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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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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원 대표 단편선> 자백과 고문 (下)

닉네임
유중원
등록일
2021-04-27 11:09:36
조회수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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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의 변호인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는 말했다.
…… 김근태는 70년대부터 여러 민주화운동에 관여했는데 그 때는 거의 잡히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요. 78년경부터 83년까지 약 5년 동안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 간사를 했습니다. 주로 도시 산업선교회 활동, 실무자 활동을 쭉 인천 언더에서 한 사람이죠. 그때 김동완 목사나 교회관계자들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고 그랬습니다. 83년 9월에 여러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을 묶어 청년운동단체로 민청련을 만들었습니다.
…… 민청련 의장을 누가 맡느냐 이런 걸로 좀 논의가 되었던 것 같은데 그 지도력이나 운동에 전력해온 경력이나 운동권 후배들한테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 같은 면에 있어서, 김근태가 적절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어 김근태가 민청련 의장이 되었어요.
…… 그때 민청련 활동은 대단했습니다. 80년대 초에 운동권이 박살나면서 침체기에 빠져 있을 때 새로운 돌파구를 연 것이 민청련이었어요. 학생운동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재야세력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상당한 청년그룹들이 민청련에서 활동하면서, 기관지 「민주화의 길」도 발간하고, 많은 활동을 합니다. 민청련은 타협노선이 아니라 선명한 정치투쟁의 기치를 내걸면서도 공개조직으로 움직여 운동의 중심축을 만들어냈습니다.
…… 그래서 물고문을 하고, 전기고문하고,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그러면서 자술서를 쓰라고 강요합니다. 자술서를 무려 7차례 쓰고, 피의자신문조서를 10회나 작성했어요. 이거 피눈물 나는 이야기에요. 수사기관에 가서 자술서 쓰고 피의자신문조서를 쓰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몰라요. 더구나 고문당하면서 이렇게 많은 양을 쓴다는 게 일반인은 상상도 못합니다. 자술서와 피의자신문조서 같은 것 보면요, 이게 글씨가 깨끗해요. 고치게 되면 다시 써야 돼요. 그걸 갖다가 김근태가 몇십 페이지, 백 페이지를 썼다고. 불과 20일내에 그 많은 양을 깨끗한 글씨로 말입니다. 물고문, 전기고문을 몇 차례씩 가하고, 잠도 안 재우고, 그러면서 자술서 쓰게 하고, 자술서 내용을 토대로 피의자신문조서를 만들고… 이런 작업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쭉 한 겁니다. 김근태는 완전히 파괴되었죠. 이거는 도저히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어요. 김근태의 탄원서라는 걸 한 번 읽어보세요. 김근태 고문 사건의 진상이 아주 적나라하게 다 나와 있습니다.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인권변론 한 시대」, 511~533쪽 참조)

고문 고발장
박정희 유신 시절의 대표적인 고문 사건이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의 경우 그 당시 중정에 의한 온갖 가혹한 고문과 조작을 거쳐 무고한 8명의 국민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18시간 만에 목을 매달아 사형집행까지 하였으니.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누굴 위해서 존재하는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저지르는 잔혹한 폭력이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유명한 고문 사건은 1985년 김근태 고문 조작 사건, 1986년 부천서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국가 형사정책적 차원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악랄하게 진행된 고문 사건으로 대표적인 것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 동안 자행된 김근태 고문 사건이다.
장기간에 걸쳐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온갖 종류의 고문을 가하고 이에 대해 피고문자의 끈질긴 의지가 충돌하는 과정은 고문과 자백의 유구한 역사에 있어서 가히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다.
나는 그의 자전적 성격을 띤 에세이 혹은 고백록, 고발장이라 할 수 있는 「남영동」에서 고문에 관한 부분만 발췌하여 그대로 전재하였다. 내가 어떻게 작가로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달리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아주 똑같은 내용이지만 일인칭 자전적 글과 제3자가 쓴 3인칭 글은 독자의 감수성 면에서 엄연히 차이가 있다고 본다. 김근태는 모진 고문을 당한 타자이면서 자백의 주체이다. 그의 주체성을 냉정하게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를 객관화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받아적었을 뿐이다.
이 책은 불과 2년 후인 1987년 9월에 초판이 나왔으니까 그의 탁월한 기억력과 그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법원을 향하여 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탄원서에 근거했으므로 그 정확성을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 고통스러운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던 무한한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국가기관이 자행한 무자비한 고문을 증언해야 한다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빠뜨려서는 안 되고 더욱 사실대로 기록하여 진실을 온전히 드러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웠을 그 혹독한 고문을 이겨낸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또한 그러한 고문을 당하고도 마지막 날 남영동을 떠나면서 고문자들에게 먼저 악수를 청하고, 나중에 그들을 용서한 용기와 인격에 경의를 표한다. 가증스러운 고문자와 피고문자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유대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었을까.
