후 (after)’라는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아주 전위적인 관점에서 최신의 사상적 유행으로 파악하거나 반대로 계몽주의 이후 성립한 이성주의적인 사회규범과 의식, 전통적 체계를 해체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문학에 있어서는 포스트 모더니즘이건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이건 어떤 경우에도 결코 리얼리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모더니즘은 종래의 고리타분한 낭만주의와 그것을 이은 소설의 전성시대인 19세기 사실주의를 탈피하고 새로운 예술 및 문학의 전통을 수립한 문학적 혁명으로 간주 되었다. 모더니즘은 문학 작품의 내용, 사상이나 관념보다 그 문체나 구조 등 기법을 더욱더 강조했다. 특히 1922년 제임스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유간접화법을 활용하여 내적 독백 기법을 발전시킨)「율리시즈」와 T.S. 엘리엇의「황무지」의 출현은 모더니즘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나타난 장 폴 사르트르에 의한 실존주의 (Existentialism)의 대두, 그리고 (당초에는 그 구별이 어려웠던) 사회적 리얼리즘의 유행, 그것들을 기반으로 한 참여문학 혹은 앙가주망 (Engagement)은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며 문체나 구조 등 형식에 경도된 모더니즘을 현실 도피적이고 ‘말장난을 한다’고 극도로 경멸하였다.
누군가는 「율리시즈」에도 말장난이 많지만 「피네건의 경야」는 줄거리도 없으면서 전부가 말장난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책은 읽을 수도 없는 책, 어떤 독자도 끝까지 읽을 수 없는 책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소위 고급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문학 작품들은 그 내용은 빈약하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형식에 있어서는 읽어나가기가 무슨 암호를 푸는 것처럼 난해하니까 일반 독자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소위 말하는 전문 문학 비평가들의 연구서로 전락한 것이다.
그때 반짝 나타난 모더니즘은 자기중심적이었고 자폐적이었다. 그들의 형식 실험은 문학사에 흔적을 남기긴 했지만 문학적 유파나 문학사조로서 생명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독창성을 우상처럼 간주하는 작가들에게는 문학적 형식에 매달리는 잔재가 남아있지만……. 하긴 모더니즘의 유명한 슬로건이 ‘나를 놀라케 하라’이니까.)
결국 서사의 중심은 뭐니 뭐니 해도 예술성이라는 미학적 감동과 문학적 깊이가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에 형식보다는 내용이어야 하고 story telling이어야 한다. 이야기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재미와 감동, 사상과 관념, 악과 선, 희망과 절망, 상처, 유혹, 거부, 구원, 교훈을 줘야 한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로 접어들었는데 불가피하게 다시금 (소설이 다른 장르를 압도했다는 의미에서 소설 제국주의 시대인) 19세기의 전통적 사실주의 또는 자연주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의 전통 ― 라블레의 블랙 유머에서부터 시작하여 플로베르, 발자크, 에밀 졸라와 프루스트로 이어지는 리얼리즘 소설들은 프랑스 사회를 최상층에서부터 밑바닥까지 구석구석을 탐구하여 문학적 서사로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어떤 종류의 소설이건 간에 소설은 리얼리즘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리얼리즘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초현실주의는 현실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시 말하지만 story telling은 어떤 형태이든 도저히 리얼리즘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소설 미학에서는 형식과 내용은 떼어낼 수 없는 일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형식은 내용을 위해 존재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실체보다는 현상과 소설 작품의 양상을 강조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형식의 기능은 새로운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미적 특성을 이미 상실한 낡은 형식을 교체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낯설게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식주의자들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오로지 기법 (technique)이나 기교에만 집중한다.
그런데 새로운 테크닉은 처음 등장했을 때는 신선했으나 그게 눈에 익숙해지면서 또한 모방을 거듭하면서 이제 낡은 것이 되고 그러면 독자들은 짜증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그게 바로 클리셰 (Cliché)이다. 클리셰란 ‘짜증 유발자’를 의미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건축가 찰스 젠크스 (Charles Jencks)의 말을 인용한다. 포스트 모던 건축물과 예술 작품은 고급 코드를 사용하는 소수 집단과 엘리트 대중은 물론이고 대중적 코드를 사용하는 다수 대중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모더니즘은 반사적 효과로 (예술은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 예술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 예술가는 민중 문화 창조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래서 형식주의자들을 맹렬하게 공격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Socialist Realism)이건 마술적 리얼리즘 (Magic Realism)이건, (주로 일상적인 현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형상화하면서 주관을 극도로 배제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사진처럼 극명하게 실재를 구성하는) 극사실주의 (Hyperrealism)이건 네오 리얼리즘이건, 더러운 리얼리즘 (Dirty Realism)이건, 비판적 리얼리즘이건, 뉴저널리즘 소설이건, 실험적 소설 (experimental fiction)이었던 누보 로망이건 간에 리얼리즘이야말로 소설 문학의 근본임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문학이나 예술에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무분별할 정도로 아주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리얼리즘은 현실의 정확한 표상을 제공한다는 예술의 창작 방법을 지칭하기도 하고 어떤 예술적 유파의 명칭일 수도 있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를 뜻하기도 하고 동시에 양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작중 인물들과 그들의 삶을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자연주의 (Naturalism)는 리얼리즘 내부의 문학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 소설가 조지 무어가 이제까지 문학에는 리얼리즘 이외의 다른 유형의 문학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가 의미하는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
나는 스스로 비판적 리얼리즘에 경도된 리얼리스트라고 자처한다. 하지만 아무리 예술이 없다면 인간과 사회는 짐승이나 정글과 다름없다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적 또는 추상적 예술은 예술이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정직해야만 한다. 폐쇄적이고 공허한 일그러진 추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추상은 예술의 진수인 디테일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적 가치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인간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한다.

