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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에세이> 작가란 무엇인가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5-25 10:00:52
조회수
570
작가란 무엇인가


이 인터뷰 내용은 지난 해 (2016년) 여름에 서울지방변호사회보에 게재되었던 것을 몇 차례 수정 보완하여 재정리한 것이다. 그때 지면 관계상 충분히 질문하고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 작가란 무엇인가요? 혹은 작가란 누구인가요?

(답) 글쎄요. 쉽게 말하자면 무슨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아닐까요? 하지만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문적이 아닌 무슨 글을 쓰건 간에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글을 쓰는 사람이 작가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문학이나 예술의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작가라고 하고, 저작자의 준말인 저자란 책을 지은 사람, 그래서 (예술 작품이 아닌) 일반적인 책을 쓴 지은이를, 필자란 사전적으로는 글이나 글씨를 쓴 사람을 말하지만 널리 논문이나 에세이 등을 쓴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들을 읽어보면 ‘필자’라는 용어를 널리 사용하고 있거든요.
이건 순전히 정확하지도 않은 제 견해일 뿐입니다만.
그런데 작가란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고 여기서 창작이란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하므로 작가란 창조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작가와 창조적 작가의 차이는 얼핏 ‘작문’과 ‘창작’의 차이와 비슷하다고 했습니다만. 저는 창조적이라는 용어에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창조적일까요?
그러므로 내가 많은 학술 논문과 판례평석, 에세이, 법학 전문서, 기타 글 등을 썼으므로 필자 또는 저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창조적인 작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작품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 그 알량한 저자와 현명한 독자의 지위를 전복시킨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예술작품을 창조적 행위의 산물이라고 보았던 전통적 관념을 무시했던 미셸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 변호사님은 작가가 혹은 예술가가 완전무결하게 창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모방하거나 심한 경우 표절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소설에서도 말입니다.

(답) 저는 대한변협에서 발행하는 권위 있는 학술지인「인권과 정의」에서 8년째 실질적으로 편집위원장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 편집위원들은 제출된 논문을 심사할 때 표절 여부를 제일 먼저 살펴보고 있습니다. 학술논문에서는 표절이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시나 소설에서 표절은 우리 문학 풍토에서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 이래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과 미국, 남미,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거대한 기독교 문화권과 비교하면, 우리의 현대문학은 그 역사가 너무 짧고 문학작품 도 양과 질이 너무 빈약합니다. 그러니 표절의 유혹을 느낄 만큼 좋은 작품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경숙 작가의 경우, 일본 소설을 표절했다고 해서 문제가 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게 과연 표절인지 의문입니다. 제가 그 작가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고 그의 소설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만 억울하지 않을까요? 20년이 지나서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떤 사람들이 더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진즉 문제 삼지 않았을까요?
그 무렵 어떤 원로 작가는 공개적으로 그에게 절필을 요구했습니다. 그 작가가 무슨 권리로 그런 선언을 할 수 있을까요? 작가에게 글을 쓰는 일은 숙명이고 업이고 밥벌이인데 말입니다. 장자의 소요유편 (逍遙遊篇)에 나오는 월조대포 (越俎代庖)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는군요.
제가 ‘표절에 관한 단상’이라는 긴 에세이를 쓴 일이 있습니다. 누가 내 글을 표절한다면 어떨까요? 내 법학 전문 논문과 저서들은 일부 사람들이 표절 또는 인용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 글의 조사와 종결어미를 바꾸고 문장을 조정하여 재배치했습니다. 그러나 내 글의 고유한 지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필자의 목소리, 다시 말하면 스타일과 문체, 어조, 내가 특히 좋아하는 단어들을 사용한 언어 장치를 바꾸지는 못했지요.
하지만 내 글을 표절하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표절이란 내 글에 대한 오마주가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제가 그걸 자신 있게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의 좋은 글로부터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단어와 문장을 자주 훔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가가 누군가의 글을 읽고 맹목적으로 모방하려고 하는 것은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베끼기이고 완전한 표절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겨운 일입니다. 자신의 관점에서 변용하고 변주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모방이나 표절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들 때 오랜 궁리 끝에 자신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그건 요즈음 말하는 자기 표절에 해당되지요.
(그러면, 무엇이 또는 어떻게 해야만 창조적이란 말인가? 괴테는 ‘나는 경험하지 않은 것을 쓴 적도 없고 또 경험한 대로 쓴 적도 없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또 경험한 대로 쓴 적도 없다’는 무슨 의미이겠는가? 그걸 창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해석과 재해석, 번역, 변주, 편집, 재구성, 비틀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조물주가 있었다면 조물주의 창조야말로 유일하게 창조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순수한 의미의 창조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말했다. ‘무엇도 새로운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다른 어딘가에서 전생을 살았지 않았겠는가.’ 20세기 초 영국의 젊은 여류 소설가들 중 가장 뛰어났다는 평을 받은 엘리자베스 보엔 Elizabeth Bowen 은 「책으로부터 Out of a Book」라는 작은 논문에서 ‘…… 경험 가운데 전적으로 나 자신의 경험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이 아무리 단순화되었더라도, 거의 없다 ― 내가 겪은 일인가? 아니면 그런 일이 있었다고 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디선가 읽었었던 일인가? 내가 글을 쓸 때, 나는 나에게 창조된 것을 다시 창조한다.’ 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현재의 시점에서 약간 또는 상당히 새롭고 신선하다는 느낌은, 그건 현명한 독자들이 판단할 일입니다.