그게 나 같은 소시민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므로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혹시 위선 또는 자기 기만이 아닌지 의심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작가라 하더라도 차마 쓸 수 없는 것이 있고 건너 뛰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법이지만 나는 그의 내면 속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다.
그는 민주화를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헌신하였다.

김근태는 1985년 여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물고문, 전기고문을 순서대로 당하여 허위 진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터무니없는 공소사실이 전부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7년에 자격정지 6년을 선고받았다.
고문은 끝나도 고문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극한 상황에 처했던 고문 피해자들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서도 그때의 아픈 기억과 고통을 하루에도 몇 차례씩 되씹어야 한다.
육체적 후유증으로 두통, 소화 불량, 성기능 장애, 청력 및 시력 이상, 이상 감각 등에 시달리고 무력감, 기억 손상, 우울증, 악몽 등 정신적인 고통을 오랫동안 감수해야 한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매년 초가을만 되면 한 달가량 몸살을 앓았다. 한기와 콧물 때문에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했다. 말이 어눌해지고 몸놀림도 둔해졌다. 파킨슨병도 앓았다. 트라우마도 그를 괴롭혔다.
2011년 10월 15일. 그날은 가을비가 여름 장맛비처럼 세차게 내렸다. 김근태는 우산도 쓰지 않고 비를 흠뻑 맞으며 갈지자로 여기저기 거리를 헤맸다. 건강에 큰 이상이 생긴 것 같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파킨슨병 증세라고 했다.
그는 11월 29일 뇌정맥혈전증으로 입원했는데 딸 김병민의 결혼식이 있기 열흘 전이었다. 그는 12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암흑의 소굴들
우리나라에서 고문다운 고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악독한 군사독재정권 시절인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그 이전 시대인 자유당 시절 경찰이 자행했던 고문은 구식이고 유치했다. 자백을 받기 위해서라면 불문곡직하고 무조건 두들겨 팼으니까. 아직 악랄한 전기고문은 없던 시절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그 당시 ‘남산’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 남산 분실과 ‘서빙고 호텔’로 불리던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과 함께 고문수사로 악명 높았던 곳이다. 그러니까 이 3곳이야말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3대 고문실이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은 서울 용산구 갈월동 98-8번지에 있다. 19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간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았다. 1987년 6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가 1987년 1월 14일 물고문으로 숨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8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건물의 외관과 내부는 그대로 남았다. 고문 피해자가 도망치거나 투신할 수 없도록 좁게 만든 창문과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없도록 격자로 배치한 취조실, 고문 피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도록 만든 5층 높이의 나선형 계단 등은 당시의 잔혹했던 현장을 그대로 보여준다.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딸 병민이가 ‘근태 서재, 시 소리 숲’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남영동 대공분실에 열었다고 한다. 아빠가 고문당했던 515호 조사실에 참혹한 고문의 기억이 아닌, 고문을 극복하고자 한 김근태의 노력을 따뜻한 느낌으로 연출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찾아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남영동 대공분실에 찾아갈 수 없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마주하는 일은 나에겐 끔찍한 악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한때 남영동 대공분실을 몽땅 부수고 철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고문수사의 상징이었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이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건물은 1990년 철거됐다. 그 자리에는 2004년 1월 기무사 직원 아파트가 들어섰다.
2004년 1월 준공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주차장 터에 세워진 표지석에는 ‘해방 후인 1957.9.1.부터 특무부대 공작분실로 개관, 1971.9.20. 보안사 수사분실로 개칭하여 사용하다가 1990.11월 폐쇄할 때까지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수많은 방첩인들의 땀과 혼이 서려 있는 터로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이 표지석을 세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후안무치하게도 잔인한 고문자들을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자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2018년 1월 아파트 진출로 바닥에 ‘민주인사 등에게 고문수사를 했던 국군보안사 서빙고 분실 자리’ 라는 글귀를 새긴 동판을 설치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곳이 과거 잔인한 고문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군 보안사 대공처 6과 소속이었던 서빙고 분실은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의 한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그 당시 ‘서빙고 호텔’ 또는 ‘빙고 호텔’로 불리며 군인은 물론 민간인에게도 잔혹한 물고문, 전기고문을 가했던 곳이다. 이곳 요원들은 서로가 이름도 알지 못할 정도로 보안을 지켰다. 요원들끼리도 가명과 은어를 사용했다. 고문은 ‘강력심사’, 물고문은 ‘수도공사’, 각목 등을 사용한 수사는 ‘토목공사’로 불렀다.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한 김재규 장군도 이곳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옛날 악명 높은 국군 기무사령부는 경복궁의 오른쪽 담을 끼고 삼청동 가는 길의 오른편 소격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국군 서울지구병원 안에 위장 간판을 달고 숨어 있었다. 2008년에 기무사는 과천으로 이사했고 국군 서울지구병원은 대통령의 응급 상황을 고려해 청와대에서 5분 거리 이내에 병원을 둔다는 경호 원칙에 따라 삼청동 금융연수원 뒤편으로 이전했다.