그러나 나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21세기 빛나는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다. 이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통과해버린 것이다. 컴퓨터와 AI와 스크린이 지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물론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은 리얼리즘과 완전히 결별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는 독자의 이해를 의식적으로 방해하기 위하여 줄거리는 파편화되고 초현실적인 스타일로 쓰여 있으므로 비사실주의적이고 실험적인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문학 비평 이론에서 가끔 사용되기는 하지만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용된 예를 찾을 수가 없으니 내가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의 경계는 아직 확실치 않다. 여기에서 나는 이 용어들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한 시대의 예술사조는 시대가 바뀌면서 진부한 과거가 된다.
지금 현재는 완연히 시대의 변곡점에 와있다.
컴퓨터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비약적인 기술 발전, 월드 와이드 웹과 함께 인터넷의 광범위한 사용에 따른 소셜 미디어의 등장, 하이퍼텍스트 (hypertext)의 등장, 짧은 단편소설 (short-short story), 아주 아주 짧은 소설인 마이크로픽션 (microfiction)과 플래시 픽션 (flash fiction)의 유행, 형식에서 자유로운 짤막한 에세이인 causerie의 유행, 네이버와 카카오 같은 콘텐트 공룡의 출현과 웹 소설, 웹툰, 게임, 캐릭터의 대유행, 디지털 기술 덕분에 자기의 삶을 자동으로 기술하는 (작가와 화자와 작중 인물이 동일한) 자전적 소설인 오토픽션 (autofiction)의 등장, 디지털 시대의 거의 마지막 단계인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인 것처럼 사용하는 포노 사피엔스인 MZ 세대와 AI의 등장은 일찍이 보지 못했던 극적인 변화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어쩔 수 없이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복제품이 현실이 되었다. 수많은 복제품이 끊임없이 증식하는 현실에서 원본이라는 것은 이미 그 유일무이한 의미를 상실했다. 특히 시각 예술에서는 복제품이 연속적으로 반복해서 복제품을 낳고 있으니 원본은 아무 데도 없다. 디지털 사진의 복제품은 원본과 차이점이 전혀 없으니 똑같이 원본이고 똑같이 복제품이다. 다만 예술가들은 법적 소송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변주하며 표현을 다시 해서 내놓는다. 소재를 다른 형식이나 장르로 가져가고, 확대하거나 축소시키면서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에 있어서는 문학 텍스트 역시 고정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텍스트는 내부적 또는 외부적 맥락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기 때문에 더 이상 단일하고 고정된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동성과 불안정성이 현대 텍스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는 저자 스스로 수정을 거듭하면서, 편집과 번역의 과정을 거치면서, 연극의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가 되면서, 표지, 저널리즘의 광고, 비평, 해설의 과정에서 작품의 변화와 변형은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에서 종이에 의한 고정된 출판물은 한계가 있고 ‘정본 (正本)’이라는 의미는 퇴색되었다.
프랑스 작가 에드몽 자베스 (Edmon Jabès)는 장르를 규정하기 어려운 작품을 썼다. 그러니까 장편소설도 아니고 시도 아니고 에세이도 희곡도 아니면서 그 모든 것을 종합한 것이다. 단편들, aphorism, 대화, 노래, 논평 등이 모자이크로 합성되어 있는데 다만 주제를 중심축으로 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그 주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하면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장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네 명의 프랑스 작가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자크 데리다는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에서 나온 작품치고 자베스의 텍스트에서 그 선례를 가져오지 않은 작품은 없다’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마크슨 (David Markson)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This is Not a Novel」는 거의 전적으로 다른 작가들의 문장으로만 구성된 책이다. 출처를 밝힌 문장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의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제멋대로 짜깁기한 문장도 많다. 그러면 윌리엄 버로스 (William Burroughs)의 컷업 기법 (Cut-up Technique)은 어떠한가? 그건 저자이건 독자이건 간에 텍스트를 제멋대로 잘라낸 뒤 재배치해서 시공간의 연관 없이 툭 끊어지는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로버트 쿠버가 주도한, 21세기 새로운 소설 양식인 하이퍼 픽션 (Hyper-Fiction)은 문자와 음향, 동영상 등을 결합하고 하나의 텍스트 안에 다양한 서사구조를 담는 양식으로, 일정한 시작도 끝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흐름도 없다.