(문) 뒤늦게, 갑자기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있었는가요?

(답) 가장 늦었다고 생각한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명언도 있습니다. 저는 2007년에 작은 로펌 소속 변호사였습니다. 그 해 여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그냥 소설을 끄적이기 시작했지요. 작가가 되려는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대단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소위 말하는 에피퍼니epiphany가 불현듯 나타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소설 쓰는데 특별히 교육을 받은 일도 없었고 습작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요.
다만 그때까지 너무 많은 소설을 읽었지요. 내 삶이 너무 지겨운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나는 신경안정제로 독한 술을 밤새 마셨고, 정신이 말짱해지면 대개 소설을 읽었거든요. 나도 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막연히 한 번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문) 그러나 너무 늦은 게 아닌가요? 문학이란 젊은 시절 감수성이 예민할 때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요?

(답) ……모든 것은 잉태기를 거친 후에야 세상에 나올 수 있습니다. 내 나이 60을 넘어서니 이제야 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논어의 六十而耳順이라는 경구가 비로소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할까요. 작가란 작가 자신이 내면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숙해야만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상극하는 모순된 목소리와 세계관들이 생생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좋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내 손을 바라보며 시간이 없다고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으니, 나의 방언으로 내 글을 써야겠다고 갈망한 것이지요.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를 쓰고 싶습니다. 요즈음 작가들은 새털처럼 가벼워서 얄팍한 거 이외에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데 말입니다. 그것들이야말로 이 세계를 지탱하는 뼈대인데 말입니다.

(문) 법조인으로 30년을 살았는데 그게 소설 쓰기와 어떤 관계가 있나요?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법조인으로서 지난 30여 년간은 진실과 허위, 법정에서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똑같은 말들의 반복이었습니다. 그 닳고 닳은 말들 속에 언어의 간결함과 아름다움, 침묵의 언어, 언어의 정수인 은유는 없었지요. 관료주의와 매너리즘, 자기 기만, 자기 연민과의 기나긴 싸움이고 패배의 시간이었습니다.
변호사로서 사물과 현상의 진실을 밝히려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과부적의 일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요. 여기서 자세히 밝힐 수 없는 몇 가지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변호사는 가끔 소장이나 준비서면에서 소설을 써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건조한 법률용어로 서술해야 하는 소장과 준비서면, 법률문서 등과 학술논문이나 판례평석, 법학 전문 책들을 쓰는 스타일과 문체는 소설의 그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지요. 문학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소설에서 플롯의 구성과 인물의 창조, 문체를 쓰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문) 소설적 문체가 신문 기사나 학술 논문, 법률 문서의 그것과 다른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답) 논문이나 법률 문서는 곧장 논점의 핵심으로 들어가서 논쟁을 시작합니다. 거기에는 부사와 형용사의 사용은 절제되어있고 은유와 직유 같은 수사법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생략이나 침묵이 주는 암시적 효과를 의도해서는 안 됩니다. 무미건조하게 표현될 뿐입니다. 치밀한 논리가 우선입니다. 하지만 소설은 다른 경우입니다. 소설에서는 살과 뼈가 있고 피가 흐르는 인물이 등장하여 진짜처럼 보이는 사건의 전개를 통해 작가의 의식 또는 주제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소설은 스케일보다는 디테일이 중요하죠. 소설에서는 디테일을 통해서 인과성, 개연성, 핍진성, 필연성, 진실성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러면 소설은 인물의 본질을 규정하면서 생명력을 얻게 되고 깊은 울림을 드러내게 됩니다.
작가는 독자와 비평가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낯설게 만드는, 우리가 흔히 문학성이라고 일컫는 소설을 꽁꽁 묶고 있는 소설의 고유한 구조, 문장의 특수한 구성이나 어휘의 독특한 배치, 뉘앙스와 깊이, 문체의 고유한 리듬을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필요한 곳에 필요한 단어를 찾아야 합니다. 그게 사실주의 작가 플로베르의 주장이긴 합니다.
그러나 소설은 명쾌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닙니다. 가끔은 작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어야 하거든요. 소설에도 인과관계에 따른 논리성이 필연적이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오로지 합리적이기만 하면 작품이 지극히 단순해지고 예측 가능하면서 설교적이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력이 사라지고 영혼이 없게 됩니다.
작가는 이야기와 관련해서 원하는 것을 전부 끌어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그대로 다 표현할 수도 없고, 그만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무엇이 꼭 필요한지, 또는 전혀 불필요한지,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중요하고, 그렇지 않은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문) 자신의 소설 작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또는 작가적 자세 같은 거 말입니다.