서울 중구 서울시 소방재난본부가 자리 잡은 예장산 자락에는 과거 중앙정보부 6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과거 ‘인민혁명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 등에 대한 수사와 고문이 이뤄졌던 곳이다. 유신 시절 고문수사의 상징인 ‘6국’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시절 만들어진 기관이다. 유신 직후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의원들이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곳도 6국이었다. 당시 6국은 ‘육국(肉局)’으로 불렸다. 사람이 고깃덩어리가 돼서 나오는 곳이란 말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5년 그 당시 안기부는 서초구 내곡동에 최신식 6개 동 건물을 짓고 나서 이문동에 있던 본부와 남산 별관이 동시에 이전했다. 그때 온갖 고문 도구들도 함께 가지고 가지 않았을까. 언젠가 시절이 바뀌면 먼지를 털어내고 창고에서 꺼낼 때가 있을지 모르니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5060600045&code=940100&s_code=as264

악은 평범한가?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악에 굴복하고 악에 물들어버린 비겁한 인간들이고 패배자들이었다. 악이 그들 인간의 본성 깊숙이 자리 잡은 것이다. 아무렴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아주 잔인한 종족으로 돌변할 수 있었겠는가. 자기 기만과 위선, 안일한 이기주의로 자신을 옹호했다. 그래서 인면수심의 악마가 되었다. 겉으로는 가면을 쓰고 악마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단순히 자백과 조작, 완전한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악에 빠져서 인격 파괴, 인간성 말살을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살인보다 더 무섭고 악랄한 범죄이다.
그들이 정말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면 인간적으로 반성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겸손할 줄 알고, 후회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들 중 누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아이히만 같은 악마는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무슨 염치로 사형이 확정된 후 친필로 된 ‘사면 청원서’를 그 당시 이스라엘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에게 제출할 수 있었단 말인가.
무슨 진실규명 위원회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했던 고문자들은 반성하는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시절의 고문의 추억에 잠겼다. 한결같이 변명하기에 급급하거나, 고문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거나, 나는 가해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에 가깝다고 주장하거나, “이제 빨갱이 세상이 되니까 빨갱이들이 날뛰는구만. 빨갱이를 잡으려면 고문이 필수적이야. 고문 없이 어떻게 하란 말이야. 내가 당신에게 묻고 싶구만. 내가 보기에 그들은 빨강병에 걸린 환자들이야. 그 병은 세상이 온통 빨갛게 보인단 말이지. 그것들한테는 충격요법이 필요해요. 가장 효과가 있는 게 전기충격요법이지. 다시 말하면 그건 고문이 아니라 충격요법인 거요. 충격요법은 오랫동안 정신과 환자를 치료하는데 사용된 거 아닌가”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하거나, 자신은 오로지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였을 뿐이라고 항변하였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고문 담당자가 과로사로 순직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평생 동안 습관적으로 자신을 기만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처음과 끝이 있는 하나의 스토리로 구성해서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 변명을 자신을 아는 친구, 주위 사람들에게, 심지어 자식이나 형제들에게까지 반복해서 되풀이했다.
진실규명 위원회의 조사관들은 끊임없이 가슴 속 밑바닥에서부터 어떤 울분이 솟구쳐 올라왔는데 고문자들이 지긋지긋한 인간 별종처럼 느껴지면서 그들을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조사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가령, 당신도 한 번 똑같이 당해보겠어! 물고문! 전기고문! 인간 백정 같으니라고! 자식들 앞에서 무슨 낯짝으로!) 그걸 목구멍 속으로 다시 집어 넣으니라고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무진 고통을 겪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는 유대계 정치 철학자로 이스라엘 법정에서 진행된 유대인 학살의 일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했다.
수백만 유대인을 사지로 몰아넣은 악의 화신쯤일 줄 알았던 아이히만을 법정에서 살펴보니 늙고 지극히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더라는 얘기다.
나치 관료주의에 젖어 사유능력을 상실한 채 자신이 수행하는 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무슨 악마 같은 자로 아예 드러난 인간이 악을 자행하는 게 아니라, 악의 제도에 순응하고 거기서 한자리하려는 보통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사악한 제도의 구현자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하면 아이히만의 문제는 많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변태적이거나 가학적이지 않고 대단히 무서울 정도로 정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솔 벨로는 자신의 소설 「Becoming Eichmann」에서 아서 샘러라는 인물을 통해 아렌트에 대해 경멸적으로 말했다.