반소설 (Anti Novel)은 전통적인 소설의 개념을 부정한다. 새로운 수법에 따른 실험 소설을 추구한다. 명백한 플롯의 부재, 산만한 에피소드, 많은 반복, 단어나 구두법, 문장의 실험, 분절된 페이지들, 카드놀이처럼 뒤섞여진 페이지들, 채색된 페이지들, 비어 있는 페이지들, 콜라주 효과의 극대화, 그림이나 그림 문자를 사용한다. 일관되고 특정한 줄거리가 없으므로 줄거리를 무시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줄거리의 구성은 독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작가와 읽는 사람인 독자 사이의 사회적 구분이 모호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할리우드식 집단 창작에 의한 ‘소설 공장’이 탄생했다. 흥행을 보장하는 데이터를 활용하여 공동 집필 시스템에 의해 소설을 대량 생산하는 것이다. 메인 작가, 줄거리 PD, 문장만 쓰는 보조 작가 등이 분업화, 협업화 해서 주로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이 등장하는 판타지 로맨스, 여고생이나 여대생이 주인공인 1인칭 소설을 공장처럼 빠르게 대량 생산해서 공급하는 것이다. 바로 모바일 웹 소설 플랫폼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유명한 작가는 유능한 프로그래밍 능력을 갖춘 해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작가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기술에 숙달해서 그 기술을 활용하여 웹을 해체하고 재창조하면서 즉흥 재즈 연주처럼 변주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도로 발달한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반세기도 전에 또는 그 무렵에 롤랑 바르트는 ‘저자는 죽었다’고 했고, 미셸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통적인 저자의 개념 또는 저자의 통념에 대해서 이를 해체하고 비판하였다. 또한 독자에 의한 텍스트의 수용을 중시하는 볼프강 이저 또는 스탠리 피쉬의 독자 반응 비평 (Reader-Response Criticism)은 저자보다는 독자를 중시하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들은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받아들이고 변형시키는 것이라는 크리스테바가 주장한 상호 텍스트 개념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이들 이론은 포스트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가는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오늘날 이야기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매체는 소설, 영화, 연극, 텔레비전 드라마, 비디오 게임, 그래픽 노블과 만화책 등 너무나 다양하다. 문학에서는 전통적 의미의 장르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SF, 판타지, 공포 스릴러 같은 특수한 장르 소설에서도 서로를 구분하던 명확하고 분명한 선은 이미 희미해졌다. 그러므로 판타지와 공포물은 마술적 사실주의와도 그 경계선이 애매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과 진실 또는 기억과 경험이 상상력과 환상과 뒤섞이면서 콜라주 (Collage) 형식의 산문이, 인간의 온갖 복잡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 표현주의적 산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종류의 산문이 넘쳐나면서 고급예술과 대중문화, 논픽션과 픽션, 소설과 산문시, 여행기와 소설, 일기와 소설, 역사와 소설, 제품의 사용설명서와 소설, 픽션과 에세이의 경계도 애매해졌다. (그레이엄 그린은 자신의 장편소설을 진지한 장편소설과 대중용 소설로 구분했지만 결국 그런 구분을 포기했다.) 특히 (大說도 아니고 中說도 아닌 그래서 잡설이라고 할 수 있는) 小說과 (원래부터 그 개념이 애매하고 범위도 무한정한) 에세이는 경계선도 한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포괄해서 무한한 유연성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르의 차원이 아니라 오직 서사학에서 말하는 서사성과 문학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소설은 형식뿐만 아니라 내용이나 소재에 있어서도 아무런 제약이 없다. (지금은 21세기 문명사회이다.) 미국 소설가 로버트 쿠버 (Robert Coover)는 대표작 「공개 화형 Public Burning」에서 닉슨 대통령이 뉴욕의 번화가인 타임 스퀘어에서 에설 로젠버그를 강간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제프 다이어 (Geoff Dyer)가 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논픽션 소설「조나 Zona」에는 분량이 본문에 맞먹는 방대한 각주가 달려있다.
작가는 어떤 경우에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와닿는 근본적인 주제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형식으로 마음껏 쓰면 되는 것이다. 존 가드너가 말했던 것처럼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실험적 소설을 써보라. 자유로워져라. 한껏 자유로워……

현대소설을 단순히 현대에 씌어진 소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현대에 씌어졌고 현대소설의 주요한 특성, 다시 말하면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 모더니즘 소설이라고 하는 소설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을 공유한 소설이라고 한다면 우리 현대소설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물론이고 모더니즘의 본격적인 형식 실험 소설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 소설은 고색창연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구의 소설보다 거의 일 세기는 뒤떨어진, 문학에 있어서 아주 후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비평계가 문제이다. 우리나라에 비평계가 있기는 있었던가? 비평다운 비평이 있었던가? 날카로운 통렬한 가혹한 비평이 있었던가? 문학 비평은 타락했고 무능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냉철한 반성과 검토가 없었다. 그래서 문학은 지지부진하다 못해 썩어버렸다.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서로 주고받는다. ‘주례사 비평’ 일색이다. 감히 어떻게 ‘최인훈’을, ‘김승옥’을, ‘조정래’를 비평한단 말인가.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께름칙한가? 왜 선행 논문을 마구잡이로 짜깁기하고 논지를 그대로 추종하는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비평가로서 양심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에 대한 과도한 상찬은 우리 모두에게 독이 되었다. 그리고 공평하지 못하고 정의의 관념에도 반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찮은 성공에 도취해서 기고만장하였고 거만을 떨었다. 시릴 코널리는 ‘수많은 문학의 적들 가운데 성공이 가장 교활하다. 성공은 오직 인생의 황혼기에 그것도 오직 적은 양만 복용해야 하는 독약이다.’ 라고 말했는데 말이다.)
소설가 존 바스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기수라고 치켜세울 필요는 없겠지만 그의 「도깨비집에서 길을 잃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에서 메타픽션 (metafiction)의 트럼펫 소리 같다는 찬사를 들었다. 그는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소설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현대 문화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 소설은 각종 영상 매체들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 그래서 소설의 종말론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결론은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 소설의 전통적인 관습을 과감히 내던지면서 장르를 고집하지 말고 콜라주 기법이건 컷업 기법이건, 픽션과 에세이를 마구 뒤섞든, 실험 소설이든, (글쓰기 과정을 드러내 보이는) 메타 픽션이든 자기 스타일로 제멋대로 쓰라는 것이다.
소설은 탄생할 때부터 비관습적 성격과 잡종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 독창성이나 창의성이라는 애매한 용어에 현혹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뭐가 독창성이란 말인가. 상호 텍스트성 (intertextuality)이란 무엇인가.
(헬렌 필딩 Helen Fielding은 1995년 2월 인터넷 신문인「인디펜던트」에 칼럼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칼럼 시리즈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였다. 그러나 이 칼럼이 책으로 출간되고 오랫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면서 ‘칙 릿 (chicklit)’이라 부르는 장르를 개척한 소설로 인정받았다.)