(답) 제가 작가인지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왠지 진지한 작가로서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이 없습니다. 예술가는 절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되면, ‘이만하면 됐다’고 만족하거나 자위하면서 쉽게 가는 길을 택할 수 있습니다. 그건 인지상정이라고도 할 수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예술가라면 그걸 극복해야 합니다.
전에도 어떤 기회에 밝힌 바 있습니다만……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섬세하고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합니다. 물론 산문에서 서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산문은 시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바이런은 시에 대해서 ‘상상력의 용암’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한 쓸쓸한 문장을 쓰려고 하지요. 내가 약간 멜랑콜리하거나 센티멘탈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언어의 아름다움과 기묘함을 사랑하기 때문이지요. ( 보들레르는, “…… 우리 중에 야심으로 충만했던 순간에 시적 산문이라는 기적을 꿈꾸어보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제가 약간 흥분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이고 실제는 형편없는 문체로 지극히 평범하거나 진부한 이야기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문) 소설을 가장 짧게 가장 적은 단어로 써야 한다는 헤밍웨이 식 미니멀리즘과 반복해서 주절주절하는 소설 스타일 중에서 어느 쪽인가요?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인즉, 변호사님은 장편소설에 나왔던 어떤 장면이나 사건, 인물을 다시 중편이나 단편으로 반복하면서 주제를 확장하고 심화시키고 있거든요.

(답) 저는 언제나 자신이 없고 불안과 강박증이 있기 때문에 말을 할 때에도 소설을 쓸 때에도 중언부언 반복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장편이라고 해도 스토리의 전개나 구조상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이야기에는 최대 상한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정한 선에서 절제를 해야 합니다. 나머지 부분은 중편이나 단편으로 옮겨서 반복합니다. 그게 제 스타일이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그건 개인적인 스타일의 문제이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르다는 식으로 평가할 일은 아닙니다.
정교하게 압축해서는 군소리 없이 작품의 본질로 직진해야 한다는 미니멀리즘은 1920년대 재즈 시대에 대공황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일시 유행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사라졌지요.
그러니까 헤밍웨이식 미니멀리즘이 한때 풍미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짧은 기간이었을 겁니다. 소설이 너무 축약되면 필연적으로 내용이 빈약하고 허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런 식의 소설은 쓸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요.
지금은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이고 포스트 휴머니즘 시대입니다. 소설에서도 온갖 형태의 소설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원래 잡설입니다. 보이스오버 형식의 내레이션, 메타 픽션, 하이퍼 텍스트, 웹소설, 오토 픽션, 인프라 소설이 등장해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문) 시나 소설의 경우 문장에서의 반복은 리듬과 관계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게 문체에서 특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답) 좋은 지적입니다. 문장에서 리듬은 아주 중요합니다.
문장에서 리듬은 소리와 침묵의 엇갈림이고 반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E.M.포스터는 ‘소설의 이해’에서 리듬과 반복과 변화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니까 글 전체를 소리만으로 채우면 안 되겠지요. 음악에서 휴지부가 필수적인 것처럼 휴식부도 반드시 필요하지요.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글에서 리듬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소리에 둔감하고 음악적 소양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항상 적절한 단어와 글귀는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단순한 레토릭이 아닌 (인간의) 소리와 색채와 냄새를 가진 살아있는 문장과 문단을 만드느냐는 것이지요. 단어는 혼자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단어는 문장 안에 있을 때만, 문장은 문단 안에 있을 때만 그 의미가 충만합니다. 단어들을 조합해서 의미를 굴절시키고 풍요롭도록 조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는 작가들의 서정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문체가 정신착란과도 같은 숭고한 경이로움으로 만들어진다고 믿는 것은 확실히 잘못이다. 위대한 문체는 명징한 논리로 만들어진다’고 하였습니다.