“세기의 가장 중대한 범죄를 아둔하게 보이게 만드는 생각은 평범하지 않아. …… 지식인들은 이해를 하지 못해. 모든 사람은 (일부 여류작가를 제외한다면) 살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그것은 매우 오래된 인간의 앎이야. 태고부터 가장 순수한 인간들도 생명이 신성하다는 것을 이해했어. 그 오래된 이해를 거부하는 것은 평범함이 아니며 거기에는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음모가 있었어. 평범함은 양심을 없애버리려는 매우 강력한 의지를 위장하기 위해 채택된 것이지. 그런 계획이 사소한가? 인간의 생명이 사소한 경우에만 그럴 거야.”
나중에 역사학자들이 널리 퍼져있는 사료들을 모아서 신중히 연구하고 검토한 결과에 의하면 아렌트는 재판정에서의 아이히만의 기만적인 연극과 왜곡된 논리에 속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히만의 특별한 악마성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걸 부인했는지 모른다.
나치의 잔당들인 히틀러의 마지막 정부 수반이었던 장관, 나치의 집단 학살을 죽을 때까지도 끝까지 부정한 장군, 히틀러가 인정한 최우수 조종사, 검은 군복의 무장 친위대인 SS부대의 고위 장교들은 1947년 당시 공공연히 나치를 찬양하고 반유대주의자였던 아르헨티나 페론 정부의 비호하에 스웨덴의 말뫼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망명하였고, 부에이노스아이레스에서 나치 핵심 그룹을 형성했다. 아이히만은 그 그룹에서 활동했다.
그곳에서 반유대적인 나치 잡지인 ‘데어 비크’가 1947년 창간되었고 아이히만은 그 잡지의 영원한 편집장인 에베르트 프리치를 존경하여 ‘프리치 동지’라고 불렀다. 그 잡지는 나치의 치밀한 기획하에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다. 희생자의 수가 600만에 훨씬 못 미친다거나 강제수용소는 물론이고 가스실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히틀러와 나치는 무관하다는 식의 억지 주장을 계속 펼쳤다.
그 무렵 아이히만은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기 위하여 1955년 네덜란드의 언론인 빌렘 S. 자센과 한 인터뷰에서 “내가 학살한 유대인이 더 많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서 유감이다”라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노회하고 영악한 악마였다.
아이히만은 법정에서 노련한 늙은 배우처럼 연기를 하며 교묘하게 거짓 진술을 했지만 그때 인터뷰에서 녹음한 테이프는 그 재판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철저한 아리안 민족주의자이고 골수 반유대주의자이고 광신적인 히틀러 신봉자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그 흔해 빠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최후 진술에서 말했다. “나는 괴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다. 나는 오류의 희생자이다.”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가담자였고 권력 지향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페론 정권의 도움을 받아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지만 일말의 반성은커녕 그곳에서도 반유대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절멸시켜야 한다는 발언을 계속 했던 것이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정권이 바뀌고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추적을 받게 되자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오랫동안 잠적하였다. 모사드의 요원에 의해 체포될 당시에는 추하게 늙어서 머리는 거의 빠지고 얼굴은 주름이 깊이 패여 쭈글쭈글했으며 걸음걸이는 어색한 평범한 노인에 불과했다. 악마도 세월의 무게는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1961년 12월 15일 금요일 아침 9시에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1962년 5월 31일 (그날은 목요일이었다) 자정이 되기 직전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그의 사체는 화장되어 지중해의 이스라엘 수역 밖에 뿌려졌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범죄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고 집행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에게 죽음은 오히려 지나치게 가벼운 징벌이자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그녀의 저서「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의 후기에 조금 구체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그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고 결론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본문 중에는 오직 한 차례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찰과 연구 범위, 논리 전개는 훨씬 광범위하다. 우리가 그 개념을 깊이 검토하고 비판하지 않은 채 그대로 인용해서 사용한다면 크게 오해하거나 오용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녀가 아이히만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일반론으로 악의 평범성을 논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나 아렌트와 그 책을 아주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경솔하게 결론을 내리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더 깊은 연구를 위해서는 베티나 슈탕네트의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Eichmann before Jerusalem」, 조앙 샤푸토의 「피의 법칙 La Loi du Sang」, 아르헨티나 페론 정권의 친 나치 정책에 관한 우키 고니의 「진정한 오데사 La Authentica Odessa」, 유대인 학살 전범 연구자인 시몬 비젠탈의 자서전인 「나는 아이히만을 추적했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의 또 다른 저서인 「책임과 판단 Responsabilite et judgment」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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