나의 경우에는 콜라주나 메타픽션에 관심이 많지만 (장편소설 「광화문 광장」이 그런 식으로 쓰여졌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다. 요즘에는 이미 반세기도 전에 트루먼 커포티나 노먼 메일러 등이 개척해서 지금까지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뉴저널리즘 (New Journalism)이라는 하이브리드 (hybrid) 문학 장르 또는 역사적 사건에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인물을 밀어 넣은 다음 공적 사건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소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니까 논픽션에 소설적 기법을 교묘하게 결합한 것이다.
심층적인 뉴스 기사나 다큐멘터리에서 다루는 큰 사건이나 또는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작가 (또는 기자)가 1인칭 혹은 3인칭 시점으로 인물들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므로 몰입 저널리즘 (Immersive Journalism)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게 저널리즘인지 논픽션 소설인지 또는 그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애매한 것이다. (중편소설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2019 즐거운 사라’, 단편소설 ‘그날 밤의 비밀’, ‘야, 그 얘긴 하지 마’, ‘자백과 고문’, ‘남과 북’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들 역사소설이면서 사회소설에서 역사적 사건 또는 사회현실, 시대 정신을 엄밀하게 재평가하여 공증인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 문학계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옛날보다는 문학으로부터 훨씬 멀어진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문학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거나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밑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오늘날은 누구나 작가가 되는 세상이다. 누군가 비아냥거렸다. “요즘에는 개나 소나 작가잖아. 고작 누구도 읽지 않는 책 하나 내고서……” 작가가 되는 길은 널려있다. 수많은 웹툰, 웹소설 창작자들, 메타버스에서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 직접 원고를 써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유튜버들도 작가이고, 인스타그래머들은 현대 미술 작가이다. 온라인 플랫폼의 진화와 확산이 작가의 탄생을 더욱 쉽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작가들은 변호사나 의사, 부동산 중개업자처럼 등록하지 않는다. 물론 사업자등록증도 없다. 그래서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 2020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문인 단체인 한국문인협회의 총 회원은 약 15,000명이고 그중 소설가는 1,000여 명이다. 국제PEN한국본부의 회원은 4,000여 명이고 그중 소설가는 300여 명이다. 한국작가회의의 경우 전체 회원은 3,000여 명이고 서울 본부 회원은 2,400여 명인데 그중 700여 명이 소설가이다. 한국소설가협회는 전국 소설가의 약 80% 정도가 가입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회원은 1,300여 명이다. 그러니까 모든 회원의 80% 이상이 시인들이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시인들이 넘쳐난다.)
우리 문학계는 지금 예측 가능한 게 아무것도 없다. 진지한 예술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상황은 너무나 절망적이다. 물론 그 책임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작가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자업자득이다. 나는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저히 읽을만한 가치가 없는, 더 이상 읽는 게 고통스러운 그렇고 그런 작품을 쏟아낸다면 누가 소설을, 작가를 쳐다나 볼 것인가.
어쨌거나 종이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소셜 미디어 혹은 SNS와의 전쟁에서 책은 무너지고 있다. 우리는 종이의 질감에 향수를 느끼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지금 불가피하게 종이를 외면한다. 내가 외면하는 게 아니라 종이가 나를 외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컴퓨터와 인터넷, SNS, 블로그, 이메일 시대에 나는 이들을 문명의 이기로 활용한다. 얼마나 편리한가. 글을 써서 올리고 때로는 내린다. 지면의 제한이 없으니 얼마든지 수정한다. 확대하고 축소한다. 그리고 이메일은 어떠한가. 작가에게는 대외적으로 어느 정도는 공개된 삶이 있다. 종이 책으로 책을 출간하면 그렇다. 다른 하나는 은밀해서 알려지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되는 삶이 있다. 그런데 이메일은 주고받는 사람끼리만 아는 은밀한 장소이다. 얼마든지 익명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나는 이메일도 유선 전화처럼 선이 연결되어 있고 그 끝에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렇다니까……?!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으니 전통적인 종이는 새로운 종류의 스크린 (컴퓨터, 스마트폰, TV, 영화관의 스크린)과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것이다. 종이 신문은 쇠락하고 있고 종이 문학 잡지는 거의 궤멸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작품을 투고 받아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별해 개재하는「Newyorker」같은 문학 잡지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사라진 셈이다. 지금 매월 나오는 「한국소설」,「월간문학」,「한국 문학인」,「PEN 문학」,「내일을 여는 작가」 등은 무슨 협회의 존속을 위해 불가피하게 혹은 형식상 발행하는 동인지 수준에 불과하다. 그래서 회원들의 수준 미달 작품들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순서에 따라 실리게 된다.
출판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손익분기점을 넘겨서 살아남아야 하므로 철저하게 상업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사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아우성이다. 그들은 입을 모아 이구동성으로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문학작품이 안 팔린다는 것이다. 판매가 격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품의 내용이나 깊이, 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금씩 팔리는 시류에 편승한 얄팍한 것 외에는 안 팔리는 무거운 진지한 소설은 안중에도 없다. 메이저 출판사는 자기들이 키운 자기 식구 챙기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그들은 자기 출판사를 경영하는 방편으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문학 관련 계간지를 발행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사항은 문학 잡지나 출판사의 편집자들에 관한 문제이다. 조지프 한센 Joseph Hansen 은, ‘글쓰기는 고독한 작업이다. 골방에 혼자 앉아 매일 몇 시간씩, 달이 가고 해가 가도록 자판을 두드려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모든 피와 땀과 눈물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쓴 글을 존중하고 그 상태 그대로 활자로 바꾸어 줄 누군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게 당신의 첫 책이든 서른한 번째 책이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내 말을 믿어도 좋다.’ 라고 말했다.