(문) 작가는 소설을 쓸 때 그야말로 완전히 자유로운 상황에서 인물과 사건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답) 우리 헌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양심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언제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예술적 영혼을, 온전한 애정을,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창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소설 쓰기에서 작가는 얼마나 자유스러울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작가는 작중인물들의 삶을, 운명과 죽음까지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허구가 아니고 모두 진짜 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매지요. 여기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허구로 지어낸 모든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 의미도 없는 어떤 것을 고안해 냈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허구로 지어낸 것이 어떤 의미와 결부되어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진리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문학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작가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실재, 사회적 제도와 관습, 전통, 불문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그러니까 아무런 제약 따위는 없이 무작위로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는 그런걸 ‘역사적 속박’과 ‘소설적 속박’이라고 했습니다. 소설은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SF, 환타지, 공포 스릴러 같은 특수한 장르 소설의 경우에도 리얼리즘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리얼리즘은 모든 형태의 소설에 있어서 기본입니다.
저는 오히려 오랜 직업적 습성 탓인지 유럽에서 한때 유행했던 네오리얼리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에는 다른 예술의 형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습니다.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자기 세계를 창조하니까 창조주, 신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쓰고 싶은 강렬한 욕망 혹은 써야 한다는 병적 강박과 함께 끈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오르한 파묵’이 말한 ‘바늘로 우물 파기’처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편집증 환자처럼 쓰고 또 쓰고,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 합니다.


(문)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고 출판은 어떻게 하나요? 지금 직업적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가요? 다시 말하면 작가로서 어떤 종류의 수입이 있는가요?

(답) 작가가 책을 출판하는 일은 참으로 고달픈 일입니다. 어느 출판사가 무명작가의 그렇고 그런 원고를 선뜻 받아주겠나요? 책을 낼 때는 유쾌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건 작가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말했습니다. ‘나는 내 첫 책의 원고를 76년 전에 마무리했다. 나는 그걸 영어권의 출판사란 출판사에는 모두 보냈다. 그들의 거절 이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똑같았다. 그 원고가 활자화된 것은 그로부터 50년 뒤였는데, 그때는 출판사들이 내 이름으로 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출판하고자 했다. 나는 출판업자들에게 이렇게 항의한다. 그들이 내게 한 좋은 일 한 가지는 그들 없이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준 것이다. 그들은 좋은 사업가도, 훌륭한 문학적 판관도 되지 못하면서 상업적 파렴치와 예술적 과민함 및 심술로 똘똘 뭉친 이들이다.’
현재 나의 간절한 소망인즉 내가 조금만 유명해지고 그래서 새 책을 내면 몇천 권 정도는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출판사는 손해가 나지 않으니까 책을 내는데 부담감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변호사 업무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늘 불편한 마음으로 그 낯선 법정으로 들어가야 하지요. 그게 밥줄이니까요. 그렇지만 법정은 그렇게 드나들었어도 긴장되고 부담스럽고 어떤 경우에는 공포스럽지요.
법정은 신성한 곳이 아닙니다. 이해 당사자들이 치열하게 대결하는 싸움터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정은 자주 가식과 위선, 기만이 판치는 곳 아닙니까?
법정 안 당사자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법 원리나 법 상식이 아니라 감정, 성격, 기분, 직관적 예단, 고정관념, 편견, 설익은 소신 같은 비이성적 요소에 의해 진실을 부정, 왜곡, 조작할 수 있습니다.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그것은 실상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진실이란 증거법의 테두리 내에서 인정되는 제한된 사실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실체적 진실’이란 가상적 관념이거나 이념적 도구에 불과합니다.
지금까지 소설을 쓰고 책을 냈지만 단 한 푼의 소득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인 새뮤얼 존슨은 ‘돈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은 얼간이밖에 없다’라고 말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직업적인 작가, 또는 전업 작가라고 할 순 없습니다. 현재의 여건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지요. 나는 지금 소설을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게 아닙니다. 내 소설은 단지 쓰이기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문) 법조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셨는데 그래서 많은 지인이 있을 것입니다만, 그들은 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우호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답) 법조계 친구들은 한결같이 경멸적인 시선으로 문학을 바라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저는 그들의 태도에서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누가 한가롭게 소설책을 읽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들에게 문학은 쓸모없는 천덕꾸러기인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는 한심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무관심과 천대를 이겨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문단과는 한참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세계는 오랫동안 법조계였고, 그쪽과는 아는 사람도 없고 교류할 기회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편견일 수도 있겠는데, 그쪽에서는 이방인 또는 엉뚱한 침입자 취급을 하지 않을까요. 혹시 빈정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호사 주제에 무슨 소설을 쓴다고……”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한편 아쉽기는 합니다.

(문) 작가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어려움이랄까? 고통은 어떤가요?

(답) 모든 창작자의 공통된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오늘도 백지를 마주하고 앉아서 망연자실한 채로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게 바로 writer’s block 이라는 겁니다. 창작의 열정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요.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자기 회의, 불안, 강박 때문에 괴롭습니다.
소설을 완성해서 끝냈다고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머뭇거리고 두려워하는지 아세요?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작품에 대해 어떠한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작가가 글을 쓴다는 일은 아주 좁은 공간, 그러니까 감옥 같은 밀실에서 매일 혼자서 해야 하는 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얼마나 지겹고 지루하겠습니까. 그러나 작가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쓰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자기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작가로서 살아남고 또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선 작가 자신이 납득하는 것을 써야만 합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그게 가능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부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하라」에 대해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요? 첫 작품이기 때문에 그만큼 애착이 가는 게 아닐까요?

(답) 나는 장편소설「사하라」를 쓰고 고치는데 거의 10년 동안 매달렸지요. 그러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하라」를 쓸 때 100권이 훨씬 넘는 참고 문헌을 살펴보았고, (타클라마칸, 타르, 룹알할리, 칼라하리, 누비아, 사하라 등) 사막, 낙타, (탕헤르, 라바트, 패스, 카사블랑카, 마라케시 등) 모로코의 도시들, 알제리의 알제, 콩스탄틴, 오란, 타만라세트, 말리의 통북트, 아하가르 산맥, 사하라의 원주민 투아레그, 부족 전쟁, 사하라 이남의 도시들, 니제르강, 바마코, 세렝게티, 보츠와나, 콩고 분지의 밀림, 말라리아, 에이즈, (톰슨 가젤, 스프링 복스, 윌드 비스트, 오릭스, 리추에, 임팔라 등) 영양류, (사자, 하이에나, 표범, 치타 등) 고양이과 동물, 아프리카 부족, 난민촌, 무슬림과 마호메트교, 쿠란, 이집트와 나일강, 예루살렘, 시나이 반도, 메카, 마르세유, 바르셀로나 등에 관한 5,000장이 넘는 사진, 수백 개의 다큐멘터리 비디오 테이프를 보고 또 보았던 것입니다.
나는 사하라와 사막, 사막의 부족 투아레그, 낙타,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비극, 무슬림과 쿠란, 건축가의 세계,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여행, 신과 종교, 사랑과 이별, 운명과 비극,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하라와 사막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소설 속 주요 등장 인물로 기능하는 하나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 읽히는 소설…… 그러면 매년 판매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조금씩 팔리는…… 소위 말하는 백리스트 backlist 가 되기를 내심 바랐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철저히 외면을 당하여 절판 위기에 있습니다.
그 소설의 정체성을 이루는 부분이 무엇일까요. 책 제목인지,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인지, 장소적 배경인지, 그 전부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독자들이 판단하겠지요. 독자들이 끝까지 읽고 나서 정서적으로나 지적으로 어떤 여운을 느낄 수 있다면, 작가로서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문) 작가는 독자의 재미를 위해서 아니면 독자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소설을 쓰는가요?