그래서 작가는 처음 편집자와 조우한다. 하지만 우리 편집자들은 도대체 실력이 없으니까 문학적 관점이나 견해가 없고 게으른 데다가 무성의하고 편협하다. 내가 직접 수십 차례나 경험했으니까. 그들은 내가 보낸 원고를 읽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떤 종류의 회신도 보낸 일이 없었다. 그들은 이런 거절 편지를 보낼 줄도 모른다.
‘이런 원고는 딱 질색입니다. 사무엘 베케트는 아마도 영리한 친구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조이스를 비굴하게, 그리고 다소 일관되지 못하게 흉내 내고 있습니다. 언어는 극도로 괴팍하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젠체하는 대목들로 가득합니다. 게다가 추잡하기까지 합니다. 그 제목으로는 책을 팔 수도 없을 겁니다.’ )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는 사정이 어떠한가. 소설의 경우 온갖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몇만 권 팔린다면, 인문사회의 경우 몇천 권만 팔리게 되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게 된다. 그렇다고 잘 팔린 책들을 독자들이 열심히 읽기나 할까? 요즘 발달된 통계기술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베스트셀러의 완독률은 몇 프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사면 반드시 혹은 꼭 읽어보는가? 보통 사놓고 뒤로 미루다가 결국에는 잊어버린다.
그런데 베스트셀러 작품들은 문학성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질은 어떠할까? 닳고 닳은 관습적인 방식의 진부한 소설, 인과관계를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 노골적으로 클리셰 (Cliché)여야 그나마 조금 팔리니까, 예술적 감수성 혹은 진지한 문학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 작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바로 절판이 되고 아주 빠르게 잊혀질 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계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중소설과 순수문학을 구별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대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여러 의미에서 본격 소설을 쓰는 진정한 작가라면 그런 허접한 소설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통속화된 소설의 군중적 인기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그런 소설이 줏대 없이 우왕좌왕하는 분별력 없는 대중에 영합해서 인기가 있다는 것은 문학적으로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오락적인 작품은 누구도 교양있는 비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얻는 게 없어요. 계속 그렇게 가다가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사람들에게 잊힌 자신을 발견하는 게 그들의 최후지요.’ 라고 말했다.
맹자는 양혜왕 편에서 무항산 (無恒産)이면 무항심 (無恒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전업 작가이기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현실적으로 거의 또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 겸업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된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을 감내하고서라도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 작가의 의무란 (작가의 개성이 숨김없이 노출되어 독자적 의미를 갖는 혹은 독자적 형식을 갖춘)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이 전부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경제적 이익도 없고 내 명예를 드높이는 것도 아니고 권력으로 가는 길도 아닌데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문학에서 돈, 명성, 권력, 존경, 구원을 얻고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소설이라는 매체는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기가 가장 쉽기 때문에), 내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관점 또는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를 알고 있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회 현실을 또는 역사적 실재를 있는 그대로 엄밀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병적으로 말을 몹시 많이 하는 증상인 강박적인 다변증 때문에, 사무엘 베케트가 말한 것처럼 잘하는 거라고는 글쓰기밖에 없어서일까 (하지만 나는 글을 잘 쓸 줄 모르고 언제나 헤매인다), 어떤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이 글을 쓰도록 강요하기 때문일까.
예술지상주의에 경도되어 완벽한 예술을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유일무이한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이 나이에 순수한 야망을 품고 진짜 예술가, 진짜 작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가. 소설의 이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소설이 효과를 발휘하여 독자들이 문학적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은 디테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신은 디테일에 숨어 있다. 그렇지만 디테일이 지나치면 독자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과정에서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주제에 집중하면서 일단 군더더기로 생각되면 아무리 흥미로운 디테일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이 과감하게 생략할 수 있는가. 독자들을 폄하하면서 거들먹거린 적은 없었던가. 아니면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려고 별의별 기교를 부린 적은 없었는가. 나는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너무 정확하고 정직하게 말한다면 대화는 가끔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인간이 대화를 하는 목적은 명백히 드러내는 것 뿐만 아니라 숨기는 데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혹한 논평에도, 작가 동료들의 경멸에도, 대다수 독자들의 무관심에도 꿈쩍하지 않고 무덤덤할 수 있는가. 사람들로부터 무관심이라는 정말 지독한 무시를 당해도 분개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가. 장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시대에 소설도 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비평도 아니면서 학술 논문, 판결문, 공소장, 광고문, 사용설명서, 신문기사, 인터넷에 떠도는 무수한 것들, 기타 등등 그 모든 것을 얼버무린 모자이크식 잡문을 쓸 수 있는가. 내 무의식 속에 감춰진 기억들 ― 6·25 전쟁과 월남전 전쟁의 기억들, 소록도에 관한 기억, 트라우마들, 깊고 깊은 사랑의 상처들 ― 이 바타유가 말한 소설 집필의 동기 혹은 원천이 되는 불꽃이 될 수 있을까. 내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들이 제기한 ‘어떻게 글을 쓰는가’, ‘왜 쓰는가’, ‘무엇을 쓰는가’라는 질문에 명쾌하게 답변할 수 있는가. 나의 작품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도덕적 교훈, 메시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런 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할 수 있는가. 베케트는 ‘잉크가 마르자마자 나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라고 했는데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 엄청난 혐오감과 실망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고 박수갈채를 받고 싶은 욕망은……
나는 작가로서 조금도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내 소설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올 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내 소설을 확대 해석하거나 과대 평가하지 않는다. 아주 가식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여지껏 뭔가 중요한 걸 깨닫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작가로서 자의식 과잉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문장들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로서 한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오도 가도 못하는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저 시간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작가는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인간이다. 그래서 나는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절망한다.
소설은 독자들에게 단지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를 제공할 뿐인가. 독자가 현대의 변덕스러운 소비자처럼 입맛대로 소설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독자는 그런 종류의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은 예술품이지 대량으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다. 작품의 질과 가치는 교환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문학은 타락한 문학이다.
나는 작중 인물이 누구이건 간에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체홉은 자신이 만든 인물들을 절대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에 대한 해석과 가치판단은 독자 또는 비평가만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작가야말로 그 인물을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내 인물들을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가치판단도 하지 않는 게 아니다. 그런 걸 독자가 마음대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작가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와 작품 속 인물들과 진정으로 소통, 이해, 공감, 참여할 수 있는 소수의 독자를 원한다. 나는 그런 진지한 독자를 위하여 엄숙하게 소설을 쓴다. 하지만 독자는 깨어나야 한다. 독자는 작가와 함께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점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왜 작가들이 대중이 원하는 것만을 써야 하고 독자들에게 재미를 주고 감동을 주기 위해서 영합해야 하는가.
작곡가가 자신이 구상한 음악의 성격에 따라 오케스트레이션을 해야 하지 연주자들이나 또는 청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단순화시켜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관객 (독자)를 무시하고 모독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는 연극이나 희곡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 시클롭스키가 말한 낯설게 하기 (Defamiliarization)에 따른 소외 효과를 강조하면서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어서 이게 현실이 아니라 연극 공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고, 페터 한트케 (Peter Handke)는「관객모독 Publikumsbeschimpfung」에서 관객을 화나게 하고 모독함으로써 전통적으로 연극의 미덕으로 여기던 감동, 감정이입, 정신감응 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를 해체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소설 속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확한 내용, 왜곡, 과장된 서술, 생략된 서술, 부정, 부정의 부정, 회피, 모순, 비난, 허풍, 말장난, 쓸데없는 말, 거짓말, 불확실하거나 모순된 기억, 논리적 오류, 논리적 비약, 고답적인 철학, 사상이나 관념, 교훈을 늘어놓기, 편집자적 논평, 전보처럼 압축된 단문, prologue, epilogue, 참고자료, 실제 인물들에 대한 세세한 정보, 너무나 엉뚱한 예측, 지나친 반복, 쓸데없거나 지연된 또는 중언부언식 서사, 시점 (視點, Point of view)의 변경이나 혼용, 감정의 기복, 수많은 샛길, 너무 늘어지거나 너무 지루하거나, ‘일기, 보고서, 수사기록, 판결문, 신문기사, 인터넷 기사, 제품 설명서’ 등을 여기저기 끼워 넣기를 하면 그 소설은 혼란과 불확실, 모호함에 빠지게 되면서, (물론 이것이 작가의 숨은 의도일수도 있지만) 소설의 감동과 재미, 문학성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독자들은 인내심을 발휘하여 짜증과 불쾌감을 이겨내면서 그걸 독해하고 해석해서 스스로 텍스트 내부의 틈새 (gaps)를 메꿔 스토리를 연결해야만 한다. 그래서 의미를 찾아내고, 재해석하고, 오독을 경험하고 숨어 있는 다양한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어쨌거나 문학작품은 독립된 실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오독을 하게 될까? 독자가 아둔해서? 작가에게 문제가 있어서? 오독은 독자의 실수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논리나 인과관계의 왜곡, 조작, 혼란, 문장의 뒤틀림, 어색함, 쓸데없이 난해함, 잘못된 강조, 문단 배열의 실패, 문장부호의 오남용, 번역물의 경우 오역 등등이 독자를 왜곡된 해석으로 이끌게 된다.)
나는 절실하게 무언가 쓰고 싶으니까 쓰는 것이다. 나는 시를 쓰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쓰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인간이 글을 쓰는 것은 할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서’ 라고 말했다. 나는 언제나 절실함과 함께 무조건적인 충동성을 간직하고 있다. 글을 쓸 때는 (들끓는) 마음이 평화를 얻는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정신적으로 꼭 필요한 활동이다. 가슴 속에 쌓여 있는 감당하기 버거운 분노, 불신, 혐오, 냉소라는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감정을 조절하는 데는 이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골적인 상업주의에 진절머리를 내면서도, 작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뛰어난 상상력과 독자를 매료시켜서 소설 속으로 끌어들이는 작가적 역량이 턱없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 쓰라린 고통 속에서 소설을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겠는가.
작가는 호모 로켄스 (Homo loquens)이기 때문에 글자 중독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가의 직업병이 음표 중독증이라고 한다면 어떤 러시아 작곡가는 교향곡 하나에 11개의 버전을 만들었다. 어떤 화가는 끝도 없이 덧칠하고, 연거푸 물감을 긁어내고, 또다시 캔버스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반복해서 칠하고 긁어낸다.
인간의 삶에는 스토리 텔링이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는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여서 계속적으로 쇠락하지만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를 쓰지는 않는다. 쓸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시는 그 구성적 특질에 있어서 산문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시는 근본적으로 소리이고 템포이고 리듬인데 나는 그런 청각적 감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복잡한 사회 현상을 시에 의해서는 깊이 있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시나 참여시 논쟁은 나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윌리엄 포크너는 자신을 실패한 시인으로 간주했다.