(답) 독자들이 제 글을 읽도록 하기 위해서는 작가 고유의 목소리와 관점이 확립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제가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는지,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게 확립되어 있다면 떳떳하게 작가 행세를 해도 어색하지 않겠지요.
몇몇 독자들은 내 소설은 깊이는 있으나 너무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들은 소설이 재미없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설을 전혀 읽지 않았지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교훈을 말할 처지는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중차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문학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는 걸까요? 약간의 의미를 또는 무의미를, 다시 말하면 의미의 결핍을 전달하려고 시도는 하겠지요. 이 경우 무의미가 뜻깊은 의미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무명작가이기 때문에 잡지사나 출판사로부터 뭘 써주세요 라고 부탁받는 일이 도대체 없습니다. 그래서 마감시간 같은 것에 쫓길 일이 없지요. 그리고 독자가 거의 없다고 지레짐작하기 때문에 어떤 독자를 상정하고 그가 읽기를 바라는 소설을 쓰는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나를 위해서 쓴다는 것이 되겠지요. 자기 치유 혹은 자기 정화를 위해서 말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가의 작업이란 글쓰기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 사랑 이야기,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공포로 떨게 만들거나 폭소를 자아내는 이야기를 씀으로써…….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매일 철저하게 진지함으로 무장하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그럴듯하긴 합니다. 그가 인기 있는 대중작가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는 그의 작품을 단 한 편도 읽은 적이 없습니다.

(문) 작품에 대해 비평을 받아보신 적이 있었나요? 비평 또는 비평가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답) 제 소설들은 제대로 된 비평 (혹은 평론)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혹평이건 악평이라도 말입니다. 그들이 무시했다기보다는 제가 워낙 무명이었으니까 관심권 밖이었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지금 비평이 존재하는가요? 하여간에 저는 주례사 평론은 사양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비평 또는 비평가에 대한 명언들을 소개하고 싶군요. ‘비평은 쉽고 예술은 어렵다’ ‘비평가란 문학이나 예술 면에서 실패한 무리들이다’ ‘비평가에 대한 작가의 소감을 묻는 것은 개들에게 전봇대의 소감을 묻는 것과 같다’ ‘비평은 예술가의 명성에 한 몫 끼려고 하는 비평가가 동원하는 기술이다’

(문) (나이도 많으신데) 앞으로도 계속 (어떻게) 소설을 쓸 것인가요?

(답) 이 단계에서 뭘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요……?!
더 늦기 전에 예술과 삶 중에서 선택했어야 하는데 차일피일 한 겁니다. 속물근성 때문이기도 하고…… 제가 어리석어서 우유부단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만의 문학이론을 정립해야겠지요.
저는 내 목소리로 지금 / 여기 /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쓸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실용적인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고 실체적 진실을 포착하여 그걸 정면에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찾아야 하겠지요.
이야기 속에서 인과관계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야 하고 플롯에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소설의 성패는 스케일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는 대중소설이나 장르소설은 쓸 능력도 없고 쓸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대중의 취향을 철저히 무시합니다.
진지한 주제를 다루는 순수 문학소설이면서도 사회소설이 저에게는 딱 좋습니다. 대중소설과 본격소설을 구분하는 게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관습적이고 낡은 관념이기는 합니다만.
우리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는 대부분 모호하고 복잡하고 양가적 측면을 안고 있습니다. 당연히 법률적 쟁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리얼리즘을 추구하고 리얼리즘을 뛰어넘는 포스트 리얼리즘적인 소설, 메타 픽션이나 인프라 소설 같은 실험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완벽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까 완벽한 삶도, 완벽한 예술도 없는 거예요. 더욱이 둘 다…… 예술과 삶은 간극이 있고 서로 충돌하니까 둘 다 동시에 가질 수가 없어요. 반드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저는 예술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신봉하지요. 하지만 도덕주의자는 아니에요. 교훈적이거나 설교를 늘어놓는 것은 질색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자아를 위해서, 자신을 입증하고,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맞는 만족할 만한 작품을 쓰는 거예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면 죄다 퇴짜를 맞아요. 팔릴 수 없는 책이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저는 작가로서 소외되고 결국 소멸되거나 파멸을 맞을 것입니다. 그게 제 운명이라면 일찌감치 체념해야겠지요.
작성일:2021-05-25 10:00:52 14.32.9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