‘나는 실패한 시인입니다. 어쩌면 모든 소설가들은 하나같이 처음에는 시를 쓰고 싶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시를 쓸 수 있는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단편소설에 손을 대지요. 단편소설은 시 다음으로 가장 엄격한 문학 장르입니다. 그리고 단편소설에도 실패하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그들은 장편소설을 쓰게 됩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쓰는가? 지금은 마광수 교수를 구속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하였던 사회적 압박은 사라졌다. 그러므로 소설로 다루면 안 되는 윤리 도덕에 반하는 소재의 제한은 없다. 오히려 무궁무진한 온갖 해괴망측한 소재를 발굴하는 것이 작가로서 성공하는 지름길이 되었다. 나는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예술가에게 도덕적 삶은 예술의 소재다. …… 예술가는 윤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윤리에 찬성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태도다. 예술가가 결코 불건전해서가 아니다. 선과 악은 예술가에게 예술적 수단이다. …… 쓸모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변명은 그것을 열렬히 흠모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예술은 쓸모가 없다.’
예술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삶을 재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쓰기는 신랄함과 분노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글쓰기가 신랄함과 분노를 낳는 것일까 (돈 드릴로). 조르주 바타유는 모든 위대한 작품의 집필 동기에 대해 ‘분노의 순간’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가 꼭 쓰고 싶다는 마음 없이 쓴 책들을 우리가 어떻게 오래 붙잡고 있겠는가?’ 라고 했다.
예술가는 반동분자여야 한다. 시대의 주류적 풍조에 저항해야 하고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기득권 체제를 전복하고 뛰어넘어야 한다. 지금 그리고 여기 (hic et nunc), 우리에 대하여 (für unc) 써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쟁점을 직접적으로 다룬 정치적 성향 또는 주제의 소설,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혹은 우리 시대와 장소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자화상인) 사회소설 또는 (내가 스스로 붙인 명칭이지만) 법률소설을 지향한다.
나는 호모 폴리티쿠스 (Homo Politicus)이다. 우리의 현실 상황을 직시하고 사회 비판을 하는 리얼리즘적 소설을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진정한 역사의식과 우리 시대 사회 현상의 다양한 측면을 세밀하게 포착할 수 있는 투철한 작가 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의 형식에 대한 강박관념을, 탐미주의적 경향을, 언어를 유희하고 싶은 욕망에서 어느 정도는 탈피해야 한다.
로브 그리예는「누보 로망을 위하여」에서 ‘모든 작가들은 그들 자신이 리얼리스트라고 믿고 있다. 어느 작가도 결코 자기 자신을 가리켜 추상적인 작가라든가, 환상적인 작가라든가, 비현실적인 작가라든가, 공상적인 작가라든가, 혹은 사실을 왜곡시키는 작가라고는 결코 자처하지 않는다’ 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는 엄밀한 리얼리스트로서 우리 시대의 구체적인, 흔해빠진, 따분한 풍경과 사물을 형상화한 사회소설을 쓰므로 그런 면에서 ‘사회적 리얼리스트’ 또는 ‘비판적 리얼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회의주의자나 염세주의자는 아니며 유유자적 한가한 진보적 낙관주의자도 아니다.) 그런데 그 용어는 민중성, 계급성, 당파성을 강조했던 옛날 소비에트 시절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참여문학 혹은 실천문학을 지향하고 있는가? 독자들은 내 소설을 읽음으로써 이미 현실참여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내 소설이 문학적 깊이와 냉철함이, 생명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작가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소수자들의 절망과 불행을 이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싶지는 않다.)
사르트르가 한때 공산주의였기 때문인지 참여 작가에게는 공산주의자 또는 좌익이나 좌파로 낙인을 찍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좌파도 우파도 중도 좌파도 아니고 어떤 정치적, 사상적 지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급진적인 진보와 강경한 보수가 이념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념도 신념도 실종된 채 진영별로 나뉘어 진창에서 개싸움 하듯이 더러운 이전투구를 하고 있을 뿐인데 내가 왜 거기에 휩쓸리겠는가.)
단지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 사회적 모순과 우리의 분단 상황과 엄혹한 시절의 시대 상황에 관심이 많다. 역사소설이나 사회소설을 쓸 때는 가끔 소설과 에세이가 결합한 에세이형 소설이 적합했다. 인물이나 주제와 관련해서 나의 견해를 명백히 드러내려면 에세이의 장점을 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과 상황을 소재 또는 배경으로 하여 엄밀한 리얼리스트의 관점에서 주도면밀한 객관적인 화자를 통해 세밀하게 소설을 쓴다. (특히 남과 북, 분단의 문제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이산 가족으로 분단의 희생자이기에 더욱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단 문학의 하위 장르로 탈북 문학이 성립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탈북 문학이라는 우리만의 독특한 장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소설군, 그것도 본격 소설로 평가할 수 있는 장편소설이 충분히 나와야 하고 더욱이 이정표가 될만한 문제작이 나와야 하는데 현재 그런 작품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두목도 없고, 집단도 없고, 전문지도 없고, 공동선언도 없다. 모두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소재와 주제를 끊임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이어서 그러한 텍스트의 문학적 가치는 현저히 감소한다.)

누군가가 그를 평가했다. 알렉상드르 솔제니친은 실패한 예술가지만 아주 성공한 도덕주의자이기도 하고, 그의 소설은 허세 가득한 쓰레기지만 그가 쓴 정치적인 글, 예를 들어 「수용소 군도」는 소비에트의 실상을 고발한 귀중한 걸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굉장히 도덕적인 목적으로 소설이라는 수단을 통해 말 그대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용소 군도」는 소설을 뛰어넘는 역사적 또는 사실적 증언이며 고발장이다. 자신의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어 소비에트 체제를 증언하는 모든 자료를 망라한 귀중한 역사적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그 소설의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솔제니친은 이 소설에 대해 ‘문학적 탐구의 한 실험’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70년대 유신독재 체제와 80년대 군사독재 체제는 소비에트 정부만큼 엄혹한 체제였으니 나는 그 시대의 상황을 여실하게 고발하고 시대의 초상이 될 작품을 남기고 싶다.
그때는 뭐하고 이제사……? 나는 그 시절 먹고 사는데 바빠서 어떤 종류의 소설이건 소설을 읽은 적이 없고 그랬으니 소설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논픽션 역사소설은 일정한 시간, 예컨대 최소한 20년이건 한 세대건 지나서 진실이 거의 다 밝혀지고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가 끝났을 때 비로소 쓰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 실제 사건과 상황을 배경으로 또는 단순한 배경이 아닌 전경으로 하여 깊은 주제를 다루건 간에 역사성에의 접근이 필요한) 역사소설은 그 외연이 너무 넓어서 개념을 정확히 정의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연 고유한 장르로 성립할 수 있는지 의문이긴 하지만 (탁월한 역사적 관점에 의해 사회비평을 해야 하는) 사회소설과는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래서 학문적으로도 역사학파 특히 아날 학파 (Annales school)의 포스트 모던 역사학은 무엇보다도 사회학과의 긴밀한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정치사나 왕조사 또는 위대한 인물이나 영웅 위주의 역사소설은 물론이고 방법론적으로도 엄격한 역사 실증주의나 경험주의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E. H. 카는 ‘역사학이 더욱 사회학적이 되고, 사회학이 더욱 역사학적으로 되는 것은 그 둘을 위해서 더 좋은 일이다’ 라고 말했다.
발터 벤야민은 책은 알맞은 독자가 우연히 나타날 때까지 읽히지 않은 채 천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장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천 년이라니!? 천 년은 아니고 몇십 년은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조지 오웰은 ‘문학 작품이 끝까지 살아남느냐 여부가 궁극적으로는 문학적 우수성을 검증하는 유일한 방법’ 이라고 말했고, 마거릿 애트우드는 ‘하지만 후대까지 유산을 남기며 마지막에 웃는 자는 비밀스런 정체성, 비밀스런 힘을 지닌 바로 그 예술가들입니다. 그들에겐 보기보다 훨씬 많은 것이 숨겨져 있거든요!’ 라고 말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사건은 필연적으로 법적인 쟁점을 내포하고 있다. 나는 그들 사건이 안고 있는 양가적 측면과 모호성, 복잡성을 소설로 형상화한다. 그러면서도 소설이 필연적으로 갖추어야 할 인간 본성에 대한 엄숙한 통찰과 미학적 관점에서 냉철한 묘사, 진지한 문학성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나는 법과 정의, 법률 세계의 실상, 어두운 이면을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으므로, 그런 것들을 피할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눈을 돌려 버릴 수가 없다. 우리 시대에 대해서, 우리에 대해서 쓰고자 한다면 법조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법적 차원의 고발을 하려는 또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발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냥 넘어갈 수 없으므로 그저 그들이 원하는 대로가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증언을 하려고 한다. 작가란 아무것도 할 말이 없으면서도 바로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말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200편이건 300편이건 작품을 써서 남기면 내가 죽은 후 몇 편만이라도 끝까지 살아남기를 바란다. (작가는 우선 많이 써야만 한다. 예술가들이 충분히 많은 작품을 남겨야 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많은 작품을 남겼다는 것은 그만큼 예술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채홉은 700편에 가까운 단편소설을 썼지만 그중에서 불과 몇 편만이 명작으로 회자되면서 살아남았다. 베토벤과 모차르트가 왜 그렇게 천재 작곡가로 유명하게 되었는가. 그들은 다른 음악가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곡을 썼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실패한 곡도 많았지만 유명한 여러 편의 명곡들이 있었다.)
신비평 이론가들이 주장한 대로 하나의 문학 작품은 독자들의 읽기 행위와는 관계없이 시간을 초월하여 자기충족적으로 (또는 자율적으로) 존재한다. 바흐친은 모든 진정으로 위대한 작품은 그것들이 창작된 시대를 뛰어넘어 성장한다고 했다. 가령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당대에서의 삶 보다 훨씬 풍부하고 더 열정적이고 더 충만한 사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내 소설 역시 그 작품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의해 그 의미가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계속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 소설 속에 숨어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문학 본연의 그 무엇을 찾아서 열심히 읽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진정한 독자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내 소설이 더 열정적이고 더 충만한 사후의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21세기 우리 문학계에서 (물론 사회소설의 전통은 유구하지만) 사회소설 또는 법률소설을 본격적으로 써서 정착시킨 작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와 사회의 총체적 의미를 증언한 핵심적 증언자가 되고 싶다. 그 소설들이 내가 이 세상에 왔다가 갔음을 증명해주기를 바란다. 내 소설이 출판, 연구,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내 소설이 아니라 한 인간을 바라볼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미국인들이 허먼 멜빌을 새삼스럽게 알아보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그런데 말이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야…… 과대망상인가, 피해망상인가.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나 되는 것처럼 굴다니. 나는 겨우 겨우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한데……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나를 스스로 평가하자면 자기 방어적이고 자기 중심적이어서 틀림없이 유아론자일 것이다. 나는 찬사를 받으려고 쓰는 것도 아니고 독자를 생각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지만, 내 소설들은 어떠한 성과도 어떠한 평가도 얻지 못했다. 내 소설들은 탄생한 순간부터 빛을 보기는커녕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조만간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나는 지금 모두 헛된 짓이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나는 자위한다. ‘아무것도 아냐…… 괜찮다니까…… 후회는 없어…… 어중간한 명성은 필요 없는 거야. 껍데기뿐인 작가일 바에는 차라리 완전한 무명이 낫다고.’
나는 지금 타인의 불행에서 은밀한 쾌감을 느끼는 독일어 단어 샤덴프로이데 (Schadenfreude)를 생각한다.
작성일:2021-05-25 10:09:31 14.32.9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